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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신데렐라 - 신빈김씨(愼嬪金氏)
* 조선의 신데렐라
노비출신이면서도 세종의 총애를 입어 후궁으로서 최고의 위치인 빈의 자리까지 오르고 정비 소헌왕후와도 사이좋게 지내며 일생을 행복하게 보냈다.
조선의 신데렐라 - 신빈 김씨
조선시대 걸출한 왕 중에서도 대표적인 왕으로 세종대왕이 있다. 노비출신으로서 세종대왕의 사랑을 받으며 8명이나 되는 자녀를 두고, 후궁 중에서 최고의 자리인 빈(嬪)에까지 올라가 행복하게 살았던 신빈 김씨는 조선판 신데렐라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겠다. 신빈 김씨는 내자시(內資寺) 소속의 공노비였다. 태종의 셋째아들인 세종이 갑자기 22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게 되자 많은 궁녀들의 충원이 필요했고, 이때 신빈 김씨도 13살의 나이로 궁녀로 들어와 세종의 왕비 소헌왕후 심씨의 지밀나인이 되었다. 세종의 즉위 후 4년간은 태종이 왕권을 장악하고 어린 세종이 외척에게 휘둘릴 것을 염려하여 외척들을 숙청하였고 이 과정에서 태종의 처가인 여흥 민씨 가문과 세종의 처가인 청송 심씨 가문이 거의 멸문되다시피 하였다. 그러나 세종은 소헌왕후 심씨를 매우 사랑하여 소헌왕후의 폐위를 막았고, 심씨와 사이에 대군을 7명이나 둘 정도로 의가 좋았다.
한편 세종은 소헌왕후의 시녀로 있던 신빈 김씨를 총애하게 되어 세종 9년(1427) 8월에 신빈 김씨 사이에 첫 아이가 태어났고 이후 12년간 세종과 신빈 김씨 사이에 아들 6명과 딸 2명을 두었다.
~ 신빈 김씨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e조선궁중여성), 2004., 한국콘텐츠진흥원)
신빈김씨(愼嬪金氏)
졸년1464(세조 10)
세종(世宗)의 후궁으로 부친은 김원(金元)이다.
소의(昭儀)는 본래 내자시(內資寺) 여종[婢]이었으나, 세종이 즉위하던 해 신빈김씨가 13세의 나이로 원경왕후에게 발탁이 되어 중궁전으로 보내지게 된다.
천성이 부드럽고 아름다워 양궁(兩宮)을 섬기는 데 오직 근신하였다.
1435년(세종 17) 후궁으로써 영해군 이장(李璋)을 낳는다. 이장은 후에 이름을 이당(李瑭)으로 바꾸었다. 후에 소의가 되었으며 1439년(세종 21) 1월 27일 소의김씨는 귀인이 된다.
세종이 죽자 신빈김씨(愼嬪金氏)는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다. 단종이 다시 환속하도록 하였으나 끝내 듣지 않았다.
신빈김씨는 6남 2녀를 낳았으니 계양군(桂陽君) 이증(李璔), 의창군(義昌君) 이강(李玒), 밀성군(密城君) 이침(李琛), 익현군(翼峴君) 이관(李璭), 영해군(寧海君) 이당(李瑭), 담양군(潭陽君) 이거(李璖)이며, 딸들은 모두 일찍 죽는다
1464년(세조 10) 9월 4일 신빈김씨가 사망하자 세조는 쌀‧콩 모두 70석(石)을 부의(賻儀)로 내려 주었다.
[참고문헌]
朝鮮王朝實錄
璿源系譜紀略
~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 신빈 김씨(愼嬪 金氏, 1406년 ~ 1464년 음력 9월 4일)는 조선의 제4대 왕 세종의 후궁이다.
생애
본관은 청주이며, 아버지는 김원이고 어머니는 삭녕 고씨이다[1]. 원래 내자시의 여종이었으나, 1418년(세종 즉위년) 13세의 나이로 원경왕후에게 발탁되어 소헌왕후의 궁인이 되었다.[2] 훗날 세종의 승은을 입고 후궁이 되었고, 1427년(세종 9년) 장남 계양군을 출산하였다. 그 후 정2품 소의를 거쳐 1439년(세종 21년) 종1품 귀인에 진봉되었다. 당시 세종이 도승지 김돈에게 "김씨의 출신이 천하지만 13세부터 궁중에 들어와 행실이 바르기에 빈이나 귀인으로 삼고자 하는데 어떠하냐" 고 묻자 김돈이 신개 등과 의논해 귀인으로 승격시켰다.[2] 이후 정1품 신빈(愼嬪)에 책봉되었다.
