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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민 한국인 거리
베트남 호치민시. 한국인 많이 사는 지역은 공항에서 2-3분 거리 슈퍼볼지역과 옛날 한국인거리 판 반하이 지역이 많이 살고 있으나, 지금 현재는 대부분 많은 한국 사람들이 호치민 신도시 지역 푸미홍 으로 많이 이동 했다.
호치민 코리아 타운은 호치민 탄산누트 공항에서 택시로 5분거리에 있으며 10여년전 정주섭씨가 정착하여 라이따이한을돌보면서 이곳에 정착하였다. 이후 한국사람이 이곳으로 모이게 되면서 코리아 타운이 형성되었다. 이곳은 베트남 대형 재래시장이 있어서 먹거리가 풍성하여 한국사람들이 생할하기에 편리한 곳에 있다. 코리아 타운에는 많은 한국식당 점포 책방 호텔이 있어서 베트남말을 못하여도 이곳에선 불편하지 않습니다.
특히 정주섭씨가 운영하는 다목적 휴계실식당은 음식이 저렴하고 맛이있어서 많은 한국사람 의 사랑방 역할을 하고있습니다. 모든 한국음식값이 25.000동 35000동 한국돈 2천원 3천원이면 한국음식을 먹을 수있다.베낭여행하신 분들 한국음식이 생각나면 꼭 이곳을 찿아보시면 좋은 여행 경험이 될 것입니다.
베트남 호치민시에 거주하는 '라이따이한의 대부' 정주섭씨의 실천하는 인간애를 소개한 기사
동포의 이름으로 부른 '사랑노래'
베트남의 라이따이한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두 사람 있다. 베트남에서 유일하게 목사로 활동할 수 있는 한국 사람 김영관 목사와 정주섭씨다.
휴메인 직업 기술학교가 문을 열기 전에는 정주섭씨가 설립한 직업 기술학교가 라이따이한을 도운 것으로 알려졌다. 1990년대 초 베트남에 들어간 정주섭씨는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인 기술자들이 많이 모여살았던 호치민 판반하이에서 라이따이한들을 돕기 시작했다.
한국의 한 복지단체의 도움으로 시작된 직업 기술학교에는 영어와 한국어 타자를 가르쳤고 기숙사도 운영해 소문을 들은 라이따이한들이 몰려들었다.라이따이한들의 이력서도 정주섭씨와 정 씨를 도왔던 강희조씨가 작성했던 것. 정주섭 강희조씨는 "당시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 기업에 라이따이한을 취업시키기 위해 작성했던 것이며, 이력서를 통해 아버지를 만난 라이따이한들도 많이 있다"고 말했다.
라이따이한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활동하는 김상일씨
라이따이한들은 정주섭씨를 '빠빠정'으로 부르며 따랐고 정주섭씨는 자신을 의지하는 라이따이한들이 생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30대 중후반의 나이로 성장한 베트남의 라이따이한들은 여전히 그를 '빠빠정'으로 부르며 따른다.
라이따이한 김상일씨는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지금도 라이따이한들을 찾아 인터뷰하고 라이따이한이 직면한 현실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김상일씨는 자신이 파악한 라이따이한의 명단이 6백 명에 이른다고 말했다. 한국정부와 일부 한국인에 대해 피해의식이 강한 그는 "여전히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벗지 못하는 라이따이한들이 많으며, 그들을 한국 정부가 도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원하는 이들에게는 한국에 가서 노동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
하지만 상일씨의 주장은 한국과 베트남의 여건상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상일씨의 이같은 주장에 대해 호치민 김지영총영사는 "고용허가제가 시행되는 상황에서 베트남의 라이따이한에게만 특혜를 주는 것은 한국 기업은 물론 베트남 정부에서도 바라지 않는 일"이라고 설명한다.
김영관목사와 정주섭씨 그리고 라이따이한 김상일씨 외에 라이따이한에게 관심을 갖는 이들은 한국 교회가 파송한 베트남 사역자들의 모임인'VDF'회원들도 있다.
