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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고(비판/건의/안티) 스크랩 달성 서씨의 유래
太師公의 後孫 추천 0 조회 381 09.10.11 04:2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 서씨()의 유래와 본관

1) (서)씨              
(가성)서씨,   (광성)서씨,   (경북)서씨,   (경주)서씨,   (군위)서씨,
(김해)서씨,   (나주)서씨,   (남양)서씨,   (남원)서씨,   (남평)서씨,
(달성)서씨,  (달천)서씨,   (단양)서씨,   (담양)서씨,   (당성)서씨, 
(대구)서씨,   (대전)서씨,   (밀양)서씨,   (복흥)서씨,   (부여)서씨,
(봉성)서씨,   (서산)서씨,   (서원)서씨,   (서천)서씨,   석강(석강)서씨,
(수원)서씨,   (순창)서씨,   (안동)서씨,   (안성)서씨,   (여주)서씨,  
(연산)서씨,   (연안)서씨,   연천(연천)서씨,   (염주)서씨,   영성(영성)서씨,
(예천)서씨,   (원주)서씨,   (용궁)서씨,   (울산)서씨,   (의령)서씨,
(의성)서씨,   (의주)서씨,   (이천)서씨,   (인천)서씨,   (장성)서씨,  
(전주)서씨,   (절강)서씨,   (진주)서씨,   (창녕)서씨,   천천(천천)서씨,
(청주)서씨,   (충주)서씨,   (파주)서씨,   (평당)서씨,   (평택)서씨,
(함양)서씨,   (함평)서씨,   (해주)서씨,   (황산)서씨.

2) 본관은 이천()달성()장성()연산()남평()부여()당성()평당()복흥()의령()남양()황산()염주()군위()가성()봉성()용궁() 등 20본 가까이 현존한다. 그러나 증보문헌비고()에는 153본, 조선씨족통보()에는 176본이 기록되어 있다.
 서씨의 대종은 이천서씨이며 나머지는 모두 이천서씨에서 분파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증보문헌비고나 조선씨족통보에는 이천서씨에서 달성장성연산남평평당부여 등이 갈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부여서씨의 시조는 서수손()으로 되어 있으나 만성대동보()에는 부여서씨의 시조가 백제 의자왕()의 태자인 부여 융()으로서 나라가 망한 뒤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당고종()으로부터 서씨성을 받았으며, 그 후손인 존()이 중시조로, 그리고 수손은 그의 11대손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 달성서씨의 시조는 화담() 서경덕()의 증조부인 득부()로 나와 있다.
 1960년도 국세조사에 의하면 6만 6571가구에 인구 37만 7833명으로 성별() 순위는 258성 중 제14위였고 1985년도 조사에서는 가구수 14만 4320 가구, 인구 61만 1148명으로 성별 순위는 274성 중 역시 제14위였다

