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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4:31-44 전도하시더라! 2007. 1. 7
31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시매 32 저희가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세가 있음이러라 33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34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35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 36 다 놀라 서로 말하여 가로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세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하더라 37 이에 예수의 소문이 그 근처 사방에 퍼지니라
38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에 붙들린지라 사람이 저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 39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40 ○해 질 적에 각색 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다 병인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41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 질러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저희의 말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줄 앎이러라
42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 하시고 44 2)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
예수님이 이 땅에 왜 오셨습니까? 성탄의 의미도 모르고 떠들썩하던 연말의 분위기는 벌써 사라졌습니다. 새해 새 희망이라고 말하였지만 벌써 7일입니다. 달라진 것이 있나요? 참으로 해아래 새것이 없다는 말씀이 실감이 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날마다 일탈을 殯摸庸?새로운 재미를 찾아 나섭니다. 그러나 아무리 새것이라고 하여도 한두 번만 맛보고 나면 식상해져서 또다시 미친 듯이 새것을 찾아 나섭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새로운 것이 유일하게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17절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새것이 있습니다. 옛 하늘과 옛 땅은 죄로 더러워졌기에 불사라 없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새 하늘과 새 땅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새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의 43절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예수님의 오신 목적이며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전도하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시는 것이 예수님이 오신 일입니다. 이 일은 이미 선지자들이 예언한 바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시기 위하여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첫 설교는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 61장의 말씀을 읽으시고 이것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다고 하셨습니다. 그 내용은 지난주에 본대로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의 해를 선포하셨고 응하였다고 말씀하셨는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낭떠러지에 밀쳐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은혜의 해를 선포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는데 왜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까? 그들이 원하는 은혜는 세상의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세상의 영광과 자랑이 될만한 땅의 것을 구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은혜란 오직 선민이라는 자기들만의 혜택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수님을 자기 동네사람이라고 믿지 아니하는 그들을 향하여 엘리야 시대 때에 수많은 과부들이 있었지만 시돈 땅의 과부에게만 보내심을 받았다는 말씀과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에 수많은 문둥이들이 있었지만 한사람도 고침을 받지 못하고 이방인 나아만장군만 깨끗함을 받았다는 말씀에 그들은 분노하면서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왜 죽이려고 까지 한 것입니까? 자기들이 원하는 방식의 은혜가 아니기도 하고 또 이방인들이 은혜를 받았다는 것에 분노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평소에 스스로 상상하고 생각한 하나님이 다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란 적어도 이렇게 하여야 하나님답다는 생각을 하면서 살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상상과 전혀 다른 하나님이 소개된다면 사람들은 분노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지난주 어느 방송설교를 들으니 엘리야 시대의 과부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새해를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흉년이 든 해에 사렙다의 한 과부가 자기 아들과 함께 마지막 양식을 먹고 죽으려고 나뭇가지를 줍고 있는데 엘리야가 자기를 위하여 떡을 만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과부가 하나님의 선지자에게 떡을 만들어 드리고서 흉년이 끝날 때 까지 그 가루 통에 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기름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이 말씀으로 어떻게 적용을 하는가 하니 새해가 되어서 하나님께 복을 받으려면 먼저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남은 양식인데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종자와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농부가 아무리 굶주려도 종자 씨를 먹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처럼 하나님께 먼저 드려야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설교를 하면 사람들이 제일 먼저 헌금을 중요하게 여겨서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복을 받은 사람들의 간증과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 저주를 받은 자들의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열심을 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동일한 엘리야 시대의 과부를 설교하셨는데 왜 사람들이 죽이려고 하였습니까? 지금 예를 든 설교는 바쳐서 복 받자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의 종교성이기에 사람들이 다 이해가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엘리야와 과부의 이야기를 가지고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선택받았다고 여기는 그들은 배척하시고 이방인이라고 여기는 자들에게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기에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믿는 다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의 먹음직하고 보임직하고 세상의 자랑과 영광이 될만한 것을 공급하여 주시는 분이십니까? 아니면 세상의 영광이 아니라 세상의 멸시와 천대와 배척을 받은 십자가를 지도록 하시는 분이십니까? 이것은 너무나 분명하고 확연합니다. 어렵고 복잡하게 계산해서 알아보는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너무나 쉬운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우리 안에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가득 들어있기에 어려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예수님은 십자가에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영광으로 알아볼 수 없도록 자신을 숨기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학적인 용어로 메시아 은닉이라는 주제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은혜의 해를 선포하러 오신 메시아시라면 자신을 드러내셔야 하시는데도 자신을 숨기시는 것입니다. 메시아가 해야 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병자를 고치시고 하는 사역들을 수행하시면서도 자신을 숨기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병 고침을 받은 자들에게도, 제자들에게도, 귀신들에게도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알리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31-41절을 보시면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또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셔서 말씀을 가르치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놀랍니다. 그 말씀이 권세가 있는 것입니다. 왜 권세가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 자신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회당에 더러운 귀신들린 자가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회당에 다녀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들통이 난 것입니다.