직업 학교 세워 라이따이한 자립돕는 정주섭씨 "산업연수생으로 받아주세요"
1995.05.02 한겨레 5면 사회 기사(인터뷰)
직업학교세워 라이따이한 자립돕는정주섭씨 “산업연수생으로 받아주세요” 양상우 기자 “사업차 호치민시에 들렀다 방황하는 우리 한국인 2세들을 보고가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지난달 24~30일 서울에서... 베트남의 한국인 2세들 아버지 만날날 꿈꾸며 한국말 배워
1992.02.07 한겨레 7면 사회 기사(뉴스)
사업가 정주섭씨가 한인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도 이학교를 통해서였다. 그러나 학교는 4개월 만에 폐쇄됐다. 폐쇄된 이유를 정확하게 알고있는 사람들은 없지만, 이러한과정을 거치면서 호치민시의... 휴지통
1992.04.10 동아일보 23면 사회 기사(가십)
도치농씨의 방한은 지난해 10월초 의료봉사를 위해 호치민시를 방문했던 한국여의사회 소속여의사들이 월남에서 사업을 하고있는 鄭周燮(정주섭)씨 (57)로부터 딱한 사정을 전해듣고 仁川(인천)... 대한女醫師會(여의사회) 베트남에 仁術(인술)봉사
1991.10.01 동아일보 21면 사회 기사(뉴스)
베트남의 한국계혼혈아와호치민시(구 사이공시)주민들을 무료진료해주기 위해 1일... 한국계혼혈아인 푸녕기술학교(이사장 鄭周燮(정주섭))를 방문,지원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다. 여의사회의 이번...
라이따이한 아버지 "파파 정"(한국명:정주섭씨)
호치민의 코리아타운 '팜반하이' 거리는 호치민 탄산누트 공항에서 택시로 5분거리에 있다.
사이공 4지구 '푸미홍'에 신도시가 만들어 지면서 그곳에 새로 코리아타운이 형성되면서
한국의 주재원이나 부유층이 많이 옮겨갔지만, 한국인들은 '팜반하이'에 아직도 많이 산다.
대형 재래시장이 길끝쪽에 위치하고 있어 주거환경이 편리한 이 거리에, 10여년전 정주섭씨가 단신으로 이곳에 와서 다목적 휴게실을 운영하면서 라이따이한을 돌보면서 정착하였다. 차츰 한국사람이 이곳으로 모이게 되면서 코리아 타운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2007년 1월1일 새해아침 정주섭씨를 만나러 갔다.
이남원 전우의 안내로 택시를 타고 팜반하이로 갔더니 반가운 얼굴들이 보인다. 우선 타국에 와서 한글 간판을 보니 반가움이 앞선다.
한호성 전우를 그곳에서 만나니 얼마나 반가웁겠는가? 한호성 전우는 사이공에서 30km쯤 북쪽 빈증이라는 곳에 집을 지었으나 아들이 이곳 한국인 학교에 다니고 있어 이곳에서 소일 하는 시간이 많다고 한다. 자신은 늙은 맹호지만 아들이 사회에 나가서 독립할 때까지 뒷바라지 하는게 그의 마지막 임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주섭씨가 운영하는 다목적 휴계실식당은 음식값이 저렴하고 고향의 맛이 있어서 이곳 많은 한국사람들이 찾아와서 사랑방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음식값이 25.000동 35000동 한국돈 2천원 3천원이면 한국음식을 먹을 수 있다. 베낭여행객들도 한국음식이 생각나면 이곳을 찾아와 한국인들도 만나고 고향의 음식맛을 즐기고, 반가운 인사들을 나누는 흐뭇한 시간을 가진다.
처음 뵙는 정주섭 씨(72세,팜반하이 거주)는 연세에 비하여 건강한 모습이었고, 인자한 느낌을 주었다. 정주섭씨는 새해정초라며 같이 자리한 전우들에게 귀한 술을 한잔씩 따라 주시고, 떡꾹을 한접시씩 돌리며, 우리들에게 라이따이한 이야기를 해주셨다.
'라이'(Lai)의 뜻은 '튀기'를 의미한다.
라이따이한은 한국인의 피가 섞인 한국인 아버지와 베트남 어머니를 둔 한국인2세를 말한다.
라이따이한이 생기게 된 배경 바로 그 옆에는 베트남 전쟁이 있었다.
