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전한 성소
히 9:11-22
11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15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6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17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유효한즉 1)유언한 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효력이 없느니라
18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19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두루마리와 온 백성에게 뿌리며
20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21 또한 이와 같이 피를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히 9:11-22 /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제 우리가 가진 이 더 나은 제도의 대제사장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닌, 다시 말하면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하늘의 더 위대하고 완전한 성전으로 들어가셨습니다. 12)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 번 안쪽에 있는 지성소에 들어가 피를 뿌리셨습니다. 그 피는 염소나 송아지의 피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피를 흘리셔서 그 피로 몸소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을 보증해 주신 것입니다. 13) 만일 옛 제도 아래서 황소나 염소의 피와 암송아지의 재가 사람들의 몸을 죄악에서 씻어 낼 수 있었다면 14) 하물며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마음과 생활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더욱 확실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희생은 옛 율법에 얽매여 있는 고통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기쁜 마음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그것은 영원히 살아 계시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티끌만한 죄도 흠도 없으신 그리스도께서 기꺼이 하나님께 자신의 몸을 드려 우리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 덕분입니다. 15) 그리스도께서는 이처럼 새로운 계약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옛 제도 아래서 범한 죄의 형벌에서 인간을 구원하려고 죽으셨기 때문에 그분에게 초청받은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놀라운 복을 영원히 받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16) 만일 어떤 사람이 재산 상속인을 정해 놓은 유언장을 남겼다고 합시다. 그러나 그 재산은 유언장을 남긴 사람이 죽은 것이 증명될 때까지는 아무도 손댈 수가 없습니다. 17) 유언은 유언한 사람이 죽은 후에야 비로소 효력을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아무리 그 재산이 상속인에게 약속된 것이라 하더라도 쓸 수 없습니다. 18) 이런 이유로 첫번째 계약도 효력을 발생하려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증명할 피가 뿌려져야했던 것입니다. 19) 모세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다 들려준 후에 물에 섞은 송아지와 염소의 피를 우슬초와 붉은 양털에 묻혀서 계약의 책과 모든 백성에게 뿌렸습니다. 20) 그리고 모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ㄱ) `이 피는 하나님과 여러분 사이에 맺은 계약이 효력을 발생하였다는 표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여러분과의 사이에 세우게 된 것입니다.' (ㄱ. 출24:8) 21) 또 모세는 성막과 예배에 쓰이는 모든 기구에도 이와같이 피를 뿌렸습니다. 22) 옛 율법 아래서는 모든 것이 피로써 깨끗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피흘림이 없이는 죄를 용서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언약과 완전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완전한 대제사장(11-14) 유대력 7월 10일은 속죄일(레 23:27)입니다. 이날에만 대제사장이 지성소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제사장이라고 할지라도 죄가 있으면 지성소에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신 것입니다. 첫 언약의 예법에서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확신에 찬 말을 합니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라고 했습니다. 예수의 제사는 옛 언약의 제사보다 우월한 것으로 양심을 깨끗하게 하고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게 하는 죄를 완전히 제거한 속죄의 제사입니다.
새 언약의 중보자(15-22) 예수의 희생은 첫 언약 아래 행한 죄를 속량하시려고 죽으시고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 약속하신 기업을 얻게 하셨습니다. 또한 종말론적 구속을 성취하셨습니다.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닙니다. 레위기에서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 17:11)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피를 뿌리며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출 24:8)라고 했습니다. 이제 새 언약의 시대를 여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잔을 나누시며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선지자 예레미아에게 예언하신 새 언약의 시대를 연 것입니다(렘 31:31-34).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것입니다. 여기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유언에 관하여 설명하며 예수께서 새 언약의 중보자가 되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죽어야만 하셨음을 말합니다. 예수가 죽으심으로 새로운 언약을 완성한 것입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가 피 흘리심으로 죄 사함의 은혜가 이 땅에 넘쳐흐르게 된 것입니다.
적용: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언제나 현재에 집중할 수 있다면 행복할 것이다. -파울루 코엘류.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매달려도 일은 쉽사리 마음대로 되지 않는 법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이 할 수 없는 일, 지나간 일이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일에 한눈을 팔고는 합니다. 우리는 새 언약의 사람으로서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어 죄사함의 은혜를 누리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설 교 >
예수 그리스도 피의 능력
히브리서 9:11-22
기독교의 심장인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은 지난 2000년 동안 기독교의 대적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을 통해 검증되고 체험되어 왔습니다.
죄인이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되어 하나님의 거룩함을 닮아가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되어 하나님의 천국을 영원히 상속받을 수 있는 열쇠는 십자가 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는 십자가의 증인으로 십자가를 사랑하며 주님의 보혈의 은총을 노래합니다.
구약의 성소와 제사제도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사건에 집중되어 있는 그림자일 뿐 실체가 아니기에 불완전합니다.
짐승을 잡아 그 피로 제사를 지낸다고 해서 우리 인간이 거룩하게 되지 않으며, 양심의 변화를 일으킬 수도 없습니다.
히9:9절을 읽겠습니다.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따라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나니”
따라서 우리에겐 새로운 양심의 변화와 진정한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하고, 반복의 필요가 없는 영원한 단번의 제사가 필요합니다.
그 영원한 단번의 제사가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예수그리스도 보혈의 능력을 통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축복된 삶의 원리를 살펴보겠습니다.
1. 예수의 보혈은 그 은총을 의지하는 자마다 속죄의 축복을 가져다줍니다.
12절을 읽겠습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주님의 보혈의 능력이야말로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실 뿐 아니라 구약의 제사제도와 성소가 이루지 못했던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구속 곧 죄사함은 다른 어떤 수단과 방법, 과정과 철학을 통하여서는 불가능하지만,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가능합니다.
또한, 예수그리스도의 피는 우리로 하여금 사망과 두려움에서 근본적인 해방을 경험하게 해줍니다.
계1:5절에 보면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라고 했습니다.
2. 예수의 보혈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회복시켜 줍니다.
히10:19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성소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자리이자, 하나님의 임재의 자리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와의 친밀했던 관계가 멀어졌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통해서 이 모든 관계의 장벽이 무너졌습니다.
우리의 계급장이나 높은 학문, 경험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갈 담력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또한 예수의 보혈을 통해 하나님과 화해한 사람들은 이웃과도 화해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엡2:13절에 보면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 졌느니라.”고 했습니다.
주님과 화목했다면 반드시 그 열매는 인간과의 관계 회복으로 나타납니다.
예수의 보혈을 통해 우리 인생의 소유권은 주님께로 옮겨졌습니다.
인생의 주권이 하나님의 손에 있기에, 우리는 우리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뛰어 다니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달려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보고 주님의 보혈을 묵상할 때마다 우리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신지를 알 수 가 있는 것입니다.
3. 예수의 보혈은 삶의 능력을 공급해줍니다.
14절을 읽겠습니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냐”
예수의 보혈이 우리의 삶에 하나님을 섬기는 능력을 공급해주십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들이 가지는 담대함이며 삶의 역동성입니다.
진실로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을 묵상한 자들은, 한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비록 허물이 있고 부족함이 있다할지라도 담대한 마음으로 용기백배하여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십자가의 보혈은 우리가 모든 대적에게서 승리할 수 있게 해줍니다.
계12:11절에 보면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들을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 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니라 공중의 권세 잡은 악의 영들에 대적하는 것입니다.
“우리 형제” 곧 천국에 올라간 믿음의 선배들은, 어린양의 피와 신앙고백을 통해서 대적 사탄과의 싸움에서 승리했습니다.
원자폭탄과 수소폭탄이 아닌 우리의 신앙고백과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게 될 때, 우리의 대적 사탄을 대적하여 너끈하게 승리할 수 있습니다.
히10:29절을 읽겠습니다.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아프리카 선교를 위해 일생을 헌신했던 영국의 데이비드 리빙스톤(David Livingston)이 고국에 돌아와서 “놀라운 희생을 치렀다.”는 치하의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결코 내가 희생적인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자신의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영광스런 아버지의 보좌를 떠나오신 예수님께서 치르신 위대한 희생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감히 희생이라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고현 믿음의 가족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십자가의 은혜를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 외면한 사람이 당할 형벌은 참으로 크다고 성경은 증거합니다.
우리 모두 이 시대의 삶의 현장에서 십자가의 증인으로 우뚝 섭시다.
그리고 영원한 속죄의 축복을 가져다주신 예수님의 보혈을 통해 삶의 능력을 공급받아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화목하고 이웃과 화해하는 행복한 삶을 누립시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
히 9:11-22 / 지성래 목사
히브리서 9장은 28절 분량이다. 1-10절은 ‘첫 언약’인 모세 때에 허락하신 회막에서의 제사만으로는 인간의 죄의 문제를 온전하게 해결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9절에서 말씀한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나니”라는 표현이 그런 뜻이다. 양과 염소와 송아지를 잡아 번제로 드리는 그 정도의 제사법으로는 인간의 죄의 문제를 온전하게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10절에서는 “이런 것은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改革) 할 때까지 맡겨둔 것이니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씀하는 ‘개혁’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둘째 언약으로 인한 새 언약의 완성을 말씀하신 것이다.
