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위에서(낙원)*김병삼 목사
누가복음 23:4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요 19:26-27]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나와 함께 낙원에…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도전이 되는 것은 구원받은 자, 낙원을 선물로 받은 자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묵상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상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용서의 기도였다면 두 번째 기도는 우리를 향한 구원의 선물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즉, 용서를 경험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선물이 “구원”의 선물입니다. 구원이 “선물”이라는 사실이 우리에게 아주 심각한 딜레마가 됩니다. 왜냐하면, 선물은 받는 자의 권한이 아니라 주는 자의 권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그 선물을 받을 만한 자격이 우리의 믿음 고백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믿음의 반응이 만들어내는 합작품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지 않으면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응답하지 않는 어떤 사람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제가 목회를 하면서 참 난감했던 일이 미국에서 있었습니다. 교회에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어 교인들이 함께 심방을 가자는 것입니다. 제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인데,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라 심방 가긴 가야 하는데 자신들이 그곳에 가서 할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저에게 참 담대한 마음을 주셨던 것 같습니다. 간암으로 죽어가는 사람에게 모두 소망이 없다는 사람에게 제게 선포한 말씀이 “당신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생명은 하나님께 달렸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생명을 맡기고 기도하십시오. 예수님을 믿으세요.”
그런데 놀라운 일은 그 사람이 그 상황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가 그 기쁨을 오래 누리지 못하고 간 이식 수술을 하다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제가 의식을 잃은 그분의 가족에게 산소 호흡기를 그만 떼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면서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습니다.
“하나님! 살려 주셨으면 삶을 누리게 하셔야지, 왜 구원받은 사람의 생명을 그렇게 빨리 거둬가시나요?” 어쩌면 오늘 이 자리에 있는 많은 분의 고민이 동일하지 않은가요?
오늘 십자가 위에서 두 번째로 하신 말씀도 그렇지 않나요?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분명히 구원받은 것을 선포하셨는데, 이왕이면 기적을 베푸셔서 십자가에서 내려오게 하시지 말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진정 구원받았다고 한다면 지금 주님과 함께 낙원에 거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가요? 오늘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서 십자가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십자가는 구원입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낙원에 이끄시는 주님의 사랑과 능력을 체험하게 되는 순간이지요. 오늘도 한 번 그런 상상을 하면 말씀을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천국과 지옥 사이에서 오늘 예수님을 가운데 두고 두 강도가 함께 죽어 갑니다. 한 사람은 저주하고 죽고 다른 한 사람은 구원을 받는 장면을 말입니다. 이 장면이 참 받아들이기 어렵지 않습니까? 정말 그렇게 쉽게 구원을 받을 수 있나요? 아니 그 순간에 천국과 지옥이 갈린다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둘 중에 누가 더 나쁜 놈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둘 다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해야 할 죄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상대적인 비교는 무의미합니다. 그렇게 허무하게 죽어 지옥에 가는 것도 억울하지만, 그렇게 쉽게 천국에 가는 것도 용납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누구 입장에 서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겠지요. 내가 지옥에 간 강도라면 너무 짧은 시간에 일어나는 일 때문에 억울할 수도 있고, 내가 구원받은 강도라면 너무나 큰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말씀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오늘 나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 말씀이 나와 상관없는 누구와 비교되기 시작하면 말씀이 은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꾸 판단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은혜와 율법의 차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이 순간이 어떤 사람에게는 아주 소중한 “카이로스”의 시간이 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너무나 평범한 “크로노스”의 시간이 되기도 합니다.
얼마 전 크리스천 CEO들이 모이는 MBA 과정에서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1년 동안 함께 spiritual leader로 가게 되는 첫 시간에 그런 도전을 했습니다. 이 시간이 여러분 평생의 사업에서 “카이로스”의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고….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명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떠나라!”라는 것입니다. 과거로부터의 단절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단절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은혜의 시간이라는 것이지요.
