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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이제 부처님 말씀과 마음 공부 80 쪽이고요. 80쪽 읽어보겠습니다. 마음은 그림을 잘 그리는 능숙한 화가와 같아서 그림을 그리듯이 갖가지 세상 만사를 만들어낸다. 온갖 현상의 발생은 오직 마음에 나타남일 뿐이니 온갖 인과와 세계의 모습이 다 마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어 화엄경에서 그 일체 유심조를 설명하는 그런 부분인데요?
마음은 그림을 잘 그리는 능숙한 화가와 같아서 그림을 그리듯이 갖가지 세상 만산를 만들어낸다.
어 일체 모든 것은 마음이 그려낸 그림이다 그랬어요 어 보통 이제 불교에서 마음 하면 이제 두 가지
주로 이렇게 편의상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 있어요. 그 그 두 가지가 서로 다른 것은 아니지만 어 그걸 이제 대승기준로에서는 일一 심 心이二문門 이래서
마음은 하나인데 두 가지로 이렇게 문이 있다.
이렇게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해 볼 수 있다.
이렇게 설명했어요
어 뭐 진여물과 진여문과 생명문
이렇게 얘기하기도 하고요.
뭐 중생심과 뭐 진여심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고요. 또는 분별심과. 무분별 심
이렇게도 설명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의 마음이 마음인데
같은 마음인데 분별의 측면으로 쓸 쓰는 마음이 있고요.
또 무분별지의 측면으로 어떤 확인할 수 있는 마음이 있다.
이걸 쉽게 말하면 어 마음은 하나예요.
그 마음이 뭐냐 하면 물이란 말이에요.
물 물 물을 마음이라고 했을 때
어 이 바다 바다가 있을 때 바다가 물이잖아요.
바다 바다인 측면이 있고 파도인 측면이 있다.
그런데 바다는 하나잖아요. 바다는 하난데. 바다 위 바다 위에 드러난 파도는 이제 서로 다른 모양을 가지고 있겠죠. 또 인연 따라 다른 모양을 막 그려내겠죠. 그리고 파도는 작은 파도 있고 큰 파도 있고 서로 이렇게 다른 것처럼 이제 보일 수 있죠. 바다도 물이고 파도도 물이에요. 한마음이란 말이죠. 바다도 마음이고 물도 마음이란 말이죠? 즉 진여심도 이 마음이고 생멸심도 마음이에요. 우리들의 분별심도 마음이고 무분별 심도 마음이란 말이죠? 그런데 이제 편의상 우리가 경전을 이해할 때는 아 이것이 분별심을 얘기하는 건지. 혹은 무분별심을 얘기하는 건지를 좀 이렇게 어 구분해서 보면 경전이 조금 더 경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겠죠 어 환경에서 말하는 일체의심조라는 것은? 네 이 진열심의 마음을 이제 뜻하는 거죠? 일반적으로는 그래서 이 세상 모든 것은 만물은 마음 위에서 드러난다. 마음 위에서 드러난다. 바다 위에 파도가 치듯이 파도가 전부 다 우리들의 우리들의 물질적인 몸 마음 느낌 의지. 의식 이게 다 파도우고요. 나와 세상 만물 삼라만상 우주 왓 빌딩 보이는 모양 있는 1층 모든 것 모양 있고 모양 없는 일체 정신적인 물질적인 일체 모든 것들 이는 따라 생겨나고 인연 따라 사라지는 모든 것들 그걸 이제 불계선 맘법 이렇게 얘기하기도 하고. 이 일체 삼 남아상 모든 것들 그것은 마음 위에서 드러난단 말이죠? 마치 바다 위에서 다양한 파도가 치듯이 마음 위에서 이 세상 모든 것이 건립된다는 거요. 마음에서 왔다 간다. 이 말은 다르게 말하면 우리가 여러분도 마음이 있잖아요. 저도 마음이 있고 이천 500년 전에 석가모니 부처님도 마음이 있었을 것이고 갓난애기도 마음이 있고 고양이 강아지에게도 마음이 있겠죠. 그런데 여러분이 가지고 쓰고 있는 그 마음하고. 제가 쓰고 있는 마음하고 2500년 전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쓰고 있던 마음하고 다른 마음일까요? 다르지 않은 마음이란 말이죠? 그게 불교에서 말하는 불이익법이죠. 불의법 한마음 1 심 이러지 집집마다 1심 이렇게 표고해가지고 많이 걸어 놨더라고요? 뜨개질 옛날에 저 어릴 때 할머 어르신들이 뜨개질 일 심하고 옆에 대나무 그림 그려 가지고 집집마다 가보니까 없는 게 없어요. 그게 집집마다는 일심이 놀라운 일이에요. 집집마다 어떻게 열심히 붙어있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알고? 이 마음이 한마음인 줄 어떻게 알고 요오노츠 삼남화상 전체가 한마음이라니까요. 마마나 마마나 뿐이에요. 여러분 마음도 이 한마음이고 제 마음도 한마음이고 석고하니 부처님의 마음도 한마음이고 정생심과 부처님의 마음이 동일한 마음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번뇌즉 보리 이렇게 말을 해요 번뇌에는 중생심이 번뇌잖아요. 번뇌망상이잖아요. 번뇌가 곧 보디 깨달음이란 말이에요. 9000만원이라는 거예요. 색즉시공 3개 국공이라는 거거든요. 색은 모양의 세계잖아요. 공은 진실을 의미하는 것이고 둘이 아니라는 말이거든요. 그런데 이 마음. 우리의 일심 이게 진짜 진짜 자기 마음 이게 우리의 본질이에요. 옆구리는 TV 자막에도 많이 나오잖아요? 나는 누구인가 여기는 어디인가 뭐 뭐 야간 멘붕 오면 그러지 않아요? 이 4주 멘붕이 와야 돼요. 그 내가 누구지? 내가 있는 여기는 어디일까? 내가 죽고 나면 어디로 가는 거지? 내가 태어나기 전에는 어디 있다는 거지? 나의 진짜가 뭘까? 나의 본질이 뭘까? 이게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게. 어릴 때 나와 지금의 나는 많이 달라졌거든요. 그러니까 외모만 달라진 게 아니고 이 제품만 달라진 게 아니라 성격도 많이 바뀌어 바뀐 사람도 있죠. 그죠 성격이 완전히 바뀐 사람이 있어요. 제가 학교 다닐 때 기억이 아 뭐 얘기해도 이걸 혹시 듣더라도 누군지 모를 테니까. 