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청소년문화재단 각위원회,청소년푸르미 단원회원들의 응원부탁드립니다...
프로레슬링의 역사
미국 프로레슬링의 역사는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기원을 찾는다는 것은 힘든일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국 프로레슬링의 양분하던 메이저 단체라면 누구라도 단연 WCW와 WWF를 손꼽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메이저 단체도 이제는 WWF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통합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러한 빈스맥마한의 움직임은 과연 단순하게 미국의 프로레슬링의 천하통일을 이룬 대업으로서의 평가 받는 것으로 끝나는 것인가? 미국의 프로레슬링은 60년대 이후부터 우리나라 하나보다 더 큰 주안에서 수 많은 레슬링의 챔피언들이 난립하는 그야말로 춘추전국시대였다.
이러한 시대의 챔피언 벨트의 가치와 챔피언으로서의 위치를 지키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 바로 NWA라는 단체였다. NWA는 미국을 포함한 일본과 멕시코 한국 인도 등등 많은 회원국을 보유하면서 프로모션을 벌려나갔다.
때문에 NWA의 챔피언은 세계에서 가장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나이라는 호칭도 생겨나게 된다.
이 NWA는 이후 WWA의 흡수와 더불어서 WCW로 변화하기 까지 미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단체로서 손색이 없는 모습을 지니게 된다.
빈스맥마한의 아버지는 뉴욕을 주무대로 하는 프로모터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오늘날로 치면 흥행업자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들은 레슬링이라는 사업으로 인해 많은 이익을 누릴 수 있을 것을 의심치 않았었고 때문에 NWA라는 거대 프로모션을 박차고 나와 독립적인 단체인 WWWF를 만들게 된다.
WORLD WIDE WRESTLING FEDERATION이라는 이름의 이 단체는 기대와는 달리 NWA의 세력을 두려워하는 흥행업자들의 참가부재와 더불어서 결국 독립한지 얼마안되어서 다시 NWA로 흡수합병되고 만다.
치욕을 겪어야만 했던 아버지를 지켜보기만 했던 빈스맥마한 주니어는 이후로 WWF라는 단체를 만들어서 다시 한번 NWA를 박차고 나온다. NWA는 WWF의 그런 움직임은 신경도 쓰지 않을 정도로 거목으로 자라나고 만다.
당시에 인기를 모으던 단체중에는 또다른 단체인 AWA라는 단체가 있었는데 챔피언의 재목이라는 평가를 받으면서도 닉 복윙클의 기피로 인해 타이틀을 차지할 수 없었던 거한 헐크호건과 만나게 되면서 이들의 세계는 무서운 공조력으로 NWA를 잠식해 나가기 시작한다.
NWA는 일본의 단체들 중에서도 그야말로 진정한 세계의 챔피언으로 손꼽힐 정도였고 릭플레어의 위대한 챔프로서의 길과 그를 위협해오는 새로운 세력으로 스팅이 등장하여 전대미문의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빈스는 반격의 준비를 갖추었고 레슬링이 쇼냐 아니냐를 떠나서 아예 그것을 까놓고 보여주고 즐기는 과감한 마케팅을 실시하게 된다. 레슬링 외적인 머천다이징에도 많은 투자를 하였고 이후로 앞서 언급했던 거한인 헐크호건과 이후로 80년대와 90년대 초반의 WWF의 전성기를 열게만든 것이다.
호건이 출연하는 모든 방송들은 그야말로 최고의 인기였고 선과 악이 분명한 권선징악의 대결구도는 보는 이들을 유쾌한 흥분 속으로 몰아넣었다. 결국 WWF는 이후로 NWA가 WCW라는 이름으로 바뀌어질 무렵부터 철저한 전략으로 그들을 앞서나가기 시작한다.
빈스는 금년 3월 26일을 마지막으로 라이벌 업체였던 WCW의 나이트로의 막을 완전히 내리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보란듯이 그 라이벌 단체이자 아버지를 절망케 했던 WCW를 사들였다.
물론 독점 방지 등의 미국 법률탓인지 표면적으로는 아들인 쉐인이 사들인 것으로 되어 있지만 말이다. 모든 사람들은 빈스맥마한이 단순하게 WCW를 사들임으로 인해서 그의 아버지의 복수를 했고 WWF를 유일무이한 최고의 단체로 만들었다고 생각하지만 빈스맥마한이 사들인 것은 WWF의 미래도 아닌 WCW의 현재의 모습도 아닌 미국 프로레슬링의 역사가 담기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NWA가 지나온 모든 역사가 담긴 비디오테입의 판권과 그들이 관련했던 모든 영상물의 저작권까지도 포함해서 사들인 것 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그렇게 많지는 않다.