그녀는 천성이 부드럽고 매사에 조심스러워 소헌왕후에게도 사랑을 받았으며, 소헌왕후는 그녀에게 막내아들 영응대군의 유모 역할을 맡기기도 하였다.[2] 또한 그녀는 평소에 불교를 신봉했었는데, 세종이 죽고나서는 아예 여승이 되어 살았다. 1450년(문종 즉위년)에 사망한 막내아들 담양군을 위한 경문 인쇄 비용으로 조정에서 쌀 500석을 하사받았으며,[3] 1452년(단종 즉위년)에는 단종이 그녀의 아들 의창군의 청원에 의해 그녀에게 머리를 기르도록 명령하였지만 이를 거절하였다는 기록이 있다.[4]
1464년(세조 10년) 음력 9월 4일 59세를 일기로 죽었으며, 세조는 쌀, 콩등 모두 70석(石)을 부의로 내렸다. 그녀의 묘 《화성 남양리 신빈김씨 묘역》는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남양리에 있다. 묘 주위에는 세조 11년(1465)에 세운 묘갈(墓碣:무덤 앞에 별다른 장식없이 세우는 작은 비석)과 묘비, 불을 밝히기 위한 장명등(長明燈), 문인석 1쌍, 제물을 올리고 제사를 올리기 위한 상석(床石)이 있으며 묘 주위는 돌담으로 둘러 싸여 있다. 1994년 경기도의 기념물 제153호로 지정되었다.
가족 관계
아버지 : 김원(金元)
어머니 : 삭녕 고씨
남편 : 제4대 세종대왕(世宗大王, 1397년 ~ 1450년, 재위 1418년 ~ 1450년)
장남 : 계양군 증(桂陽君 璔, 1427년 ~ 1464년 8월 16일)
자부 : 정선군부인 청주 한씨(旌善郡夫人 淸州 韓氏[5], 1426년 4월 12일 ~ 1480년 7월 27일)
장손 : 영원군 예(寧原君 澧)
손자부 : 현부인 청송 심씨(縣夫人 靑松 沈氏) - 심선의 딸
양증손 : 도안부정(道安副正) - 셋째 손자인 부림군의 차남
차손 : 강양군 숙(江陽君 潚)[6]
손자 : 부림군 식(富林君 湜)
손자부 : 현부인 안동 김씨(縣夫人 安東 金氏)
증손 : 회안부정 식(淮安副正 軾)
증손 : 도안부정(道安副正)[7]
증손녀 : 전주 이씨(全州 李氏) - 김맹손(金孟孫)과 혼인
증손녀 : 전주 이씨(全州 李氏) - 채윤권(蔡胤權)과 혼인
증손녀 : 전주 이씨(全州 李氏) - 신상(申鏛)과 혼인
손녀 : 전주 이씨(全州 李氏) - 안계송(安繼宋)과 혼인
손녀 : 전주 이씨(全州 李氏) - 정경조(鄭敬祖)와 혼인
손녀 : 전주 이씨(全州 李氏) - 한금(韓嶔)과 혼인
자부(첩) : 미상
서장손 : 방산수 란(方山守 瀾)
서손녀 : 전주 이씨(全州 李氏) - 정종선(鄭從善)과 혼인
차남 : 의창군 공(義昌君 玒, 1428년 ~ 1460년 2월 27일)
자부 : 양원군부인 연안 김씨(梁源郡夫人 延安金氏, 1429년 ~ 1482년)
손자 : 사산군 호(蛇山君 灝)
자부 : 현부인 고성 이씨(縣夫人 固城 李氏)
증손 : 동성군 순(東城君 詢)
증손 : 화산군 해(花山君 諧)[8]
증손녀 : 전주 이씨(全州 李氏) - 윤구손(尹龜孫)과 혼인
증손녀 : 전주 이씨(全州 李氏) - 조수충(趙守忠)과 혼인
증손녀 : 전주 이씨(全州 李氏) - 조원효(趙元孝)과 혼인
증손녀 : 전주 이씨(全州 李氏) - 심광정(沈光庭)와 혼인
손녀 : 전주 이씨(全州 李氏) - 신우정(申禹鼎)과 혼인
손녀 : 전주 이씨(全州 李氏) - 신종호(申從濩)와 혼인
삼남 : 밀성군 침(密城君 琛, 1430년 ~ 1479년 1월 1일)
자부 : 풍덕군부인 여흥 민씨(豊德郡夫人 驪興閔氏)
