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잠깐만!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이 아저씨야! 평소에는 잘도 길게 쓰더
니 갑자기 짧아지면 어떻게 해!"
- 팬드래건은 속임수. 동쪽 전선에 유의할 것.
"노호랑 연계되어있지 않다고 했던 게 바로 어제잖아! 갑자기 이렇게 말을
확확 바꾸면! 으이그~~~~ 살라딘은 이미 내려갔단 말이야!"
".....저, 유나씨."
"왜요?"
"일단 모두에게 이 소식부터 전해야죠."
"아, 참 그렇지....."
.
.
.
.
"속임수....?"
"속임수라고.....?"
"빨리 지도좀 가져와 주십시오!"
이븐 시나의 손가락이 약간의 떨림을 동반한 채 지도 위를 더듬었다.
"....이 부근입니다."
자마후자리 동쪽의 밀림.
"엥? 하지만 여기는 순전히 몽땅 숲인데...."
"아니오. 거기가 맞습니다."
무카파의 의문에 케먈이 동조하고 나섰다.
"일사담이 있으니까요. 아드리아노플과 우다비나를 연결하던 상인입니다.
이 일대 지리쯤은 쫙 꿰고 있을 겁니다. 우리를 위해 스파이짓을 하고 있
긴 하지만 분명 버몬트에게 길은 가르쳐준다고 했으니까....."
"그럼 우리가 팬드래건의 침입을 막으려고 모이는 동안 그들은 북쪽으로
올라간단 말이야?"
"이제 어떻게 해! 팬드래건을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잖아!"
"최대한 적은 병력으로 상대하면 돼."
"에? 그게 가능해?"
"나는 가능하지."
오랜만에 어울리는 상황에 어울리는 후까시를 잡는 철가면. 그의 실력에
대해서 의의를 달만한 강심장은 없었기에 다들 납득했다.
"죽이지 않고 굴복시키는 건 상대보다 월등하게 실력이 높지 않으면 안돼.
나밖에 더 있나. 그럴 사람이."
".....얀 님을 불러야겠군요."
"그것도 나쁘지 않지. 아무래도 혼자는 벅차니까."
"총사령관 각하도 오시도록 하는 게....."
"아니, 그는 그냥 계속 그 경로로 남하하도록 하게. 어쨌거나 노호를 상대
해야 하지 않겠는 가?"
------------------------------
"............."
- 하지만 난 네 이름을 모르니 꼬마라고 부를 수 밖에, 꼬.마.야.
- 필립! 내 이름은 필립이야!
- 좋았어! 이렇게 된 것도 하늘의 운명! 천수관음의 봉인을 풀고 대자대비
하신 부처님의 자비를 얻자!
- 어이.... 아저씨......?
스승님을 닮았다.
그토록 머리를 아프게 했던 기시감의 정체를 알아냈다.
그건 묘한 기분이었다.
"....그런 식으로 세상 사는 사람이 또 있을 줄은 몰랐군......."
피식 웃으며 터번을 벗고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짧아진 머리.....
-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거래요....
아무렇게나 둘둘 감곤 했던 터번은 새로 바꾼 뒤로는 단정하게 끝마무리
까지 되어있어 얼핏보면 공군들의 베레모같기까지 했다. (CG 버전을 참고
해주십시오...;;)
"각하! 카디스의 폐하와 라샤미아의 독립부대에서 동시에 전갈이 들어왔습
니다!"
".......둘 다에서? 무슨 일이지?"
전갈을 받아든 살라딘은 눈쌀을 찌푸렸다.
적이 둘이니 성가시군. 이렇게 제멋대로라니....
이런 식의 작전은 우리가 팬드래건이 쳐들어온다는 것을 알고 있을 때 성
립하는 걸텐데?
..........!!!
알고.....있다?
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어떻게?
살라딘은 재빨리 과거의 기억을 더듬었다. 엄밀히 말해 노호의 병력은 별
반 희생된 것이 없다. 희생된 것은 거의 오스만과 라쉬카 휘하의 어쌔신
들... 그것도 하쉬쉬에 중독되어 전략이 아닌 충동에 따라 죽을 때까지 베
기만 하는 불안하기 그지 없는 병력.
.....맙소사.... 대체 어디서......
일 사담?
- 살라딘님이 안 계실 때.....
설마.... 그가? 만약.... 그렇다면.....!
"즉시 폐하와 라샤미아로 전령을 띄워라! 지원병력을 요청해!"
---------------------
"제길.....일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군!"
".....유나씨?"
"세라자드님! 전에도 제가 요새방어를 부탁드린 적이 있죠?"
세라자드는 유나의 기세에 눌려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만 더 부탁할께요! 아무래도 라샤미아에서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는
독립부대들이 모이기는 힘들 것 같고 제가 내려가봐야 되겠어요. 그러니까
카디스는 세라자드님께 부탁드립니다. 전투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시니 조
금만 조심하시면 될 거예요. 아셨죠?"
자기 할말만 잔뜩 하고는 재빨리 밖으로 나가려던 유나는 뭔가에 잡힌 듯
몸이 앞으로 나가지지 않는 것을 깨닫고는 황급히 뒤를 바라보았다.
"세, 세라자드....?"
"......꼭 가야 해요?"
그것은 한번도 본 적 없는 표정.
"꼭..... 꼭 유나씨가 가야 하나요?"
".....아, 아니.... 그, 그게....."
"가야 해요!?"
절박하기까지한 물음에, 유나는 왠지 분위기에 눌려서 조용히 대답했다.
"제가 아니면..... 갈 사람이 없어요...."
느껴지는 것은 떨려오는 온기.... 사무치는 불안감.
닥쳐오는 지난 날의 기억....