3) 서씨()의 성씨 기원
 성씨제도()는 원래 왕가()에서만 사용하다가 차츰 귀족들과 백성들에게 퍼진 것이다. 우리 나라는 고조선() 시대에 왕족에 한하여 성씨를 사용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이후 삼국시대() 고구려의 주몽이 고씨(), 백제의 온조가 부여씨(), 신라의 혁거세가 박씨()를 성씨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서씨()의 성씨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단군시대() 예국() 군장() 여수기()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에게 고을을 나누어 다스리게 한즉 선정을 베풀었다 하여, 그 공을 못 잊어 백성들이 "여러 사람이 고마움의 뜻을 표한다" 하여 중인변()을 부쳐 여()자를 서()라고 고쳐 사성()한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위지 동사강목( )의 기록에 따르면, 기자()의 40세 손이고 기씨조선()의 마지막 왕인 애왕() 기준()이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뱃길로 남쪽으로 옮겨, 진() 나라 북쪽 변방인 지금의 경기도 이천() 땅인 서아성() 지방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지명을 따 성씨를 서씨라 하였다고 한다. 우리 나라 성씨 가운데 기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성씨는 서씨 이외에도 청주한씨()와 태원선우씨() 및 행주기씨() 등이 있습니다. 서씨로서 이름을 떨친 이는 신라() 때의 개국공신 아성() 대장군() 서두라()가 있었습니다.
 서씨()라는 성은 왕이 하사했다는 기록도 전해지고 있다. 서씨사적정해()에 따르면, 기준()의 후손인 만주()라는 사람이 나이 40살에 사슴의 목숨을 구해준 어느 날, 신라 문성왕()이 그 이야기를 듣고 기특하게 느껴 왕의 눈에 들어 만주에게 서씨()의 성을 내리고 뒤를 보살펴 줌으로 신()의 가호로 안일하게 되었다는 뜻에서 이름을 신일()로 고쳤다고 한다. 오늘날 이천서씨()는 모두 서신일의 후손이며, 달성(), 장성(), 연산(), 평당(), 남평(), 남양() 등 7파의 서씨가 나뉘었고, 모두 서신일()의 후손이라고 한다.
 서씨의 대부분은 이천 서씨이고, 역사상 빼어난 인물을 많이 배출한 집안은 대구 서씨이다.
삼대 정승에 삼대 대제학을 지낸 집으로 대구 서씨를 비롯하여 청송 심씨, 청풍 김씨가 있을 따름으로 그 중에서도 6대에 걸쳐 삼정승 삼대제학을 낸 집안은 대구 서씨 뿐이다.
 1985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서, 144,335가구에 611,20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씨는 옛 문헌에 165개의 본관이 있었으나 10개의 본관 이외에는 시조 및 유래를 알 수가 없어 아쉬움을 남긴다.
 
2. (달성)서씨의 기원

1) 달성()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
 고대
- 변한 때는 탁순국.
  757년(신라 경덕왕 16), 수창군, 하빈현, 화원현, 현효현, 해안현으로 개명.
 고려
- 940년(태조 23), 수창군은 수성군으로, 현효현은 현풍현으로 개명.
 1143년(인종 21), 대구현에 현령을 파견하고 하빈현을 영속시킴.
 조선
- 1414년(태종 14), 수성과 해안현이 대구현에 영속.
 1419년(세종 1), 대구현을 군으로 승격.
 근대
- 1896년, 경상북도 대구군과 현풍군으로 편제.
  1914년, 대구부 승격, 달성군 설치.
  현재, 대구광역시 달성군 지역.

2) (달성)서씨의 기원
 달성서씨()는 이천서씨()에서 분관()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내력을 명확하게 고증할 수 없는 실정이다. 이천서씨 문헌에 서희()의 아들 4형제 중 서주행()이 달성으로 이거()하였다는 설이 있을 뿐이니 막연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이천서씨에서 분관된 달성서씨는 고려 군기소윤() 서한()을 시조로 하는 경파()와 고려 판도판서() 서진()을 시조로 하는 향파()로 나누어졌다. 두 파는 조선 숙종() 28년 서기 1702년에 처음으로 족보를 함께 하여 임오보()를 만들었으나 두 파의 의견충돌이 심하여, 결국 영조() 대에 이르러 서기 1736년 경파()만이 단독 족보를 만들어 대구서씨()로 갈라섬으로써 양파가 완전히 족보를 달리하게 되었다.
 달성서씨의 원조() 서진()은 고려시대 사람으로 벼슬은 봉익대부 판도판서() 달성군이었고, 출생년도는 대략 서기 1260년에서 1280년 사이로 추정되며, 부인은 초계 주()씨였다. 학유공파()는 달성서씨 7세손 학유공 서도()의 후손들로서, 학유공의 일호는 월촌()이었다. 벼슬은 조선 무공랑 성균관 권지학유를 지냈고, 부인은 월성 정()씨였다. 묘소는 영천시 금호읍 귀암리 마당골 신좌()이고 묘향일은 한식() 익일()이다. 호잠파()는 달성서씨 10세손 서수영()의 후손들로서, 서수영은 조선 통정대부의 벼슬을 지냈고, 부인은 제주 양()씨이며, 서기 1500년에서 1565년까지 살았다. 달성서씨 유허비는 대구 달성공원()에 있다.