제가 함께 모인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6월 25일 무슨 날인지 아시나요? 물론 대답이 빨리 나왔습니다. 6.25지요? 그렇습니다. 거기에 모인 사람들에게 6월 25일은 역사적인 사건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저에게 그날은 특별한 날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결혼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사이에 두고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는 순간이 누군가에게는 크로노스의 사건이고 누군가에게는 카이로스의 사건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도전이 무엇인가요? 누가복음 23장 43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조금 전에 언급했지만, 낙원에 가는 것이 나일 경우에는 은혜로 느껴지는데 그 대상이 내가 아닐 때는 은혜를 경험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우리에게 주는 도전이 무엇입니까? 누군가의 문제 말입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던 여인이 예수님의 은혜로 사함을 받고, 향유 옥합을 깨뜨리는 믿음을 보면서 우리가 감탄합니다. “그래 저 여인에게 참 많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임했었나 보다. 그러니 저 여인이 좋은 교인이 되어 잘 섬기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간음하다 현장에서 들켰던 그 여인의 상대가 내 가족 혹은 내가 아는 사람일 경우에도 그렇게 편안하게 생각할 수 있을까요? 아니,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 가운데 깨어진 가정이 있습니다. 다시 결혼을 하고 새로운 가정을 이룬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주 원론적으로 쉽게 이야기합니다.
‘앞으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사는 복된 가정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 깨어진 가정의 당사자가 바로 우리 가정일 경우,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런 일로 말미암아 어려움을 당했을 때도 그렇게 담담하게 축복할 수 있는가? 오늘 한편의 강도가 구원받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담담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내가 그 강도 때문에 피해를 받은 사람이라면 그렇게 담담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오늘 이 십자가의 말씀이 지난주의 말씀과 이어서 생각하지 않으면 온전히 이해될 수 없는 부분일 것 같습니다. 오늘 이 말씀이 능력이 있는 것은, 우리에게 강력하게 도전이 되는 것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을 용서해 달라는 예수님의 기도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죄를 지은 사람들의 영혼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보지 않으면, 결코 한 편 강도의 구원을 축복할 수 없기에 말입니다.
신앙은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그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없는 그 무엇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질 때 ‘신앙’,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십자가상에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선포가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이 무엇일까요?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지 못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 하나님 앞에서 구원의 역사는 결코 늦는 법이 없다는 것, 모든 하나님의 역사는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격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면, 또 하나의 추상적인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것이지요. 가장 놀라운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두 강도 가운데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가장 거룩하신 하나님의 역사가 가장 흉악한 강도들 가운데에서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일입니다. 교회와 신앙의 역사는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세상 가운데서 능력이 드러나는 일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그리고 예수님의 생애가 거룩한 곳에 머문 것이 아니라 거룩하지 못한 곳에서 거룩한 역사를 이루어내셨다는 것을 말입니다.
오래전 우리 교인들에게 물었던 것이 있습니다. 옛날 교회에는, 아니 요즘에서 서양 교회에는 들어가는 입구에 ‘성수’가 있습니다. 성전에 들어가기 전에 자신의 더러움을 깨끗하게 하려고 손을 담그고 성수를 물에 뿌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성수에 파리가 빠지면, 성수가 더러워집니까? 아니면 파리가 깨끗해집니까? 여러 가지 대답이 가능하겠지만, 영향력과 능력의 차이가 아니겠습니까? 성수가 능력이 있으면 파리가 깨끗해질 것이고, 성수에 능력이 없다면 파리 한 마리에도 성수가 오염되지 않겠습니까? 결국, 우리 신앙의 문제는 세상과 죄와 죽음과 떨어져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한가운데서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구원의 역사는 바로 두 흉악한 십자가 사이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 가운데서 선포하신 하나님의 능력의 사건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천국과 지옥 사이에서 어떤 반응을 했느냐가 중요했다는 것이지요. 복음이 선포되는 현장이 거룩하기 때문이 아니라 거룩한 복음이 선포될 때 어떤 믿음의 고백이 있느냐가 천국과 지옥을 나눈다는 것입니다.
한 강도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오히려 조롱했습니다. 비방했습니다. 39절에 보면 그 강도는 예수께서 진짜 그리스도라면 당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라고 비웃었습니다. 그가 보기에 그리스도가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이 강도는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도 자기의 죄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죄인처럼 죽어야지만 인류를 구원하실 수 있는 하나님 아들의 운명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편 강도는 달랐습니다. 40-41절을 보십시오.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자신이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의 은혜는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은혜가 보입니다.