라이따이한 그러면, 흔히들 월남전 파월용사들에 의해 그 많은 라이따이한들이 낳아지고, 버려진걸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현재 베트남엔 많아야 2,000명 정도의 라이따이한이 있는데, 거의 대부분 라이따이한 아버지는 파월근로자 및 군속으로써 파견되었던 한국의 일반 민간인 들이었다. 그 중에 내가(정주섭씨) 알고 있는 라이 따이한 중에서 100명에 1명정도 국군장병의 자녀이고 대부분 파월기술자 민간인들의 자녀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한국인 아버지의 아들 딸이다. 그들에게 도움이 필요하다.
그들은 한국인 아버지의 뿌리를 잊고 혼란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다.
정주섭씨는 라이따이한이 찾아오면 사연을 확인하고 조건없이 숙식을 무료로 제공해준단다.
라이따이한 들은 정주섭 씨를 "파파 정"은 이라고 부른다. 그들의 아빠역할을 하는 대부로 통한다. 어려움이 있으면 모두가 도움을 청하는 것이다. 2세들은 정주섭씨가 임대한 휴게실이 붙은 4층짜리 가옥에서 취직하거나 독립하기까지 돌봐준다고 한다.
그러나 라이따이한의 신분으로 취직을 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워 여자 라이따이한들은 보통 잔심부름을 하거나 카운터를 볼수 있는 한국인 가정이나 가라오케에 취직하기를 바라고, 남자들은 보통 한달에 약 60달러 정도의 비교적 안정된 수입이 보장되는 한국인이 경영하는 신발, 가방공장등에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물론 ‘파파정’이 동분서주 그들의 취직 자리를 알아보지만 2세들이 일할 수 있는 곳은 그리 흔치 않다.
정주섭씨는 이들을 위해 친분이 있는 한국인들을 찾아가 호소를 하고 지원요청을 했다. 그리고 많은 도움도 받앗다. 그렇다고 그가 어떤 대가를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일부에서는 순수한 정주섭씨를 매도하는 자들도 있었다고 한다. 한때는 좌절하여 술도 많이 마셨는데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이 "파파! 힘내요" 격려 때문에 다시 기분을 돌렸다고 한다.
그는 라이따이한들이 어떤 과정에 의해 잉태했고 또 어떤 아픔을 가지고 태어났는지, 월남전 당시 현지에서 분명하게 그리고 생생하게 목격한 사람이다. 월남전 당시 베트남에서 한국일보 지국을 5년간 운영한 것이 오늘이 있게한 인연이었단다.
2층 휴게실 벽면을 가득 메우도록 붙어있는 지난 사진들을 보니, 베트남에 다시와서 라이따이한을 돌보고 그들의 대부 노릇을 하며 취직도 시키고 결혼도 시키며 참 많을 일을 한 세월이 보인다. 한국의 친아버지도 챙기지 않는 자식들을 위하여 사재를 털어가며 이런 노력을 한다는 것은 보통사람으로서 가능한일이 아니다. 정작 정주섭씨 자신은 한국에 있는 마누라와 아들 딸이 퍼다만 주고 가장의 역할을 못하였기 때문에 한국 본가에 가면 환영받지 못했단다. 최근에 와서야 아들이 좋은평을 받는 아버지를 이해하게되고, 어머니를 설득시켜 지금은 부인이 베트남에 와서 다목적 휴게실의 안주인으로서 같이 봉사하고 계신다. 이제는 오히려 성공한 라이따이한들이 용돈도 준다고 자랑한다.
정주섭씨는 우리에게 A4지 5장 분량의 유인물을 건네 주셨다. 라이따이한 한국인 2세 "쨩 다이녁"이라는 젊은이가 시집을 발간할 준비를 하고 있단다. 한국이름은 "김상일"이란다.
그의 아버지는 백마28연대 CIA였다고 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경기도 부천에 살고 있는데, "쨩 다이녁"은 그의 아버지를 찾아갔지만 냉대를 받고 돌아와야만 했습니다. 다시 베트남에 돌아온 "쨩 다이녁"은 아픈 심정을 詩로 썼다고 합니다. 내용은 보지 않았지만 가슴 아리는 사연일겁니다.
"파월군인들은 전투하느라 정신없었고, 관계를 맺더라도 가끔 월남의 사창가에 들렀던 정도였습니다...물론 라이따이한의 아버지가 군인들이 전혀 없었다고는 말할수 없습니다.
라이따이한은 대부분 파월 근로자 및 군속의 자재들이지만, 그중에 파월 군인의 아들인 "쨩 다이녁"이 외치면 베트남에서도 많은 반향이 일어날 것입니다.
