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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한동안 눈팅도 자주 못하고 활발히 들어와보지를 못했는데, 운영진의 배려로 이번 5주기 책자팀의 일원으로 원고를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맡은 주제는 "대한민국 마이클 잭슨 팬클럽의 역사" 인데, 제가 모든 팬클럽에 다 참여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체계적인 정리를 할 수는 없었고, 개인적인 경험들을 섞어서 에세이식으로 정리하였습니다.
저의 기억에 의존하다보니 직접 참여하지 못했던 OPL 의 활동은 들어서 알고 있던 지식과 인터넷 블로그에 남아있는 글을 참고하여 적을 수밖에 없었고, Invincible 활동이 접어진 2004~2009년 사이의 팬클럽 활동은 기억나는 것이 적다보니 '침체기'로 표현하게 된 측면이 있는지라,
가능하면 많은 기억을 가진 카페 회원님들께 먼저 보여드리고 검증을 받아 보완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프리보드에 올리게 되었습니다. 올드팬들께서 많이 보아주시고, 기억하시는 맥락과 달랐다거나 사실과 달랐던 점, 보완했으면 좋을 점에 대해 댓글로 지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문장이 매끄럽지 않거나 수월하게 읽히지 않는 부분 등도 지적해 주시면 보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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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MJ 팬클럽의 발자취를 돌아보며
김영민 (팬클럽 닉네임 masquerade)
5주기라는 시점은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이에게는 묘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감정들이 조금씩 차분해지고 그간의 기억들 중에서 인상이 강하게 남았던 순간들이 선택되는, ‘돌아본다’는 말이 가장 어울리는 시기가 아닐까.
‘사후 팬’들에게 마이클은 주로 디지털 매체에서 만나게 되는, 이미 레전드로서 불가침의 반열에 오른 기록 속의 법신(法身)과도 같은 존재일 것 같다. ‘생전 팬’들은 마이클을 브라운관 TV와 신문의 흑백사진 속에서 동시간대에 만났었고 잠실 주경기장 무대 위에 솟아올라 현신(現身)한 그의 숨소리를 듣는 특별한 순간을 함께 할 수 있었던 반면, 온갖 편견과 악성루머에 함께 분노하고 아파해야 했던 기억도 갖고 있다.
중학교 1학년때부터 20여년간 마이클의 팬을 자처해 왔기에 생전 팬인 동시에 사후 팬이기도 하며, 그가 첫 내한공연에서 던진 페도라(중절모)를 소장하는 행운을 일종의 계시처럼 간직해 온 필자가 본 지면을 허락받게 된 것은 누구보다 마이클을 더 그리워하거나 잘 알기 때문이 아니라, 대한민국 땅에서 마이클의 팬 커뮤니티와 미디어의 변화를 실시간으로 겪어 왔던 한 사람으로서의 증언이 갖는 의미 때문이라 여긴다. 따라서 사실의 나열을 넘어 당시를 마이클과 함께 살아냈던 팬으로서 느꼈던 개인적인 정서를 함께 고백하는 것이 가장 정직하게 나눌 수 있는 기록이 될 것 같다.
[ 90년대 초 : Dangerous Era ]
커버의 강렬한 눈빛에 끌려 집어들었던 <Dangerous>(1992) 앨범의 치밀한 사운드에 빠져들며 마이클에게 속절없이 굴복하기 시작한 중학생 시절은 인터넷이 보급되기 전이라 정규음반 이외의 자료를 참 구하기 어려웠다. 마이클을 담은 매체에 무척 목말랐고, 팬클럽 소속 없이 그에 대한 세간의 오해(성형중독, 기이함) 속에서 외로운 팬심을 이어가야 했던 투쟁과도 같던 시절이다.
