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월 19일 목요일
루카 1,5-25
자녀는 부모가 태어나기 전부터 기대한 대로 된다
오늘 복음에서 가브리엘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구세주의 선지자가 그에게서 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그는 믿지 못합니다.
그것을 믿었다가 아니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창피만 당할 것입니다.
그가 평생 청해온 것이면서 믿지 못하고 청했던 것입니다.
즈카르야는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냥 그렇게 되는지, 안 되는지 시간이 지나 보면 알 것을 해 보지도 않고 무조건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이에 천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 하게 될 것이다.” 천사가 즈카르야의 입을 막아버린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런 벌을 통해서라도 자신의 말이 진실임을 믿기를 원하였기 때문입니다.
만약 믿지 못하고 엘리사벳과 합방을 하지 않았다면 요한은 태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녀의 미래를 위해 부모의 믿음은 절대적입니다. 자녀가 태어나기 전부터 차곡차곡 자녀의 미래를 설계한 부모는 자녀의 성공을 지켜보게 됩니다.
리처드 윌리엄스는 두 딸, 비너스와 세레나 윌리엄스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들을 세계적인
테니스 선수로 키우겠다는 확고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는 TV에서 한 테니스 선수가 우승 상금으로 4만 달러를 받는 것을 보고, 테니스의 잠재적 기회를 깨달았습니다.
흑인으로서 성공할 수 있는 길을 스포츠에서 찾은 것입니다.
그는 딸들이 태어나기 2년 전부터 전혀 무지했던 테니스에 관심을 가지고 78페이지에 달하는
‘챔피언 육성 계획서’를 작성하였습니다.
비디오 레슨과 도서를 통해 독학하며 딸들에게 직접 테니스를 가르쳤습니다.
특히, 그는 딸들을 벽에 세우고 빠른 속도로 공을 쳐 내며 방어 능력을 키우는 등 독특한 훈련 방법을 도입했습니다.
리처드는 “계획을 세우지 않는 것은 실패를 계획하는 것과 같다.”라는 신념 아래, 딸들의 훈련뿐만 아니라 정신적 성장에도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딸들은 아버지의 지도 아래 혹독한 훈련을 견뎌냈으며, 나중에는 아버지의 헌신과 비전에 깊은 감사를 표했습니다.
세레나는 한 인터뷰에서 “아버지는 항상 우리를 믿어주셨고, 그 믿음이 오늘의 우리를 만들었다.”라고 말했습니다.
미리부터 믿고 계획하여 자녀를 키우면 자녀는 성공할 확률이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나중에야 테니스 재능을 깨닫고 시작한 이들은 태어나기 전부터 준비된 이를 이길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실험을 자녀에게 한 대표적인 심리학자가 루돌프 폴가르입니다.
헝가리의 심리학자 루돌프는 “천재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는 자녀가 태어나기도 전에 “나는 자녀들을 체스 천재로 만들 것이다.”라고 계획을 세웠고,
그 믿음에 따라 자녀들에게 체스를 가르쳤습니다.
첫째 수잔 폴가는 세계 4위까지 올랐고,
둘째 소피아 폴가는 여성 선수 1위,
셋째 주디트 폴가는 당시 최고의 체스 천재였던 바비 피셔를 꺾고 당당히 최연소 세계 챔피언에 올랐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은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께서 자녀에게 어떤 삶을 바라는지 깨닫고 그렇게 준비하고 키우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만약 그렇게 한다면 이 세상에서는 훌륭한 자녀를
키워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느님 앞에서도 큰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그러기 힘듭니다.
왜냐하면 부모가 자녀의 선택권을 박탈했기 때문입니다.
자유를 빼앗긴 자녀는 부모에게 이용당한다 느끼기에 온전한 자존감으로 살아가기 어렵습니다.
만약 그런 것이었다면 가브리엘 천사가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지
알려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천사의 말은 모호합니다.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
그가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우리는 자녀가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 것”이란 믿음은 가져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만 그렇게 창조하셨을까요? 우리 모두도 세례자 요한처럼 귀한 인간입니다.
