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산무진 江山無盡 ENDLESS NATURE
김동욱展 / KIMDONGWOOK / 金東旭 / photography
2009_0918 ▶ 2009_0927
김동욱_방겸재(倣謙齊)-백악과 인왕사이 서울을 보다_종이에 피크먼트 잉크_150×960cm_2005
겸재 정선_장안연우(長安烟雨)_종이에 먹_30×39.8cm_
영조17년(1741)_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중 간송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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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9_0918_금요일_05:00pm
후원_경기문화재단
관람시간 / 10:30am~06:30pm
노암갤러리_NOAM GALLERY
서울 종로구 인사동 133번지
Tel. +82.2.720.2235
www.noamgallery.com
전설 또는 길목―김동욱의 「방겸재」 작업에 대한 단상 ● 1. 겸재라는 전설 겸재는 서예의 추사와 더불어 한국미술사를 대표하는 대가로서 서화-전통 담론에서 최고의 경배 대상으로 추앙되고 있다. 그는 20세기 우리나라 수묵화단과 이에 관련된 비평의 주요 열쇠말 중 하나였다. 수묵화가들과 이론가들에게 겸재는 어떤 기원이며 범본이고, 출발지점이자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어떤 경지이며, 고향이자 이상향인 것처럼 보인다. 겸재는 그의 실존의 역사적 구체성으로부터 ‘해방'(혹은 이탈)되어 이미 '신화'의 영역으로 진입해버렸고, 겸재 신화는 겸재라는 사실을 압도해왔다. 20세기 수묵화단이 어떤 이유에서건 '해방'과 '신화'를 필요로 했고, 겸재는 그러한 20세기의 '역사적' 필요를 충족시켜줄 전형적인 선례로서 호출된 것이다.
김동욱_방겸재(倣謙齊)-서울숲에서 현대아파트를 보다1_종이에 피크먼트잉크_100×720cm_2007
겸재 정선_압구정(狎鷗亭) 비단에 채색_20×31cm_영조17년(1741)_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중 간송미술관 소장)
그 필요성은 20세기의 '아픔'에서 오는 것이며, 결정적인 계기는 식민주의이다. 말하자면 탈식민적 비전을 마련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비상구로서, 과거에 '이미' 존재했던 미적 이상을 발굴할 필요가 있었고 거기에 겸재가 선정된 것이다. 여기서 겸재는, 중화주의가 공식적으로 붕괴한 이후의 조선 문예부흥기에 조선회화의 미적·정치적 정체성을 성취한 고전이라고 평가되곤 한다. 다시 말해 겸재는, 식민주의에 의해 훼손된 현재의 상처를 치유하고자 하는 20세기에 의해, 훼손되기 이전의 고전적 이상으로서 불리어 나온 것이다. ● 문제는, 겸재의 시도가 자신의 '현재'를 돌파하기 위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20세기는 겸재의 당대성과 역사성을 증발시키고, 그 대신 시공간의 구체적 조건과 맥락을 초월하는 보편적 위상과 신화적 원형성을 그에게 덧씌우려 한다는 점이다(이를테면,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또는 '겸재의 진경 정신!' 처럼). 또한, 20세기가 겸재를 호출하는 것이, 자신의 현재를 성찰하고 비평하는 길을 역사적 선례로부터 새롭게 발견하고자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과거 후광에 귀의함으로써 현재를 오히려 유폐하는 경향이 짙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18세기 겸재를 20·21세기 여기에 이식하는 것은 말도 안되는 짓이다. 그런 상황에서 겸재라는 존재는 다만 전설이나 허울에 지나지 않을 뿐 아니라, 20세기가 스스로를 비평할 안목을 갖추지 못한 채 명목상 휘둘러대는 이데올로기적 도구 신세를 면하기 어렵게 된다. 현재와 과거를 동시에 냉동시키는 것이다.