그나마 SBS 출범 이후 방송사들의 컨텐츠가 다양해지면서 1993년 <수퍼볼> 하프타임과 <아메리칸 뮤직 어워즈> 오프닝을 장식한 마이클을 TV에서 볼 수 있었고, 당시 이를 VHS로 녹화한 영상을 틈만 나면 테이프가 닳도록 틀어댔던 기억이 선하다. 잠깐 빌려서 보게 된 <Dangerous 투어> 루마니아 부카레스트 공연실황에서 <Jam> 의 장쾌한 무대영상이 머릿 속에서 떠나지 않았지만 구할 길이 없었고, 그나마 뮤직 비디오들을 소개하던 KBS <지구촌 영상음악>이나 자정이후 주한미군방송 AFKN의 <Videolink>를 하염없이 쳐다보며 마이클이 나타나길 기다리곤 했다. 당시 오프라 윈프리와의 인터뷰도 큰 화제가 되었는데, 백반증에 대한 적극적인 해명을 포함하여 마이클이 은둔형 이미지를 벗고 인간적으로 다가선 모습, 한 곡 뽑아보라는 오프라의 주문에 수줍어하더니 눈을 지긋이 감고 <Who Is It>을 구성지게 비트박스하는 장면을 AFKN을 통해 접할 수 있었다.
현재 우리가 기억하는 “King of Pop” 이미지를 완성한 이 시기의 마이클을 무대에서 만날 수 있었던 <Dangerous 투어> 내한공연이 1993년 당시 갓 출범한 김영삼 정권의 불허로 좌절된 것은 통한의 기억이다. 외교적 마찰 우려에 대한 기사들도 나왔었지만 당시 정권은 문민정부를 표방하고도 ‘신한국 분위기 저해’라는 이유로 끝내 이를 불허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인터넷/SNS를 통한 여론수렴이 없었던 시기인지라 팬 커뮤니티가 결집하여 관(官)을 압박할 수 있는 동력을 만들기 어려웠고, 외국가수에게 외화낭비하는 것 아니냐는 정서도 가볍지 않았던 것 같다. 대형스타들이 일본시장을 중시하면서도 한국은 대체로 외면하던 시기에, ‘꼭 한국에 오겠다’는 적극적 의지를 넘어 압력까지 동원한 마이클을 대통령이 막아버려, 우리는 플로어 밑에서 펑 하며 튀어올라 서서히 썬글라스를 벗은 뒤 무대를 휘젓기 시작하는 그를 결국 눈으로 볼 수 없었다.
팬클럽을 통한 교류가 어렵지 않고, 디테일한 정보도 많으며, YouTube로 마이클의 거의 모든 영상을 쉽게 접할 수 있는 요즘과 비교하면, TV에서 마이클이 나오면 일 초라도 놓칠세라 녹화버튼을 누르던 시기의 빈곤함은 허탈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만큼 목마름이 있어 소중함도 강렬했던 것 같다. 아동성추행 혐의와 쟁송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기 직전까지의 이 시기야말로 마이클이 <Dangerous> 음반의 독자적 프로듀싱을 통해 확립한 자아(Ego)를 맘껏 펼쳐보였던 진정한 전성기가 아니었을지.
[ 90년대 중후반 : HIStory Era ]
고교시절 PC 통신이 본격화되면서 이를 중심으로 한 팬클럽 커뮤니티가 활성화되었다. 마이클이 힘든 시기를 이겨내고 음반 <HIStory>(1995)를 통해 재기의 의욕을 불태웠을 뿐 아니라, 1996년과 1999년의 내한공연을 통해 한국의 팬들을 ‘공연 가 본 팬’으로 업그레이드시켜 준 소중한 시기이다.
