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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산경표 따라 걷기 (광인 산행자료창고) 원문보기 글쓴이: 광인
내 인생에서의 마지막 지리산 종주... 그러나
성삼재(861번 지방도로)-노고단-돼지령-x1411.6-임걸령-노루목-삼도봉(1501.0)-x1343.1-토끼봉(1535.3)-x1477.0-명선봉(△1583.4)-연하천대피소-삼각고지(1484.0)-부자바위-형제봉(1452.8)-벽소령-덕평봉(1521.0)-선비샘-칠선봉(1558.3)-x1562.3-영신봉(1651.6-세석대피소-촛대봉(1703.1)-x1693.6-연하봉(1723.3)-장터목대피소-유암폭포-칼바위-중산리
실거리 : 31km
지리산국립공원 (전북 남원시 전남 구례군 경남 하동군 진주시 함양군)
도엽명 : 운봉 산청
백두대간의 남쪽 끝에 가장 크게 솟아 있는 산이자 남한에서 제주도 한라산 다음으로 높은 산에 가장 육중한 산이며 1967년 국립공원 1호로 지정된 지리산은 3개道(전북.전남.경남) 5개郡(남원.구례.함양.하동.산청군)에 걸쳐있으며 그 넓이가 440.5㎢로서 한국의 육상 국립공원으로서는 가장 넓다
가장 넓다는 것은 어느 정도일까? 단순 숫자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데 설악산국립공원보다 70.5㎢가 넓으며 북한산 국립공원의 5.5배라면 어느 정도 짐작이 갈는지 모르겠지만 대략 평수로 따진다면 1억3000만평 정도 지리산은 깊다
지리산은 方丈山.혹은 頭流山.南岳山.方壺山으로도 불렸다하며 현재의 한자는 智異山인데 그대로 읽으면 지이산 이다
地理山이나 地利山도 있는데 智異山으로 굳어 진 것은 佛家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하는데 문수보살이 지리산의 다른(異)神들을 교화시켰다(智)는 뜻이라 한다
아무튼 종주의 능선은 이름이 있는 봉우리마다 오르내림이 이어지지만 뚜렷한 등산로 이정표로 체력만 따라준다면 어려움은 없고 곳곳에 몇 곳의 탈출할 곳이 있다.
◁산행후기▷
2022년 5월 22일 (일) 맑음
홀로산행
내 인생에 마지막 지리산 종주라고 한 것은 이제 나이도 있고 체력도 있기에 지리산 개별코스야 가겠지만 먼 여정의 종주는 계획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 것도 예전에 하던 화-대종주야 언감생심 계획도 세울 수 없겠고 그냥 성-중 종주나 하자고 내 수 십년 산행에서도 몇 차례 이용하지 않았던 안내산악회로 무박산행에 들어간다
지리산 종주야 8~90년대 고전적 종주 몇 차례와 백두대간 종주 태극종주로 제법 많이 했었지만 2000년대 들어서는 지맥완주에 전념하느라 오랜만이다
그런데 막걸리 3병에 일 년에 한번 사용할까말까 하는 온갖 것들이 다 들어간 48리터 배낭을 메고 가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듯 내가 시대에 뒤 떨어진 느낌이다
성삼재는 마한 때 성씨가 다른 세 명의 장군이 지켰던 고개라 하여 성삼재 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진다
▽ 산행 중 바라본 제석봉 천왕봉
▽ 03시 성삼재를 출발할 수 있게 개방한다