미국과 호주는 국가적 차원에서 자국의 2세들을 모두 데려 갔습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무관심 입니다. 베트남과의 밝은 미래를 위하여 손을 써야할 부분입니다."
"라이따이한은 우리 대한민국의 아들,딸입니다." 정주섭씨가 힘주어 말했다.
1975년 4월30일 자유월남이 패망하고부터 공산화 되면서 이별의 날들이 시작되었습니다.
잃어버린 32년 세월...가슴 속 깊이 사무친 그리움만 남아있었습니다. 엄마는 고통을 이기지 못해 하늘나라로 가 버렸고, 세딸들은 외롭고 힘이 들수록 하늘나라에서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을 엄마를 생각하며 이를 악물고 살아 왔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간절했습니다.
2007년 4월16일 세딸들은 빈넬회사에 다녔던 아버지의 사진을 한호성 전우에게 보여줍니다.
한호성 전우는 디카로 사진을 찍어 "월남전과 한국" '아버지를 찾습니다' 사연을 올리게 됩니다. 마침 호주의 이윤화 전우가 발견하고 2007년 4월 19일 꿈에도 그리던 아버지와 극적인 전화통화가 이루어 집니다.
2007년 6월9일 아버지는 베트남에 도착합니다. 그렇게 고대했던 상봉이 이루어 졌습니다.
이 사진은 결혼을 한 세딸들의 가족입니다. 캄란공항에서 마중을 나와 찍은 사진입니다.
세딸들과 아버지가 상봉하는 장면은 아버지의 요청으로 사진을 찍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지금까지 베트남 이산가족을 찾아주기위해 성금을 보내주신 여러 전우님들을 위하여
이렇게 잘 마무리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그들의 핏줄찾기는 현재의 아버지 가정에 심각한 혼란을 불러 올 수도 있다는 충고였습니다.
또 다른 불행의 그림자를 현재의 가정속에 드리우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도 일리는 있지만, 그대로 방치하는 것은 천륜을 어기는 것이지요. 공개를 하지않고 무슨 수 로 찾아냅니까? 그래도 딸을 찾은 아버지는 이제 마음의 짐을 벗은것 아니겠습니까?
어떠한 방법으로 찾았더라도 현재 부인이 알았을땐 충격은 심하겠지요. 그러나 현재 부인의
입장에서도 부인 모르게 속여가며 딸들과 접촉하고 지원해 주는것을 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 다른 한가지는 SBS방송과 라이따이한 문제에 적극관심을 보였던 파파정 정주섭씨가 정작 베트남에 다녀간 아버지들이 그동안 들어간 경비도 지불하지 않고 고맙다는 말도 없이 떠나 버렸다고 한호성, 김성찬 전우에게 엄청 화를 내며 어제부터 사이가 벌어졌다는 것입니다.
인터넷을 하지 못하는 파파정은 이산가족 찾아주기 성금모금을 한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무슨 거금이나 들어 오는것처럼 오해를 하는 것 같다네요. 돈이 뭔지...인간사 참 어렵습니다.
만나지 못해도 마음의 짐...만나게 하고서도 마음의 짐...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딜레마에 빠진체 망설일 수 는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양심에 꺼리낄 점 이 없다면 그대로 밀고 나가야 될 일 입니다.
그것은 우리 한국인의 핏줄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일 뿐만 아니라 인간적 도리 입니다.
부끄러일이라고 모른척하며 감추어 둔다고 해결되어지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베트남에서 온 부고 편지
2003년 새해 벽두를 잊지 못합니다. 베트남에서 팩시밀리를 타고 편지 한 장이 날아들었습니다. 호치민 팜반하이 거리에서 라이따이한(베트남의 한인 2세)을 돌보며 사는 고령의 정주섭 선생이 보낸 것이었습니다.
"이곳 베트남에서 인간문화재 감이었던 유남성(柳南城)옹이 1월 6일 새벽 별세했다네. 지금 막 남사이공 주택가에 차려진 빈소에 애도를 표하고 돌아왔네. 서울의 딸에게 연락 취해주게나. "
사연을 읽다말고 잠시 숨을 멈춰야 했습니다. 당시로 8년9개월 전인 1994년 4월 말, 호치민으로 그를 찾아 나섰던 장면이 휘돌아 지나갔습니다. 그러다가 기억 속에서 살아생전 그가 남긴 의미 있는 문구를 하나 건져냈습니다. "전쟁은 길 위에서 헤어지는 것. 그리고 다시 돌아올 날을 약속하고…."