삐~익 하는 모뎀 소리와 파란 바탕의 흰 텍스트로 추억되는 PC 통신을 통해, 그간 외롭게 편견과 싸워가며 마이클을 각자 숭배하던 이들이 공동체를 경험하게 된다. 하이텔(클럽명 “피터팬”), 천리안, 나우누리(클럽명 “네버랜드”)로 대별되는 PC 통신 팬클럽은 당시 고교생~대학생들이 주축이었고, 대체로 운영진의 수고와 열정에 기대어 유지되었다. 마이클의 음반 및 공연활동 상황에 따라 활동량의 부침이 있었고 지금과 같은 고속인터넷을 통한 대용량 자료가 아닌, 텍스트나 수십 Mb 단위의 자료 위주였지만 이를 통해 온라인을 통한 팬 담론을 활성화하였을 뿐 아니라 오프라인 모임(정모, 번개)을 통해 팬들간 친목을 도모하고, 주기적인 영상회를 통해 개인이 구하기 어려운 마이클의 필름들을 함께하였다. 이러한 시간들이 현재 인터넷 중심 팬 커뮤니티의 모태가 되었다고 할 것이다.
마이클의 팬클럽을 얘기할 때 “100% Pure Love” (약칭 “OPL”)를 빼놓을 수 없는데, 온라인 팬클럽과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연령대의 열성적인 여성팬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되었다. 회지발행, 정기/임시모임, 영상회 개최를 포함한 왕성한 활동을 하였으며, 1996년 내한당시 마이클로부터 공식 팬클럽의 지위를 인정받기도 했다. 마이클을 따라 공항, 에버랜드, 무주 리조트 등에 열심히 쫓아다니고 그 와중에 마이클에 지목당해 포옹을 해 보았다거나, 운영진이 마이클을 직접 만나서 알현의 시간을 가졌다는 등의 전설적인 얘기들을 만들어 낸 OPL 회원들의 저력은 지금도 팬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회자된다.
1996년 10월 11일, 13일 있었던 <HIStory 투어 서울공연>은, 마이클을 범죄자로 기정사실화하는 시민단체의 반대운동이 있었지만 시간의 흐름을 반영하듯 비교적 무난하게 성사되었고, 당시 고2였던 필자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순간이 된다. 첫날 공연에서 왼쪽 구석에 배정받은 자리에 만족하지 못하고 가운데 맨 앞자리에서 앞으로 더 나와 무릎꿇고 관람한 덕에 시야는 안전요원에 자주 가리웠지만, 무대에 선 마이클을 약 15m 전방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 무대를 뚫고 솟은 우주선을 박차고 나온 뒤 마스크를 벗어던진 그의 화장기 짙은 얼굴이 처음 드러나자 그간 수없이 영상 안에만 있던 마이클이 정말 내 앞에 서 있다는 실감이 났고, Jackson 5 메들리 직전 “Old songs, Old fashioned way !”를 말하는 라이브 음성이 무척 거칠면서 생생하게 다가왔으며 <Stranger in Moscow>에서는 저역대 음파에 옷과 살이 부르르 떨렸다. <Billie Jean> 공연 끝에 마이클이 던진 페도라는 힘을 받지 못해 펜스 안쪽으로 떨어졌는데, 무대관계자 한 사람이 주워서 관중석 안으로 내밀었고, 반사적으로 달려들어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이를 움켜쥔 끝에 필자가 획득하게 된다. (당시 PC 통신에 올라온 어떤 관람기에서 이를 “미친듯이 달려들어”라고 써놓았다.) 당시 나는 “2 Long We’ve Waited”라는 글귀의 플래카드를 만들어 갔었는데, <Black Or White> 후반부 시야가 뚫린 틈을 타 펼쳐든 이 카드를 마주 다가오던 마이클이 보고 씩 웃으며 손으로 키스를 불어주었고, 나는 나도 모르게 그자리에 쓰러져 한동안 목놓아 엉엉 울고 말았다. 그런 기억들마저 단편적인 조각처럼 남아있을 뿐 공연순간의 구체적인 이미지는 이미 흐릿한데, 발매된 공연영상은 원래 기록용도였던지라 그때 기억을 되살려주지는 못하는 것 같아 아쉽다. 요즘처럼 쉽게 녹화할 수 있는 디지털 모바일기기가 그때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공연이 끝난 후 페도라를 품 안에 숨기고 돌아오던 길 내내 심장이 터질듯 쿵쾅거리던 기억만은 또렷하다.