▽ 넓고 좋은 길을 따르다가 성삼재에서 30분 소요하며 올라선 약1.335m 노고단대피소 사실 걸어온 길은 백두대간 마루금은 아니다
▽ 어둠 속에서 고운 하늘을 보며 이른 시각 억지로 빵조각을 씹으며 일부러 25분을 지체하고 출발한다
▽ 노고단 정상 쪽 능선의 좌측사면으로 이어지는 등산로를 따르다가 능선을 만나는 圖上 돼지령이다
▽ 편안하게 진행하다가 살짝 올라선 x1411.6m
노고단단은 천왕봉(1915.4) 반야봉(1731.8)과 함께 지리산 3대봉의 하나이며 백두대간에 속한다
신라시대에 화랑국선(花郞國仙)의 연무도장이 되는 한편 제단을 만들어 산신제를 지냈던 영봉(靈峰)으로 지리산국립공원의 남서부를 차지한다
노고단이란 도교(道敎)에서 온 말로 우리말로는「할미단」이며 ‘할미’는 국모신(國母神)인 서술성모(西述聖母:仙桃聖母)를 일컫는 말이다
반소매가 춥다고 느낄 정도로 바람이 불어대니 낮 시간 시원하게 산행할 수 있겠다 싶으며 달려오는 산악마라톤을 하는 사람들에게 연신 길을 비켜주느라 지체하는데 앞으로도 몇 시간동안 그런 형태의 산행이 이어진다
▽ 어둠 속에서 동쪽 불무장등을 쳐다보고
▽ 북쪽 심원계곡 쪽 x1263.3m 분기봉을 지나며 내려서는 곳 안부도 아닌 곳에 돼지령 표시 다
▽ 바로 앞 x1383.4m 좌측사면으로 지나가기 전 사진 좌측 반야봉을 본다
▽ 피아골삼거리 우측 피아골대피소2.0km 직전마을6.0km
▽ 안부에서 조금 오른 지점에 임걸령 표시 이후 노루목까지 은근한 오름이다
▽ 노루목에서 밝아지면서 돌아본 지나온 능선과 노고단
▽ 불무장등
▽ 노루목에서 첫 막초 마시며 땀을 식히며 그 예전 반야봉 묘향대 심원 뻔질나게 다니던 추억을 떠 올려본다 천왕봉20.0km다
조선 선조 때의 좀도둑 임걸년은 화개장터에서 넘어오는 보부상을 털거나 지리산의 사찰을 털었는데 그는 한참 강성했을 때는 지리산의 모든 사찰을 털었다고 전해진다
임걸령은 그가 활동한 장소라 해서 임걸령 이란 이름이 붙게 되었다
반야봉(1731.8)을 오르지 않고 우측사면으로 이어지는 산죽사이의 등산로는 이제 지리산 특유의 울툭불툭 바위들이 밟히며 진행하는데 일출이 시작되는 듯 햇볕이 비춰진다
▽ 반야봉을 올랐다면 다시 내려서는 마루금이며 卍묘향대로 갈수 있다
▽ 삼도봉을 바라보며 오름이다
▽ 반야봉을 배경으로 한 삼도봉 정상
▽ 삼도봉에서 당겨본 바로 앞 목통(칠불)능선과 멀리 남부능선이다
▽ 우측 목통골을 내려다 보지만 오늘 전반적으로 조망이 없고 답답하다
▽ 화개재까지 고도를 팍팍 줄여야 한다
▽ 바로 앞 x1343.1m와 저 앞 토끼봉을 보며 내려선 화개재 좌측 뱀사골 쪽 반선9.2km다
▽ 화개재에서 돌아본 삼도봉과 반야봉
▽ x1343.1m 정상 오르지 않고 좌측 바로 아래로 진행한다
▽ 이후 토끼봉 오름은 표고차 200m 정도 꾸준한 오름이다
삼도봉은 다른 이름으로는 날나리봉이며 삼도봉이라는 이름은 전라북도(남원시 산내면)·전라남도(구례군 산동면)·경상남도(하동군 화개면)의 3도에 걸쳐있기 때문이다
날라리봉의 지명 유래에 관해서 정상의 바위가 낫의 날처럼 생겼다고 하여 낫날봉 인데 음이 변형되어 날라리봉 늴리리봉(닐리리봉) 등으로 불렀다고 한다
1998년에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삼도의 표지석을 세우면서부터 삼도봉으로 부르기 시작하였다
토끼봉 오름은 성삼재 출발 이후 처음으로 제법 꾸준하게 힘 든 오름이 이어지며 나같이 수시로 조망을 즐기는 것과 달리 그냥 달리는 형태의 종주가 요즘은 대세인가 보다
