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따뜻하지도 그렇다고 차갑지도 않은 날씨. 밝지도 그렇다고 어둡지도 않은 오후. 삭막한 공기가 내 목구녕을 타고 폐로 흘러내렸다.
한 두시간 전에 입에 올렸던 시가는 아직도 줄어들지 않은 채 내 입 안 가득 향을 채우고 있었고 구름 따윈 전혀 없는 이 곳 하늘엔 태양만이
우두커니 서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걸은거지? 문득 이 생각이 내 뇌리를 스쳤다. 그러고보니 난 오랫동안 길을 걸어왔다. 한번도 걸음을 쉰 적이 없었다. 물
을 마신 적도 무엇을 먹은 적도 없었다.
잠은 잔 적도 없었고 담배로 인해 달고 살던 기침을 한번도 내뿜은적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약한 체력 때문에 헥헥 거린 적도 없었다.
난 주위를 둘러보았다. 산도 지평선도 보이지 않는 황량한 자갈밭. 바람마저 불지 않는다. 의문 투성이였다. 내가 어떻게 이 곳에 왔는지 조차
의문점이었다.
하지만 난 어느덧 길을 계속 걷고 있었다. 마치 꼭두각시처럼 나도 모르는 사이에 계속 걷고있었다. 감정마저 사라졌는지 낯선 곳에 대한 두려
움 조차 생기지 않았다. 난 너무나 태연했다. 나 자신조차 놀랄 정도로.
1. 집.
계속 가니 아주 멀리서 작은 점이 있는 것이 보였다. 멀리서도 점처럼 보일 정도면 아주 큰 것이 틀림없었다. 난 입술에 미소를 머금었다. 생각
해보건데 여기와서 처음 짓는 웃음이었다.
하지만 이건 감정으로 인한 웃음이 아니었다 아니었다. 마치 일부러 입을 찢는 전혀 즐겁지 않은 미소였다.
그러나 마음 어느 구석엔 안도감이 밀려왔다. 동시에 알 수 없는 묘한 무언가가 향수처럼 풍겨왔다.
한참을 가서 본 그 곳엔 주황 지붕에 하얀 벽돌로 지은 작은 주택이 있었다.
2. 비밀.
의자가 보였다. 의자에 한 여자가 앉아있었다. 155정도 되는 키에 살이 뒤룩뒤룩 쪘고 검은 루즈를 바르고 진한 화장을 했으며 검은 드레스를
입은 마치 돼지가 의자에 앉아있는 걸 연상시키는 여자였다.
여자는 연기가 흩날리는 시가를 입에 물고 잠들어 있었다. 난 한참을 그 여자 곁에 서있었다. 여자는 내가 곁에 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했다.
하지만 가끔 코를 킁킁 거리며 입맛을 다셨는데 정말 돼지를 연상시켰다. 그때였다. 여자가 눈을 뜨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더니 내 쪽을
바라보았다.
난 순간 방금 느꼈던 묘한 무언가를 느끼며 그대로 굳어버렸다. 우리 둘은 한참을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 순간 신비한 일이 일어났다. 내 검은
선글라스를 통해 비쳐진 그녀의 얼굴에서 왠지 모를 섹스런 매력이 풍기기 시작한 것이었다. 난 한낱 볼품없고 뚱뚱한 그녀의 얼굴을 살찐 비
너스의 얼굴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난 비로소야 그 오묘한 느낌이 그녀에게서 풍겨오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가 나를 유혹하고 있다는 것까지 알아
차렸다. 난 아차했다. 언젠가 들은 적이 있었다. 눈을 통해 최면술을 건다는 유혹의 여신.
그녀는 사실 요물이었고 악마였고 유혹의 여신이었다. 난 직감적으로 그녀가 나를 유혹한 뒤 나를 잡아먹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또 한 명이 그
녀의 살을 부풀게 할 것이었다. 그녀는 여러 방랑객들을 먹어 뒤룩뒤룩 찐 살을 흔들며 내게로 다가왔다. 그리곤 내 목을 혓바닥으로 핥으며 배
시시 웃었다.
역겨운 한편으로는 짜릿했다. 그녀는 한참을 내 몸을 요리조리 훑더니 내 귀로 입술을 천천히 끌어와서는 달콤하게 속삭였다.
