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후 3년인 1948년 10월 19일밤, 간간히 들리는 총성과 함께 주둔군인들에 의하여 감행된 14연대 반란사건(10.19사건)!
일주일 뒤에 반란군을 소탕하겠다고 진군한 국군 진압군에 의하여 여수 중심시가지가 불질러 사라지고, 여수/순천 청장년 6천여명을 학살한 사건.
피해가족을 오히려 공산당으로 몰아 40여년동안이나 연좌제에 묶어 두었던 사건!
이제 그 진상을 조금이나마 알리고자 합니다.
Overview
속칭 '여순 반란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정식으로 '10.19 사건'으로 개칭되었다.
이 사건은 제주도 '4.3항쟁'과 더불어 해방정국에서 발생한 최대의 민족사적 비극이었다. 이 사건은 여수/순천 사람들에게는 지금도 기억하기 꺼려하는 사건으로 남아있다. 특히 여수 주민들은 여순 사건의 전개과정을 묻는 질문에 '당한 것만도 지긋지긋한데 대답은 무슨 대답이냐' 며 질문을 회피하고 만다.
이 사건은 전대미문의 엄청난 인명피해뿐만 아니라 사건 자체가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결코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이 역사적 사건에 대한 충분한 평가작업이 이루어. 지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10.19사건'이나 '4.3항쟁'이 민족분단으로 치닫고 있던 역사적 과정의 한 단면을 극명하게 보여준 민족의 비극이었다면 오늘의 조국분단의 상황은 그러한 비극의 연장선상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의 정치상황에서 이 사건을 객관적으로 새롭게 조명하는 것은 쉽지않은 일이다.
비록 40여년전의 일이지만 이 사건의 구체적인 전개과정과 실상에 대해서도 제한된 자료만을 접할 수 있을 뿐이다.
또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국내자료들도 대부분 당시 집권세력이 남긴 한정된 자료뿐이며 그나마도 사건의 원인과 배경등 전모를 살피기에는 불충분하거나 부정확한 것들이다.
당시 국방부나 수도경찰청등의 자료에는 사건의 의미를 가능한 축소하려거나 진상을 은페하려는 집권세력의 의도가 적지않게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사건이 종결되고 나서도 이 지방의 사람들은 명칭에서 오는 엄청난 편견에 시달려야 했다.
한때 명칭에서 오는 잘못된 선입견을 벗겨보고자 '14연대 반란사건'으로 개칭하려는 노력이 있었고, 이제서야 '10.19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개칭이 된 지금, 이지방에 엄청난 고통을 준 이 사건을 재조명 해 본다.
10.19 사건전후의 정국
10.19 사건은 단순한 좌익군인들의 우발적 봉기인가 아니면 사건발생 초기 정부가 주장한대로 공산계열과 일부 극우 정치세력이 결탁, 수많은 경관과 양민을 살상한 일대 불상사인가?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건의 배경으로서 해방직후의 정치상황과 여수를 비롯한 전남동부지방의 특수성을 살펴보아야 한다.
사건의 전개
14연대의 반란
사태의 파급(반란군하의 여수)
여수 탈환작전 최종 4일 - 진압군 출동
진압군 여수 입성 이후 : 공포의 여수
체 험 수 기
내가 겪은 10.19사건 - 김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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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9사건 전후의 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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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은 한반도가 분단되어 남북에 각각 서로 배타적 정통성을 자임하는 정권이 수립된 해였고 다른 한편으로 수립된 정권의 권위에 도전하는 수많은 시도와 충돌이 빈발하였다.
이른바 남로당의 '2·7구국투쟁'을 선두로 제주도 4·3사건, '5·10 단선반대 투쟁', l0월의 여수 제14연대 반란사건(여수·순천사건), 대구 6연대 반란사건 등의 무장반란과 대결의 흐름은 국내의 냉전적 질서를 걷잡을 수 없는 민족 비극의 최상급인 한국전쟁으로 몰아갔다.
1948년 4월 제주도에서 발생한 일련의 '4.3 사건'은, 이후 남한에서 좌익에 의한 무장유격투쟁 의 시발점이 되었으며, 이 환상의 섬을 한국전쟁 이전의 한반도에서 가장 참담한 파괴와 고통의 신음 소리로 가득 차게 하였다.
이승만 정권의 창출을 위한 5·l0단독선거에 반대하는 정치적 시위자에 대한 경찰과 경비대, 그리고 서북청년단의 가혹한 탄압은 고립된 섬의 지형적 조건. 혈연적 유대의식과 감성적 연계사슬을 통해 제주도 전역을 분노의 화산으로 만들어 버렸다.
사태가 진압되었을 때 당국은 사상자들이 모두 공산주의자라고 발표했지만, 49년말까지 추정된 1만5천~3만3천(제주도 인구의 약 10퍼센트를 상회하는)의 사망자수와 2만여 채에 달하는 파괴 가옥수는 이 발표가 얼마나 터무니 없이 과장된 것이었는가를 반증해 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제주도가소요에 빠져 있을 때 전남의 항구도시 여수에서는 제주도의 반도 토벌을 위해 출동하기로 되었던 국군 제14연대 사병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대한민국이 수렵된 뒤인 48년 10월 19일에 시작된 이 반란은 10월 27일까지 약 l주일간 여수를 비롯해 순천·광양·곡성·구례·보성 등지를 휩쓸었다.
반란을 일으킨 여수 l4연대는 광주 4연대(l946. 2. 15 창설)에서 차출된 l개 대대를 기간으로 1948년 5월 14일 창설된 부대였다. 반란은 남로당의 세포책임자인 하사관 지창수에 의해 선동된 2천 명 가량의 사병들이 '경찰타도, 제주도 출동거부, 남북통일을 위해 인민군으로 행동하자'는 구호를 내걸고 제주도 출동을 거부하고 여수시내로 진입함으로써 시작되었다.
20일 여수·순천을 장악한 반군은 연이어 인근 지역으로 퍼져나갔고, 반란군이 장악한 지역에서는 대중집회형식을 빌어 인민위원회가 복구되는 한편 '인민행정'이 시작되었다. 또한 이경모의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수백명의 경찰·공무원·지주·한민당원·우익계 인사들이 즉석에서 살해되거나 '인민재판'을 통해 처형되었다.
이같은 살육과 테러는 동시에 반란군의 패배 뒤에 반드시 있게 될 끔찍한 보복에 대한 예고 이기도 하였다. 전투사령부(사령관:송호성(宋虎聲) 광복군 출신, 국방경비사령부 총사령관, 6·25때 납북, 1954년 의거자학교 교장, 1956년 재북평화통일추진협의회 중앙집행위원, 1959년 반혁명분자로 숙청)를 설치하고, 여수·순천지구에 계엄령을 내린 정부는 반란군을 공격하기 시작했지만, 오히려 토벌대의 일부분이 반란군에 투항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반란은 정부군이 장갑차·경비행기·군함 등을 동원하고 여수가 불바다가 된 후인 27일에 가서야 비로소 진정되기 시작하였다.
관민 1천2백여 명 사망, 반란군 8백여 명 사망이라는 엄청난 피해( 국방부 발표 : 실제 추정과는 거리가 있음 )를 가져 온 반란은 신생 대한민국의 기틀을 위협하는 폭풍으로 인식되었으나 실제로는 '찻잔 속의 폭풍'에 불과했다. 남한 내의 어떠한 반란도 실제로는 정부의 물리력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여하튼 잔류한 l천여 반란군은 김지회(金智會)·홍순석의 지휘 하에 지리산·백운산 등으로 입산 도피하였고, 이들의 입산으로 1948년 l950년간의 남한 내전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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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연대의 제주도 출동거부 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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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0월 19일 10시경 여수읍 신월리에 있는 제14연대의 정문 남쪽 바닷가에서 3발 의 예광탄이 발사되었다. 이를 신호로 병사들의 무기고 및 탄약고 점령이 있었다. 이 무기고에는 제주도 출동을 위해 지급된 최신의 무기인 M1소총과 더불어 아직 반납되지 않은 99식 소총등 6천여정의 병기가 있었다.
이에 앞서 10월 15∼16일경 여수우편국 "일반전보"로 10월 19일 20시를 기해 1개대대를 제주도로 출동시키라는 육군본부의 명령이 하달되었다. 명령문은 "일반전보"형식이었으므로 기밀이 누설되었을 것을 우려 출항시간을 두 시간 연기하여 22시에 출항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해군의 대륙용 주정(舟艇:LST)의 밤샘 선적작업까지 하는 등 준비를 마치고, 20 시에 연대장에 대한 출동신고가 끝나면 도보로 신항까지 행군하기위해 출동 제1대대는 저녁 식사후 내무반에 대기중이었고 제2대대는 출동대대의 두끼분의 김밥을 만드느라 분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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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고 탄약고 점령후 연대 인사계 지창수상사는 마이크를 통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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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장병은 연병장에 모여라!』
고 하고 집합이 끝나자(이 병사들의 집합과 관련하여 비상나팔 소리가 문제가 된다. 지금까지 여순사건을 다룬 글을 보면 한결같이 총소리와 비상나팔소리를 신호로 병사들의 집합이 이루어진 것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유관종씨의 (한국전쟁사)(행방과 건군)에서 비롯된 것으로 (현대공론)'89. 2월호에서 유씨는 당시 박창원소위의 증언을 인용하여 이전의 그의 잘못을 바로잡고 있다.박창원소위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총소리가 나고 병사들이 왔 다갔다 할 때, 연대작전 주임 강성윤대위는 불온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판단하고, 즉각 비상소집으로써 병력을 집결시켜 진압하기 위해 주번 사령에게도 알리지 않고 비상나팔을 불게 했다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인사계 선임하사관 지상사이다. 지금 긴급정보에 의하면 여수경찰이 평소 우리와의 사소한 충돌로 반감을 품고 전 일본해군을 동원하여 여수에 상륙하여 우리 연대를 포위 공격하려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제주도 출동에 앞서 이들 악질반동 경찰과 일 본군을 타도해야 한다.
