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장으로 갔습니다. 내가 심은 이천평 감자밭과 옥수수밭이 억수같은 비에도 늠름했습니다.
그 진한 녹색이란! 수확의 기쁨도 있지만, 식물을 키우는 것은 오히려 수확보다 녹색의 기쁨입니다.
대지의 온갖 난관을 이겨내고 찬란한 녹색을 뽐내고 있는 그들에게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 대단한 녁석들이 내 자신이라는 뿌듯함, 감격에 빗속에 밭고랑 사이에 서서 한참을 있었습니다.
그 동안 농수산물을 인터넷 쇼핑몰로 팔아 왔지만, 사실 장사보다는 농부가 되고 싶었습니다. 이익을 따지기 전에 땅의 뜨거운 기운이 내 몸과 함께 되기를 기원했습니다. 드디어 농부가 되었습니다.
참으로 많이도 돌아서 온 길이었습니다. 내가 공부하고 경험하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땅으로 보답이 되었습니다.
농부가 되거나 스님이 되거나 둘 중에, 내가 가야 할 길이 있다는 것을 이제서야 알게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동안 그렇게도 괴로웠나 봅니다. 이제야 마음이 평화롭습니다. 장마비가 더욱 촉촉히 내리다가 억수 같아집니다.
북동분교에 막걸리를 마실 조그만 주막 [花無十一紅]을 만들었습니다. 내가 담근 막걸리 [북동막걸리]를 마셨습니다. [녹색평론]을 읽다가 잠시 졸았더니 술 맛이 꿀맛입니다. 앞에 보이는 학교 뒷산 발림산에 구름이 내려앉았더군요. 그 풍경이 술 맛을 더해주었습니다.
녹색 평론을 읽는 순간은, 저에게 삶의 법칙과 혜안을 가지는 순간입니다. 책을 읽다가 깜박 졸기도 합니다.
농사일로 피로했던 몸과 마음이 함께 환해지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나서 막걸리를 마십니다.
발림산의 찬란한 녹색은 구름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내 인생을 돌고 돌아 이곳 북동리에 온 것은, 현실 세계에 적응하지 못한 부적응자의 그것과 닮아 있습니다.
피하고 피해서 막장까지 온 도망자이자 이방인, 그러나 북동리는 천국입니다. 이 찬란한 녹색은 저를 무한히 감싸주고 있습니다.
진보당원이 되고 몇 개의 환경단체 회원이 되고 녹색평론을 읽는 것은, 저가 세상에 대해 희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포기한 때문입니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단서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지만, 도저히 자신이 없고 사람들에 기대를 저 버린지 오래입니다.
그래서 도망치듯 숨어든 곳이 이곳인지 모릅니다.
녹색에 대해 한마디만 하고 싶습니다. 녹색은 빛깔만 녹색이 아닙니다. 색으로의 녹색 이전에 그 찬란한 빛이 어디서 오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생태 운동하는 자들의 대부분은 녹색만 바라봅니다. 그 찬란한 빛이 어디서 오고, 그 빛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 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녹색이 찬란한 빛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삶의 방식을 바꿔야 합니다. 법과 제도와 운동만으로는 모래성과 같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태어나고 어디로 가는 지, 우리가 왜 살아가야 하는 지, 누구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지, 우리가 진정 먹고 숨 쉬고 말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에 대한 물음부터 바로 잡아가야 합니다.
삶의 방식을 바꾸지 않는 녹색은 그 뒤의 찬란한 빛을 보지 못합니다.
4대강은 이명박의 책임이 아니라, 이런 삶의 방식을 고집하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미국은 에코 오일을 생산하기 위해, 3억명이 먹어야 할 옥수수를 소비했습니다. 옥수수값은 폭등하고 기아에 굶주리는 사람들은 더욱 늘어났습니다.
우리가 먹어치우는 소 한마리는 60명이 먹어야 할 곡식을 소비합니다. 그리고 소가 방출하는 이산화탄소는 자동차의 그것보다 양이 많습니다.
억울한 한진 중공업 노동자들이 만든 자랑스런 무역선은 사실 해적선입니다. 세계무역은 이 모든 왜곡된 삶의 방식을 실어 나르는 폭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