히브리서 9장 1-10절이 모세 때에 주어진 ‘첫 언약’의 한계에 대한 설명이라면 오늘 본문인 히브리서 9장 11-22절은 ‘둘째 언약’의 주인공이시며 ‘새 언약(言約)의 중보자(仲保者)’(히9:15)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자세하게 교훈하고 있다. 7장 22절은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라고 하였다. 8장 6절은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라고 하였다. 중보라는 원어는 ‘메시테스’(μεσιτηs)인데 ‘가운데’라는 뜻의 ‘메소스’에서 나온 말이다. 구약시대의 제사장은 하나님과 백성들의 죄 사이에서 백성들의 죄를 대신 사함 받기 위해서 중보자역할을 하였다. 하나님이 그런 직임으로 택하신 것이 제사장직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의 죄를 대신 사하는 중보자로 택하셨다는 의미이다.
오늘 말씀의 시작인 히브리서 9장 11절은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장래 좋은 일’이란 계속하여 수 없이 많은 양과 염소와 황소와 암송아지를 잡아 그 피를 뿌려 제사하는 번제(燔祭)로도 온전히 해결할 수 없던 죄 사함의 문제를 예수께서는 단번(單番)에 해결하셨다는 점을 언급한 내용이다.
그렇다. 예수는 이 ‘장래의 좋은 일’을 위해서 보냄을 받으신 대제사장이시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이란 때가 되어 이룩하신 ‘장래의 좋은 일’인 것이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 중에 ‘나의 죄를 씻기는’이란 제목의 찬송이 있다. 252장 찬송이다. 그 찬송의 가사에 보면 5절로 된 가사의 내용 중에 ‘예수의 피 밖에 없네’(nothing but the blood of Jesus)라는 내용이 10번이나 나온다. 맞다. 예수의 피 밖에 없다. 에수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이란 없다.
양과 염소와 송아지나 비둘기의 피로 해결 할 수 없는 죄 사함의 문제를 예수께서 친히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 승천하심으로 이룩해 주신 것이다. 할렐루야.
본문 말씀의 22절에 보면,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without the shedding of blood there is no forgiveness)고 하였다. 자, 그러면 본문이 말씀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란 무엇인가. 좀 더 자세하게 묵상하도록 하자.
영원(永遠)한 속죄(贖罪)를 이루심.
인간이 스스로 해결 할 수 없는 것이 죄의 문제이다. 죄가 무엇인가. 하나님이 지으신 아담과 하와에게 죄가 있었나. 그러면 언제부터 인간에게 죄가 들어 왔나. 죄의 시작이 무엇인가. 불순종이 아닌가. 하와가 뱀의 유혹 앞에 무너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불순종으로 인해서 하와와 그의 남편인 아담에게 죄가 들어 왔다. 그 죄의 시작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경홀하게 여기는 마음가짐이다.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하와는 뱀과 이야기 하던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뱀에게 넘어 가고 말았다.
죄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는 행위이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말씀을 알고 있나. 우리가 얼마나 많은 성경 말씀들을 듣고 또 듣나. 그러나 우리의 신앙의 위기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는 진지함이 없는 것이다. 사탄은 계속해서 믿음의 사람에게 속삭인다. 창세기 3장에 보면 뱀은 하와에게 이렇게 간교하게 접근한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여자가 뱀에게 말하였다.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그 때에 뱀이 여자에게 말하였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시느니라.”
이와 같은 대화로부터 뱀의 유혹 앞에서 하와가 먼저 무너지고, 남편 아담도 따라서 무너졌다.
과거에는 방바닥의 구들 밑으로 연탄의 열기가 통하게 하는 난방법을 사용하던 때가 있었다. 그 당시에는 잠자던 중에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죽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지난해인 2018년 12월에 있었던 강릉 패션 유독가스 유출 중독 사고로 은평구 대성고등학교 졸업반 학생 3명이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숨졌다. 7명이 겨우 목숨을 건졌다.
죄란 것이 그런 것이다. 죄를 사소하게 여기면 안 된다. 죄를 별 것 아닌 것처럼 취급하면 안 된다. 죄란 어마 어마한 죄만 죄가 아니다. 작은 죄도 죄이다. 예수는 죄의 결과 보다 원인을 더 심각하게 다루셨다. 살인(殺人)만 심각한 죄가 아니라 형제를 대할 때에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5:22)고 경고하셨다. 간음(姦淫)이 심각한 죄이지만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5:28)라고 경고하셨다.
요즘 신문과 라디오와 TV와 인터넷에 도배가 되는 사고사건 뉴스와 온갖 스캔들 소식들을 보라. 살인, 음란, 도박, 마약, 거짓말, 탈세 등등 별의 별 사건 소식들이 넘쳐 나고 있다.
“유명한 가수 누구누구가 어쨌다더라, 경찰 간부 누구누구가 저쨌다더라, 사법 고시 출신의 검사 출신으로 법무부 차관까지 지낸 누가 어쨌다더라.”이런 모든 낯 뜨거운 소식 들 속에 하나님을 떠나 불순종하던 아담과 하와의 피가 섞여 흐르고 있다.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모세 때에 제정해 주신 첫 언약의 피의 제사를 계속해 왔으나 그것만으로 해결 되지 않는 것이 인간의 죄의 문제였다.
히브리서 9장 12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룩하신 것은 ‘영원(永遠)한 속죄(贖罪)’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원한 속죄’란 말씀이 무엇인가. 예수 만나야 한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여야 한다. 예수 안에 내가 죽고 내 안에 예수께서 살아계셔야 한다. 저들이 가수이든, 경찰이든, 장관이든 차관이든 예수 안에서 청소년기를 보냈고 예수 안에서 청년기를 보내고 예수 안에서 살아가고 있었다면 그렇게 행동할 수 있었겠나. 그들이 십자가의 복음 안에서 예수 영접하고 살아가던 인생들이라면 그렇게 인생이 비참해 질 수 있었겠나. 맞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피부색, 언어, 인종, 남녀노소 누구나 다 개인적으로 예수를 만나야 한다.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고 우리를 거듭나게 하고 새사람이 되게 하는 힘은 예수에게서 나온다.
왜 히브리서 기자가 ‘영원한 속죄’의 주제를 이처럼 진지하게 다루고 있는 것일까. 이 세상에 의인은 없다. 단 한 사람도 없다. 생각이 죄이고, 의도가 죄이고, 보는 것이 죄이고, 듣는 것이 죄이고, 말하는 것이 죄이다. 인간은 다윗의 고백처럼 죄 가운데서 잉태되고 죄 가운데서 태어나고 죄를 먹고 산다. 인간은 죄 덩어리다. 인간의 피 안에 아담과 하와에게서 시작된 죄의 피가 흐르고 있다. 그 죄가 행동으로 이어져서 어떤 악한 죄를 지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부모 거역,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증거, 탐심” 이런 정도의 십계명의 문제 앞에서 죄의 문제를 다루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사람들은 교양, 도덕, 윤리, 체면, 문화, 경제 수준의 옷으로 자신 속에 악취가 나는 한센 병과 같은 심각한 상태의 추하고 악하고 부끄러운 타락된 실상을 숨기고 가리고 아닌 척 하면서 위선의 탈을 쓰고 살아간다.
하나님은 다 아신다. 하나님은 인간이 얼마나 악하고 추하고 더럽고 죄 되고 타락한 존재인지를 속속들이 아신다. 이건 모세도 마찬가지였고 그의 형 아론도 마찬가지였다. 아론의 제사장의 대를 이어야 하는 아론의 아들들의 죄의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출애굽기 28장에 보면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위하여 정교하고 화려한 제사장의 옷을 지어 입게 하였다. 베로 만든 속바지는 넓적다리까지 가리도록 해서 하체를 모두 가리게 하였다. 그 위에 속옷을 입게 하고 그 위에 겉옷을 입게 하였다. 그 위에 ‘에봇’ 즉 ‘거룩한 옷’을 지어 입게 하였다. 그 위에 정교하게 짠 띠를 띠게 하였다. 12지파를 상징하는 12가지 보석을 가슴에 새겨 달았다. 판결 흉패 안에는 ‘우림’과 ‘둠밈’을 넣게 하였다. ‘우림은 빛, 둠밈은 온전함’이란 의미를 상징하는 상징물이었다.이처럼 정교하게 하고, 아름답게 하는 그 모든 목적은 ‘거룩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답하여 보라. 그런다고 거룩해 지나. 인간이 아무리 황금실로 옷을 지어 속옷과 겉옷을 겹겹이 화려하고 아름답게 하여 인간의 외모를 가린다고 해서 죄인인 인간이 거룩해 지나. 성결해 지나. 아니다.
최근에 계속하여 대하는 히브리서의 내용이 그것이다. 양과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인간이 온전하게 죄 사함을 받을 수 없다. 아론에게서 시작된 그 어느 제사장 자신도 죄에 대하여 무흠하고 깨끗한 존재란 단 한 명도 없었다. 대 속죄일을 맞아서 민족 앞에서 죄의 문제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던 그 어떤 대제사장 자신이라도 스스로 자신의 죄를 해결할 능력이 자신에게 없다.
그러므로 맞다. 예수 그리스도 만이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이와 같은 ‘영원한 속죄’를 이룩하셨다. 뿐만 아니라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룩하셨다. 또한 ‘단번’(單番)에 ‘성소’(聖所)에 들어가심으로 첫 언약으로 온전히 해결하지 못하는 ‘영원한 속죄’를 완성하신 것이다.