나아가서는 우리는 동족상잔의 제주도출동에 반대한다. "
(이때 '옳소!' 하는 소리와 함께 박수소리).
우리는 남북통일의 정부를 진정으로 원한다. 지금 북조선의 인 민군도 남조선 해방과 일본군을 격퇴하고자 38선을 넘어 남진중에 있다는 소식이다. 우리도 이제 인민해방군으로서 반동경찰과 일본군을 쳐부수고 북상하는 인민해방군대로서 지금부터 행동을 한다. 모두 나의 뒤를 따르라!"
연설이 끝난 후 이에 반대하는 하사관 3명을 즉살하고 제 1. 2. 3대대 2,500여명의 병사와 합세한 민간인 33 명과 함께 여수읍내로 진격하였다.
읍내진격은 22:00 20일 01:00, 04:00시에 제 1. 2. 3대대가 차례로 연대를 출발하였다.
읍내 진격도중 봉산·충무지서의 경찰저지선을 돌파하고, 읍내 좌익단체·학생등 600여명에게 무기를 지급하여 03:00경 여수경찰서를 05시경에는 여수읍내 각 관공서 및 중요기관을 점거하였다.
한편 08:30분 6량의 열차에 분승한 700여명과 각종차량에 분승한 1,300여명은 순천으로 향했 다. 당시 순천에는 14연대의 2개중대가 주둔하고 있었으며 선임중대장인 홍순석중위는 2개 중대를 통합 지휘하여 북상군과 합류할 목적으로 대기하고 있었다.
20일 10시경 읍사무소 자리에 '보안서'를 설치하고 '여수 인민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와 함께 경찰·우익인사의 수색·체포·총살을 하였다. 또한 읍내 중심지에는 『제주도 출동거부 병사 위원회』명의로 다음과 같은 성명서가 붙어 있었다. 우리들은 조선인민의 아들이고 노동자·농민의 아들이다. 우리는 우리들의 사명이 국토를 방위하고 인민의 권리와 복리를 위하여 생명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
우리는 제주도 애국인민을 무차별 학살하기 위하여 우리들은 제주도에 출동시키려는 작전에 조선사람의 아 들로서 조선동포를 학살한 것을 거부하고 조선인민의 복리를 위하여 총궐기하였다.
지금 제주도 인민들은 미제국주의의 침략정책에 항거하여 단독선거에 반대하고 조국의 통일 과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고자 4.3인민항쟁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제주도 인민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영웅적으로 투쟁하면서 목숨을 바치고 있다.
이승만 도당은 무수한 애국자를 학 살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제14연대의 대대병력을 금번에 제주도에 중파해서 학살을 조장시키려 하므로 우리 제14연대는 단호히 출동명령을 거부하고 인민의 군대로서 인민의 편에 서서 동족상잔을 결사적으로 반대한다.
1. 우리 조국을 해방시켜준 위대한 소련군은 북조선에서 철퇴하겠다고 성명했다. 따라서 남 조선에서 인민의 학살을 조장하고 있는 미군도 더 이상 점령할 이유가 없으므로 즉시 철퇴 를 거듭 촉구한다.
2. 우리 제14연대의 병사위원회가 봉기한 것은 진정한 조선인민의 군대로서 참여하여 우리 손으로 남북으로 갈라진 조국의 통일독립국가를 건설하고자 저희들은 오늘 분연히 일어섰습 니다. 여수 인민들은 저희들과 함께 민족반역자들을 처단하고 조선인민공화국 건설에 다함께 매진을 합시다.
《(여수 인민보) 48년 10월 24일자》
15시 30분경 중앙동 광장에서 4만 군중이 모인 가운데 『인민대회가』,『추도가』,『해방의 노래』등으로 개시되었다.
여수 남로당위원장 이용기가 인사를 한후 유목윤이 연설을 했는 데 『지난 밤부터 여수에는 인민해방군이 상륙하여와 우리를 해방시키고 순천으로 북상하여 이를 점령하고 북으로 북상중에 있다. 또한 이북의 인민군대가 38선을 돌파하여 서울을 점 령하고 남진중에 있으며, 남조선의 전체해방은 목전에 도달하고 있다. 이북의 인민군대가 38 선을 돌파하였기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도 오늘 아침에 일본으로 도망을 쳤다. 따라서 우리 여수인민은 총궐기하여 남조선을 완전해방시키는 데 앞장을 서야 한다』고 선동했다. 이어서 인민위원회의 의장단 선출에 들어가 이용기. 송욱. 유목윤. 박채영. 김귀영. 문성휘 등 6명이 선출되었다. 봉기군을 대표해서 지상사가 인사를 하고 좌익을 대표해서 박기암이 축사를 했다. 이어서 전평. 민청. 여맹 등 좌익대표의 짤막한 선동연설이 있었고 6개항목의 결정서를 채택했다.
1.인민위원회의 여수행정기구 접수를 인정한다.
2.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수호와 충성을 맹세한다.
3.대한민국의 분쇄를 맹세한다.
4.남한 정부의 모든 법령은 무효로 선언 한다.
5.친일파, 민족반역자, 경찰관 등을 철저히 소탕한다.
6.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 개혁을 실시한다.
이러한 내용의 결정서를 채택하고 『최후의 결전가』로 대회를 끝냈다.
그리고 군중시위에 들어갔다.
이 시각 이후 지하에 있던 좌익단체들이 '민주애국청년동맹(민주애청)','학통','민주여성동맹', '합동노조', '교원노조', '철도노조'등 일제히 간판을 내걸고서 각 단체별로 반동자의 수색 체포에 나섰다.
한편 15시경 순천을 완전 점령한 14연대 주력부대는 3개부대로 재편성하여 구례, 곡성, 남원 을 향하여 학구로, 다른 일부는 보성, 화순, 광주를 향해 벌교로, 또 다른 일부는 하동쪽을 향해 광양으로 분진하였다. 순천에 잔류하고 있던 그 일부는 토착 좌익세력에 합류하여 인공기를 게양하고 '인민위원회 ' 를 조직하여 '인민행정'을 개시하였다.
20일, 저녁에서 21일 사이 남원, 구례구, 보성이 점령되었는데 남원은 봉기군의 도착과 함께 구례구와 보성에서는 봉기군 도착전에 지방민들에 의해 경찰서가 점령 되었다. 21일, 여수 인민위원회가 기능을 시작하여 친일파, 모리배 등의 은행예금동결령, 재산몰수령 을 내리고 인구와 적산가옥을 조사하였다. 보안서는 한민당 독촉 대청 족청 서청간부와 단 원을 적발 문초했다. '인민재판'을 실시하여 제일 먼저 경찰서장 고인수 이하 사찰계 직원 10여명이 처형되었다. 15시경 국군 L형 연락기가 연수상공에 나타나 투항권고문을 살포했다.
22일, 군청이하 전 행정기관을 접수, 과장이상의 관리를 파면하였다. 21일과 22일 사이에 최 대로 확산되었는데 여수, 순천, 고흥, 보성, 광양, 구례, 곡성군 전체와 화순, 남원, 하동 일부 까지 확산되었고 장흥과 담양은 확산이 추정된다.
여기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순천점령 이후 무장력의 이동에 의해서뿐 아니라 좌익과 민 중들만의 힘으로 파급이 가속화되었고 동시에 지역적으로 확산되었다는 점이다.
23일, 여수 인민위원회는 발표를 통하여 서울에는 새 인민공화국이 들어섰다고 하면서 인공 기와 인민증을 나누어주고, 인민증을 가진 사람들에게 1인당 3홉씩의 쌀을 배급하였다.
14시경 최고심사위원회에서 '요처단 반역자'로 결정된 우익인사의 사형이 '보안서'앞에서 거행되었다.
국군의 공격이 있어 탄약운반을 하던 여맹원 정기덕(18세)이 사망하고, 국군은 큰 피해를 입고 후퇴하였다.
인민위원회를 발행인으로 하고 박채영을 편집인으로 하는 『여수 인민보』가 21일자로 발행 되었다.
1면에는 '여수 인민에게 호소함'이란 표제하에 『제주도 출동거부 병사위원회』의 성명과 20일 있었던 인민군중대회 명의의 『인민군장병에게 드리는 감사문』그리고 동 대회 에서 연설한 각계 대표들의 연설 요지를 게재했다.
2 5 일
전차, 장갑차, 비행기를 앞세운 정부군의 맹공격으로 가장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어 미 평, 오림리 주민이 대피하고 봉기군, 좌익간부들이 구례쪽으로 퇴각했으며 여수읍내에는 좌 익계 청년, 학생들만 남게 되었다.
2 7 일
여수시는 불바다가 되고 말았으며 시가전은 한 집 한집을 두고 치열하게 벌어졌다. 10 시경 국군 장갑차가 시내에 돌입하여 14시 읍내가 완전 탈환되고 15시 30분경 전 여수읍이 탈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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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탈환 이후 - 진압군의 군사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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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과 경찰은 여수~순천지역을 재탈환한 뒤 맨 먼저 반군과 부역자 색출에 나섰다. 10월 28일부터 12월 중순까지 계속된 가담자 색출과 처벌로 여수등은 공포의 도시로 변하고 말았다. 진압군들은 곳곳에서 보복적인 테러, 방화, 약탈 그리고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했다.
순천의 경우 23일 오전 약5만명의 읍민이 순천북국민학교 교정에 집결했다.
주민들은 여기에서 군용팬티를 입은 자, 머리가 짧은 자, 하얀 고무신을 신은 자들이 1차로 분류되고 2차로 군, 경, 마을유지로 구성된 심사위원들의 심사를 받았다.
인민재판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자 1급, 소극적으로 참여한 자 2급, 애매한 자 3급등이었다.
심사는 주로 외모, 고발, 개인적 감정에 의한 중상모략, 강요된 자백등 극히 자의적 기준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무고한 사람들이 처벌을 받는 것이 많았다.