▽ 토끼봉 헬기장 우측 칠불능선과 빗점골 왼골 분기점이기도 하다
▽ 헬기장에서 살짝 오른 실제 토끼봉 정상
▽ 토끼봉 이후도 철쭉들이 아직도
▽ 토끼봉을 다 내려서면 한동안 아주 편안한 이런 능선만 이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 짧지만 가파른 오름이면
▽ x1477.0m 다
▽ 북쪽 명선봉 오름이 꾸준하게 이어진다
▽ 약1535m 좌측 뱀사골 쪽 x1068.5m 분기봉 까지 힘들게 올랐고 북쪽에서 북동쪽이다
▽ 동쪽 역광에 진행할 덕평봉 칠선봉 영신봉 등 겹겹이 보인다
▽ 명선봉이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며
토끼봉의 옛 이름은 묘봉(妙峯)으로 보이며 묘봉 이라는 이름은 묘봉암(妙峰庵)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남효온(南孝溫1454~1492)의「지리산일과(智異山日課)」에 만복대(萬福臺) 동쪽에는 묘봉암(妙峰庵)이 있다"라는 내용이 있다
묘봉(妙峯)이라는 명칭은 정석구(丁錫龜1772~1833)의「두류산기(頭流山記)」에 나온다
"만복대에서 뻗은 산줄기는 조금 아래로 내려와 솟아서 묘봉(妙峯)이 되니 산동의 주봉이다 (중략) 반야봉이 묘봉과 마주하였다"라고 기록하였다
그런데 같은 책에 "산줄기가 토현(兎峴)을 지나면 이 아래는 문수사와 연곡사가 있다"라고 적고 있는 것으로 보아 토끼봉과 토현(兎峴)이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토끼봉의 한자어인 묘봉(卯峰)이라는 표현은 1906년에 지리산을 유람한 김교준(金敎俊1883~1944)의「두류산기행록(頭流山記行錄)」과 1941년에 산행한 양회갑(梁會甲1884~1961)의「두류산기(頭流山記)」에서 보인다
따라서 묘봉(卯峰)은 묘봉(妙峯)이 와전되어 생겼을 가능성이 있고 근대에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묘봉(卯峰)의 한글 명칭으로서 토끼봉이라는 공식 지명이 되었다
꾸준하게 오름이 이어지는 명선봉 오름도 지루하고 정상에서 30m 정도 아래서 좌측사면으로 이어지는 등산로를 따르다가 푹신한 풀밭을 밟으며 명선봉 정상과 삼각점 확인을 위해 정상을 올라서 조망을 즐기고 연하천대피소로 향한다
▽ 글씨 확인을 못한 삼각점의 명선봉 정상
▽ 가야할 능선 오르내리는 봉우리들 멀리 천왕봉이 흐릿하게 보인다
▽ 크게 본 남동쪽 멀리 삼신봉 등의 남부능선은 낙남정맥이다
▽ 오랜만에 와본 연하천대피소는 새로운 건물이고 10.5km노고단고개↔천왕봉15km 다
▽ 연하천에서 편안하게 진행하며 올라갈 삼각고지를 본다
▽ 의신골과 와운골 안부 음정마을6.6km 벽소령대피소2.9km 표시다
▽ 갈림길 안부에서 3분 만에 올라선 삼각고지 정상 돌아본 명선봉이다 삼각고지 북쪽으로 분기한 중북부능선은 영원령을 지나 삼정산(1156.2)로 이어진다
▽ 형제봉을 향해서
▽ 올라갈 형제봉을 당겨본다
▽ 외부자바위에서 남쪽 의신골을 본다 오늘 조망이 시원찮다
▽ 부자바위 우측아래로 지나간다
명선봉 일대의 울창한 수림은 빨치산의 활동무대가 되어 여순반란사건과 한국전쟁 당시 은신처였다고 한다
삼각고지에는 군사용 벙커 흔적이 남아 있는데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이 빗점골에서 최후를 맞이하기 전까지 이 일대를 무대로 활약하며 치열한 전투를 벌였기 때문에 삼각고지~명선봉~벽소령 일원을 ‘피의 능선’이라 부르는 이도 있다