<HIStory 투어>를 전후로 활성화된 팬클럽은 투어 이듬해 음반 <Blood on the Dance Floor>(1997) 및 쇼트필름 <Ghosts>(1997)가 발매된 시기에 마이클의 활동과 미발표곡 등을 화제로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었으나, 당시까지도 공중파에서는 마이클의 영상을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았고 마이클에 대한 뿌리깊은 세간의 편견도 크게 나아짐이 없었다. 거기에 미국 내에서 얼터너티브 록, 힙합이 득세하는 트렌드로부터 유아독존을 고수하는 마이클의 이미지가 괴리를 갖게 되면서 팝 황제의 통치권이 예전만큼 강력하지 않았기에 마이클 잭슨을 과거의 이름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적지 않았다. 팬클럽 내에서의 유대감은 돈독해졌지만 밖에다 마이클 팬이라고 자랑하고 다니기는 좀 애매한, 마이클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지만 제대로 알고 있는 이는 드물었던 시절이었고,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가수인 마이클의 팬으로서 지낸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이런 마이너리티의 고충을 감내하는 고난의 행군이기도 했다.
필자가 수능을 보았던 날 아침 TV에서 마이클이 무주 방문차 예고없이 한국을 방문했다는 뉴스를 접한 데 이어, 김대중 당시 대통령당선자와 유세과정에서 친분을 맺게 된 마이클이 대통령 취임식 방문차 1주일간 방한하여 신라호텔에 묵었고, 당시 대학교 입학을 확정지어 홀가분하던 나는 호텔을 나서는 마이클을 보기 위해 매일 신라호텔로 출근하여 다른 팬들과 함께 로비를 지켰다. 마이클이 밴에 탑승하기 위해 호텔 로비를 걷는 수 분을 함께하기 위해 로비에 몇 시간을 죽치고 기다리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니었고, 1층 엘리베이터가 열리며 경호대장 웨인이 나오고 이어서 마이클의 페도라 끝이 보이는 순간부터 팬들은 너나할것없이 일제히 이성을 잃어버리고 “Michael~!” “I love you~!”를 목이 터져라 외쳤다. 넷째날이던가 조금 차분했던 날, 팬들 앞에 손을 내밀어주는 마이클에게 필자가 미리 준비한 팬레터를 건네고, 스치듯 그 손을 잡아 본 순간도 잊을 수 없다.
1999년 6월 25일 <MJ & Friends 서울공연>은 특별하면서도 아쉬운 기억이다. 당시 스타가 한국을 방문한다는 것은 대개 월드투어의 일환이거나 일본공연의 연장선상에서였는데, 전 세계에서 독일과 함께 한국을 콕 찝어 마이클이 특별공연을 연다는 것은 분단국가라는 명분 때문이라고는 해도 결과적으로 한국 팬들로서 무척 으쓱해지는 일이었다. 다들 흥분에 차 있었고, 팬클럽 연합으로 공연대행사를 통해 공동구매를 진행하였다. 그러나 공연대행사(제일기획)는 마이클에게는 팬클럽에 가장 좋은 좌석을 제공한다고 보고해 놓고는 팬들의 공동구매 좌석을 VIP석 중 무대에서 떨어진 뒷편으로 배치하고 주변을 진행요원으로 둘러싸는 만행을 저지르고 만다. 곱씹을수록 괘씸하고 용서가 되지 않는 처사이지만 어쨌든 ‘친구들’ 섭외에 약간의 난항이 있었음에도 머라이어 캐리의 첫 내한무대가 무게를 더해주었고, 조금은 걸쭉하게 믹스한 <Dangerous>를 비롯한 마이클의 무대를 다시 잠실 주경기장에서 볼 수 있었다. 당시 파트리샤 카스가 노래를 부르던 중, 공연장 밖에서 마이클이 버스를 타고 도착하여 내리는 것을 목격한 우리 팬들이 무대를 외면하고 그쪽으로 일제히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파트리샤가 머쓱해 하던 것이 기억난다. 관중을 향해 “한국이 통일되는 날 다시 오겠다.”던 마이클을 보게 되는 날이 그 날이 마지막일 줄, 정확히 10년 후에 그를 떠나보내게 될 줄은…
[ 2000년대 : Invincible Era ]
1990년대 중반부터 PC통신과 더불어 인터넷이 도입되면서 국제적인 팬클럽 홈페이지들(www.mjifc.com 등)이 생겨났고, 이를 통해 마이클의 활동이나 신상에 대해 국내에서도 타블로이드를 거치지 않은 정확한 정보를 접할 수 있었다. 1995년에 마이클은 인터넷을 통한 simulchat를 진행하기도 했고, 1997년 태어난 프린스와 아빠가 된 마이클을 인터넷을 통해 전세계 팬들이 함께 축하하였다.
