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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不可知執受 處了常與觸 作意受想思 相應唯捨受
(4) 是無覆無記 觸等亦如是 恒轉如瀑流 阿羅漢位捨
이것이 초능변식(初能變識)인 이숙식(異熟識)은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고 하는데, 모든 종자(種子)를 다르게 성숙시키며, 유근신(有根身)·종자(種子)·기세간(器世間)을 요별(了別)함은 알 수 없고, 늘 촉(觸)·작의(作意)·수(受)·상(想)·사(思)와 상응(相應)하지만, 수(受)에서는 오직 불고불락(不苦不樂)의 사수(捨受)와만 상응한다. 따라서 이 이숙식은 무부(無覆)·무기(無記)인데, 촉(觸)·작의(作意)·수(受)·상(想)·사(思) 등도 이 식(識)과 같이 무부·무기이다. 이 이숙식은 흐르는 물처럼 늘 전개되지만, 아라한위(阿羅漢位)에서는 사라진다.
<약의>
제8식 즉 초능변식의 이름과 그 행상(行相)과 상응하는 심소(心所)와 3수(三受)와 4성(四性)과 이미 전개된 것과 아직 전개되지 않은 것의 모습과 의미 등을 밝힘으로써 앞의 물음에 답하고 있다.
제1구와 제2구 '初阿賴耶識 異熟一切種'은 제8식에 3가지 이름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첫째 이름은 아뢰야이다. 이것은 품고 있음[藏]을 뜻하는데, 3장(三藏)을 갖추고 있는 것이 이것의 자상(自相)이기 때문이다.
{성유식론}에서는, "초능변식은 대소승교에서 아뢰야라고 일컫는데 능장(能藏)·소장(所藏)·집장(執藏)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식은 더러움[雜染]과 더불어 서로 연(緣)이 되며, 유정(有情)이 집착하여 자아(自我)라고 여기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곧 초능변식의 자상이 인과(因果)를 유지시키는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이 식이 더러움[雜染]과 더불어 서로 연이 된다는 것은 능장과 소장을 풀이한 것인데, 종자를 지니고 있는 것을 능장이라 하고, 훈습(熏習)을 받는 것을 소장이라 한다. 또 유정이 집착하여 자아라고 여긴다는 것은 집장을 풀이한 것인데, 제7식이 늘 제8식을 자아라고 집착하고 있음을 말한다.
둘째 이름은 이숙(異熟)이다. 이것은 업(業)을 초래하여 과보(果報)를 만들 수 있음을 뜻한다.
{성유식론}에서는, "이것은 육도(六道)·사생(四生)으로 윤회하는 삼계(三界)의 모든 중생의 선하거나 선하지 못한 업과 그것의 이숙과(異熟果)를 만들 수 있다. 그래서 이숙(異熟)이라고 일컫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곧 초능변식 즉 제8식이 가진 결과를 낳는 행상 즉 과상(果相)을 나타내는 것이다.
셋째 이름은 일체종(一切種)이다. 이것은 종자를 받아들이고 훈습하고 유지하는 것이 초능변식의 원인으로서의 행상 즉 인상(因相)임을 말한다.
{성유식론}에서는, "이것은 제법(諸法)의 종자를 유지시켜서 잃지 않는다. 따라서 일체종이라고 일컫는다."라고 말한다. 이말은 곧 초능변식이 가진 원인으로서의 행상 즉 인상(因相)을 나타내는 것이다.
제3구와 제4구의 일부분인 '不可知執受處了'는, 이 식이 대상에 반연하는 행상(行相)은 유근신(有根身)과 종자(種子)와 처소(處所)에 비하여 미세하여, 종자·유근신·처소라는 요별의 대상과 이 식의 요별행상(了別行相)을 함께 알기는 어려움을 말한다.
