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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수가좋다오 원문보기 글쓴이: (一麥.)
죽음을 이긴 부활 고린도전서 15장 55-58절 / 이성희 목사 “7. 내가 칙령을 밝히 보이리라. {창조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이 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8. 내게 구하라. 그리하면 내가 이교도들을 네게 상속물로 주고 땅의 맨 끝 지역들을 네게 소유물로 주리라. 9. 네가 그들을 철장으로 부수고 토기장이의 그릇같이 산산조각 부수리라, 하셨도다.”(시편2편7-9절) “55. 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오 무덤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56.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힘은 율법이니라. 57.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는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을 넘치게 하라.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너희가 아느니라.”(고전15:55-58) 세상에는 무덤을 자랑하는 종교가 있습니다. 이슬람에서는 모하멧의 무덤을 자랑합니다. 또 많은 위인들의 무덤을 자랑하기도 합니다. 세계적 위인들의 무덤을 가는 곳마다 한번쯤은 가보기도 합니다. 심지어 죽은 사람을 아예 살아 있는 것처럼 만들어놓은 곳도 있습니다. 죽고 나서 시신을 산 사람처럼 만들어놓은 사람이 네 사람입니다. 레닌, 모택동, 호치민, 김일성입니다. 저는 이 네 시신을 다 보았습니다. 존경스럽기보다는 불쌍한 생각이 듭니다. 제대로 죽지도 못한 사람들입니다. 기독교는 무덤을 자랑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시신을 자랑하는 종교도 아닙니다. 기독교는 시신도 무덤도 없는 종교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무덤이 빈 것을 자랑하는 종교입니다. 죽음이 아닌 생명의 종교입니다. 시신이 아닌 부활의 종교입니다. 칼 바르트는 “부활절과 성탄절의 설교는 짧으면 짧을수록 좋다. 왜냐하면 이는 설명할 필요가 없는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이다”고 하였습니다. 부활은 가정이 아닙니다. 신화가 아닙니다. 부활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래서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신약성경에는 부활에 관한 말씀이 204회나 언급이 되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17-19에는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 합니다. 부활이 없으면 불쌍합니다. 왜냐하면 생명도 헛되고, 우리가 믿는 것도 거짓이고,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전 세계의 60억 이상의 인류 가운데 3분의 1 이상이 부활을 믿고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인 주일을 공휴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만 봐도 예수님의 부활이 알게 모르게 인류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예고를 세 번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오랜 후가 아니라 사흘 후에 부활하셨습니다. 당시인은 누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이렇게 증언합니다. “부활이 없다면 거짓말하는 자가 되었으리라.” 예수님의 부활은 승리의 소식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승리인 것을 다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첫째,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을 이기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잡히심, 죽음, 십자가 이 모두가 초라해 보이기까지 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잡히시고 고난당하실 때는 예수님의 편이 없이 모두 적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제자들까지 배반하고 도망갔습니다. 이제 그 도는 완전히 망하고 끝난 줄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세상의 승리요, 유대인의 승리요, 군중의 승리요, 빌라도의 승리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예수님만이 승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막으려고 애썼던 사람들, 훔쳐갔다고 거짓말을 유포한 사람들, 기절했다가 깨났다고 증거한 사람들 이 모두가 패배자입니다. 예수님은 패배와 같아 보이는 승리를 하셨습니다. 누가 봐도 예수님이 졌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예수님이 이기셨습니다. 세상과 예수님의 갈등은 성경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요한복음 1:10에는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부터 세상이 알아주지 못했고 싫어했습니다. 요한복음 15:18에는 예수님께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고 하십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미워합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6:33에는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고 합니다. 세상이 등지고 미워하지만 종래는 예수님이 승리하십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세상을 이기고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번도 세상에 진 적이 없습니다. 운동 경기에서 최후의 승자가 승자입니다. 권투에서도 몇 차례 쓰러졌다가 마지막 한방으로 상대를 쓰러트립니다. 다른 경기에서도 흔히 “다 이긴 경기를 내줬다”고 합니다. “다 진 경기를 이겼다”고도 합니다. 때로는 “지옥까지 갔다 천당에 올라갔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최후 승리를 얻으신 분입니다. 시편 2:9에는 “네가 그들을 철장으로 부수고 토기장이의 그릇같이 산산조각 부수리라, 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권세는 세상의 모든 것을 질그릇같이 부수십니다. 세상이 아무리 힘이 있다고 하더라도 질그릇 밖에 되지 않습니다. 