12절 후반부에서 말씀하는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는 그 성소는 이 땅에 정해 놓으신 성소가 아니다. 모세 때에 광야에 제정하신 성막의 그 성소가 아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단번에 들어가신 성소란 하나님 나라의 하나님 보좌 우편의 보좌에 앉으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리라.” 이런 말씀을 묵상하고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깨달음을 가진 성도들이라면 이젠 다르게 살아가야 한다.
이즈음에서는 에베소서 2장의 말씀이 구구절절이 은혜로 충만하게 우리의 생각과 마음과 결심과 결정과 판단과 느낌과 범사를 사로잡아 이끌어 가시는 그런 삶을 매 순간마다 살아가기 위하여 주 안에서 씨름하여야 맞다. 신앙을 고백하는 심정으로 에베소서 2장 1-10절을 함께 읽자.
“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속죄를 은혜로 체험한 나라고 하면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까. 그 대답을 스스로 찾아 가는 신앙생활이 되길 축원한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심.
염소와 황소의 피 그리고 암송아지의 재로 인간의 부정함과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육체를 정결하게 하고 거룩하게 하려 하였다. 그것이 구약 시대에 계속하여 행해져온 첫 언약에 의한 성막의 제사이다. 그러나 영원한 성령으로 말미암으셨고 흠이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인간의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셨다. 이것은 단번에 이룩해 주신 속죄의 은총이며 대속의 권세이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덧입고 죄 사함을 받은 성도라면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그 섬김이 분명하고 구체적이고 믿음과 확신에 차서 간증이 넘치는 섬김이 아닐 수 없다.
지난주에 바울 교회 황희수 목사의 간증의 글을 읽을 기회가 있었다. 한국국제기드온협회에서 발간하는 <기드온뉴스레터> 2019년 3월호에 실린 간증이다. 지난해 전국 기드온협회 제 52차 대회가 부산에서 열렸다. 그 때 간증한 내용이다.
“저는 부산 영도에서 6남매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불교 신자였고 아버지는 알콜 중독자였습니다. 위로 세명의 누이와 두 명의 형들이 있었습니다. 세명의 누이들은 제가 중학교 1학년 때에 아버지의 핍박을 견디지 못하여 모두 가출해 버렸습니다. 큰 형은 중학교를 중퇴하였습니다. 바로 위 형 만이 기숙사가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집을 떠나 살았습니다. 저는 늘 집에 혼자였습니다. 아버지는 여섯 살 쯤 되던 때에 잠 자고 있는 나의 빰을 때리시면서 깨우셨습니다. 술을 사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집 밖에서 잠을 자는 날이 많았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신문배달을 했습니다. 13살 때부터는 본격적으로 도둑질을 시작했습니다. 중 3때 부터는 불량 서클에 들어가서 친구들 돈도 빼앗고 도둑질을 날마다 하며 지냈습니다. 퇴학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부산 혜광고등학교에 진학했습니다. 기독교 학교였습니다. 학교 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그 때 누군가가 학교 정문에서 기드온 성경을 나누어 주고는 하였습니다. 조회 시간에 어느 선교사님이 오셔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려면 성경을 읽어 보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기드온의 파란 비닐 커버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로 선배의 전도를 받고 부산송도제일교회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읽으며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가르쳐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시편 57편의 말씀이 마음에 받아 들여졌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로다.” 그 이후로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 날부터 날마다 아버지가 술을 끊고 예수 믿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40일 간 작정 기도를 계속하였지만 아버지는 오히려 이전 보다 술을 더 많이 마셨습니다. 40일 중에 10일 정도 졸면서 기도한 것이 회개가 되어 다시 10일을 더 작정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 10일째 되는 날 아버지는 병원에 실려 가셨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아버지에게 “이제는 술을 끊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날 이후로 아버지는 술을 입에도 대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예수 잘 믿으시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셨습니다. 고등학교 때 정문에서 나누어 준 성경책을 받아 든 나의 친구 세 명 중에서 한 명은 목사가 되고, 한명은 태국 선교사가 되고, 한 명은 ‘도박중독치유선터’에서 근무하는 안수 집사로 서로가 자기 자리에서 주님을 잘 섬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한 권의 성경책이 나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고 확신합니다. 나와 나의 두 친구들을 통해서 수 많은 영혼들을 나라 안팎에서 구원하고 계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한 권의 성경인 하나님의 말씀이 저를 목사로 삼아 주셨고 제 친구들을 선교사와 주를 충성되게 섬기는 집사가 되게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충성되게 섬기는 우리 모두가 되길 축원한다.
영원(永遠)한 기업(基業)의 약속(約束)을 얻게 하심.
예수는 ‘새 언약의 중보자’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그를 믿는 성도들을 죄에서 속량(贖良)하시고 부르셔서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해 주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이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영원한 기업의 약속이다.
여기서 말씀하는 ‘영원한 기업의 약속’이란 이 땅에서 이미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시고 뿐만 아니라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하실 약속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을 히브리서 12장 22-23절에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들의 영들”이라고 하셨다.
이것은 요한 계시록 19장이 말씀하는 ‘어린 양의 혼인잔치’와 같은 상태이다. 요한 계시록 20장이 말씀하시는 ‘천년 왕국’을 말씀한다. 요한 계시록 21장이 말씀하시는 “새하늘과 새 땅이며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서의 영원한 복락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22장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 강으로 흐르는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신 것이다. 요한계시록 22장 2절에 보면,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고 하였다.
새 언약의 중보자로 오셔서 택한 백성들을 부르시고 속량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총이 우리 각 사람에게 충만하길 축원한다. 아멘
피 흘림의 비밀
히브리서 9:11-22 / 김학현 목사(예은교회)
성경 속에는 피가 철철 넘칩니다. 성경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성경의 각 장과 절속에는 피 흘림의 역사가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피가 곧 복음의 생명이자 핵심입니다. 디한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피에 관한 책이요, 피투성이의 책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당하신 고난이 우리에게 그렇게도 큰 의미를 갖는 이유도 바로 그 고난의 핵심에 그의 피 흘림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고난의 절정에 만약 피 흘리심이 없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그 의미를 상실하고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피 흘림이 없이는 결코 죄 사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감사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우리 같은 죄인을 대속하시기 위해서 고난 받으실 때 온갖 멸시와 천대를 친히 감당해 주신 것도 황송한데, 골고다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아낌없이 우리를 위해 다 흘려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피가 인류 역사이래 수많은 죄인들의 더러워진 양심과 죽은 행실을 깨끗하게 만들었습니다. 죄인 된 우리들로 하여금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영원한 속죄를 이루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죄인 된 우리들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 곧 하늘나라까지 상속받도록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이 시간은 주께서 흘린 피의 비밀을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습니다
첫 번째 신비는 바로 피가 생명이란 것입니다. [레17:14]은 말씀합니다. “모든 생물은 그 피가 곧 생명과 일체라” 그렇습니다. 피는 곧 생명입니다. [잠1:18]에도 피와 생명을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가만히 엎드림은 자기의 피를 흘릴 뿐이요 숨어 기다림은 자기의 생명을 해할 뿐이니” 피를 흘리는 게 바로 생명을 해하는 것입니다. 피를 흘린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잃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위대하신 것은 자신의 생명을 피를 흘려 내주셨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기에 [창9:4]은 명령합니다. “고기를 먹되 그 생명 되는 피 채 먹지 말라” 이 명령은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이상한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생명이 되는 피를 먹지 말라는 말은 생명을 해하지 말라는 말로 의역[意譯]할 수 있습니다. 즉,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과 같은 말입니다. 피는 안 먹는데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바리새적인 교조주의의 극치라 할 수 있습니다. 피를 먹느냐 안 먹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생명을 귀하게 여기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의 죽고 사는 문제가 항상 피에 달려있습니다. 오늘날 성인병의 대부분이 혈관질환이란 걸 아십니까? 각종 심장질환, 고혈압, 저혈압, 당뇨병, 고지혈증, 동맥경화, 뇌졸중.... 그 어느 것 하나 피와 관계없는 게 없습니다. 피가 깨끗하면 건강한 사람이지만, 피가 더러우면 불건강한 사람입니다.
육신이 그렇듯 영적인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죄인입니다. 인공심장, 인공뼈, 인공신장, 인공수족... 그러나 아직 생명의 근본인 피는 만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피를 만드는 날이 이 세상의 끝날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피는 곧 생명입니다. 그래서 피를 많이 흘리면 누구든지 죽게 됩니다.
모든 사람의 피는 하나입니다
두 번째 비밀은 모든 사람은 한 혈통이라는 것입니다. [행17: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와 거주의 한계를 한하셨으니” 모든 족속은 그가 백인종이든 황인종이든 흑인종이든지 모두다 아담의 피를 이어 받은 한 혈통입니다. 그래서 결국 모든 인류는 남녀노소, 빈부귀천, 족보나 인종, 지위 학벌, 따질 것 없이 다 한 가족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류의 조상 아담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했고, 그 죄는 결과적으로 사람으로 생명인 피 속에 죽음의 독소를 가져 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담의 피를 이어받은 모든 인간은 더러워진 아담의 피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어쩔 수 없이 죄와 죽음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롬3:10]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병의 인자가 있는 피를 가진 부모는 원하지 않아도 자식에게 자신이 가진 질병의 인자를 피를 통하여 전달하여 줍니다. 이와 같이 죄와 사망이 인류역사이래 지금까지 아담의 피를 이어받은 모든 사람 위에 왕 노릇하게 된 것입니다.