{성유식론}에서는, "요(了)는 요별(了別)을 일컫는데 곧 이 식의 행상이다. 식의 행상이란 본래 요별이다. 처(處)는 처소(處所)를 일컫는데 곧 기세간(器世間)이다. 기세간은 모든 유정이 거주하는 장소이다. 집수(執受)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여러 종자와 유근신이다. 여러 종자(種子)라는 것은 여러 모습[相]과 이름[名]이 나누어짐[分別]에 의하여 형성된 습기(習氣)를 말한다. 유근신(有根身)이라는 것은 여러 색근(色根) 즉 눈[眼]·귀[耳]·코[鼻]·혀[舌]·육체[身]의 5가지 감각기관과 이들 감각기관이 의지하는 장소인 몸[有根身]을 말한다. 여러 종자와 유근신 두 가지는 이 제8식이 붙잡아[執] 받아들여[受] 거느림으로써[攝] 스스로의 체(體)라고 여겨 안전함과 위태로움을 함께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성유식론}에서는 또 전5식의 종자에는 붙잡아[執] 받아들여[受] 거느리는[攝] 행상이 없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종자와 유근신에 모두 붙잡아[執] 받아들이는[受] 행상이 있다고 하니, 이 두 주장은 어떻게 통할 수 있는가?
종자와 유근신에 붙잡아[執] 받아들이는[受] 행상이 있다는 것은 그 의미에 차별이 있다. 붙잡음[執]에 반연하여 거느림[攝]과 유지함[持]이 있게 되는데, 거느림[攝]은 <제8식이 종자와 유근신을> 스스로의 체라고 여기는 행상이고, 유지함[持]은 <제8식이 그 종자와 유근신을> 잃지 않는 행상이다.
제8식의 종자에는 오직 유지하는 행상[持]만이 있으며 거느리는 행상[攝]은 없는데, 이것은 종자가 드러나게 작용하는 것[現行法]이 아니고 숨어있는 것이어서 스스로 체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 받아들임[受]에는 인정(認定)함[領]과 인지(認知)함[覺]이라는 두 가지 작용이 있다. 인정함[領]이란 곧 대상[境]이라고 인정하는 작용이고, 인지함[覺]이란 그렇게 인정한 대상을 지각하는 작용이다. 제8식의 종자에는 대상이라고 인정하는 작용만 있을 뿐이지 즉 종자의 성립에는 대상이 전제되어 있을 뿐이지 대상을 인지하는 작용은 없다. 그것은 드러나게 작용하는 것[現行法]에만 지각하는 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성유식론}에서는, 전오식의 종자에는 거느림[攝]과 인지함[覺]이라는 행상이 없음을 이유로 하여, 붙잡아[執] 받아들이는[受] 행상이 없다고 한 것이고, 유지함[持]과 인정함[領]이라는 행상은 있으므로 붙잡아[執] 받아들이는[受] 행상이 있다고 한 것이다. 따라서 그 두 주장이 서로 통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유근신에는 거느림[攝]과 유지함[持] 및 인정함[領]과 인지함[覺]이라는 4가지 행상이 모두 갖추어져 있으나, 종자에는 단지 유지함[持]과 인정함[領]이라는 2가지 행상만이 갖추어져 있으며, 기세간에는 대상[境]이라고 인정하는 작용인 인정함[領]이라는 이라는 행상 1가지만 있다.
'알 수 없다'[不可知]라고 하는 것은, 유근신·종자·기세간의 이러한 4행상들이 지극히 미세하여 알아차리기 어렵다는 말이고, 안으로는 대상을 붙잡아[執] 받아들이는[受] 행상이 미세하고, 밖으로는 기세간[處]이 광대하여 역시 알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모습[相]과 이름[名]의 나눔[分別]에 의하여 습기(習氣)가 형성된다는 것에서, 모습[相]은 반연되는 객관[相分]이며, 이름[名]은 반연하는 주관[見分]이며, 나눈다[分別]는 것은 주관의 나누는 작용[能分別]과 객관의 나누어지는 작용[所分別]을 가리키니, 이러한 주관·객관의 나누는 작용에 의하여 업종자(業種子)가 훈습되여 만들어진다. 따라서 습기는 곧 종자이다.
모든 색근(色根)과 색근이 의지하는 곳[根依處]이라는 것에서, 근(根)은 곧 승의근(勝義根)이니 보고·듣고 할 수 있음을 가리키고, 의지하는 곳[依處]은 곧 부진근(浮塵根)이니 눈·귀등 형태를 갖춘 것이며, 이것들은 제8식이 반연하는 대상이다. 오직 종자·유근신·기세간만이 미세하여 헤아리기가 어렵다. 따라서 '알 수 없다'[不可知]라고 한 것이다.
제4구에서 제6구까지 '常與觸作意受想思相應'은, 6위(位)의 심소 가운데에서 오직 이들만이 변행위( 行位)임을 말한다.
