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 버드’, 푸른 날개의 ★ 꿈
‘수원’...
이곳이 축구하면 떠오르는 도시의 하나로 자리 잡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1995년 12월에 창단한 수원삼성블루윙즈는 K-리그에서 상대적으로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최단기간 명문 구단의 청사진을 제시한 구단이다. 창단 첫 해부터 후기리그 우승 및 종합우승을 차지하며 돌풍의 주역이 되었고, 창단 3년만인 1998년 K리그 챔피언에 등극했다. 그리고 1999년에는 시즌 전관왕 이라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위업을 달성하며 2000년 슈퍼컵과 컵대회까지 우승하며 한국을 대표하는 프로축구 구단의 이미지를 굳건히 했다.
95년 당시 제시한 중장기 비젼을 달성하기 위한 구단의 적극적인 지원과 선진 축구 시스템의 도입으로 재미있는 축구, 신바람 나는 축구를 열었으며 국내 최초이자 최대의 조직을 자랑하는 서포터즈 클럽 ‘그랑블루’를 필두로 한 연고의식 속에서 수원 시민들이 하나 되어 이룬 결과였다.
결국 수원의 레전드로 불리우는 김호 감독에 이어 바통을 넘겨받은 한국 축구의 영웅 차범근 감독 역시 수원을 2004년 K리그 챔피언에 등극시키며 전통을 이어갔으며 이후 주전선수들의 부상과 대표팀 차출 문제와 맞물려 고난의 시간도 존재했지만 2006시즌에 다시 한번 챔피언결정전에 진출하며 챔피언 등극을 노리고 있다.
‘세계적인 명문구단’ 이라는 도약을 꿈꾸는 구단 자체의 꿈과 이상. 그리고 팬들의 성원이 있기에 오늘날의 수원이 존재하고, 앞으로의 수원이 존재한다는 논증의 이유이기도 하다.
Part 1. ‘빅버드’의 첫 발걸음
1994년 9월. 수원시는 월드컵을 유치하고자 하는 뜻을 표출한다. 그러면서 1996년 7월에 수원시와 삼성전자간의 전용 구장에 관한 건립 협약 체결을 통해 본격적인 시동을 걸었다. 당시 협약 체결 내용에는 수원시의 경기장 부지 제공과 더불어 삼성전자는 자체 자금으로 경기장 및 수익시설을 설치하여 20년 운영 후에 수원시에 기부체납의 조건을 걸었다. 그러나 1998년 4월 IMF 위기로 삼성전자 측이 단독 건립 불가함을 수원시에 통보하면서 기초공사가 중단 되었다. 그러면서 FIFA에 경기 유치 반납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나 1999년 4월 수원시에서 경기도에 직접 건설사업비를 요청하면서 경기도 제3섹터형 독립법인 설립안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그 해 11월에 경기도와 수원시가 월드컵 수원경기추진위원회 설립협약을 체결하면서 수원시가 6:4의 비율로 사업비 공동투자를 극적으로 합의하게 된다. 결국 2000년 3월 3일 법인 설립 등기를 통해 수원 월드컵 경기장 탄생의 시작이 되었다.
재단 측에서는 기존의 방향을 지역 및 국내 축구 산업 발전에 기여함과 동시에 도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체육, 문화시설의 공간 제공, 전국 제일의 축구 메카 도시로의 기반을 구축한다는 청사진을 그렸다.
2006년 11월 12일 수원시 팔달구 우만 1동에 위치하고 있는 수원 월드컵 경기장. 어느 때처럼 7007번 버스를 타고 경기장에서 하차한 필자는 웅장해 보이는 ‘빅 버드’의 자태가 한 눈에 들어온다.
그렇다면, 축구팬들에게 익숙해져있는‘빅 버드’라는 용어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수원 월드컵 경기장 관리공단 측은 개발 초기의 컨셉을 비상하는 새의 날개 이미지 표현에 주안점을 두었다. 흔히 서울시 상암동의 서울 월드컵 경기장이 방패연을 형상화 하였듯이 수원 또한 정형화된 새의 날개 표현으로 축구팬들은 흔히 ‘빅 버드’라는 애칭을 사용하게 된것이다.