2000년대에 이르러 인터넷이 고속화되면서 PC 통신은 서서히 퇴조하게 되고, 팬 커뮤니티도 인터넷 홈페이지를 중심으로 재편되게 된다. 소니 홈페이지의 일부였던 마이클의 공식 홈페이지는 www.michaeljackson.com 으로 독립하여 쇼트 필름들을 스트리밍으로 제공하기 시작하였고, 국내 팬들을 결집한 사이트로 대표적인 곳은 닉네임 ‘호로새’님이 운영하던 www.kingofpop.co.kr 이었다. 내한공연의 열기가 가라앉은 이 시절에 팬클럽 홈페이지와 PC 통신을 지켰던 팬들은 다른 시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한 충성도와 꾸준함으로써 활동을 이어나갔던 것으로 기억된다.
밀레니엄 이후 <솔로데뷔 30주년 공연>을 통해 형재들과의 재결합과 건재함을 과시한 직후 발매된 앨범 <Invincible>(2001)은 무언가를 성취하려는 욕망보다는 가정을 이룬 마이클의 여유로움이 묻어나오는 사운드로 가득했다. 월드투어는 없었지만 <You Rock My World> 쇼트 필름을 필두로 싱글 <Butterfly>가 순항하고 <What More Can I Give> 프로젝트를 비롯, 미국 내 몇몇 행사에서 마이클이 공연을 선보이는 모습을 인터넷을 통해 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소니와의 불화가 표면화되면서 음반 홍보가 중단되고 마이클의 주도 하에 해외 팬들이 ‘Sony Sucks’를 외치며 음반사의 홍보전략을 성토하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 마틴 배셔가 마이클을 밀착취재한 다큐멘터리 <Living with Michael Jackson>(2003)의 편집방향이 마이클의 기대와 어긋나 <Take 2>가 발표되기도 하고, 마이클이 셋째인 블랭킷을 팬들을 향해 호텔 창밖으로 내미는 실수가 논란을 야기하였으며, 결정적으로 마이클을 갉아먹는 두 번째 기소 사건이 터지면서 활동은 사실상 종료되고 만다. 그나마 박스 세트인 <The Ultimate Collection>(2004)을 통해 Dangerous 투어 루마니아 공연(Live in Bucharest)이 10여 년만에 드디어 정식발매되어 오랜 갈증을 해소해 주었고, 시상식에서 마이클을 예우한 특별상을 받는 모습들, <Thriller 25주년>(2008)의 발매, 소송과정 중 응원하는 팬들 앞에서 마이클이 자동차 위에 뛰어올라 자신감을 내비치는 모습과 이어지는 승소소식이 한국 팬들을 미소짓게 해주었다.