여러분, 구원받은 세계와 구원받지 못한 세계는 지리적으로나 인종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갈라지지 않습니다! 상대적으로 더 선하고 상대적으로 더 악한 사람들에 의하여 구분되지도 않습니다. 온 인류, 온 세계, 온 문화가 오직 십자가 하나로 구분이 됩니다. 십자가 한 편에 예수님의 구주되심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구원받은 세계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십자가 다른 편에 죽어가는 순간까지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는 불신앙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42절에 이렇게 부탁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구원받은 강도의 부탁은 매우 소박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매우 막연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의 나라가 임할 때 자기에게 상을 달라고 부탁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구원해달라고 청원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자기를 잊지 말고 기억해달라고 부탁했을 뿐입니다. 그는 사회적인 중죄인이요 흉악범이었기에 온 사회가 잊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따위 천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은 가족들조차도 빨리 기억으로부터 지우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만큼은 자기를 기억해주기를 바랐습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소박하고 겸손한 마음입니까?
아주 작은 이 믿음이 그로 하여금 구원받은 백성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졌을 때는 세상에서 기적을 행하시던 예수님의 모습을 본 것이 아니라 가장 연약하게 십자가에 달리신 모습을 보면서 의지한 것입니다. 정말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믿는 그 믿음이 그를 구원받은 백성으로 만들어 놓았다는 사실입니다.
무엇이 믿음인지 아십니까? 세상 사람이 다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을 따라 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어떤 학자는 이 「구원받은 강도의 이야기」가 ‘기독교 최초의 설교’라고까지 말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친 예수님의 제자들, 즉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조차도 깨닫지 못한 구속론의 비밀을 이 강도는 바로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죄인의 모습이 되어 처절히 죽어가야만 한다는 사실을 옳게 깨달았던 것입니다.
자기를 기억해달라는 강도의 부탁에 주님께서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43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강도의 부탁은 매우 모호했는데 예수님의 대답은 매우 구체적입니다. 오늘 주님과 함께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과 더불어 천국에 최초로 들어간 사람은 베드로나 야고보나 요한과 같은 예수님의 수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아니었습니다. 정반대로 평생 못된 짓만 골라 했던 흉악범, 강도 한 사람이 천국에 들어간 첫 번째 손님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세례나 성만찬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는 선행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두 손목과 두 발목에 굵은 대못이 박혀 있습니다. 이제는 두 손과 두 발로 착한 일을 하고 싶어도 도저히 할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천국에 들어간 것은 그의 노력이나 선행 때문도 아닙니다.
100% 그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믿음 하나로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들어가는 영광을 얻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우리의 공로를 헤아려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100%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일 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는 도전은 이 믿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 부흥회를 인도하시러 목사님이 가셨습니다. 때는 몹시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강사 숙소에 할머니 한 분이 오셔서 정성껏 시중을 들어주셨습니다. 그 할머니는 찬 것을 마시면 감기가 든다면서 콜라까지 보글보글 끓여다 주셨습니다. 이 할머니는 성경을 자주 보고 계셨는데 이상한 것은 성경을 다 읽지 않고 사람 이름만 읽고 계셨습니다.
목사님께서 이상해서 물었습니다. "할머니! 왜 사람 이름만 읽으세요?" 하니까 "아이고 목사님!! 곧 하나님 앞에 갈 텐데 성경은 다 읽어서 무엇합니까? 이 사람들이 다 천당에 있을 텐데 이름이나 외워 가야지요!" 하며 껄껄 웃었습니다. 이 할머니는 구원에 대한 확신과 소망이 넘쳐 있었던 것입니다.
네 어머니라! 오늘 봉독한 요한복음 19장 26-2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성경에서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몇 군데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찾아온 사람 중의 하나가 “내 아버지를 장사하고 예수님을 좇겠다!”라고 했더니, 마태복음 8장 2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어떻게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나요?