심사결과, “여순사건(10.19사건)”이나 인민재판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한 자로 지목된 사람은 즉석에서 곤봉, 개머리판, 체인 등으로 무참하게 타살되거나 총살당했으며 나머지는 계엄군이나 경찰에 넘겨져 재판을 받았다.
여수의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26일 진압군의 반격작전이 개시되면서 대부분의 시민들은 진압군의 지시에 따라 진남관, 중앙국교, 서국교등 3개 장소로 집결했다. 진압군의 본부는 서교에 있었다.
“여수,여천발전사”는 당시 서교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서도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정문에서는 간혹 파리한 몰골의 가담자들이 잡혀들어와 교사뒤의 단죄대로 끌려가고 있었으며 그곳에서는 간혹 이들을 즉결 처분하는 기분나쁜 총소리가 “탕탕”울려퍼져 사람들의 긴장을 얼어붙게 했다.
세 곳에 모인 시민들에 대해서도 살아 남은 경찰관이나 우익진영 요인들이 돌아다니면서 소위 “심사”라는 것을 했는데 시민들 중에 가담자가 눈에 띄면 뒤따르던 군경에게 “저 사람”하고 손가락질만 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즉결처분장으로 끌려가는 판이니 누구나 산목숨이라 할 수 없었다.
그날 밤 8시께 난데없이 서시장에 불이나 밤새껏 타고 있는데도 아무도 불을 끄러 갈 수 없었고 27일 밤 8시께도 충무동 시민극장 근처에서 불이나 충무동, 교동, 중앙동 일대를 태우고 있는데도 대안의 불처럼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누구나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는 몸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죄없이 끌려온 시민들의 고생은 정말 말이 아니었다.”
시민들은 썰렁한 교정에서 이틀밤을 지샌뒤 28일 오후 3시께야 풀려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사태가 일단락 되는 것으로 알고 한숨을 돌리고 있었으나 그게 아니었다. 오히려 시작이었다.
군, 경은 40세 미만의 젊은 남자들은 일단 가담혐의가 있는것으로 보고 6백여명을 따로 가려냈다. 혐의자는 오동도에 재수감돼 심사를 받은 뒤 중앙국교로 끌려갔다.
이들의 심사를 위해 “주부대”라는 수도경찰이 따로 파견돼 중앙국교에 자리잡고 있었다. 군, 경은 가담자를 색출하기 위해 일반 시민들로부터 투서를 받는 방법을 썼다. 치졸한 방법이었다. 이 때문에 개인감정등에 의해 생사람을 잡는 허위투서가 난무하여 무고한 민간인들이 수없이 희생을 당해야 했다.
“여순사건”땐 각급 기관장이나 우익진영의 유력인사를 제외하곤 일반 민간인의 피해는 거의 없었으나 진압군이 들어오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중앙국민학교에서 진행된 가담자 색출작업도 동족이나 민족이란 개념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무자비한 몽둥이 고문에 견디다못한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쉴새없이 흘러나왔다. 군, 경은 가담사실이 드러나면 바로 교정 동쪽에 있는 버드나무 밑에서 즉결처분했다.
여수시내 중심부의 시청과 경찰서 주변에는 시체가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었고 경찰서 뒤뜰에는 시체가 대강 정렬돼 있거나 혹은 난잡하게 포개져 있어 그 처절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또 만성리로 가는 터널 뒤쪽에는 집단총살된 사람의 수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백두산 호랑이”로 악명을 떨치고 있던 김종원 대대장(당시 대위)은 일본도의 칼맛을 시험한다며 여수 구석구석을 뛰어다니면서 혐의자들을 참수 즉결처분하기도 했다.
아들 형제를 살해한 원수를 사형장에서 구해내 양아들로 삼은 손양원목사의 인간애가 피어난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가려진 사건 가담혐의자들은 법적인 절차에 관계없이 가혹하게 고문당하거나 즉석에서 처형당하기까지 했다. 광주와 순천의 군법회의에 회부된 사건 가담자는 4백 58명, 이들은 11월 13일과 14일 재판을 받았는데 그중 양민으로 판명돼 석방된 사람이 1백 87명, 사형 1백 2명, 20년 징역 79명, 5년 징역 79명, 무죄 11명등이었다. 이 재판 결과만 보아도 군, 경의 가담자 색출작업이 얼마나 모진 고문에 의해 얻어낸 허위자백이었던가를 알 수 있다.
당시 여수의 참상은 몇몇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경향신문도 “가가호호에 기중공포에 쌓인 여수”라는 제목으로 이헌구씨의 현지견문기를 소개하고 있다.(여수. 여천 발전사 331쪽)
“나는 문교부파견 반란현지 조사반의 일원으로 11월 3일 아침 서울을 떠나 8일 귀환하기까지 1주간 내평생에 처음일뿐 아니라 우리 민족으로서의 최대 불행이요, 이는 또한 현세계각국이 직면하고 있는 유사이래 일대 참화의 한 장면을 전 심신에 사무치는 무서운 전율과 공포와 고통으로써 목격하였다. 비록 일제하의 탄압아래서 몸서리치도록 뼈아프게 약소민족의 비애를 느껴왔지마는 이번과 같이 잔인하고도 참혹한 구체적인 사실을 목도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조차 못했던 일이다.
... 이번 동행했던 영랑형이 몇번이고 나에게 “이 민족에 절망하라”고 울부짖으면서 “이 민족이 절망에서 구원되리라고 생각하는 의욕까지를 포기하라”고 나에게 강요하다시피 원통해 하는 것이었다....
이번 사태에 대하여 어딘지 모르게 대다수의 민중이 아연히 방심한 채 끝없는 침묵속에 잠겨져 있는 이 무기미한 불안상태는 또 무엇이라고 설명해야 하는 것일까? 이 난국에 처하여 울연히 치밀어오르는 동포애와 민족정기의 기염이 생생한 맥박과 격동을 가슴깊이 체감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스스로 멸망의 길을 밟지 않을 수 없을 것이요, 더군다나 이 민족적위기를 가리켜 일제시대에 지긋지긋이 우리를 괴롭히던 “시국”이라는 말로 착각하며 혼동하는 인사가 있다면 이는 또한 굴욕의 시대를 자초하는 결과밖에 안 될 것이다.
또 경향신문 11월 13.14일자는 “찌그러진 남비 한개의 살림살이”라는 제목으로 최영수기자의 현지시찰기를 보도하고 있다.
“아무리 남쪽이라고는 하나 싸늘한 초겨울 바람이 불어오는 여수읍에는 거리마다 창백한 얼굴과 가다듬지 못한 머리를 흐트린 채 분주히 오고가는 모습부터가 처참하였다. 어느곳을 가나 탄환의 벽이며 유리창이며를 사정없이 깨트려 놓고 그날의 참상을 연상하기에 충분할 만큼 전율과 공포의 7일을 겪고 다만 일조에 집을 잃은 이재민이 8천 8백호에 이른다는 이런 숫자를.. 그리고 하룻밤에 타버린 가옥이 1천5백38호나 된다는 이숫자를... 1천 2백명이 사망하고 1천1백50명이 혹은 중상 혹은 경상으로 누워 신음하고 있다는 이 숫자를, 여수의 현지에서 직접 눈으로 볼때 기자는 다시 한번 가슴이 뜨겁게 느껴짐을 참을길 없다.
난민들이 초라한 모습으로 흙속을 후벼도 보고 잿더미를 파헤쳐보나 티끌하나 건질것 없고 다만 옹기종기 모여서 있는 가족들! 반란에 가담하였던 사람들이 군경의 손에 묶이어 스물 혹은 마흔씩 열을 지어 저벅저벅 사령부로 걸어가고 있다.
일찍이 그들의 얼굴에 무슨 원한이 있었던가?
동족이라기엔 너무 멀다. 그 대열속에는 이 고을에서 밤낮으로 대하던 형제요,모녀요,부자의 피가 얽힌 겨레가 아니었던가, 부두에 나는 갈매기, 발동선의 기적소리마저 슬픈 역사의 “ 피의 노래”를 부르는 것 같다”
진압군의 진주와 함께 여순지구에는 『여순사건』으로 해제됐던 종전의 정당 사회단체들이 재조직되기 시작했다. 자위대 우익청년단체등은 강화되거나 신설되기까지 했다. 순천의 경우 『충무부대』가 신설됐는데 『학생연맹』과 청년단체출신등 모두 79명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한민당, 대한부인회의 지원과 협조 아래 가담자들에 대한 정보입수, 착후탐정등을 통해 군, 경 진압부대를 지원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여수에는 폐허화된 여수재건을 위해 『여수부흥성회』가 결성됐다. 기성회 간부는 회장 문균, 부회장 정재완, 총무부장 정경수, 재정부장 박홍근, 건전부장 장기 등 지방유지들이었다.
부흥기성회의 목적은 진압군을 도와 사태를 부드럽게 수습하고 중앙당국을 움직여 가능한 한 많은 구호 물자를 타오는데 있었다. 여수긴급구호자금으로 1억8천5백만원이 배정됐고 22억5천만원이 장기저리대금으로 융자됐다. 기성부흥회는 주로 군, 관, 민,의 교량역할을 담당하였으며 궁지에 빠진 지방유지들을 구해 내기도 했다. 김모씨는 반군에게 2백만원을 제공하기로 약속했다는 혐의와 그의 집에서 장총 3정이 발견돼 중앙국교에서 29일 동안 구치되어 있다 구출됐고 당시 여수금융조합장 이사였던 박모씨는 인민위원회의 재정책 업무를 맡았다는 혐의로 궁지에 빠졌다가 풀려났다. 또 다른 김모씨는 사건가담자들에게 서북청년단원의 주거를 가르쳐 준 혐의로 체포대상이 되었으나 구출되기도 했다.
육군사령부는 49년 1월 10일 여순사건과 관련하여 군사재판에 회부된 군인의 재판결과를 발표했다. 발표문에 따르면 모두 2천8백17명이 재판을 받아 4백10명이 사형, 5백68명이 종신형을 받고 나머지는 유죄형 혹은 무죄 석방되었다.
이러한 발표에도 불구 여순사건의 피해를 총체적으로 집계한 자료는 아직 발견할 수 없다.
