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사·철을 뛰어넘는 전방위 재능으로
조선의 문예부흥과 근대화를 주도한 중인(中人) 다큐멘터리
지금으로 말하면 의료(의원), 법률(율관), 금융(계사), 외교(역관), 천문지리(음양과), 미술(화원), 음악(악공), 문학(시인) 등 전문지식 분야와 예술 및 문화 전방위에서 활약한 중인이 없었더라면 정조도, 조선도 없었다.
중인은 양반과 평민 사이에 있는 중간 계층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대부에 훨씬 미치지 못하면서 평민이나 심지어 천민에게도 존중받지 못한 경계인이었다. 그럼에도 중인 가운데는 문·사·철을 뛰어넘는 비범함으로 문예부흥과 근대화를 주도했던 지식인이 여럿 있었다.
중인들이 모여 만든 문학동인 ‘송석원시사’는 조선 후기 서민문학을 이끌었고 역관시인 홍세태와 「달마도」를 그린 김명국은 일본에 한류 열풍을 일으킨 예술가였다.
출판에 평생을 바친 장혼은 중국의 『천자문』을 대신할 교과서 『아희원람』,『계몽편』을 편찬하였고, 고약전문가 피재길은 부스럼으로 잠 못 이루던 정조를 사흘 만에 완치시켜 종6품까지 올랐다. 의원 허임과 백광현은 신기에 가까운 침술로 수많은 백성을 살렸고, 역관 변수는 조선인 최초로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학사였다. 바둑천재 유찬홍은 대적할 자 없던 불패의 국수國手였으며, 민족신문 ‘만세보’를 발행한 오세창은 조선의 1세대 신문기자였다.
계층의 벽을 디딤돌 삼아
조선의 르네상스를 만든 사람들
실학자 이중환은 인문지리서 《택리지》의 서론인 ‘사민총론’에서 백성을 사(士)·농(農)·공(工)·상(商) 으로 나누어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옛날에는 사대부가 따로 없었고, 모두 백성(民)이었다. 백성에는 네 가지가 있는데, 선비가 어질고 덕이 있으면 임금이 벼슬을 시켰고, 벼슬하지 못한 자는 농사를 짓거나 장인(匠人)이 되거나 장사꾼이 되었다.
즉, 이중환은 사·농·공·상을 신분으로 보지 않고 직업으로 보면서, “사대부라고 하여 농·공·상을 업신여기거나 농·공·상이 되었다고 사대부를 부러워한다면, 이는 모두 근본을 모르는 자들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중환의 이러한 논지는 당시 신분 차별이 매우 심각했음을 방증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특히 사·농·공·상으로 나눈 이중환의 분류 어디에도 중인이 속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흔히 ‘반쪽 양반’이라 불리는 서얼은 육조(六曹)와 삼사(三司) 등의 중앙 관직으로 진출하는 것이 제도적으로 금지되었기에, 대부분 역관·의원·율관·산관·화원 등의 기술...(하략)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출판사 서평 펼쳐보기
책속으로
위항(委巷)은 꼬불꼬불한 거리나 골목, 사람이 많이 사는 동네를 가리킨다. 양반들은 넓은 집에 살았으므로 좁은 골목에 모여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중인 계금 이하였다. 중인을 위항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들이 살았던 거처에 기인한다. 한양을 남촌과 북촌으로 나누면 그 중간 지대인 청계천 일대가 위항이었다. 좁은 집이 모여 있던 누상동(樓上洞)·누하동(樓下洞)을 중심으로 한 인왕산 일대도 위항이었다. 청계천 일대에는 역관이나 의원에서부터 상인에 이르기까지 재산이 넉넉한 중인들이 살았으며, 인왕산 언저리에는 주로 서리나 아전이 살았다. -15쪽