또한 개발 초기에 처마 이미지를 은유한 지붕의 형태를 통하여 고도 수원의 역사성과 하이테크 건축이 조화될 수 있도록 하였다. 경기장 기능의 핵심인 관람석은 현장감을 최대화하여 관람객들이 자연스럽게 경기장 분위기에 동화 될 수 있도록 좌석배치와 조명, 음향 등을 고려하여 평면형태를 직선이 아닌 타원으로 계획하여 현장감을 더욱 만끽할 수 있도록 하였다.
‘빅 버드’는 42,138명의 수용인원과 425,000㎡면적의 부지에 연면적 66.595㎡규모로 건설되었다. 동일 부지 내에 축구경기장 외에 보조구장 1면, 잔디연습구장2면, Clay구장 1면이 설치되어 있고 월드컵 홍보를 위한 홍보관이 설치되어 있으며 단지 내에는 특색있는 가로수, 꽃동산 등 테마공원을 설치하여 사계절 꽃과 녹음, 단풍과 설경이 어루러지는 쉼터가 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월드컵 준비시설인 선수단 준비캠프와 자원봉사/등록센터, 이용객 편의를 위한 축구공 형태의 조형화장실 3동, 월드컵 경기후 수익을 위한 시설로 스포츠센터가 설치되어있다.
경기장 관리공단에서는 개발 초기 사후 활용에 대해서도 “지역 주민들의 스포츠 문화, 위락, 휴식 등 다양한 욕구를 만족시켜 직접 참여하는 스포츠 문화의 중심이 될 수 있도록 동선계획이나 시설계획을 하였고 향후 증축을 고려한 부지 전체의 배치가 될 수 있도록 계획” 이었음을 밝혔다. 즉, 기존의 설계의 주안점에는 ‘간결하고 명쾌한 구조’, ‘단순하고 간결한 동선’, ‘안전 및 방재’, ‘기능성 및 미래지향적 외관’ 이라는 것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개발 초기에 2002년 한일월드컵 종료 후에도 각종 국제, 국내 초정 축구대회를 지속적으로 개최하며, 실내 수영장과 골프 연습장, 스포츠 매장, 대형 할인점, 물류센터, 다목적 홀, 소극장, 컨벤션 센터, 시민 생활체육의 장으로 활용하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또한 향후 원천 유원지와 세계의 유명한 성을 모형으로 전시하는 화성미니어처공원의 연계를 계획하였다.
이와같이 2002년 한일월드컵을 개최하며, 미국 대 포르투갈(6월 5일), 세네갈 대 우루과이(6월 11일), 브라질 대 코스타리카(6월 13일)의 조별리그전을 치렀고, 스페인 대 아일랜드(6월 16일)의 16강전도 개최하며 ‘빅 버드’의 고공행진이 시작되었다.
Part 2. 역사적인 ‘명승부’의 현장, 그리고 ‘월드컵’
2001년 5월 13일. 또 하나의 ‘꿈의 구장’의 탄생한 그 날. 수원 월드컵 경기장의 개장경기가 열렸다. 그것도 다름 아닌 ‘수원컵 국제 청소년 축구대회’로 수원의 축구 명문 ‘수원고’와 바르셀로나 유스팀과의 경기가 열렸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수원 월드컵 경기장의 1호골을 뽑아낸 선수는 스페인의 ‘텔레치아’였다. 그는 전반전에 패널티킥으로 골을 성공시키며 개장 이 후 첫 골을 뽑아냈다. 후반전에 수원고의 박범훈이 역시 패널티킥으로 동점골을 뽑아냈지만, 연달아 두 골을 허용하며 1-3 패배를 했다.
당시 바르셀로나의 엔리크 다비드 감독은 “수원 월드컵 경기장의 잔디와 각종 시설이 모두 완벽해서 좋은 경기를 치렀다”고 소감을 밝혔다. 비록 개장경기는 수원고가 패배했지만, 날개를 활짝 피고 새로운 시작을 다짐한 수원의 상징물인 ‘빅 버드’의 화려한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임은 분명했다.
