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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10일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2코린토 9,6ㄴ-10 요한 12,24-26
고행과 자기 학대의 차이점
신자 중에서 가끔은 용하다고 인정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성이 높아서 많은 사람이 찾아가, 기도도 청하고 예언도 듣고 치유와 가르침도 받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분들은 대부분 외모가 비슷합니다.
생김새가 비슷하다기보다는 풍기는 이미지가 비슷합니다.
일단 화장을 하지 않습니다.
예쁘게 보이려는 마음까지 주님께 봉헌했다는 것입니다.
머리는 흰머리와 검은 머리가 반반 섞여 있습니다.
전혀 꾸미지 않고 그냥 고무줄 하나로 묶고 다닙니다.
옷도 생활 한복과 같은 멋을 낼 필요 없는 수수한 것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아주 오래 성당에 앉아 있거나 엄청난 시간을 기도와 성경 필사 등에 투자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분들이 가치 있는 고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학대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고행은 좋은 것일까요? 예수님은 40일 동안 광야에서 세속-육신-마귀와 싸우기 위해
단식하시며 고행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고행은 좋은 것이고 꼭 필요한 것입니다.
고행이 없는 종교는 없습니다.
그런데 고행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리면 그것은 자기 학대일 뿐입니다.
인도에 70년 이상 음식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프라흘라드 자니’입니다.
그는 하늘의 기운을 마시며 산다고 말합니다.
그는 어린 시절 여신의 축복을 받아 신비한 능력을 갖추게 된 이후로 음식을 입에 대지 않고
살아왔다고 주장합니다.
여신 때문인지 그는 여성의 모습처럼 분장하고 다닙니다.
그가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자 인도 국방연구개발기구(ORDO)는 2010년 15일 동안
병원에서 그를 관찰하였습니다. 사람이 15일 동안 물을 마시지 않고는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30명의 의료진이 카메라와 CCTV를 통해 그를 살펴본 결과 정말 그는 음식과 물을 먹고 마시지 않았습니다.
물론 화장실에도 간 적이 없습니다.
놀란 의료진은 15일 뒤, 자니의 장기와 뇌, 혈관 등을 검사했으나 그 수치가 모두 정상인의 안전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뇌의 상태는 25세 젊은이의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밝혔습니다.
DRDO는 그를 더 연구하면 군인들이 전장에서 음식물 없이 견디거나 재난 상황에서 고립된 사람들이 오래 버틸 수 있도록 하는데 보탬이 되는 의학적 성과가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습니다.
이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가능하더라도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이런 수행은 그저 자기 학대에 불과합니다.
고매한 스승 밑에서 수행하던 제자가 스승에게 달려왔습니다.
“스승님, 드디어 제가 물 위를 걸어서 강을 건널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러자 스승이 말했습니다.
“애 많이 썼구나. 그런데 이 강을 건너는 뱃삯이 얼마더냐?”
“20루피입니다.” 스승이 말했습니다.
“너는 20년 동안 그 고생을 하고 20루피를 번 것이니라.”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거의 경지에 오른 제자 하나가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스승님, 어떻게 하면 하늘을 날 수 있습니까?”
스승이 답했습니다. “하늘을 나는 일은 새들에게나 맡겨 두세나.”
왜 스승들은 이런 시도를 하는 제자들을 칭찬해주지 않을까요?
그런 일을 하려는 목적이 자기 영광을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유학 가서 신학생 때 고행을 한답시고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잤습니다.
그러나 결국 음식을 먹을 때는 폭식을 할 때도 있었고, 잠은 수업시간에 잤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그저 고행 자체로 자신이 특별하다고 느끼려고 하는 자기 학대에 불과합니다.
자기 학대는 자기만족을 위함입니다.
그러나 고행은 사랑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고생을 말합니다.
마치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찍으면 반드시 거쳐서 가야 하는 길이 있는데, 그 목적지가 사랑이라면 그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길이 고행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를 죽이는 일은 고행입니다.
그러나 그 고행이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함이 아니면 자기 학대가 되는 것입니다.
이웃을 위해 오히려 얼굴을 예쁘게 꾸미고 머리도 예쁘게 단장하고 슬픈 일이 있더라도 웃는 모습을 보여주며 배가 불러도 필요하면 더 먹어주기 위해 당하는 고통이 바로 고행입니다.
어머니가 가족을 위해 맛있는 반찬을 만드는 것이 고행인 것입니다.