세상에 어떤 권세가 예수님을 핍박하고 끝까지 승리했습니까? 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잔해하였지만 교회는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네로를 비롯한 로마의 황제들이 기독교를 박해했지만 기독교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로마제국이 기독교 말살정책을 썼지만 교회는 더 든든해졌습니다. 독일의 히틀러가 기독교를 없이하려고 했지만 기독교는 세상에 존재합니다. 공산주의가 종교를 아편이라고 하여 기독교를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일본제국주의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순교자를 많이 냈지만 순교의 피는 복음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붉은 용의 세력은 산산조각이 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부활의 힘입니다. 부활의 능력입니다. 맥스 루케이도는 그의 책에서 “우리는 세상에 적합하도록 창조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에서 절대로 완전한 만족을 누릴 수 없습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미워하도록 지어졌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기게 하십니다. ➤요한일서 5장4절에는 “무엇이든 하나님에게서 난 것은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이니라.”고 합니다. 우리의 이김의 근거가 어디 있습니까? 믿음입니다. 믿음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부활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부활로 이깁니다. 부활은 예수님의 승리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승리입니다. 부활을 근거로 하는 신앙을 가진 우리는 최후의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의 권세를 이길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부활은 죄의 권세를 이기신 사건입니다. 죄는 인간의 영원한 적입니다. 죄는 인간의 죽음의 원인입니다. 쉴 새 없이 밀려오는 악의 파도가 죄를 실어옵니다. 악은 성난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악은 쓰나미처럼 우리를 괴롭힙니다. ➤로마서 6:23에는 “죄의 삯은 사망이나 [하나님]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해 얻는 영원한 생명이니라.”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합니다. ➤에스겔 18장4절에는 “보라, 모든 혼은 내 것이라. 아버지의 혼과 마찬가지로 아들의 혼도 내 것이니 죄를 짓는 혼, 그 혼은 죽을지니라.” “범죄는 영혼은 죽으리라”고 합니다. 아담의 범죄로 사망이 왕 노릇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평생을 따라다니는 노골적이고 치명적인 짧은 단어가 ‘죄’입니다. ➤로마서 4:25에는 “그분께서는 우리의 범죄로 인하여 넘겨지셨으며 우리의 칭의를 위하여 다시 일으켜지셨느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시고 사신 것입니다. 천로역정에는 그리스도인이 인간의 마음을 상징하는 큰방에 들어갑니다. 그 방은 죄를 나타내는 먼지로 덮혀 있습니다. 그가 법을 상징하는 큰 빗자루로 먼지를 쓸어내려고 비질을 합니다. 그런데 먼지를 쓸어내기는커녕 오히려 더 먼지를 일으킵니다. 이것이 우리가 법에 따라 살려고 할 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죄를 쓸어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를 자극시키는 것입니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라고 찬양합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라고 찬송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자기를 추구합니다. 자기중심적으로 삽니다. 죄를 다스릴 능력을 상실하고 삽니다. 루터는 자기를 추구하는 것이 죄라고 하였습니다. 테레사 수녀에게 어떤 언론인이 물었습니다. “당신도 고해를 하십니까?” “물론, 저도 매주 고해하러 간답니다.” “당신이 고해를 해야 한다면 하나님은 지나친 요구를 하시는 분이시군요.” 아무리 의인이라도 참회할 일은 있습니다. 사람은 죄와 더불어 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당대의 의인이라고 하는 욥도 고통을 다 이긴 다음에 티끌과 재 가운데서 한하며 회개한다고 하였습니다. 어느 수도원에 갔을 때 나이가 많은 할아버지 수도사 한분을 만났습니다. 그 수도사는 수도원에 들어와 수도사가 된지 53년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 수도사가 저에게 자신의 “죄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너무 의아해서 물어보았습니다. “수도원에서 무슨 죄 지을 것이 있습니까?” 그 분은 매일 마음에 파도처럼 끊임없이 밀려오는 마음의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해도 그것을 완전히 떨쳐버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죄를 처리하는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 15장 55-56절 “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오 무덤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힘은 율법이니라.”라고 죄의 결과인 사망을 이긴 것을 공포합니다. 톨스토이의 대표작인 ‘부활’이란 소설은 카츄사라는 한 여성의 기구한 일생을 그린 작품입니다. 카츄사는 귀족 네플류도프의 집 하녀로 일합니다. 그런데 네플류도프의 의하여 더럽혀지고 타락하게 되어 나중에는 유형수가 되어 시베리아로 갑니다. 눈으로 덮인 시베리아 들판에서 부활절을 알리는 종소리를 듣고, 자기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찾아온 네플류도프와 함께 복음서가 말해 주는 진리의 부활의 길을 찾아낸다는 것이 그 작품의 내용입니다. “주는 실로 부활하셨다”는 부활의 종소리를 들으면서 죄에 얽매였던 카츄사의 영혼이 부활하게 됩니다. 부활은 누구에게나 영혼이 다시 사는 은총을 줍니다. 인간은 누구나 죄의 가능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이것을 원죄라고 합니다. 이런 죄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짓는 성향을 만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지은 가인에게 “그러나 네가 잘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그의 열망이 네게 있으리니 너는 그를 다스릴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죄를 지은 인간은 죄를 다스리는 능력을 상실하였습니다. 