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12일 [연중 제19주간 월요일]
마태오 17,22-27
이 세상에서 천국을 살려면: 무분별의 지혜
몇 년 전에 아이들과 물놀이를 가서 한참 물을 뿌리며 노는데 구석에 앉아있던 고등학교
남학생들로 보이는 아이 중 한 무리에 물이 조금 튀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 하나는 기분이 매우 나쁘다는 듯 저를 째려봤습니다.
물놀이 시설에서 물속에 앉아서 얼굴에 물이 조금 튀었다고 해서 그렇게 기분 나빠 할 것이면 물 밖에 앉아있던가 물놀이를 오지 말아야 할 텐데 굳이 거기 앉아서 당연히 튀는 물에 기분 나빠하는 아이들이 마냥 신기하기만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있는 어른에게 무례하기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저의 분별심을 잠시 접고 아이들의 자존심을 상해주지 않기 위해 정중하게 미안하다고
사과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아이는 학교 선생님처럼 근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심각한 자세로 돌아앉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들이 행복하지 않은 것을 남 탓을 하려고 항상 준비되어 있습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심이 극도로 치솟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분별심을 없애주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셔야 한다는 것도 옳지 않다고 여깁니다.
또 성전세를 내는 것도 어쩌면 자존심 상해 하십니다.
예수님은 임금의 아들이 궁궐에서 세금 내며 살 필요가 없는 것처럼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당신도 성전에서 세금을 바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옳은 일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라고 명하십니다.
당신이 가진 돈을 주시지 않고 물고기를 잡아 주라고 하시는 것은 하느님께 바치는 것은 주님께서 어떻게든 채워주신다는 뜻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한화로 2만 원 정도 하는 한 스타테르 동전을 문 물고기가 베드로가 던진 낚시에 잡힐 확률은 실제로 없다고 보아도 무관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네가 이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음을 모르는데 뭐를 판단하니? 너의 판단을 멈추어라!”
사람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분별심’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이들은 분별심이 없습니다.
부모가 다 알아서 분별해주기 때문입니다. 분별심은 ‘나’가 자신을 지키려고 선을 긋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어린아이가 독사굴에 손을 넣고 맹수와 함께 뛰노는 곳입니다.
나를 지켜주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적을 때 분별심이 커지고 그 자아 때문에 사람은 고통 속에서 삽니다.
그러다 회개하지 못하면 천국 무분별의 세계에서는 살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뮤지컬 ‘레 미제라블’에서는 장 발장과 자베르 경감의 관계가 이야기의 중심입니다.
장 발장은 빵 한 덩어리를 훔친 혐의로 19년 동안 감옥에서 복역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 알듯이 주교님의 무분별한 자비심으로 회개하여 신분 세탁하고 존경받는 시장이자 공장 소유주가 됩니다.
자베르 경감은 법과 사람은 변할 수 없다는 생각을 깊이 믿는 완고하고 냉혹한 경찰관입니다.
그는 가석방을 위반한 장발장을 자신의 도덕적 의무로 재판에 회부하기로 결심합니다.
이때 1832년 파리 봉기 동안 장발장은 혁명가들에게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은 자베르를 죽일 기회를 얻습니다.
이미 옳고 그름의 세상에서 발을 뗀 장발장은 복수하는 대신 이렇게 말하며 그를 풀어줍니다.
“당신은 자유롭고 조건이 없습니다. 거래나 청원도 없습니다.
내가 당신을 비난할 것은 없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의무를 다한 것입니다. 더는 없습니다.”
이 자비로운 행동은 자베르의 세계관을 완전히 깨뜨립니다.
그는 장발장의 친절함과 그가 받은 자비와 법과 정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조화시킬 수 없습니다.
자베르의 입장에서는 죄수가 그러한 연민을 보일 수 있고 자비가 법을 초월할 수 있다는 생각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법에 대한 의무와 그가 받은 자비 사이의 내부 갈등에 대처할 수 없었던 자베르 경감은 궁극적으로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센 강에 뛰어들어 생을 마감합니다.
나를 품고 계신 분이 정의 자체이신 분입니다. 그분의 정의는 언제나 옳습니다.
그러니 나의 분별심을 그분께 봉헌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나는 어린이처럼 판단할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되어 자비심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천국입니다.
나를 지옥으로 만드는 자아가 하느님의 품 안에서는 할 일이 없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8월12일 [연중 제19주간 월요일]
복음: 마태 17,22-27
성전 세를 받으셔야 할 주님께서 성전 세를 바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 세와 관련해서 베드로 사도에게 아주 특별하고 기이한 명령을 내리십니다.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한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
오늘 보여주시는 기적은 대체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독특한 이적 사화는 아마도 후대에 가필(加筆)된 것으로 추정됩니다만,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이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제정해놓은 편협하고 제한된 제도나 관습으로부터 철저하게 자유로운 분이심을 강조하는 기적이 아닐까 싶습니다.
유다 지도층 인사들은 목숨을 걸고 성전 세를 징수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성전 세가 어떤 사람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지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의 구린 관례나 시궁창 냄새 나는 악습을 완전 개무시하는 한 표현이 지니고 있는 돈주머니에서 성전 제를 내지 말고 물고기 속의 돈으로 성전 세를 바치라는 말씀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께서는 세금 징수에 목숨거는 유다인들에게 큰 엿을 하나 먹이신 것입니다.