삼각고지 동쪽의 형제바위에는 전설이 있다 "지리산에서 두 형제가 수도를 하고 있었다 두 형제에게 반한 연하천 요정이 두 형제를 유혹하였지만 두 형제는 끝끝내 요정의 유혹을 물리치고 득도했다
그러나 성불한 후에도 집요한 연하천 요정의 유혹이 이어지자 두 형제는 서로 등을 맞대고 부동자세로 유혹을 경계하는 바람에 그만 몸이 굳어 그대로 두 개의 석불이 되고 말았다"는 내용이다
▽ 형제봉에서 가야할 능선 바로 앞 오르지 않을 x1399.4m 좌측 아래가 벽소령이고 세 번째가 덕평봉이다
▽ 내려서는 능선
▽ 시설물이 있는 x1399.4m는 오르지 않고 좌측사면으로 가며 멀리 덕평봉이다
▽ 삼각고지에서 우측으로 분기한 중북부능선을 본다
▽ 벽소령에서 돌아본 형제봉 삼각고지 좌측 음정마을6.7km 우측 의신마을6.8km다
▽ 벽소령대피소 뒤로 오르지 않고 지나온 x1399.4m를 본다
▽ 멀리 이후 힘겹게 올라갈 덕평봉이다
▽ 능선의 x1432.6m 우측아래 낙석지대로 지나가는데 약간 지루한 구간이다
▽ 능선의 x1382.5m 바로 아래 벽소령1.1km↔세석대피소5.2km고 막초 마시며 휴식이다
경상남도 함양군의 마천면 삼정리와 하동군 화개면 대성리 사이를 잇는 지리산의 고개 벽소령은「택리지」에 벽소(碧霄)라는 용어가 나타난다
"지리산 북쪽은 모두 함양 땅이며 영원동·군자사·유점촌이 있는데 남사고는 복지라 하였다
또 벽소운동(碧霄雲洞)과 추성동은 다 같이 경치 좋은 곳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벽소운동은 골짜기를 표현한 것이지만 벽소령이라는 명칭과 관련이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1807년 지리산을 유람한 하익범(1767~1815)의「유두류록(遊頭流錄)」에도 "벽소령 냉천점(冷泉岾) 70리에 이르러서부터 비로소 아래로 내려가는 길로 바뀌었다"라는 내용이 있다
「영남지도」(함양)와「광여도」(함양)에는 벽수령(碧愁嶺)으로 표기되었다 달밤에 푸른 숲 위로 떠오르는 달빛이 희고 맑아서 푸르게 보인다 하여 벽소령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벽소령에는 세 부자(父子) 바위 설화가 있는데 '나무꾼과 선녀'의 스토리와 같으며 남편과 아이가 하늘로 올라간 선녀(어미)를 기다리다 벽소령 높은 곳에 세 바위가 솟아올랐다는 이야기이다
▽ 북쪽 오공능선 분기점에서 올라갈 덕평봉을 본다
▽ 남쪽의 꾸준한 오름은 정상직전 우측사면으로 돌아 오른다
▽ 좌측 위 덕평봉 정상 바로 아래 지점 덕평봉 정상을 대신하자
▽ 선비샘
▽ 덕평봉 정상에서 능선으로 내려선 지점
▽ 칠선봉을 보며 마지막으로 내려서고
▽ 칠선봉 오름 두 곳의 바위능선지대 좌측사면으로 오른다
▽ 올라선 칠선봉에서 앞 영신봉과 멀리 천왕봉 중봉 써레봉이 보인다
▽ 그러나 남쪽 x1371.0m 분기봉 바로 다음 바위지대에 칠선봉 표시다
▽ x1562.3m 정상 좌측 바로 아래 지점이다
덕평봉은 하동의 주요 관찬지리지와 군현지도에는 나타나지 않아 지명의 유래를 확인하기 어렵다
1930년대의 지리산 유산기에는 덕평(德坪)이 나오는데 1934년에 지리산을 유람한 정기(鄭琦1879~1950)는 산행 중에 덕평에서 하루를 묵었다고「유방장산기(遊方丈山記)」에 적고 있다