3) (달성)서씨
 달성()은 경상북도() 최남단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삼한시대()에 달구화() 또는 달구벌()이라 불렀고,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대구현()으로 개칭하여 수창군()에 속하였다.
 조선() 영조조()에 구()를 구()로 고쳐 대구()라 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시가지를 이룬 전역이 대구부()로 독립되고, 외곽지 전부와 현풍군을 폐합하여 달성군()으로 개칭하였다. 
 달성 서씨()는 시조() 서진()이 고려조()에서 봉익대부()로 판도판서()를  지냈고, 그의 아들 기준()과 손자 영()에 이르기까지 3대()가 달성군()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달성()에 세거()하며 관향()을 달성으로 하게 되었으며, 후대로 내려와 현감공파( : )학유공파( : )판서공파(  : )감찰공파( : )진사공파( : )생원공파( : )진사공파( :  )참판공파( : )종사랑공파( : ) 등 9파로 갈라져서 세계()를 이어왔다.

4)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
 달성서씨는 조선시대에 상신 9명, 대제학 6명, 왕비 1명을 배출했는데, 이것은 고려시대에 이천서씨가 많은 인물을 낸 것과는 반대로 조선시대에 달성서씨에서 많은 명신과 학자가 나왔음을 의미한다.
 시조의 증손() 균형()이 1360년(공민왕 9) 문과()에 급제하여 간관()으로 있으면서 신 돈의, 방탕한 횡포를 탄핵하는 직언()을 서슴지 않았고 잦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한 군의 중요성을 역설하였으며 그의 아들 침은 정몽주()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여 조선()이 개국()한 후 조봉대부()로 전의소감()을 지냈다.
 침의 아들 3형제 중 장남 문한()은 승사랑()으로 광흥창 부승 ()을 거쳐  문과()에 급제하여 현감()을 지냈으며, 차남 문간()은 중시()에 올라 역시 현감을  역임했고, 막내 문덕()은  숙부()인 송화 부사()에게 출계()하여 이조 정랑()과 만경 현감()을  지냈다.
 대사간 충()의 증손 한정( : 진사 균의 아들)은 세종() 때 진사()로 태학()에서 학문()을 연구하였고, 1455년(세조 1)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자 이를 개탄하여 벼슬의 뜻을 버리고 가족을 데리고 영주 이산면 한성동()으로 내려가 은거()하다가 소백산() 밑 순흥()으로 옮겨 세상과  인연을 끊고 학문연구에 진력하며 스스로 호()을 돈암()이라 불렀다.
 한편 임진왜란 때 중봉() 조 헌( )의 휘하로 들어가 금산()의 전투에서 칠백 의사()와 함께 순절한 응시()는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선조() 때 학행()으로 명성을 떨쳤던 사원()은 청안 혐감()에 부임하여 학문의 진흥과  후진양성에 진력하였다. 그 외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주사장()으로 연전연승()을 거두었던 인충()과 병자호란() 때 김상헌()과 함께 화의()를 반대했던 변이 유명했고, 충무공() 이순신()의 막하()에서 선봉수문장()으로 임명되었던 후손 수천()은 대나무로 뗏목을 만들어 노량 해전()에서 무공을 떨쳤다.