이승만정부의 발표에 따르더라도 학살된 민중의 수가 6천여명에 이른 것을 비롯 2만 3천여명의 민중이 체포, 투옥됐으며 5천여호의 가옥이 소실되는 등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또 『한국전쟁사 1권』에는 여순사건 1주일 현재 여수지구에서만 관민 1천2백명이 학살당하고 중, 경상자 1천1백50명, 가옥소실파괴 1천5백38동, 이재민 발생 9천8백여명의 피해를 냈으며 여순지구의 인명피해도 4백여명에 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순사건』은 이러한 피해를 남기고 막을 내렸다.
『여순사건』에 대해선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오겠지만 간과할 수 없는 문제는 단순한 군대내부의 반란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선 초대 국방장관 이범석의 국회보고에서
『본 사건의 원인이 군내부에 있다기보다는 중점적으로 민중에 있는 것』
이라는 표현에서도 그 일단을 살펴볼 수 있다. 즉 여순사건에서 보이는 자연 발생설은 당시 사회의 일반적 상황에 대한 독자적 반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기보다는 현지주민들에게 책임을 뒤집어 씌우고 있었다.
이승만대통령은 대구회담화에서
근일 우리 국회에서는 도각설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번 여순, 여수반란의 책임을 지고 정부가 물러 앉은 후 내각을 다시 조직하라하여 많은 질문으로 장시간을 허비하였으나 ...공산분자들이 지하공작으로 연락해가지고 반란을 일으켜 살인방화하는 것을 우리 정부가 책임을 지라는 것은 당초에 어불성설이다.
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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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 밤중의 요란한 총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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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0일 오전
하룻밤에 바뀐천하 1948년 10월 20일 새벽1시,
문득 콩볶는듯한 요란한 총소리에 놀라 나는 단잠을 깼다.
그러나 그 당시만 하더라도 경향각지에서 국방경비대와 경찰이 자주 충돌해서 총격전을 벌 이는 일이 더러 있을 때였음으로, 아마 신월리 14연대와 여수경찰이 또 한바탕 붙은 것인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다시 잠자리에 들고 말았다. 그러나 아침에 일어나 보니 이건 정말 너무나 엄청난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
우선 경찰서가 훨훨 타고 있는 것이 예삿일이 아니라는 직감이 들었고, 시내 여기 저기에서 때 아닌 총소리가 탕탕 울려 퍼지고 있는것만 봐도 끔찍한 사건이 터졌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그때 23세의 약관으로 여수군청에 다니면서 군자동 꼭대기에 있는 달동네 박성하영감 댁 문간채 첫째방에 세들어 살고 있었다. 그 둘째방에는 페인트칠을 하는 40대안팎의 임병 춘이 살았다. 본채 큰방에는 복덕방에 다니는 60대의 집주인이 살았으며 그 둘째 방에는 가데기(판장에서 고기상자를 메어나르는 직업)를 하던 50대의 정재일이 살았다. 그때 우리들은 그야말로 한지붕 네식구가 오손도손 살면서 시간만 있으면 막걸리 파티를 벌이곤 하였다.
그때의 경찰은 정말 하늘 높은 줄 몰랐다. 권력을 등에 업은 그들은 연상들에 대해서도 반말 쓰기가 예사였고, 자칫하면 생사람을 좌익으로 몰아 때려잡는 바람에 관제 공산당이라는 새 용어가 생겨날 정도였으니, 사람들은 그게 무서워 무조건 쩔쩔맸다. 흔히 일제 경찰이 포악 했다고 하지만 그래도 일제경찰은 법에 걸려야 간섭을 했다. 미군정을 거쳐 이승만정부 치하에서 우리 경찰은 국민생활의 모든면에 걸쳐서 간섭안하는 것이 없었다. 걸핏하면 몽둥이로 사람을 때려 잡았기 때문에 '민중의 몽둥이'라고 해서 민원 의 대상이 됐었다. 그 때문에 이들에게 억울하게 당한 젊은 청년들은 경찰을 한번 봐주기 위해서 일부러 국방경비대에 뛰어들어가는 일까지 있었다.
그때 내가 살고있는 집은 종고산 꼭대기에 있었기 때문에 아침에 일어나면 여수시내의 모든 움직임이 밥상같이 환히 내려다 보였다. 그런데 그날 아침따라 여기 저기서 총소리만 자꾸 들려올뿐 어쩐지 전 시내가 죽은 것 같이 괴괴하기만 했다. 그때 출근채비를 서두르고 있는 나에게 박영감이
"엊저녁에 무슨 일이 나도 크게 난 것같은데 자네는 관공리이니까 오늘 하루 쉬는게 좋을 것 같네"
하고 말했다. 작은방에서 정씨도 나오면서
"그렇게 하소. 나도 일찍 판장에 나갔다가 군인들한테 혼쭐이 나서 쫓겨왔네"
라고 했다. 나는
"여하튼 국이 끓는지 장이 끓는지 알아보고나 올랍니다."
하고 집을 나섰다. 진남관 네거리에 내려오니 웬 수산학생 두사람이 총을 메고 섰다가 '누구엿'하면서 총대로 앞을 가로 막았다. 다행히 그 중 한사람이 안면이 있어
"자네 백초련형이 동생아닌가? 나 가사리 김계윤인데 왜 그러는가"
했더니 그 학생은 머리를 긁으면서
"그러셨군요.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금족령이 내려져 있어서 어디 움직이 면 안됩니다."
하면서 그가 들려준 어젯밤의 사건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 신월리 14연대는 지난 9월 육군본부의 군장검사를 받을 때 곧 제주도로 출동할것이라는 낌새를 맡았다. 그러자 이 연대의 인사처 선임하사관이며 또 이 연대 남로당 조직책임자인 지창수상사는 이 기회에 한번 들고 일어나기로 연대 40여명의 핵심 좌익 프락치들과 물샐틈 없는 면밀한 계획을 짰다. 그리고 이북 인민군들과도 기맥을 통해, 14연대가 일어나면 이북 인민군도 38선을 뚫고 밀고 내려오기로 굳은 약속이 돼 있었다. 그리고 남한내의 다른 국방 들도 14연대만 일어나면 사방에서 벌떼 같이 호응하기로 짜고 있었다. 그런데 드디어 어젯 밤(19일 밤8시) 상부에서 제주도에 출동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래서 지창수상사는 미리 짜놓은 계획대로 먼저 탄약고와 무기고를 점령하고 비상나팔을 불어 3개대대의 전연대가 똘 똘뭉쳐 연대내의 반동장교 20여명을 사살하고 밤11시 30분 신월리를 출발, 비상소집으로 시 내를 지키고 있던 1백 50여명의 경찰을 물리치고 오늘새벽 3시 30분 여수경찰서를 점령한 뒤 좌익단체 청년들과 학생들을 동원하여 오늘 새벽부터 경찰을 검은개, 장교들을 노랑개로 부르며 우익진영 요인들과 함께 잡아 들이고 있다. 그리고 또 이북 인민군과 합류키 위해 김지회중위가 2개대대를 이끌고 오늘 아침8시에 이미 순천으로 떠났다. -
는 것이었다.
나는 온몸에 전율같은 것을 느끼며 집으로 돌아올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뒤 박영감이 듣고온 또 다른 소식에 의하면 오늘 10시쯤 읍사무소에 인민위원회 와 보안서가 들어섰는데 김영준의 고무공장에서 휜 자카다비를 세트럭 싣고 오고, 또 신월 리 14연대에서 99식 소총과 카빈 소총을 산더미 같이 싣고와 민애청과 학생동맹원들을 무장 시켜 경찰과 우익진영 요인들을 이잡듯이 잡아 들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할 일 없이 또 막걸리 파티를 벌려 놓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참말로 38선이 터졌을 까요?"
"글쎄, 저 사람이 시내를 완전히 장악했어도 아무 반응이 없는 것을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 그나저나 신문이 와야 뭘 알지"
하고 박영감이 말하니까
"이럴 때 라디오가 있으면 좋은데"
하고 임씨가 나서자
"이 사람아, 지금 여수 시내에 라디오가 몇 대나 있을 것 같애"
하고 정씨가 말해 우리는 모두 웃었다. 사실이 그랬다.
그 당시 라디오란 일부 특권층만의 점유물에 불과했다. 또 정씨가 말했다.
"아마 모르기는 해도 이번 사건도 이승만대통령 땜새 일어난지도 모를거여. 김구씨 말대로 남북협상인가 뭣인가를 끈덕지게해서 나라를 통일시켜 놓고 봐야 하는건데 그노의 영감태기 가 얼른 대통령 해묵을라고 510선거를 서두르고 반쪼가리 정부를 세워 놓으니까 세상이 늘 시끄러운 거여"
하니까 임씨가 무슨 중대결심이나 하는 것처럼 한참을 있다가
"그건 그렇다치고, 요새 경찰놈들 땜새 우리 백성덜 어디살아 가겄어요"
하고 말했다.
그 당시 누구나 경찰 이야기라면 바짝 긴장하고 들을 때였다. 그의 말은 다음과 같았다.
고소동 김모씨 집에 사찰계에 다니는 박이라는 형사가 하숙을 했는데, 그 집 쥔 여자 게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 집 쥔이 간통죄로 일을 꾸미려 하자 그 형사놈 이 좌익문서를 거짓으로 만들어 그 집 장롱에 살짝 넣어 놓고 딴 형사를 시켜 가택 수색을 시켰다. 문제의 문서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 형사놈이 쥔을 사상가라고 경찰서에 잡아 넣 으려고 하니까 오히려 쥔쪽에서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했다. 그래서 요새는 아주 터놓고 벼개 동서격으로 세 사람이 사이좋게 (?) 산다는 것이었다.
