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10월26일 [(녹)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제1독서 에페소서 4,1-6
복음 루카 12,54-59
◈ [서울]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2018년 나해 10월26일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예전에 우리 조상들은 ‘홍익인간’, ‘세속오계’, ‘삼강오륜’과 같은
가치를 배웠습니다. 이는 우리 조상들이 사회를 유지하고 이끌어가는
윤리와 도덕의 지침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렵고 힘든 문제가 생기면
이와 같은 가르침을 생각하면서 삶의 척도로 삼았습니다.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는 삶, 아내와 남편, 부모와 자식, 임금과 신하, 친구와
친구,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왔습니다. 지금은 많이 퇴색되었지만, 이런 가르침은
우리민족을 하나로 통합하고, 정이 넘치면서도 질서가 있는 사회가
되도록 이끌었습니다.
빌 게이츠는 세계에서 가장 큰 부자입니다. 그는 부자에도 3가지
부류가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첫째는 자신의 부를 유지하기 위해서
돈을 쓰는 사람입니다. 기업을 확장하고, 새로운 투자를 통해서 부를
키우는 사람입니다. 둘째는 자신의 부를 이웃들과 나누는 사람입니다.
자선사업을 하고, 자신의 재산을 가족들에게 상속하지 않고, 사회에
환원하는 사람입니다. 셋째는 자신의 부를 호화로운 생활을 위해서
사용하는 사람입니다. 요트를 사고, 비싼 차를 사고, 궁궐 같은 집을
사는 사람입니다. 부자라고 해서 다 같은 부자가 아니라고 말을
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라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신앙인들은 모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인내와 겸손으로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요즘의 학생들은 이런 가치와 신념을 배우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학교는 삶의 지혜를 깨우치고,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풀고, 암기하는 곳으로 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많은 사람들이 대학을 졸업했어도, 예전에 많이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쉽게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들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세례를 받고 신앙인이 되었다는 것은 이제 삶의 새로운 가치와 원리를
배운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명확하게 정리 해 놓은 것이 예전에
배웠던 ‘교리문답’입니다. 그 첫 번째는 이렇습니다. ‘사람은 하느님을
믿고 알아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태어났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 주셨다. 이제 하느님을
찬미하는데 유익하면 그것들을 사용할 것이고, 하느님을 찬미하는데
유익하지 않으면 버릴 것이다. 하느님을 위해서라면 부귀보다 가난을
택할 수도 있고,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도 있고, 장수보다 단명을
택할 수도 있다. 이제 삶의 목적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간결하면서도 우리들이 살아가야 할 방향을 정확하게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쁘신 중에도 늘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내면의 소리,
참된 자아의 소리를 들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구름이 서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오겠다.’하고 말합니다. 과연 그대로 됩니다. 또
남풍이 불면 ‘더워지겠다.’라고 말합니다. 과연 그대로 됩니다.
여러분은 하늘과 땅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릅니까? 여러분은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합니까?”
믿음, 소망, 사랑이 우리를 참된 식별에로 인도해줄 것입니다. 세상의
뜻을 헤아리는 만큼, 하느님의 뜻을 찾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외모를
가꾸려는 마음만큼, 내면의 정신을 키우라고 하십니다.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는 만큼, 어떻게 살아야 될까를 고민하라고 하십니다. 재산을
늘리려고 노력하는 만큼, 하늘에 보화를 쌓도록 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자연과 환경을 생각하고, 가난한 이들과 연대하며, 모두가 건강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소중한
일들입니다. 매일의 삶에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 중에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아야 하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진리는 자명(自明)하다
2018년 나해 10월26일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진리는 자명(自明)하다>
복음:루카 12,54-59
오늘은 이번에 나오게 될 책에 대한 홍보도 할 겸 책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하려 합니다(제목은 ‘나는 왜 교회를 믿는가’입니다). 특별히
진화론과 창조론에 대한 내용입니다.
‘진화론’이 절대 진리가 될 수 없음에도 학교에서도 가르치고 또 많은
사람들이 진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진화론자들의 주장으로는 진화가
일어나는 목적이 ‘생존’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가장 진화하여 가장
생존력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가장 진화한 인간이 생존력이 가장
떨어집니다. 인간은 거의 20년을 부모의 보호를 받으며
성장해야합니다. 그 이전에 독립하려하면 굶어죽기 십상입니다.
그리고 또 이웃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기도 합니다. 이런
면에서 생존력이 가장 큰 것들은 기생충이나 모기와 같은
하등동물입니다. 이것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자립합니다. 고등동물로
올라올수록 사랑이 증가하고 그래서 양성생식을 하며 자신의 새끼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도 합니다. 이렇게 고등동물은 생존이 아니라
사랑을 위해 진화하였습니다. 사랑하면 이 세상에서는 나누어주고
목숨까지도 바쳐야하기 때문에 생존 가능성이 떨어집니다. 예수님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알아가며 ‘이런 명확한 사실도 왜
그동안 알지 못했을까?’ 저 자신도 신기했습니다.
