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생활성서 – 소금항아리]
상실과 공허로 인한 마음의 기억을 성찰하며, 그 공허를 채워주실 사랑의 존재를 관상해봅시다.
⠀
2024/3/31/주님 부활 대축일
⠀
요한 복음 20장 1-9절
⠀
상실의 언덕, 시간이 지나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난 뒤 우리는 세상이 무너지는 경험을 합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는 충분한 애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아픔이 지나고 나면 서서히 후회와 죄책감, 분노와 절망이 밀려옵니다. 그리고 그 소용돌이를 다 겪어내고 나면 비로소 찾아오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난 뒤 제자들 역시 무너졌습니다. 공동체는 서로 믿지 못했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떠나간 자신의 어두움을 온전히 마주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몇몇은 아픔이 있을지언정 멀리 떠나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이들을 남아 있게 했을까. 이들이 인격적으로 체험한 예수님의 존재는, 그 사랑은 무엇이었길래 이들은 기다리고 있었을까. 요한 복음도 마르코 복음과 같이 빈 무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에서는 조금 더 나아가 “보고 믿었다”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믿음이 아직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닙니다. 요한 복음은 글의 속도를 조절하여 이들이 다시 믿음의 힘을 얻는 과정을 천천히 전할 것입니다. 요한 복음은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아주 느리게 서술하면서 우리를 복음으로 초대합니다. 우리는 이제 부활 시기를 맞아 제자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자신을 드러내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이 작다고 좌절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복음의 후반부는 넘어진 제자들이 다시 일어서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죄는, 우리의 시련은, 우리의 온 생애는 보잘것없기에 예수님으로 가득 채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길 위에서 사랑을 체험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그리고 우리 역시 그 사랑으로 다시 일어나 나아가길 원하시는 그분으로부터.
⠀
배우석 리노 신부(서울대교구)
생활성서 2024년 3월호 '소금항아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