그때 아래쪽 공동수도거리에 사는 반장이 올라왔다. 그의 말에 의하면, 어젯밤 경찰서에서 사전에 정보를 입수하고 비상소집령을 내려 1백 50명이 나왔는데 결국 22명이 최후까지 버 티다가 5명이 전사하고 나머지는 다 도망쳤다는 것이다. 오늘 12시 현재 40여명이 잡혀 들 어갔다는 얘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 3시에 중앙동광장에서 인민대회가 있으니 한 집에 꼭 한사람씩 나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후환도 없애고 공기도 알아볼 겸 해서 가보기 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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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인민대회 : 10월 20일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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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과업 6개항 결의
골목길에 나와 보니 벌써 인공기를 내건 집들이 더러 있었고, 중앙동 벽보판에는
인민 해방군 환영,
만세! 제주도 출동거부
병사위원회 성명서
여수 인민에게 고함
토지는 농민에게
등등 낯설을 벽보들이 닥지닥지 붙어 있었다. 어제 낮까지만 해도 이따위 벽보는 바로 총살감이었는데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도 세상이 변하다니 정말 꿈과 같은 일이었다.
중앙동광장에는 벌써 1천여명의 군중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얼른 봐도 그 계통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았다. 지금의 해바리기 슈퍼앞에 연단이 마련돼 있고 임시로 만든 국기게양대가 서 있었다. 곧이어 이용기, 이창수, 박창래, 주원석, 유목윤, 김상열, 김현수, 강대훈, 박채영, 문성휘, 김 귀영등 여수 좌익계의 거두들이 호리낭창한 키에 상사 계급장을 단 군인 한사람을 안내하고 들어서자 장내에서 우렁찬 박수가 터져 나왔다. 오늘의 주인공은 지창수상사였다.
곧 연장자인 이창수의 사회로 인민대회가 개최되었다. 추도가해방의 노래를 시작으로 인공기가 서서히 올라가 하늘높이 펄럭였다.
맨처음 남로당 여수지구위원장인 이용기의 식사가 있었고, 보안서장으로 내정됐다는 유목윤의 격려 사가 있었으며, 세번째로 지창수의 인사말이 있었다. 전남 벌교태생으로 일제 때 지원병 출신이였다는 그는 군중들의 열띤 환호속에 손을 흔들며 여유있는 모습으로 등단해 능란한 말솜씨로 장내를 사로 잡았다.
친애하는 여수 인민 여러분. 저는 14연대 인민 해방군사령관 지창수입니다. 어젯밤 우리는 미리 북조선 인민군과 짜놓은 계획대로 동족상잔의 제주 파병을 거부하고 여수 인민을 해방 시켰습니다. 도 우리는 북조선 인민군과 약속대로 합류하기 위해 오늘 아침 김지회동무가 2 개 대대병력을 이끌고 이미 순천으로 떠났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 순간 국내에 있는 우리 국방군 동무들도 우리와 호응하기 위해 일제히 일어났습니다. 이승만도 이 기미를 알아차리 고 이미 일본으로 도망가고 없습니다. 여수 인민 여러분! 이제 우리의 조국 통일은 단지 시 간 문제입니다. 앞으로 우리 인민해방군은 통일의 첫 걸음이 되는 군사작전에만 힘쓰고, 후 방의 혁명과업은 인민위원회와 보안서가 맡아서 잘 처리해 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혁명 사업을 성공적으로 잘 마무리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승만일당의 주구 노릇을 하던 경찰과 친일파, 모리간상배등 반동분자들을 철저히 뿌리 뽑아야 합니다. 그래야 땅을 파는 농부가 땅임자가 되는 진정한 해방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존경하는 여수인민 여러분! 앞으로 이 여수 땅은 우리 14연대가 조국통일의 첫 북을 울린 영광스런 인민해방의 땅으로 영원히 역사에 빛날 것입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우뢰같은 환호와 박수가 장내를 메웠다.
이어서 박기암이 여수 인민을 대표해서 14연대 해방군에게 드리는 메세지를 채택했고, 그 다음 의장단 선출에 들어가 그들의 각본대로 이용기, 송욱, 유목윤, 박채영, 문성휘, 김귀영 등 6인으로 구두 호천을 뽑았다. 이어 전평, 민청, 여맹대표들의 짤막한 축사가 있었다. 그리 고 오늘의 하이라이트인 6개항의 결의문 낭독이 있었는데 이용기가 1개항씩 읽으면 박수로 승인하는 식이었다.
가. 인민위원회가 여수지구 행정기관을 접수하는 것을 인정한다.
나.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다.
다. 대한민국의 분쇄를 맹세한다.
라. 대한민국의 모든 법령을 무효로 한다.
마. 친일파 모리간상배 경찰관등을 철저히 소탕한다.
바. 무상 몰수 무상 분배에 의한 토지개혁을 실시한다.
이 결의문이 채택되자 또 한차례 뜨거운 박수가 터졌다.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군인민위원장인 이용기 의 취임 인사가 있었다.
이용기! 그는 1908년생으로 여수공립수산학교 재학시절부터 학업성적이 남달리 우수했으나 가정이 어려워 수업료를 늘 제때 못 낸 탓으로 조행성적이 깎여 우등생이 못되었다. 이에 자극 받은 그는 소년시절부터 좌경사상에 물들기 시작해 3학년 때인 1930년 3월 동교졸업생 윤경현과 같이 독서회를 조직하고 .
민족차별을 철폐한다. .
한국인에게는 모국어를 가르쳐라.
는 요구조건을 내걸고 동맹휴학을 일으켰는데, 동조자들은 거의 퇴학처분되고 주모자인 그 와 윤은 각각 징역 2년씩을 선고 받았다. 그 뒤 이용기는 해방 전 경성일보와 동아일보지국장을 지내면서 지방민들로부터 신사로 존경받았다.
만장의 박수 속에 등단한 그는 장내의 열띤 분위기와는 달리 차분히 입을 열었다.
존경하는 여수인민 여러분! 그동안 미제국주의자들의 압박속에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 까. 해방 후 우리나라는 마땅히 연합국 측의 신탁통치를 받아 들였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무 슨 좌익이니 우익이니 하는 문제를 떠나서 민족적 양심으로 그렇게 했어야 시일이 많이 걸 리더라도 통일된 조국을 세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승만은 순전히 자기 개인의 정권욕에 눈이 어두워 조국을 분단시켜 놓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민족 반역자들도 많지만 이승만도 이완용 못지않은 민족 반역자일 것입니다. 이번에 다행히 우리 14연대 인민해방군 의 영웅적인 봉기로 우리 여수는 해방 되었습니다. 그리고 북조선 우리 인민군의 남진으로 우리 조국도 곧 해방될 것입니다. 우리 인민위원회에서는 방금 여러분께서 결의해주신대로 우선 다음과 같은 중요과업을 수행해 나갈것입니다.
첫째, 친일파 모리간상배를 비롯해 이승만 일당들이 단선단정을 추진 하는데 앞장섰던 경찰과, 한민당 독립촉성회 서북청년단 대동청년단 민족청년단을 반동단체로 규정하고 그중 악 질 간부들을 골라 징치하되 반드시 보안서의 엄격한 조사를 거쳐 사형, 징역, 취체, 석방등 의 네등급으로 구분 처리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말씀 드려둘 것은 사형만은 최고심사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심중히 처리할 것이며, 또 최소화 할 것입니다.
둘째, 친일파와 모리간상배들이 인민의 고혈을 빨아 모은 은행예금을 동결시키고, 그들의 재 산을 압수할 것입니다.
셋째, 적산가옥과 아무 연고도 없이 관권을 이용하여 부정하게 빼앗은 것은 재조사해서 옳 은 연고자에게 되돌려줄 것입니다.
넷째, 매판자본가들이 세운 사업장의 운영권을 종업원들에게 넘겨줄 것입니다.
다섯째, 식량영단의 문을 열어 극빈자대중에게 쌀을 배급할 것입니다. 여섯째, 금융기관의 문을 열어 없는 무산대중에게도 돈을 대부해 줄 것입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또 벅찬 환호와 박수가 장내에 메아리쳤다. 그는 실지로 군부와 서종현일 당의 강경파 중간에 서서 인명피해를 없애려고 무척 애썼다는 후일담이 많이 남아있다.
끝으로 인민공화국 만세삼창이 있었고, 최후의 결전가를 끝으로 시가행진에 들어갔는데, 도중에 많은 사람들이 끼어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대회를 계기로 그때까지 지하에 숨어 있던 민애청, 민청, 학동, 여맹, 합동노조, 교원노조, 철도노조원 6백여명이 자발적으로 인민의용군을 조직하고, 무기를 들고 경찰과 우익진영 인사체포에 나서는 바람에 시내는 새로운 긴장감이 확산되었다.
그리고 그날 밤 여느때와 같이 전등불이 빤짝 켜지자 어디서 나는지 불꺼라...는 우렁찬 함성이 시내에 메 아리 쳤다. 반면에 시내 곳곳에 있는 그들의 초소에서는 때아닌 모닥불이 훨훨 타올라 마치 어느 동화책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이때 그들이 전등불을 끄게 한 것은 라디오를 못듣게 하기위해서 였다고 함)
--------------------------------------------------------------------------3. 사무인계 10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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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무과장의 소집
어제의 분위기로 봐 우리 관공리는 별탈이 없을 것 같아 집에 멍하니 있는데 오후 2시경 청 부 육삼조가 올라와 내무과장 정주양의 회장을 내밀었다. 정주양의 친필이 틀림없는 그 회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고, 이미 70여명 직원들의 도장이 찍혀 있었다.
- 회 장 -
내일 오전 10시 군인민위원회에 사무인계가 있으니 전청원은 이 회장을 보는 즉시 등청하여 인계서 작성에 착수하시기 바람.
단기 4281년 10월 21일 내무과장 정주양
(이때 정주양이 군직원을 소집한 것은 군직원들을 유입시키기로 이용깅와 합의를 보았기 때 문이었다고 함)
이때 군수 장성필은 사건 전날 광주에 가고 없었기 때문에 내무과장이 군수 직무를 대리하 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회장으로 직원들을 소집한 것이었다.