"침대로 가."
3. 위기.
난 무언가에 홀린 듯 그녀를 따라 집안으로 가고 있었다. 난 속으로 끊임없이 저항했지만 어느새 난 그녀와 침대를 향해 가고 있었고 그녀는
천천히 내 외투를 벗기며 내가 물고 있던 시가를 빼 재떨이에 놓으며 날 침대에 눕혔다.
난 계속해서 속으로 끊임없이 욕지거리를 내뿜으며 저항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몸은 꼼짝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나를 향해 웃었다. 제법 따스하
게 웃었지만 난 역겨울 뿐이었다.
난 있는 힘을 다해 입을 악 물었다. 그때 뜻밖에도 그녀가 반응을 보였다.
"왜 그래?" 그녀가 내 셔츠 단추를 끌던 손을 멈췄다. "내가 싫은 거야?"
난 말을 하고 싶었지만 말이 목구멍에서 턱 막혀왔다. 마치 무언가가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대신 난 다시 한번 입을 악 물었다.
"말을 하란말야."
그 순간 날 조르던 무언가가 탁 풀리는 듯한 느낌이 들더니 목소리가 기어나오기 시작했다.
"아...." 난 짧은 신음을 내뱉으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마음같아선 당장 꺼져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오직 한마
디가 날 살릴 수 있었다. 그녀에게서 도망치려면 단 한마디를 잘해야했다. 난 한참을 곰곰히 생각했다. 그녀는 어서 말해보라 재촉했고 난 삐
질삐질 식은땀을 흘리며 그녀를 떼어낼 단 그럴듯한 결정타를 생각했다. 그리고 이내 난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너 냄새 난다구."
순간 그녀가 인상을 구기기 시작했다. 순간 난 두려움이 엄습했지만 태연하게 말했다.
"우리 기본적인 에티켓은 갖자구."
난 씩 웃어보였고 그녀는 자신의 몸에 코를 바짝 가져다 대며 킁킁 냄새를 맡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아. 기다려."
그러면서 그녀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하지만 난 여전히 몸을 꼼짝할 수 없었고 다시 한 번 그녀를 불러야했다.
"저기 이봐."
"왜 그래?" 그녀가 고개만 돌리며 말했다. "여기서도 냄새가 나나?"
"아니, 이 몸 왜 움직이지 않지?"
난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며 말했다. 그녀는 수상하다는 듯 눈썹을 까닥였다.
"내가 그랬어. 왜?"
"그래? 그럼 좀 풀어주지 그래?"
순간 그녀가 인상을 사악하게 구기며 외쳤다.
"내가 모를 줄 알고? 도망치려는 거잖아!"
난 찔끔했지만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내가? 왜? 얼마만에 내 곁에 온 여자인데? 이 좋은 기회를 차버리는 녀석이 머저리 아닌가?" 그러면서 난 깔깔거렸지만 속은 들켰을까 걱정됐
다. "그냥 답답해서 그래. 부탁해."
그녀는 한참을 나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묘한 매력이 풍겨왔지만 이젠 어느정도 무시할 만했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정말이야?"
난 기회다 싶어 재빨리 말했다.
"그럼! 설사 이 짓을 하고 죽어도 여한이 없겠어!"
그 순간 정곡을 찌른 듯 그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녀가 다급히 외쳤다.
"무슨! 조..좋아 풀어주지."
그녀가 손가락을 퉁겼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난 벌떡 일어나 풀린 셔츠 구멍을 메꾸며 바닥에 구겨진 외투를 집어들
었다.
그녀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왜 다시 옷을 입어?"
난 웃음을 참지 못하며 말했다. 나의 꾀에 걸려들어간 그녀가 우스웠기 때문이었다.
"왜냐고?" 난 깔깔 웃으며 시가를 다시 입에 물었다. 난 재떨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당신한테 유혹당했을 때부터 하고 싶던 말이 있었
어. 뭔지 알아?"
"뭐..뭔데?"
그녀가 아차하며 부르르 떨며 말했다. 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꺼져! 돼지 같은년!"
4. 내 길.
난 재떨이를 그녀의 머리 위로 던졌고 재떨이는 와장창하며 깨졌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겁에 질린 고양이처럼 부르르 떨며 말했다.
"오오! 살려줘! 미안해!"