한국의 방송국이 ‘프라흘라드 자니’를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15일 단식 당시의 기록을 상세하게 살폈습니다.
그랬더니 샤워하러 들어가기 전에는 방광에 소변이 가득 차 있다가 샤워한 후에는 그 소변이 싹 빠져버린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샤워 물을 마시고 그때 소변을 보았던 것입니다.
훈련되면 음식 없이 40일 이상 사는 것은 어렵지는 않다고 합니다.
자니씨는 자신의 영광을 위해 고생한 자기 학대의 삶을 산 것뿐입니다.
반면 오늘 축일을 지내는 성 라우렌시오 부제는 황제가 원하는 재물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그 덕분으로 자신은 불로 달궈진 석쇠에 구워지는 고생을 하였으니 그것은 정말 고행입니다.
그것은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도, 몸을 조금 괴롭히는 것도 그것이 이웃을 더 사랑하기 위한 열매의 목적이 아니면 상은커녕 평생을 자기에게 자기가 속은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밀알은 썩어야 하지만 반드시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 썩어야 합니다.
그 열매란 나의 고생으로 이웃이 더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8월10일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복음: 요한 12,24-26
고통을 건너뛰는 행복, 희생없는 성공을 경계합시다!
저희 피정 센터는 바야흐로 대목입니다.
이박삼일 일정으로 아이들이 나가고 들어오고, 적막하던 어촌 마을이 시끌벅적합니다.
목청껏 소리 지르면서 신나게 뛰놀고, 야무지게도 잘 먹는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다들 흐뭇해합니다.
무대 위에 서서 마이크를 잡고 프로그램을 운영하지는 않지만 열심히 뒷바라지를 하고 있습니다.
어제는 동료 사제와 산더미처럼 쌓인 쓰레기를 분리 수거하면서, “어머니가 이 모습을 보시면
얼마나 슬퍼하시겠냐?”
“젊을 때 공부 열심히 안한 결과!”라는 둥 농담을 주고받으며 땀을 뻘뻘 흘렸습니다.
그러면서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 하나!
뭐든 거저 되는 것은 없다는 것,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것, 행사가 성공리에 치러졌다면, 반드시 누군가의 묵묵한 희생과 헌신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 조용히 땅에 떨어져 썩고 죽는 밀알 영성이 참으로 소중하다는 것!
아버지께서 부여하신 지상에서의 과제를 120퍼센트 완수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 앞에 남아있는 마지막 관문인 수난과 죽음의 길을 떠나시면서, 우리에게 남기시는 말씀의 핵심 키워드 역시 ‘밀알 하나’였습니다.
내어놓음이나 희생, 변화나 쇄신, 결국 죽음을 거부하는 밀알은 언제까지나 그저 한 알 밀알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기꺼이 자아를 포기하고 길을 떠날 때,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의 성장과 변화,
열매와 발전을 희망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이비 교주들이나 이단자들이 크게 강조하는 바가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고통을 건너뛰는 행복입니다.
희생이나 헌신없는 성공입니다. 말도 안되는 기적의 연출입니다.
십자가 길 대신 꽃길 보장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영광의 길에 참여하기 위해 수난과 죽음은 필수라고 강조하십니다.
두렵고 떨렸지만 점점 다가오는 죽음을 용감하게 수용하십니다.
내적인 갈등이 커질 때마다 아버지를 생각하고, 아버지께 의탁하며, 언젠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 드러날 아버지의 영광을 꿈꾸며, 얼마 남아있지 않은 당신의 여정을 힘차게 걸어가십니다.
제자인 우리들 역시, 스승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열심히 따라 걸어가야겠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한 배에 승선한 운명 공동체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운명은 곧 우리들의 운명입니다.
우리도 두려움을 떨치고 그분께서 선택하신 수난과 죽음의 길, 그러나 영광의 길을 기꺼이 선택해야겠습니다.
죽음은 오늘 제자들인 우리에게 다양한 형태로 다가옵니다.
고통이 극심할 때, 포기하고 싶어질 때는 ‘죽을 각오’로, 더 열심히 이 세상을 살아가야겠습니다.
미운 감정이 폭발할 때는 순교자의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고 용서해야겠습니다.