손자 : 운산군 계(雲山君 誡)
손자부 : 현부인 현풍 곽씨(縣夫人 玄風 郭氏)
손자부 : 현부인 영일 정씨(縣夫人 迎日 鄭氏)
증손 : 철성군 갱(鐡城君 鏗)
증손 : 고성군 강(固城君 鋼)[9]
증손 : 광성부정 전(匡城副正 銓)
증손녀 : 전주 이씨(全州 李氏) - 윤탕로(尹湯老)와 혼인
손자 : 춘성군 당(春城君 譡)[10]
양증손 : 고성군 강(固城君 鋼)
손자 : 수안정 상(遂安正 言+賞)[11]
손자 : 석양정 남(石陽正 諵)
사남 : 익현군 연(翼峴君 璭, 1431년 ~ 1463년 5월 4일)
자부 : 김제군부인 평양 조씨(金堤郡夫人 平壤趙氏)
손자 : 괴산군 궤(槐山君 漬, ?~1467년 6월 10일)
손자부 : 현부인 한산 이씨(縣夫人 韓山 李氏)
양증손 : 화산군 해(花山君 諧)[12]
손녀 : 전주 이씨(全州 李氏) - 여종경(呂宗敬)과 혼인
오남 : 영해군 당(寧海君 瑭, 1435년 ~ 1477년)
자부 : 임천군부인 평산 신씨(林川郡夫人 平山 申氏)
손자 : 영춘군 인(永春君 仁)
손자부 : 현부인 진주 유씨(縣夫人 晉州 柳氏)
증손 : 완천군 희(完川君 禧)
증손 : 강녕부정 기(江寧副正 祺)
증손 : 순성부정 정(蓴城副正 禎)
증손 : 덕녕부정 위(德寧副正 褘)
증손녀 : 전주 이씨(全州 李氏) - 윤회충(尹懷忠)과 혼인
증손녀 : 전주 이씨(全州 李氏) - 윤개(尹漑)와 혼인
손자 : 길안도정 의(吉安都正 義)
손자부 : 신부인 여산 송씨(慎夫人 礪山 宋氏)
증손 : 시산부정 정숙(詩山副正 正叔)
증손녀 : 전주 이씨(全州 李氏) - 신준양(申遵羙)과 혼인
손자부 : 신부인 청주 한씨(慎夫人 淸州 韓氏, 한명회의 서녀)
증손 : 청화수 창숙(淸化守 昌叔)
증손 : 송계군 중숙(松溪君 仲叔)
증손 : 은계군 말숙(銀溪君 末叔)
증손 : 벽계도정 종숙(碧溪都正 終叔)
증손 : 옥계군 필숙(玉溪君 畢叔)
손자부(첩) : 미상
서증손녀 : 전주 이씨(全州 李氏) - 이삼(李蔘)과 혼인
서증손녀 : 전주 이씨(全州 李氏) - 이효원(李孝元)과 혼인
손녀 : 전주 이씨(全州 李氏) - 박승약(朴承爚)과 혼인
육남 : 담양군 거(潭陽君 璖) - 요절
정혼녀 : 의령 남씨(宜寧 南氏)[13]
양손자 : 강양군 숙(江陽君 潚)[14]
양손자부 : 현부인 양주 허씨(縣夫人 陽州 許氏)
양손자부(첩) : 미상
서증손 : 영평정 보(鈴平正 輔)
서증손 : 희안군 집(喜安君 輯)
서증손 : 예안정 헌(禮安正 軒)
양손자부(첩) : 미상
서증손 : 양평부수 홍(陽平副守 車+弘)
서증손 : 함창부수 함(咸昌副守 轞)
서증손녀 : 전주 이씨(全州 李氏) - 신귀정(辛貴貞)과 혼인
양손자부(첩) : 미상
서증손녀 : 전주 이씨(全州 李氏) - 정소종(鄭紹宗)과 혼인
서증손녀 : 전주 이씨(全州 李氏) - 김내문(金乃文)과 혼인
서증손녀 : 전주 이씨(全州 李氏) - 박승준(朴承俊)과 혼인
신빈 김씨가 등장한 작품
《대왕 세종》 (KBS, 2008, 배우:이정현)
참고 자료
《조선왕조실록》
《연려실기술》 제3권
신빈 김씨 - 한국학중앙연구원
~ 출처 :위키백과
* 화성 남양리 신빈김씨 묘역 [ 華城南陽里愼嬪金氏墓域 ]
화성 남양리 신빈김씨 묘역
경기도 화성시 남양동에 있는 조선 세종 후궁 신빈김씨의 묘. 경기도 기념물 제153호. 묘역에는 봉분, 상석, 장명등, 문인석 등이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 묘갈이 있다.