사막 위에 스마트폰이 떨어져 있다면 그것이 저절로 진화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는 자연의 법칙과 어긋납니다. 자연계의
모든 것들은 스스로 더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죽고 썩고 허물어집니다.
오직 진화론만 이 자연법칙에 어긋나는 주장을 합니다. 모래가 모여
스마트폰이 되고 돌이 모여 저절로 도시가 되었다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더 신기한 것은 이런 주장을 안 믿는 사람보다 믿는 사람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에 반해 과학적으로는 말이 안 된다는 창조론은 의외로
자연법칙을 따릅니다. 남녀가 사랑하여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에 세상의 생명체를
탄생시키셨다는 창조론과 일치합니다.
그리고 동물과 같은 수준의 아기를 부모님이 사랑으로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참 인간으로 새로 태어나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도
당신 사랑으로 인간을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게 하십니다.
그리고 아기가 믿음으로 부모가 원하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처럼,
우리도 믿음으로 하느님께서 원하는 방향으로 성장합니다. 사랑은
사랑받지 못하면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랑으로 자녀를 인간답게
만들 수 있는 인간인 부모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면, 사랑으로
인간을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게 만들 수 있는 분은 왜 믿으려하지
않을까요?
왜 우리는 하늘과 땅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다가오는 죽음에
대해서는 이리도 무심한 것일까요? 왜 우리는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오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또 남풍이 불면
‘더워지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스스로 조금만 생각해도 무엇이 진리이고
아닌지를 알아들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비가 오는 것을 예측하는 것도, 또 더워질 것을 예측하는 것도 모두
어떤 자연의 ‘법칙’에 지배받고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우리가 가장
기본적인 ‘법칙’을 알고 있으면 그것의 응용을 통해 다른 것들도
예측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자연법칙은 아이들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자명하고 단순합니다. 명확하지
않다면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는 어린이도 이해할 수 있어야합니다.
예수님도 진리를 어린이와 같은 이들에게 드러내 보이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린이처럼 단순해지면 하느님이 계실 수밖에 없음을 믿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어른으로 자신의 욕구대로 죄를 짓고 살고 싶기
때문에 하느님이 계시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선적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결국 자아의 욕구를 따라 살고 싶은지, 아니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고 싶은지에 따라 진리를 진리로 보거나, 진리를
왜곡하여 거짓을 진리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는 이미 우리에게 다 주어져있습니다. 쉽고 단순하고 자명하여 온
천지가 그 증거가 되지 못하면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그래서 온
세상 존재하는 모든 만물이 하느님의 존재를 증거하고 주님을
찬미하고 있는데 인간만이 주님이 계심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직
어린이와 같은 이들만 어떻게 주님이 계시지 않을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만약 나의 삶도 어린이처럼 깨끗해지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며 진리는 진리이고 하느님은 하느님임을 보게 될 것입니다.
http://www.수원교구영성관.com/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원] 하느님과 이웃과 화해! / 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8년 나해 10월26일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복음: 루카 12,54-59: 법정으로 가는 길에서 화해하도록 힘써라
오랜 경험으로 사람들은 어떤 현상이 일어나면 그것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안다. 언제 비가 내리고 폭풍이 불지를 예측한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날씨를 미리 알고 폭풍을 예고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장차 일어날 중요한 일을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신다. 중요한 일이란 마지막 시대에 만인의 구원을
위해 당신을 희생으로 바치시는 것이다.
이 위대하고 값진 구원의 수난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이루어진다.
이제 그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문이 활짝 열리고 그들은
넘치는 행복을 누릴 것이다. 아가서에서 우리는 신부를 부르시는
그리스도를 만난다. “나의 애인이여, 일어나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 와주오. 자, 이제 겨울은 지나고 장마는 걷혔다오.
땅에는 꽃이 모습을 드러내고 노래의 계절이 다가 왔다오.”
(아가 2,10-12)
여기서 신부는 교회이며 그분을 믿는 이들에게는 봄기운이 다가오고
있다.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해 준 징조들을 통해 이 시대의 본질을
알았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서도 또한 걸맞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재판관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
주님께서는 우리 목숨이 다하기 전에 죄와 형벌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늘 깨어있어야 한다고 하셨다. 우리는 모두 죄를 지은
자들이다. 아직 재판관에게 가기 전에, 즉 살아있을 때에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를 온갖 빚과 형벌에서 자유롭게 해 주고, 온갖
두려움과 번민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주님의 은총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의 더러움을 씻지 않으면, 결국 재판관 앞에 서서 판결을 받고,
아무도 피할 수 없는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해 합당한 벌을 받을 것이다. 재판관은 우리를 옥리에게 넘기고
옥리는 우리를 감옥에 가둔다. 내가 지은 죄에 대한 대가를 모두
치루기 전에는 결코 나올 수 없고, 옥리도 내보내지 않을 것이다. 이
형벌을 면해줄 수 있는 분은 오직 주님뿐이시다.