[롬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악의 심각성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레2:22] “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수다한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오히려 네 앞에 그저 있으리라” 피가 더러워진 죄야말로 그 어떤 것으로도 씻을 수 없습니다. 아담의 피를 이어받아 한 혈통이 된 모든 인류가 겪고 있는 심각한 비극이 모두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피 흘림을 통해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피에 관한 세 번째 비밀은 피로 용서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레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왔지만, 피로써 죄를 용서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해서 한 방법을 준비하셨습니다. 오늘 성경은 말씀합니다. (22절)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첫 사람 아담으로 인하여 들어온 죄를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님의 피로 씻었습니다.
피 흘림의 비밀 중에 가장 백미입니다. 세제도 아니고, 표백제도 아닌데 피가 깨끗케 한다는 것입니다. 속죄(贖罪)의 결론은 결국 피 흘림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송아지나 염소의 피로는 한번의 죄밖에 속할 수 없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피여야 영원한 대속의 피가 될 수 있습니다. [히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십자가 밑에서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믿겠다고 예수님을 조롱했던 사람들은 이 피의 비밀을 몰랐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만약 그때 십자가에서 내려오셨다면 인류의 죄는 아직도 그 해결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구약의 짐승의 피로 죄를 속하던 제사제도는 사람이 만들어 낸 제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정하신 방법이었습니다. 신약에 와서는 더 이상 짐승의 피가 아닌 영원한 속죄를 위해 죄 없으신 그리스도의 피를 흘리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류의 역사는 온통 피의 역사입니다. 전쟁의 역사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피의 역사를 반대로 바꿔야 합니다. 온통 피로 물들여야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그런 전쟁의 피 역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적시는 역사를 써야 합니다. 성경은 보혈의 피에 대한 역사요, 예수님은 피를 흘리신 분이며, 그리스도인은 그 피의 공로를 믿고 그 피로 세상에 넘치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자, 이제 피 흘림의 비밀을 알았으면 피로 물들게 하는 일을 합시다. 전쟁의 피가 아니라, 평화와 구원의 피로 넘치게 합시다. 아무런 능력도 없는 인간의 피가 아니라, 구원을 이루는 그리스도의 피로 넘치게 합시다. 세상은 모두 온통 피로 물들어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우리를 모든 죄에서부터 깨끗케 하셨음을 믿고 그 피의 역사를 씁시다. 언약의 피, 구속의 보혈만이 인류가 살길입니다. 할렐루야! 피를 먹지 말라 외치기보다, 생명을 살리는 일에 앞장서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새 언약의 피
히브리서 9:11-22 / 한인 그리스도의 교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탈출하기 직전 양을 잡아 양의 피를 문지방에 바르게 했는데 문지방에 양의 피가 발라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정은 무사했으나 문지방에 양의 피가 발라져 있지 않은 애굽 사람들의 가정마다 장자가 다 죽었던 것입니다. 양의 피는 죽음을 면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장자를 죽이는 천사가 피가 발라져 있는 가정은 건너 뛰어준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 바로 유월절인 것입니다. 한문으로 유월절이란 건너 뛴 절기라는 뜻이며 영어로도 같은 의미로Passover 라고 하는데 양의 피가 죽음을 면케 해주었던 것입니다.
피는 생명이며 생명이 피안에 있다는 것이 구약의 사상입니다. 이런 피의 원리는 율법의 속죄와 정결의식에서도 같은 차원에서 적용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의 죄로 인하여 죽어 마땅하지만 자기 대신 양을 잡아 죽여 그 피를 뿌려 줌으로 죄가 용서가 되고 더러운 것이 정결하게 되는 것으로 인정되었던 것입니다. 일년에 한 번씩 대 제사장은 자신을 위하여 수송아지의 피를 취하여 손가락으로 속죄소에 뿌리고 또 백성들을 위하여는 수염소의 피를 속죄소에 뿌림으로 자신의 죄와 백성들의 죄가 용서되었던 것입니다. 평일에도 제사장은 자신과 백성들의 죄를 위하여 짐승을 잡아 그 피를 성막 안에 있는 번제단 주변에나 향단 주변에 뿌려주었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 피를 제사장 위임식때에는 제사장과 그의 자녀들의 오른 쪽 귓부리, 오른 쪽 엄지, 오른 발 엄지에 발라주어 정결해지도록 했으며 백성들에게도 정결의식으로 똑같이 오른 쪽 귓부리와 오른 쪽 엄지와 오른 발 엄지에 발라주었던 것입니다. 또 정결의식으로서는 사람들의 옷에나 집에도 피를 뿌리도록 했던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이런 짐승들의 피를 통해서도 정결케 될 수 있었음을 말하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죄 사함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죄 사함의 진리를 바로 깨닫게 되는 좋은 기회가 되시기를 원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깨닫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그리스도(11-12) [2]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신 그리스도의 피(13-15) [3]첫 언약의 피(16-22)입니다.
[1]먼저 11절부터 12절까지의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그리스도 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11과 12절에 보니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다고 했습니다. 이 본문에서는 모세 율법에 따라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 동물의 피로 속죄했던 것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주님의 피로 속죄했던 것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문지방에 바른 양의 피는 하나의 모형이요 그림자이며, 십자가상에서 흘리신 주님의 피는 원형이요 실체인 것입니다. 문지방에 바른 피로 인해 육체적 삶이 연장된 것은 먼 훗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영적으로 영원히 살 수 있게 될 것을 예시해 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대 제사장이 일년에 한번씩 동물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 자신과 백성들의 죄를 용서받도록 한 것은 하나의 모형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동물의 피 대신 자신의 피를 흘리신 것은 원형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두 속죄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 대제사장이 사람이 지은 성소에 들어가 동물의 피로 매년 속죄제를 드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께서 친히 대 제사장이 되시어 사람이 짓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성소에 들어가시어 동물의 피가 아닌 자기의 피를 가지고 속죄하셨으며 또 매년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단번에 속죄하셨다고 비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제사장들만 들어갈 수 있는 길이가 50미터요 폭이 25미터쯤 되는 좁은 공간인 성막에 들어가 속죄제를 드렸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막힌 담도 휘장도 없이 툭 터진 골고다 성소에서 속죄제를 드렸기 때문에 더 큰 성소가 되는 것이요 사람이 짓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지으신 성소에서 드렸기 때문에 더 좋은 성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매년 들어갈 필요가 없이 단번에 그리고 동물의 피가 아닌 자신의 피로 속죄제를 드렸으므로 더 온전한 성소에 들어가신 것이 되는 것입니다.
[2]두 번째로 13절부터 15절까지의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신 그리스도의 피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앞의 서론에서 모세의 율법에서는 동물의 피를 사람의 옷에나 몸에나 또 집에 뿌려줌으로 정결케 된다는 것을 소개해 드렸는데 또한 동물을 태운 재를 물에 타서 뿌려 줌으로도 정결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13절부터 15절까지에서는 동물의 피로 드린 속죄제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드린 속죄제의 효력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염소나 황소의 피로 또는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신을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죽은 행실과 양심을 깨끗하여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동물의 피는 육체를 정결케 하는 것이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죽은 행실과 심령을 깨끗하여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한다는 것이며,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한다고 했습니다. 옛 언약에서는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제사장과 동물의 피가 중보가 되었으나 새 언약에서는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피가 중보가 된 것입니다. 옛 언약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임시로 육적인 복락을 누리는 것이고 새 언약은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 영원히 영적인 복락을 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일을 위해 그를 믿고 따르는 자를 위해 중보자가 되신 것입니다.
[3]마지막으로 16절부터 22절까지의 첫 언약의 피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16절부터 22절까지에서는 다시 동물의 피로 맺었던 첫 언약에 대해 쓰고 있습니다. 모세가 율법을 백성들에게 말한 후에 동물의 피를 그 율법책과 온 백성들에게 뿌리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고 했으며 또 이 피를 장막의 모든 그릇에 뿌려 정결케 했다고 했습니다. 피를 통해 하나님께서 그들과 언약을 세우신 것입니다. 19절에는 동물의 피와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백성들에게 뿌렸다고 했는데 출애굽기 24장에는 피를 뿌린 것으로만 되어 있습니다. 물과 양털과 그리고 우슬초는 대개 시체를 만져서 부정해진 자나 문둥병자를 정결케하는 데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구약인 첫 언약에서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언약을 세우실 때에 이와 같이 동물의 피를 통해 하셨던 것입니다. 구약에서 죄가 정결케 되는 일이나 모든 물건들이 정결케 되는 일이 피로써 되어졌던 것입니다. 즉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나 정결케 될 수 없음이 하나님의 언약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주신 본문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는 새 언약의 피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 흘리심에 대해 그 의미를 바로 깨닫고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심에 합당한 삶을 살라는 교훈입니다. 하나님의 속죄의 길은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피 흘리게 하심으로 인류의 죄를 온전히 사하신 것입니다. 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길밖에 없음을 아시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신 것입니다.