소재지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남양리 산131-7
소유자
전주이씨육군파대종회
관리자
전주이씨육군파대종회
문화재 지정번호
경기도 기념물 제153호
문화재 지정일
1994년 12월 24일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에 있는 조선전기 제4대 세종의 후궁 신빈김씨 관련 묘역. 시도기념물.
내용
경기도 기념물 제153호. 신빈김씨(1404∼1464)는 세종의 후궁이 되어 계양군(桂陽君)·의창군(義昌君)·밀양군(密陽君)·익현군(翼峴君)·영해군(寧海君)·담양군(潭陽君) 등 6명의 왕자를 낳았다.
묘역에는 봉분·상석(床石)·장명등(長明燈)·문인석(文人石) 등이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 묘갈(墓碣)이 있다. 봉분의 높이는 220㎝이고, 둘레는 25m이다. 묘 주위에는 높이 230㎝의 묘비, 높이 200㎝의 4각 장명등, 250×55×50㎝의 문인석 2개, 가로 100㎝와 세로 180㎝의 상석 등이 있다.
묘갈은 전체 높이가 230㎝이나 비신은 157×57×25㎝으로 종 모양의 비갓이다. 문인석은 섬세하게 장식하여 여성적인 부드러운 모습을 보인다. 곡항은 높이 1.5m에 50m로 묘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대동금석서』에 의하면, 이는 성하원년(聖下元年)에 세운 것으로, 김수온(金守溫)이 찬(撰)하고 안혜(安惠)가 서(書)했다고 전한다.
참고문헌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
『화성군지(華城郡誌)』
『경기도인물지(京畿道人物誌)』
『화성군의 역사와 민속』(경희대학교박물관, 1989)
~ 화성 남양리 신빈김씨 묘역 [華城南陽里愼嬪金氏墓域]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이기환의 Hi-story]관청 노비에서 일약 세종대왕의 후궁으로…조선 최고의 신데렐라
경향신문 선임 기자 lkh@kyunghyang.com
입력 : 2020.10.05 06:30 수정 : 2020.10.05 08:54
역사는 히스토리, 히스토리는 이야기입니다. 역사를 이야기로 풀어보는 코너, 이기환의 ‘하이-스토리’ 시간입니다.
세종을 흔히 만고의 성군이라고 합니다. 훈민정음 창제를 비롯한 필설로 다할 수 없는 업적과 함께 세종의 일거수일투족도 인구에 회자되었죠. 그렇다면 세종을 둘러싼 여인들은 어떨까요. 한번 알아볼까요?
세종은 2살 연상의 소헌왕후 심씨(1395~1446)를 비롯해서 모두 여섯분의 부인을 두었습니다. 정부인인 소헌왕후와의 사이에는 8남 2녀를 두었습니다. 그리고 영빈 강씨(1남)·신빈 김씨(6남)·혜빈 양씨(3남)·숙원 이씨(1녀)와 궁녀인 상침 송씨(1녀) 등 다섯분의 부인들이 더 있었고, 그 분들과의 사이에 10남2녀를 더 두셨습니다. 슬하에 총 18남4녀를 두신 거죠.
경기 화성 남양동에 있는 신빈 김씨의 묘. 경기도 기념물 제153호로 지정되어 있다.|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여종에서 정1품 빈(신빈)으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보죠. 나중에 말씀드리겠지만 국모(중전)의 자리에 오른 대가로 친정이 멸문지경에 빠진 소헌왕후 심씨 보다는 후궁들의 신세가 오히려 행복했던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듭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행복한 세종의 여인은 신빈 김씨(?~1464)가 아닐까요
신빈 김씨는 세종의 자식을 8명이나 낳은 분입니다. 그중 두 명의 딸은 일찍 죽었지만 남은 6명은 모두 왕자였습니다. 계양군(1427~1464), 의창군(1428~1460), 밀성군(1430~1470), 익현군(1431~1463), 영해군(1435~1477), 담양군(1439~1450) 등입니다. 자식들의 출생연도를 봐서 짐작하겠지만 신빈 김씨는 1427년부터 1439년까지 12년만에 아들만 여섯분 두었으니 세종의 사랑이 지극했음을 알 수 있죠.