그런데 지난번에 부산에 있는 영안 침례교회 박정근 목사님에 의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두 번 장례를 치른 답니다. 먼저 시신을 세마포에 싸서 동굴 안에 두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다 부패된 후에 뼈를 추려서 항아리에 담는다는 것이지요. 이 사람이 아버지를 장사지낸다는 것은 바로 두 번째 장례를 의미하는 것이고, 이 시기는 필요한 때 정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깃들일 곳이 있는데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라고 하셨을 때 예수님을 쫓는 것이 부담스러웠을 것이고, 핑곗거리를 찾다가 장례를 핑계 삼았다는 해석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의무를 게을리하는 것을 경계하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에 보면 “고르반”이라는 말이 있지요. 마가복음 7장 9절 이하에 나오는 말씀인데, 아주 경건해 보이는 사람 중에 율법을 지킨다는 이름으로 “하나님께 드린 바 되었다!”라고 하면서 부모님께 드려야 할 것을 드리지 않는 것을 질책하십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을 왜곡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범 가운데 하나가 바로 십자가 위에서 하신 세 번째 말씀이실 것 같습니다.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부탁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그 명령을 지켜 사도 요한은 수십 년 동안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십니다. 다른 사도들이 이름을 날릴 때 요한은 예수님의 명령을 묵묵히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90이 넘어서 밧모섬에서 “사랑의 사도”로 예수님의 계시를 기록하는 위대한 사람이 되지요.
예수님이 가장 사랑하셨던 제자에게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하시는 장면, 사실 신앙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말씀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기본적인 의무를 게을리하는지,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잘 알아야 합니다. 가만히 보면,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핑계 대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식과 아내, 남편에 대하여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죄송합니다. 어떤 특정한 프로그램에 대한 비난이 아닌 저의 생각입니다. 아버지학교를 하면서 많은 아버지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고 나니까 문제가 생깁니다. 좋은 아버지가 되라고 공부를 했는데, 봉사하기 위해 주말마다 교회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 학교를 그만두었습니다. 제가 우리 교회에서 수요일 저녁 예배와 주일 저녁예배를 드리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가정을 섬기는 것도 굉장히 중요한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 가장 아름다운 전통 중의 하나가 변화산 특별 (새벽) 기도회입니다. 가족이 함께 나와 예배합니다.
물론 특별한 때에,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께 특별히 헌신해야 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의 헌신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명심할 것은 헌신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이 해야 하는 의무를 다하지 못함을 정당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절규하신 세 번째 말씀은 어쩌면 가장 인간적인 예수님의 모습을 잘 드러내는 장면인 것 같습니다. 십자가의 육신의 고통의 문제보다 마음이 아프셨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9장 23-27절에 보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속옷을 놓고 군인들이 제비를 뽑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지었을 통으로 짠 속옷을 가지려고 제비를 뽑는 군인들을 바라보며, 또 그 장면을 바라보는 마리아의 모습을 바라보며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이지요.
자식의 죽음을 앞에 놓고 아파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바라봐야 하는 아들의 심정이 오죽했겠습니까? 그리하여 예수님은 턱을 가슴께로 축 늘어뜨린 채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고 요한을 가리켰습니다. 이때의 아들은 예수님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 대신 마리아를 모시게 될 요한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제자인 요한에게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시면서 마리아를 친어머니처럼 모셔 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바로 그것이 십자가에서 달리신 예수님의 마음과 고통이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으신가요? 사실 사역을 하면서 힘든 것은 어쩔 수 없는 미안함과 고통입니다. 자식에 대하여 말입니다. 제가 지금도 자녀에 대하여 안한 것, 어떤 사람인들 그렇지 않겠습니까마는 사역 때문에 소홀했던 부분들 말입니다. 저의 인생에 중요한 때 한 번도 그 자리를 지켜주지 못했던 아버지를 기억하는 것처럼 우리 아이들도 그런 아버지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도 마음 아픈데 말입니다. 정말 여유가 없어서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면 모르겠지만, 무언가 선택해야 할 때, 늘 사역을 먼저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가정을 생각하면서 떠오르는 일들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절규가 사역하는 사람들에게는 더 와 닿는 부분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역”을 십자가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일 것 같습니다. 어느 것도 소홀할 수 없지만, 결국 무언가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 때문에 말입니다. 감리교 신학대학의 학장이셨던 윤성범 교수님은 [성(誠)의 신학]을 이야기한 분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를 한자어로 표현한 것이지요. 그분은 예수님을 인류 최고의 효자로 묘사한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에게 효성을 다하기 위해 죽기까지 복종하셨고, 어머니에게 효성을 다하기 위해 죽는 순간까지 어머니를 부탁하셨던 분이라고 말입니다.
우리에게 부탁하신다. 오늘 말씀을 보며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지만, 십자가를 지고 하늘나라에 가신 예수님께서는 남겨진 일을 이 땅의 누군가에게 맡기신다는 사실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가장 사랑받는 제자였습니다. 그에게 부담스런 일이었을지 모르지만, 영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끝까지 모신 요한을 예수님께서 귀하게 쓰셨습니다.