군 인민위원회가 된 군청에는 무장보초만 두 사람 서 있을뿐 평소와 아무 다름이 없었다. 사무실에도 1백 20여명의 직원중 70여명 가량이 나와 있었다.
5.10선거당시 직원들 앞으로 선거보이콧 우편을 띄우고, 군청 인공기 게양사건으로 평소 주목을 받아오던 공보계 노용배, 학무계 강대학, 농회 서정태 세사람이 부지런히 설치고 다니면서, 과장급 이상은 몰라도 우 리 직원들은 아무 염려 없으니 걱정들 말라고 위로해 주었다.
조금 뒤 지시에 따라 줄을 서 자 인민위원회 간부란 사람이 나와 좌익식으로 하는 사무인계 서식을 말해 주었고, 또 이등 중사 계급장을 단 군인 한 사람이 어제와 오늘 사이에 14연대가 이룩한 전과를 설명해 주었다.
어제 아침 통근 열차 8량과 화물트럭으로 순천으로 올라간 2개대대 병력은 어제 오후 순천 을 점령한 뒤 3개 부대로 재편성하여 주력부대는 구계, 곡성, 남원을 점령하기 위해 학구로 향진 중이며, 또 한 부대는 보성, 화순, 광주를 점령하기 위해 벌교로 쳐들어가고 있고, 또 다른 한 부대는 하동을 발판으로 경상도로 쳐들어가기 위해 광양으로 진격중이라고 했다.
시간이 파한 후 나는 시내의 공기를 알아보기 위해 여기 저기를 돌아다녀 보았는데 시내는 어느덧 좌익일색으로 물들어 가는것 같이 보였다. 어쩌다가 경찰관이 잡혀나오면 행인들은 물론 우물가의 아낙네들까지도 열띤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일반 시민들 역시 당초의 공포 분위기와는 달리 윗전에 물러나 차분히 구경 하는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중앙동에 서 구둣방을 하는 오길곤을 찾았는데, 그는 나와 국민학교 동창생으로 못할 말이 없는 사이 였다. 우리는 소주에 오징어 다리를 씹으면서 마주 앉았다.
대관절 세상이 어떻게 될것 같애?
이 사람, 전국적인 현상인데 뭣이 어떻게 되긴 어떻게 돼. 다 돼버린 것이지 시내의 분위기는 좀 어떤가 올 것이 왔다고 다 좋아들 하고 있어.
오늘도 고연수서장의 사찰계 악질 형사놈들이 보안서 앞에서 10명 총살 됐는데 구경꾼들이 모여들어 박수를 쳤다는 거야 남들이 해도 자네는 하지 말어 쌍둥이가 다 하나, 물든 놈들이 하지. 우리는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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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위원회의 훈시 : 10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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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시에 군청 회의실에 모였다. 이용기가 막료 두 사람과 군인 두 사람을 데리고 정주양내무 과장과 함께 들어섰다. 우리는 긴장했다.
군직원 동무 여러분! 저는 아직 나이도 적고 또 배운 것도 아주 짧습니다. 동무들 가운데 는 저보다 연세도 많으시고 또 학벌도 높은 사람들이 많다고 알고 있습니다.
동무 여러분! 이번에 우리 14연대가 이승만도당들이 시키는 대로 만약 제주도로 갔더라면 어떤 결과가 왔겠습니까. 일제 36년 동안 그들 등살에 못견뎌 일본이나 만주등지로 유리걸식하고 다니다가 해방이 돼서 내 고향이라고 찾아온 우리 동포들을 그들은 5만명이나 죽였습니다. 그 이유는 단선단정을 반대 한다는 것 하나뿐입니다. 이승만 도당이 단선단정으로 조국을 영영 분단 시켜 놓자 이북에서도 할 수 없이 금년 8월달에 와서 전기를 끊어 버려 우리 남한내의 공장 기계가 안돌아 산업이 파탄됐습니다.
그리고 이승만이 미국의 괴뢰인 단독 정 부를 세우자 금년 9월 이북도 할 수 없이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을 세운 것입니다. 이 런 가운데 이번에 우리 14연대 동무들이 조국통일을 부르짖고 일어 선 것입니다.
군직원 동무여러분! 대체 미제국주주의가 하는 자본주의라는 것은 빈부의 격차가 너무 심한데도 사람이 살아 갈 수 있다고 보십니까. 어떤 사람은 배가 고파서 죽고, 어떤 사람은 배가 터져 죽습니다. 또 어떤 죄를 지어도 돈있고 권세있는 사람이 지으면 죄가 안되고, 돈없고 약한 사람이 지으면 죄가 됩니다. 한마디로 이런 세상은 뒤엎어 버려야합니다.
그래서 이번에 우리 인민위원회에 서는 과거 일본놈들한테 빌붙어 우리 민족을 못살게 군 친일파와 우리 민족은 굶어죽거나 말거나 대련이나 향항으로 우리나라 쌀을 내다파는 모리간상배들의 은행예금을 동결시키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권력과 결탁해서 부정하게 차지한 적산가옥을 재조사해서 정당한 연고권자에게 되돌려 줄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승만이 단선단정을 세우는데 앞장섰던 경찰을 비롯한 반동분자들을 철저히 소탕할 것입니다. 그리고 항간에는 경찰을 잡으면 현장에서 처형한다는 말이 떠돌고 있습니다만 그건 낭설입니다. 앞으로 경찰은 물론 어떠한 반동분자라도 반드시 보안서에서 엄밀히 조사해서 처리 할것입 니다.
그리고 되도록이면 군직원여러분을 그대로 포섭해서 썼으면 좋겠습니다만 대외적인 체면도 있는 것이니 여기서 호명하는 간부 몇 사람만 제외하고 나머지 동무들은 이 자리에 그대로 남아서 우리와 함께 혁명과업완수에 힘 써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열렬한 박수를 쳤다. 이어서 해직자 명단이 발표되었는데 군수 장성필, 내무과장 정 주양, 산업과장 한창석, 후생과장 박학래, 행정계장 윤태병, 학무계장 김주식, 공부계장 이기 호, 산립계장 이문재, 농정계장 심창식, 면작계장 나은채, 농사계장 나종방등 11명으로 기억 된다.그 자리에서 해직자를 대표해 정주양이 짤막한 이임 인사가 있었다.
이어서 군인이 나 서서 21일 현재의 전황보고를 했는데, 14연대는 보성, 광양, 구례, 곡성, 화순, 장흥, 담양, 남 원, 하동까지 완전 점령했다고 말해 우리는 또 박수를 쳤다.
우리는 행정반이란 붉은 완장을 얻어차고 사무인계서를 만들었으나 당장 인계받을 사람 이 있는것도 아니어서 지시에 따라 과별로 취합하여 위원장실에 넘겼다. 오후부터는 조를 짜서 친일파 모리간상배들의 은행예금고를 조사하고 적산가옥 대장을 열람하기 위해 각금융기관과 관재서 및 등기소로 나갔으나 어느 기관이나 개점 휴업상태여서 조 사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우왕좌왕 하다가 각기 집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집에와 보니 낮에는 국군 정찰기가 뿌리고 갔다는 전단을 아내가 몰래 주어놨다가 내 놓았 다.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 이범석 명의로 된 이 삐라에는 반란군은 지도자를 사살하고 부대의 백기를 달고 투항하거나,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집단 혹은 개인적으로라도 총기, 탄약, 화약을 파괴하고 귀순하라는 내용이었다.
여기서 나는 뒷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그때까지 이 사태가 전국적인 현상인줄로만 알고 있던 시민들도 단순히 14연대만의 반란사건이라는 낌새를 알게 되어 상당히 동요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뒷날에야 안 이야기지만 이때 건국 후 처음으로 여순지구에 계엄령이 선포됐었다는데, 그 때는 물론 그런 것을 알 턱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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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양심적인 경찰관 석방 : 10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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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익 인사 처형
아침 일직 정주양의 집에 갔으나 그는 이미 집에 없었다. 나도 남산동 친척집으로 몸을 피했다. 이날 들어온 소식에 의하면 읍인민위원회에서는 극빈자들에게 인민증을 발급해주고, 식량영단의 창고문을 열어 인민증소지자에 한해서 1인당 3홉씩의 쌀을 배급해 주었다고 했다. 그리고 각금융기관에서는 정상적인 일과로 돌아가 대부사무까지 취급했다고 하며, 각 사업 장에서도 종업원들에게 운영권을 넘겨주도록 했다고 한다.
한편 보안서에는 20일 새벽부터 그때까지 잡아들인 경찰과 우익진영 인사들이 약 1백20명가 량 되었다고 하는데, 이날 오전 10경 아군 정찰기의 엔진소리를 듣고 흥분한 나머지 그중 연창희(경찰서 후원회장, 5.10선거 출마자)와 박귀환(대동청년단장) 두 사람이 2층에서 뛰 어 내리다가 보초에게 사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여기에 당황한 보안서에서는 그동안 최고 심사위원회에서 사형이 확정된 경찰관 2명과 민간인 10명의 집행여부를 놓고, 결정대로 집행을 하자는 유목윤일당의 강경파와 징역으로 감일등 하자는 이용기일파의 의견이 대립돼 집행이 유보돼 왔는데 이같은 불의의 사고가 발생하자 이날 오후 2시 보안서 앞뜰에서 이들 을 처형해버렸다. 나머지는 전원 석방했다고 한다.
그런데 또 불의의 사고가 생겼다. 즉 이날 밤 업무타협차 의장단이 신월리군부에 가고 없는 사이에 평소에 행동대장이라고 설치고 다니던 서종현 일파가 낮의 최고심사위원회의 결정에 반발하고, 낮에 풀어준 사람들 중 평소 자기들과 감정이 안좋던 경찰관들을 도로 잡아다가 상당수 사살해 버렸다는 것이다. 이날밤 사살된 경찰관들이 과연 몇명이었는지 확실한 숫자 는 알 수 없지만 좌우간 여순사건으로 죽은 경찰관의 수는 전사자를 포함해 모두 74명으로 나타나 있다.