제 후배 중에 우리 동아리 후배 중에 아 성격이 개떡 같은 친구 하나 있었어요. 성격이 너무 더러워서 야. 너는 진짜 넌 얼굴만 이쁨 뭐하니 성격이 개떡같다. 그 망근이 성격 진짜 더럽다. 진짜 어떻게 저럴 성격이 저럴 수가 있나 하고 다들 좀 이렇게 좀 이렇게 좀 좀 싫어한달까? 이렇게 그런 것도 내지는 못하고 다들 좀 별로 이렇게 안 좋아했으면 너무 고집이 세고 자기 생각만 그냥 막 그냥 고집하고 이래서 다들 좀 별로 안 좋아했어요. 어 근데 깜짝 놀랬습니다. 이 친구가 방학을 보내고 와서요? 근데 어떻게 사람 이렇게 갑자기 변할 수 있지. 그런데 되게 놀라웠어요. 저 좀 충격적이었어요. 아, 이게 사람 이럴 수도 있구나 되게 놀라웠어요. 방학을 딱 보내고 왔는데 뭐 뭔 뭔 일이 있었나 보* 아마 완전 성격이 달라졌어요. 너무 착해지고 자기 고집도 안 부리고 뭐 깨달았나 모르겠는데 완전히 달라진 거예요. 그래서 아 사람이 이게 고정된 자기 개성 자기 성격 절대 안 달라진다. 이런 게 없구나. 그 그 어린 나이에 그 느낌이 느껴졌던 기억이 나거든요. 근데 우리도 비슷해요. 비슷한 사람도 있겠죠. 물론 그런데 특히나 삶이 좀 파란만장했던 사람들 뭔가 큰 절망을 느껴봤거나 서글픔을 느껴 놨거나 큰 고통이 한번 찾아왔다거나 이런 사람들일수록 자기가 그 전후 완전히 뒤바뀌는 걸 경험하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생활 방식이 확 바뀌기도 하고요. 하다못해 우리가 병이 하나 큰 병이 찾아왔다. 그러면 맨날 순 담배 쩔어. 살던 사람이 갑자기 딱 끊을 수도 있죠. 그럼 운동은 절대 안 해 하던 사람이 운동 엄청 할 수도 있죠. 맨날 안 좋은 음식 먹으면서 살든 사람이 안전 음식을 다 끊고 적은 음식만 먹고 살 수도 있어요. 그리고 한 방에 바뀌기도 하거든요. 왜 그러냐 왜 이렇게 바뀔까? 과거에 내가 지금의 내가 아니란 말이에요. 비슷한 것 같은 느낌은 있겠죠. 20년 30년 전에도 여러분 한강은 똑같이 한강이었잖아요. 그때도 이름이 한강이고 지금도 한강이에요. 그런데 그때도 한강이고 지금도 한강이니까. 여러분은 한강을 20년 전부터 30년 전부터 50년 전부터 안다 한강 안다. 그리고 더 이상 한강을 궁금해하지 않죠. 아닌 가는 거니까. 그런데 50년 전 한강과 30년 전 한강이 같겠어요? 아니 지금 내가 한강이나 손을 씻었으면 조금 있다가 가서 손을 다시 씻으면 조금 전에 내가 씻었던 그물이겠습니까? 출퇴근물이 아니잖아요. 한강한테 흘러갔단 말이에요. 내가 알고 있는 그 한강은? 그런데 우리는 그냥 똑같이 한강 이렇게 부르지만 그 진짜 한강이냔 말이에요. 그걸로 고정돼 있는 거냔 말이죠? 내가 아는 그게 맞느냔 말이죠. 그러니까. 고정된 어떤 이게 뇌가 고정되지 않잖아 계속 변하잖아요? 성격도 바뀌고 외모도 바뀌고 마음도 바뀌고 느낀 감정 의지 의식 다 바뀌고 그러면 도대체 어떤 순간이 나을까? 진짜 내가 누굴까 이게 궁금하단 말이에요? 그 진짜 내가 누굴까? 난 성격인 줄 알았는데 성격이 바뀌었으면 바뀌기 전인 안가 바뀐 다음이 남가 궁금하지 않나요? 젊었을 때 막 예쁘고 사람들에게 사랑받은 그 외모가 그게 난가 아니면 예를 들어 나이가 들었는데 몸도 아프고 이러니까 사람들이 그런 충격받는 분들 계시거든요. 젊을 때 잘나가던 분들이 퇴직하고 나서 힘없으니까 아무도 안 찾아오더라 그러면서 막 그냥 세상 사람들 욕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내가 힘 있고 능력이 있을 땐 그렇게 나한테 와서 아부를 그렇게 하던 놈들이 말이지. 내가 딱 힘 없어지니까 나를 쳐다도 안 보고, 내가 골프장도 한번 슬슬슬 도망간다. 이렇게 얘기를 한단 말이지 그럼 다 그렇지 않거든요. 진짜 자비를 베풀었던 사람은 나중에 오히려 더 찾아가죠. 사람들이 그럴 수도 있죠. 그게 남들 욕은 할 줄 알아서 자기를 돌아보*는 못하죠. 도대체 그 힘 있을 때가 난가 힘 없어. 가지고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고 나를 거들떠보*도 않고 이럴 때가 나은가 그러니까 진짜 롤이 젊었을 때는 내가 젊고 잘 나갈 때는 그게 나갔거든요? 그게 나아 같아서 나라는 정체성이 거기에 딱 이렇게 묶여 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약간 괄시하는 것만 봐도 욱하는 마음이 올랐을 수 있어요. 저 사람이 내가 누군지 알고 저렇게 과시하지. 보통 이제 처음 보는 사람을 만나면 우린 대부분 명함을 주든지 아니면 내가 누군지를 일단 어필을 해야 되잖아요. 어필을 해야 하든 내가 뭐하는 사람이고, 누구 어떤 어떤 사람이다. 왜 어필을 해야 이제 나를 무시 안 하니까 나를 존중할 거니까 이런 느낌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내가 누군지. 그때 명함에 적힌 거를 막 읊는단 말이죠. 그런데 그걸 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나중에 그 명함에 적히는 문구들이 사라졌을 때 그거 잠깐 적히는 거잖아요. 젊고 생생했을 때 뭐 어느 대학 나왔다 뭐 어느 회사를 다니고 어느 직함에 있었다? 그분 뭐 한창 잘나갈 때 그때 잠깐 명칭이지. 그것이 그 정가 명칭이잖아요. 그 영원한 게 아니죠? 그런데 그건 반드시 사라지거든요. 근데 사라질 때 그걸 나와 동일시하던 사람은 너무 오랫동안 거기 새어나오진 못해요. 태극권에 있을 때 어떤 장군분이 그 진짜 소박하고 좋다라고 그냥 너무 그냥 전혀 쌍군이랑 상의 없는 그런 분이 계셨는데 당신 꿈도 되게 저박했어요. 꿈이 당신은 그냥 어디 시골에 가서 작은 작은 아파트 아파트 이제 관리 관리 인 같은 거 하면서 이렇게 왔다 갔다 청소도 하고. 그러면서 아파트 사람들에게 사람들이 이렇게 보면은와 아파트가 관리사장님 모시고 너무너무 깨끗해졌어요. 이러면서 아파트 사람들하고 막 이제 완전 농담 주고받으면서 그러고 노후를 보내고 싶다 뭐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이제 또 어떤 분들은 그런 분도 있죠? 