 한말()에 와서는 서화()에 탁월하여 <팔능()>으로 일컬어졌던 병오()와 독립운동가로 대동청년당()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에 앞장섰던 상일()이, 영친왕() 결혼식전에 참석했던 총독부 요인과 이완용() 등의 살해를 기도하다 피체되었던 상한( : 상일의 아우)과 함께 명성을 떨쳤다. 사헌부 감찰() 목렬()의 아들 재승( : 종사랑  진의 12세손)은 일찌기 유학()에  전념하여 시()와 예학()에 정통했으며 효성() 이 뛰어나 세인()들의 칭찬을 받았다.
 1905년(광무 9) 통사랑()으로 탁지부 주사()이 되었으나  일본()의 침략흉계에 의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의분을 참지 못해 의병을 일으켜  항일투쟁에 앞장섰으며, 군자금() 조달을 위하여 고향인 영주()로 내려가 활약하다가 밀고자에  의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도중 영풍군 풍기읍() 창락동에서 일본 헌병과 격투하다가 40세로 순절하였다. 그후 그의 충절()을 기려 사림()에서 충의()라 사시()하였고, 1980년 8월 14일 대한민국건국포장()이 수여되었다.   근대에 와서는  죽림() 재승()의 장손() 병극()이 전국 사림의 공의()에 의하여 사업비() 일체를 전담하여  경북 영풍군 단산면 사천리()에 백산서원()을 건립하여 전사  청()을 비롯한 부속건물을 세우고 경내()의 조경()과 진입로 공사를 완료하여 선조()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달성서씨의 대표적 인물은 세종에서 성종에 이르는 6대 왕조에서 6조()의 판서와 대제학 등을 역임하고 학자로도 유명한 거정()이다. 그의 종현손인 약봉()은 선조 때 5도의 관찰사와 호조형조공조 판서 등을 역임했으며, 서인()이 주동한 인조반정()을 고비로 약봉의 일가는 전성기를 맞았다. 약봉의 네 아들 경우()경수()경빈()경주() 중에서 경우는 우의정에 오르고, 경주는 선조의 부마가 되었다. 4형제 중에서도 둘째 경수와 넷째 경주의 집이 특히 번창하여 경수의 현손 종제()의 딸이 영조비가 되고, 종제의 현손 용보()가 영의정이 되었으며, 경주의 집에서 영의정 6명과 좌의정 1명, 대제학 5명이 나왔다. 특히 종태()명균()지수()의 3대 상신()과 유신()영보()기순()의 3대대제학()이 유명하고, 또 명응(:)호수(:)유구(:)의 3대는 다같이 문명이 높았다. 달성서씨의 세칭 '약봉집'은 선조에서 고종에 이르는 약 300년간 정계를 주름잡았으며, 숙종 때 서씨로서 참판급() 이상이 30여 명이나 되었으니 그 번창한 정도를 능히 알 수 있다. 그런데 달성서씨는 서울에 올라와 벼슬을 지낸 경파()와 고향에 남아 벼슬과는 인연 없이 지내온 향파()로 크게 갈라진다. 두 파는 다같이 한을 시조로 하고 있지만, 경파는 한의 6대손인 익진()을, 향파는 한의 증손인 진()을 각각 중시조로 하고 있으며 대동보()도 따로따로 만들고 있다. 그러나 세계상으로는 향파가 큰집이다.
 근대의 유명한 독립운동가로 서재필(, 1866-1951)이 있다. 서재필은 달성서씨로서 젊은 시절 김옥균() 등 개화파 인물들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미국으로 망명한 뒤 워싱턴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1896년 한국 최초의 한글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하였고 이승만()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결성하고 독립문을 세웠다. 일제침략기에는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외교위원장으로 활동하였고, 1945년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큰 공헌을 하였다.