국제전화로 정주섭 선생을 찾아 장례비를 걱정했습니다. "우리끼리 해야지. 예전에 허 기자랑 몇몇해서 모아둔 돈도 약간 있고…. 그런데 너무 오래 투병을 하다 보니 이젠 이곳 영사관에도 유남성을 아는 사람이 있어야 말이지. "
이렇게 대화는 나는 후 수화기를 놓자니 생각은 만 갈래로 흩어져 과거로 거슬러 올랐습니다. 1994년 5월 초 수소문 끝에 찾아간 호치민 쩌라이 병원과 거기 한 병실에 의식을 잃고 누운 유남성 옹의 모습만 또렷할 뿐 구체적인 사연은 가물가물했구요.
깨알 같은 노트 속 메모에서 그는 조금씩 되살아났습니다. 5개 이름으로 한반도와 인도차이나 반도를 떠돈 부평초라는 표현이 먼저 눈에 들어왔습니다.
1917년 강원도 양양군의 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어릴 때 이름이 '수근(洙根)'. 그 아이는 자라면서 황해도, 함경남도 등을 유랑하며 철령 금광에 일자리를 잡았는데 그 때부터 '남성(南城)'으로 불리며 광물 전문가로 성장해 갔습니다.
그러다 태평양 전쟁이 터지면서 그는 동남아지역 희귀금속 탐사 요원으로 차출됐습니다. '야나이 가쓰오'라는 이름의 일본 군인 신분이었습니다. 그의 1942년 12월 어느 날 기록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내가 서울을 떠나올 때 건강을 빌던 늙으신 어머니, 거기다 서빙고역에서 노량진역까지 울면서 따라오던 임신 3개월의 처…. 그들과 생이별이 될 줄이야. "
야나이 가쓰오는 1945년 일본의 패전 후 귀국 기회를 놓치고 북베트남에 잔류했습니다. 이제 그의 이름은 '레 반 응'. 베트남 전쟁과 독립의 영웅인 보 구앤 지압 장군을 멀리서 지켜보며 전쟁 임무를 수행하며 그는 착각에 빠지기 일쑤였습니다. 나는 도대체 누구이며 어느 조국을 위해 목숨을 건 전쟁을 치르는가 하고 말입니다.
1954년 북베트남의 디엔비엔푸 승전 직후 남긴 그의 소회는 눈물겹습니다. "9년의 전쟁 기간 중 베트남 아내를 얻고 내 손으로 2남 2녀를 받았다. 그런데 그 예쁜 아이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말라리아로 떠나보낸 기구한 운명이 어디 있을까. 내 품에서 숨을 거둔 아이를 차례로 거적에 싸서 파묻어야 했던 애달픈 사연들…. "
이후 그는 부인과 둘이서 17도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베트남으로 탈출해 '리유 남 타잉'이란 이름으로 새 삶을 꾸렸습니다. 거기서 그는 파병된 우리 군 관계자와 기술자 그리고 사업차 나온 일반 민간인들과 접촉하며 잊혀진 조국을 다시 생각했습니다.
1960년대 중반 베트남 구엔 반 티우 대통령의 한국 방문 때 그는 공식 통역 수행원으로 서울을 찾았습니다. 당시 그는 수소문 끝에 영원히 헤어진 줄로만 알았던 중년의 부인과 재회해 화제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그는 조국 아닌 조국 베트남으로 돌아기야 했습니다. 이미 현지에도 부인과 아이들이 있는 엄연한 고향이었기 때문입니다.
1975년 수도 사이공(지금의 호치민)이 월맹군에 접수된 후 유 할아버지는 베트남의 부인과 함께 서울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생활 또한 순탄치 않았습니다. 베트남에서 데리고 온 부인과 옛 부인 사이에서 그는 갈등했습니다. 베트남 부인은 끝내 병을 얻어 사망했고 옛 부인에게 돌아갈 처지도 아니었습니다.