이게 전역한 지 한 30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어디 가서 나를 이제 장군님하고 불러야 되는 거예요. 뭐 그것을 뭐 탓한다기보다도 그렇게 어떤 과거에 우리는 그걸 나와 동일시하는 거죠? 한 번 그거면 영원히 그거라는. 라는 생각을 하죠. 그런데 이게 또 실체적 사고방식일 경우에 이럴 수밖에 없거든요. 뭐 이거 이거 제가 이제 뭐 그냥 그냥 비교하기 위해 하는 거예요? 뭐 비난하는 건 아니고요? 제가 친한 신부님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까 아 그럴 수 있겠구나 그 기독교는 약간 하나님은 절대잖아요. 절대 선악이 딱 분명하고, 이제 나뉘는 어떤 이런 게 명확하다 보니까 인연 따라 사람이 신부님이 됐다가 신부님 아닌 사람도 됐다가 이런 게 아닌 거예요. 한 분 신부님이 되면 신부님이라는 그 어떤 영원성 절대성 그게 그 사람에게 이미 딱 주어져 버린 거예요. 그래서 신부님이 이제 뭐 약간 사고를 쳐가지고 나갈 일이 있어도 이제 쓱 하면서 나가 조용히 나가더라도 본인은 어쨌든 신부인 거예요. 만약에 공식적인 거 잘렸더라도 일단 신부라는 그 어떤 그 이게 유지가 된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아 이게 이제 문화적인 어떤 차이 어떤 불교랑은 좀 차이가 있구나 불교는 그런 게 아닌 것 같은데요. 여러분이 그 머리 휙 깎고 승복 입으면 스님이에요. 물론 이제 그 나름 절차가 있지만 부처님 당시에는 그랬어요. 사실 지금은 뭐 뭔가 절차가 있잖아요. 행자 교육 받아야 되고 뭐 스님한테 의사 스님한테 교육받고 뭐 여기다가 뭐 이렇게 눌러 지치고 뭐 이래 해야 되잖아요. 부처님 당시에는 그냥 평범한 사람이 부처님 저 출갑했습니다. 그럼 부장님이 오라 비고요 그리 잡았다. 근데 인제 쓴 입니다. 그럼 그 스님인 거예요? 그냥 그 간단하게 심플하게 그냥 갑자기 원무 스님이 내버리는 거예요. 그럼 스님 생활하다가 부처님 아 저 경전에 나오는 얘기거든요. 부침 제가 아무래도 우리 집에 있는 예쁜 마누라가 생각나서 도저히 신생아 못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가라 열심히 살아라 그럼 저 그러고 핵가버리는 거예요.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아요. 욕하지 않아요. 거기 갔나 보다 이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우리는 그러고 나서 또 오면 좋겠 심하잖아요. 엄마가 말이지. 지가 갔을 땐 가고 또 지하시니까 또 왔다 이러잖아요. 그거를 아내가 보고 싶어가지 왔다 갔다를 7번을 반복해놓은 비구가 있었어요. 왔다갔다 7번을 했다가 8번째 들어와 가지고 와란이 됐어요. 어 불교는 이게 이게 무슨 말이겠어요? 그 사람에게 출가자라는 수행자라는 어떤 고정된 정해진 실체 이런 게 없어요. 실체적인 어떤 그런 요건 이런 게 없어요. 자아가 없으니까 나라는 실체적 자아 이런 게 없어요. 브라만 부처님이 그거 깨면서 등장한 게 불교거든요. 인도는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도라 불가축 천민에서 명확하게 계층이 아니거든요. 근데 부처님은 그런거 없다. 어떻게 사람이 계층이 날 수가 있느냐 태어난 태생을 가지고 계층은 아니거든요. 인도는 그 어떻게 그런 게 있을 수 있느냐 그런 거 없다. 그렇게 말만 해도 지금도 그렇게 말하면 좀 좀 충격적이거든요. 지금도 어쨌든 그걸 깨려고 막 하지만 이게 잘 안 깨진단 말이에요. 지금도. 그런데 2500년 전에 그걸 깬다는 거는 상상 불가한 얘기인 거예요. 되게 부처님이 진짜 대포가 센 분인 거예요. 그 당시 사회에서 이건 충격적인 일인 거예요. 그 인도 사람들의 정신세계 속에서 2500년 전에 말도 안 되는 거거든요. 근데 부처님이 부처님 사촌 동생 왕자들 왕자들이 왔을 때 왕자 머리 깎아주려고 왕자가 출가하니까 이제 궁에서 머리 깎아주려고 이발사까지 같이 대동해서 보낸 거죠? 근데 그 이발사가 와서 보니까 나도 출발하고 싶은데 보니까. 이거 나 같은 천민들도 있단 말이에요. 죄송합니다만 저도 같이 해도. 될까요? 이랬더니 당연히 되지. 그래서 오팔리 전자를 오늘 머리카 켜서 스님을 만들고 절 집 안에는 이게 나이 계급 계층 다 필요 없어요. 먼저 머리 깎인 선배거든요. 그리고 파리존자 먼저 머리 깎이고 그 다음날 왕자들 머리가 깎아버렸어요. 그 저 왕자들한테 오팔리 존자가 너희들의 사형이다. 잘 사형을 잘 모셔라 그리고 이 프레젠가 10대 제자가 됐잖아요. 부처님이 계급 계층 상관없단말이죠. 그걸 다 깨뜨린 게 불교에요? 이 말은 사람들에게는 그 어떤 절대성이 없다는 거예요. 고귀한 사람으로 태어난 사람 그런 거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럼 뭐가 그 사람을 고귀하게 만드느냐 그 경전에 나오는 말에 우리 읽어봤죠. 지난 시간에 행위가 아무리 어떤 계층이 있어도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게 청정하고 반듯하면 그 사람이 성인이고 아무리 위대한 계층에 있어도 속이 청정하지 못하면 친구의 사법이 청정하지 못하면 그 사람은 속입니다. 그게 불교거든요. 그러니까 상을 깨는 게 볼게요. 근데 이제 어찌어찌 하다 보니까 이게 인도에서 출가 전통 그걸 그냥 불교는 기존에 있는 전통 문화를 깨뜨리고 등장하는 종교가 아니라 그 글을 다 허용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도에서는 출가지도 그대로 따랐고 중국 한국 와가지고는 뭐 뭐 산신도 그냥 받아들여 주고 독성도 받아들여지고 바닷가 가면 뭐 용암각도 있고요. 뭐 별 알고 있는 게 다 있어요. 오케이 뭐 이렇게 깨뜨리지 않는단 말이에요. 그러다 보니까 이제 그 당시 출가의 전통 그리고 그게 그 당시 상당히 유효했으니까 그런 전통을 받아들인 것 뿐이죠. 