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주변 건축물 중에 용산수위관측소를 좋아한다.
외벽의 페인트가 벗겨지고 쇠 부품은 녹슬고 낡아 부서졌지만 제법 고즈넉한 운치가 감도는 예쁜 건물이다. 지금은 주변 일대가 완전히 개발되니 그 속에 파묻혀 초라한 꼴이 되었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홀로 당당했다. 어떤 신문이 이 건물을 우리나라에 유일한 하천 등대라고 썼던 적이 있다. 아니다, 수위관측소다. 일제강점기인 1924년 일본인이 많이 살던 이촌동 일대의 한강 범람을 미리 예측하기 위해 세웠다.
1909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다이치 고스케는 징병을 피해 열도를 떠돌다가 1928년 조선에 왔다. 조선에 와서도 헌병의 눈을 피해 다니는 도망자 신세였던 다이치는 마침 용산 수위관측소에서 일할 사람을 찾는다는 공고를 보고 지원했다. 관측소 안에 들어가 일하면 헌병의 눈을 피할 수 있으리라는 속셈이었다. 지원서에 이름을 카타나카라고 적었다. 일은 어렵지 않았다. 한강 속 암반에 설치된 우물통 모양의 콘크리트관 내부에 띄워 놓은 부자의 눈금을 읽어 기록만 하면 끝이었다. 따로 보고할 필요도 없이, 관측소 건물 바깥에도 눈금이 그려져 있어서 매일 아침 기상대 직원이 물 높이를 읽고 갔다. 카타나카는 안전했다.
카타나카는 이따금 밤에만 관측소 밖으로 나와 지금의 명동, 메이지마치에 가서 잔술을 마시곤 했다. 도망자 신세라 자칫 실수할까 봐 과음하지는 않았다.
당시 경성(서울)의 인구는 칠십만 명이었다. 그 중 일본인이 십만 명이 훨씬 넘었으니 일곱에 하나 꼴로 일본인이었던 셈이다. 일본인들은 중구와 용산구 쪽에 따로 거주 지역을 개발하고 살았다. 일본인들은 짧은 거리를 이동할 때도 인력거를 탔다. 인력거꾼들은 검은 색 핫비를 입고 지까다비를 신고 달렸다. 일본은 그들의 유곽을 조선에 들여왔다. 지금 용산구 도원동과 중구 묵정동이 일본 여자들의 유곽이 있던 곳이다. 조선인이 조선 여자를 고용해 운영하는 유곽도 늘어났다. 유곽 여자들 중에 궁핍한 생활을 못 이겨 스스로 몸을 팔기 시작한 사람도 더러 있었지만 대부분 악덕 뚜쟁이의 거짓 꼬임에 빠져 팔려온 여자들이었다.
악화는 양화를 구축하니, 일패라 불리던 품위 있는 조선 기생은 사라지고 이패에 해당하는 유곽 기생들이 늘어났다. 이들은 일본식 용어인 권번을 자칭하여 새 기생 조합을 만들었다. 권번은 일패의 기생 어미들과는 달리 유곽에 여자를 대고 요정에 기생을 공급했으며 화대를 받아 챙기기도 했다. 아무 조합에도 속하지 않는 삼패 무리들도 생겨났다. 이들은 싼 술집에서 노래와 춤, 그리고 몸을 팔았다. 예향은 혼마치의 삼패였다.
일본의 패망이 점점 다가오자 카타나카의 소박한 취미도 즐기기 어려워졌다. 더 독해진 헌병대는 백주발검을 서슴지 않고 사람들을 잡아갔다. 카타나카는 밤에도 관측소 밖으로 나오지 않고 안에서 지냈다. 혼마치 쪽방에서 몸을 팔다 달아나 갈 곳 없이 헤매던 예향이 그와 눈이 맞아 관측소 안에 살림을 차렸다. 본명은 예향이 아니겠지만, 알 수 없다. 카타나카는 혹독한 시절이 계속 이어질 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얼마 되지 않는 봉급으로 통조림 깡통을 사들여 쟁였다.
일제가 마침내 망해 본국으로 달아나던 해, 카타나카는 관측소의 철문과 창을 안으로 걸어 잠갔다. 땅 밖으로 나오는 굴을 팠지만 입구를 큰 돌로 가려 두어 바깥에서는 알아볼 수 없었다. 아들 하나 가 태어나 다케우치라 했다.