옛 언약에서 동물을 죽게 함으로 죄가 사해졌는데 동물을 잡아죽이기 전에 동물의 머리에 죄인의 손을 얹고 안수한 것은 자기가 죽어야 마땅하나 자기 대신 동물이 죽는 것을 의미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인간은 자기의 죄 값으로 인해 자신이 죽어 자신의 피를 흘렸어야 마땅하나 우리를 대신하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주님의 십자가는 주님께서도 돌아가셨고 역시 그 십자가의 진리를 믿고 따르는 자들도 우리 대신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살아 있으나 실지로는 주님께서 대신하여 죽으셨으므로 우리는 이미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죄 값으로 이미 죽은 거나 마찬가지인 우리들은 우리의 삶을 이제는 우리를 위해 대신 죽어주신 분의 뜻에 맞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죽어주신 분이 있는데 그 사실을 잊고 내 욕심을 따라 나만을 위해 산다고 한다면 나를 대신 죽으신 분의 뜻에 합당하지 못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매주 마다 우리 교회는 주의 만찬을 하게 되는 데 이 만찬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던 주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는 것입니다. 살과 피를 기념한다는 뜻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런 행사를 하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새 언약의 피의 가치를 망각할까해서 인 것입니다. 피 흘리심이 없이는 우리의 죄가 사해질 수 없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시고 피를 흘리게 하심으로 우리를 영적으로 살리신 새 언약의 피를 기억하도록 한 것입니다. 고전 10:16 에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때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 함이 아니냐’ 고 했습니다. 매주 마다 주의 만찬을 한다는 것이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행사를 1년에 2번이라든가 한 달에 한번 정도 해도 된다고 믿는 신앙은 새 언약의 피에 대해서 많이 등한한 신앙이라고 말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고 보면 기독교라고는 부르지만 새 언약의 피와 별로 상관이 없는 기독교도 있을 수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들이 주님의 피 흘리심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는지 늘 자신을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피 흘리심에 합당한 삶이란 말씀을 읽고 그 말씀대로 사는 삶을 말합니다.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을 접고 하나님이 가라고 하는 길을 가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이 있으나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으로 판단이 되면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그만 두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하고자 하는 것을 하나님께 꼭 물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는 신앙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합당한 삶을 사시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히브리서 9:11-14
김광욱 목사 / 찬송가 257장 ‘마음에 가득한 의심을 깨치고’
8장부터 새 언약과 예수님의 속죄 제사의 우월성을 옛 언약과 구약의 제사와 비교하며 증거하고 있습니다. 어제 본문인 9장 1절부터 10절은 옛 언약에 속한 성소와 지성소 안에 있는 성물들에 대한 소개, 그리고 성소와 지성소의 별칭이 각각 첫째 장막과 둘째 장막이라는 것, 그리고 성소와 지성소에서 제사장과 대제사장의 직무에 관한 설명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를 설명하는 이유는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무지하기에 그것들을 가르쳐 주고자 함이 아니라 구약의 제사와 대제사장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신 예수님과 예수님의 사역을 알리고자 함입니다. 8장 1절부터 10장 18절까지의 내용의 결론이 9장 11절과 12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단번에 성소로 들어가셨느니라(11-12절)
11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장래 좋은 일’란 옛 언약과 제사는 미래에 오실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예표라는 점과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일은 옛 언약과 제사로 누리는 기쁨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일이라는 의미입니다. ‘장래의 좋은 일의 대제사장’은 구약의 대제사장과 대조를 이루는 분으로서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힘들고 우울한 과거를 잊게 해 주시고 새로운 개념의 밝은 미래와 희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이란 이 땅의 장막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 땅에서 손으로 지은 장막은 8장이 증거하고 있듯이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본문 11절의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이란 손으로 짓지 아니한 장막, 곧 하늘의 장막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을 위하여, 하신 일을 다음 구절이 알려주고 있습니다.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였다’는 말은 지상의 장막과 구약 제사의 한계를 알려줍니다. 지상의 장막과 구약의 제사가 완벽하였다면 어제 본문인 11절의 표현대로 ‘개혁’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상의 장막과 구약의 제사가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에는 한계가 있었기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아론 반차의 대제사장은 지성소에 1년에 단 한 번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아론 반차의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갈 때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를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송아지의 피는 대제사장 자신의 속죄를 위한 것이고, 염소의 피는 백성들의 속죄를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을 위하여, 더 이상 구약의 제사 즉 염소와 송아지 피의 제사가 필요 없도록 친히 제물이 되셨습니다.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영원한 속죄’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는 불가능합니다. 오직 예수님의 피로만 가능합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는 1년에 한 번 대속죄를 위해 필요하였으므로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속죄할 수 있는 유효기간은 딱 1년인 셈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피는 영원한 속죄를 이루시기에 유효기간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피로 속죄함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는 구약의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2천년 전에 오셔서 자신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이를 알고 있다면 주님의 대속의 은혜를 잊지 않고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속죄를 이루시고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습니다.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에서 성소는 지성소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다고 복음서가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소의 휘장은 지성소로 들어가는 휘장을 뜻합니다. 본 구절에서 성소 역시 지성소를 뜻합니다. 아론 반차의 대제사장이 1년에 한 번 염소와 송아지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서 속죄하는 곳이 지성소이기에 문맥을 볼 때 12절의 성소는 지성소를 의미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8절과 24절과 25절의 성소 역시 지성소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는 아론 반차의 대제사장들처럼 더 이상 지성소에 들어가실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왜 대제사장이신 주님께서 옛 장막의 지성소로 더 이상 들어가실 필요가 없겠습니까? 아론 반차의 대제사장들이 1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는 이유는 자신의 죄와 백성의 죄를 속죄하기 위함인데,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옛 언약과 구약의 제사보다 새 언약과 예수님의 속죄 제사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남을 히브리서 기자가 전하고 있습니다. 13절과 14절 역시 예수님의 피의 능력이 구약의 제물의 피보다 더 뛰어남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13-14절)
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민수기 19장을 보면, 제사장들이 부정하게 된 사람들의 육체를 정결하게 하는 방법으로 소의 피와 소를 태운 후 나온 재를 부정하게 된 사람들에게 뿌렸습니다. 정결하게 하는 절차가 까다롭습니다. 부정하게 된 사람에게 뿌릴 피와 재를 얻기 위하여 소를 잡고 태운 제사장과 사람들 역시 자기의 옷을 빨아야 하고 저녁까지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부정하다는 것은 위생적 측면에서의 불결함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죽은 자의 장례를 위해 시체를 만진 사람은 양잿물로 아무리 손과 몸을 깨끗하게 씻더라도 7일 동안 부정한 자로 간주되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출산한 사람, 월경 중에 있는 사람, 몸의 유출병이 있는 사람, 기타 특이한 질병을 가진 사람들 역시 각 경우에 따라 특정 기간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소위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보면, 강도 만난 사람을 발견한 제사장과 레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을 피하여 지나간 이유 중 하나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강도 만난 사람이 죽었는데 그를 만질 경우 일주일 동안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어 직무를 수행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그가 부정한 상태에서 성소의 직무를 행하면 성소를 더럽힌 죄로 형벌을 면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사장과 레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을 피하여 지나간 행동은 율법의 근본정신을 벗어났기에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의 생사여부를 확인한 후 그 사람이 살아 있으면 응급처치와 치료를 받도록 도왔어야 했으며, 만약에 사망하였으면 당국에 신고하고 장례를 위한 임시조치를 했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정결법에 따라 정결 의식을 준수하고 그의 직무를 수행했어야 했습니다. 이처럼 옛 언약과 구약의 정결법을 포함한 제사법은 불편함과 불완전함이 공존하였습니다. 불완전함이란 비록 염소와 황소의 피와 암송아지의 재를 뿌려 정결 의식을 거행하더라도 사람의 양심을 정결하게 하고 온전하게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피만이 죄인의 양심과 죽은 행실을 온전하게 고쳐 주실 수 있습니다.
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예수님께서는 영원하신 영으로, 그리고 자발적으로 흠 없는 자신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제물이 되신 예수님의 피는 염소와 황소의 피와는 견줄 수 없는 능력의 피이며, 신비로운 피이며, 구원의 피이며, 은혜의 피입니다. 이러한 피이기에 사람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시며 죽은 행실을 버리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양심을 깨끗하게 하고 죽은 행실을 버릴 때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양심이 온전하지 못하고 죽은 행실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이름과 ‘자기의’를 드러내는 일을 하는 중입니다.
깨끗한 양심과 살아있는 행실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오직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잊지 마십시다. 그 은혜를 잊지 않도록 은혜가 풍성한 주님의 말씀을 영원한 기업으로 삼고 마음의 즐거움으로 삼으십시다. 그리고 은혜가 풍성한 주님의 말씀을 지키기로 마음이 확정되고 확정되는 은총이 매일 새벽 말씀 묵상과 기도 시간에 있으시길 기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을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보내 주시고, 예수님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어 주사 저희를 구원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예수님께서 단번에 지성소에 들어가심으로 저희가 언제든지 속죄받을 수 있도록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오직 예수님의 피가 저희 더러운 양심을 깨끗하게 하며 죽은 행실을 버리게 할 수 있음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기 위해서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깨끗한 양심과 살아있는 행실로 살아가는 오늘 하루가 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위한 질문
1.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은 누구시며, 그분이 나에게 해 주신 좋은 일은 무엇입니까?
2. 영원한 속죄는 어떻게 받을 수 있습니까?
3. 구약 시대 정결법에 따르자면, 내가 부정하게 될 때 어떤 불편함을 겪습니까? 새 언약의 정결법은 어떤 편리함과 완전함이 있습니까?