그런데 불교는 상을 깨는 종교인데 성직자들 가운데 가장 상위 센 정교가 불교였던 목사님 신부님들은 이거 로망 칼라 같은 경우 삭 빼면 그냥 민간인 같거든요 그 우리 군에 있을 때 군정 장교도 목사신 부스님들 보이면 이게 군복 있을 땐 똑같지만 이렇게 이렇게 딱 자기 성직자 옷 입고 있다가든 이렇게 그분들 요것만 딱 빼면 그냥 양복 같아가지고. 뭐 그냥 어디 식당 가서도 별 티가 안 나는데 우리는 뭘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이게 너무 확 T가 나니까 그 머리까지 깎고 이러니까. 이게 상이 성직자라는 상이 엄청나게 이게 세지 않을 수가 없는 거예요. 왜 중생세가는 아 스님들도 중생 아니에요. 중생새가는 이 보이는 모양 이거 되게 많이 휘둘리거든요. 되게 많이 끝 달리거든요. 이게 참 지금 아이러니죠. 상을 깨는 종교에서 스님들이 상이 확실히 리마인드가 확 달라버리는 불이법이 아닌 것 같은 근데 이제 그거는 하나의 문화죠 문화 문화로 받아들인데요. 거기에 그런 실체가 있으면 절대 안 돼요. 왜 제가 이런 얘기 자꾸 많이 하느냐 하면요 제가 출가 전에 그랬거든요. 출발 전에 나 같은 사람이 뭐 이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제가 깜짝 놀랐다니까요? 제가 그 대학 다닐 때 공동묘지 주변에 살았거든요. 이제 집 싼 데를 가다 보니까 그럼 뭐 막 무섭기도 하고 뭐 이랬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제가 출발하고 나서 뭐 이런저런 뭐 기도하다가 또는 뭐 꿈에서도 그렇고 뭐 이런저런 경계 같은 것들을 많이 막 체험하고 있는데 그럴 때마다 그전에는 되게 두려웠거든요? 그러니까. 뭐 수행하다가 뭐 이상한 게 나타나고 막 이러면 되게 두렵고 무섭고 해서 막 이렇게 다시 막 빠져나오기도 하고 막 이런 경험도 있었는데 저는 이제 사실 이렇게 출가를 처음에 그 얘기 몇 번 했잖아요. 저희 저 의사 스님께서 왜 의사스님은 큰 스님들은 그냥 본인이 도가 있으니까 형식이 구호받지 않는 거예요. 우리들 입장에서는 형식이 중요하잖아요. 근데 큰 선생님들은 형식이 중요하지 않아요. 딴 사람들 보기에는 정말 어이가 없는 일인데 저 의사 스님은 제가 이렇게 왔는데. 네 뭐 제가 또 내 내일 상자 해라 그래서 좋습니다. 그랬더니 바로 머리를 이렇게 깎더니 바로 이제 승복을 행자복을 안 주고 승복을 주더라고요. 그는 그 다음날 이제 4시 불공을 하라고 그래요. 사시불금 어떻게 해요? 그랬더니 아주 쌤한테 가서 배우라고 그 옆에서 따라서 이렇게 지금 배우고 2 3일 있었나 한 이삼 며칠 안 있었나 이런 얘기지 하면 안 되는데 얼마 며칠 안 됐는데 이 그냥 차라리 기도를 하라 그랬느냐 뭐 책 보고 어쨌든 달에 읽으면 되는데 한 며칠 안 됐는데. 누가 이제 돌아가신 분이 신도림 중에 생겼는데 그 장지를 따라가가지고 기도를 해주고 오는 거예요. 아니, 머리가 보기 장지에 가서 뭘 어떻게 기도를 줘야 되는지를 모르는데 아까 배우면 돼? 옆에 스님이 또 하나하나 산 산에 가서 산소에 가서 뭐 일 결하고 땅을 파가지고 파망할 때는 이건 하고 하면서 뭐 하나하나 가르쳐주는데와 모르게 너무 모르겠더라고요. 벌벌벌 떡이고 20대 중반 밖에 안 됐는데 거기서 그분들이 이제 이게 이럴 때 어떻게 하냐고 자꾸 묻잖아요. 난 뭘 모르는데 자꾸 모르니까 제가 잠깐만요. 그리고 책을 찾아보다 이 책이 안 나오는데요 이렇게 얘기를 했거든요. 그치 그분이 저한테 했던 말이 지금도 기억이 나요. 그 격거리면서 스님. 승리 지금 너무 너무 저기 책이 안 나온다는 말 하니까 너무 너무 하는 말씀 아니세요 그런데 이제 우리 절에서만 그랬던 거죠? 이제 대외적으로는 이제 행잔데, 저희는 그냥 스님처럼 해서 저 회사 스님 엄마 이렇게 다 샘처럼 생활 했어요. 근데 그게 왜 가능하겠어요? 다 알아요? 동네방님 그리고 우리 행자님 저 저보다 먼저 왔던 행자님인데 이제 맏 실진 행자님인데 그분도 스님이죠. 근데 그분이 엄마 더 한 것도 있으니까 뭐 그래서 우리는 뭐 하여간. 되게 그리스였는데 그걸 가지고 그 누구도 뭐라고 안 그런 게 그 부처님도 그렇게 사시는 거 아니에 부처님도 오라비고요 하면 끝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옛날 큰 스님들은 그러고 살았단 말이에요. 큰 스님들에게는 형식 절차 뭐 의대 의식 이런 게 필요가 없어요. 사실은 그런데 이제 그 모두가 그럼 안 되겠죠? 우리들에게는 일반인들에게는 그냥 똑같이 절에서 해야 되는 어떤 절차가 있고 문화가 있고 그런 거 다 해야 되겠죠? 그런데 이제 어린 선생님들은 그런 거에 완전 자유로운 분들이 이겠죠? 자유롭다 보니까 거기 뭐 크게 그런 거 하나하나의 형식 절차 이런 거에 연연하지 않는 거죠? 그리고 그것이 불교에서 욕먹을 짓이 아닌 이유가 이유가 바로 거기 있어요. 불교는 어떤 고정된 어떤 상이 없거든요. 고정된 불교는 이래야 돼 스님은 이래야 돼. 뭐 이런 게 없어요. 뭐 얼마 전엔가 어떤 젊은 스님이 나는 게임 맨날 게임에 집에 절에 앉아가지고 시간 날 때 게임해 이걸 당당하게 그 얘기한다는 게 절 집안에서 이 보수적인 절 집안에서 얼마나 욕먹을 일이에요? 어찌 보면 일반 스님들이 노잼 제한해도 죄가 제가 미*나 싶을 거 아니겠어요? 그런데 그런 얘기를 하더라도 그거를 무조건 옳다. 그르다라는 관점에서 보지 않는단 말이에요. 아시죠? 그 사실은 제가 부러웠던 것은 제가 이제 야 내가 전역할 때가 됐다 싶었던 게 20대 스님들이 군에 왔는데 장병들하고 대화가 통하는 거예요. 뭐 어렸을 때 같이 게임하고 자란 세대 아니에요. 애들이 게임 얘기하면 같이 막 재밌게 게임 얘기로 막 웃음꽃을 피우고 번문하다가 게임 얘기를 해가지고 번문을 할 때 애들이 막 눈빛이처럼 처럼 하더란 말이에요. 그런데 나토 도대체 저게 무슨 외계인지 뭐 뭐 모르겠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눈높이를 크게 이제 대기 설법이고 또 그게 동사석 아니겠어요. 그 눈높이에서 그 사람들을 구제하려면 그들이 하는 같은 일을 하면서 그들을 구제하라고 주님도 동사 섭외라고 하셨단 말이죠? 