5) 사연리 서씨고가
 달성 서씨 집성촌인 사일마을 앞으로는 태화강과 넓은 들이 펼쳐져 있고 언양-울산 간 고속도로 너머로는 문수산이 바라다 보인다.
 마을 중간에 솟을대문을 한 고가가 있는데 2백 년 전 서달원이 이 마을로 이주해 지은 것이다.
 원래 안채, 사랑채, 곳간채, 행랑채로 지어졌으나 몇 년 전 곳간채와 행랑채를 헐어버렸다. 뒷산이 낮고 지형이 평평해 전체적으로 옆으로 긴 가옥구조이다.
안채는 일반 서민들의 살림집을 확대한 것같이 일자형의 옆으로 긴 7칸의 방으로 되어 있다. 안채 제일 오른쪽 방은 멀방을 며느리방으로 사용하거나 딸 신행용방으로 사용했다. 몇 년전 중간 행랑채를 수리하던 중 지붕꼭대기 기와를 몇 층 더 올리는 바람에 안채 전망이 가려지게 되어 갑갑함을 느끼게 한다.
 사랑채는 팔작지붕으로 단정하게 지었는데 방 2칸과 마루 2칸으로 되어 있으며 분합문 형식이어서 4칸을 하나로 틀 수 있다. 앞뒤로 모두 툇마루가 있어 앞쪽은 경치를 즐기는 풍류용으로, 뒤쪽은 광으로 사용한 것 같다. 지붕틀은 재질이 매우 우수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져 천장을 만들어 가리지 않고 그대로 노출시켜 놓았다. 지붕틀은 정교하게 만들기 어려워 천장으로 가리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에 비추면 매우 이채롭다. 또 사랑체 방 천장은 기름을 먹인 종이 반자를 사용하고 있는데 전국에서도 보기 드문 것이다.
 사랑채 제일 왼쪽에는 빈소방이 있는데 대부분의 사대부 집에서 사당을 따로 만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사당이 있다가 없어진 것 같다. 툇마루에 앉으면 앞의 넓은 들과 문수산이 멀리 보이고 뜰에는 목련 등을 심어 은은히 감상할 수 있게 하였다.
 서씨고가는 안채와 사랑채를 철저히 분리하고 있는데,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는 사랑채로 통하는 중문이 따로 있고 곧바로 가면 안채로 통하는 문이 있다.
마당도 안마당과 바깥마당이 따로 있어 남녀 간 생활공간을 철저히 분리하고 있다. 또 집밖 대문 앞에는 사각형 연못 한 복판에 둥근 섬을 만들고 나무를 심어 도교적인 색채를 농후하게 보여 준다. 연못을 집밖에 만들어 색다른 공간 느낌을 주고 있는 것은 다른 고가와는 상이한 점이다(풍수상 집안에 우물을 파면 화재가 자주 일어난다하여 집밖에 연못을 만들었다 한다).
 그 외 특징으로 집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담은 두께가 두껍고 견고해 아직까지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특히 담 위에는 이끼가 낀 기와가 그대로 얹혀 있다. 또 대문이 서쪽으로 나 있는 것도 특징이다. 20세기초에 나온 풍수서를 보면 민택삼요()라 해서 안방, 대문, 부엌의 방향과 위치는 서로 상관관계가 있고 매우 중요한 것으로 여겨 집주인의 사주팔자를 봐서 그 방향을 정했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안채 뒤뜰 중간에 담을 쌓아 장독대를 부엌쪽이 아닌 반대쪽에 설치해 놓은 것이다. 이는 살림을 사는 종들이 함부로 된장이나 간장을 퍼가지 못하도록 하고, 장독 출입 때에 반드시 주인의 눈에 띄는 안마당을 거쳐가도록 하였다. 마치 행랑채를 안방에서 잘 보이는 곳에 배치해 감시의 눈길을 멈추지 않았던 것과 같다.
 현재 서씨고가는 지은 지 2백년 이상 돼 곳곳이 허물어져 가고 있다.
울산지역에 과거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고가가 제대로 보존되고 있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시급히 문화재로 지정해 보존 관리해야 변형과 파손을 막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3. (달성)서씨와 관련된 이야기