4. 더러운 양심과 죽은 행실을 고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5.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사람은 어떤 장막에서 어떻게 하나님께 참되게 예배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자기 희생
히 9:11-14 / 옥한흠 목사
저는 오늘 하나님의 자기 희생의 절정인 십자가의 은혜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186장 '내 주의 보혈은' 찬송가는 우리 한국교회 믿음의 선배들이 밤낮없이 부르면서 십자가 앞에서 그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하던 곡인데 말씀을 듣기 전에 1절 한번 불러 봅시다. 풍금도 없고 오르간도 없을 때 박자도 제대로 안 맞으면서도 그 찬송이 너무 좋아서 눈물 흘리며 부르던 우리 선배들을 마음에 떠올리면서 왜 우리는 그들만큼 십자가의 은혜를 모르고 있을까 하는 가책도 마음에 느끼면서 반주하지 말고 옛날 식으로 불러봤으면 좋겠습니다. 안이숙 사모님이 8년,9년 전에 우리 교회에서 집회하실 때 시간마다 가사를 바꾸어서 이 찬송을 불렀죠? '지금 가오니'를 '지금 왔으니'로 바꾸고, '갈보리'는 문학적인 표현이지 성경적이 아니기 때문으로 '예수님의 보혈'로 바꾸라고 하여 시간마다 부르면서 은혜 받은 기억이 납니다. 가사를 바꾸어서 불렀으면 좋겠습니다.
'내 주의 보혈은 정하고 정하다/ 내 죄를 정케 하신 주 날 오라 하신다/ 내가 주께로 지금 왔으니 / 예수님의 보혈로 날 씻어 주소서/ 약하고 추해도 주께로 나가면 / 힘 주시고 내 추함을 곧 씻어 주시네/ 내가 주께로 지금 왔으니/ 예수님의 보혈로 날 씻어 주소서/ 내가 주께로 지금 왔으니/ 예수님의 보혈로 날 씻어 주소서/ 아멘
얼마 전 화재가 난 현장에서 소방관 6명이 아까운 목숨을 던져 순직하는 장면을 TV를 통해 지켜 보면서 우리 모두가 가슴을 치며 괴로워 한 일이 있습니다.
방화범은 중학교 3학년 때부터 학교에서 왕따를 당해 정신적으로 약간 온전치 않은 사람인데 정신병원이나 기도원을 전전하면서 치료를 받은 경력이 있다고 합니다. 그날도 새벽 2시가 넘어서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와 다투다가 어머니를 때리고 홧김에 불을 질렀습니다. 불이 사방으로 번지기 시작하자 어머니는 급히 밖으로 뛰어 나와서 소방관을 붙들고 아들이 아직 못 나오고 있으니 살려달라고 하소연을 했습니다. 이 말을 듣자 소방관 6,7명이 자기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우르르 집안으로 들어 갔다가 불더미에 힘없이 쏟아져 내리는 벽돌더미 아래 그 고귀한 생명을 던지고 말았습니다.
TV를 보면서 얼마나 괴로웠는지 모릅니다. 나중에 보니 방화범은 오히려 멀쩡하게 살아서 밖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죽어야 될 사람은 저 사람인데 너무나 아까운 사람들이, 처자가 딸린 6명이 희생을 당했구나. 저 사람이 평생 살면서 자기가 6명의 소방관의 생명을 대신해서 살아남은 사람이라는 빚진 감정을 가지고 살까? 정말 사람이 좀 달라질까? 인간다운 존재로 바뀔 수 있을까? 자기를 위해 희생한 가족을 위해서 자기의 몸을 던져 사람답게 살아 보려고 애를 쓸까?' 하는 생각을 하며 참 안타까웠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그 방화범과 저 자신을 비교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사람은 사람 같지도 않은 인간이지만 6명의 생명을 희생하고 대신 살아 남았다. 너는 어떤가? 너는 죄없는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덕분에 지금 살고 있지 않는가? 지금 저 사람을 속으로 욕하면서 차라리 저 사람이 죽었으면 하고 있는데, 진짜 죽어야 될 사람은 너야. 너는 얼마만큼 떳떳한가?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통해서 구원 받은 사람답게 살고 있느냐?' 그러다 보니 남을 욕 하던 것이 결국은 나를 욕하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남을 탓하는 사람이 내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십자가는 가까이 묵상할 때마다 이렇게 사람을 엄숙하게 만듭니다. 어떤 면에는 다시 한번 내 자신을 깊이 돌아보는 실존의 자아로 돌아가게 만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를 종합해 보면 주후 30년 4월 7일 경에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 되셨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사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아주 간결한 세 마디가 반복되는 것을 봅니다. '못박히시니라, 운명 하시니라, 장사 지내니라'
분명히 예수님은 돌아가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것은 엄연한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기독교가 만들어 낸 우화가 아닙니다. 제자들이 정신이 이상해져서 없는 일을 있는 것처럼 꾸며낸 이야기도 아닙니다. 분명한 역사적인 사건이요, 아무도 이 사건을 거짓으로 증명한 사람이 없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죽으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만큼 불가사의한 것이 있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이 죽을 수 있다는 이야기 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만큼 모순 투성이가 있습니까? 어떻게 의인이 죄인을 대신해서 죽는다 말입니까? 십자가의 죽음만큼 가공할 만한 죽음이 또 있습니까? 가장 참혹한 죽음의 방식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세계가 다 알고 있는데 어떻게 그 죽음을 하나님의 아들이 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얼굴을 돌리셨습니다. 해는 빛을 잃었고 땅은 슬픔을 견디지 못하여 진동했습니다. 여인들은 가슴을 치고 통곡을 했습니다. 십자가의 전율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감동은 아직도 식지 않고 있습니다. 이 세상 마지막까지 그 감동은 점점 더 진해질 것이고 그 전율은 더 강하게 흔들릴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요단강을 건너서 저 나라에 가면 영원토록 그 십자가의 영광은 광채를 발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교회 안에는 이 십자가에 대해서 그렇게 칭찬할 만한 반응을 보이지 못하는 태도를 취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십자가에 대해서 너무 모릅니다. 모른다고 하는 말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내용을 모른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영적으로 잘 모른다는 말입니다. 십자가에 담겨 있는 영적인 의미와 은혜를 잘 모르고 신앙생활 하고 있습니다. 참 답답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모르고 사는 것을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고 교회를 다닙니다.
1863년 링컨이 새해 벽두에 노예해방을 공식적으로 선언하고 그 일로 인해서 링컨은 괴한에게 피살 되었습니다. 자기 생명을 흑인들의 행복과 자유와 평화를 위해서 바친 것입니다. 흑인들은 평생 아브라함 링컨의 은혜를 잊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링컨이 땅에 묻힌 뒤 수년이 지났습니다. 남부에 있는 대 농장에서는 여전히 흑인들은 노예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역사학자가 알라바마에 있는 어떤 흑인을 붙들고 물었답니다. "당신은 링컨을 압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 링컨에 관한 말은 많이 들었습니다. 우리를 해방시켰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링컨이 누군지 잘 모릅니다. 그리고 해방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참 놀라운 이야기 아닙니까? 그러니 이 노예들의 무식함을 농장 주인들은 최대한 이용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던지 무식한 채 내버려 둬라. 가르치지 말라. 그리고 일만 시키자.' 이것이 노예 주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십자기에 죽으셨습니다. 그 십자가 안에 담겨있는 영적인 의미를 깊이 깨닫는 영적 지식이 부족하면 마귀 좋은 일을 시키는 것입니다. 마귀는 '모르는 것이 좋다. 교회만 다녀라. 그 정도면 됐어.' 하고 우리가 십자가 앞으로 더 깊이 들어가려고 하는 문을 전부 걸어 잠궈 버립니다. 이런 잠긴 문 속에 갇힌 성도들이 교회 안에 한두 명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불행입니다. 비극입니다.
또 한 부류가 있는데, 너무 많이 알아 가지고 십자가의 은혜에 대해서 둔감해 진 사람들입니다. 모태신앙 입니다. 주일학교 때부터 교회 다니면서 귀가 아프도록 듣고 또 들었습니다. 성경도 꽤 많이 읽고 배웠습니다. 다 아는 것입니다. 처음 이 놀라운 십자가의 은혜를 가슴으로 느꼈을 때는 주님 앞에 너무 감격해서 남 부끄러운 줄 모르고 울기도 하고, 가슴이 너무 뜨거워서 주님을 위해 살겠다고 하는 열정을 보인 때도 있었고, 생각 할 때마다 나를 위해 죽으신 주님이 너무 고마워 찬송을 부르던 때가 있었지만, 이제는 흘러간 옛 노래가 되어 버리고 지금은 덤덤해져 버렸습니다.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병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런 현상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20대에 과부가 되어 아들 하나에다 소망을 걸고 평생을 고생하며 키운 엄마가 결혼한 아들을 놓고 '얘,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지 아니?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지 아니?' 하면서 밤이고 낮이고 계속 같은 소리를 해대면 나중에는 그 고마움이 고마움으로 전달이 안됩니다. 가슴이 무디어져서 듣는 둥 마는 둥, 들어도 그만이고 안 들어도 그만이 되어버립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심성입니다. 아무리 좋은 이야기, 아무리 감격적인 이야기라도 자꾸 계속해서 듣고 반복하면 감동이 없어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는 이와 같은 자연스러운 현상을 용인하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항상 십자가의 은혜를 새롭게 느끼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는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한두 가지 알았다고 해서 안심할 수 있습니까? 그 깊은 차원은 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끝없이 새로운 은혜를 계속 발견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십자가가 매일매일 새롭게 다가오게 하는 분이 누구십니까? 성령입니다. 그러므로 너무 많이 알기 때문에 마음이 둔감해져서 요즘에는 은혜가 안 된다는 식의 소리는 변명이지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에 비추어 보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닙니다.
