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래남3우리 때는 필터 없는화랑담배였어요.이틀에 한갑... 제 고향이 제주도라 휴가가 30일,그때 화랑담배 한 보루가 아마 30갑인가?싶은데 초임병땐 내가 담배를 안 피어서 모아 뒀다가 아버지 가져다 드렸지요 귀대 하면서 제주도 관광기념품으로 인기였든 산호 물뿌리(파이프)을 가지고 와 부대원들에게 선임하사,포대장에게 드리면 아주 좋아 했지요. 그땐 담뱌 안 피우는게 이상 할정도 ㅋㅋ 호랭이가 담배피던 시절였으니 다들 동참했는지...원^^&(&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지나간 시절 그립습니다
^^ 마이가리...참으로 오랜만에 읽어보는 용어네요. 저도 휴가 때 일병 였지만 병장 마아가리 하고 다녔습니다 군복 명찰에 군번이 새겨 있지만 제주도에는 해병대 헌병들만 있어서 육군 부대 사정은 잘 모를거라 생각하여 용산 역전 군장 파는 곳에서 요란한 여러 마크들을 붙이고 달고 다니며 떵폼을 잡고 다녔지요 지금 생각 해 보면 참으로 철? 없고 어리석었지요 ㅎㅎㅎ
저는 30경비단 출신입니다. 82년 5월초 전역 했죠. 올리신 글을 보니 33단에서 근무 하셨나 봅니다.33단으로 간 동기가 3~4명 되는데 일요일날 CP에서 영화 상영 할때 보려와서 가끔 만나기도 했습니다. 33단이 서대문으로 간 후로는 안 오더군요.세월이 지나 생각해 보니 부대가에 나오는 것처럼 억센군대 란 말이 잘 어울리는 부대 였던 것 같습니다. 좆아가기에 심신이 고달펏던 ... 동 근무복 사진중 어느쪽이 님 이신가요? 다들 키 하나는 훤출해서 외출복을 입으면 잘 어울렸지요.저는 부대평균 키를 말아 먹을 정도여서 애로사항이 많았습니다.당시약172, 그래서 선착순은 포기요. 소대대항 어떠한 운동도 끼지를 못했습니다. 군기가 너무 세서 경직된 채로 33개월을 보낸 것이 아쉽습니다. . 바로 담하나 너머가 청 이었으니 정말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았죠. 한대라도 덜 얻어맞기 위해서 잡고 잡혔죠. 33단 만해도 분위가 저희부대 보다는 좋았던 것 같습니다. 하기 휴양소에 가서 공연 같이할때 . 우리는 거기가서도 경직이 안풀려 못노는데 비해 자유분방하더군요.아마도 같이 어울릴때 그곳에 함께 했을지도 모르겠군요. 전 군에서 무릎 관절염을 얻었고 고막파열까지 당했지요
하여, 생각하면 애증이 교차 하는데 그래서 다시 군대 간다면 그곳에 다시 또 가고 싶지는 않습니다.논산 수경사 선발때 부터 시험관이 군기 잡더니 배치부대 열차 타기 전 또 돌리고 겁주고 니네들은 이제 죽었다 복창하라고. 잔뜩 쫄은 채로 잠도 못 자고 용산 용사의 집에 왔을 땐 또 대검차고 이상한 복장을 한 하사가 와서 또 군기잡고 버스 태워 보충교육대 행.일주일 유격 훈련같은 뺑뺑이 돌고 운 나빠 제일 빡센 30단에 배치 명령 받을 땐 동기들 모두 얼굴이 노래졌지요. 난 왜 방공단이나 군지대 같은 편한 곳에 안되나 그쪽으로 배치되는 동기들을 바라보며 매우 부러워했지요. 약간의 질투심이 생겨 방공단 아이들은 우리 수경사로 쳐주고 싶지도 안았습니다 저들도 나름 고생하겠지만요.저의 자대는 매우 살벌했습니다. 가서 일주일 또 적응교육..하사훈련을 받고 온 친구가 자살했다는 그 교육끝나고 소대 배치되니 또 소대적응 교육3일 받았습니다. 배치 후 저보다 몸집이 더의 두배나 큰 고참들 에게 온몸이 시커멓게 되게 맞은 일은 지금 생각해도 눈물날 정도 입니다. 낙오되지 않게 저의 역량을 150%정도 더 내어 살았습니다. 기합을 받아도 매를 맞아도 거의 초죽음 상태까지
가니 점점 독해져 갔습니다. 일상이 그랬지요. 그래 그 독기로 제대 후 닭잡기 . 개잡기 까지도 해봤습니다. 물론 군기가 살아있던 당시 까지 였지만요..국군의 일번지. 엘리트 부대등 좋은 수식어도 있었습니다마는 내부에 부정적인 모습도 꽤 있습니다.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니 제 동기 한명은 정신병 걸려 의가사 제대 후 아직 정신병원에서 수 십년을 보내고 있지요. 그럼에도 서울 한복판에 좋은 환경은 사실입니다. 그때 전 후방 다들 고생하며 3년을 보냈는데 우쭐하며 개폼 잡은것이 미안하기도 합니다. 고달파도 가장 좋은 시절이었기에 그 시절에 관한 사연을 보려고 둘어와도 많지가 않아 아쉽더군요. 그래도 우연히 만나게 된 군 후배와 가끔 만나 하던 얘기 또 하고 그걸 또 재미있게 듣고 웃고 그런답니다. 소래남님 께서 이 공간을 담당하시고 볼거리 있게 만들어 주시는 수고에 감사 드립니다.