이날 낮 소위 양심적인 경찰관이라 해서 풀려난 사람들의 이름을 다 알 수 없 지만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사람들은 정홍수(보안과장), 정주용(수사과장), 이해진(경사), 허 종(경사), 김우본(순경), 이상배(순경), 김형순(순경), 이정호(순경), 정선도(순경)등이었고 이 날 처형된 경찰관 2명은 박찬길(사찰계 형사), 박기남(사찰계형사) 등이었으며, 민간인 8명은 김영준(천일고무사장, 한민당위원장), 차활언(한민당 5.10선거출마), 김창업(대한노총지부장), 김수곤(한민당), 최인태(우익), 김본동(우익), 서종형(우익), 이광선(미CIC 요원) 등이었다. 그런데 이때 김영준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의 아쉬움을 샀으며, 김창업이 마지막 부른 봉선화는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자기 아들을 둘씩이나 죽인 원수를 사형장에서 구해내 양자를 삼은 손양원목사의 거룩한 인간애는 많은 사람들을 감동 시켰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오동도 앞바다에 해군 함정 7척이 떠있어 시민들은 아연 긴장했다. 저군 함들이 아군 편이냐? 그렇지 않으면 14연대 편이냐? 하는 것을 궁금해했다. 그 의문은 곧 풀 렸다. 14연대 병사들과 민간인 가담자들이 군함을 향해 집중사격을 퍼부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또 새로운 걱정이 시민들의 머리를 무겁게 짓눌러왔다. 저 군함들이 함포사격을 퍼붓고, 국군이 순천에서 밀고 내려오면 여수 시내는 과연 어떻게 되겠느냐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시민들의 이런 걱정은 곧 현실로 눈앞에 다가왔다. 이날 오후 이 사건 후 처음으로 내외신 보도진까지 거느린 진압군이 송호성전투사령관의 진두지휘 아래 제3연대 부연대장 송석하소령 휘하의 주력부대가 둔덕동 철교위 산협까지 밀고 내려오다가 잠복한 14연대의 기습을 받 아 송호성이 차에서 떨어져서 고막이 터지는 참패를 당하고 순천으로 퇴각해 버린것이다.
그러나 이때까지 여수에 잔류하고 있던 14연대 1개 대대도 비록 국군의 1차 공격은 물리쳤 다 하더라도 순천이 21일 탈환된 마당에 퇴로가 차단될 것이 겁났던지 이날 야음을 틈타서 백운산방면으로 퇴각해버렸다. (지창수도 이때 퇴각했다함) 물론 이때 많은 민간인 가담자나 학생들도 그들의 뒤를 따랐고, 남은 것은 저들이 짐이 될까봐 안데리고 간 피라미들 뿐이었다.
이날 또 저들의 탄약을 운반하다가 여맹원 정기덕(18)이 사망했는데 그 뒷날 떠들썩한 인민장이 있었다. 또 이날, 의장단의 한 사람인 박채영이 구 여수일보를 여수인민보로 제호 를 바꿔 21일자로 소급발행 했는데 그들의 선전문으로 꽉 찼던 것은 물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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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5일 : 시민들의 피난 행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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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여수에 남아있던 14연대 주력부대가 퇴각한줄을 모르는 시민들은 오늘에야 말로 진압군이 대대적인 공격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아침부터 필사적으로 피난행각에 나섰다. 온 종일 서교 뒤의 한재와 미평가도는 피난민들이 장사진을 이뤄 마치 막혔던 봇물이 한꺼번에 터진것 같았다. 나는 앞으로 전개될 이 역사의 현장을 지켜보기 위해 여수에 남았다. 이때 여수 인구는 8만 명이었는데 어제와 오늘의 피난으로 시내가 텅텅 빈감이 있었다.
그러나 묘하게도 이날은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후일 들은 이야기지만 이날은 진압부 대를 재편성 하느라고 공백이 있었다함)
어떤 기록에는 이날도 국군의 공경이 있었다고 돼 있지만 적어도 여수에 남았던 나의 기억에는 그런 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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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6일 : 불바다가 된 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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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틀림없이 국군의 공격이 있을 것으로 보고 아침부터 여수시내는 숨막힐 것 같은 초긴장 상태에 빠졌다. 먼곳에 있는 사람의 숨소리까지 들릴것 같은 긴장감이 온 시내를 휘덮었다. 이런 것을 두고 태풍 전야의 정적이라고 한다던가. 일분, 또 일분 시간이 갈수록 온 시내가 무거운 침묵에 빠져 들었다.
아, 드디어 올것이 오고야 말았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1948년 10월 26일 오후 3시. 종고 산, 예암산, 장군산, 구봉산 꼭대기에 사람의 그림자가 얼씬거린다고 느껴지는 순간 종고산 꼭대기의 일성포화를 신호로 전 시내가 순식간에 포연탄우가 소가 돼 버리지 않은가!
육지에서는 사방에서 콩볶는것 같은 총소리! 따아 따아 따아하고 쉴 새 없이 뿜어대는 기관총소리! 쿠웅 쿠웅 쿠웅하고 천지를 뒤흔드는 박격포소리! 바다에서는 아무대나 용서 없이 쏴대는 함포사격소리! 하늘에서는 귀를 째는 비행기의 굉음! 좌우간 이 순간의 여수는 마치 지구 최후의 날을 연상케하는, 바로 그것이었다.
언제 어느 때 내집에 직격탄이 떨어질지 모르는 숨가쁜 순간들이었다. 이런 가운데서 어찌 살기를 바라랴. 하느님 맙소사. 그 순간 우리 여수사람들 입에서는 누구나 그 소리가 절로 나왔다. 우리 네식구들도 모두 자기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덮어쓰고, 온 가족이 서로 몸을 부 둥켜 안고 오들오들 떨었다. 그 순간에 할 수 있는 일이란 단지 그것밖에 없었다. 죽어도 온 식구가 같이 죽자는 절박한 생각만이 있을 뿐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다. 시가지를 완전포위하고 시내로 압축해 들어오던 진압군은 어느덧 집집마다 들이닥쳐 손들어하는 짤막한 외침소리와 함께 싸늘한 총구를 가슴에 들이댔다. 우리들은 그들이 내 모는대로 서국민학교로 향했다. 거리거리에는 진압군들이 총 구를 겨누고 서서 이탈자를 경계하고 있다. 이탈하면 반란군으로 보고 바로 쏴버린다는 것이다.
아직 잔당소탕의 전진이 자욱한 시내로 끌려갔다. 서교까지는 약 30분 거리였다. 도중 에 누구 한 사람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바로 도소의 양 그대로였다.
이윽고 서교 정문앞에 도착했다. 중기관총구를 시내쪽으로 세워놓고 군인들이 겨누고 있는 것부터가 섬뜩했다. 교정에는 벌써 많은 시민들로 꽉차 있었다. 주위를 무장군인들이 뺑 둘 러서서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다. 이날 이같은 현상은 동정 공설시장, 동국민학교, 진남관, 종산국민학교(중앙교), 서국민학교의 다섯군데에서 똑 같이 벌어지고 있었다.
우리가 온 서 국민학교는 진압군의 본부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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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0월 26일 : 즉결처분 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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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결처분 심사가 시작되었다.
심사라는 것은 14연대나 지방가담자들로부터 피해를 입었거나, 피해를 입으려다가 구출됐거나, 또 수배대상에 올랐던 사람들이 이번에는 거꾸로 현장에서 가담자 를 가려내는 것이었다.
생존 경찰관을 선두로 우익진영 요원들과 진압군인으로 이뤄진 5~6 명의 심사원들이 시민들을 열지어 앉혀놓고 사람들의 얼굴을 훑고 다니다가 가담자가 눈에 띄면 저 사람하고 손가락질만 하면 끝장이었다. 바로 교사 뒤에 파놓은 구덩이 앞으로 끌려가 불문곡직하고 즉결처분(총살)을 해버렸다.
임사호천, 사람이란 누구나 죽게되면 하늘을 부른다고 했다. 그때 여수시민들은 누구나 마음 속으로 하늘을 불렀다. 그런 가운데 정문에 간혹 소탕작전에서 잡혀오는 것으로 보이는 파리한 몰골의 젊은이들이 2~3명씩 나타났다. 그들도 뒤뜰로 끌려갔고, 어김없이 기분 나쁜 총 소리가 뒤 따라와 사람들의 간장을 얼어붙게 했다.
이런 심사는 한번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심사원들의 얼굴이 바뀔때마다 다시 반복된다. 이유는 심사원들이 5개 수용소를 번갈아 돌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때 사람들이 제일 겁을 먹은 것은 아무리 양민이라 할지라도 혹 운수가 나쁘면 그들의 착각이나 혹은 개인 감정에 의해서 손가락질을 받지 않을까 하는 불안 때문이었다.
장내에는 남녀노소 그 많은 사람들이 꽉차 있으면서도 숨소리 하나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 때 심사의 기준은 다음과 같은 것이라 했다. .
교전중인자 .
총을 가진자 .
손바닥에 총을 쥔 흔적이 있는자 .
흰 지카다비를 신은자 .
미군용 군용팬티를 입고 있는자 .
머리를 짧게 깎은자
이윽고 오후 6시가 되었을까, 뒤에서 약간 어술렁이는것 같아 뒤돌아 보았다. 아! 그런데 거 기에는 여수읍장 김정식과 군 내무과장 정주양이 장교 한 사람의 안내를 받아 본부로 당당 히 걸어들어오고 있지 않은가.
이 순간 시민들은 환성이라도 지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 기대는 헛되지 않고 나타났다. 그것은 이들이 계엄사령관 박기병소령과 담판한 결과 첫째 한집에 한 사람씩의 부녀자들을 돌려 보내 밥과 모포를 가져오게 한다. 둘째 여기와 있는 기관장이나 지방유지에 한해 두 사람이 신원을 보증하는 사람은 통행증을 끊어줘 이날밤 돌아가게 한다는 두가지였다. 그 결과 서교에 와 있는 군직원 7명이 불려나가 본부요원으로 군정반이라는 완장을 차고 이런 서무를 맡아보게 됐던 것이다.
