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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바랜 사진 속에서 남보원과 백남봉은 서로 마주보고 인상을 쓰고 있다. '으르렁'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남보원(72)은 "80년대 초쯤 찍은 사진"이라고 했다. 둘이 남보원의 집에서 '왈왈', '멍멍' 개 소리를 흉내내면서 찍은 사진<왼쪽>이다. 틈만 나면 그렇게 놀았다. 아니, 연습했다.
1960년대 말 처음 만나고 40년 동안 둘은 형제이자 '원맨쇼'의 라이벌이었다. 무대 위에서 혼자 노래하고, 성대모사를 하고, 만담과 가벼운 시사 비평을 섞은 1인 쇼를 이끌었다. 남보원은 두 달 전 폐암으로 세상을 등진 백남봉의 장례식에서 "화관 문화훈장도 추서됐으니 먼저 간 선배님들 만나면 자랑도 좀 하라"며 '한 오백년'을 불렀다. "한 많은 이 세상, 야속한 백남봉, 정만 두고 몸만 가니 눈물이 나네…."
◆실력 없으면 유혹도 많아
지난달 30일, 서울 서초동 자택에서 만난 남보원은 "나도 나이가 들수록 관리가 힘들어진다"며 웃었다. '사고'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남보원은 백남봉과 함께 구설에 오른 일 별로 없이 근 50년을 연예계에서 활약했다. 남보원 또한 1997년에 화관 문화훈장을 받았다.
"요즘 후배들 얘기인데, 도박하고 뭐 훔치고 이런 친구들 보면 정신병자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연예인이 대중(大衆)에 미치는 영향이 커지는 만큼 잡음도 늘어나는 세태에 대한 쓴소리다.
"사업하는 것도 좋고, 다 좋아요. 하지만 본업을 잘해야지요. 내 경험으로 보면 레퍼토리 찾고 연습할 시간도 부족했어요."
그 역시 '방탕하게' 산 때가 있었다. 그는 평안남도 순천 출신으로 1·4 후퇴 때 피란을 왔다. 공부에는 취미가 없어 '을6(을지로 6가)'을 주름잡는 건달로 지내기도 했다. 군대에서 남을 웃기는 재주가 있다는 것을 알고 코미디를 시작했다. 데뷔는 1963년.
"사람들이 알아보기 시작하니까 어깨가 으쓱거렸죠. 식당에 가도 돈을 안 받거나 누가 대신 내줘요. 술도 5차까지 마시는 건 기본이고, 해외 공연 가서 카지노에도 가고."
정신을 차린 것은 1975년 결혼한 뒤였다. 몸에 살이 찌면서 건강에도 적신호가 왔다. 담배를 끊고 살을 빼면서 무기력증도 겪었지만, 이후부터 절제가 몸에 뱄다고 한다.
◆"아직도 날 찾는 곳 많아"
자기 관리에 성공한 남보원은 지금도 '원맨쇼'를 한다. 처 주길자(63)씨가 매니저이자 기사다. 5월에 공연 요청이 가장 많다. 12월에는 1988년부터 작년까지 한 번도 빼지 않고 호텔에서 디너쇼를 했다.
노인회, 각종 축제에서 남보원은 여전히 '넘버 원(No.1)' 섭외자다. 잘나가는 개그맨을 부른다고 해도 2시간을 계속 혼자 떠들면서 좌중의 눈과 귀를 붙들고 있기란 쉽지 않을 터.
"말만 하거나, 노래만 하거나, 성대모사만 하는 식으로 한 가지만 하면 몇 분 못 끌고 가요. 원맨쇼는 이 모든 걸 섞어야 해요. 웃다가 울다가 노래하다 소리지르다가 그렇게 되는 거죠."
성대모사만 해도 가수 한두 명, 정치인 한두 명을 하는 게 아니다. 가수를 하면 김정구·조용필·최희준 등등이 쏟아져 나온다. 조용필의 '허공'을 김정구의 목소리로 부른다. 대통령은 이승만부터 노무현까지 단번에 이어진다. 남보원은 "박정희 대통령이 '님자가 내 흉내 잘 낸다며? 해봐'라고 해서 진짜로 목전에서 하기는 했는데, 온몸이 굳었었다"고 회고했다.
고전(古典)에 속하는 팔도 사투리 시조편은 여전하다. "태산이 높으믄 얼마나 높겠습지비"(함경도)를 시작으로 양사언의 시조를 팔도 사투리로 다 바꿔서 읊는다. 레퍼토리를 연구하는 것도 여전하다. 요즘엔 60년 전 일본왕이 했던 항복 라디오 방송의 성대모사를 시작했다. 광복 65주년이 흘러나온다.
세월의 무게는 남보원을 어떻게 변화시켰을까.
"아, 정말 달라진 게 있어요. 한 번 무대에 올라가면 안 내려오려고 한다는 거. 같이 간 가수들은 제 뒷순서로 공연을 넣으면 아주 싫어해요." 공연비는 한 푼도 안 받으면 안 받지, 깎지는 않는다. 어디 가서 '나 써 달라'는 말도 하지 않는다.
남보원은 자기 이름에 얽힌 사연을 꼭 써 달라고 했다. 본명은 김덕용(金德容). '남보원'은 어떤 일을 하건 'No.1(제일)'이 되라는 아버지의 말씀이 생각나 지은 예명이다. 그 '남보원'이 요즘 KBS 개그콘서트에 나온다. '남성인권보장위원회'라는 코너의 줄임말로!
"얼마 전 방송 인터뷰에서 개그맨 후배들에 대해 한마디했어요. '어렵게 지은 이름이다. 이름 빌린 값을 내든가 그 프로에 나를 출연시켜라. 아니면 개콘에 개 풀어놓겠다!'라고요. 근데 아무 반응이 없더군요. 흐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