그러니까 그게 우리는 정할 수 없단 말이야 이건 옳은 거고 저건 틀린 거야. 스님은 이런 건 하면 되고 저런 건 하면 돼. 또 올바른 사람은 뭐 이런 걸 하는 사람은 올바르고 저런 거는 참 올바르지 않아 나는 이런 사람이고. 나는 저런 사람이 되면 안 돼. 이런 거 있잖아요. 정해진 거 정해진 고정된 실체가 있느냐 없습니다. 부처님도 계율을 어떻게 만들었어요? 고정된 법칙이 있으면 처음부터 딱 세팅해서 만들어 놓겠죠. 법을 그런데 부처님 그렇게 안 만들었어요? 중구 남방이라니까요 그때그때 만들었잖아요. 개요를 누가 사고 치면 그때 개요를 만든 거예요. 사고치면 그러니까 2 250개 개율까지 만들 필요가 없었어. 사고 치지 않고 모범적인 스님들만 있다면 불교 계열이 그렇게 많을 필요가 없죠. 250 가지 기업이 있을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250 가지 계열이 만들어진 이유가 그 육군 비구라고 있어요. 6명의 무리로 몰려다니는 아주 그 그 사고 사고뭉탱이 아주 사고만 치는 기구들이 6명이 있었어요. 걔네들이 다니면서 내 사고만 치고 오니까 그때마다 부처님 모아가지고 혼을 내면서 이건 하지 마라 저건 하지 마라 하면서 개율이 종류가 늘어난 거거든요. 이처럼 게으리라는 것은 그때그때 만들어진 거예요. 인연 따라 그때그때 그러니까 불교에는 부처님이 팔만대장경을 그렇게 손해놨지만. 선한 바가 없다. 그런단 말이에요. 이게 고정된 절대적인 진실이 아닙니다. 전혀 아니에요. 다 버려도 되는 무방한 거란 말이에요. 자기가 법이 있으면 아 뭐랄까요? 법이 없을 때는 내가 팔만대장경을 공부해가지고 그걸 이렇게 설명을 해야 돼요. 그런데 내가 법이 있어버리면 팔만대장경이 다 버려도 괜찮아요. 입만 열었다면 법이 드러나니까 부처님이 입만 열었다면 그게 다 법인 거 아니에요? 어떤 책 제목에 보니까 나는 붓을 던지기만 해도 그림이 된다. 음 뭐 이러던데 부처님은 입만 열었단 본문이 되잖아요. 사람들이 어떤 얘기를 하더라도 거기 맞춰서 그러니까 저 저 보험료 스님만 해도 어때요? 그냥 아무나 뭔 질문이라도 해라 그 그냥 얘기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게 불교지 어떤 고정된 불균 이런 거야라고 정해진 어떤 언어 개념으로 불교를 정할 수 없어요. 경전 속의 불교의 진실을 가둘 수 없어요. 법이 있으면 이렇게 얘기해도 좋고 저렇게도 좋고 또 방편으로는 이렇게 얘기해도 좋고 저렇게도 좋고 그러나 방편이 아닌 자리에서 본다면 아무리 아무리 근사치도 가깝게 법을 설에 써도 다 틀린 거예요. 개혁을 생각하면 싹 다 틀린 거예요. 왜 말은 올바를 수 없는 거예요? 말은 말의 낙초가 중요한 것이지. 그러니까 불교에서 저거 내 불교 공부하는 데서는 옳으냐 그르냐 맞냐 틀리냐 어떤 언어 어떤 개념 교류화시켜서 딱 고정시켜가지고 이것만이 진리야 해서 믿고 이런 게 있어선 안 되는 거죠? 이처럼 불교라는 개념 자체가 어떤 것도 고정된 실체 이런 걸 부여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실제적 자아 이런 관념이 없는 거예요. 내가 없어요. 정해진 게 없어요. 근데 그게 진짜거든요. 자기가 자기 삶을 생각해보면 정말이잖아요. 내가 도대체 어느 게 나지? 나는 때로는 못했기도 하거든요? 나는 때로는 착하기도 하거든요. 나름 때로는 누군가를 막 도와주는 아까워하지 않고 막 도와주는 자비로운 사람이거든요. 근데 또 어떨 때 보면 되게 욕심 많은 사람이거든요. 그럼 뭐가 날까? 이거 궁금하지 않나요? 신기하지 않나요? 글쎄 여기 궁금해야 되는 거예요? 왜 이 진짜 자기는 그러니까 불교가 그냥 아예 결론을 먼저 딱 설명해주는 이유가 법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얘기를 반야신경의 불생불면 불구부정 부정불감. 결론을 먼저 얘기해 준단 말이에요. 여러분의 진짜 본 마음은 진짜 진실은 진짜 내가 누구냐 진짜 나는 불생불멸이다? 생겨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다. 그러면 이건 아니잖아요. 불쌍불멸 안 맞잖아요. 이거는 얘는 생멸하잖아요. 얘는 생겨났다 사라지잖아요. 부정불면 아니란 말이야. 그럼 어. 이거는 불참불면 아니네. 그럼 불교는 전부 다. 법을 얘기하는 거잖아요. 법이 뭐예요? 진실이죠 진실 내가 누구냐가 내가 누구냐 세상이 무엇이냐 이게 진실이잖아요. 진짜 내가 누구냐 불신불멸이라는 거잖아요. 음 이건 부생물면이 아니네요. 그죠 이건 내가 아니잖아요. 느낌 무슨 불멸이지 생겨났다? 사라지잖아요. 느낌 왔다 가잖아요. 생각 왔다 가고 의지. 의지 다 왔다 가잖아요. 아 그 부생불멸이 아니니까 이건 다 내가 아니네. 이건 진실이 아니네. 그런데 이걸 진실로 알고 살았잖아요. 이걸 나로 알고 살았잖아요. 어, 이거 진실 아닌 게 맞네. 진짜네 불구부 좀 아 이게 깨끗합니까? 목욕하고 나면 깨끗하지만 깨끗한 것 같지만 목욕 며칠만 안 하면 냄새나죠 누구나. 아무리 깨끗한 사람도 없고 그런 부처님이 그런 얘기를 하셨어요. 천하의 그 미 미인이 너무 미인이라고 막 그냥 왕자들 막 장자들 이런 사람들이 막 서로 고백을 하고 이랬던 니인이 있었어요. 근데, 그 아버지 어머니는 이 왕자 장자 돈 많은 사람들 이 사람들이 며느리감으로 데리 가겠다고 막 와가지고 막 그냥 그 여인을 우리 아들 아기 주십시오 하고 막 찾아왔는데 그 엄마 아빠는 눈에 차질 않는 거예요. 돈 아무리 많아봐야. 이게 눈에 차질 않는 거야. 내 딸이 얼마나 내가 이렇게 이쁘고 귀한 딸인데 그렇게 돈 많다고 내가 주고 그러지 않는다. 어떤 사람에게 줄까 너무 귀한 있고 또 귀하다고 전국 저 나라 전체 소문이 나 있으니까 이거 아무한테나 주기가 싫은 거예요. 그러니까 아버지. 어머니는 그래도 약간 정신이 있는 분이시라 야 누구에게 줘야 되지. 그래서 모든 것이 거룩한 사람한테 줘야 되겠다. 그걸 딱 보니 아무리 찾아보니까 이거 왕자고 뭐 장자고 다 마음에 안 드는 거예요. 