카파르나움 세금 징수원은 예수님께 성전세를 요구했는데, 사실 이것처럼 천부당만부당한 일이
다시 또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그분은 이스라엘의 주님이신 하느님 아버지의 외아드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리도 애지중지하는 성전의 주인이십니다.
그렇다면 백성들이 바치는 성전세를 수령하실 분은 사제나 랍비들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성전의 주인이신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성전세 징수원은 기가 막히게도 성전의 주인이신 예수님께 성전세를 바치라고 하였습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했겠는지, 충분히 짐작이 갑니다.
서글프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셨던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명하신 것이 갈릴래아 호수에 가서 낚시를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세를 바치셔야 할 분이 아니라 성전세를 받으셔야 할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굳이 까칠한 유다인들의 비유를 건드릴 필요가 없으니 베드로 사도에게 꽤 웃기는 방법으로 돈을 마련해 성전세를 바치라고 당부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다시 한번 예수님의 지극한 겸손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왕 중에도 한참 아래쪽의 왕인 세상의 왕에게 겸손하게 세금을 바칩니다.
큰 나라 전체를 다스리는 황제가 한 고을을 다스리는 영주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부여해주신 권한을 단 한 번도 남용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저 겸손하게 하느님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바로 그것만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따라가십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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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9주간 월요일 강론>
(2024. 8. 12. 월)(마태 17,22-27)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하느님이신 분입니다.>
“그들이 갈릴래아에 모여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몹시 슬퍼하였다.
그들이 카파르나움으로 갔을 때,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이 베드로에게 다가와,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 세를 내지 않으십니까?’ 하고 물었다.
베드로가 ‘내십니다.’ 하고는 집에 들어갔더니 예수님께서 먼저, ‘시몬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서 관세나 세금을 거두느냐? 자기 자녀들에게서냐, 아니면 남들에게서냐?’ 하고 물으셨다.
베드로가 ‘남들에게서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그렇다면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마태 17,22-27)”
1)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것을 계시하셨다는 증언입니다.
<성전 세를 내신 일은 부수적인 일이고, 성전 세를 내는 일을 계기로 삼아서 당신의 신원을 드러내신 일입니다.>
‘성전 세 규정’은 탈출기 30장에 있습니다.
“인구 조사를 받는 이는 누구나 성소 세켈로 반 세켈을 내야 한다.
한 세켈은 스무 게라이다.
그 반 세켈은 주님에게 올리는 예물이다.
인구 조사를 받는 스무 살 이상의 남자는 누구나 주님에게 예물을 올려야 한다.
너희 목숨에 대한 속죄로 주님에게 이 예물을
바칠 때, 부자라고 반 세켈보다 더 많이 내도 안 되고, 가난한 이라고 이보다 덜 내도 안 된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서 속전을 받아, 만남의 천막 예식 비용으로 쓰도록 내주어라.
이것이 주님 앞에서 너희 목숨에 대한 속죄의 기념이 될 것이다(탈출 30,13-16).”
성전 세는 로마제국과는 상관없이 유대교에서 자체적으로 징수하던 세금이었습니다.
당시에 성전 세는 일 년에 한 번씩 거두었고,
그 돈은 성전 유지와 관리를 위한 비용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성전 세를 내지 않느냐는 질문에 베드로 사도가
‘내십니다.’ 라고 대답한 것은, 예수님께서 평소에
성전 세를 내셨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2) “그렇다면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계시입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를 비롯해서 사도들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것을 이미 믿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본 사도들은,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라고
자신들의 믿음을 고백했습니다(마태 14,33).
또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라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 사도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라는
신앙고백의 말을 했습니다(마태 16,15-16).
그래서 ‘성전 세를 내신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계시하셨음을 기록한 것은, 복음서를 읽는 독자들을(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믿는 믿음은,
사실은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라고 믿는 믿음입니다.
삼위일체 안에서 성부 하느님과 성자 하느님은
한 분이신 하느님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10,30).
이 말씀은 비유나 상징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 말씀하신 ‘진리’입니다.>
3)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하느님이신 분이니까
성전 세를 내지 않아도 되는데, 왜 내셨을까?
27절에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를 원문대로 직역하면,
“그러나 그들이 걸려 넘어지게 하지 않도록”입니다.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다.’ 라는 번역은 좀 이상합니다.>
‘걸려 넘어지게 하지 않도록’은 ‘죄 짓게 하지 않도록’입니다.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은 정당한 직무 수행을 하는 중이고, 그리고 그 규정은 원래 하느님께서 직접 명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 문제나 정결 예식 문제로 바리사이들과 충돌한 일이 많은데, 그 충돌은 바리사이들이 만든 규정들 때문이었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계명들과 율법들을
‘모범적으로’ 준수하셨습니다.
또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성전 세를 내신 것은 “하느님의 명령을 지키는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그리고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의 직무 수행을 존중하고 그들을 배려하기 위해서” 라고 해석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 세를 낼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
‘작은 기적’을 행하시는데, 그 기적은 “봉헌이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일”이라는 가르침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나의 것’은 없습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주님께서 주신 ‘주님의 것’입니다.
그것을 잠시 내가 맡고 있는 것뿐입니다.
4)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니까 성전 세를 내지 않아도 되는데 왜 내셨을까?” 라는 질문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이 왜 사람들 손에 넘겨져 죽으셨을까?” 라는 질문에 연결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인류를), 그리고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주셨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 일은 우리에 대한(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것이(1요한 4,9-10) 우리의 믿음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