저의 가슴 속에 뜨거운 부르짖음이 있습니다. 저를 위한 부르짖음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위한 부르짖음입니다. "성령이여 좀 더 강하게 좀 더 진하게 좀더 뜨겁게 우리에게 임하셔서 계시의 영을 주시고 마음 눈을 밝혀서 십자가의 그 놀라운 죽음을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보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그 놀라운 십자가의 은혜를 마음에 담을 수 있게 해 주옵소서." 옥 목사를 주님께서 그런 은혜의 자리로 인도해 달라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사랑의교회가 커지다 보니 너무나 많은 분들이 은혜를 모르고 교회를 왔다 갔다 하고 계십니다. 사랑의교회를 오래 다닌 분은 오래 다닌 대로 그 영혼이 둔감해졌습니다. 식어 있습니다. 큰 교회가 되어서 적당히 숨을 곳이 많기 때문에 편하게 신앙생활 하려고 이 교회를 찾은 분들은, 여전히 은혜는 메말라 가슴에는 황야와 같이 타 들어 가는데도 그것이 영적인 병인 줄을 모르고 교회를 다니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을 보면 느끼는 바가 있습니다. "하나님 이대로 두셔서는 안됩니다. 옥 목사도 이대로 두어서는 안됩니다." 십자가 이야기를 너무 많이 설교하다 보니 저도 마음이 식어 있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 이대로 두시면 안됩니다. 우리 교회를 이대로 두시면 안됩니다. 성령이여 임하소서. 영혼을 깨뜨리시옵소서. 영혼을 울려 주시고 영혼을 깨워 주시옵소서." 이런 부르짖음이 저에게 있습니다.
십자가는 몇 마디 안다고 해서 다 아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그 은혜를 다 알려면 죽을 때까지 십자가 앞에서 성령의 은혜를 받아도 모자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십자가에 대해서 무식한 사람이 있습니까? 그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허리띠를 동여매고 등불을 들고 이 놀라운 은혜를 알아 보려고 최선을 다하기를 바랍니다. 마음이 둔감해 진 사람이 있습니까? 회개하십시오. 어디에다 마음을 다 빼앗기고 십자가의 은혜 앞에 둔감해집니까? 무엇에 마음을 다 빼앗기고 여러분의 마음은 그렇게 있어서는 안 되는 것들로만 가득 차서 십자가가 멀리 보이게 되었습니까? 원인이 어디 있는지 찾으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보시고 구원 받아야 될 존재로 선언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는 말씀에 의하면 우리 모두가 죄인입니다. 하나님은 거침없이 이 사실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히브리서 9장 27절에 있는 말씀대로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우리 모두 다 죽습니다.
육신이 죽고 난 다음에 죄의 결과로 따라 오는 것이 있습니다. 심판입니다. 여러분 심판의 무서움을 압니까? 하나님의 심판의 무서움을 압니까? 여러분 법원에서 판사가 호출을 해도 가슴이 덜렁덜렁 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신다면 그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아십니까?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심판을 면하려면 구원을 받아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 받으라고 하십니다. 다른 종교는 이와 같이 인간을 놓고 구원 받아야 될 존재라고 노골적으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힌두교의 어느 유명한 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힌두교는 인간을 죄인이라고 부르는 것을 거부합니다. 인간은 신의 자녀요, 인간은 거룩하고 성결한 존재입니다. 이런 인간을 놓고 '죄인이다, 회개하라.'고 하는 것은 모독하는 것이요, 그 자체가 죄악입니다." 이거야말로 눈 감고 아웅이 아닙니까? 정말로 인간이 거룩합니까? 회개가 필요 없고 구원이 필요 없습니까? 우리 양심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현실을 보십시오. 인간만큼 더러운 악마들이 어디 있습니까? 역사를 한번 보십시오. 성경을 한번 보십시오. 인간이 정말 죄가 없습니까? 구원이 필요 없습니까? 그런 눈 감고 아웅식의 거짓말을 하면 안됩니다. 우리의 양심이 용납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다 엉망입니다. 구원 받아야 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를 향해서 구원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구원 받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꼭 십자가에 죽으셔야 될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려면 십자가에 예수님이 꼭 죽어야 된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히브리서는 구약의 제사를 가지고 이 사실을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약에 있는 모든 제사제도는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실 그 죽음을 미리 가르쳐 주고 미리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예표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을 읽으면서 십자가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제사제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한 가지 아주 중요한 원리를 제시하셨습니다. 무슨 원리인 줄 아십니까? 9장 22절 보십시오. '율법을 좇아 그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이것이 제사의 기본 원리 입니다. 왜 제사에서 제사를 드리면서 짐승을 잡습니까? 왜 피를 흘리고 피를 뿌립니까? 피가 없으면 죄 용서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피는 생명의 상징입니다. 우리가 죄인이 됨으로 인하여 생명을 잃어 버렸습니다. 우리에게 찾아 온 것은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이 죽음을 대체할 생명을 다시 회복하려면 생명의 상징인 피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진리입니다. 피가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짐승을 잡아서 피를 흘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피를 뿌렸습니다. 죄 지은 사람이 짐승을 끌고 와서 그 짐승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면 그 짐승은 자기 머리에 손 얹고 기도하는 사람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그 짐승을 잡아 피를 가지고 그 사람에게 뿌립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제사 지냄으로 그 사람의 죄가 용서 받았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특별히 대제사장은 1년에 한 차례씩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자기 몸에 피를 뿌리면서 지성소로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이 계신다고 하는 지성소로 가서 자신의 죄와 모든 백성의 죄를 하나님 앞에 용서 받고 나왔습니다. 이와 같은 속죄의 은혜는 피가 없이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구약에 모든 제도는 다 일시적인 것이고 그림자요, 불완전한 것입니다. 구약에 대제사장이 누굽니까? 사람입니다. 사람이기에 자기도 죄인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불완전한 것입니다. 대제사장으로서 완전하지 못합니다. 또 구약에 드리는 모든 제사는 짐승의 피입니다. 짐승의 피이기 때문에 일시적인 효력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죄를 범할 때마다 자꾸 반복해서 짐승을 잡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불완전하고 일시적인 제사 제도를 계속 하시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드디어 때가 되매 완전하고 영원한 제사를 하나님이 받으시기 위한 준비를 하셨습니다. 그 일을 위해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완전한 대제사장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죄가 없기 때문에 완전 무결한 대제사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나가서 얼마든지 하나님 앞에서 용서 받게 만드실 수 있는 자격을 가진 분입니다. 예수님이 드린 제사는 완전한 제사요, 영원한 제사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짐승의 피가 아니고 예수님 자신의 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자신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이 제사는 완전한 제사요, 한번 드림으로 끝나는 제사요, 다시 반복 할 필요가 없는 제사입니다. 한번 드림으로 온 세상의 모든 죄를 완전히 하나님 앞에서 용서 받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제사였습니다. 하나님이 이 제사를 받으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십자가의 죽음이 하나님 자신의 자기 희생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이 사실을 꼭 명심 해 두십시오.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 자신의 희생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이 되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죽으신 분은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 만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려 계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만이 아닙니다. 거기에 달리신 분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이 사실을 이해하십니까? 하나님 자신입니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에 달리신 그 분은 인간이신 예수님만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 분은 하나님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요, 하나님입니다. 사람이요, 하나님입니다. 완전하신 사람이요 완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사람만 못 박힌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만 못 박힌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요, 하나님이신 분이 그곳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분은 하나님이시요, 사람이십니다.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인간의 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가 죄를 범했기 때문에 죄 값을 배상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배상 해야 됩니다. 범죄한 사람이 배상의 책임을 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힘으로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배상을 만족하게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할복 자살을 해도 하나님이 원하는 죄의 값을 우리가 지불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문제였습니다.