그런데 딱 보니까 부처님이 너무 맘에 드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이 어머니 아버지 쫓아가서 부처님한테 얘기를 해요. 부처님한테 딸을 데리고 가가지고 부처님 아, 네가 아무리 전화에 붙여놔도 이렇게 예쁜 사람 앞에서나 넘어가지 않겠나 싶어서 부처님 제 딸입니다. 보셨죠? 제 딸을 부처님에게 시집보내겠습니다. 뭐 이런 식으로 얘기를 했단 말이에요. 그때 부처님이 그 딸 어찌 보면은 그 딸에게 그 내가 이 삼 내가 잘났다. 예쁘다라는 그 상 그 상을 아마 깨뜨려주려고. 그런 박근혜 쓰셨겠죠? 그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어요. 왜냐하면 나중에 그게 부처님에게 좀 그 그 사람의 앙심을 품는 계기가 됐으니까. 근데 그때 그 여인 앞에서 뭐라 했냐면 내가 여인이 아무리 이쁜들 똥주머니에 불과하고 오물들이 이렇게 그냥 거죽으로 이렇게 둘러싸인 거에 불과하다. 사람의 피부라는 것은 피부 안에 들여다보면 다 지저분하고 보물 같은 것들이 다. 아니 수술한다고 배 찢어보면은 거기 아름다움이 있습니까? 그냥 또 오물 이렇게 겉에 이렇게 포장 잘해놓은 거잖아요. 포장지 잘 씌워놓은 거에 불과하다 이런 얘기를 했단 말이에요. 얼마나 충격을 받았겠어요? 얘가 미*나 싶은 생각을 하지 않았겠어요. 그 여자 입장에서 그래서 나중에. 이 사람이 왕의 왕자의 아내가 됐단 말이야. 나중에 결국에는 그래가지고 막 부처님을 모함하고 욕하고 막 막 엄청나게 막 욕을 하고 막 그랬어요. 그러면서 엄청난 사건들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법구용 이야기할 때 그 얘기를 쭉 해줬는데 야 이 여자 강심을 품으면 이렇게 아주 부처님도 먹어만 소용없구나 아주 엄청난 그런 앙심을 품었던 그런 계기가 있어요. 근데 부처님 그렇게 말씀하신 것처럼 이 몸이라는 게 아 정말 그렇죠? 이렇게 몸을 그냥 이 년 따라 이렇게 만들어진 것 뿐이죠. 이게 얼마나 오래 가겠어요. 아무리 아름다운 들 아무리 젊고 탱탱한데 그게 나이 들면 뭐 똑같아지지 않나 겠어요. 그리고 나이 들면 새카맸던 어디가 이렇게 허해지지 않겠어요? 그 어떤 분은 머리가 하얀 머리가 몇 개 난 걸 가지고 어? 어느 날인가 또 무사히 막 기분이 침울해지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좀 우울해 보이시는 거예요. 그래서 우선 뭔 일 있으세요 그랬더니 아 모르겠어요. 저도 이게 갱년기가 오는 건지 뭐 이런 얘기를 하셔요. 그래서 김명규가 뭐 지난주 지난달까지만 해도 전혀 멀쩡하시던 분이 뭔 갑자기 갱년기가 와요, 그랬더니 하는 말이 이런 거예요. 제가 내 또래들 아줌마에 비해서 저는 딱 하나 내가 아마 내세울 게 아는 아무것도 없는데, 나는 새카만 머리 흰머리 하나도 없는 새까 한 머리가 나는 나도 모른 자부심이 있었나 봐요. 그게 되게 뿌듯했대요. 그런데 딸 아줌마들 보면 다 흰머리가 많은데 나는 새까매서 흰머리 하나 없더라는 거죠. 그래서 야, 내가 이거 이거는 내가 따나 스마트보다 내가 그게 뭐가 잘난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그게 느꼈나봐요? 그랬는데 어느 날 보니까 흰머리가 한 두 억이 생기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처음에 의심을 했대 설마 그러고서 이제 재빨리 감춰놓으라고 막 그냥 기를 써가지고 그거를 두 개를 뽑아냈다는 거죠. 그런데 그런 애한테 또 너 생기더라는 거예요? 근데 누가 옆에서 야 그거 자꾸 뽑으면 오히려 2개 3개 더 나아. 그 말을 듣고는 뽑지도 못하게 했고, 안 뽑지도 못하게 갑자기 급 우울해지기 시작하면서 갑자기 갱년기가 오기 시작하면서 내가 늙었구나 이 그러니까 보세요. 사람이 아무것도 아니고 하나가 하나가 내가 의미부여를 하는 거잖아요. 우리가 하얘지면 나는 이제 늙는 건가 내 젊음은 가는 건가 이럴 수도 있단 말이야. 자기가 가치를 어디에다 뒀느냐에 따라서 저는 뭐 10대 때부터 머리가 하얗기 때문에 하얀 머리에 저장 뭐 그런 게 없어요. 저는 한 3분의 일은 하였거든요. 지금도 머리를 기르면 사람들이 한 60대로 봅니다 50대 제가 50대로 본다는 얘기를 했는데 이제 최근에는 60대로 바꿨습니다. 30세 60대 분들이 또래를 보시더라고요. 그러니까 흰머리가 길면 나이가 탁 들어 보인단 말이죠 근데 이게. 스님 생활하기는 너무 좋아요. 제가 20대 때 콤플렉스가 20대부터 제가 군법당에 있었으니까 신도님들하고 이렇게 관계를 맺고 상담을 하고 살았는데 제가 그 느낌인지 몰라도 제가 20대 때 절에서 있을 때는 신부님들이 저한테 깊은 상담을 안 하는 거예요. 저 엄마가 젊은 애가 지가 알아봐야 뭘 알겠냐 약간 이런 뉘앙스 이런 느낌 그래서 나를 좀 이렇게 이렇게 너무 어리게 보는 이렇게 그냥 스님으로는 존중하지만에 뭐 젊은 사람이 뭘 알겠네 약간 이런. 그 느낌을 받 받았는데 머리를 약간 그래서 살짝 이제 기르게 한 일 cm 2센치 막 이렇게 기르고 있으면 약간 좀 어둡게 보더란 말이죠. 그러니까. 나이 들어 보이는 게 좋단 말이죠? 저는 이제 제 동생은 저는 제 동생을 보면서 제 동생은 저보다 훨씬 저는 삼 분의 일이 백발인데 제 동생은 한 3분의 이가 백발이에요. 그거 제 동생은 저만 항상 하는 말이에요. 제 머리를 보면서와 형은 진짜 같은 집에서 태어났는데 머리가 이렇게 새카만 수가 있냐고 모르겠어. 시커멓다고. 이 기가 잘 어지시죠 남들이 듣기에는 그러고 자랑하니까 전 뭐 신물에 대한 트레스가 없었단 말이죠. 왜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야? 근데 이런 것처럼 이거 아무것도 아닌 거 작은 거 하나가 자기를 울고 오게 만들잖아요. 남들이 지나가면서 하는 말 한마디 아이고 엄마도 늙었구나 이런 말을 하거나 어떤 약간 눈치 없는 엄마들 보면 그런 얘기 하잖아요. 눈촌 아줌마들 보면 들어와서 옛날에 만났다가 다시 이렇게 절에서 만나는 거예요. 어디 어디 절에 큰 행사 있을 때 엄마 방과 후에 저 있으면 당신들끼리 만나가자마자 반갑다 그랬는데. 