빈스는 왜 이 과거의 저작권을 사들였을까? 그리고 이것을 사들임으로 인해 앞으로도 그렇고 이전에도 현재에도 영원히 레슬링은 WWF라는 인식을 주기 위한 것일까? 아니 어쩌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소유한 영원불멸의 WWF왕국을 꿈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나라의 프로레슬링은 엄밀하게 따지면, 국내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났다고 보아야 한다.
국내 프로레슬링은 6·25 동난 이후에 부산을 중심으로 태동하게 된다. 아마추어레슬링, 당수도, 합기도, 복싱 등 무술 및 스포츠 출신 선수들에 의하여 자생적으로 출범을 했다.
초창기 플라잉 시저스가 특기인 국내 참피언 장영철. 당수도의 달인 천규덕, 타이거 안명길(현 국제심판), 우기환, 고릴라 이석윤 등이 강자로 인기는 대단했지만 국내의 사정 등 구조적인 문제로 인하여, 수준이 국제적이지는 못했다.
그러나 장영철 선수는 당시 기술을 바탕으로 최고의 인기를 끌고 있었고, 국내 프로레슬링이 자리를 잡기까지 많은 역할을 했다고 하는데 의의를 둘 수가 있다.
프로레슬링이 우리나라에서 진정한 스포츠로서 자리를 잡기 시작한 계기는 민족의 스포츠 영웅인 김일 선생님의 등장으로 인해서였다.
당시 미국, 일본에서 활동을 했던, 세계적인 선수인 김일 선수는 입국 후, 해외 및 국내 프로모터의 역할과 현역선수를 겸하게 된다. 이 당시 김일 선수는 많은 후진 양성을 했고, 이때 양성된 선수는 현재 국내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며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선수가 이왕표, 김도유, 노지심 선수 이다. 이 당시 국내프로레슬링이 흥행된 이유를 들자면, 후진 양성을 통한 선수의 저변확대, 활발한 해외 교류, 당시의 시대상을 적절히 발휘하는 역사적인 흐름과 궤를 같이 했다는 점을 들수 있다.
즉, 아마추어와 프로의 조화로 인한 적절한 인적 구성 및 국민의 욕구가 매치되어 흥행이 되었다고 분석된다.
일제 식민지와 민족상잔의 비극으로 얼룩진 근세사를 몸으로 격은 우리 국민의 민족적인 한과 아픔을 달래주는 진정한 의미의 민족 스포츠로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
앞에서 간략히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 프로레슬링은 이젠 팬들의 기억 속에서 멀어지고, 잊혀지고 있긴 하지만 근대사를 함께한 민족의 스포츠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한국프로레슬링도 다시 부활의 몸짓을 하고 있다. 이 홈페이지는 그 첫 걸음이라는 데 의의가 있다. 향후 본 한국프로레슬링연맹은 정기적인 경기의 유치와 해외선수와의 교류, 팬을 위한 볼거리와 즐길거리 제공. 또한, 세계속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 컨텐츠로 부활할 것이며, 그런 활동을 위한 준비는 상당부분 구체화 되어 있다.
|
맨손으로 두방이면 잡는 황소를 정보부 협박에…” 2009-05-01 | |||
|
변 기자의 격투 이야기] 한국 프로레슬링의 신구, 천규덕과 한대호의 만남
[엑스포츠뉴스=변성재 기자]
서울 종로구 한 구석진 곳에 있는 한국 프로레슬링 동우회, 그곳에 도착하니 호탕한 웃음소리가 나를 반겼다. 그 웃음의 주인공들은 마지막 남은 한국 프로레슬러 1세대 '당수 귀신' 천규덕과 국내 1호 박사 학위 수여 중인 프로레슬러 한대호였다.
1965년 국내 최초 프로레슬링을 도입시켜 일약 스타덤에 오른 천규덕, 그리고 2009년 국내 최초 프로레슬링 과학 연구소를 설립하여, 30여 명의 엘리트 스포츠인과 석, 박사 출신들과 함께 한국 프로레슬링의 발전을 위해 태어났다고 밝힌 한대호.
|
'60년대의 프로레슬링 전설'과 '2000년대의 프로레슬링 전설'이 만남을 가졌다. 이번 만남을 주선한 사람은 바로 한대호, 그는 50여 년 한국의 프로레슬링 역사를 학문적, 체계적으로 틀을 바로 잡으려 소리없이 홀로 노력해왔다.
이를 기특하게 생각한 천규덕은 " 한국의 프로레슬링 발전을 위해 이런 엘리트 스포츠인을 만나 반갑다. 나로 하여금 도움이 된다면 물심양면으로 전폭적인 지원뿐만 아니라, 나로 하여금 올라갈 수 있는 발판이 되어 주겠다 " 라고 덧붙였다.