결국 홀몸이 된 그는 일본을 상대로 일본군 복무 당시 자신의 봉급을 청구하는 소송에 몸을 던졌습니다. 한국의 가족에게 보내진다는 돈이 한푼도 전해지지 않았음을 뒤늦게 안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한국에서 일본에서 싸늘한 답을 얻고 말았습니다.
여전히 그는 베트남의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본의 아니게도 자신의 젊은 날을 바쳤던 나라기에 그랬을 것입니다. 1994년 2월 그는 베트남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불과 두 달 후 중풍으로 쓰러졌다가 이제사 호치민 남쪽 롱안의 야산에 묻힌 거죠.
한국인으로 태어난 청년 유남성이 이 땅도 아닌 인도차이나의 베트남에서 그 나라의 이념 투쟁에 소용돌이 속에서 생존을 위해 험란한 줄다리기를 하며 살아갔다는 사실이 저는 믿기지 않습니다. 누구 하나 기억하거나 기억하려 노력하지 않은 무명의 전사로, 또 자연인으로 갈등했다는 사실...그것은 카프카의 소설속 사연처럼 한 인간이 느닷없이 벌레가 돼 떠도는 것이나 다름 없을 듯합니다.
1992~93년 워싱턴 포스트 특파원으로 발칸반도에 머물면서 보스니아 전쟁을 취재했던 피터 마쓰의 <네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책을 떠올립니다. 아니 정확히는 '야만의 기록'이라는 그 책의 부제를 되뇌었다는 편이 옳을지 모릅니다. 유남성 옹의 생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남성 옹의 죽음을 뒤로 하며 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얘기하고 싶은 것일까요. 해답은 다음과 같은 피터 마쓰의 마지막 멘트에 있다고 해야할 듯합니다. "문제는 저기 어딘가에 아직도 인간의 야수성이 숨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내가 딛고 있는 이 땅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
몇 개월 후 한국에 남은 유 옹의 딸이 뒤늦게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지금이라도 아버지 묘소를 찾아가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딸은 “호치민에 있는 아버지의 자녀들에게 저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어왔습니다. 저도 대책이 없는지라 하는 수 없이 정주섭 선생님과 상의해보라고 했습니다.
유남성 옹의 삶은 전쟁으로 일그러진 것의 상징 같습니다. 비록 드러나지 않은 채 묻혀 있지만 그보다 더한 사연도 있을 터이고 대수롭지 않아 보여도 어느 것 하나 간단치 않은 게 비슷한 시대를 넘가면서 전장에 끌려가고 그리고 살거나 죽은 자들의 얘기일 것입니다.
유남성 옹의 인생처럼 산산조각난 한 개인과 가족사의 아픔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모두 전쟁 탓입니다. 비록 길에서 헤어진 게 전부이지만 결과는 너무 가혹합니다. 먼 이국 땅 베트남에 몸을 누인 그의 영전에 다시 깊은 조의를 표합니다. 평생을 떠돌았으나 이제 한 평 땅에 지친 몸을 쉴 수 있길 바랄 뿐입니다.
정주섭 (Chung Ju Sup)
주소: 54 Tan Son Hoa Street 2 Ward Tan Bin Dist., HCMC, Vietnam
베트남 1 세대 출신으로 유명 하셨던 판반하이의 정주섭 님 (다목적 휴게실 운영)이 뇌종양 으로 2007.12.03 운명 하셨습니다.베트남 에 참 좋은 일도 많이 하시고 하셨던 분인데... 토요일 발인 하였고요. 좋은 곳으로 가시길 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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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김영관 목사님은 아직도 목회 활동을 하고 계시고, 이름 모르게 뒤에서 한국 교회를
정식으로 설립 인가를 받기 위해서 가장 노력한 분은 김 병석 사장으로 지금 빈증에서
봉제 공장을 운영 중 입니다. 아마 정 주섭씨는 지끔쯤 좋은 곳에서 편히 잠들어 계시리라 믿습니다.
호치민에 가면 한국인 거리 근처라니 사진이라도 한장 찍고 와야죠...
많은 것을 나누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버리는 사람이 있고
쓰레기 치우는 사람이 따로 있지만
한국인의 긍지로 조금은 베풀고 살았으면 합니다....
당하고, 뺏기지 않고
조금씩 나누어 주면 공존의 길이 생기겠지요.... 개인적인 생각 입니다.
베트남 코리아 타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