“재주가 있고 없는 것은 내게 달렸으며, 그 재주를 쓰지 않는 것은 남에게 달렸다. 나는 내게 달린 것을 할 뿐이다. 어찌 남에게 달린 것 때문에 궁하고 통하며 기뻐하고 슬퍼하다가, 내가 하늘로부터 받은 것을 그만둘 수 있으랴?” 중인 이하에게 벼슬길을 제한하는 사회제도 때문에 슬퍼할 게 아니라 타고난 천기와 글재주를 맘껏 발휘하라는 충고이자, 사대부 문단에 대한 선언이었다. 홍세태의 천기론은 후대에 더욱 발전하여 위항시인들이 방대한 분량의 시선집을 출판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62쪽
https://youtu.be/HCfU0khbwRs
서른이 되기 전에「평생지」를 써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집을 설계했던 장혼은 자기 뜻대로 세 칸 집에 만족하며 살았다. “그의 집이 비바람을 가리지 못했으므로 남들은 그가 가진 것 없음을 비웃었지만” 그 자신은 69세 되던 해 입춘절에 “굶주림과 배부름, 추위와 더위, 죽음과 삶, 재앙과 복은 운명을 따르면 그만이다”라고 자부한 뒤,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다. -83쪽
김명국은 술에 취하지 않으면 재주가 나오지 않았고, 취하면 좋은 그림이 나오지 않았다. ‘취하고 싶으나 아직은 덜 취한 상태’에서 그려야 했는데, 그런 상태에서 그린 그림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김명국의 그림에는 걸작도 많지만 실패작도 많다고 한다. 그러나 남태응은 그런 이유가 술 때문만은 아니라 중인이라는 신분 때문이기도 하다고 변명했다. 국부(國富)라고까지 불렸던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 윤두서는 양반인 데다 갑부였기에 재물이나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이 내킬 때에만 그림을 그렸으며, 그 그림이 자기 마음에 들어야만 남에게 보여 주었다. 그랬기에 하나같이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중인 김명국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것이다. -116~117쪽
중인 후배인 조희룡은 최북이 한쪽 눈을 보지 못하게 된 사연을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어떤 높은 벼슬아치가 최북에게 그림을 그려 달라고 요구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그를 위협하려고 했다. 그러나 최북이 노하여 말했다. ‘남이 나를 저버리는 게 아니라, 내 눈이 나를 저버리는구나.’ 그러면서 곧바로 눈을 찔러서 애꾸가 되었다. 늙은 뒤에는 돋보기안경을 한쪽만 끼었다. 나이 마흔아홉에 죽으니, 사람들이 칠칠의 참(讒)이라고 하였다. -132쪽
10만 석 거부의 상속자인 전형필이 1929년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돌아와 골동 서화를 수집하며 지금의 간송미술관을 설립하게 된 것이나, 역시 일본 대학에 유학했던 오봉빈이 1929년에 광화문 당주동에서 신구(新舊) 서화 전시와 판매를 목적으로 한 조선미술관을 개설한 것은 모두 오세창의 권고와 지도 덕분이었다.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고서화 명품 가운데 상당수는 오세창의 감정과 평가를 거쳐 수집되었다고 한다. -162쪽
1793년 여름에 정조의 머리에 부스럼이 생겼다. 여러 가지 침과 약을 써 보았지만 오랫동안 낫지 않았다. (…) 피재길은 미천한 신분이었으므로 임금 앞에서 떨며 땀만 흘리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좌우에 있던 여러 의원과 신하가 모두 속으로 비웃었다. 정조가 가까이 다가와 진찰하게 하였다. “두려워 말고 네 솜씨를 다하라.” 그러자 피재길이 말했다. “신에게 한 가지 처방이 있는데, 이 증상에 써 볼 만합니다.” (…) 정조가 “며칠이면 낫겠느냐?”고 묻자, “하루면 통증이 멎고, 사흘이면 다 나을 것입니다.”하고 대답했다. 사흘 뒤에 정말 다 나았다. -196~197쪽
