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8일 [연중 제18간 목요일]
마태오 16,13-23
내가 살 수 있는 자격은 내가 줄 수 있는 자격과 같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십니다.
그 이전에 당신이 누구인지 알아보게 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어도 허사입니다.
그러면 하늘 나라의 열쇠는 무엇일까요? 하늘 나라에서 살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만이 줄 수 있는 무엇입니다.
그리고 그 열쇠를 받게 되면 그 사람도 하늘 나라에 살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도 자신을 알아보는 이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늘 나라의 열쇠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먼저 인간 나라의 열쇠가 무엇인지부터 알아보아야겠습니다.
인간답게 인간들 가운데 살기 위해서는 그 인간답게 사는 이에게 인간성의 열쇠를 받아야 합니다.
영화 ‘더 로드’는 아버지와 그의 어린 아들이 원인 모를 화재로 황량하게 된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과정을 그렸습니다.
화마는 온 세상에 먹을 것을 없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세상에 자녀를 낳는 것을 엄마는 거부합니다.
그러나 아이는 태어납니다.
엄마는 어차피 약탈자들에게 잡아먹힐 것 같은 두려움에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반면 아버지는 아들에게 약탈자들의 모습이 되지 않기 위해 인간성을 잃지 않게 합니다.
이야기의 핵심은 아들에게 희망과 선함의 '불꽃'을 보존하려는 아버지의 끊임없는 노력입니다.
그들을 둘러싼 압도적인 황폐함과 잔혹함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선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의 중요성과 그들이 "불을 옮기는 것"이라고 부르는 도덕적 나침반을 가르치려고 노력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보호하고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 자신의 건강을 희생합니다.
아버지는 죽어갑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보여준 희생을 통해 자신이 가진 것을 자신보다 더 못한 이에게 나누어주는 사랑을 베풉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그런 모습을 보며 불안해하면서도 만족해합니다.
결국 아버지는 죽고 아들은 혼자 남았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그들을 쫓아오던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쭉 지켜봤다며 자신들과 함께 살자고 합니다.
그들은 이런 황량함 가운데서도 인간성을 잃지 않고 사는 유일한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곳은 안전하고 먹을 것을 나누는 천국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었던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영화나 사례는 너무나 많고 가장 좋은 사례는 우리 자신들입니다.
우리들은 자녀를 낳을 때 자녀가 인간처럼 살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 믿음을 살과 피를 내어주며 가르칩니다.
영화 ‘타고난 재능: 벤 카슨 이야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맨날 꼴지만 하는 벤 카슨에게 글도 배우지 못한 어머니는 실망하지 말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존재임을 믿게 하였습니다.
벤 카슨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머리가 붙은 아기를 분리 수술을 하여 둘 다 살려낸 천재입니다.
이는 어머니의 가르침이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이 주신 그 두뇌를 사용해야 한다.“
"읽을 수 있으면 알고 싶은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다. 읽을 수 있는 사람에게는 세상의 문이 열려 있다."
"최선을 다하고 나머지는 하느님께 맡겨라.“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을 보아야 한다."
"변명하지 말고 일단 하라."
"하느님의 도움으로 너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베니, 너는 다른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너만이 그것을 더 잘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명은 하느님 자녀를 낳음입니다.
인간의 자녀를 낳을 수 있으면 인간 나라에 살 자격이 주어집니다.
하느님 나라에 살 자격은 하늘 나라의 열쇠에
있습니다.
이 사명이 나에게 초월적 능력을 주고 자존감도 준다.
자존감의 수준이 행복의 수준이고 부모는 자녀들 안에서 안식을 누립니다.
그리고 그 부모가 있는 곳에 살 자격을 얻게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으로서 신성을 우리에게 주셨다면, 우리도 다른 이도 하느님처럼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전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늘 나라에 들어갈 열쇠를 지닌 존재임을 증명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8월8일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복음: 마태 16,13-23
총애받던 수제자의 모습에서 초라한 사탄 한 마리로 급전락한 이유!
주님께서는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당신의 백성과 교회를 위해 당신의 자비와 권능을 드러내는 표시를 보여주십니다.
그 가장 대표적인 예가 그 시기에 딱 맞는 성인들의 출현입니다.
교회가 갈팡질팡하며 총체적 난국 속에 허덕이던 중세 시기, 주님께서는 방황하던 당신의 양들을 위해 착한 목자이자 명설교가 도미니코 사제를 선물로 보내주셨습니다.
그는 때로 논리정연하면서도 감동적인 설교, 때로 벼락이요 철퇴 같은 강렬한 말씀 선포로 이단들을 물리쳤고, 교우들을 구원과 생명의 길로 인도하였습니다.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이 시대는 또 다른 도미니코 사제와 같은 명설교가를 요청합니다.
사실 우리 사제들은 다들 모두 명강론을 하고 싶어합니다.
감동을 주고, 눈물을 흘리게 하고, 그 자리에서 회개를 하게 만드는 그런 강론을 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그게 마음 같지 않습니다.
이 시대는 넘치는 자료들의 홍수 시대입니다.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유명 강사들의 명강의가 내 손안에서 펼쳐집니다.
고리타분한 강론 외에도 얼마나 많은 즐길 꺼리들로 넘쳐나는지 모릅니다.
뭔가 말 좀 해보려 시도를 하면, 즉시 눈을 감아버리고 딴전을 피우는 사람들 앞에서 강론을 계속한다는 것, 참 난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2차바티칸 공의회 정신에 따르면 강론은 우리 사제가 교우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 중에 하나입니다.