2002년 5월 26일 수원 월드컵 경기장. 역사적인 대한민국 땅에서의 월드컵 축구 개막이 임박한 시점에서 한국 국가대표팀과 ‘우승후보’ 프랑스 대표팀과의 정예 대결이 펼쳐졌다. 당시 히딩크 국가대표팀 감독의 월드컵을 앞 둔 마지막 평가전이자 2001년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 당한 0-5의 치욕을 기억하는 축구팬들에게는 ‘긴장과 기대’라는 첨예한 심리적 대립을 이끌고 ‘빅 버드’에 시선을 향했다.
전반 16분. 프랑스의 트레제게가 왼쪽에서 올라온 앙리의 크로스를 논스톱 오른발슛으로 연결하며 선제골을 뽑아 냈다. 당시 상승세로 월드컵을 맞이하던 대표팀에게 역시나 프랑스와의 마지막 평가전은 부담이었을까. 선수 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의 마음은 같았을 것이다. 걱정과 근심이 교차할 무렵 전반 26분, ‘수원사나이’ 박지성(현 맨체스터)이 환상적인 왼발슛으로 동점골을 뽑아내며 빅 버드의 4만 관중을 열광시켰다. 이어서 전반 41분에 설기현이 이영표의 프리킥을 헤딩슛으로 연결하며 역전골을 뽑아냈다. 달라진 대표팀의 위력을 확인할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비록 후반전에 프랑스의 뒤가리와 르 뵈프에게 연달아 골을 허용해 2-3 석패를 당하기는 했지만, 월드컵 첫 경기를 앞두고 몰라보게 달라진 대표팀을 두고 세계 각 언론에서의 찬사와 더불어 국민들의 호응을 얻었다.
‘빅 버드’에서의 대표팀 마지막 평가전은 2002년 한일월드컵의 4강신화를 이룩하는데 있어서 밑거름이 되었고,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던 기억으로 남고 있다.
2004년 12월 12일에는 김호 감독의 바통을 넘겨 받은 차범근 감독의 수원 삼성이 5년만에 K리그 패권을 놓고 ‘빅 버드’에서 포항과 만난 날이다. ‘스틸야드’ 에서의 1차전을 0-0 무승부로 마친 수원은 홈에서 2차전을 치르게 되었다.
어느 때보다 경기에 대한 집중력이 높았던 두 팀은 한 치의 공간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역시 전,후반내내 ‘우승골’을 성공시키지 못하며 또 다시 연장전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치열한 사투를 벌인 연장전마저도 골 맛을 보지 못했고, 결국 2004 K-리그의 우승컵은 운명의 승부차기로 이어졌다.
수원과 포항이 두 번째 키커까지 모두 성공한 상황. 수원의 세 번째 키커로 나온 김두현이 침착하게 골을 성공시켰지만, 포항의 이민성(현 서울)의 슛이 골대를 맞고 나왔다. 그러나 포항에는 김병지(현 서울)가 있었다. 수원의 네 번째 키커로 나온 김진우의 슛을 막아냈고,이어진 코난의 골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이어진 수원의 마지막 키커인 우르모브가 성공시키며 4-3 상황이 되었다. 그리고 이후의 K리그 역사상 가장 기억에 남는 ‘명장면’ 이 나온다. 포항의 마지막 키커는 골문을 지키던 김병지였고, 이를 막아낼 수원의 수문장은 지난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김병지를 제치고 대표팀 골문을 지켰던 이운재였다. 두 라이벌의 창과 방패의 대결이 한국 프로축구. 그것도 챔피언 결정전에서 벌어졌다.
그러나 승리의 여신은 이운재의 손을 들어주었다. 김병지가 찬 공은 다소 빗맞으며 이운재 손에 걸렸고, 실패 후에 한 곳을 응시하며 실망하는 김병지의 시선 앞으로 이운재는 마치 월드컵 4강을 재현한 양. 벤치 쪽으로 포효하며 달려갔다.