그러나 마이클이 퍼포머로서의 활동보다는 지루한 소송에 몰두하게 되면서, 팬클럽 역시 전반적으로 침체기를 겪게 된다. 그 사이 인터넷은 포털(다음, 네이버, 디씨인사이드 등) 위주로 재편되었고, DVD가 보급되었으며 이어 대용량 HD 동영상을 공유하거나 YouTube 로 즐길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 2009년, 그이후 ]
다른 팬들과 마찬가지로 필자도 오랜 공백 후 컴백을 선언하는 마이클의 기자회견 소식을 접한 후 일상 속에 파묻혀 있다가 갑자기 비보를 들었다. 쪽잠으로 밤을 새우다시피 한 아침 맑지도 않은 정신으로 새벽 뉴스에서 그 소식을 들었을 때의 무어라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은, 눈물 없이 마이클을 떠올릴 수 없는 날들로 한동안 이어졌다.
마이클 생전에 진면목을 이해하기보다는 흠잡는 데 열중했던 세인들의 보상심리가 더해진 듯한 추모열기를 담아 MBC는 황금시간대에 <Live in Bucharest : The Dangerous Tour>를 상영했고, 이 방송이 한국에서 마이클의 ‘사후 팬’들을 양산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상실을 계기로 올드팬들과 사후 팬들이 합심하여 이루어 낸 커뮤니티는 SNS와 인터넷의 발달에 힘입어 전에 없는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으며, 마이클 잭슨 재단은 유작 <This Is It>(2009), 사후음반 <Michael>(2010), 쇼트 필름 집대성인 <Vision(2010)>, <태양의 서커스 임모털> 내한(2013), <Thriller Live> 내한(2013), 근작 <Xscape>(2014)를 통해 팬들의 그리움을 달래주고 있다.
현재 마이클 팬 커뮤니티는 다음(daum) 카페 “문워키즈”, 네이버(naver) 카페 “문워커”, 디씨인사이드 “마이클 잭슨 갤러리”가 주축이 되어 마이클 잭슨 팬클럽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으며, “마이클잭슨 리퍼블릭”을 포함한 수많은 블로그와 팬페이지들이 있어 필자의 덕력을 무색케 하는 방대함과 디테일을 과시하고 있다. “한국 마이클 잭슨 팬연합”의 이름으로 1주기부터 올해 5주기까지 이어지는 마이클의 추모행사는 팬클럽 운영진의 헌신과 더불어, 마이클을 기억하고 사랑하는 이들의 관심이 자양분이 되는 연례행사로 자리잡고 있다.
[ 팬클럽, 그리고 L.O.V.E. ]
20여 년간 한국땅에서 겪었던 마이클과 팬들의 기억을 주마간산처럼 훑으면서, 지금은 없어진 PC통신 팬클럽과 여러 홈페이지들, 못다한 얘기들과 그간 팬클럽에서 만났던 여러 얼굴들이 스쳐간다. 돌이켜보면 팬 커뮤니티도 사람의 일인지라 반목이 있기도 하고, 넘치는 열정이 한순간 식어버린 후 하산하기도 하고, 헌신에 소비하는 에너지에 스스로 번 아웃(burn out) 되어버리는 경우도 많았다. 어쩌면 마이클에 대한 팬으로서의 감정은 어렸기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되뇌이면서 그 애증의 기억을 눌러담고 사는 분들도 더러 있을지 모르겠다. 사랑의 형태는 여러 가지이기에 어떤 것이 진짜 팬이라고 하기보다는, 마이클의 존재가 기쁨이었던 기억을 간직한 이라면 누구나 이미 팬으로서의 사랑을 실천했던 것이라고 조심스레 말하고 싶다. 존재 자체가 누군가에게 기쁨일 수 있다면, 그것이 마이클이 항상 얘기하던 L.O.V.E. 일지도 모르겠다고.
마이클이 한때라도 소중한 존재였던 모든 분들, 특히 고난(?)의 시절 팬클럽 커뮤니티 운영에 헌신하셨던 분들께 이 자리를 빌어 그 소중한 기억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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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Xscape 2015가 아닌 2014로 수정부탁드려요ㅎㅎ
옴마 올해를 2015년으로 혼동했었네요.. TT
@Masquerade 저도 요게 눈에 딱 띄더라구요^^;;;
사후 팬으로서 생생하고 열정적인 팬클럽의 역사 잘 보았습니다
과거의 일임에도 세세하게 기억하고 표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블랭킷은 마이클의 셋째딸이 아닌 아들로 알고 있습니다
치명적인 실수가 있었네요. 감사드립니다~
팬클럽 역사에 대한 소중한 자료를 정말 정리를 잘하셨네요~
읽는 내내 그 시절 그때 그때 느꼈을 감정들이 그대로 전해지네요 ...