다만 부모가 그렇게 믿어주냐, 그렇지 않으냐에 따라 자녀가 어디까지 성장하느냐가 달렸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렇습니다.
부모는 유대인들이 자녀가 하느님의 것임을 인정합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한 목적이 있을 것이란 것은 믿어주지만, 그의 삶을 구체적으로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자신이 찾아가도록 맡기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을 보면 될 것입니다.
어머니는 어긋나는 아우구스티노를 보면서 하느님은 그런 삶을 살라고 창조한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아우구스티노는 회개하고 하느님 앞에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분명 우리 자녀가 세례자 요한처럼 하느님 앞에 큰 인물이 되려고 창조되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삶의 방향은 본인이 찾아가도록 유도하며 믿어주고 기도해주면 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2월19일
그냥 모든 것을 맡겨드리고 나니
비록 오랜 세월이 흐르고 난 후의 응답이었고, 너무 늦은 감이 드는 응답이었지만 하느님의 응답에 기쁨과 감격에 찬 어조로 외치고 있습니다.
엘리사벳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의 남편 즈카르야는 또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무엇보다도 두 사람은 한 평생 하느님 앞에서 의롭게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로 법이 없어도 살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 무수히 많은 율법 계명과 규정들이 백성들을 괴롭혔지요.
그 모든 계명들을 다 지켜나가기란 하늘의 별따기 였습니다.
정녕 숨 막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두 사람은 그 모든 율법과 규정들을 철저하게 지켜나갔습니다.
한 점 흠 없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언제나 성실하게 성전에서 봉사하며 하루 온 종일을 기도하며,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한 가지 있었는데, 자식이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나 저제나 했었지만, 끝까지 자식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어느덧 세월이 흘렀습니다.
둘 다 이젠 자식을 희망할 수 없는 노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당시 ‘많은 후손’처럼 큰 축복은 없었습니다.
자식 많은 것은 축복 중의 축복으로 여겼습니다. 반대로 자식이 없다는 것은 축복의 반대 개념이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눈길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노년에 손자손녀를 안아보는 기쁨은 얼마나 큰 것입니까?
평생의 결실, 뿌듯함과 흐뭇함의 대상이 아들이요, 손자손녀이지요.
명절이 다가오면 외로움은 더욱 커졌습니다. 집집마다 찾아온 아들들, 며느리들, 손자손녀들로 복잡한 이웃집이 부러웠습니다.
밤늦도록 왁자지껄 떠들면서 먹고 마시는 모습들이 정말 부러웠습니다.
오직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의 집만이 적막감이 감돌았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원망도 많았습니다.
섭섭함도 많았습니다.
“저희가 도대체 뭘 잘 못 했길래?” 하는 억하심정도 생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끝까지 하느님께 충실했습니다.
끝까지 하느님께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성전에서 충실하게 봉사했습니다.
항상 기도 안에 살았습니다.
고통스러웠지만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이런 두 사람의 항구한 신앙, 충직한 종의 모습에 마침내 하느님께서 응답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힘을 포기할 때 깨달을 수 있습니다.
복음의 진리도 인간의 능력을 내려놓을 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정녕 하느님을 만나고 진하게 하느님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그냥’ 모든 것을 맡겨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분께서 주도하시는 흐름에, 그분의 물결에 그냥 내 존재 전체를 맡길 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 체험의 출발점은 어디입니까?
하느님은 내 힘이 다한 곳에서 체험됩니다.
하느님은 내 존재의 비참한 곳까지 내려가 외롭게 되었을 때 비로소 체험되는 존재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며 완전히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풀이 죽을 때 하느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는 곳에서 비로소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이제민, 제3의 영성, 바오로딸 참조)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2월 19일 강론>
(2024. 12. 19. 목)(루카 1,5-25)
<‘하느님의 일’은 인간의 과학과 상식을 ‘초월’합니다.>
“즈카르야가 천사에게,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 하고 말하자, 천사가 그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하느님을 모시는 가브리엘인데, 너에게 이야기하여 이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파견되었다.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
한편 즈카르야를 기다리던 백성은 그가 성소 안에서 너무 지체하므로 이상하게 여겼다.