‘빅 버드’에는 우승을 자축하는 폭죽을 쏘아올렸고, 수원의 선수들 뿐만 아니라 임직원들. 그리고 수원 홈 팬들이 한데 엉겼다. 승부차기의 접전 끝에 2004 K리그 패권을 차지하는 순간이었다.
Part 3. ‘빅버드’의 동반자 ‘그랑블루’
국내 최대의 서포터즈 클럽인 수원 삼성의 ‘그랑블루’. 그들의 길고긴 역사 만큼이나 수원 월드컵 경기장의 역사는 그들의 일부이기도 하다.
2006년 11월 12일 수원 월드컵 경기장. 2년만에 다시 챔피언 결정전 진출을 노리는 수원이 또 다시 포항과 플레이오프에서 격돌했다. 경기에 대한 긴장감과 설레임을 앉고 있을 무렵. 필자는 경기 시작 전, 그랑블루의 현장팀장을 만나서 대화를 나누었다.
“수원종합운동장에서 경기를 계속 함께하다가 빅버드에 와서 경기를 하니까 처음에는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 우리도 전용구장이 생겼구나...’ 하는 것이죠. 감회가 상당히 남달랐던 기억이 계속 들었고, 이 외에도 새로 지어진 경기장이니까 깨끗하면서도 세련된 느낌을 받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수원월드컵경기장의 첫 출발을 그는 생생하게 기억하면서도 벅차오른 느낌을 전했다. 그러면서 그는 최고의 명승부의 현장에도 함께 하였음을 떠올렸다.
“2003년 K리그 최종전을 대구 FC와 빅 버드에서 가졌어요. 그 경기는 상당히 특별한 의미의 경기였는데 바로 김호 전 감독님의 고별전이었어요. 모두가 승리를 하고 감독님을 보내고 싶었는데 당시 1-1이던 상황이었는데, 후반 48분에 저희가 프리킥을 얻었어요. 내심 모두가 한마음이 되서 지켜보았는데 김두현 선수가 골을 넣은거예요. 정말 영화보다 이렇게 멋진 것이 있구나하고 저희만의 최고의 추억으로 남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2003년 11월 16일 ‘빅 버드’. 기적 같은 명승부가 연출이 되었다. 수원의 승리 과정은 그야말로 축구의 속어 ‘각본 없는 드라마’였다. 당시 김호 감독은 대구와의 시즌 최종전이 8시즌째 수원을 맡은 후 마지막 고별전이었다.
초반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수문장’ 이운재는 마치 2002년 한일월드컵의 8강 스페인전을 연상시키듯 전반전 대구의 인지오의 패널티킥을 선방했다. 그러나 후반 초반에 평범한 볼을 놓치며 대구에게 선제골을 허용하고 말았다. 그러나 수원의 선수들은 어느 때보다 열심히 뛰었고, 서포터즈 ‘그랑블루’의 목청은 더욱 컸다. 이러한 기세를 모아 후반 29분 나드손이 동점골을 성공시키며 한숨을 놓았다.
그러나 수원 선수들은 만족하지 않았다. 분명 이날의 목표는 ‘승리’ 하나뿐. 그래서 더욱 열심히 뛰었다. 후반 종료 직전 얻어낸 수원의 프리킥은 어느 때보다 숨이 멎었다. 그리고 그 앞에 김두현이 섰다. 모두의 시선은 빅 버드 스타디움안의 축구공과 김두현의 오른발에 고정되었다. ‘긴장과 초조’라는 기류가 흐를 무렵, 김두현의 프리킥은 영화같이 대구의 골망을 흔들었다. 모두가 두 손을 머리위로 솟구치며 환호했고 포효했다. 2-1 수원의 승리였다.