나는 그때 상사를 잘만나 14연대 치하에서와 진압군치하에서 두번씩이나 완장을 얻어차고 모진 고생을 면한 것을 지금도 감사히 생각하고 있다. 그날밤 우리 군정반에서 통행증 을 끊어준 사람은 23명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날 밤 8시께였다. 난데없이 서시장 일각에서 불이 나 온 밤을 제멋대로 타면서 서교동 일대를 완전히 태워버렸다. 그러나 거기있는 사람치고 그 누구도 화재 따위에는 별 관심도 없었다. 밤이 깊어갔다. 썰렁한 땅바닥에 앉아 온 밤을 나는 시민들의 고생은 정말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늦가을의 찬서리를 바로 맞으면서 뼛골까지 스며드는 모진 추위를 견딘다는 것은 일제 36년동안에도 차마 겪어 보지 못했던 일이다. 그런데 해방된 조국에서, 그것도 같은 동포로부터 그 같은 고통을 받는다는 것은 정말 하늘에 사무치는 원한이 아닐 수 없었다. 사람들은 차라리 이런 땅에 내 몸을 낳게 해준 하늘을 원망했다. 이같은 고통은 서교뿐 아니 라 5개 수용소가 다 마찬가지일터 였다.
사건 진압후 우리 여수 사람들은 이런 몸 서리치는 조국을 버리고 일본으로 밀항한 사람들 이 많이 생겼다. 그래서 나의 생각은, 이같은 일은 비단 우리 여수에서 만의 일은 아니고, 해방 후 제주도 4.3사건이나 6.25사변을 겪는 과정에서 군경으로부터 받는 모진 탄압 때 문에 조국을 등지고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일본에서 한때 조총련이 성 한것도 그 까닭이 아니었나 생각될때가 있다.
한편, 이날 최후까지 여수에 남아 저항을 시도했을 것으로 보이는 14연대 잔당 일당이 이날 오후 5시 여수를 마지막으로 떠나면서 당시 한국은행 여수지점에 있던 돈 3억 6천만원 가운 데 2천 1백만원을 싣고 갔다. 좌우간 이같은 무자비한 색출로 양산된 그들이 퇴각한 곳은 백운산이었다.
여기서 의문으로 남은 것은 이용기의 자살이다. 그는 무엇 때문에 14연대 잔당들을 따라가 지 않고 석천사뒤 마래산에서 혼자 소나무에 목을 맨 채로 발견 됐을까? 그때 그의 나이 40 세. 이 사건에 대한 도의적 속죄때문이었을까? 혹은 공산주의에 대한 회의 때문이었을까? 그렇잖으면 입산생활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그가 간지 이미 40개 성상이 흘렀지만 오 늘날까지도 그의 죽음은 구구한 억측을 남긴채 많은 사람들의 뇌리속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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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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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여수의 심장부를 태우다 신항에 있던 마산 5연대 1대대(대대장김종원대위)가 상륙했다. 시내에서는 아직 산발적으 로 소탕전을 벌이고 있는것 같았다.
서교에서는 오전 중 또 한차례의 심사가 있었다.
이날 밤 두번째의 화재가 일어났다. 밤 8시께 충무동 시민극장 근처에서 갑자기 화광이 치 솟더니 순식간에 해안통에 산더미같이 쌓여 있는 휘발유드럼에 옮겨붙었다. 그야말로 마치 로마의 대화재를 연상케 하리만치 큰 불로 번져나갔다.
화재가 휘발유드럼에 옮겨붙자 휘발 유드럼이 천지가 깨지는것 같은 무서운 굉음을 내면서 하늘로 치솟았다. 아무도 끄는 사람 이 없는채 이 불은 28일 오후까지 뭉게뭉게 탔는데 이 불로 중앙동, 교동, 충무동 일대의 여수시 중심가가 완전히 잿더미가 돼버렸다.
진압군 측에서는 박격포사격으로 인해 불이났다 고 발표했다. 그러나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 불은 연이틀 동안 똑 같은 밤 8시에 났을뿐 아니라, 그 시간에는 박격포도 쏘지 않고 또 쏠수도 없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구나 건물안에 숨은 잔당들의 소탕을 위해서 진압군이 일부러 불질을 한 것으로 치부하고 있었다.
종산국민학교의 비극 이날 오후 3시께에야 시민들은 풀려났다. 시간의 차이는 약간 있었어도 5개 수용소가 다 마 찬가지였다.
사람들은 이것으로 사건이 일단락 된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때부터가 새로운 시작이었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가담자의 색출과 처벌이란 무서운 토벌작전을 시작했다. 즉 40세미만의 남자들은 일용 가담혐의가 있는 것으로보고 종산국민학교에 따로 수용하고 살벌한 색출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여수의 하늘은 다시 검은 먹구름이 뒤덮였다. 숨막힐 것같은 무서운 공포분위기가 온 여수 를 짙게 내려 누르고 있었다. 내 가족의 시체가 밖에 버려져 있어도 군경이 무서워 그대로 방치 해야했고, 길거리에 혹시나 군경을 만날까봐 일부러 골목길을 택해 살금거리며 다녀야 했다. 오늘날 광주사태가 어쩌고 하지만, 그래도 요즘은 민주화가 많이 된 세상이고, 어떤의미에서는 그런대로 범 질서도 잡혀 있는 상태하에서의 광주사태다. 그때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대한민국 건국 후 최초의 계엄하요, 토벌작전하의 여수였다. 완전 인권 제로지대였다.
가담자를 색출해 내기위해 수도경찰이라 부르는 주부대(주종일 경감)와 전남도경 특수대, 그리고 여수경찰 특수대가 종산국교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들은 시민들을 팬티만 입힌 알몸으로 교정에 앉혀 놓고 근달포동안 한 사람씩 조사실로 불러들여 장작개비를 휘두르며 자백을 강요했다. 견디다 못한 피의자들은 끝내는 마의 절규 같은 단말마적인 비명을 지르 다가 까무라쳐 버린다. 그러면 바케쓰로 찬물을 끼얹고 다시 고문을 반복, 억지로라도 자백을 받아내야 그만 두는 것이었다.
교정 북쪽 버드나무 밑에서는 백두산호랑이(김종원을 지칭)가 시내에서 잡아오는 가담자들을 시민들이 두려움 속에 지켜보는 가운데서 권총으로 쏴 죽이고, 일본도로 쳐 죽이는 등 천인공노할 학살을 광란적으로 벌이고 있는 판이었다.
가담자들이 그해 11월 13일부터 14일까지 이틀동안 순천고등군범회의에서 재판을 받았는데, 그때의 언도받은 내용이 바로 그들의 죄상이 어떠 했는가를 백일하에 폭로해 주고 있다.
재판에 회부된 인원 : 458명
양민으로 판명돼 석방된자 : 190명
사 형 : 102명
20년 징 역 : 75명
5년 징 역 : 79명
무죄 석방 : 12명
이때 강석오작사, 박시춘작곡의 여수부르스가 흘러나와 여수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는데 곧 진압군에 의해 금지돼 자취를 감춰버렸다. 그 가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여수 부르스
1. 여수는 항구였다아- 철석철석 파도치는 꽃피는 항구 안개속에 기적소리 옛님을 싣고 어디로 흘러가나 어디로 흘러가나 재만 남은 이 거리에 부슬부슬 이슬비만 내리네
2. 여수는 항구였다아- 마도로스 꿈을 꾸는 꽃피는 항구 어버이 혼이 우는 빈터에 서서 옛날을 불러봐도 옛날을 불러봐도 오막살이 처마 끝에 부슬부슬 이슬비만 내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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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맺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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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칭 여순반란사건으로 불리우는 이 사건은 1948년 10월 19일에 일어나 25일까지 7일동 안 14연대 치하가 되었고, 26일부터 27일까지 진압군의 소탕작전이 있었으며, 28일부터 12월 중순까지 약 달포 동안 가담자 색출과 처벌이라는 미증유의 공포시대를 만나 여수를 꽁꽁 얼어붙게 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14연대 치하에서는 그들이 말하는 소위 반동분자로 수배된 사람들이 나 떨었지 일반 시민은 별로 다치지 않았다.
그러나 국군이 쳐들어와 소위 진압작전을 벌이 면서부터는 시내의 공기가 무겁고 소름끼치는 공포 분위기로 완전히 일변했다.
우선 그 진압작전이란 것만 해도 진압군이 쳐들어왔을 때는 14연대 주력부대는 이미 다 퇴각 해 버리고 피라미 같은 학생들 정도가 산발적으로 대항할 정도였다. 그런데도 무엇 때문에 육해공 3군이 합동작전을 벌여 여수를 불바다로 만들었는가 하는 아쉬움이 클 뿐이다. 그것은 당시 진압군의 일원이었던 함병선 소령도 명백히 증언하고 있는 바이다.
또 한가지는 아무리 잔당들이 건물에 숨어 저항한다 할지라도 꼭 시가지에 두 차례씩이나 불을 지르지 않으면 이들을 완전 소탕할 수 없었느냐 하는 뼈아픈 의문이다.
또 있다. 진압군의 무분별한 살상행위가 보여준 야만성이다. 국군이 정부의 관리 잘못으로 반란을 일으켜 국민에게 피해를 줬다면 마땅히 그 원인을 제공케한 정부가 책임을 지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인데, 당시 이승만정부는 저들의 총칼앞에 마지 못해 가담한 사람들까 지도 그 흑백을 가릴 겨를도 없이 마구잡이로 학살해 버렸다는 사실이다. 그 때문에 오늘날 우리 여수에는 그 당시 한창때일 50~60세 남자가 귀하다.
이것은 저 6 25때 아무런 저항 능력이 없던 보도연맹을 전국적으로 대량 학살했던 사건과 견주어 보면, 여수사건때 우리 여수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억울하게 희생당했나 하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볼때, 당시 알게 모르게 이같은 민족적 죄악을 범한 책임자들은 마땅히 마음속으로 나마 민족 천추의 역사 앞에 깊이 깊이 사죄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