살아있는 동안에 죄를 벗어버리고 변화되지 않으면 우리의 죄가 오백
데나리온이건, 오십 데나리온이건 탕감 받을 자격이 없다. 그러므로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루카 7,48)는 말을 들을 자격이 없다. 우리는
감옥에 갇혀 징벌을 받는 것으로 빚을 갚아야 할 것이다. 거기서
‘마지막 한 푼까지’ 갚지 않으면 결코 나오지 못할 것이다. 진정한
변화를 우리가 살아있을 때 이루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변화하지 않아 하느님께 죄를 짓게 되면 우리를 재판관에게
넘겨 재판관이 우리를 옥리에게 넘기게 하는 고발자는 누구일까?
우리는 빨리 그를 찾아 합의를 봐야한다. 그 고발자는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며 올바로 살 수 있을 때, 우리는
하느님께 죄를 즉 빚을 지지 않는다. 하느님의 말씀에 따르는 삶을
살도록 하자.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수도회] 나는 주님으로 인해, 주님 때문에, 주님을 위하여 옥에
갇혀있습니다!
2018년 나해 10월26일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나는 주님으로 인해, 주님 때문에, 주님을 위하여 옥에 갇혀있습니다!
한 때 잘 나가던 사람들, 그릇된 방법으로 권력을 손에 쥔 것도 모자라,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하던 사람들의 부끄러운 실체가 만천하에
낯낯이 드러나는 모습을 보면서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적절치 않은 공권력 행사, 상상을 초월하는 공금횡령과 착복, 공문서
위조 등으로 수인(囚人)이 되어 ‘큰집’으로 향하는 모습은 참으로 보기
민망합니다. 고개를 푹 숙이고, 큰 마스크에, 수갑찬 손을 가리고...
참담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정 반대 모습의 수인들도 있었습니다. 군사력을 동원한
불법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찬탈한 군부 독재자들의 철권 통치
아래서나, 무자비하고 잔악했던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 청춘과 목숨을 바쳤던 민주화 인사들, 독립투사들 역시
똑같은 수인 신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재판받고 투옥되는 과정에서도 얼굴이 빛이 났습니다.
태도 역시 당당했습니다. 자신의 그릇된 행실이나 사욕으로 인해
수인이 된 것이 아니라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일하다가 수인이 되었기에
그런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유다인들에게 눈엣가시처럼
여겨졌던 그는 공공의 적이었습니다. 틈만 나면 협박당했으며
고소당했습니다. 투옥되고 수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옥중에서도 그
얼굴이 충만한 기쁨으로 빛났습니다. 놀라운 사실 한 가지! 옥에 갇힌
것을 둘도 없는 큰 영예로 여기고, 세상 사람들 앞에 크게
자랑했습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
주님으로 인해 옥에 갇혔기 때문입니다. 생의 전부요, 삶의 시작이요
끝이며, 불멸의 연인이신 주님으로 인해 수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형제 여러분, 주님 안에서 수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에페소서 4장 1절)
청소년 교정 사목에 협조하던 시절이 기억납니다. 수인이 된 괴로움은
참으로 큰 것이었습니다. 사방 모든 것이 제한적입니다.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은 단 1퍼센트도 없습니다. 늘 누군가의 지시를 받아야 하고
시선을 의식해야 합니다. 자연스레 몸과 마음이 크게 위축됩니다.
어쩔 수 없이 맞이한 현실을 도무지 수용할 수 없다보니, 틈만 나면
분노하게 되고, 그 분노가 폭발하게 됩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를 한번 보십시오. 그런 열악한 옥중 생활 속에서도
오히려 바깥에 있는 우리를 걱정합니다. 사목자로서 옥중에서 조차
방황하는 양떼를 위해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버지의 마음으로 여러
교회에 일일이 사목서한을 집필합니다. 옥중 편지여서 그런지 편지의
내용이 너무 절절하고 귀중하고 명문장입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에페소서 4장 1~3절) (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도회]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루카 12, 57)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8년 나해 10월26일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루카 12, 57)
우리의 시대와 우리의 삶은 결코 무관할 수 없습니다.
온 힘을 다하여 불타올랐던 단풍이 우수수 떨어져내립니다.