공의회는 강조합니다.
좋은 강론이 되기 위해서는 성경에서 출발해서 성경을 주제로, 성경으로 마무리되어야 합니다.
그러다보면 청중들 지루해 죽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처지를 고려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살아가는 현실에 대한 파악이 중요합니다.
그들이 매일 겪는 기쁨과 슬픔, 고통과 눈물과 동떨어진 강론은 백퍼센트 실패입니다.
너무나 강론하기 힘든 시대, 그러나 희망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많은 교우들이 사제들의 강론을 간절히 고대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강론을 준비하기 힘든 이 시대, 얼마나 많은 사제들이 강론에 진심인지 모릅니다.
힘겨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교우들에게 우리 사제들께서 시원한 청량 음료 같은 강론으로
그들을 위로하고 기쁨을 주고, 다시 살아갈 용기를 주는 그런 여름이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 참으로 재미있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주님으로부터 반석 소리를 들으며 사도단의 에이스로서 천국의 열쇠까지 건네받았던 베드로 사도였습니다.
그런데 단 1분도 지나지 않아 주님으로부터 총애받던 수제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흉측하고 초라한 사탄 한 마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순식간에 주님 나라의 충신에서 역적으로 둔갑한 것입니다.
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답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그가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성공과 영예, 박수갈채에만 몰두했지, 주님 나라에 입국하기 위한 희생과 헌신, 고통과 십자가 죽음을 철저히 외면했던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8주간 목요일 강론>
(2024. 8. 8. 목)(마태 16,13-23)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내게서 물러가라.”는 “내 뒤로 가라.”입니다.>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1-23)”
1) “내게서 물러가라.” 라는 말씀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내 뒤로 물러가라.”입니다.
이 말씀은, “제자의 본분을 지켜라.” 라는 뜻입니다.
<베드로 사도를 쫓아내신 말씀이 아닙니다.>
제자의 본분은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그대로 뒤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면 ‘반석’이 될 수 있지만, 앞에서 가로막거나 거치적거리면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사탄’이라고 부르신 것은, 그가 마귀 들렸다는 뜻도 아니고, 마귀의 유혹에 넘어갔다는 뜻도 아니고, 그의 행동이 사탄의 행동과 같다는 뜻입니다.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라는 말씀도 “앞에서 가로막지 말고 내 뒤로 가서 나를 따르기만 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인간적으로만 판단하지 말고,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믿음으로’ 따라라.” 라는 뜻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들은, 베드로 사도를 꾸짖으시는 말씀이긴 한데, 그를 사탄의 유혹에서 지켜 주기 위한 ‘사랑의 말씀’이기도 하고, 그가 흔들림 없는 ‘반석’이 되기를 바라는 심정을 나타내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2) 비슷한 장면이 최후의 만찬 때에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당신 손에
내주셨다는 것을, 또 당신이 하느님에게서 나왔다가 하느님께 돌아간다는 것을 아시고, 식탁에서 일어나시어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들어 허리에 두르셨다.
그리고 대야에 물을 부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허리에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 시작하셨다. 그렇게 하여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자 베드로가, ‘주님, 주님께서
제 발을 씻으시렵니까?’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는 일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지만 나중에는 깨닫게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래도 베드로가 예수님께 ‘제발은 절대로 씻지 못하십니다.’ 하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요한 13,3-8)”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도 같고, 그 일을 가로막으려고 했다는 점도 같습니다.
여기서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라는 말씀보다 더 엄한 꾸중입니다.
이 말씀은 “내가 하는 일을 막으면 너는 더 이상
내 제자가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베드로 사도뿐만 아니라 다른 사도들도 ‘예수님을 참으로 따르는 제자’가 되기까지 많은 과정들을, 즉 복잡하고 어렵고 힘든 고비들을 많이 넘겼습니다.
그런 과정들을 모두 극복하고 이겨냈기 때문에
위대한 사도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또는 어느 날 갑자기 위대한 사도들이 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3) 방금 전에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마태 16,17).” 라는 축복의 말씀을 들었고, 교회의 반석으로 임명받았고, 하늘나라의 열쇠도 받았던
베드로 사도인데(마태 16,18-19), 어떻게 금방 그렇게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라고 혼나는 상황이 되었을까?
누구에게나 그 상황은 인간적으로는(‘살과 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부르심과 응답의 관점에서 그 일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라고 신앙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께서 특별히 그를 선택하셔서 그에게 계시를 내려 주셨고, 베드로 사도가 그 계시를 믿었기 때문에 이루어진 일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설명에 근거를 둔 말입니다.)
자신에게 내려진 계시를 믿은 것은 곧 부르심에 응답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응답은 그 당시에는 ‘머리로만’ 한 것이고, 아직 ‘삶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수난 예고 말씀을 하실 때,
또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실 때,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말리려고 한 것입니다.
믿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고 믿는 대로
사는 것이 믿음입니다.
마찬가지로 ‘응답’도 ‘머리’가 아니라, 또 ‘말로만’이 아니라, ‘삶’으로 해야 합니다.
온 삶을 다 바쳐서, 온 마음을 다하여 예수님의 뒤를 따라갈 때, 그때 비로소 응답이 완성됩니다.
<사도 직무 수행뿐만 아니라, 모든 신앙인들의 신앙생활은 그 자체가 곧 부르심에 응답하는 생활입니다.
생각만 하는 것, 또는 말만 하는 것은 신앙생활이 아니고, 온 마음과 삶을 다 바쳐서 끝까지 충실하게 사는 것,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