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이 위협받더니 급기야 앗수르에게 북이스라엘이, 바빌론에게 남유다가 망하게 되었습니다. “주께서 어찌하여 그 담을 허시사 길을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 그것을 따게 하셨나이까 숲 속의 멧돼지들이 상해하며 들짐승들이 먹나이다”(시80:12~13) 시편은 나라가 망한 후 뿌리가 뽑힌 채 어딘가에서 노예처럼 살고 있는 사람들의 기도입니다. 뿌리가 뽑혀 더 이상 열매를 맺을 수 없는 포도나무 같은 신세를 한탄하며 구원을 바라는 기도입니다. “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아오소서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돌보소서”(시80:14) 시편은 빛이 땅에 닿지 않는 동토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하얀 입김으로 내뿜는 기도입니다. 오지 않을 것 같은 봄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겨울나기가 시편입니다.
자연은 어김없이 봄을 맞이했는데, 마음은 여전히 겨울에 머물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잔인한 4월이라고 하나봅니다. 4월에는 4·3이 있고, 4·19가 있고, 4·16이 있습니다. 봄에 죽은 사람들이 있어, 4월이면 더 겨울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봄에도 겨울이라 4월은 잔인하게 느껴집니다.
땅에 빛이 닿으니 풀이 나고 꽃이 핍니다. 가지에 빛이 쪼이니 잎이 돋고 꽃이 핍니다. 빛이 있으니 풀도 나무도 꽃을 피우며 열매를 준비합니다. 열매를 맺자면 빛이 있어야 합니다. 4월에도 여전히 겨울을 경험하는 모두에게 빛이 비추기를 기도합니다. 기적같이 봄이 와서, 죽음을 사는 모두에게 부활의 기쁨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파리 하나 없는 가지에도 열매가 맺기를 기도합니다.
열매를 맺자면 빛을 쬐어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 빛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시80:3) 열매를 맺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올린 시인의 기도입니다. 가지가 꺾이고, 줄기가 베일 것 같은 위기의 때에 드린 시인의 기도입니다. ‘눈물의 양식’으로 끼니를 삼고 살아가는 이들과 함께 시인이 기도합니다.(시80:5)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회복하여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시80:7)
아벨의 죽음을 슬퍼하는 죽임당한 아벨의 가족들에게, 하나님의 얼굴이 닿아 아벨의 가족들이 하나님의 얼굴로 세상을 사는 것이 구원입니다. 심판대 앞에 섰을 때에 하나님께서 사람의 얼굴을 살피시는데, 그때에 우리 얼굴에도 하나님의 얼굴이 비추어 구원받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이 내게 비추어, 내 얼굴이 하나님의 얼굴로 성형되는 것이 구원입니다. ‘주의 얼굴의 광채’가 있어 하나님을 닮은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억울하여 애통하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또 내 얼굴에 하나님의 얼굴이 닿아, 하나님의 얼굴로 변화되어 구원받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이 있어서, 모세는 이집트의 파라오 앞에 설 수 있었습니다.(출5:1) 하나님의 얼굴이 있어서, 바울은 로마 황제 앞에서 변론하겠다고 상고 했습니다.(행25:11) 파라오가 모세를 통해 파라오를 보았을 때에도, 로마의 총독이 바울을 통해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을 때에 인상이 좋다 여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이 모든 사람에게 편안함을 주는 건 아닙니다. 권력자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외면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지닌 사람을 제거하고 싶습니다. 모세는 그래서 이집트 제국을 떠나야 했고, 바울은 로마제국에서 처형됐습니다.
앗수르에 망한 북이스라엘 사람들, 바빌론에 무너진 남유다 사람들 뿐 아니라, ‘에덴의 동쪽’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노예처럼 삽니다.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3:18~19) 노예처럼 살다가 마침내 먼지가 되는 것이 에덴에서 쫓겨난 모든 사람들의 운명입니다.
기도는 운명에 저항하는 것입니다. ‘에덴의 동쪽’에서 살아야할 운명을 거부하고, ‘에덴’을 향하여 몸을 틀어 에덴을 요청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먼지뭉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생기를 머금은 생령으로 살겠다는 선언이 기도입니다. ‘주홍글씨’로 자자(刺字)된 얼굴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서 하나님의 얼굴빛을 뿜으며 살고자하는 소원이 기도입니다. “우리를 소생하게 하소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켜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시80:18~19) 흙으로 돌아가고야 마는 운명대로 살지 않고, 영원히 죽지 않는 하나님처럼 살기 위해 ‘신성’을 갖고자 발버둥치는 것이 기도입니다. 육체로는 인간이셨고, 죽은 뒤에 부활하신 예수처럼 되기를 갈구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시인이 ‘주의 얼굴’을 비추어 달라고 반복해서 기도하는 이유입니다.(시80:3,7,19)
제겐 약점이 많습니다. 스스로를 닦고, 가정을 살피는 것도 버거울 만큼 인격적으로 부족합니다. 교회를 세우고, 사회를 개혁하자고 말하는 게 민망할 뿐입니다. 예수님처럼 불의에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성격과 기질을 따라 성질부릴 때가 많습니다. 기도하는 이유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형편도 많이 다르지 않을 겁니다. 우리 모두가,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하는 까닭입니다.(살전5:17) 쉬지 말고 기도한다는 것은 모든 순간 하나님과 대면한다는 것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한다는 것은 모든 공간에서 하나님의 얼굴로 조명 삼는다는 것입니다. ‘주의 얼굴의 광채’가 내게 있어, 내 성격과 기질로 성질부리는 게 아니라, 정치과 자본의 권력이 성질을 부려도 태연자약하며 평안을 누리는 능력이 영성입니다.(빌4:13) ‘주의 얼굴의 광채’가 있는 사람은 모세처럼 사람들과 함께 광야에 설 수 있고, 바울처럼 제국의 권력에 허리를 꺾이지 않습니다. 권력에 허리를 꺾지 않은 바울의 목은 잘렸고, 광야로 나섰던 모세는 ‘약속의 땅’을 밟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에만, 죽음을 아랑곳하지 않고 광야를 마다하지 않고, 길을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