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 2. 17. 큐티
요한복음 1:6 ~ 18
말씀이 육신이 되어
관찰 :
1)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빛을 믿게 하려한 자
- 6절.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 사복음서의 저자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함에 있어서 세례자 요한을 통하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구약을 신약에 잇는 존재이고, 또 그의 사명 자체가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보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세례자 요한을 설명함에 있어서 그의 드레스 코드나 메시지 등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유대적 배경에 있는 이들에게는 그것이 의미가 있겠지만 헬라 문화 가운데 있는 요한복음의 일차 수신자들에게 그런 자세한 것을 설명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유일한 사도적 권위를 가지고 세례자 요한을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다른 공관복음과 다르게 세례자 요한에 대해서 그냥 단순히 요한이라고 한 것은 자신이 요한이기에 세례자 요한을 구분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과 사도 요한 스스로가 자신을 겸손하게 여겨서 세례자 요한과 자신을 동격을 여기지 않았기에 이렇게 설명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 7절.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 세례자 요한의 존재이유는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복음서를 통해서 이미 세례자 요한은 소개되었었고, 또 그의 가르침은 유대와 유대 디아스포라 전역에 퍼졌었기 때문에 더 이상 자세히 다룰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의 메시지의 본질에 대해서만 간략하지만 핵심을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가 빛 되심을 증거하고, 그를 믿도록 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 8절.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 사도 요한은 세례자 요한이 빛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선을 긋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가 이 땅에 온 목적이 빛을 증언하고 그의 길의 예비한 자이기에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분명하게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세례자 요한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설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까지도 예수님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에 대해서 세례자 요한에 대한 바른 설명을 시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참 빛
- 9절.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 이제 세례자 요한이 증거하고자 했던 바로 그 분에 대해서 설명이 시작됩니다. 그 분은 “참 빛”이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는 온 우주에 대해 이 세상의 빛이 아닌, 태양과 달과 별이 아닌, 그 뒤에 실존하시는 신비의 빛, 창조의 빛, 생명의 빛이 바로 세례자 요한이 소개하고자 하는 분의 존재이시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 10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 참 빛 되신, 창조의 주체가 되셨고, 천지 만물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이 이 세상에 오셨지만 이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이 세상에 대하여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사도 요한은 분명하게 지적하는 것입니다.
- 11절.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 사도 요한은 세례자 요한이 증거한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유대인들에 대해서 그것이 죄악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엉뚱하고 생뚱맞은 상황에 대해서 사도 요한은 안타깝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두 손을 들고 환영하며 맞이해도 부족할 판에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영접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사실은 예수님을 배척하고, 배척하다 못해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기까지 한 것입니다. 이 모든 사실을 밑바탕에 깔고 보면 이 11절은 유대인들에게 너무나 무서운 선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피할 수 없는 범죄의 행위가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 즉 구약의 메시지가 요약된 존재를 통해서 소개된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한 유대인의 범죄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제 아무리 똑똑하고 세계의 부를 좌지우지하는 민족이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한 죄에 대하여 회개하고 주님의 몸 된 교회로 들어오지 않으면 그들이 가진 지혜나 혹은 그 무엇이라도 온전한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
- 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 사도 요한은 세례자 요한보다 훨씬 더 급진적인 복음의 메시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방법은 유대인이 되는 것이 아니며,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그 중심에 영접하는 자라는 혁명적 메시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로 들어온 자의 권세는 이 세상의 역사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풍성하고 위대한 다스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권세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하나님의 권세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나누는 그 어떤 분리도 무너뜨릴 수 있는 위대한 하나님의 파워입니다. 종과 주인을 나누는 장벽도, 남과 여, 나이의 많고 적음, 세상적인 지위의 고하, 물질의 많고 적음을 떠나 오직 예수 영접하는 것으로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입니다. 이것은 세상에 없던 권세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못 박혀 죽으심으로 얻게 된 권세입니다. 그래서 이 권세가 하나님의 권세입니다.
- 13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사도 요한은 이제 위대한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인 요한은 자신이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으로서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참되신 하나님의 가르침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으로 태어난 것은 그들의 역사적 자존감을 내포합니다. 그러나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선포를 통해서 그런 그릇된 기득권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가르침이 민족적 전통이나 우월감보다 더 우선하는 것이 됨을 분명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전체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입니다. 이들 안에는 유대인도 포함되고, 이방인도 포함되는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이루는 성도들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을 새롭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권세가 되는 것입니다.