그런데 그가 밖으로 나와서 말도 하지 못하자,
사람들은 그가 성소 안에서 어떤 환시를 보았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몸짓만 할 뿐 줄곧 벙어리로
지냈다.
그러다가 봉직 기간이 차자 집으로 돌아갔다.
그 뒤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였다. 엘리사벳은 다섯 달 동안 숨어 지내며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 일을 해 주셨구나.’(루카 1,18-25)”
1)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를
원문대로 직역하면, “제가 무엇으로 그것에 관해 알 수 있겠습니까?”인데, 자기가 믿을 수 있도록 어떤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청하는 말입니다.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는
자기가 천사의 말을 믿지 못하는 이유를 말한 것입니다.
즈카르야는 자신과 아내 엘리사벳이 너무 늙어서
아기를 낳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도 아니고, 믿음이 부족한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그가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천사의 말을 믿지 못한 것을 잘못이라고(죄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말을 못하게 된 것은 ‘벌’이 아닙니다.>
“나는 하느님을 모시는 가브리엘인데, 너에게 이야기하여 이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파견되었다.” 라는 말은, 가브리엘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한 말은 모두 천사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아들이 태어나는 것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은, “하느님 말씀은 ‘때가 되면’ 반드시 이루어진다.
그러니 그 말씀을 믿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 라는 말을 겉으로만 보면, 믿지 못한 것에 대해서 말을 못하게 되는 ‘벌’을 준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아니고, 즈카르야가 요청한 대로 ‘표징’을 준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습니다.
즈카르야가 갑자기 말을 못하게 된 것이 표징이 아니라, 아기가 태어난 후에 다시 말을 하게 된 것이 표징입니다.
“그 모든 일은 ‘하느님의 일’이라는 것”을 알려 주는 표징.
<그런데 왜 표징을 그런 식으로(‘말’에 관한 일로) 주었을까?
아마도 세례자 요한의 사명이 ‘선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기의 사명이기 때문에, 표징도 ‘말’에 관한 일로 주어진 것 같습니다.
즈카르야가 사제라는 것을 생각하면, 믿음이 없거나 부족한 사람은 사제 자격이 없다는 것을, 또 하느님 말씀을 전할 자격이 없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일이기도 합니다.
즈카르야는 믿음을 완전히 갖게 될 때까지 ‘사제 자격 직무 정지’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가 믿음을 완전히 가진 때는 아기가 태어났을 때입니다.
따라서 그가 아들이 태어나기를 기다린 시간은,
침묵 중에 하느님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이 아니라, 반신반의 하면서 초조하게 기다리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2) 즈카르야는 말을 못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듣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루카 1,62).
그러나 글을 쓸 수는 있었기 때문에(루카 1,63),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엘리사벳에게 전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신이 믿지 못한 일을 엘리사벳에게 믿으라고 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엘리사벳이 자신의 잉태를 ‘하느님의 일’로 믿으면서도, 아기의 사명을 이해하지는 못하고, ‘나에게’ 베풀어 주신 은총으로만 생각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엘리사벳이 모든 것을 완전히 깨닫게 되고 알게 된 때는 마리아가 방문했을 때입니다(루카 1,40-45).
3) ‘하느님의 일’은 인간의 과학과 상식을 초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과학과 상식이 ‘믿음’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될 때가 많습니다.
그 걸림돌을 극복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즈카르야의 경우처럼 천사가 나타나서 직접 설명을 해 준다면 좀 더 쉽게 믿음을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도움이 없다면, 지금 나에게 일어난 일이 ‘하느님의 일’인지, ‘사람의 일’인지 판단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 됩니다.
<그 일이 고통스럽고 불행한 일이라면 특히 더 그렇습니다.
만일에 지금 어떤 고통을 겪고 있다면, “주님은 나에게 고통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더욱 굳게 믿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 4,6-7).”
기도하는 동안에 평화를 얻는 일은 누구든지 금방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 평화는, 하느님의 뜻을 알게 해 주는 깨달음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불행과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힘과 용기의 원천이 되기도 합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