견딜 수 없어 눈물만 흐릴 수 있다면 죽어버려도 좋다고 생각될 정도로
가슴이 내려앉았던 그때.....
그리고는 한번 꽉 끌어안아주었다.
........결국은 자기가 자기 몸 끌어안는 게 되어버렸지만....
뭐, 어때. 좋은 게 좋은 거지.
"다녀오겠습니다!"
------------------------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이....."
"가주십시오! 어차피 당신은 폐하를 위해서 여기에 있게 된 것 아닙니까!"
철가면을 향한 이븐 시나의 요청을 반대한 것은........
"팬드래건을 우습게 보지 마십시오. 그 버몬트 대공이란 자가 어떤 자인지
아무도 모르지 않습니까? 급한 불은 이쪽입니다."
누군가는 예상했겠지만, 대부분의 극중 인물은 예상밖이었던
케먈이었다.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겁니까! 폐하가 최우선입니다!"
"병력이 있습니다. 폐하께서도 생각없이 몸을 내던지는 분이 아니시구요.
팬드래건을 상대하는 데는 철가면씨가 있어야 합니다."
"......이 자식.....!!"
다혈질인 무카파는 대뜸 케먈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무카파보다 머리 하나
는 작은 케먈이었지만 겁먹은 기색이나, 폭력에 상응하는 대꾸를 할 마음
은 전혀 없어보여, 그게 또 무카파를 열받게 했다.
"처음부터 거슬렸어! 당신! 대체 그 머리통 속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아무렇지도 않게 세라자드님을 전선 맨 앞에다 세우고! 아무 것도
모르는 그 분을 정치니 뭐니 복잡한 문제에 끌여들여서...."
각이 지고 험해보이는 인상의 무카파였지만 저토록 무시무시한 얼굴은 처
음이었다.
소연과 경님은 침만 꿀꺽 삼키고 그 장면을 목격하고 있던 중,
케먈의 눈에서 불꽃이 튀는 듯한 환영을 봤다.
"무례하군. 자네."
".......뭐?"
"지금 감히 누굴 함부로 깎아내리는 건가? 게다가 세라자드님? 자네는 술
탄이자 칼리프인 분의 이름을 함부로 부는 건가? 왕족도 귀족도 아닌 천
민출신의 자네가? 아니지, 왕족이나 귀족이라 한들 그런 무례가 용납될 리
없지."
아니, 불꽃이 아니라 얼음이 얼어붙는 섬광이었던 모양이다.
극지의 빙퇴석마냥 단단하고도 차가운, 일종의 분노마저 느껴지는 시선에,
막무가내로 유명한 무카파도 한 발자국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봐! 당신들 머리속에 있는 폐하가 어떤 모습이시든,
나는 몰라! 알 바 아니야! 중요한 건! 지금 이 투르의 왕은 다름 아닌 그
분이라는 점이다! 지금 당신들의 발언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전시다!
지금은 다름아닌 전시야! 폐하가 홀홀단신으로 적지에 떨어져있는 건가!
충분한 병력이 있고, 스스로 움직일 권한과 능력이 있다! 호위병력으로 중
요 전력을 빼돌리자니, 이런 정신머리로 전쟁을 하는 놈들이 어디있나!"
일찌기 마왕이 잠시나마 쫄았던 것이 이해가 되는, 압도적인 박력이었다.
"웃기기 짝이 없는 인간들이 아닌가! 뭘 생각하고 있는 건가! 왕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르는 건가! 그 분을 그 자리에 세운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자네들이야! 그 분이 술탄이 되심으로서 가장 큰 권력을 손에 쥐게 된 이
들도 자네들이고! 무엇 때문에 술탄과 칼리프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건
가!!"
불같은 노성은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말 나온 김에 계속하지. 도대체 내 눈에는 하나같이 웃긴 꼴들이야. 아무
도 몰라. 지금 어떻게 우리가 팬드래건을 궁지로 몰아넣었으며, 전쟁이 그
나마 우리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게 누구 덕분인지? 살라딘님? 아니면
이븐 시나 당신의 전략? .........머리라는 게 있다면 생각을 해봐! 지금 이
투를 진정 지탱하고 있는 게 누구인지!"
"아리따운 성녀인가? 죽어가는 백성들을 보며 눈물 한방울 떨군 채 모두
를 용서하는 천상의 공주님인가? 말해보게. 이 많은 투르의 전사들이 일사
불란하게 복종하는 것은 누구의 명령인가? 북부의 그 많은 토호들의 목을
자른 건 대체 누군가!"
무카파를 비롯,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시반 슈미터의 일원들은 보기 싫은
광경에 그대로 목을 들이민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핏줄 하나 남기지 않고 모조리 싹을 뽑았다. 현명하게도 자신의 손은 더
럽히지 않고 오랜 시간동안 축적된 분노와 원한을 가진 평민들과 천민들
을 이용해서. 선대 칼리프는 그들을 모두 묵인하고 용서했지. 다시 말해보
게나. 다시 한번 그 분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보란 말일세!"
"정신차려! 상냥하게 웃으며 들꽃을 보고 기뻐하는 곱디고운 공주님은 없
어! 애시당초 없었을 지도 모르지."
조각조각... 과거의 행복했던 시간을 부셔뜨려 가면서, 케먈은 눈하나 깜짝
하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대뜸 아드리아노플로 가서 최고지위에 오른 남자의 여동생
이야. 자네들에게 보여줬던 가면따위 열두개도 더 만들어낼 수 있을 지 누
가 아나?"
"..........알아들었으니 이제 그만 하시오."
한계를 넘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발라의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그만 하라니, 뭘? 멋대로 그분을 평가하고, 그 틀에 잡아맞춘 사람이 누
군데?"