{성유식론}에서는, "아뢰야식은 시작없는 때로부터 현행식(現行識)으로 전개되기 이전[未轉]까지 모든 위(位)에서 이 5심소와 늘 상응한다. 이것은 변행심소( 行心所)이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이 장식(藏識)은 시작없는 때로부터 제8지(第八地)에 이르기까지를 미전의(未轉依)라 하고, 전7지(前七地) 가운데에서와 3현(三賢)과 6도(六道)에서는 일체위(一切位)라고 하는데, 모든 위(位) 가운데에서 늘 이 5심소와 상응한다. 이것은 5심소에 변행이라는 속성이 있기 때문인데, 5심소는 장식과 더불어 일체위에 두루하는 것이다.
{성유식론}에서 말하는 촉(觸)은, 6근(六根)·6경(六境)·6식(六識) 3자가 조화하여 분별이 생기도록 하는 것으로서, 심왕(心王)과 심소(心所)로 하여금 대상[境]에 접촉하도록 하는 것이 그 본성이며, 수(受)·상(想)·사(思) 등이 촉(觸)에 의존하여 성립되니 이것이 촉의 작용[業]이다. 촉과 심소는 근·경·식 3법이 화합하고 변화하여 생겨나며, 다시 심법(心法)과 심소법(心所法)으로 하여금 경계(境界)에 접촉하도록 하는 것이 촉의 본성이며, 수·상·사 등이 촉에 의존하여 생겨나는 것이 촉의 작용이다.
{성유식론}에서 말하는 작의(作意)는, 경계(警戒)할 수 있는 마음이 그 본성이고, 반연(攀緣)된 경계에로 마음을 이끄는 것이 그 작용이다. 마음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을 때 경계(警戒)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작의의 본성이고, 마음이 이미 일어난 후에는 그 마음을 이끌어 경계(境界)에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작의의 작용이다.
{성유식론}에서 말하는 수(受)는, 순경(順境)·위경(違境)·비순비위경(非順非違境)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 본성이고, 경계(境界)에 대해 애착심을 일으키는 것이 그 작용이다. 순경(順境)을 받아들임을 낙수(樂受)라 하고, 위경(違境)을 받아들임을 고수(苦受)라 하고, 비순비위경(非順非違境)을 받아들임을 사수(捨受)라 하는데, 이들 3수(三受)가 바로 수의 체성(體性)이다. 수는 의지하기를 바라는데 바라는 것은 곧 좋아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애착심을 일으키는 것이 수의 업용(業用)이라고 하는 것이다.
{성유식론}에서 말하는 상(想)은, 경계(境界)에 대하여 상(像)을 취하는 것이 그 체성(體性)이고, 여러 가지 말[言語]을 만드는 것이 그 업용(業用)이다. 상(想)의 힘으로 말미암아 경계에 대하여 상(像)을 취하니 이것이 상(想)의 체성이고, 말을 만들어 세우니 이것이 상(想)의 업용이다.
{성유식론}에서 말하는 사(思)는, 마음으로 하여금 조작(造作)하게 하는 것이 그 체성이고, 선품(善品) 등에서 마음을 부리는[役] 것이 그 업용이다. 조작은 곧 생각하고 헤아리는 것이니 사의 체성이며, 심·심소를 부리는 것이 사의 업용이다.
{성유식론}에서는, "이 촉 등 5가지는 이숙식과는 비록 행상이 다르지만 때와 의지함이 같으면 반연된 것[所緣事]이 같아지므로 상응한다고 한다."라고 한다.
행상이 다르다는 것은, 식의 행상은 경계(境界)를 요별하는 것이지만, 촉의 행상은 마음으로 하여금 경계(境界)에 접촉하게 하는 것이고, 작의의 행상은 경계(警戒)하는 마음이고, 수의 행상은 경계(境界)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상(想)의 행상은 상(像)을 취하는 것이고, 사의 행상은 조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때와 의지함이 같으면 반연된 것[所緣事]이 같아지므로 상응한다는 것은, 일[事]이 같고 장소[處]가 같고 때[時]가 같고 의존하는 것[所依]이 같음으로 말미암아 상응(相應)한다고 한 것이다.
제6구 '相應唯捨受'라고 한 것은, 고락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상응이라는 두 글자는 앞구절과 뒷구절에 함께 걸려 있다.