곧 옆에 있는 제가 민망하게 보자마자 눈치 없이 아이고 참 너도 어쩔 수 없구나 이러면서 야 어찌 이렇게 훅 가버렸냐 이러면서 그런 이야기를 그렇게 하는데 와, 저 저 부사님이 저러니까 친구가 없구나 그런데 이분은 어쨌든 그냥 웃자고 한소일 거 아니겠어요. 뭐 요즘은 반갑다 소릴 거 아니겠어요 센스가 없는 거지 그냥 그렇게 반갑다는 얘기를 그렇게 한 거겠죠? 근데 그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게 지금 농담으로 드리겠습니까? 그거 그냥 농담으로 듣는 사람도 있겠죠. 모르겠어요 없나요? 있죠 어 있다고 그러잖아요. 근데 없다 그런 사람도 있잖아요. 그게 있는 사람도 있다니까요. 그걸 진짜 농담으로 뜨는 사람도 있다니까요. 그런데 그걸 농담으로 죽어도 못하는 사람도 많죠. 어 저것도 그렇게 안 들리는 사람도 많죠. 그게 뭐겠어요? 자기가 그 말 한마디에 그 말이 뭐예요? 말은 왔다 가는 거잖아요. 그냥 말 한마디에 내가 휘둘리기를 자청하는 거예요. 자기가 스스로. 사람이 사실은 이제 그 사람 누구나 그렇지 않나요? 여러분이 막 그냥 내가 나이 들게 꾸미려면 엄청 나이 들려 보일 수도 있어요. 사람이 어떨 때는 또 젊어 보이려면 엄청 젊어 보일 수도 있어요. 근데 그걸 말을 누구한테 그런 얘기 한마디 들은 것이 나를 얼마나 휘둘리게 만들어요? 근데 그게 얼마나 어이가 없어요. 우리가 우리는 그렇게 인연 따라오고 가는 거에 휘둘린단 말이에요. 김현딸 오고 가는 거 그게 뭐라고? 아무것도 아닌데 그게 자기가 부여한 가치예요. 나는 젊어 보여야 돼.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조금만 늙어 보이면 스트레스를 받는단 말이죠. 본래는 어떨까? 요 벌레는 본래는 정말 나이가 없고 나는 누구라는 게 없어요? 나는 누구라는 거는 전부 다 분별 수 있는 분별이에요. 다 인연 가합된 거짓된 자기예요? 나는 누구야라는 거 여러분 여자 아니에요. 남자다. 여자다 그런 게 안돼. 그 생각할 때만 일어나잖아요. 진짜로 생각할 때만 나는 여자의 아르잖아요. 생각할 때만 나는. 뭐 나이 들었어? 이러잖아요 생각 없으면 나이가 있습니까? 나이 생각 안 하고 살잖아요. 평소에 그냥 날 생각 안 하고 살아요. 그나 문득문득 누가 나이 얘기할 때만 그냥 아 내가 나의 글이 됐나 이러는 거지 나이가 없어요. 사실은 한 생각 일어날 때 나이가 등장해요. 그럼 그거 어떻게 진짜예요? 그리고 기억상실에 와서 나이를 잊어버렸다. 아니면 옛날 어르신들 보면 나이를 몰라요. 잘 그래서 저희 부모 아버님만 해도 그러시거든요. 당신 나이를 당신이 잘 모르세요. 그래서 아버님 친구분들을 보면요. 옛날 제가 어릴 때 아버님 친구분들을 보면 이 친구 만나 내 친구고 저 친구 만났던 친구고 저 친구 만나는 친구 다 친구여서 분쟁을 삼더라고요. 아버님 때문에 한 열 살 위아래가 다친 거예요. 그 이 사람한테는 어 나 52 알겠다. 저 사람한테 나 욕실이 어렵다고 막 왔다갔다 하세요. 그건 나중에 와서 야 너 안 되겠다. 나 정체를 밝혀라 그러면 내가. 그 주민등록상은 나 몇 살로 되어 있는데, 부모님이 어릴 때 돌아가셨는데 그 부모님의 말을 전해 들었던 어떤 친척이 나한테 해준 얘기를 들어보면 그때 부모님이 당장 태어나자마자 주민등록을 올리지 못해서 몇 년 있다가 올렸다 하더라 근데 그게 누구 말 들어보니까 한 삼 사 년 있다 올렸다는 얘기도 있고 또 어떤 친척 얘기로는 한 칠 팔 년 떠올렸다는 얘기도 있고 막 이러니까 당신도 모르는 거예요 그냥. 그럼 당신이 정확히 몇 살인지 모르세요? 엄밀히 말은 모른다고 그러시더라 근데 그 어느 정도를 모르시는데요? 그러니까 대략 10년 왔다 갔다가 인권 문명에 10년 왔다 갔다 한 건 분명한데 그 구체적인 연도는 모르겠다고 그러신 분도 계시거든요. 그럼 그 사람 나이가 몇 살일까요? 우리 보너스로 올해 나이가 젊어졌잖아요. 아, 우리 뭐 어디 인터뷰를 하자고 인터뷰를 하는데 제가 분명히 작년인가 그 작년에 그 제 나이를 이렇게 인터뷰에 본 아이를 썼거든요. 그때 인터뷰할 때 근데 올해 인터뷰를 하면 또 그 나이 쓴 거예요? 과연 욕먹게 생겼는데 보니까 이게 저는 그냥 몇 년생이냐고 하도 멀었으셔서 얘기를 했더니 고 나이를 적으셨더라고요? 그거 보니까 야 내가 이렇게 젊었구나 나가 없어요. 나가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그 모양 그는 자기 분별이에요. 근데 이게 정말이에요. 자기가 나이 없는 그러니까 내가 나라고 할 게 있다. 나를 뭐라고 여기는지를 쭉 써보란 말이에요? 나이 뭐 외모 뭐 재산 뭐 학력, 배경 뭐 나의 부모님 내가 태어난 곳 이런 걸 쭉 적을 수 있잖아요. 그게 나냔 말이에요. 그 다 왔다. 가는 거잖아요. 다 2년 따라왔다. 2년 따라 가는 거거든요? 그런데 그 모든 어떤 그 나라고 여겼던 모든 것들 모든 정체성들 코트를 인정하러 왔다가니까. 진짜가 아닌데 내가 갓난 아기일 때도 나고 10대 일 때도 나고 20대일 때도 나고 지금도 나고 생각이 있어서 아 내가 나이가 이렇게 많았어. 할 때도 나고 생각이 난 그래도 젊어 보이네. 할 때도 나오고 그 변치한 자기가 없다고는 할 수 없잖아요. 변하지 않는 자기가 없다고는 할 수 없어요. 뭐 분명히 있긴 있잖아요. 그죠? 근데 그게 몸은 아니었단 말이죠? 늙거나 이런 것도 아니었단 말이죠? 몸 뇌 이거 전부 다 싹 왔다 가잖아요. 전부 다 변하잖아요. 그러니까 몸 안에 있는 줄 알았는데, 그 내가 몸 안에 있는 줄 알았는데 암밖에 없더란 말이에요. 그 중도 안팎이 돌이 아니라 그런다면 애플교에서는 그 내가 몸 안에만 있는 게 내가 아니야. 피부를 중심으로 아는 나고 바깥은 내가 아니야. 이렇게 얘기할 수 없어요. 생각할 때 눈 뜨고 있는데도 버젓이 뜨고 있는데도 생각이 떠오르잖아요. 그 생각이 어서 돌아올라야 물어보면은요. 어 한 3분의 일 쯤은 처음에는 누구나 뇌에서 떠올라 이러거든요. 그러나 그렇게 생각 배운 거 얘기하지 말고 배운거 말고 그냥 자기 경험을 가지고 어서 떠오른 것 같아요. 