난 부르르 떠는 그녀 앞에 다가서며 말했다.
"말해. 얼마나 더 가면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벗어나지?"
"얼마나 더?" 그녀는 그러면서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그리곤 다시 나와 눈을 마주치려 했다. 필시 유혹을 하려는 속셈이었다. 난 재빨리 그녀
의 목을 잡으며 벽으로 향했다.
그녀의 등에 벽이 부딪치는 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그녀는 눈을 찔끔감으며 발버둥 쳤다. 난 눈을 사납게 부릅뜨며 말했다.
"개수작 부리지마! 늙은 돼지! 얼마나 더 가야되지?"
난 그녀가 말할 수 있게 손을 조금 풀었다. 그녀는 컥컥거리며 다시 눈을 부시시 떴다. 난 그 순간 차라리 눈을 감고 있게 하는 편이 낫다고 생
각했고 다시 손에 힘을 주며 외쳤다.
"눈 감고 얘기해!"
그녀는 다시 컥컥거리며 눈을 찔끔감았고 난 손에 힘을 풀었다. 그녀는 곧이곧대로 눈을 감으며 말했다.
"동쪽으로 5km 더 가면 철의 숲이 나와. 그리고 거기서 서쪽으로 3일 밤낮을 더 가면 강이 있는데 그곳이 스튁스강이야. 그곳엔 뱃사공이 보
일거야. 그 뱃사공을 타고가면 그곳이 나오지."
"그 곳?" 내가 의아해하며 말했다. "그 곳이 어디지?"
"이 곳에 온 자들이 무조건 향하는 곳"
난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 곳이면 필시 그것도 있을 것이었다. 내가 애타게 찾던 그것. 이렇게 개고생을 하면서 까지 찾던 그것.
난 다시 한번 손에 힘을 주며 외쳤다.
"내가 집을 나설때까지 꼼짝마! 알았어?"
그녀는 고개를 가까스로 끄덕였다. 난 재빨리 그녀의 목에 손을 풀고 나가려고 했다. 그때였다. 그녀가 말했다.
"니가 여기 온 이유가 뭔지는 모르지만 많은 산 자들이 이 곳을 찾아왔지. 하지만 전부 내 유혹에 빠져 죽었어. 살은 내가 먹고 지붕은 피로 칠
했고 뼈로 이 집을 지었지. 하지만 그거 알아? 내 유혹에 빠지지 않은 건 극소수야. 그 중 니가 포함되어 있어. 약속하지. 니가 다시 온다하면
극진히 모신다고. 스튁스강에 맹세할게."
그러면서 그녀는 허망하게 웃었다. 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고맙군. 넌 그거 아나? 넌 날 유혹할 수 있었는데 할 수 없었어. 왠 줄 아나?"
"뭔데?" 그녀가 호기심에 찬 듯 말했다. "말해봐."
"누가 돼지와 잠자리를 원하겠나?"
순간 그녀가 깔깔 웃으며 수긍했다. 난 애써 웃으며 집을 나왔다.
그리고 난 다시 길을 걸었다. 외롭고 삭막한 이 길을.
에필로그
누군가가 내게 묻는다. 다 가진 자가 왜 그 험한 길로 가려 하오?
그러자 내가 말한다. 전 다가졌죠. 명예 돈 신뢰 친구.
하지만 한가지 없어요. 사랑이죠.
그녀가 죽었어요. 저승으로 갔어요. 바보같지만 전 모든 걸 버릴 수 있어요. 그녀를 위해서라면. 그런데 왜 저승을 못가겠어요?
전 그녀를 데려올겁니다. 모든 걸 다 버려서라도. 그게 제 삶이고 이 곳에 온 이유 이기도 하고요.
난 웃는다. 저절로 콧노래가 나온다. 어떻게 여기 왔는지 모르지만 왠지 이 곳에 온 역경을 엮은 자서전 같은 노래가 나온다.
[이 길을 걷네. 나는
그녀를 찾으려.
불의 숲을 건너 물의 땅을 건너 땅의 대지를 건너 철의 숲까지.]
카페 게시글
인소닷단편소설
[단편]
[월드미] 오아시스를 찾아서.
월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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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10.11 13:24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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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글쎄요... 뭔가 어려운 듯한 내용이랄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