{성유식론}에서는, "이 식의 행상은 극히 불명료하여 위경과 순경을 분별할 수도 없고 미세하게 한 종류로 서로 이어 전개하여 나아간다. 이 까닭에 오직 사수(捨受)와만 상응한다."라고 한다.
사수는 5상(五相)을 갖추고 있는데 제8식의 행상과 모두 같다. 이 때문에 당연히 상응하는 것이다. 첫째는 밝게 요별하지 못하는 것이니 지혜로운 생각이 없기 때문이고, 둘째는 분별하지 못하는 것이니 연(緣)이 경계(境界)에 알맞기 때문이고, 셋째는 미세함이니 그 모습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고, 넷째는 한 종류이니 바뀌어 달라짐이 없기 때문이고, 다섯째는 서로 이어 전개해 나아가는 것이니 끊어짐이 없기 때문이다.
제7구 '是無覆無記'라고 한 것은, 이 식이 4성(四性) 가운데에 오직 한 성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성유식론}에서는, "이 식은 오직 무부무기(無覆無記)의 이숙성(異熟性)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부(覆=덮다)란 염법(染法=물든 법)으로서 성도(聖道)에 장애가 되고 마음을 덮어서 깨끗하게 되지 못하게 한다. 그런데 이 식은 염법이 아니기 때문에 무부(無覆)라 한다. 무기(無記)란, 선인(善因)·악인(惡因)에 대한 애과(愛果)·비애과(非愛果)는 기별(記別=예측)할 수 있는데, 이 識은 선악이 아니기 때문에 무기(無記)라고 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이 제8식은 무루종자(無漏種子)를 지니고 있으므로 성도(聖道)에 방해가 되지 않고 진여(眞如)의 의지처가 되며, 마음을 가리지도 않으므로 무부(無覆)라고 한다. 애과(愛果)는 선인(善因)의 과보(果報)이고 비애과(非愛果)는 악인(惡因)의 과보(果報)인데, 선인·악인은 모두 그 힘이 강하여 이와 같이 기별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식은 선악이 아니므로 기별되지 않는다[無記]고 한 것이다.
제8구 '觸等亦如是'라고 한 것은, 심왕과 심소가 모두 그 성질이 같기 때문이다.
{성유식론}에서는, "아뢰야식이 오직 무부무기인 것처럼 촉(觸)·작의(作意)·수(受)·상(想)·사(思) 역시 무부무기이다. 모든 서로 응하는 법[相應法]은 반드시 그 성질을 같이하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제9구 '恒轉如瀑流'라고 한 것은, 체(體)는 끊어져 없어지지도[斷] 않고 영원히 변함없이 존속하지도[常] 않는 것으로서, 비유하면 마치 흐르는 물과 같다는 것이다.
{성유식론}에서는, "항상[恒]이란 끊어짐이 없다는 말이고, 전개된다[轉]란 변함없지 않음을 나타낸다. 흐르는 물과 같다는 것은 인과법(因果法)이 그러하다는 말이다."라고 한다.
제10구 '阿羅漢位捨'라고 한 것은, 처음에는 말[名言]만 버리고 이숙식과 종자는 최후에 버리기 때문이다.
{성유식론}에서는, "번뇌장(煩惱障)이 모두 끊어졌을 때를 아라한이라고 하는데, 이때 이 식(識)은 번뇌추중(煩惱序重)에서 영원히 멀어지는데, 이 때문에 버린다[捨]라고 한다."라고 한다.
수행자가 처음에 예류과(預流果)에 들어가서는 아직 번뇌가 다 없어지지는 않으므로 아라한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모든 번뇌가 다 사라지고 난 이후에야 비로소 그를 아라한이라고 부른다. 아라한이란 무생(無生)을 의미하는데, 번뇌가 생기지 않는다는 말이다. 추중(序重)은 곧 종자(種子)이다. 이 식이 품고 있는 잡염종자(雜染種子)가 모두 사라지기 때문에 버린다[捨]라고 한다.
이와 같이 초능변(初能變)의 모습을 설명했다. 제2능변(能變)은 그 모습이 어떠한가?
송에서 말한다.
첫댓글
잘 몰라서 묻는 것인데
유식학에 8식이 끝입니까? 아니면 더 있습니까?
이를테면 9식, 10식, 11식....이런 식으로요
8식만으로는 아무래도 허전해 보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