를 물어보면 한 삼 분의 일쯤은 이쪽 어딘가인 것 같은데요. 이렇게 안쪽 어디 같은데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도 있고요. 의외로 한 3분의 2 정도 반 이상은요. 여기 어딘 것 같은데 이렇게 얘기를 해요. 근데 바깥 이 주변 어딘 것 같다는 식으로 얘기를 해요. 그게 사실 자기 경험이거든요? 소릴 들을 때 여러분 귀 안에서 귓구멍 안에서 들어요? 아니 저 바깥에 100 m 바깥에서 나는 꿈 하는 소리가 저기서 들려요? 여기서 들려요? 국회가 돼서 들려요 저기서 들려요? 귀 안에서 들린다고 하려니 저 쪽 꿈 소리 저쪽 꿈 소리 다 다 들리잖아요. 그럼 그 소리가 저기 있을까? 요 여기 있을까요? 우리는 적이 있거나 여기 있거나 어떻게 하나를 정하려고 한단 말이에요. 근데 실제 자기 경험으로 돌아가면 은별심을 내려놓고 내 귀가 저서를 듣는 거고 저 소리가 꾹 울리면 소리 파장이 이렇게 진동을 해 가지고 허공을 진동해 와서 이 귓전에 뭐를 뭐 달팡이 관을 때려가지고 어디 가서 있다고 하고 이렇게 배운 생각 말고 진짜 자기 경험 진짜 자기 경험을 들어보면 소리가 날 때 이게 어디 있다. 이런 것보다 그냥. 이 난다라는 경험 이 알아차림이 분명하지. 여러 차림이 분명할 뿐이지. 이게 어디 있는지 사실 알 수가 없어요. 대충 이런 어떤 느낌이 있지만 그래서 가만히 보면 오히려 이런 느낌이 있지 않냔 말이에요. 소리가 여기서도 나고 저기서도 나고 하는 거지. 그냥 여기서 나도 알고 저서 나도 알고 저 하늘에서 천둥소리 번쩍해도 안단 말이에요. 이 호공 전체가 나니까 혹은 전체가 이거를 알고 있단 말이에요. 이걸 듣고 있단 말이에요. 말하자면 뭐 이렇게 얘기하는 건 참 별 의미가 없지만 그래서 그럴 수 있는 가능성에 우리가 마음을 열어보자는 거죠. 진짜 자기 경험 우리는 지금까지 생각을 믿고 살았지만 배운 것을 믿고 살았지만 아 그 배운 거 말고 진짜 자기 경험 진짜 자기 경험을 통해서 진짜를 보는 진짜를 볼 때는 머리를 가지고 보면 안 되는 거예요? 실제 자기 경험을 보는 거예요. 그러면 진짜 나는 나라고 이 몸을 나라고 했다. 이거는 생각이잖아요 근데 진짜 자기 경험은 뭐예요? 눈을 감고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나 라는 것을 내가 거울에서 많이 보던 익숙하든 그 외모 그거를 이미지로 그려놓고 그걸 나라고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근데 그 생각이죠? 근데 단순히 눈만 감고 가만히 앉아 있어서 내가 누구지 하고 이렇게 바라보면 그 모양이 보입니까? 직접 자기 경험으로 보면 거울 없이 직접 자기 영어로 자기를 이렇게 바라보면 그 모양 안 보이죠? 남자거나 여자앤 모양 안 보이죠? 거울에 비치던 그 모양 안 보이죠? 실제 경험되는 건 뭐가 경험돼요 얼굴이라고 내가 이름 붙인 어디를 이렇게 경험하면 얼굴이란 건 모르겠는데, 그냥 여기 어딘가에서 뭔가 이렇게 떼끈거리고 따끔거리고, 뭐가 이렇게 들락날락하고 어떤 열기도 느껴지는 어떤 이런 뭔가가 차려질 뿐이죠. 몸에 열기 같은 게 이렇게 알아차려질 뿐이고 엉덩이 이렇게 무게감 같은 게 아래 차려질 뿐이고 그러다가 어때서 소리가 나면 그 소리가 알아차리실 뿐이고 그러면 내 몸에서 꼬르륵하면 꼬르륵 소리가 차려지기도 하고 그러면 보세요. 내 몸에서 꼬르륵이 알아차려졌어요. 근데 요. 바로 앞에 네 이렇게 앉아 있는데 요. 위에. 강아지나 고양이가 내 위에 앉아 있었다. 그럼 강아지나 고양이 뱃속에서 꼬르륵 반응했다. 그러면 눈을 감고 가만히 그냥 관하고 있을 때 그 소리가 그 소리가 안에서 난소리와 밖에서 난소리가 내가 아니다 밖이다. 이건 얘기해서 난소리야 나에게서 하는 이렇게 분변하니까. 그렇지만 사실은 분별이 이전에 먼저 확인되는 건 뭐냐 하면 꼬르륵 이게 먼저 확인되잖아요. 그러고 나서 이제 아 내 뱃속에서 나온 걸 거예요. 이건 예비 속에선 안 갈 거야. 그 다음에 산 생각 일으켰을 때 그게 분별되거든요? 근데 첫 번째 자리에서 그냥 꼬르륵이 확인된단 말이에요. 거기에 자기가 있단 말이야. 거기에 그 꼬르륵 이걸 통해서 어? 내가 이렇게 이걸 아는 놈이 있네. 이걸 듣고 있는 놈이 있네. 그럼 그 꼬르륵에서 자기가 확인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서 자기가 각인되는 거죠. 내 몸 안에서만 내가 확인되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뜰 앞에 잣나무에서 자기가 확인된단 말이에요. 그 어떻게 이게 안 바뀌었습니까? 보는 것도 보는 알아차림이 먼저죠. 듣는 것도 듣는 알아차림이 먼저죠. 듣고 난 다음에 분별하는 게 있잖아요. 냄새 맡 먹고 냄새 맡아서 좋다 나쁘다. 그 나 한 생각 읽혔을 때 좋고 나쁘고가 펼쳐지지 그냥 뭔가 어떤 냄새가 느껴진다는 그게 먼저 알아차지거든요. 맛보고 감점 느끼고 생각하는 그 모든 것이 그래서 어떤 느낌이 일어날 때 어떤 생각이 일어날 때 그 일어난다는 자체가 그 근원에서 탁 자기 자기 경험으로 비춰보면. 항생아 일어날 때 여기서 꼬르륵이 알아차렸었던 것처럼, 몸의 느낌이 알아차려졌던 것처럼 여기 어딘가에서 한 생각이 이렇게 일어나고 있다라는 게 이렇게 알아차려져요. 그래서 진실은 뭐냐면요. 생각의 내용물을 쫓아가서 이랬다. 저랬다 하고 그게 진짜라고 생각하면서 거기 끌려다니는 건 중생이 하는 일인데요. 한 생각 일어날 때 그 내용물이 뭔지 중요하지 않고 한창 일어날 때 그 생각이 일어났다는 걸 알아차리는 걸 통해서 어. 이거를 딱 회강반지에 돌이켜보면 이걸 이게 드러나는 여기가 있네. 이 자리가 있네. 하지가 일어나는 이놈이. 여기서 한 생각이 일어나는 거잖아요. 내용물을 쫓아가지 말고 이걸 통해 어. 이걸 알아차리는 놈이 여기 있잖아요. 현생각을 알아차리는 한 생각 일어난 그 생각을 따라가지 말고 한 생각이 일어난 자리가 있잖아요. 이걸 알아차리는 이 자리가 있잖아요. 그게 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