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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고조선,부여,발해 등 고대사토론방 손에 잡히지 않는 말갈의 역사
천산 추천 0 조회 668 08.01.14 13:39 댓글 14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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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8.01.14 22:10

    첫댓글 읍루라고 부르건, 물길이라 부르건, 어찌되었든.... 고구려 7세기 동안 말갈이란 단어는 멈추지 않고 계속 등장했습니다.

  • 작성자 08.01.14 22:59

    부여 멸망후, 고구려 말기에 등장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전에 등장한 것은 고려인의 인식이 그러했던 탓에 소급되어 적용되었던 것 아니었을까요

  • 08.01.15 14:36

    소급적용이라 한다면 말갈이란 단어가 굳이 물길이란 단어가 등장하는 시기에 같이 나올 이유가 있었을까요?? 말갈이 꾸준히 나오면서도 말갈전은 따로 없는것도 이상하긴 합니다.

  • 작성자 08.01.16 00:20

    말갈전이 따로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삼국사기를 두고 하신 말씀 같습니다. 삼국사기는 말그대로 삼국사기니깐요. 물길과 말갈이 같이 등장한다기 보다는 물길과 말갈을 기록한 시대가 같아서 물길을 말갈처럼 기록하였던 것이지요. 물길은 말갈의 일부가 될 수 있겠죠. 말갈당대의 핵심 말갈이 이전시대의 물길쯤 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 08.01.16 13:29

    저도 기억이 확실하진 못합니다만 말갈이라는 명칭도 물길에서 나왔다고 들은 것 같습니다. 말갈(靺鞨)이라는 한자에는 모두 가죽 혁(革)자가 들어있어서 일종의 비하 명칭으로 쓰였는데, 음이 비슷한 것으로 보아 물길에서 온 말로 보입니다.(확실한 정보가 아니라서 확인이 필요합니다;;)

  • 08.01.15 01:09

    인구문제의 350만명은 잘못된 통계가 아닌지요? 김용만 선생님 글에서도 나와있구 말입니다.

  • 작성자 08.01.15 11:53

    말갈의 인구는 군사대비 하여 과소하게 생각했습니다. 말갈은 군사력으로 대변되는 부족이라서 그렇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고구려는 그냥 사서에 나온 내용을 일반적인 호구로 적용한 것입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고구려 대비한 말갈족의 인구는 미미하여 동북아시아의 족적을 변화시킬만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갈이 누구이었던가도 중요한 문제지만 말갈의 후예라고 하는 이들의 대부분은 실상은 고구려인이었다는 것입니다.

  • 08.01.15 23:10

    아..네..^^

  • 08.01.15 20:27

    자치통감에 보이는 부여를 몰아낸 백제에 관한 기사는 살아있는백제사에서 언급을 한 적이 있는데 서로다른 3개의 사서에서 모두 만주지방의 백제가 보이므로 그 것은 고구려의 오기가 아니라 백제가 맞다고 했습니다. 만주백제의 남하로 백제는 근초고왕대에 역사적단층이 발견된다고 합니다.

  • 작성자 08.01.16 00:25

    저는 대륙백제를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언급하신 내용에 대해서는 공감은 하지만 확증하지 못하고, 공감하고 나면 다른 것이 더 꼬여서, 세월을 보내고 난 후 다시 한번 고민해 보자는 입장입니다.

  • 08.01.15 20:27

    그리고 말갈의 후예가 대부분 고구려인이였다는건 커다란 비약이 아닐까싶습니다. 수서 동이전에 보이는 말갈은 한서동이전에 보이는 읍루와 습성과 지역이 비슷합니다. 따라서 동일계통의 부족이 아니더라도 가까운 계통임엔 맞습니다. 예와 부여 고구려 옥저는 풍습이 있고 제도와 질서가 있어 비교적 발달되있습니다. 말갈계통과는 확실히 구별되보입니다

  • 작성자 08.01.15 21:25

    수서의 말갈이 위에서 처음 언급된 말갈이고 그 분포지역입니다. 읍루와 많이 다릅니다. 읍루의 언어와 부여의 언어는 다르지만, 말갈의 언어와 북부여의 후예인 두막루, 거란, 실위등의 언어는 같았습니다. 3세기 읍루가 아닌 3세기 숙신으로 기록된 세력은 읍루와는 다른 성에서 생활하였습니다. 다른 부분도 어느정도 있지는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 작성자 08.01.16 00:30

    고구려인이라고 말할때의 고구려인은 고구려 지배층을 말했던 것이 아니며, 말갈의 후예가 고구려인이라고 말했던 것도 아니며, 여진족의 선조를 다 말갈족이라고 말하지만, 6~7세기경의 말갈족 보다, 6~7세기경의 고구려인이 여진족속에는 더 많았다는 것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 08.01.15 20:26

    후한서 동이전에보이는 읍루입니다. 다른 사서에서 보이는 말갈도 이와 비슷합니다.[[산림사이에 거하며 몹시도 추우며 항시 토굴에 있어 깊은 것을 귀하게 여기어 큰 집은 사다리 아홉 개에 이른다. 돼지 기르기를 즐겨 그 고기를 먹고 그 가죽으로 옷을 입는다. 겨울에는 돼지 기름을 두터히 나누어 몸에 발라 이로써 바람과 추위를 막는다. 여름에는 벌거 벗고 그 전후에 베로 가린다. 사람이 냄새가 많이 나고 더러움을 알지 못하여 변소를 가운데 짓고 그 주위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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