첫댓글 재미있게 보겠습니다
지금은 금연 하라고 난리인데
그 시절엔 대통령이 담배 선물을 ㅎ
그땐 그랳지요
이틀에 한갑씩 .,.
더운 여름
휴식시간에 세번 쭈욱 빨면 손꾸락이 뜨거워 버리려면
꼴초꾼이 빼앗아 한번 더
피던 시절이었지요
아마
누구나 비슷한 경험들이
있을 겁니다
그래도
솔 담배는 그당시
최고의 양담배 같아..ㅎㅎ
@소래남3 우리 때는 필터 없는화랑담배였어요.이틀에 한갑...
제 고향이 제주도라 휴가가 30일,그때 화랑담배 한 보루가 아마 30갑인가?싶은데
초임병땐 내가 담배를 안 피어서 모아 뒀다가 아버지 가져다 드렸지요
귀대 하면서 제주도 관광기념품으로 인기였든 산호 물뿌리(파이프)을 가지고 와 부대원들에게
선임하사,포대장에게 드리면 아주 좋아 했지요.
그땐 담뱌 안 피우는게 이상 할정도 ㅋㅋ
호랭이가 담배피던 시절였으니 다들 동참했는지...원^^&(&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지나간 시절 그립습니다
소래남 님께선 수경사 참 좋은곳에서 근무했군요.
저랑 비슷한 시기에 군생활한것같은데
저는 최전방 21사 백두산부대서 근무했습니다.연말이면 대통령 하사품 과자 종합선물셋트 받은기억이 나네요
아
그래 보이나요?ㅎ
같은세대 복무해서
더 반갑습니다
하긴
서울시내 무장군인(야통시간에만)
보기 힘든 시절!
그리고 깔끔한 외출군복,
거기다가
신촌 이대 앞을 지나 가노라면
여학생들이 환호 할때,..
남산 봉화대.
장충단 공원. 용산역등등
그때가 참 좋앗지요 ㅎㅎ
그럼
전방부대 생활
사진과 함께
추억담을 듣고 싶습니다
역시 대통령 친위부대라 보급이며 시설이 좋았네요,^^
우리네 시절엔 상상이 안되는 모습입니다.
그래도 내 친구 입대동기가 육본 의장대에 있어 휴가 가며 면회를 가 보니
여기도 우리와는 모든게 별천집디다 ^^
우리부대 선배님들 얘기들어보면
피차 일반입니다.
아마도
김신조 사태이후 쯤
당국으로부터
관심을 가진 듯.,.
아무케도
대한민국 수도 서울이라
약간은 다르겠지요
암튼
그시절 선배님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내둘째형님이 수경사 방공포대 출신입니다 창신동인가 그곳에서 근무했는데 나와 동생은 해병대 3형제가 같이 군대에있었는데 창신동 포대에 우리가면회가서
만났던 기억이나네요
웃기는것은 형님은 상병인데 나는 병장 동생도 상병 마이가리 아시지요 휴가나오면 무조건 병장달고 다녔네요
결국 형님은 병장못달고 상병으로 전역하더군요 70년대초에는 육군에 상병전역자들이 많았던것 같습니다
아니
으떡해 3형제 씩이나..
참으로 대단 하시군요 ㅎㅎ
수경사 방공여단.,.
우리도 자세히는 잘 모르지만
시내 요직의 빌딩마다
소대별로 생활 한다는 군요
맞씁니다
우리 선배님들 역시 상병제대 있는데
아마도
병장 티오는 없고
만기가 되다보니
그리 됬다고 합니다 .
그래도
마이가리 하고
창신동 까지 이동중에
수경사 헌병들에게
걸리지 않은것만도
행운 이셨네요.ㅎㅎ
^^ 마이가리...참으로 오랜만에 읽어보는 용어네요.
저도 휴가 때 일병 였지만 병장 마아가리 하고 다녔습니다
군복 명찰에 군번이 새겨 있지만
제주도에는 해병대 헌병들만 있어서 육군 부대 사정은 잘 모를거라 생각하여
용산 역전 군장 파는 곳에서 요란한 여러 마크들을 붙이고 달고 다니며 떵폼을 잡고 다녔지요
지금 생각 해 보면 참으로 철? 없고 어리석었지요 ㅎㅎㅎ
@용연지킴이 아무리 마이가리로 달고 다녀도 얼굴에 졸병티가 납니다
@청천장희한 ^^ 그렇습니다만 그땐 물병장이라 하여 논산훈련소에서 아예 분대장 요원으로 훈련시켜
병장계급달고 배출 시켰지요.