김수팽이 어느 날 서류를 결재 받으려고 판서의 집으로 찾아갔더니, 판서는 마침 손님과 바둑을 두고 있었다. 김수팽이 결재해 달라고 청했지만, 판서는 머리만 끄덕일 뿐 여전히 바둑만 두었다. 수팽이 섬돌에 뛰어올라가 손으로 바둑판을 쓸어 버리고, 뜰로 내려와 아뢰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정말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랏일은 늦출 수가 없으니, 저를 파직시키고 다른 아전을 시켜서 결재하시기 바랍니다.” -236쪽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임준원을 따르는 이유는 가난한 사람에 대한 넉넉한 마음과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올곧음 때문이었다. 하루는 그가 육조거리 앞을 지나가는데, 어떤 여자가 관리에게 구박받고 있었다. 불량배 하나가 그 뒤를 따라가며 욕을 해대는데, 여자는 슬프게 울기만 했다. 그가 그 까닭을 묻고는 “그까짓 얼마 안 되는 빚 때문에 여자를 이토록 욕보일 수 있단 말이냐?”하고 불량배를 꾸짖었다. 그 자리에서 빚을 갚아 주고는, 차용증을 찢어 버린 채 가 버렸다. 여자가 쫓아가면서 이름과 주소를 물었지만, 그는 끝내 가르쳐주지 않았다. -245~246쪽
청나라에서 온 사신은 으레 뇌물을 요구했으며, 요구하지 않더라도 우리 조정에서 온갖 방법으로 뇌물을 주었다. 그런데 1723년에 사신으로 왔던 도란(圖蘭) 일행은 아무런 뇌물도 요구하지 않고, 작은 부채 하나를 내놓으며 시 한 편만 지어 달라고 하였다.『경종실록』3년 7월 11일 기록에 의하면 “시인 홍세태로 하여금 율시 1수를 지어 주게 하였다. 이들이 뇌물을 받지 않고 돌아간 적은 근래에 없었다”했으니, 우리 조정에서도 홍세태를 국제적인 시인으로 인정했음을 알 수 있다. -276쪽
양반 관료는 고유 업무가 있었으므로 일생에 한 번이라도 사신으로 가기 어려웠으며, 두 차례 이상 나갔던 문인도 별로 없다. 그러나 역관은 외국에 나가 통역하는 게 업무였으므로 능력만 인정되면 몇 번이라도 나갔다. 외국에 많이 나갈수록 회화 솜씨가 느는 것은 당연했다. 가장 많이 나갔던 역관은 이상적과 그의 제자 오경석인데, 이상적은 27세 되던 1829년부터 환갑이 지난 1864년까지 중국에 열두 차례나 다녀왔다. 한 번 왕복하는 데 반 년 넘게 걸리고 준비 기간까지 필요한 것을 감안하면, 젊은 시절의 절반은 외국에서 머문 셈이다. 박지원이나 박제가 같은 실학자들이 중국 여행을 통해 중국 문인들과 교유한 예가 있지만, 모두 일회성에 그쳤다. 이상적같이 지속적으로 교유한 예는 없었다. -311쪽
김득련은 기행문 말고도 오언절구 4수, 오언율시 5수, 칠언절구 111수, 칠언율시 13수, 칠언장시 3수 증 모두 136수의 한시를 지어『환구음초』라는 한시집을 간행했다. (…) 조선시대에는 기행문을 ‘와유록(臥遊錄)’이라 했는데, 이는 방바닥에 누워 글을 읽으면서 실제 가 본 것처럼 즐긴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득련의『환구음초』는 독자들이 조선 최초로 세계일주를 즐기게 해 준 와유록인 셈이다. -335쪽
역관들은 무역을 통해 막대한 재산을 축적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한양의 돈줄이 되었다. 연암 박지원의 소설「허생전」에서 허생이 돈을 빌린 갑부 변씨도 역관인데, 변시는 허생을 어영대장 이완에게 추천하여 벼슬을 주려 했다. 또한 역관들은 막대한 재산과 해박한 국제 정세를 통해 정권의 핵심과 가까웠다. 역관의 딸로 왕비에까지 오른 장희빈이 대표적인 예이다. -364쪽 --- 본문 중에서
조선의 중인들, 허경진, 침술의 대가, 허임, 동의보감, 허준, 노비집안, 악공, 어머니 병, 의원 침술, 달마도, 김명국, 장혼, 천자문, 아희원람, 피재길, 정조, 고약, 허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