천규덕(아하 '천'으로 표기)- 씨름 선수 출신이라 들었소. 덩치 하나 마음에 듭니다. (웃음)
한대호(이하 '한'으로 표기)- 감사합니다. 한국 프로레슬링의 신화 '당수 귀신' 천규덕 사범님을 처음 뵈어 다소 긴장이 됩니다.
천- 긴장하지 마시오. 나는 이미 늙은 사람이오. 반갑소 천규덕이오.
한- 안녕하십니까? 처음 인사드립니다. 한국의 프로레슬링 발전과 미래의 꿈나무 양성에 힘쓰는 프로레슬링 과학 연구소 소장 한대호라 합니다. 잘 부탁합니다.
천- 한국에 최초 프로레슬링 과학 연구소에 소장으로 있다고 들었소. 흥미롭소. 그곳은 어떤 곳이오?
한- 한국 프로레슬링은 아직 학문적인 체계가 잡혀 있지 않습니다. 50년 여년 가까이 명맥을 유지해온 인기 스포츠 종목이면서 한때 한국 최고의 스포츠 종목인 프로레슬링을 과학적인 시선과 학술적인 가치를 적립하고 정기적인 프로레슬링 관련 논문발표 및 대중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연구소라 말할 수 있습니다.
|
천- 그렇군요. 나보다 어린 나이에 이런 생각을 했다는 자네가 대견하고 한편으로 나 자신이 부끄럽고, 또한 자네가 존경스럽소.
한- 아닙니다. 사범님, 사범님께서는 한국 프로레슬링의 기둥이신 분 입니다. 감히 그런 분께 이런 말씀을 들어 정말 당황스럽고, 이 자리에 함께 있어 감사할 따름이며, 영광입니다.
천- 그런 소리 하지 마시오. (웃음) 본론으로 넘어가 봅시다. 프로레슬링 흥행도 펼칠 예정에 있는지 궁금하오.
한- 물론입니다. 정기적인 프로레슬링 흥행과 현재 불모지인 한국 프로레슬링 발전을 위해 논문을 발표할 예정에 있습니다. 온 국민이 쉽게 프로레슬링에 다가갈 수 있는 발판을 만들고 싶습니다.
천- 자네에겐 프로레슬링이 어떤 의미를 가진 스포츠인가?
한- 14년 씨름판에서 활동했지만 어린 시절 저 자신의 마음을 움직이는 스포츠는 바로 프로레슬링이었습니다. 프로레슬링은 아버지 같은 분 입니다.배우면 배울수록 그 가치는 위대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
천- 현재 한국 프로레슬링 현재 가장 어느 것이 문제라고 생각 하오?
한- 가장 문제점은 스폰서 부제라 생각합니다. 현재 한국 경제는 최악의 상황이라, 어려움이 많습니다. 경제만 회복된다면 스타성 있는 프로레슬러를 육성 시키는 것은 시간문제라 생각합니다.
천- 마지막으로 이 늙은이가 자네에게 부탁 한마디 해도 괜찮겠소?
한- 네. 영광입니다. 천 사범님께서 오늘 하신 말씀 평생 기억하고 생각하겠습니다.
천- 한국 프로레슬링 계를 잘 부탁하오. 내가 살아있는 한 물심양면으로 자네에게 전폭적인 도움을 줄 것이오. 이 시점 자네 같은 든든한 나무가 한국 프로레슬링 계에 절실히 필요하오. 잘 부탁드리오.
한- 감사합니다. 사범님, 한국 프로레슬링 계의 든든한 나무가 되도록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오늘 하신 말씀 가슴 깊이 새기고 다시 새기겠습니다.바쁜 시간 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천규덕 약력
1932년 부산 출생
1949년 육군항공대 입대
1961년 한국 프로레슬러 데뷔 (29세)
1964년 영진약품 근무
1966년 미국 프로레슬링 데뷔
1978년 극동 태그매치 챔피온 왕좌
1975년 한국 프로레슬링 헤비급 챔피언 왕좌
1998년 프로레슬링 동우회 결성
2002년 신한국 프로레슬링 협회 원로고문 역임
한대호 약력
1971년 서울 출생
1985년 14세 어린 나이 씨름에 입문
1987년 대한 씨름 협회 우수선수상 수상
1991년 일양약품 프로 씨름단 활약
1996년 설날 천하장사 씨름대회 2품
1997년 충주 천하장사 씨름대회 2품
1998년 한국 프로레슬링 연맹 프로레슬러 활동
2005년 프로레슬링 엔터테인먼트 솔드아웃 대표
2008년 프로레슬링 과학 연구소 소장 역임
[사진 = 천규덕, 한대호 (C) 엑스포츠뉴스DB 변성재 기자]
엑스포츠뉴스 변성재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