그런 생각을 해보셨나요? “십자가가 복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아무에게나 맡기시지는 않으십니다. 예수님에게 가장 중요한 어머니를 가장 사랑하는 제자에게 맡기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신뢰를 받는 일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14장 27절을 보세요.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말씀을 조금 더 확대하여 해석해 볼까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어머니가 단지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만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마가복음 3장 32-35절을 보세요. 예수님이 무리와 함께 계실 때, 제자들이 와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32절)라고 했더니,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34-35)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어머니를 십자가에서 부탁하시는 심정을 아시겠습니까? 사실은 예수님이 사랑하고 돌봐야 하는 모든 이에 대한 염려를 남겨진 우리에게 맡기셨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시나요?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부담이기는 하지만 복입니다.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십자가가 아니라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된 것을 축복으로 여기는 자가 진정한 복을 소유한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얼마 전에 김용의 선교사님이 쓴 [십자가의 완전한 복음]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책에 보면 선교사로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던 다섯 자녀와 우연히 아버지의 생일을 한국에서 지나게 되었답니다. 케이크에 불을 붙이고 파티가 되어야 하는 순간에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 때문에 분위기가 침울해졌습니다. 그래서 분위기 좀 바꿔보자고 한 사람씩 돌아가며 생일 축하 메시지를 던지기로 했답니다.
그때 첫째 아들 충성이가 이렇게 물었답니다. “아버지, 제가 아프리카에서 사역할 때, 저를 만나러 오신 것 기억나세요?” “맞아, 그때 한 번 갔었지.” “그럼 그때 제게 카드 써 주셨던 것도 기억하세요?” “내가 그랬냐?”
아마도 김용의 선교사님이 아프리카에서도 가장 가난한 나라인 ‘기니비사우’에서 사역하는 아들을 보면서 한숨이 절로 나왔던 모양입니다. 학교도 전기도 수도도 없는 곳에서 고생하는 아들을 보면서 “어떤 상황이나 환경에서든 잘 견뎌라!”라고 했지만, 더운 날씨에 10kg이나 살이 빠진 아들의 모습이 너무 안쓰럽고, 이런 곳에서 우리 아들이 썩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아들에 대한 고민과 갈등은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날 밤까지 계속되었고 아마도 아들에게 카드를 써주고 왔던 모양입니다. 아들이 그 카드의 이야기를 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아들이 말합니다.“아버지의 그 고백을, 그날 밤 저 또한 하나님께 드렸어요. 이렇게 적으셨어요.
‘사랑하는 아들아, 우리 땅끝에서 죽어 하늘 복판에서 만나자.’ 저는 이 말을 제 가슴 판에 새겼습니다. 아버지, 훌륭한 믿음의 선배가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서 저는 다음 사역지를 ‘땅끝’이라는 러시아 체첸으로 결정했습니다. 우리 땅 끝에서 죽어 하늘 복판에서 만나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 생일 파티는 눈물바다가 되었답니다.
김용의 선교사님 가족에게 선교는 그런 의미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 가족에게 그런 존재였던 것이지요. 그것이 기쁘고 가장 감격스러웠다고 합니다. 적어도 죄의 장아찌로 살아온 자신의 삶을 바꾸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자신의 삶이 십자가를 지는 것 같지만, 얼마나 귀한지 말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변방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역의 중심으로 부르셨다는 사실에 얼마나 감격하는지 말입니다.
제가 대학원에 다니던 시절, 아버지는 집회로, 어머니는 병원으로, 여동생은 고 3으로. 그런데 형과 누나네 식구들은 다 미국에 있었습니다. 그때 저에게 너무 무거운 짐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4남매 중의 부모님에게 가장 귀한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은 사람이 저라는 생각을 합니다. 다 주관적인 생각일지 모르지만, 가장 행복한 생각이 아닐까요? 오늘 여러분이 십자가 위에서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사역을 위임받는 영광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했던 십자가가 우리에게 무거운 짐이 아니라 사명의 영광이기에 열매가 있음을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로 가장 사랑하는 제자에게 위임하신 일, 여러분을 가장 사랑하시기에 맡겨주신 십자가가 여러분의 삶에서 아름답게 고백 될 수 있기를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니다.ⓗ
예수가좋다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