김동욱_방겸재(倣謙齊)-아차산과 쉐라톤 워커힐 호텔을 보다_종이에 피크먼트잉크_50×240cm_2007
겸재 정선_광진(廣津) 비단에 채색_20×31.5cm_영조17년(1741)_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중 간송미술관 소장
그럼 '냉동'을 면할 방법은 있는가? 있다. 비판하는 것이다. 겸재를 만고불변의 순수가치나 원형적 상징으로 떠받드는 게 아니라, 그의 역사적 지점과 맥락을 좀더 성심껏 공부하고 해체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겸재 당대에도 사람마다 사실정신의 무늬와 빛깔이 퍽 다채롭고, 또 겸재 때와 연암 때, 단원·혜원 때의 그것은 인문적 태도에서 매우 다른 양상을 보이고 예술가·학자들마다 시차도 다양하고 문제의 범주도 놀라운 변주적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 아무튼, 적지 않은 작가들이 그를 따르고자 했지만, 성과는 미미하다.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그의 삶과 의식, 작업 등을 역사적 맥락 안에서 해석하고 번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해석'해야 하고 왜 '번역'해야 하는가? 그가 걸쳐있던 조건·틀·맥락과 20세기의 그것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겸재가 중국풍 환상적 스타일의 산수화 늪에서 뛰쳐나와 현재에 실존하면서 내 몸과 생생히 교감하는 자신의 산천을 그렸다는 사실을 본받는다고 하면서 20세기의 화가가 자기 주변에 존재하는 풍경·인물·도시·사물을 그린다고 해서―물론 이것도, 일본의 식민주의 문화정치가 가르쳐준 것을 계속 따라하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저절로 하나의 회화적 성과로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 것이다). 20세기 수묵화가 결여했던 것은 정말 많지만, 심각한 점 몇 가지만 들자면, 우선, 왜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가가 화가 개인 수준에서나 제도 차원에서나 시원하게 해명되지 않고 다만 '전통' 타령만 하고 있다는 점. 화가 자신이 문사가 아님에도 겸재 시절 문사적 취향의 허울을 그저 흉내 낸다는 점. 전통이라는 관성에 모든 것을 내맡기고 거기 안주해오느라 동시대의 풍부한 예술적 시도들과는 담을 쌓아 스스로를 유폐시켜온 점. 요컨대, 미디어의 속성과 가능성을, 그때그때 삶의 조건과 맥락에 비추어 재조정하지 못했다. 따라서 그들은 현재를 살지 않고 또 현실의 공기를 호흡하지 않았다. 결국 화가와 그의 작업 자체가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김동욱_황학정에서 경찰청을 보다_종이에 피크먼트 잉크_77×300cm_2007
2. 겸재라는 길목 ● 작가가 밝히는 대로, 이번 작업을 다음과 같이 겸재로부터 출발했으니, 위에서 논의한 지점은 유념할 만하다. “올해는 겸재 정선(鄭敾/1676-1759)이 가신 지 250주년이 되는 해이다. 나는 『강산무진(江山無盡)』 시리즈에서 겸재의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에 있는 작품 중 현재 그 모습을 알아볼 수 있는 곳을 작품화했다. 선생이 발견한 '우리의 美'가 무엇인지 몸으로 보고 느끼고 싶었다. 또한 우리 국토의 현재 모습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정확히 기록하려 했다." (김동욱) ● 겸재와 김동욱 사이에는 300년 가까운 세월이 떨어져 있다. 거기에, 산수(Mountains and Rivers) 대 풍경(Landscape); 지필묵-문인화 대 카메라-사진; 오감(육신과 넋의 온 감각) 대 시각(그것도 기계적 메카니즘); 자연과 우주를 관조하는 문사적 판타지 대 실재를 묘사하는 무시무시한 디테일 등등, 겸재의 작품과 김동욱의 사진을 병치시켰을 때 얼른 확인할 수 있는 대조점들이 있다. 또한, 둘의 삶과 작업을 포괄하는 패러다임, 미적·정치적 이념, 미디어와 몸의 관계, 미디어의 작동 원리와 구조(메카니즘), 그리고 그것의 표상의 역사, 작품 감상 및 소통 방법(교유/전시), 표상(재현) 장치로서의 특이성,···,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멋대로 오역 또는 오남용 했을 때 나타나는 흥미진진한 궤도이탈 양상들에 이르기까지. 그러므로 두 사람이 거의 같은 장소를 재현했다고 해도 두 이미지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들이 거품처럼 끓어오를 테고, 차이들이 포화 상태가 되면 양자 모두 숨을 멎고 멀뚱멀뚱 서로를 바라볼 뿐, 서로 간에 어떤 교섭이나 관여, 교감, 간섭도 있어지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럴 경우 처음부터 양자를 병치하거나 비교 독해하는 일 자체를 하지 말아야 하는 건지도 또 모르고. 