"......아닙니다."
갑자기 끼어든, 침착하고 앳띤 목소리는 마르자나의 것이었다.
"당신은 모르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예요."
조용히 말하는 그녀의 옆얼굴은 칼날을 닮아있었다.
"그것은.... 그 시간만은...."
세라자드는.... 마르자나 뿐만 아니라, 시반슈미터의 모든 사람에게 존칭을
썼다.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절대로 거짓이 아닙니다."
그 고귀하고 아름다운 영혼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고집쟁이에다, 앞뒤 판단못한다고 비난하려면 해보라지.
그 누가 그녀처럼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에 온 몸을 던질 수 있다는 거
지?
"당신은 모릅니다. 그러니까 함부로 말하지 말아요."
진실을 말하는 자의 말에는, 아무런 기교나 수사가 없어도 남을 침묵시키
는 힘이 깃들어있다.
케먈은 잠시 뚫어져라 마르자나를 쳐다보았다.
"...말이 심했다면 사과하지. 하지만 아까의 발언을 취소할 생각은 조금도
없어. 그 분은 왕이고, 그 자리에 오른 이상 그 역할을 해내셔야만 해. 그
것이 그분의 운명이고, 의무이다. 그리고 지금까진 합격점이었다. 나를 비
롯한 자네들이 할 일은 그 점수를 올리는 걸 도와드리는 거지, 함부로 비
난하거나 끌어내리는 게 아니야."
고요하게 가라앉은 군막 안에서, 유일하게 그 압박감에 질리지 않은 사람
들이 있었다.
눈치가 없다고 말해도 틀리지 않다.
"자, 잠깐만 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예요!"
그래도 분위기상 큰 소리를 버럭 질렀다간 심장마비 걸릴 사람이 몇 있길
래 소연은 목소리를 낮췄다.
".....들켰네. 그 능력좋은 스파이."
철가면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네에?"
"그가 바로 알려지지 않은 퍼즐조각이야. 회계업무니 뭐니해서 일부러 정
보를 끌어모으기 좋은 위치에 앉혀놓고 쓸데없는 것들만 왕창 퍼부어놓은
거지. 그걸 역이용한거야. 원래 일사담이 준 정보대로라면 팬드래건의 병
력은 막강이고 라샤미아쪽으로 올라가는 병력이 보잘 것 없는 거겠지. 우
리들의 전병력을 상대하는 게 팬드래건이 되니까. 그러나 저들이 우리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걸 계산에 넣었다면 오히려 그 반대야. 팬드래건이
쳐들어온다고 북치고 장구치고 다 한 다음, 오히려 라샤미아쪽으로 치고
들어가는 거겠지. 젠장.... 이제 전부다 우리쪽 병력에 저들에 비해 풍부하
지 못하기 때문일세."
비록 설명은 복잡했어도...;;
-----------------------
"살라딘님!"
"오셨습니까?"
이젠 손발이 잘 맞는 친구같아진 두 사람은 곧장 앞으로 있을 전투에 대
한 의논으로 들어갔다.
"다행히도 걸려들기 직전에 아슬아슬하게 피했군요. 이정도 보충병력가지
고 될까요?"
"라샤미아를 기대해보는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우선은 제 뒤에 숨으
시지요."
"아뇨. 누군가를 보호하며 싸우는 건 소극적이 될 수 밖에 없어요. 저는
알아서 할테니 살라딘님이 일단 진을 무너뜨려주세요."
"하지만....."
"어차피 대용이니 걱정말아요!"
"..........."
"피차 생각하고 있는 게 빤한 상황에서 긴 말 않겠어요. 멀쩡하게 살아돌
아가겠다고 나도 약속했다고요! 제멋대로에 건방지고 못됐고 말 함부로 하
지만 약속은 지켜요. 그러니...... 당신도 약속은 지켜주세요."
"........무....엇을....."
"모든 일이 밝혀지면 청혼한다고 했죠? 부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약
속 꼭 지켜요."
당당하게 내밀어진 새끼손가락.....
"그럴꺼죠?"
어렸을 적.... 동생과의 약속의 증표....
그때도 이렇게 손가락을 걸었었는 데.....
"어서요!"
지키질.... 못했다.
"거 참, 시간도 없는 데....!"
다른 한손이 날쌔게 튀어나와 멍하니 있는 살라딘의 손을 잡아끌어 멋대
로 새끼손가락을 걸어버렸다.
"그리고 이건 도장!"
엄지손가락을 한번 맞대고는....
"그럼 앞은 부탁하겠어요! 저는 뒤에서 마법으로 엄호하죠!"
그리고 역시나.....
툭툭- 어깨에 닿는 가벼운 손짓...
스승님의 습관과 닮은 행동....
그대로 일말의 망설임없이 뒤돌아걸어갔다.
전장의 바람에 나부끼는 긴 생머리.....
뒷모습마저 달라보이는 건..... 알고 있기 때문인가...
불안해지지 않는 것은..... 그녀가 내 세라자드가 아니란 걸 알았기 때문에?
- 아니야. 그것만은 아니다...
"쓸데없는 생각은 나중에 해요! 우선은 눈 앞의 적이 먼저입니다! 생각할
시간은 나중에 차고 넘치게 드릴 테니! 화이어볼!"
조심성없에 내 바로 옆을 스치고 지나가는 화염구와 따끔하게 쏘는 말 한
마디에 정신을 차렸다.
"제 1 부대! 형성되려는 포위망을 뚫는다! 총사령관 각하를 엄호하라!"
히랄 하르로데..... 명령..... 전투..... 아군....
모든 것이 몸에 꼭 맞는 슈트처럼 들어맞는다.