1) 달성공원
 삼한 시대에 부족국가였던 달구벌 시대에 쌓아진 토성으로 (높이 4 길이 1,300, 폭6.6) 달성 서씨의 문중 땅이었다. 성리학의 대가 서침이 달성에 은거하였는데, 조선 세종 때 왜적에 대한 방위 때문에 성을 쌓으려고 서씨에게 지금의 남산동 땅과 교환할 것을 의논하였을 때 서씨는 당을 사양하고 그 대신 대구 읍민이 나라에 빌려 쓴 곡식의 이자를 한 섬에 5되씩 감해줄 것을 청원하여 허락을 받아, 달성을 나라에 희사하고 대구 읍민 모두가 고루 혜택을 입게 되었다. 1906년에는 일본인들이 신사를 달성 안에 건립하여 참배를 강요하였는데 1966년 8월 철거하였으며 달성 공원은 1963년 10월 18일 사적 62호로 지정되면서 본격적인 공원 조성을 시작 3만 8천 7백 75평의 부지에 동물원, 종합 문화 회관 등을 건립 1969년 2월 15일 준공되어 오늘에 이른다.

2) 서씨 시조() 서신일()의 전설
 서신일의 유명()은 만주()라고 불리는데 그는 기자() 세손()인 기준()의 후손이 된다는 것이다. 고대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인 이 위만에게 쫓기어 이천 땅에 서아성()에 자리잡은 것이 의 시초라는 것이다.
 기준의 대손에 라는 이가 효양산() 밑에 살았었다. 나이 고개를 넘기도록 장가를 못 가서 총각을 면치 못했다. 하루는 효양산 기슭에서 잎나무를 그득히 긁어 한참 모아놓고 나무 전을 치려 하는데 어디서 난데없이 화살을 맞은 채 사냥꾼에게 쫓기는 사슴 한 마리가 애절한 눈으로 살려달라는 듯 뛰어들어 앞에 쓰러지는 것이다. 는 가엾게 여겨 화살을 뽑고 저고리 속에서 솜을 꺼내 피를 멎게 한 다음 나무 속에다가 숨겨 주었더니 사냥하는 자가 뒤따라와 사슴의 행방을 묻었다. 는 얼마 전에 저편 언덕 너머로 뛰어갔다고 일러주었다. 이리하여 사냥꾼은 사슴을 찾지 못하고 돌아갔다. 는 사냥꾼이 멀리 가버리자 사슴을 나무 속에서 꺼내어 피가 멈추도록 단단히 솜으로 싸주고 사슴 등을 어루만지며 보내주었다. 사슴은 말로는 표현 못하나 눈물을 흘리면서 돌아갔다.
 그날 저녁에 잠을 자는데 생시같이 꿈속에서 한 노인이 를 찾아와 치사하기를 오늘 낮에 구해준 사슴은 내 자식인데 그대의 덕택으로 죽지 않고 살아났으니 그대의 이 은공을 무엇으로 갚을 길이 있으랴! 마땅히 그대의 자손으로 하여금 대대로 공경대부() 재상()이 되게 하리라. 그대 자자손손()이 더욱더 오래도록 영화를 누리게 하려면 그대가 늙어 죽으면 그 자리에다 묘를 쓰도록 아들에게 일러 주라고 하고는 신령님은 사라졌다.
 그후 얼마나 지난 뒤 신라 문성왕()이 그곳으로 사냥을 나왔다. 며칠간을 가 길 안내와 몰이꾼으로 문성왕을 모시게되니 이때 어진 는 왕의 눈에 들게된 것이다. 사냥을 끝마치고 환궁할 때 로 고쳐 사성()을 받고 벼슬까지 얻게 되었다. 는 사슴을 살려준 후 신의 가호로 안일하게 되었다는 뜻에서 로 고쳐 불렀으며 그후 장가들어 나이 에 이르러 아들 필()을 낳으니 그가 바로 정민공() 서필()이요, 필의 아들이 유명한 서희() 장군이었다. 이때부터 씨가 번창하기 시작했다.