카타나카의 유일한 사진, 1940년으로 추정, 용산구청 기록보관소 N-00-70043
한국전쟁이 일어난 해, 예향은 바깥에서 들리는 대포 소리에 놀라 겁에 질려 사시나무 떨듯 떨다가 결국 달아났다. 카타나카는 그 전쟁이 궁지에 몰린 일제의 마지막 발악 때문에 벌어진 것이라 생각했다. 카타나카는 관측소 문을 안에서 용접해버렸다.
달아난 예향이 한강철교에 오른 것은 1950년 6월 28일 새벽이었다. 이미 경무대를 버리고 달아난 이승만은 수도 서울은 안전하니 믿고 기다리라 말했지만 사람들은 철교에 매달려 강을 건너고 있었다. 새벽 2시 국군 공병대 최창식 대령이 한강철교를 끊었다. 인민군이 서울에 들어오기 10시간도 전에 벌어진 일이다. 폭발에 날아간 예향의 몸은 노들섬에 떨어졌다. 백골이 된 예향의 허벅지 뼈에는 아홉 개의 파편 구멍이 남았다. 지금도 노들섬에 허한 바람이 불 때면 예향의 빈 뼈에서 나는 피리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최창식은 군사재판을 거쳐 처형당했다. 폭파 명령을 내렸던 고위직은 책임을 회피했다.
1976년 늦여름, 마포나루 장사치들이 한강 둔치에 모여 개장국 솥을 불 위에 올려 두고 고기 익을 동안 돈치기를 하며 놀다가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텃밭의 파가 땅 속으로 쏙 사라지는 것이었다. 처음엔 저 아래 토끼굴이 있나 보다 했지만 아무래도 이상해 유심히 보고 있으니 또 한 포기가 쏙 사라진다. 수상하다! 웅성대다가 파출소에 신고했다. 뭐든지 조금이라도 수상하면 일단 신고하던 시절이기도 했고, 며칠 전 판문점에서 도끼 사건이 일어난 터라 유난히 흉흉하기도 했다.
곧 경찰이 관측소 문을 부수고 들어가 굴 속에 숨어 있던 카타나카와 그의 아들 다케우치를 찾아냈다. 카타나카는 노쇠해 몸을 움직이기 힘들었고 다케우치는 격리된 채 이십 년이 넘게 살아 거의 말을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당시 신문을 찾아 보면 수도 서울의 중심에서 북괴 공비 비트가 발견되었다는 특보가 있지만, 오보였다.
카타나카는 갑자기 변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곧 숨졌다. 아들 다케우치는 몇 년 간 서울 외국인 수용소에서 보호를 빙자한 감시를 받다 나온 뒤 일본으로 가지 않고 한국에 남았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다케우치의 아들은 학교 후배다. 말이 없는 아버지를 닮아 과묵하고 밝은 곳을 못 견뎌 한다. 그 친구를 조르고 졸라 관측소 우물을 본 적이 있다. 관측소 왼쪽 수풀을 헤치고 들어가 굴 입구를 막아둔 돌판을 치우니 우물이 드러났다. 깊다. 어두운 물이 차 손이 시렸다. 우물 벽 돌 틈에 검은 이끼가 자랐고, 이끼에 맺혔다가 우물에 떨어지는 물방울은 작은 놋쇠 풍경처럼 맑은 소리를 냈다. 검은 물 가운데 사각형 흰 빛은 일렁이는 하늘이다. 이곳의 절망은 너무나 아득해 이 세상 일이 아닌 듯했다.
용산 수위관측소는 1976년 9월에 공식 관측 활동을 중지했다. 사실이다, 카타나카는 그 때까지 기록을 멈추지 않았으니까. 관리 부서가 몇 번이고 바뀌는 바람에 카타나카가 기록한 문서는 이미 사라진 듯하다. 아니면 완전히 잊혀진 채 구청 창고 어딘가에 처박혀 있겠지. 그 수십년 담담한 기록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보고 싶다.




첫댓글 그것 참! 주위에 이런 것들도 있어도 전혀 모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