하나님 편에서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너희들이야 어쩔 수 없으니까 그냥 내가 받아주마.' 하고 죄의 문제를 거론하지 않고 우리를 받으신다면 하나님의 거룩에 상충됩니다. 하나님은 그런 모순을 범할 수가 없습니다. 죄는 죄대로 처리해야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직면한 문제였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면 죄는 벌하고 죄인을 살릴 수 있는가가 하나님의 숙제입니다. 어떻게 하면 죄는 벌하고 죄인은 살릴 수 있는가. 이 난제를 해결하는 방안이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죄의 배상을 책임지기 위해서 자신이 사람이 되시고 십자가에서 형벌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만족하실 수 있는 배상을 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되기 위해서 그는 하나님이셔야 했습니다. 배상의 책임을 지기 위해서 사람이 되셔야 했고 배상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이셔야 됐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는 하나님이요 사람이신 그 분이 못 박혀 돌아가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아들을 주시면서 자기 자신도 주셨습니다. 아들 되는 예수님의 인격 속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내리는 형벌을 스스로 담당하셨습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신비한 연합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형벌을 자기가 내리면서 그 형벌을 자기가 담당하는 신비스러운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외에 완벽한 대제사장과 완벽하고 완전한 제물이 될 사람이 이 세상에 누가 있습니까? 오직 예수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태리의 어느 성당에 가면 큰 그림이 하나 걸려 있는데 그 그림은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흔히 보는 십자가의 벽화인데, 자세히 보면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그 예수님 뒤에 희미한 모습으로 더 큰 어떤 분이 계시는 것이 그려져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못에 찔린 손바닥에는 그 뒤에 계시는 그 분의 손바닥도 함께 포개져 있고 창에 찔린 예수님의 옆구리에는 예수님과 함께 그 분의 옆구리도 함께 찔려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이거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그 십자가는 하나님 자신의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죽으신 겁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희생한 겁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나를 위해 돌아가신 것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사실이 우리 가슴에 깊이 젖어 들어와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십자가의 영적인 의미를 우리가 바로 알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십자가는 하나님 자신의 희생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능력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의 말씀대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이겠지만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도, 십자가의 죽음, 십자가의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소방관 6명이 그 인간 같지 않은 한 사람을 살리려고 하다가 순직을 당하니까 그 죽음이 얼마나 능력 있었는지 사람들의 마음을 찡하게 울렸고 사람들의 눈에서 눈물을 뽑았고 전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 소방관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서 유족들을 위해서 자기 호주머니를 털고 아까운 줄 모르고 내 놓게 만들었지 않습니까? 얼마나 소방관의 죽음이 능력이 있었는지 사람들을 변화 시키고 국민의 정서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지난 1월 신주쿠 지하철에서 술에 만취 되어 철로에 떨어진 일본 사람을 건지려고 자기 몸을 던졌던 이수현씨의 죽음이 알려지자 전 일본 열도가 열광했고 흥분했고 애도했습니다. 얼마나 그 죽음이 능력 있었는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습니다.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서 그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고 대한민국에 대한 그들의 시각을 바꿀 정도로 대단한 힘을 발휘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떤 의인의 죽음도 선한 사람의 죽음도 이처럼 능력이 있다면 하나님 자신의 죽음이, 죄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어떻게 능력이 없겠습니까? 어떻게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우리의 마음을 찢어 놓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죄를 회개하지 않도록 하겠습니까? 십자가의 죽음은 능력이 있습니다. 할렐루야. 모든 사람을 하나님 앞에 굴복 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세상을 구원 할 능력이 있습니다. 이 능력이 오늘도 살아있습니다.
이 십자가의 능력은 우리에게 영원한 속죄를 안겨주었습니다. 12절을 잘 보십시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피로 자기 몸으로 제사를 지냈는데, 그 예수님의 십자가의 제물 때문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영원한 속죄를 이루었다고 했습니다. 영원한 속죄, 다시 말하면 한번 용서한 다음에는 더 이상 회개도 필요 없고 더 이상 용서도 필요 없는 완전무결하고 영원히 유효한 죄의 용서를 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영원한 속죄입니다. 얼마나 능력이 큰지요.
그러므로 십자가의 주님 앞에 나가면 씻지 못할 죄가 없습니다. 용서 받지 못할 죄가 없습니다. 용서 받지 못할 죄인이 없습니다. 얼마나 그 십자가의 보혈이 능력이 있는지 용서 받지 못한 죄인이 없습니다. 씻지 못한 죄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을 무시하고 세상을 너무 오랫동안 살았습니까? 무서운 죄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주님 앞에 나오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그 모든 죄를 다 도말해 주십니다. 여러분, 우상숭배를 많이 하셨습니까? 모르고 한 일이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1계명, 2계명을 범한 죄 중에 죄 입니다. 그러나 우상숭배 했던 과거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십자가를 붙들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는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모든 우상숭배의 죄를 씻어 주십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음란합니까? 간음합니까? 남 모르게 더러운 생활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에는 더러운 생각으로 날마다 들끓고 있습니까? 교회를 다니면서도 못 고칩니까? 십자가 앞으로 오십시오. 십자가 앞에 와서 피 흘리시는 주님의 옷 자락을, 주님의 발목을 잡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더러운 음란한 죄라도 간음한 죄라도 다 씻어 주시고 다시는 기억치 않으십니다. 사랑하지 못한 죄가 있습니까? 용서하지 못한 죄가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의 죄와 우리의 불법을 사하시고 영원히 기억치 아니하신다고 약속하신 그 약속대로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 주십니다. 이것이 영원한 속죄입니다. 할렐루야. 이 속죄를 우리에게 주실 만큼 십자가는 능력이 있습니다.
또 십자가의 능력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순종하고 헌신하게 만듭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지금까지는 자신만을 위해서 살던 사람을 완전히 바꾸어 놓아 예수님을 위해서 살게 만들고, 지금까지는 그저 아까워서 재물을 내 놓지 못하던 다 풀어 놓게 만듭니다.
14절을 봅니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령이 우리 안에 역사하시면 어떻겠는가 하는 말입니다. '흠 없는 자기를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의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이 말은 죽음에 이르는 악한 행실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겠는가 하는 말입니다.
십자가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앞에서 은혜 받으면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사람이 됩니다. 십자가 앞에서 은혜 받으면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려 헌신하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나 같은 것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는데 나 같은 것을 구원하기 위하여 죄 없는 예수님이 죽으셨는데 그 은혜가 너무 감격스러워 이제는 주님을 위해서 자기 생을 드리겠다고 하는 사람으로 바뀌어요. 아까운 것이 없어요.
주일 날 그저 한두 시간 내어 교회 와서 예배 드리는 것도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하십니까? 아직도 십자가의 은혜를 모르는 분입니다. 헌금 몇 푼 하면서 그것 가지고 아까워 하십니까? 주님을 위해서 헌신해야 될 일을 빤히 보면서 손가락 하나 까딱 안하고도 마음에 가책이 없습니까? 아직도 십자가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에 아직도 사로 잡히지 못한 사람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에 사로 잡히면 여러분은 그렇게 머물고 있을 수 없습니다. 순종하게 만듭니다. 헌신하게 만듭니다.
'온 세상 만물 가져도 주 은혜 못 다 갚겠네/ 놀라운 사랑 받은 나 몸으로 제물 삼겠네' 이것이 바로 십자가 앞에 가까이 나아간 사람의 고백이요,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 사람의 고백이요, 날마다 십자가를 새롭게 체험하는 자의 고백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대단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꽉 묶어 놓습니다. 십자가는 얼마나 대단한지.
필립 얀시가 말한 것처럼 십자가에는 강하신 하나님께서 스스로 약해짐으로 죽음의 고통을 스스로 흡수 해 버린 신비한 사랑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 사랑에 우리가 한번 접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전부를 소유하게 됩니다. 그 사랑 때문에 텅텅 비었던 가슴에 놀라운 기쁨과 평안이 차오르게 되고 그 사랑 때문에 이 세상을 두려워 하던 사람이 담대함을 갖게 되고 그 사랑 때문에 불만족에 휩쓸렸던 사람들이 날마다 찬송하고 기뻐하며 살 수 있게 됩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랑을 체험하게 하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십자가의 죽음은 능력이 있어서 우리에게 영원한 속죄를 안겨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순종하고 헌신하게 만들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의 손에 꼭 사로 잡혀 살게 만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에릭 샤우어라고 하는 독일 학자의 말이 맞습니다. 구원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사건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부활 보다도 더 위대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승리를 선포하는 것이고 부활은 정복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승리가 있어야 정복이 따라 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십자가는 부활 보다 더 위대합니다. 하나님의 죽으심,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은 가장 위대한 복음이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했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 외에는 내가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십자가 앞으로 나오십시오. 성령 앞에 기도하십시오. 답답한 마음을 열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십자가에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과 은혜를 하루하루 알 수 있도록 계시의 영을 주시고 마음의 눈을 열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이대로 머물지 마십시오. 그 십자가의 은혜에 우리가 붙들리기만 하면 가장 능력 있는 사람이 됩니다 아무도 우리를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우리가 종일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고 우리가 종일 죽임을 당하는 자처럼 취급 받지만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우리를 이기게 하시는 능력이 십자가에 있습니다. 할렐루야. 이 은혜를 이번 고난 주간을 통해서 특별히 우리 모두가 다시 한번 발견하고 사랑의교회가 십자가의 감격, 십자가의 능력으로 뜨거워지는 놀라운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처음에 불렀던 찬송을 다시 불러 보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마음을 활짝 여십시오.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찬송을 부르면서 십자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던 은혜를 발견하게 해 주시고 지금까지 깨닫지 못했던 것을 다시 깨닫게 하시고 아직까지도 둔감한 마음을 가지고도 태연스럽게 앉아 있는 우리가 가슴을 찢고 십자가에 그 놀라운 보혈의 피로 가득히 채우는 시간 되게 해 달라고 우리 기도하면서 이 찬송 부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주의 보혈은 정하고 정하다/ 내 죄를 정케 하신 주 날 오라 하신다/ 내가 주께로 지금 왔으니 예수님의 보혈로 날 씻어 주소서/ 약하고 추해도 주께로 나가면/ 힘 주시고 내 추함을 곧 씻어 주시네/ 내가 주께로 지금 왔으니 예수님의 보혈로 날 씻어 주소서/ 날 오라 하심은 온전한 믿음과 /또 사랑함과 평안함 다 얻게 함일세/ 내가 주께로 지금 가오니 예수님의 보혈로 날 씻어 주소서/큰 죄인 복 받아 빌 길을 얻었네/ 한 없이 넓고 큰 은혜 베풀어 주소서/ 내가 주께로 지금 왔으니 예수님의 보혈로 날 씻어 주소서/ 그 피가 맘속에 큰 증거 됩니다/ 내 기도 소리 들으사 다 허락 하소서/ 내가 주께로 지금 왔으니 예수님의 보혈로 날 씻어 주소서/ 내가 주께로 지금 왔으니 예수님의 보혈로 날 씻어 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