@청천장희한
ㅎㅎ
네
맞씁니다..
팔각정옆 구진봉 아래
c51초소 생각이 납니다
반갑습니다
사진 한두장 첨부하여
추억 한자리 부탁드립니다
저는 30경비단 출신입니다. 82년 5월초 전역 했죠. 올리신 글을 보니 33단에서 근무 하셨나 봅니다.33단으로 간 동기가 3~4명 되는데 일요일날 CP에서 영화 상영 할때 보려와서 가끔 만나기도 했습니다. 33단이 서대문으로 간 후로는 안 오더군요.세월이 지나 생각해 보니 부대가에 나오는 것처럼 억센군대 란 말이 잘 어울리는 부대 였던 것 같습니다. 좆아가기에 심신이 고달펏던 ... 동 근무복 사진중 어느쪽이 님 이신가요? 다들 키 하나는 훤출해서 외출복을 입으면 잘 어울렸지요.저는 부대평균 키를 말아 먹을 정도여서 애로사항이 많았습니다.당시약172, 그래서 선착순은 포기요. 소대대항 어떠한 운동도 끼지를 못했습니다. 군기가 너무 세서 경직된 채로 33개월을 보낸 것이 아쉽습니다. . 바로 담하나 너머가 청 이었으니 정말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았죠. 한대라도 덜 얻어맞기 위해서 잡고 잡혔죠. 33단 만해도 분위가 저희부대 보다는 좋았던 것 같습니다. 하기 휴양소에 가서 공연 같이할때 . 우리는 거기가서도 경직이 안풀려 못노는데 비해 자유분방하더군요.아마도 같이 어울릴때 그곳에 함께 했을지도 모르겠군요. 전 군에서 무릎 관절염을 얻었고 고막파열까지 당했지요
하여, 생각하면 애증이 교차 하는데 그래서 다시 군대 간다면 그곳에 다시 또 가고 싶지는 않습니다.논산 수경사 선발때 부터 시험관이 군기 잡더니 배치부대 열차 타기 전 또 돌리고 겁주고 니네들은 이제 죽었다 복창하라고. 잔뜩 쫄은 채로 잠도 못 자고 용산 용사의 집에 왔을 땐 또 대검차고 이상한 복장을 한 하사가 와서 또 군기잡고 버스 태워 보충교육대 행.일주일 유격 훈련같은 뺑뺑이 돌고 운 나빠 제일 빡센 30단에 배치 명령 받을 땐 동기들 모두 얼굴이 노래졌지요. 난 왜 방공단이나 군지대 같은 편한 곳에 안되나 그쪽으로 배치되는 동기들을 바라보며 매우 부러워했지요. 약간의 질투심이 생겨 방공단 아이들은 우리 수경사로 쳐주고 싶지도 안았습니다 저들도 나름 고생하겠지만요.저의 자대는 매우 살벌했습니다. 가서 일주일 또 적응교육..하사훈련을 받고 온 친구가 자살했다는 그 교육끝나고 소대 배치되니 또 소대적응 교육3일 받았습니다. 배치 후 저보다 몸집이 더의 두배나 큰 고참들 에게 온몸이 시커멓게 되게 맞은 일은 지금 생각해도 눈물날 정도 입니다. 낙오되지 않게 저의 역량을 150%정도 더 내어 살았습니다. 기합을 받아도 매를 맞아도 거의 초죽음 상태까지
가니 점점 독해져 갔습니다. 일상이 그랬지요. 그래 그 독기로 제대 후 닭잡기 . 개잡기 까지도 해봤습니다. 물론 군기가 살아있던 당시 까지 였지만요..국군의 일번지. 엘리트 부대등 좋은 수식어도 있었습니다마는 내부에 부정적인 모습도 꽤 있습니다.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니 제 동기 한명은 정신병 걸려 의가사 제대 후 아직 정신병원에서 수 십년을 보내고 있지요. 그럼에도 서울 한복판에 좋은 환경은 사실입니다. 그때 전 후방 다들 고생하며 3년을 보냈는데 우쭐하며 개폼 잡은것이 미안하기도 합니다. 고달파도 가장 좋은 시절이었기에 그 시절에 관한 사연을 보려고 둘어와도 많지가 않아 아쉽더군요. 그래도 우연히 만나게 된 군 후배와 가끔 만나 하던 얘기 또 하고 그걸 또 재미있게 듣고 웃고 그런답니다. 소래남님 께서 이 공간을 담당하시고 볼거리 있게 만들어 주시는 수고에 감사 드립니다.
이제서야 하마님 글을
접합니다
아
그러시군요
저보단 약간 선배님이시네요
암튼
반갑습니다
언제 한번 시간 되시면
추억의 사진과 함께
추억담 부탁 드려 볼까요?
아니면
위 댓글을 게시글에
옴겨 드리든지..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건강하시구요
충~~~성 !!
저는 서대문 현저동 83년 초에 전역했습니다
35일 cp 35일 op
다들 잘지내는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