그리고 새파란 검기가 마룡의 검에 맺혀흐른다.
"하앗!"
실로 오랜만에 내어보는 기합. 눈 앞에 늘어선 어쌔신들을 파고 들며 살라
딘은 순식간에 포위망의 한 선을 끊어버렸다.
- 믿고 있기 때문......!
"화이어 애로우!"
멀리서도 분명히 들려오는 주문의 영창.
느껴지는 공기의 파동.
뒤를 노리던 어쌔신 하나가 불화살에 새까맣게 구워졌지만 살라딘은 쳐다
보지도 않았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냉정하게 전장을 살피며 내 주변을 돌보는 그녀
의 모습을.
그것은 동료의 모습, 함께 싸운다는 느낌.
"살라딘! 위쪽!"
다행히도 울창한 숲이었기에 소수의 병력으로도 길목을 지키며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시체가 쌓여가는 속도는 아군이 훨씬 빨랐다.
휘이이이잉-
전체마법의 진동이다. 주변에 달고 다니는 마법사만 여럿이다 보니 어느새
마력진동을 감지할 수 있게 된 살라딘은 재빨리 몸을 낮추어 닥쳐오는 칼
을 피했다. 조금만 더 버티면....
"문 라이트!"
뜨거운 밀림의 공기를 가로지르며 죽음의 냉기가 솟구쳐 올랐다.
그때였다.
"문라이트 다시 한번!"
"와앗! 경님아!"
"내가 왔단다, 친구야~~~~"
.
.
.
.
"하아, 하아, 우갸갸갸갸....."
느슨해진 포니테일을 풀어해치며 유나는 허리를 툭툭 두드렸다.
"체력저하다. 체력저하.... 살라딘."
"예?"
"세라자드님한테 맛있는 것 좀 많이 먹으라고 하세요. 힘들어죽겠네."
"............."
뭐라고.... 불러야 하지...?
"저, 폐하....."
"내 이름 가르쳐주기 싫어요. 알아서 부르세요."
"......!!"
소, 속도 읽는 건가....?
"당신 생각이야 뻔하죠, 뭐."
케켁......!
"남의 속 짚어내는 건 내 주특기에요. 표정관리 잘 하세요."
먼지를 잔뜩 뒤집어써 엉키고 설킨 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어내리던 그녀는
옆에 있던 병사가 막 마시고 내려놓은 물통을 들어 머리 위에 뿌리고는
다시금 높게 머리를 틀어올렸다.
"앗! 폐, 폐하.... 마, 마실 물을......"
"시끄러. .......여기서 카디스로 돌아가는 건 무리이고....."
물통 안에 조금밖에 남지 않은 물을 보며 오열하는 부하를 무시한 채 생
각에 빠져있던 유나에게 그새 어디 가있던 경님이 다가왔다.
"어이, 여왕님!"
"......뭐, 뭐야, 그 호칭은?"
"철가면씨가 그렇게 부른다고. 철가면단들은 다 그렇게 불러. 그나저나 중
요한 건 이게 아니고...... 우리, 라샤미아로 가자!"
"카디스에 세라씨 혼자 있는 데?"
"살라딘님이 돌아가시면 되지. 그렇죠?"
아항~~~~
그제서야 유나도 납득하고는 살라딘에게는 보이지 않는 음흉한 미소를 지
었다. 이른바 반달 눈.... (--;;)
"저는......."
"난 힘들어서 못가겠어요. 살라딘님이나 카디스 요새로 돌아가세요."
그리고는 내 배째라 모드로 털썩 주저앉는 유나.
"얼레? 다리 힘도 풀렸네. 이봐, 거기 뒤에! 멀고 먼 카디스까지 다시 올라
가고 싶나, 아니면 가까운 라샤미아에서 물 먹고 싶나?"
"라샤미아요!!!!!!!!"
"........."
"보셨죠?"
하아, 어이없다는 듯한 살라딘의 시선을 깨끗이 무시한 채 유나는 진군의
방향을 라샤미아로 잡았다.
템페스트 때부터의 질긴 인연일까.
어떻게든 죠엘 남작을 비롯 자기가 잘 아는 사람들과 검을 맞대지 않으려
던 철가면의 속셈은 산산조각 났다.
기절시킨 병사만 수십 다스를 넘어가고 있던 때 철가면의 실력을 보곤 죠
엘 남작이 나선 것이다.
.......그래서 결국 다음과 같은 상황이 연출되고 만 거다.
"어째서..... 어째서 폐하께서 투르에....."
"........잘못 되면 여기서 내 정체 들통납니다."
"아, 예..."
순간, 완전히 맥없이 풀려버린 팔에 힘주어 칼을 휘두르는 죠엘 남작.
"대체.... 대체 투르에는 왜..... 그보다도 어떻게 폐하께서..... 투르편에...."
".....나도 나름대로 협박당하고 이러는 겁니다. 정체가 들통나서 공개처형
될 뻔 했다고요.....;;"
"예애!?"
"받아랏!"
기습을 하면서 저렇게 멍청하게 기합 지르는 놈이 성기사들 중엔 꼭 하나
씩 있다.
"어딜!"
그러나 그런 녀석 쯤 뒤도 안돌아보고 제압하기란 철가면에게 식은 죽 먹
기. 이만한 실력자가 유나에게 맥 없이 잡힌 이유는 역시 정신적 충격 플
러스 협박의 결과일 것이다.
"........."
그 틈을 노렸다면 치명상일 텐데 상대의 정체를 알았으니 죠엘은 애써 타
이밍을 조절하여 검을 늦추었다.
"그나저나 죠엘 아저씨. 버몬트에게 이르십시오. 어서 군사를 물리라고."