세종대왕과 그 부인들. 정부인인 소헌왕후와 8남2녀를 낳았고, 5명의 후궁들과 10남 2녀를 두었다. 그중 내자시 여종 출신인 신빈 김씨와 6남을 두었다.|출처:두피디아
세종대왕과 그 부인들. 정부인인 소헌왕후와 8남2녀를 낳았고, 5명의 후궁들과 10남 2녀를 두었다. 그중 내자시 여종 출신인 신빈 김씨와 6남을 두었다.|출처:두피디아
그런데 뭐 요즘 말로 치면 신빈 김씨는 그야말로 신데렐라라 할 수 있어요.
왜냐면 신빈 김씨의 신분이 원래 내자시의 여종이었기 때문입니다. 내자시는 대궐에서 쓰는 물품을 관장하는 관청이죠. 천민에서 일약 내명부 정1품인 후궁(빈)으로 출세했으니까 신데렐라 소리를 들어도 돼죠.
신빈 김씨는 바로 그 관청의 종이었는데, 13세의 나이로 세종의 어머니(원경왕후 민씨·1365~1420)에 의해 중궁전으로 발탁됩니다.
신빈 김씨의 출세기는 <세종실록> 1439년 1월27일자에 자세하게 나와있는데요. 세종의 육성입니다. 세종은 “소의(정2품) 김씨를 귀인(종1품)으로 올리고 싶다”고 도승지 김돈(1385~1440)에게 의견을 구합니다.
“김씨의 천성이 부드럽고 아름다워…중궁(소헌왕후)이 막내아들(영응대군)을 기르게 했다. 성품이 근신하지 않았다면 중궁이 하필 소생 아들을 기르게 했겠느냐.”
남편 세종과 함께 묻힌 소헌왕후(경기 여주 영릉). 원래 왕후가 될 수 없었지만 지아비인 충녕대군이 임금이 되면서 중전으로 책봉됐다. 그러나 외척의 발호를 염려한 상왕 태종에 의해 친정 아버지(심온)가 죽임을 당하는 등 친정이 멸문지경에 빠졌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남편 세종과 함께 묻힌 소헌왕후(경기 여주 영릉). 원래 왕후가 될 수 없었지만 지아비인 충녕대군이 임금이 되면서 중전으로 책봉됐다. 그러나 외척의 발호를 염려한 상왕 태종에 의해 친정 아버지(심온)가 죽임을 당하는 등 친정이 멸문지경에 빠졌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소헌왕후가 막내아들(영응대군)의 교육을 맡길만큼 신빈 김씨의 심성이 고왔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소헌왕후가 천민 출신인 신빈 김씨한테 아들 교육을 시켰으니까요. 그리고 세종은 김씨를 칭찬하면서 “예부터 궁녀의 세계(世系·조상으로부터의 계보)엔 본래 귀천이 없었다”면서 “노래하던 아이를 궁중에 들인 자도 있고, 일찍이 남을 섬기다가 궁중에 들어온 자도 있었다”고 길게 부연설명합니다.
그러면서 “김씨의 계보는 비록 천하지만 겨우 13세에 궁중에 들어왔으니 이후에 쌓은 부덕(婦德)은 바른 것”이라면서 “과인이 김씨를 빈(嬪)이나 귀인으로 승격시키고자 한다”고 의견을 물었습니다.
이때 도승지 김돈은 “셋째 부인 이하는 계보의 귀천을 따지지 않았다”면서 “김씨를 귀인으로 삼아도 하등 문제될 게 없다”고 동의합니다. 훗날 김씨는 내명부 정1품인 신빈으로 승격합니다.
세종이 승하하고 문종이 즉위했을 때 신빈 김씨는 ‘선왕의 후궁들은 머리를 깎는다’는 풍습에 따라 비구니가 되었어요. 지금 같으면 말도 안되는 일이죠. 선왕의 부인들이 대궐에 남아있으면 헷갈린다는 거에요.