부활의 신앙은 죄를 다스리고 승리하게 할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의 부활은 사망 권세를 이긴 사건입니다. 죄의 결과는 죽음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너희가 이것을 먹는 날에는 정령 죽으리라”.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이것을 먹고 그 경고대로 죽음을 맛보게 된 것입니다. 죽음이란 누구에게나 과제입니다. 죽음은 어렵고 힘 드는 일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죽는 것은 실로 매일의 삶의 실체다”라고 하였습니다. 매일 죽음은 우리 가까이에 와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죽습니다. 히브리서 9:27에는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라고 합니다. 죽음은 하나님이 정하신 이치입니다. 아담 이후 인류의 최대의 적은 죽음입니다. 모든 인간은 죽음의 종입니다. 죽음은 인류의 최대의 폭군입니다. 만인에게 공포의 대상입니다. 어떤 영웅호걸도 죽음 앞에서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죽음의 권세는 눈물도 피도 없습니다. 인정사정도 없습니다. 삼대독자도 데려갑니다. 절대 죽어서는 안 되는 사랑하는 사람도 데려갑니다. 순간의 실수로 사랑하는 딸도 죽습니다. 젊은 과부의 아들도 죽습니다. 신혼부부도 신혼여행에서 쓰나미에 시체도 찾지 못하고 사라지게 합니다. 죽음만큼 몰인정한 것이 없습니다. 죽음이 무섭지 않다구요? 어떤 이는 몸이 아픈데도 병원에도 안가요. 혹시 암이라면 어떻게 하나 해서 진찰 받기를 꺼려하는 사람도 봤습니다. 죽음이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믿는다고 죽음이 무섭지 않을 것 같습니까? 죽음이 무섭 다기 보다 싫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 믿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의 선친도 하늘나라 환상을 보시고 너무 좋다고 하시기에 제가 물었습니다. “그 좋은데 가시렵니까?” 그 물음이 끝나지 마자 숨쉴 겨를도 없이 “안 갈란다.” 그러셨습니다. 좋지만 이곳도 좋은 곳입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싫은 존재입니다. 성경에는 죽음을 맛보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에녹이 그랬습니다. 엘리야가 그랬습니다. 이 두 사람은 죽음을 맛보지 않고 승천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죽음을 두 번 맛본 사람들도 있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산 사람들입니다. 엘리사에 의하여 다시 살아난 과부의 아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에 의해 살아난 야이로 딸, 나인성 과부의 아들, 나사로가 있습니다. 베드로에 의해 살아난 애니야가 있습니다. 바울에 의해 살아난 유두고란 청년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사실은 알고 보면 굉장히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그 힘든 죽음을 두 번씩이나 맛본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죽지 않으려고 온갖 몸부림을 치던 진시황도 죽었습니다. “내 사전에는 불가능이 없다”고 하던 나폴레옹도 죽음을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더 이상 정복할 땅이 없어 울었다는 알렉산더 대왕도 33세의 나이에 죽었습니다. 인간은 죽음에 직면하고 있는 숙명적 존재입니다. 앞으로는 기술이 발달하여 냉동인간으로 만들어 훗날에 다시 깨어나게 만들 수 있다고 합니다. 냉동인간이 되었다가 훗날 과학기술이 좋아서 깨어난다 해도 추억을 같이 공유한 친구들과 가족들이 없는 한 삶이 과연 행복할 수만 있을까요? 이 지상의 훗날을 그렇게 보고 싶으세요? 모두 헛것입니다. 시대적인 문화충격으로 불행할 것이 뻔합니다. 인간은 죽기 쉬어야 좋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죽을 때는 죽어야 합니다. 죽음은 비참하고 처절하고 불쌍하게 만듭니다. 바울은 로마서 7:24에서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고 한탄하였습니다.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낼 자는 부활하신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부활로 우리의 이 지긋지긋한 죽음을 극복하게 하신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의가 최후 승리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주님을 십자가에 죽게 한 자들은 불의한 자들입니다. 외식하는 위선자들입니다. 시기질투에 가득 찬 자들입니다. 만일 주께서 부활하지 못하셨다면 불의가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최후 승리는 의인이 거두게 된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공개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무리들, 제사장과 장로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저들은 자신들이 승리한줄 알았을 것입니다. 아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죽음을 확인한 다음에 승리를 자축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은 그들이 완전한 패배자요, 예수님이 승리자임을 확인하게 하셨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막 돌아왔을 때에 미국식으로 횡단보도를 건넜습니다. 미국에서는 횡단보도에 사람이 얼씬만 해도 차들이 다 섭니다. 그래서 차가 오는데도 횡단보도를 건넜습니다. 그런데 차가 섰습니다. 미국보다 조금 급하게 선 것 같습니다. 그러더니 운전자가 나이도 많지 않아 보이는데 저보고 반말로 “죽을래?” 라고 소리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어이가 없어서 쳐다보면서 “살래” 그랬습니다.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이 땅에서도 잘 살아야 하고 죽음 후에도 잘 살아야 합니다. 죽음 후에 잘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죽는 자들입니다. 오늘 부활절을 맞이하여 부활의 신앙으로 영원히 살기 위해 잘 죽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첫댓글 아멘,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