"예?"
"투르에서 철수하라는 말까지는 하지 않겠소. 내가 직접 나서지 않는 이상
들을 녀석도 아니고 난 아직 끝내지 못한 일이 남아있으니까..... 솔직히 말
하지. 난 투르의 술탄과 밀약을 맺었소."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발 목소리 좀 낮춰요........."
이젠 숫제 식은땀까지 흘리고 있다.
"이래저래 그녀에게 빚진 것도 있고..... 무엇보다 그녀에게서 들어야 할 중
요한 정보가 있단 말입니다. 내가 왕위도 버리고 돌아다닐 만큼 중요한 일
이에요. 어떻게든 버몬트 녀석을 설득 시켜 보십시오!"
".....빚이라뇨! 대체 뭐길래......"
"그건 묻지 말고요! 나중에 내가 때가 되면 다........"
"얀 지슈카님이 오셨다!"
무적의 예니체리. 사막의 암사자가 위풍당당한 모습을 드러냈다.
병사들의 환호가 끝나기도 전 등장하자마자 수명의 로열가드들을 베어넘
긴 그녀는 천천히 광선검을 곧추세웠다.
철가면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이 상황에서 지하드를 발동시켰다간 기절시킨 병사들은 소리한번 못 내보
고 고깃덩어리가 된다.
"죠엘 남작, 어서!"
철가면은 재빨리 죠엘남작의 칼을 밀쳐내고 멀찍이 떨어졌다.
"자, 잠깐....폐......"
".......부탁드립니다."
그리고선 재빨리 얀에게 다가갔다.
"아직은 아니야. 지하드는 아껴두게."
"............"
옆으로 흘겨보는 눈빛에 순간 흠칫했던 철가면의 걱정과는 달리 그녀는
웬일로 순순히 검을 늦추었다. 대신.....
"끄악!"
눈 앞에 다가오던 성기사를 향해 검기를 날렸다.
녹색 광선에서 흩어지는 녹색의 검기는 그대로 중무장한 성기사의 갑옷을
가르고 그 몸을 두동강냈다.
".......칼리프 성하의 휘하 무슬림들을 전멸시켰던 그 기술이나 써보지 그
래?"
뜨끔....
"당신, 팬드래건 사람이지?"
뜨, 뜨끔.....
".........조국을 향해서 검을 드는 자가 둘씩이나 있다니.... 팬드래건도 망해
먹을 때가 다 됐군."
".....둘?"
"몰라도 돼."
갑자기 그녀가 숨을 모으는 소리가 들렸다.
"전 팬드래건군에 알린다!"
철가면조차 다시 보게 되는 기백.
이게 예니체리란 것인가.....?
기술이나 검을 뛰어넘어선 어떤 정신적인 경지.
위엄, 기백......
한 사람의 등장으로 군의 사기를 바꿀 수 있다던, 검의 정수라고도 불리는
예니체리가....
바로 이런 것인가.....
기가 담긴 목소리는 확성기 없이도 고요해진 전장에 널리 울려퍼졌다.
"어차피 이제 승패는 갈렸다! 전멸당하고 싶다면 기꺼이 그리 해주지! 그
러나 나, 예니체리 얀 지슈카! 이제 이 대투르제국에 하나밖에 남지 않은
예니체리로서 물러나는 적에게는 칼을 들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물러서
라! 팬드래건이여!"
.........이것이.....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최소한 예의겠지. 필립....
내 어린 친구......
더 이상 내 검에..... 네 동족들의 피를 묻히고 싶진 않아.
.
.
.
.
"전 팬드래건군에 알린다!"
.....얀 지슈카, 얀 지슈카..... 그때 그 건방진 투르 여자애인가..
버몬트는 낮게 조소했다.
쓸데없는 장소에서 쓸데없는 인연을 만나는 군.
- 아야야야야~~~
- 형! 대, 대체 어디서.......!
언젠가 형은 간수들의 채찍과는 전혀 다른 무기에 잔뜩 얻어맞고 돌아온
적이 있었다.
- 으윽, 얀 녀석... 이게 봐주는 거야? 아파 죽겠네...
그 끙끙거리며 앓는 소리에는 원망이나 악의가 보이지 않았기에 나는 조
금 허둥지둥 물수건을 준비하면서도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 얀이..... 누구야?
- 으으.... 그런 녀석이 있어. 무식하게 힘은 세가지고... 아야야야~~~
- 누가 무식하다고?
형보다 훨씬 큰 키에 훨씬 강해보이던 투르의 소녀.
아니, 그때의 우리들에게 그녀는 이미 어른이었다.
너무나 크고 강했으므로.
- 으아아아아아~~~~
- 으흠? 그럼 이 몸이 일부러 가져온 이 연고는 필요없는 거겠네?
- 치, 치사해....!
- .......잔소리말고 옷이나 벗어.
- 자, 잠깐만..... 너, 넌 여자애잖아....
- 웃기고 있네. 나보다 5살이나 어린 주제에! 잔소리말고 옷벗어. 발라줄
테니까.
그 격의없는 대화가 싫었다.
다정한 체 웃고 있는 눈도 싫었다.
탁-!
- 뭐, 뭐야. 이 꼬만?
- ......형한테 손대지 마.
- 야, 존....
- .......아하~ 네가 이 녀석 동생이구나? 성질 꼬장꼬장한게 형을 갖다 박았
네. 옛다! 네가 발라주던지 떡을 치던지....... 난 그만 간다~~~
- 어, 그, 그래....
- 그리고 필립.
- 왜?
- 내일은 특훈이다. 이유는 알고 있겠지?
- 으윽!
- 그럼 내일 보자구!