‘수원의 영원한 레전드’ 김호 감독은 경기 후에 그랑블루 서포터즈에게 화답했고, 그의 화답에 그랑블루는 다 같이 눈물을 흘렸다. 1996년 후기리그 우승을 시작으로 총 14번의 챔피언 등극. 아시아클럽선수권과 슈퍼컵 2연패 등 아시아 최고 클럽으로 성장시킨 김호 감독과의 이별을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경기를 극적으로 이긴 후에 김호 감독님이 저희에게 오셨어요. 전날 서포터즈들이 다함께 선물한 옷과 머플러를 두르고 오셨더라구요. 그런 와중에 경기장에서 ‘My way'라는 노래가 흘러나왔어요. 감독님은 저희에게 고맙고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을 해주셨죠. 큰절을 하시는데 정말 많은 사람들이 울었어요. 기억에 남는 추억이죠”
“수원 월드컵 경기장은 우선 프로축구에 있어서는 크다는 생각은 들어요. 2만 5천명에서 3만명의 규모가 좋다고 생각을 하는데 일단 월드컵이 열렸던 경기장으로 4만의 수용을 하니까 수원이라는 도시에 비해 좀 크다는 느낌은 들어요”
현장팀장은 빅 버드에 대한 아쉬움에 대해서도 오랜 경험을 통해 서슴없이 밝혔다.
“골대 뒤에 우리가 응원하는 N석이 2층까지 있다는 것이 아쉬워요. 응원은 1층에서 이루어지니까 사람들은 2층으로 안 가려고하죠. 그래서 적정인원이 넘어도 계단, 구석, 장애인석, 난간 등에 모여있기 때문에 사람이 아무리 많이 와도 1층에 찬 인원 정도로만 보이게 되잖아요. 단층으로 길게 되었다면 거대해보이고 압도적일 것이고, 안전 면에서도 좋을텐데 아쉽게 생각합니다”
“2004년 7월 29일의 바르셀로나와의 친선전이었어요. 그 때는 다른 일반 분들도 상당히 많이 오셨는데 수원을 응원하는 분이 아니라도 경기를 즐기려고 오신 분들이나 유럽 축구를 좋아하는 분들이 많이 오셨어요. 당시 우르모브 선수가 프리킥을 성공시켜서 1-0으로 수원이 이겼는데 경기가 끝나고 물병이 날라들었어요. 그런데 정당하게 승리한 경기라고 생각하는데 왜 그런 행동이 있었는지 이해가 안가더라구요. 지금도 아쉬운 부분입니다”
그랑블루의 열정은 축구팬들에게는 낯설지 않다. 국내 서포터즈 문화에 있어서 선진 기류를 전달해준 클럽은 분명 그랑블루였다. 그런 그들에게 빅 버드의 존재는 열정을 뿜어낼 화력의 공간이자, 때론 쉼터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멀티플렉스와 같은 재미있는 시나리오로 영화를 보는 것도 참 편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희노애락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을 해요. 우선 자랑스러운 취미생활을 즐길 수 있는 좋은 공간이라는 사실은 그랑블루 어느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거겠죠?”
포항과의 챔피언 결정전 진출권을 앞둔 시점. 수원 월드컵 경기장의 발전 방향에 대해서는 그는 한 마디 던졌다.
“제가 알기로는 경전철이 지나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도로로만 다니던 교통이 분산이 되기 때문에 경기장을 찾는 것이 쉬울거예요. 그렇게 되어서 좀 더 많은 분들이 경기장을 찾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평일과 경기없는 주말에는 가족이나 연인 단위로 찾아와서 시민들과 가까운 곳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수원시의 일부분이라는 인식을 말이죠”
“조금 더 욕심을 낸다면 인근의 아주대학교와 좀 더 연관이 되어 젊은 층도 많이 흡수했으면 하고, 대학생들이 술을 마시고 노는 것도 좋지만 가끔 경기가 있는 날은 함께 경기장을 찾아서 젊음의 패기, 열기를 표출할 수 있는 곳으로 발전했으면 좋겠습니다”
Part 4. ‘빅 버드’의 미래
‘빅 버드’ 주변에는 언제나 놀거리와 볼거리가 많다. 그 중에서도 시민들의 관심을 받는 곳은 얼마전에 개관한 ‘수원 월드컵 기념관’이다. 이곳은 2002년 월드컵의 성공적인 개최를 축하하고 한국 축구 발전을 위해 만들어진 최초의 축구사료 전시관이다. 입구에 들어서면 ‘수원의 건아’ 박지성 ZONE이 위치해 있고, 그 외 안정환 ZONE을 비롯하여 한국 축구 역사를 보여주는 전시관이 있다. 그리고 내부에는 한일월드컵 당시의 마스코트들이 줄서있다. 단순하게 축구사료들이 외부 치장에 중점을 두지 않은 진정한 역사적 가치와 의미를 느낄 수 있도록 구성해 놓았으며 수원 시민들의 자부심을 드높일만한 것이 상당수 눈에 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개관하는 이곳은 “대~한민국”의 응원 소리에 또 한번의 그때의 희열과 감동을 전해주는 대표적인 장소로 관심을 받고 있다.