김택술(金澤述1884~1954)의「두류산유록(頭流山遊錄)」에도 덕평이 나오는데 "1934년 4월 1일에 백무촌(白武村)을 떠나 직치(直峙)를 거쳐 덕평(德坪)을 찾았다 길은 점점 넓어진다 평평한 곳에는 비록 높은 산과 깊은 골짜기더라도 종종 인가가 있다"라고 기록하였다
덕평에는 일제강점기 때까지 30가구 정도가 살았다고 한다
덕평은 화개·세석 등과 함께 지리산 청학동의 한 장소로도 지목된 바 있다 선비샘 아래에 상덕평과 하덕평이 있고 천우동(天羽洞)이라는 새김글이 남아 있어 이곳이 청학동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예부터 있었다고 한다
「두류산유록(頭流山遊錄)」에도 덕평의 청학동 관련 내용이 있다
x1562.3m를 지나면서 고만하다가 저 앞 험상한 바위가 보이는 영신봉 오름이 시작되고 영신봉도 정상 우측 아래로 지나가지만 예전 몇 차례 정상을 올라보았기에 바쁜 여정 때문에 세석으로 향한다
▽ 전면 험상한 바위가 보이는 영신봉 오름이다
▽ 뒤 돌아본 칠선봉
▽ 아까 보이던 바위지대 좌측사면으로 오름이다
▽ 오르면서 연하봉 제석봉 천왕봉 중봉을 당겨본다
▽ 영신봉을 향해서
▽ 좌측 위가 영신봉 정상이고 그 아래 등산로에 영신봉 표시 다
▽ 예전에 찍었던 영신봉 정상
▽ 남부능선 삼신봉
▽ 올라갈 촛대봉이 보이고
▽ 영신봉 아래 헬기장
▽ 좌측 한신계곡 갈림길 백무동6.5km↔거림6.0km에서 막초 휴식
조선시대 하동의 주요 관찬지리지와 군현지도에는 영신봉이 표기되어 있지 않다
영신봉의 이름은 영신사(靈神寺)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이며「신증동국여지승람」(진주)에 "영신사(靈神寺)는 지리산에 있다 절 뒤 봉우리에 깎은 듯 한 돌이 섰고 그 꼭대기에 작은 돌이 평상처럼 놓여 있는데 좌고대(坐高臺)라 부른다"라는 기록이 있다
1472년에 지리산을 유람한 김종직(1431~1492)의「유두류록(遊頭流錄)」에는 "영신봉과 좌고대(坐高臺)를 바라보니 여전히 멀리 있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한신계곡 갈림길에서 휴식하며 막걸리 세 통에다 일 년에 한번 사용할일 있을까 말까하는 온갖 것들이 들어있는 48리터 배낭을 메고 종주에 나선터라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기에 천왕봉 찍고 중산리로 하산한다면 버스시간 맞추기가 어려울 것 같아 장터목에서 중산리로 하산하기로 마음을 굳힌다
뭐 산악회버스가 아니었다면 밝을 때 천왕봉 오르고 하산할 수도 있겠지만 수 십 차례 지리산 올랐던 것이니 아쉬울 거 없다
▽ 촛대봉 오름에서 돌아본 세석대피소와 영신봉
▽ 촛대봉을 향한 은근한 오름 이 일대 90년대까지만 해도 온통 야영지로 황폐화 되었던 곳이다
▽ 크게 본 영신봉과 아득히 반야봉
▽ 촛대봉
▽ 촛대봉에서 바라본 제석봉 천왕봉 중봉
▽ x1693.6m로 향하는 능선
▽ 우측아래 도장골
▽ 우측 도장골 쪽 분기봉에서 중앙 비죽한 x1693.6m 그 좌측 연하봉 중앙 뒤 제석봉 천왕봉 순이다
▽ 좌측아래 한신계곡과 멀리 백무동이다
▽ 올라선 바위의 x1693.6m 정상
▽ 연하봉과 우측 일출봉과 일출능선 천왕봉도 보인다
세석평전은 잔돌이 많은 평야와 같다고 하여 세석평전이란 이름이 붙었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지리산 유산록에는 외세석(外細石)·내세석(內細石)·세석평(細石坪)·세석평전(細石坪田) 등의 관련 지명들이 등장한다