갈색머리를 높게 묶었던 예니체리 가문의 어린 후계자....
아직 형과 함께 했던 그 시간.....
나는 그녀가 싫었지만 형은 그녀를 좋아했었다.
말싸움하고, 칼을 맞대고, 신경질 부리고, 얻어맞으면서도....
형은 강해져간다고..... 강해져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고 했었다.
.........그렇게 허무하게 죽어버릴 거면서.....
"어차피 이제 승패는 갈렸다! 전멸당하고 싶다면 기꺼이 그리 해주지! 그
러나 나, 예니체리 얀 지슈카! 이제 이 대투르제국에 하나밖에 남지 않은
예니체리로서 물러나는 적에게는 칼을 들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물러서
라! 팬드래건이여!"
하! 또 동정인가....
내 형을 가지고 놀았던 것 처럼, 위대한 예니체리의 후계자께서 불쌍한 팬
드래건의 꼬마에게 베풀어주었던 은혜를 다시 베풀어주시겠다?
미안하지만 그때와는 상황이 달라!
".........한 가지 조건이 있다."
그녀의 눈길이 나를 향해 꽂힌다.
그녀는 알아보지 못하겠지. 나는 팬드래건으로 간 뒤에도 나의 본명을 되
도록 쓰지 않았고 그때의 작고 약한 나와 지금의 나는..... 전혀 틀릴 테
니...
"결투다. 내가 진다면 굳이 은혜까지 베풀어줄 것 없다. 허나, 내가 이긴다
면..... 그대의 신병은 내가 맡겠다."
"대공 전하!"
록슬리와 아델라이데를 비롯, 모든 수뇌부들이 당황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인질인가?"
"좋을대로 생각하시지."
"난 좀 취향이 까다로워서 말이야. 오스만이나 알아샤 따위의 전철을 밟을
생각은 없는 데?"
"전향할 거라고는 기대도 안 한다."
".....좋아. 배짱 좋군. 하지만 나도 조건이 있다."
"뭔가?"
"내가 이기면........"
..........죄송합니다. 세라자드님.
"단 5분만 내 이야기를 들어주기 바란다...."
"이야기?"
"그래. 어차피 난 기절해있는 적의 숨통을 끊는 것에는 취미없다. 단 5분
이다. 단 5분만 이 전투를 멈추고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길 바란다."
.......그 바보녀석을...... 이제는........
"승락하지."
전에 없는 긴장감이 맴돌았다. 생사를 넘나들면서도 느껴본 적 없었던 긴
장감..... 그리고 초조함.
얀은 힘과 기품이 동시에 느껴지는 움직임으로 천천히 지하드를 고쳐잡았
다.
"와라! 팬드래건의 대공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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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어? 철가면이 팬드래건을 막으려갔다고? 지금 제 정신이야, 그 아저
씨!?"
"폐, 폐하? 언제 돌아오신 겁니까!"
기겁을 하는 부하들의 말은 깡그리 무시한 채 유나는 쉴 틈도 없이 신발
을 고쳐 신었다.
"경님! 소연! 어서 가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 지 상상도 안가! 빨리!"
"아, 알았어!"
"으이그~~~ 그저 내가 없으면 일이 안돼요, 일이 안돼!"
.
.
.
.
베고 넘기고 치고 돌린다.
두 사람의 검기가 뒤엉키고 폭발하고 퍼져나간다.
촤아아아아악-
발이 미끌어지며 흙먼지가 자욱하게 두 사람을 덮어씌웠다.
'어디에?'
'어디에!'
필사적으로 상대방의 기를 찾던 두 사람의 감각이 마침내 서로를 향해 고
정되고 그와 동시에 힘껏 검을 내지른다.
"하앗!"
"합!"
엉켜드는 금속광과 녹색의 빛줄기....
퍼어어어억!
서로의 검을 견뎌내지 못하고 터져버린 검기에 두 사람은 주춤 물러섰다.
".....과연 예니체리..... 만만히 볼 것은 아니군."
"썩은 매국노들과 야합하겠다고 나선 작자 치고는 꽤 괜찮은 솜씨야."
"마음대로 지껄여라."
창-! 끼긱-
녹색검기과 푸른 검기가 서로를 팽팽하게 밀어넣고 있는 가운데....
승부는 일순간의 방심으로도 끝날 것이었다.
뗴어지는 두 검...... 다시 맞붙는 검.
부딪히는 검기, 흩어지는 바람....
부딪히는 눈빛.
알 수 없는 데자뷰.....
'.......닮.....았.......나?'
휙-!
훌쩍 뒤로 물러서며 얀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역시..... 왕가의 핏줄인가... 닮은 것 같군.'
혹시나 이 자는 가까운 친적일지도.....
다시금 검을 세우는 둘.... 그리고 서로를 향해 돌진하려는 찰나....
"대체 여기가 무협영화 세트장이야, 전장이야!"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서 놀랄 수도 없는 괄괄한 목소리.
".....자, 자네가....어, 어떻게 여기에....."
"......이 눔의 아저씨가......!!!!"
퍼억-!
타고온 전차에서 뛰어내리던 자세 그대로 이단옆차기!
......는 비록 실패했지만 철가면의 복부에 선명한 신발자국을 남기는 데는
성공했다.
"당신 지금 제정신이야? 온 세계가 다 함께 미쳐가는 꼴 보고 싶어? 어쭈
구리? 이건 또 뭐야? 검투사 시합하는 거 구경하나? 이게 지금 뭐하는 짓
들이야! 헐렐레 해가지고는.... 팝콘은 안 사먹었냐?!"