지금 임금이 선왕, 즉 아버지의 부인에게 마음을 두게되면 그것은 패륜이 될 수 있다는 거죠. 그래서 머리를 깎게 했답니다. 그러나 단종이 즉위한 1452년에 특별히 “신빈 김씨만은 머리를 길러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집니다. 그러나 신빈 김씨는 “환속해도 좋다”는 조정의 결정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만큼 절제하고 조신하는 성격이었다는 겁니다. 그 덕분에 훗날 왕위에 오른 세조는 1458년(세조 4년) 신빈 김씨가 목욕을 하러 강원도를 방문하자 “강원도 관찰사는 군자미 5석을 신빈에게 주라”는 명까지 내립니다. 그리고 신빈 김씨가 세상을 떠나자(1464년·세조 10년) 쌀과 콩 70석을 부의(賻儀)로 하사합니다.
신빈 김씨가 태어난 해가 언제인지 기록되어 있지는 않아요. 그러나 세종의 어머니인 원경왕후(1365~1420)는 태종의 재위(1400~1418) 중에 13살이던 내자시 여종을 중궁전으로 불렀다는 거니까 1400년대 초반에 태어났겠죠. 신빈 김씨가 1464년 세상을 떠났으니까 당대로서는 장수한 편인 60대 초반까지 사셨던 겁니다.
■친정이 멸문지경에 빠진 본부인
물론 여섯분의 부인 중 최고는 소헌왕후겠죠. 남편(세종)과 낳은 문종·세조·안평대군 등 아들 8명은 물론이고, 그 어렵다는 역법과 산학에 능했으며, 일설에는 훈민정음 창제에도 도움을 줬다는 정의공주까지 낳은 분이죠. 세종의 유전자 또한 뛰어났지만 당연히 어머니인 소헌왕후의 DNA 또한 우월했으니까 똘똘한 자식들을 낳았겠죠. 그러나 소현왕후의 삶이 행복했을까요. 전 ‘아니다’에 한 표 던질게요.
돌이켜보면 소헌왕후는 참 기구한 신세였습니다. 심씨는 원래 임금 자리와는 상관없는 태종의 셋째아들 충녕대군과 혼인했잔하요. 그러나 창졸간에 남편이 세자위를 받는 바람에 심씨 역시 세자빈이 되었습니다. 남편의 즉위(1418년)와 함께 왕후의 자리에 올랐지만 행복한 순간은 잠깐이었어요.
외척의 발호를 지나치게 염려한 태종(재위 1400~1418)이 소헌왕후 심씨의 아버지인 심온(1375~1418)에게 역모죄를 뒤집어 씌웠습니다. 심온은 자결을 강요받았습니다.(1418년)
왕위를 물려받은 세종이었지만 상왕에 올라 군권을 휘두르던 부왕(태종)의 위세에 눌려 어쩔 수 없었습니다. 처가가 멸문지경에 몰렸지만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역적의 딸’이라면서 당장 중전의 자리에서 쫓아내야 한다는 상소가 밧발쳤습니다. 간신히 국모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소헌왕후는 천갈래만갈래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삭이고 국모의 체통을 지켜야 했습니다.
세종이 죽은 부인(소헌왕후)를 위해 지은 <월인천강지곡>(국보 제320호). 석가모니를 찬양하는 노래를 지으면서 “(부인은)~눈에 보이는듯 생각하소서. 귀에 들리는 듯 생각하소서”라는 부인을 위한 비밀 사랑코드를 넣었다는 해석이 있다.|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그러면서도 소헌왕후는 내명부(궁궐 여성의 조직체계)의 귀감이 되었어요. 성격이 워낙 부드럽고 온화하지만 기강이 엄정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후덕한 소헌왕후의 내조 덕분에 남편인 세종이 최고의 성군이 될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남편 세종이 훗날 군주의 본보기가 된 것처럼 이상적인 왕비의 ‘롤모델’이 된겁니다.
소헌왕후는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1446년(세종 28년) 승하했습니다. 그런데 <세종실록> 1448년 8월4일자를 보면 이런 기사가 나옵니다.
“임금이 만년에 지병이 겹쳐 고생한데다 두 아들(광평대군·평원대군)이 잇달아 죽고 여기에 소헌왕후(부인)마저 승하하여 임금의 마음이 기댈 곳이 없었다. 이에…궁궐 옆에 불당을 두었다.”(<세종실록>)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대궐 옆에 불당을 세운다는 것은 엄청난 반발을 초래하는 거죠. 역시 신료들의 반발이 거셌습니다. 그러나 세종은 평생 부인의 가문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나봐요. 황희 정승까지 나서서 “절대 안된다”고 반대했는데, “내가 임금 자리에서 물러나면 되는 거 아니냐”는 양위 소동까지 벌이면서 끝까지 관철시킵니다. 세종은 둘째아들(수양대군·세조)을 시켜 석가모니의 일대기(<석보상절>)를 편찬하게 하고는 이를 한글로 번역하게 했습니다. 불교신자인 소헌왕후를 추모하자는 겁니다. 그렇게 편찬한 <석보상절>을 보고 세종은 583곡에 이르는 노래를 지었는데, 이것이 <월인천강지곡>입니다.