-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사도 요한의 증거가 되는 근거는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메시지를 이렇게 까지 풀어내고 증거하는 것은 신적 권세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그렇게 까지 할 수 있던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으로서의 가르침이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와 진리는 다른 곳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부터 날마다 채워지고 넘치게 공급되는 것임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 15절.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 사도 요한은 다시금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참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한 세례자 요한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쓰고 있던 당시까지 세례자 요한을 따랐던 이들 중에 예수님께로 나아가지 못하고 여전히 세례자 요한의 가르침만을 따르던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상당히 많은 유대인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통하여 다시금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에 대한 증명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을 메시야로 오해하고 있던 자들에게 이러한 사도 요한의 가르침은 충격적이었을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라는 말은 세례자 요한의 사역이 바로 이 분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4) 은혜와 진리
- 16절.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 사도 요한은 모든 은혜의 공급이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르지 않는 샘과 같은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동일본질이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창조의 능력이셨던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만물을 충만하게 채우시고, 모든 은혜를 공급하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은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공급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 17절.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언약백성으로 분명하게 부르시기 위해서 모세를 사용하셨습니다.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언약적 연합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이 모세가 만든 것은 아닙니다. 모세가 받은 율법은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것일 뿐입니다. 그 율법이 율법 될 수 있는 은혜와 진리가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그것을 전달한 존재였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가르침에 대해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영역입니다. 심지어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도 이러한 부분에 대해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 은혜의 근원이시고, 참 진리의 근원되십니다.
- 18절.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 하나님을 보는 자는 죽는다는 것이 유대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자신들이 스스로 생각한 바 하나님을 본 사람은 결코 없다고 생각하고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인간의 몸으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믿음에 대해서 그것을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을 증거하는 말씀을 사도 요한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한 사도 요한의 깨달음과 성령의 감동으로 말미암은 오류가 없는 가르침이 되는 것입니다.
가르침 :
1) 요한복음을 읽는 가장 중요한 전제가 사도 요한이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기록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도가 된 제자들에게 구약의 모든 말씀들이 예수님에 대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그 말씀의 의미를 풀어서 설명해 주셨습니다. 당대의 기라성 같은 구약 성경에 정통한 서기관들과 학자들이 있었지만, 대부분, 아니 거의 다 잘못된 해석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메시야에 대한 기대였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하시는 가르침의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메시야에 대해 재해석 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홀로 생존하는 사도로서 초대교회 당시의 헷갈려하는 또 다른 문제들, 특별히 영지주의를 포함하는 이단들의 잘못된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본인이 스스로 보고 느끼고 배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성령을 의지해서 요한복음으로 모든 성도들에게 알리고 있습니다.
2)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방법에 대한 위대한 가르침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본인도 유대인이었지만, 그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의거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은 혈통적인 방법이 아니라 몸의 어떤 뜻이나 사람의 방법으로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참된 메시야이시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고, 우리 죄를 다 이기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지금도 살아계신 분이심을 믿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3)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소유하는 것입니다. 자녀가 되어서 찌질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들었다 놓았다하는 권세를 가지는 것입니다. 일국의 왕의 왕자, 제국의 황제의 태자도 아닌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세입니다. 그의 생각의 범위와 통치의 대상은 온 우주에 달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사람의 어떤 방법으로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가 되는 것입니다.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스스로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다시 태어나게, 중생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더불어 3년여의 시간을 함께하며 말씀을 배운 사도 요한의 고백입니다. 이것이 구약의 모든 말씀을 온전히 해석하여 자신을 계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의 고백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승천하시고 보내주신 성령으로 충만하여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초대교회와 오고 오는 세대의 주님의 신부된 교회들을 위하여 주시는 성령의 메시지로 충만한 자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유대인이라서 우월하거나 월등하고, 예루살렘에 거주하기에 우월하거나 월등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동일한 quality로 주어지는 권세입니다. 이 권세의 의미를 알고 그 권세를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 권세를 바로 사용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통치하는 바른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5)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한 충만이십니다. 완전한 충만은 오직 하나님 뿐이십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공급되는 은혜는 그렇기에 끊어짐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갈망하면서 다른 것을 추구하는 것은 참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는 참되시고, 충만하셔서 모든 문제와 필요에 대해서 언제나 해결책을 공급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영역, 모든 문제, 모든 사정이 주님께 속해 있을 때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주님의 그 끊임없는 은혜를 모든 성도들에게 공급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문제는 언제나 우리 편에 있습니다. 그 은혜를 받아 누리지 못하는 것이 언제나 우리의 믿음의 부족, 우리의 실천의 부족에 근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6) 율법은 은혜와 진리로 온전해 지는 것입니다. 율법이 율법 스스로 온전해지지 못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만이 은혜와 진리의 통로가 됨이 우리에게 소망이고 기쁨이고, 그 자체가 또한 은혜인 것입니다.
7)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까지의 프로세스 자체가 놀라운 드라마이며, 하나님의 은혜의 표현이시며, 진리의 영역입니다.
적용 :
1)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보다 묵상하겠습니다. 내 생각의 지평을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크기로 넓히길 소원합니다.
2) 예수 그리스도는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 모든 문제를 여쭙고 해결책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모든 삶을 주관하시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좋은 길은 없습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 주님을 더욱 바라보고, 주님을 더욱 알아가고, 주님께 나의 모든 것들을 내어드림이 나를 깊어지게 하고, 충만함의 자리로 인도하게 되는 것임을 경험적으로 알아가길 소원하고 기도합니다. 은혜와 진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힘임을 믿습니다.
3) 예수님의 권세로 말미암은 나의 신분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한데 나의 본질과 실제 모습은 너무나 부족합니다. 참으로 주님의 은혜로 이 gap이 줄어들기를 바라고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