물론 이렇게 비관만 하고 앉아있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꽉 막힌 막장에서 뜻밖에 숨통이 터질 수도 있으니까. ● 아무튼 김동욱의 이번 작업의 핵심 주제는 ‘방(倣)겸재’이다. 아까 인용한 바와 같이 ① "선생[겸재]이 발견한 '우리의 美'가 무엇인지 몸으로 보고 느끼고"자 한다는 것, 그리고 ② "또한 우리 국토의 현재 모습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정확히 기록하려"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는 양립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지필묵과 카메라는 워낙 근본을 달리 하는 미디어이기 때문이다. 즉, 겸재가 발견한 아름다움은 당시를 풍미한 유교적 보편주의와 형이상학적 세계관, 그리고 수기자오(修己自娛)의 미적 취향에 근거한 것이며, 그것을 천지인 삼재의 원융회통을 상징하는 지필묵 미디어를 통하여 세계를 표상했던 것인 데 비하여, 김동욱의 카메라는 유럽식의 퍼스펙티브와 재현 이데올로기를 근간으로 하여 세계에 관한 지식을 추구하는 표상 장치이다. ● 달리 말해서, 겸재가 마음 놓고 놀고 있는 반면, 김동욱은 저격수처럼 긴장하는 것이다. 겸재는 해체를 즐기는 데 비하여, 김동욱은 [재]구성의 과학에 몰두하는 것이다. 겸재의 작업은 어느 곳곳을 그가 몸소 운신하여 그곳의 자연 및 미물들과 한 호흡을 나누고 그로부터 자신의 성정을 가다듬은 끝에 무심결에 몸에 이는 음악적 울렁거림을 지필묵에 실어 놓은 것임에 비하여, 김동욱의 작업은 정색하고 호흡을 멈춘 채 셔터를 누른 끝에 생산된 기록인 것이다. 겸재의 필묵이 그림 속에서조차 계속 흐느적거리고 일렁이고 어딘지 헐겁고 가볍게 건덩거리는 반면, 김동욱의 사진은 한 순간에 영원히 정지해 있는 광화문 이순신 같이 곧게 굳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 더 간단히 비교하면, 겸재는 그림에 담긴 산수풍경(Mountains, Rivers, Wind and Sunshine) 안에 육신을 담그고 취하도록 노닌 끝에 물러나와 그 기억을 관조하면서 자신의 감흥을 지필묵에 실어냈고, 김동욱은 겸재가 그린 풍경을 관망할 수 있는 곳, 그러니까 겸재가 놀았던 곳으로부터 완전히 반대편으로 가서 겸재 쪽을 시각적으로 관찰한 것이다. 겸재는 늪 안에서 허우적거린 것이고, 김동욱은 늪 바깥에서 구경한 셈이다. 늪 안팎 경계에 무엇이 있나 봤더니, 거기에 미디어가 있는 것이다. 물론 늪/사람/미디어가 삼분되는 것은 아니다. 셋은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빛이자 그림자이다. 빛과 그림자 사이에 경계가 있고, 역사를 회고해보면 사실 그 경계 노릇은 대개 인간이 떠안아 왔다. ● 그럼 겸재의 미를 어디서 구해야 할 것인가. 그것도 카메라로. 곁다리 얘기 같지만, 지필묵을 놀려온 과거의 지식인 화가들의 그림이나 글씨를 음미할 적에 그 사람이 몸을 어떻게 써 가는가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거기에 마음이 어떻게 묻어서 다니는가도 가만~히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과학적인 언어로 표현하지 않아 자칫 엉터리 도 닦는 놈 구라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실제로 지필묵은 몸과 마음을 써가는 것(드로잉)의 차원을 떠나면 헛것이다. 붓은 천~천히 가는 것이다. 천~천히 시간을 유영하고 야금야금 시간을 갉아먹는 것이다. 마치 나뭇가지가 사람 눈으로는 종잡을 수 없는 속도로 여기서 저~기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가듯. 여기서 저기를 그저 바래고 구경하는 것이 하도 심심하고 또 저쪽이 그리워서, 가서 살을 부비고 싶어서, 천~천히. 또, 엄동에 '설중방우(雪中訪友)'하듯. ● 그렇다면 카메라 가지고 겸재한테 가는 길은, 프레이밍-호흡정지-찰칵 차원보다는, 시간의 문제, 시간 차원에 있을 것 같다. 이를테면 수묵화가 이호신(마을 연작)이나 사진작가 정동석(한 십여 년 전의 「□□년 시리즈」들) 같이. 결국 우리가 겸재에 머무를 필요는 하등 없다. 오히려 그는 해체와 극복의 대상이요, 타고 넘어 어딘가로 가는 길목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 김학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