긴장감은 다 어디매로...... ㅠ.ㅠ
"잘 한다~ 기껏 밥먹여가며 상처 치료해주며 내보냈더니 남싸우는 거 구
경하며 돈이라도 걸고 있었냐? 내가 미쳐.... 얀 지슈카! 댁은 또 거기서 뭐
하는 겁니까?"
"예?"
천하의 예니체리라도 이쯤되면 벙찌기 마련.
"빨리 들어와요! 누가 당신더러 일기토해서 기선 제압하랬습니까? 몽땅 다
쓸어버리랬지!"
"페, 폐하.....?"
"어서 들어오라니깐!"
.......순식간에 파토난 일기토. 얼떨결에 미적미적 제자리로 복귀하기는 했
는 데.....
".......보아하니 안 죽이고 뒷통수만 쳤죠?"
"하, 하, 하.... 그, 그러니까 그게....."
"당신 알아보는 사람 없었어요?"
"............."
"죠엘 남작이죠?"
"...........;;"
"내가 그럴 줄 알았다니까..... 아무튼 뒷마무리는 내가 할 테니까 방패 역
할이나 잘 하고 있어요."
술탄은 예니체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목소리에 기를 실어 말할 재주는 없
었다. 채가듯 확성기를 받아든 술탄은 마음껏 성량을 발휘했다.
"물러가든 말든 너네 맘대로 해!"
..............거 참, 굉장한 발언이군.
"단지! 한가지 알려줄게 있는 데 당신네들이 움직이는 동안 저 망할 늙은
이도 움직였어! 방금 그거 작살내고 돌아오는 길이라구! 보나마나 댁들에
게 말 안했겠지? 당연하지. 댁들을 미끼로 삼은 거니까! 우리 병력들 중
최고 실력자가 다 여기에 뭉쳐있는 동안 치고 올라가려고 하다가 물먹었
다고!"
웅성웅성....
그래. 내가 노린게 바로 이거야. 버몬트 녀석은 동요하지 않더라도 팬드래
건군은 동요하지.
우키키키키!
"더 해보겠다면 얼마든지! 이미 눈치챘겠지만 우리는 너희들의 기습을 예
상하고 있었다!"
더더욱 동요하는 팬드래건인들.
한편, 일부러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몸을 숨기고 있던 일사담은 눈이 화등
잔만해져 손수건을 물어뜯고 있었다.
'폐하! 대체 지금 무슨 말씀을!?'
".......그 늙은이.... 우릴 속인건가...!"
버몬트는 칼을 집어넣으며 분노를 집어삼켰다.
한편, 유나가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으며(영 쓸데없는 소리는 아니었다.)
질질 시간을 끌고 있을 때, 일련의 사람들은 팬드래건 군사의 복장으로 변
장한 뒤, 몰래 진지에 접근하고 있었다.
- 일사담의 스파이 작전이 탄로났다.
그래도 양심이란게 폼으로나마 달려있었는 지 유나는 그 재미매니아 아저
씨를 구출해주기로 했다.
'어쨌거나 세운 공이라는 게 있으니까... 궁시렁궁시렁....'
어차피 들켰으니 옆에 두고 회계담당으로 써먹는 게 더 이익이지...
"......그러니 이쯤에서 물러나는 게......."
".......!?"
무슨.... 소리지? 이건...?
허공에서 천천히 내려깔리듯 들려오는 이 소리는....
"비행기?"
프로펠러가 돌아가는 소리다.
.........설마!
"모두 피해!!!!!!!"
푸른 하늘에 수십대의 비행기가 천천히 그 위용을 나타냈다.
.......하늘에서 화염의 비가 쏟아져내렸다.
"제길! 양동작전이었군! 저걸 퍼부을려고 그 많은 돈을 쓴 거냐아아아!!"
"팬드래건마저 쓸어버릴 작정이었나. 그 늙은이의 병력이 생각외로 어마어
마한 모양이군."
철가면의 망토속에 숨어 불똥을 피하던 유나는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아직 그 사고치는 중년을 꺼내오지도 못했는 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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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전투에서 승기를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투르는 허둥지둥 그 자리를
피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패퇴하던 팬드래건도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그때쯤엔 기절해있던 병사들도 하나둘 깨어나 그다지 큰 병력피해
는 없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
"그렇게 무서운 눈 할 게 없네."
"이게 뭐하자는 수작이지?"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거야. 어차피 정보가 새어나가지 않았어도 자네는
이기지 못했어."
".........."
점점 강도를 더해가 이제는 정말 숨도 못 쉴 지경인 살기에도 불구하고
노호는 여유만만하게 찻잔을 들었다.
그리고.....
"수확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지."
"무슨 소리인가."
"자네, 벌레를 한 마리 데리고 들어왔더군."
"뭐?"
보석반지를 잔뜩 낀 주글주글한 손가락이 맞부딪히며 소리를 냈다.
풀썩 꺾인 무릎, 엉망으로 풀어헤쳐진 터번...
건장한 체격의 남자하인 둘이 한 중년사내를 짐짝 끌고 오듯이 질질 끌고
왔다.
"........이 자였군."
"그러니까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기이한 웃음소리와 함께 노호는 젊은 대공을 떠보듯 바라보았다.
"상인은 믿을 게 못 된다고."
"....쿡쿡쿡..."
언뜻 들리는 웃음소리에 버몬트의 눈썹이 활화산처럼 꿈틀거렸다.
"믿는다? 믿는다고 하셨습니까, 어르신?"
재미매니아 아저씨, 필생의 위기앞에서 남은 건 오기밖에 없음을 증명하
다.