그중에서 현재의 명칭으로 굳어져 있는 세석평전이라는 용어는 일제강점기 이후부터 일컬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1807년 지리산을 유람한 하익범(1767~1815)의「유두류록(遊頭流錄)」에는 세석평지(細石平地)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송병선(1836~1905)의「지리산북록기(智異山北麓記)」와「두류산기(頭流山記)」에는 세석평(細石坪)이라고 기록하였다
세석평전이라는 용어는 1940년 지리산을 유람하였던 이병호(1870~1943)의 「유천왕봉연방축(遊天王峰聯芳軸)」에 나오며 그 밖에도 20세기 초반의 지리산유산기인 김택술의「두류산유록(頭流山遊錄)」정기의「유방장산기(遊方丈山記)」정덕영의「방장산유행기(方丈山遊行記)」등에도 세석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 다시 돌아본 지나온 능선과 반야봉
▽ 연하봉을 향해서 오름
▽ 도장골
▽ 실제 연하봉 정상 직전 연하봉 표시 장터목대피소0.8km다
▽ 실제 연하봉 정상과 저 앞 제석봉과 천왕봉이다
▽ 장터목 인근 초여름 날씨인데 이제 얼레지들이 꽃을 피우고 있다
▽ 장터목대피소 백무동5.8km↔중산리5.3km 다
▽ 중산리 골자기와 좌측 법계사능선 그 뒤는 구곡능선이다
촛대봉의 옛 이름은 촉봉(燭峰) 혹은 촉대봉(燭臺峰)이었고 촉봉 혹은 촉대봉이 오늘날의 한글 명칭으로 촛대봉이 되었다
1879년에 지리산을 유람하고 쓴 송병선(宋秉璿1836~1905)의「두류산기(頭流山記)」에는 "촉봉(燭峰)이 우뚝 솟아 있었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정기(鄭琦1879~1950)의「유방장산기(遊方丈山記)」에는 촉대봉(燭臺峰)으로 나오는데 "운무를 헤치고 천왕봉을 향하는데 겨우 촉대봉(燭臺峰)에 이르렀다 북풍에 비바람이 불고 운무가 날려 지척도 분간할 수 없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장터목대피소 중산리 방향 샘터인근에서 마지막 막걸리 마시며 잠시 숨을 돌리고 하산을 한다
지리산 수많은 능선 골자기들을 많이도 다녔지만 이 뻔한 코스는 이제 두 세 번째인 것 같다
부지런히 달려 내려서지만 2시간30분 소요하며 탐방소를 살짝 지난지점 도착해서 식당에서 샤워 옷 갈아입고 소주 1병 반주삼아 식사 후 잠에 빠져 돌아온다.
▽ 중산리 골자기 하산
▽ 해발 약1240m 지점 계곡 북쪽 통신골 합수점 저 동네 몇 차례 가본 곳이다
▽ 가물었다 유암폭포 수량이 ...
▽ 돌아본 통신골 상부 제석봉과 통천문 일대 되겠다
▽ 부지런히 하산
▽ 칼바위 주변에 사진 찍는 사람들 안 보이게 하려니 구도가...
▽ 걸음을 멈춘다
첫댓글 저개인적으로 지리산은 늘 가슴이 벌렁거리게 하는 산인데요. 또 심하게 요동칩니다^^^
무학님 오랜만입니다
2010년 대 지리산 골골 과 능선을 많이도 다녔습니다
이젠 그런 빡센 산행 계획조차 잡기 힘 든 세월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려
지리산 간지도 오래된 듯 합니다,,저도 한번은 다시 걸어보고 싶은 구간이고예 ~~왠지 마지막이란 단어가 찡 합니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