출처 : 수원 월드컵 경기장 관리공단
2004년 수원월드컵관리재단의 제3대 사무총장으로 부임한 박종희씨는 당시 “수원을 축구의 메카로, 스포츠 문화의 중심지로 만드는데 월드컵 관리재단이 적극 앞장서고 조직 내부 역량을 집결, 신나게 일하고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직장풍토를 조성” 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또한, “스포츠센터의 경영 수익을 상승시켜야 하는 것은 숙제라며 공격적인 경영 마인드를 통해 도민들이 신뢰할 수 있는 시설로 자리잡도록 하고 도민 개개인의 건강증진 활용의 장으로 높여나가겠다”라고 밝히며 개발 초기에 갖고 있던 컨셉에 맞게 추진할 것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수원 월드컵 경기장은 단순히 K-리그가 열리는 장소로만 인식되기 바라지 않고있다. 이곳은 수원 시민들이 언제나 자기 집같이 찾아올 수 있는 문화의 장소이자, 역사성이 있는 장소가 되기를 원한다. 경기장 관리공단에서는 지난 9월과 10월에는 ‘2006 우만 사랑 한마음 축제’를 개최하며 음악회 행사를 열어 지역민의 참여를 유도했고, ‘팔달 꿈나무 축제’와 ‘하늘이의 미술여행’과 같은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적인 부분에도 제공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이 수원 월드컵 경기장 관리공단에서는 다양한 문화행사와 지역민의 참여 이벤트를 시와 협의하여 적극적인 유치에 나서고 있다. 이는 곧 K리그 지역 연고의 출발점이자 미래를 열어가고 있는 지표이기도 하다.
경기가 끝난 후 빠져나오는 빅 버드의 분위기는 언제나 흐뭇하다. 수 천명의 그랑블루와 수 만명의 수원 시민들이 어우러진 열정과 환희의 분위기는 어느 새 익숙해져만 간다.
오늘날의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 중에서 가자 대표적인 것은 ‘열정’과 ‘감사’의 마음이다. 열정은 누구에게나 받을 수 있거나 배울 수는 없다. 스스로 불을 질러야 한다. 빅 버드를 찾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 불을 지르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선수들에게 감사하고 있다.
‘빅 버드’는 멈추지 않는 열정을 갖고 있다. 살면서 미쳤다는 말 한 번도 듣지 못했다면, 한번도 목숨 걸고 도전한 적이 없다면 그것은 서글픈 일이다. 하지만 빅 버드가 꿈꾸는 이상과 거침없는 도전은 ‘축구의 메카 수원’과 ‘미래를 향한 수원’이 계속 존재할 것이라는 확신과 믿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K-리그 명예기자 김용일
첫댓글 빅버드 올해 3번갔어 ㅎㅎ 경기한번 보러 가는데만 5만원은 넘게 쓰지만 내가 좋아해서 가는거라 ㅎㅎㅎㅎ 월드컵갈비가 인상적ㅋㅋㅋㅋㅋ
와우..정말 수원축구의 메카!! 우리나라에서 제일 훌륭하군요..^^
K리그 전 구단이 빅버드급의 성원과 관심을 받기를 바랍니다. 개인적으로 성남에살아서 그런지는몰라도 성남의 서포터 현실 부끄럽습니다. 챔피언결정전이 걱정이네요 ㅋ
빅버드 ... 25일 수원의 우승트로피를 드는 날이 될겁니다. 아자아자 빠샤~ 수원
서울유나이티드가 기록 갱신할거같음..
우리 구단이 다들 수원 만큼만 됬으면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