예수님 한분의 희생과 죽음으로 온 세상과 인류에게 구원이 다가왔듯이, 오늘 내 작은 희생과 헌신, 작은 죽음을 통해 작게나마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짐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오늘 이 작은 나의 희생과 봉사, 작은 죽음이 절대로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스승님의 십자가 길에 깊이 동참하는 사랑의 길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강론>
(2024. 8. 10. 토)(요한 12,24-26)
<나 자신이 구원받기 위해서 하나의 밀알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요한 12,24-26).”
1) 지혜서 저자는 의인들의 죽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시고, 그들이 당신께 맞갖은 이들임을 아셨기 때문이다. 그분께서는 용광로 속의 금처럼 그들을 시험하시고, 번제물처럼 그들을 받아들이셨다. 그분께서 그들을 찾아오실 때에 그들은 빛을 내고, 그루터기들만 남은 밭의 불꽃처럼 퍼져 나갈 것이다(지혜 3,2-7).”
이 말을 우리 교회의 순교자들의 순교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안 믿는 자들과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순교자들의 순교가 바보 같은 죽음으로만 보이겠지만, 순교자들의 순교는 결코 ‘인생이 끝나버리는 죽음’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서
새 생명을 누리게 되는 ‘영원한 인생의 시작’입니다.
바로 그것을, 우리 교회의 첫 순교자인 스테파노 순교자가 생생하게 증언했습니다.
“스테파노는 성령이 충만하였다.
그가 하늘을 유심히 바라보니,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예수님이 보였다. 그래서 그는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에 스테파노는,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였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하고 외쳤다.
스테파노는 이 말을 하고 잠들었다(사도 7,55-60).”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스테파노에게 당신의 모습을 보여 주신 것은, 스테파노를 ‘마중’ 나오신 것입니다.
박해자들은 자기들이 스테파노의 목숨을 끝냈다고 생각했지만, 스테파노는 하느님과 예수님의 환영을 받으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새 생명,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러니까 순교는 죽음이 아니라 새 생명의 시작입니다.
순교뿐만 아니라, 모든 충실한 신앙인들의 죽음은, 죽음이(끝이) 아니라 새 생명의 시작입니다.
믿음 없는 자들만이 죽음이라고(끝이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2) 바오로 사도는 지상에서의 인생을 ‘천막집’으로, 즉 임시 거처로, 하느님 나라에서의 새 인생을 ‘영원한 집’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 지상 천막집이 허물어지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건물 곧 사람 손으로 짓지 않은 영원한 집을 하늘에서 얻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이 천막집에서 우리는 탄식하며, 우리의 하늘 거처를 옷처럼 덧입기를 갈망합니다(2코린 5,1-2).”
신앙인의 인생은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집’을
향해서 가는 여행입니다.
그 ‘영원’을 생각한다면, 지금의 인생은 짧아도 아주 짧은 잠깐 동안의 일, 그냥 스치고 지나가는 순간일 뿐입니다.
3) 그 믿음을 바탕으로 해서 ‘밀알 하나’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읽으면,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라는 말씀은, “믿음 없는 사람들의 눈에는, 땅에 심어진 밀알이 죽은 것으로 보이겠지만, 그것은 죽음이 아니라 새 생명의 시작이고,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잠깐 거치는 과정일 뿐이다.” 라는 뜻입니다.
씨를 땅에 심는 일은, 그 씨를 죽이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땅에 심어도 아무 소용이 없는 씨가 있습니다.
이미 죽어버린 씨, 즉 생명력이 없는 씨는 땅에 잘 심고 가꾸고 돌본다고 해도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심기도 전에 이미 생명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열매를 맺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영적인 생명력’을 잃어버린 사람이 바로 그런 경우에 해당됩니다.
4) 예수님께서는 인류 전체를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 자신을 하나의 씨로 바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 자신’을 위해서 하나의 씨가 됩니다.
순교자들의 경우에도 일차적으로는 자기 자신의 구원을 위한 씨로 자신을 바치고, 그 다음에는 순교를 통한 신앙의 증언으로 다른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씨가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활동에 대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
나도 복음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1코린 9,23).”
자신이 그렇게 열정적으로 선교활동을 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자기 자신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도 실격자가 될 수 있음을
두려워했습니다(1코린 9,27).>
신앙생활은 ‘나 자신’의 구원을 위한 생활입니다.
큰일이든지 작은 일이든지 간에 어떤 일에 대해서
스스로 하나의 밀알이 되어서 희생한다고 해도, 그 희생도 사실은 일차적으로는 ‘나 자신’의 구원을 위한 희생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