무엇보다 사후에 마이클의 명성이나 킹오브 팝으로서의 자리를 공고히 하고 제대로 평가 받는거 같아 팬으로서 너무 기쁩니다...
지적 반영하고, 몇 군데 교정,추가하여 수정하였습니다.
마스쿼레이드님은 전생에 나라를 구하셨나요? 정말 특별한 인연인가봅니다....., 마이클이 웃어주고 키스를 불어줬다니
정말 정말 부럽습니다.....
저희들을 위해책자 만들어주셔서고마워요~:]
실질적인 책자제작은 저 말고 다른 분들이 수고를.. 쿨럭;; 매년 책자 보면서 내용에 감탄했었는데 졸고를 실을 기회를 주심에 저야말로 감사드립니다. (짤리지 않기를;;)
생생한 팬들의 역사를 상세하게 기술해 주셔서 감동적인 책자를 또 기대합니다 ᆢ 필력도 상당 하십니다
고생많으셨고요 ᆢ 멋진 책자 기대합니다
초고는 분량을 생각하지 않고 일단 쓴 것이라, 책자에는 개인적인 얘기들은 절제하고 팬클럽 역사에 대한 내용 위주로 추려서 싣게 될 것 같습니다. 다 실리지 못할 얘기들을 포함하여 게시판에 일단 올리고 나니 후련하네요~
우와, 진짜 수고하셨어요.
감사드려요.
뒤에서 수고하시는 모든 분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와~정말 글 잘 쓰셨어요~~~~^^ 감동 입니다~^^
마이클과의 만남을 팬의 한 사람으로 간절함과 보고 느끼신 점을 잘 표현 하셨고, 팬과 카페의 활동을 지켜보면서 쓰신 부분도 이해도 잘 되게 잘 쓰셨습니다~~대단하세요~~^^
제가 보는 견해로는 어디 하나 손볼때가 없습니다. 감동 그대로 전해집니다.
그나저나 전생에 좋은 일 많이 하셨나봐요~~~~~보통 분이 아니신 듯....마이클과의 만남이 타고난 행운이 있으신듯 합니다.^^정말 긴 글 쓰시고, 준비 하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우리 카페에 자랑스러운 분이 계셔서 영광 입니다.!^^
정말 수고많으셨습니다.
또 계속 수고하시겠지요...
대구에서 으쌰으쌰 응원을 보내며...
더불어 좋은 글에 감사함도 싣습니다!
L.O.V.E.
저도 읽으면서 마치 콘서트장에서 마이클과 마스쿼레이드님을 보고있는 기분으로 글을 읽었어요~~생생하네요..그때의 기분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었어요ㅎ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0^
띄어쓰기가 약간 안맞는 부분이 있는데 제가 모바일로 보고 있는지라 웹에서는 문제가 없으시다면 수정할 게 없으십니다..
다시 한 번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해요..^_^b
ㅎㅎ; 이렇게 미리 공개를 하시면 책을 받으실 때의 서프라이즈한 흥분이 반감되는데요! 좋은 글 주셔서 감사하고 오랜 시간 마이클링 하신 분의 경험을 공유하게 되어 저도 너무 반가웠습니다. 영민님만큼의 팬력을 가진 분도 많진 않아요. 내용적인 면은 충분히 좋고 개인적인 시각으로 푸는 이야기여서 더 의미가 큰 것 같네요. 수고하셨습니다. 전 책자편집팀 스타맨이었습니다. 모바일선 왜 옛날 닉넴으로 보이는지...-_-
고생하셨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지난세월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네요 매우공감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