돌아가신 소헌왕후로서는 하늘에서 남편의 가없는 사랑에 위안을 삼았을 겁니다. 소헌왕후는 비록 현실의 행복을 누리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똘똘한 자식들을 낳았으니 후손들에게는 그나마 다행이겠죠.
지금 소헌왕후의 삶을 반추해보면서 한편으로는 여종의 신분으로 ‘해동의 성군’인 세종의 사랑을 받아 정 1품 후궁이 된 여인(신빈 김씨)의 존재를 알릴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 동화처럼 왕자님을 만나 행복하게 오래오래 산 여인 (신빈김씨)
1406년에 한 비천한 관노가 될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아버지 김원(金元)이란 사람이었고 ㆍ어머니 삭녕 고씨의 딸이 라고만 알려져 있다.
이 여자아이는 그녀의 천한 신분을 따라 내자시(궁궐에서 쓰는 물건을 관장하는 관청)의 관노비가 되었는데 세종 즉위년(1418)에 13살 나이로 원경왕후(태종 이방원의 왕비)에게 발탁되어 세종의 아내인 소헌왕후의 궁녀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국왕인 세종에게 승은을 입어 세종 9년(1427)에 21살 때, 세종대왕의 서자인 계양군(桂陽君)을 낳았다고 한다.
세종에게는 후궁이 여럿 있었으나 세종은 이 관노 출신의 신빈 김씨를 가장 총애 했다고 한다. 신빈 김씨는 무려 6남 2녀 를 낳았다.
세종의 다른 후궁이 보통 1명~3명 정도 낳았으니 세종의 후궁 중에서는 가장 세종의 사랑을 받은 셈이다.
1. 조선의 신데렐라가 된 신빈 김씨
계양군을 출산한 후 정2품 소의를 거쳐, 1439년(세종 21년)에는 종1품 귀인이 되었다.당시 세종은 도승지 김돈에게 ‘비록 김씨의 출신이 천하지만, 13세부터 궁중에 들어와 행실이 바르기에 빈이나 귀인으로 삼고자 하는데 어떠하냐’ 고 묻자 도승지 김돈은 신개 등 여러 대신과 의논하여 관노출신인 그녀를 귀인으로 승격 시켰고 결국 후궁 중 가장 높은 정1품 빈인 신빈(愼嬪)에 까지 책봉되었다. 관노 에서 정1품 까지 엄청난 신분상승을 한 것 이다.
세종의 중전인 소헌왕후는 신빈 김씨를 친누이 처럼 대했다. 당연히 그녀와 사이가 좋지않을 것 같은 중전 소헌왕후 조차도 신빈 김씨는 ‘천성이 부드럽고 매사에 조심스럽다’ 며 칭찬을 하며ㆍ그녀를 이뻐했다고 한다. 소헌왕후는 그녀(신빈 김씨)를 진심으로 좋아했기에ㆍ가장 사랑했던 막내아들 영응대군의 유모로 맡길 정도 였다.
세종의 각별한 사랑은 받았던 신빈 김씨. 그렇게 신빈 김씨는 왕실에서는 흔치 않게 분란(투기)를 만들어 내지 않았기에, 그녀의 존재는 잘 안 알려진 듯 하다.
조선의 후궁 중 '무수리' 출신으로 '숙빈이 된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 조차도 천하다고 했는데 이렇게 관노비 출신 임에도 ‘정1품 빈’ 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 세종이 죽은 뒤에도 별탈이 없었던 신빈 김씨
그녀는 불교를 신봉 했었기에, 세종이 죽고나서는 아예 머리를 자르고 여승이 되어 살았다.
그런 그녀를 조정에서도 인정하여 1450년(문종 1년)에 그녀의 막내아들인 담양군이 요절하자 쌀 500석을 하사한다. 1452년(단종 1년)에는 단종이 그녀에게 머리를 기르고 환속하라고 명령하였지만 이를 거절한다. 즉 신빈 김씨는 ‘환속해도 좋다’ 는 조정의 결정을 따르지 않은 것 이다.