단풍은 목적지를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누구나 알지만 실천하지 않기에 누구나 모르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르는 시대는 더욱 더 우리를 복잡한 사람으로 만들어
단순한 표징조차 내면화시킬 수 없는 영적 불구자로 만들었습니다.
서두르지만 빠르게 갈 수 없고 분주하지만 열매가 하나도 없습니다.
심장과 영혼의 주인을 잊고 산 아픈 결과입니다.
올바른 삶이란 빼앗는 삶이 아니라 기쁘게 나누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면서 너무도 아무렇지않게
살아온 지난 시간을 아프게 반성합니다.
시대의 징표는 가장 가까운 우리의 양심에서 요동치고 있습니다.
징표는 올바른 우리의 실천으로 구체적인 빛과 길이 될 것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기타] 10월 26일(금) - 긍휼히 여기는 자
오늘은 “긍휼히 여기는 자”에 대해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 7절 말씀에 “긍휼이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긍휼이란 한없는 사랑과 한없는 보호와 한없는 위로가 모여 총체적인
포괄적 사랑을 말합니다. 이를 표현으로 말하면 갓난 아기의 엄마
모습이나 죽음을 앞 둔 자를 향한 가족의 그 애절한 표현을 말하면
이해가 되겠습니까?
이와 같이 긍휼은 한없는 사랑과 보호와 위로를 보내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바로 이러한 모습을 보내는 성도는 그대로 다시 되돌아와
자기도 이와 같은 은혜를 체험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 충성된 성도를 향해서도 이와 같은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이유 없이 조건 없이 주고 싶어 하는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이들에게 이러한 긍휼의 사랑이 그 자신과 그
가정과 그 직업과 그 삶의 한없는 은혜로 표현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러한 긍휼을 원하십니까? 주위에 모든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는 성도가 되십시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 [청주] 나는 아니야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8년 나해 10월26일 연중 제29주간 금요일(루카12,54-59)
나는 아니야
어르신들은 지혜가 많으신 분입니다. 많이 배우지 못해 지식은
풍부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분도 삶의 경험에서 나오는 지혜는 늘
차고 넘칩니다. 제비가 낮게 날고 있는 것을 보면서 비가 올 것을
예상했고, 개미의 움직임을 보면서 장마에 대비했습니다. 서쪽에서
밀려오는 구름을 보고 비를 예상하고 남풍이 불면 더위를 맞을 준비를
했습니다. 이렇게 지혜 있는 사람들은 자연의 징조를 읽어냈고 거기에
맞는 대책을 마련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상의 지혜에 밝은
사람들도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무지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기적들과 가르침을 통해서 하느님나라의 도래를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거기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아니
관심 부족이 아니라 외면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을 바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옛 생활 방식을 유지하고,
기득권을 누리고 싶었기 때문에 시대의 뜻을 올바로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시대의 징표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알면서도 이해하지 못하는 체하였습니다. 그래서 위선자라는
소리까지 들었습니다. 시대의 뜻은 겉모양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새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나 환경이 바뀌기를
기대하지 말고 먼저 내가 변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환경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세상의 어둠을 탓하기보다 하나의 촛불을 밝히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 첫 번째 할 일을 오늘 복음은 알려주고
있습니다. 재판관에게 가기에 앞서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
(루카12,58)는 것입니다. 화해를 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재판정에
서서 판결을 받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예수님께서는“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마태5,24) 고 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화나는 일이
있더라도 죄를 짓지 마십시오. 해 질 때까지 화를 풀지 않으면
안됩니다”(에페4,26)권고 합니다. 더더욱 판결을 받아 감옥에 가게
되면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올 수 없을 것”
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어떤 말씀이든 ‘나는 아니야’ 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어떤 말씀이나 강론을 들으면 “저
얘기는 아무개를 두고 하는 얘기야!” “그 사람이 들어야 하는데”
하고 자기와는 상관없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대의 징표를
읽는 사람은 “모두가 나를 두고 하는 말씀이야!”하며 자신을 돌아보고
다시 시작합니다. “이 시대는 하느님을 잊어가는 시대입니다.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정신이 아주 사소한 틈새까지 파고들어 우리를
정복하려고 들고 그에 따라서 우리는 더욱 영적인 사정에 둔감해지는
시대입니다.(함께야)”
이런 시대를 올바로 분별하려면 세상의 지혜를 찾지 말고 주님의 뜻을
잘 헤아려야 하겠습니다. 사실 우리는 심판의 마지막 날이 언제 올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 이순간은 회개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진정한
변화를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입니다. 그러므로 한
순간도 헛되이 하지 않기를 빕니다. 단풍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곧
나뭇잎을 떨어뜨리며 겨울을 맞이할 것입니다. 아름다움의 절정에는
내려놓아야 할 과정이 포함되어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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