3)(달성)서씨 효문
 봉남면 양전리 용두동 ()에 열녀 서씨부인의 효문이 있다.
 씨 부인은 달성 () 서치우()의 딸로 헌종()때 태어나 함양() 오병운() 에게 출가했다.
 시집온 뒤에 시부모를 효성으로 모시고 지아비를 잘 섬기었다 그러다가 남편이 병이 나서 앓기 시작하더니 백가지 약이 소용없고 차츰 위독하여 목숨이 경각을 다투게 되었다. 부인은 목욕재계하고 하늘에 빌고 손가락을 잘라 숨이 끊어지는 남편의 입으로 피를 홀려 넣어 3일간 목숨을 연명하게 하였다. 그러다가 결국 남편이 세상을 뜨고 말자 부인은 물 한 모금도 입에 넣지 않고 남편을 따라 죽고자 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늙은 시어머니가 계시고 어린 자식이 무릎에서 울고 있으니 어찌 이런 처지에 남편과 같이 죽는 것만이 도리겠는가 마음을 고쳐먹고 늙은 시어머니와 자식에 더욱 정성을 쏟았다. 남편의 3년상을 마친 뒤에도 휜 옷과 횐 띠를 두르고 지냈으며 부지런히 일하여 재산을 불리어 나가니 집안이 크게 번창하였다.
 유림들이 칭찬하고 비석을 세웠는데 이 사실은 해동 삼강실록( )에 실리게 되었다. 

4) 옥범좌수
 조선조 중엽 거제 지역은 일본과 가까운 국경지대의 변방이라 하여 관직을 주지 않고 주로 서울 관료들의 유배지로 이용되어 왔다. 이 서러움을 갚고 싶은 옥범좌수는 한 푼 없이 서울 유람을 결심했다. 다른 사람들이 범좌수를 볼 때면 두 눈에 호랑이가 보이고, 범좌수가 논두렁에서 논에 물을 대면서 잠을 자면 두 마리의 호랑이가 양쪽에 앉아 지켜 주었으니 옆 논의 농부는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하루는 유람을 떠나기로 하고 부산포로 건너가 경주로 올라가니 경주 최진사가 왕에게 바쳐야 하는 옥돌안경의 한 개를 마무리하다 복판이 깨어졌다고 걱정이 태산이었다. 
 이 때 범좌수는 그 깨어진 안경을 다시 만들 시일이 없으니 창호지와 비단으로 스물 네 반 싸서 전대로 만들어 주면 차고 가서 왕에게 바치겠습니다.하고 자청하여 노자와 대접을 받았다.
 달성의 낙동강 나룻배로 건너면서 배 삯을 주지 않자 달성 서씨 청년들이 개입하여 싸우다가 밀어서 넘어졌다. 그러나 옥돌이 깨어져 와싹했다.고 외쳐댔다. 그래서 서씨들은 사죄하고 노자를 주면서 후한 대접을 해 보내었다.
 서울에 당도한 범좌수는 아직 진상할 날짜가 남아 있어 남대문 옆의 윤대감 집을 찾아가 대문에 들어가니 문지기가 밀어내어 또다시 넘어지면서 와싹했다.고 외쳤다. 윤대감은 사죄하고 노자를 주면서 후히 대접을 하였다.
 경복궁으로 용감하게 들어가니 왕궁의 문지기가 촌 노인이라고 거칠게 밀쳐내었다.
이 바람에 또 넘어졌고 역시 와싹했다.고 외쳤다. 그리고 왕에게 절차를 몰라 무례를 범하였다고 용서를 빌었다. 왕은 깨어진 안경을 가져왔으니 벼슬은 줄 수 없으니 돌아가라고 하였다. 서울에서 거제로 돌아오면서 윤대감, 달성 서씨, 경주 최진사를 찾아 많은 노자를 얻고 대접받고 하였다.
 이 옥범좌수는 뒤에 향리의 서원 창건에 공헌하였다.