그에 비해 세종의 또 다른 후궁인 '혜빈 양씨'는 바로 환속한다. 그리고 혜빈 양씨는 궁궐에 들어가서, 단종의 후견인을 자처하다가 수양대군과의 권력투쟁에서 밀려서, 수양대군(훗날 세조)에 의해 교살(목졸라 죽임을 당함) 당하고 친정도 몰락한다. 혜빈 양씨가 내명부를 장악할 것을 염려한 수양대군은, 문종의 후궁인 귀인 홍씨의 작위를 숙빈으로 높인 후 혜빈 양씨 대신 내명부를 맡긴다.이 일로 인해 혜빈 양씨는 수양대군을 심하게 원망 하게 되었다. 하지만 수양대군이 결국 세조가 되 자혜빈 양씨는 금성대군 등과 함께 전횡을 휘둘렀다는 이유로 청풍으로 유배를 간 후, 비참하게 죽는다.
3. 세종의 여인 중 가장 행복했던 신빈 김씨 & 중전 소헌왕후의 고난
세종의 왕후인 소헌왕후는 지혜롭고 완벽한 성군 세종의 반려자 였지만ㆍ세종의 부친 태종은 외척의 발호를 막는다며 상왕이었던 태종이 소헌왕후의 친정 아버지인 심온을 별다른 죄 없이 죽여서 그녀의 가문은 멸문을 당하게 된다. 심지어 소헌왕후의 모친 역시 관노비가 되었으니 그녀는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그녀가 왕후가 되면서, 친정을 지옥에 떨어 뜨린다.
세종 역시 부친인 상왕 태종의 권세에 눌려 아무런 도움을 소헌왕후에게 줄 수 없었고 당연히 이는 소헌왕후 에게 일평생을 괴롭히는 엄청난 한(恨)을 준 셈 이다.
‘역적의 딸’이라면서 당장 중전의 자리에서 쫓아내야 한다는 상소가 밧발쳤지만 세종이 그녀를 사랑했고 시아버지 태종 역시 외척을 제거했기에, 소헌왕후는 국모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소헌왕후는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삭이며 중전의 자리에 있을 수 밖에는 없었다. 물론 남편 세종과 금실도 좋았고 함께 묻힌 여주의 영릉에서 영겁을 같이 하게 되었지만, 소헌왕후의 인생이 마냥 행복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듯 하다. 세종의 장모, 즉 소헌왕후의 모친은 관노비가 된다.
그에 비하면 앞서 언급한 대로 신빈 김씨는 소헌왕후 와도 사이가 좋았고, 세종이 승하한 후 혜빈 양씨 와 다른 선택을 해서 계속해서 평안한 삶을 살았다.
신빈 김씨는 세종의 아이도 혜빈 보다 더 많이 낳았고, 더 많은 총애를 받았지만 일체 정사에 개입을 하지 않았고 거기다가 그녀의 아들인 계양군 등은 수양대군과 가까웠으므로, 오히려 계유정난의 정난공신으로 책봉 받아 일평생을 안락하게 살다 떠난 여인이었다.
4.행복하고, 평탄한 삶을 살다간 신빈김씨 !
신빈 김씨는 성품이 유순한 덕에 세종 이후 수양대군이 일으킨 피바람도 피했고 오히려 수양대군이 국왕(세조)이 된 후 에도, 좋은 대우를 받았었다.
세종은 살아생전에 신빈 김씨를 칭찬 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예부터 궁녀의 세계(世系·조상으로부터의 계보)엔 본래 귀천이 없었다.’ 고 말하면서 신빈 김씨가 관노 출신이었던 것이 후궁으로서 아무런 흠결이 될 수 없음을 밝혀 그녀의 권위를 세워주고 자신의 애정을 보여주었다,
세종 이후 국왕이 된 수양대군(세조)도, 신빈 김씨 만큼은 엄청나게 위해주었고 1458년(세조 4년)에 신빈 김씨가 목욕을 하기위해 강원도를 방문하자 강원도 관찰사를 통해 쌀 5석을 신빈에게 주라 는 명까지 내린다. 진정한 조선판 신데렐라 신빈김씨.
그렇게 신빈 김씨 는 별 탈 없이 60대 초반 까지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녀가 죽자 세조는 쌀과 콩 70석을 부의(賻儀)로 내렸다.(세조 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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