"누가 누구를요? 애시당초 알고 있었잖습니까. 내가 스파이라는 것을. 애
시당초 믿지 않고 이용해먹고 있던 주제에 뭘 그렇게 자랑스럽게 떠벌리
는 겁니까? 내가 당신이 팬드래건의 뒷통수를 친 것에 대한 면죄부라도
된단 말입니까?"
"......입을 놀리는 법을 다시 배워할 놈이군."
노호의 손가락이 다시 움직였다.
"크윽!"
거한의 주먹이 일사담의 복부를 강타했다.
"쿨럭...! 쿡, 쿨러....허윽!"
"자아, 들통난 스파이에게는 더 볼 일이 없고.... 개인적으로 하나만 묻겠네
만....."
노호는 광적인 빛이 맴도는 눈빛으로 일사담을 주시했다.
"자네의 투자대상은 누구였나?"
".........알고 싶으신가?"
"참견 좋아하는 늙은이의 호기심이라고 생각해도 좋네."
"당신은 절대 그분을 이길 수 없어."
"..........."
다시 한번 울리는 손가락 마찰음.
그리고 숨막히는 신음소리와 바닥으로 떨어지는 핏줄기.
"후윽.....! 쿡쿡쿡.... 그, 그래도 궁금한 가보지? 사피 알딘도 없는 이 투르
를 여기까지 이끌고 온 진짜 우두머리가 누구인지?"
"묻는 말에 대답하는 법을 모르는 놈이군. 가르쳐줘야 하나?"
"아니, 그런 수고는 다시 할 필요없어. 역시 이런 종류의 선문답은 통하는
사람이 있고 안 통하는 사람이 있군. 멋없는 늙은이같으니."
"..........."
퍼억-!
끈질기게 맞고 끈질기게 이죽거리는 아저씨다. 정신상태로만 보자면 유나
보다 더 과격하고 더 엽기적일지도....
".....폐하이시다."
"뭐?"
"못 알아들었나? 내 투자대상은 이 투르의 술탄이시란 말이다. 시골깡촌구
석에 쳐박혀 살다보니 이 투르에서 폐하라고 불릴 단 한분이 누군지도 모
르나?"
"........세라자드 공주?"
"이제는 술탄이시지. 칼리프 성하이시기도 하고."
"....그녀가 너에게 사주하던가?"
"....별게 다 궁금하군."
"샌드백 역할이 마음에 들 줄은 몰랐네."
퍼억-!
"제, 젠장... 그만 좀 두들겨, 빌어먹을 산송장! 내가 하겠다고 했다!"
".....어째서? 자네는 상인이 아니던가?"
"......개는 주인을 위해 짖고 여인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단장을 하고 상
인은 신용있는 상대와 거래를 하지."
"...으음."
"....이란 건 다 뻥이고. 재미있을 것 같았다."
노호의 눈썹이 다시 꿈틀거렸다.
"진짜야! 더 두들기면 말 안해!"
......대체 이 아저씨, 자기가 처해 있는 상황을 알고나 있는 건가...?
"직접 만나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 네가 그 분에 대해서 무슨 생각
을 하고 있는 지, 어떤 기억이 남아있는 지는 모르겠지만 그 케케묵은 옛
날자료를 바탕으로 지금의 그분을 가늠해보겠다는 건 그야말로 헛짓이야."
"......오스만."
그때까지 부동의 자세로 서서 일사담의 굴욕을 약간은 쾌감어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던 오스만을 노호는 손짓으로 불렀다.
"예. 어르신."
"자네.... 전에 카디스 요새에 있을 때 세라자드를 본 적이 있다고 했지?"
"....예."
"그때가.... 한 2년전 쯤 아니었나?"
"그렇습니다. 어르신."
"지금 이 자의 말을 믿나?"
"..........아니오."
"좋아. 난 일개 상인과 예니체리의 말을 같은 무게에서 재지는 않아."
"미안하지만 난 일개 상인쪽이 더 신용이 가는 데."
그때까지 침묵하며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버몬트가 입을 열었다.
"무엇보다 난 내 비공정을 박살내는 술탄을 멀리서나마 직접 봤고.... 오늘
도 봤거든. 아니, 정확히는 들은 거지만."
그 목소리를....
"오스만은 내게 여술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고귀하고 기품있는 성녀지
만 술탄으로서는 유약하기 짝이 없는 성품이라고. 그런데 그 말을 듣고 상
륙한 투르에서 만난 여술탄은 완전히 반대야. 술탄에 등극하지 않았으면
대체 어쩔 뻔 했을 지 모르겠더군."
"........."
"오스만 자네는 직접 전투에 나간 적이 거의 없으니 모르겠지."
공중에서 울려퍼지는 그 목소리가 어떤 느낌을 주는 지...
"한가지 궁금한 게 있군. 일사담."
"말해보시구려. 대공 나으리."
"어째서 길은 제대로 가르쳐 준거지?"
"........."
"자네덕분에 뚫은 길도 만만치 않은 데....."
".....재미....때문이라고 말했다."
".........정말 이해못할 남자로군. 재미 때문에 목숨을 건단 말인가?"
"당신같이 딱딱하게 사는 사람은 이해못해. 용납할 수도 없지. 당신에겐
인생은 무슬림의 고행, 혹은 속죄와 같은 것이니까."
".........!"
"폐하께서 이해하셨는 지는 모르겠다. 그저 그분과는 말이 통했다. 그게
재미있었을 뿐이다."
"........."
"한 가지 덧붙이자면....."
일사담은 엉망이 된 얼굴로 웃어보이려고 노력했다.
"당신과 폐하를 비교해보는 것도 굉장히 재미있었어. 개인적으로 두 사람
이 만나지 못하는 게 심히 아쉽군."
--------------------------
훗, 내가 만든 사람이지만 이 성격 정말 마음에 들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