5) 잉어샘(청어샘)
 소재지 : 달성공원()
 달성공원은 오래 전부터 이 지방의 토착 호족인 달성 서씨의 문중 땅이었다.
 달성공원자리는 한 씨족의 집터로 다른 것은 좋으나 먹을 물이 부족한 것이 흠이었다. 성안 이곳저곳을 파보았으나 물은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곤란을 당하던 중 주인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자기는 성을 지키는 신령인데 성안 어느 곳을 파면 식구들이 먹기에 충분한 물이 나올 것이라고 일러주고 사라졌다.
 이튿날 날이 밝자 사람들을 모아 간밤 꿈에 노인이 일러준 곳을 팠더니 과연 이가 시리도록 찬물이 울컥울컥 솟아 나왔다.  이렇게 발견한 샘은 물이 찰 뿐 아니라 물맛까지 아주 좋아 사람들은 신령이 가리켜 줘 찾은 샘이라 하여 영천()이라 불렀다.
 서씨 일가는 이 샘으로 아무 불편 없이 살았는데 얼마 뒤 조정에서 높은 벼슬아치가  이곳에 들렸을 때 사람들이 영천의 내력을 얘기하니 신기하게 여겨 벼슬아치가 물맛을 보고 싶으니 한 바가지 퍼오도록 부탁했다.
 사람들이 달려가 커다란 두레박으로 물을 길러 올리는데 두레박 속엔 커다란 잉어  한 마리가 퍼덕이며 담겨 올라온다. 버릴까 생각했으나 평소에 없던 일이라 이상하게  생각한 사람은 손님에게 그대로 가져가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그 잉어는 음식을 만들게 하고 물맛을 보더니 과연 다른 곳에서 맛볼 수 없는 신기한 맛이라 극구 칭찬했다.
 손님은 그 잉어로 만든 요리를 먹고 떠났는데 그 뒤부터 이곳에 귀한 손님이 올 때마다 그 수효만큼 잉어가 두레박에 담겨 나와 그때부터 이 샘을 잉어샘이라고 고쳐 불렀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잉어샘은 사라져 그 자리가 어딘지 알 수가 없다.
 달성공원은 예대로 남아 대구시민의 휴식처로 시민의 사랑을 받고 있지만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잉어샘은 그 자리가 어딘지 알 수 없는 것이 못내 아쉬운 일이다.

6) 미꾸라지 샘
 소재지 : 중구 달성동 294번지
 달성공원입구의 북쪽 현재 복개공사를 하여 도로가 된 자리에는 있었다는 이 미꾸라지 샘에는 효성이 지극한 어느 달성 서씨 일가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 서씨의 집에는 외아들이 앞을 못 보는 부친을 모시고 살고 있었다. 이 외아들은 부친의 병을 고치기 위해 온갖 약은 다 쓰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지극한 정성으로 간호하였다.
 그리던 어느 날 찾아 온 스님에게 자신의 애가 타는 심정을 이야기하자 스님은 미꾸라지를 잡아 고아 드리면 났는다고 일러주었다. 그 말을 듣고 미꾸라지를 찾아 다녔으나 때가 엄동설한인지라 미꾸라지를 구하기란 몹시 어려웠다. 하루는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그만 쓰러져 정신을 잃었는데 비몽사몽간 한 노인이 나타나 "주위를 살펴보아라."하고 일러주었다.  얼른 잠에서 깨어나 사방을 둘러보니 전에는 보이지 않던 웅덩이에 몇 마리의 미꾸라지가 헤엄을 치고 있었다.
 너무나 반가운 나머지 그 웅덩이를 보고 수십 번을 절을 한 후 미꾸라지를 잡기 시작하였는데 처음에는 몇 마리밖에 보이지 않던 미꾸라지가 잡으련 잡을수록 솟아오르는 샘물처럼 나왔다. 이 미꾸라지를 정성껏 고아 부친께 드렸더니 병이 씻은듯이 나았는데 그곳에 다시 가 보았으나 미꾸라지는 없고 샘만 남아 있었다. 이 후로는 이 샘을 "미꾸라지 샘"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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