귀신 들린 사람이 크게 소리를 지르면서 나사렛 예수와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며 나를 멸하러 왔느냐고 합니다.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안다고 합니다. 귀신이 귀신같이 알아보는 것입니다. 귀신이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알아보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꾸짖으시면서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하시니 그 사람을 넘어뜨리고서 귀신이 나갔습니다. 다 놀랍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와 능력에 놀라는 것입니다. 이 소문이 그 근처에 파다하게 퍼지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장모도 열병이 난 것을 예수님이 고쳐주십니다. 그러나 곧 일어난 저희에게 수종을 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의사가 아닙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입니다. 그 말씀이 임하시니 귀신이 쫓겨나고 열병 앓든 자가 바로 일어나서 수종을 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해질녘에 각색 병든 자들을 데리고 오자 일일이 손을 얹어 고쳐주십니다. 그렇게 치유 중에 귀신들도 나가면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시자 예수님께서 꾸짖으시면서 그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십니다.
왜 허락하지 아니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아보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예수님께서 지금 그리스도로서 일하고 계시는데 왜 자신을 알리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도 귀신들이 떠나가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왜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까? 심지어 변화산에서 영광의 모습으로 변화되신 사실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보았는데 그 사실을 알리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언제까지 알리지 못하게 하셨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시기 까지는 알리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왜 자신을 그리스도임을 공개적으로 알리지 못하게 하셨을까요? 유대인들의 메시아사상이 잘못되어 있기에 알리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기다린 메시아는 땅의 메시아입니다. 제자들도 별 다를 바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땅의 이야기를 하였고 예수님은 하늘의 이야기를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공개적으로 알려지게 되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상의 임금 삼으려고 하기 때문에 숨기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병자를 고쳐주시는 것은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 고쳐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가버나움에서 병을 고쳐주시자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 나섭니다. 42절입니다. 예수님은 새벽미명에 조용한 곳을 찾으셔서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찾아다니다가 드디어 만나서는 예수님이 자기들에게서 떠나지 못하도록 만류하는 것입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곳에서는 어떤 병자를 고치거나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병자를 고쳐주시니 예수님이 그곳에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8장에 보면 거라사 지역의 미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군대귀신이 들려서 수많은 귀신이 그 사람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 사람을 고치시는데 그 귀신의 이름을 물으시자 군대라고 합니다. 쫓아내시니 그 귀신들이 돼지 때에게로 보내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돼지들이 바다로 뛰어들어 몰사하니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 마을에서 떠나달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머무르게 하고 떠나달라고 하는 기준이 어디에 있습니까?
나에게 이익인가 아닌가에 그 기준이 있는 것입니다. 어디서라도 나는 주님의 피조물이요 종이오니 그저 시키는 대로만 하겠습니다. 주께서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올 뿐입니다. 말씀만 하옵소서! 이렇게 고백하는 자들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이라고 자처하는 유대인들 가운데서 그런 자들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인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 그런 믿음이 있었습니다. 나의 수하에도 종들이 있는데 내 말한 마디로 움직입니다. 죽는 전쟁터에도 가는데 주님이 말씀만 하시면 저의 하인이 나을 줄 믿습니다. 저는 주님이 저에게 오심을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그저 말씀만 하옵소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서도 이런 믿음을 만나 본 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저나 여러분의 믿음이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도 달면 삼키고 쓰면 뱉지 않습니까? 그러니 모든 교우관계도 그렇지 않습니까? 나에게 얼마나 이익이 되느냐로 인간관계를 맺고 사는 것입니다. 이러면서도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종교적이지만 우리는 복음적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까? 우리의 삶에 예수님이 삶의 우선적인 경우가 얼마나 됩니까? 내 일이 항상 우선이고 바쁘고 최고이지 주님을 위한다는 일에 얼마나 빨랐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의 요구에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아 내어도 계셔야 할 곳은 계시는 것이고 붙들어도 가야할 때는 가시는 것입니다. 42-43절을 봅니다. 자기들에게서 떠나지 못하게 만류를 하는데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다른 동네에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신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병 고침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이 병 고쳐 주심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 것입니다. 병 고침을 받아도 다시 죽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5:17-26절을 보시면 중풍병자를 고쳐주시는데 병을 고쳐주시기 전에 먼저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참람한 말을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만이 죄를 사하는데 어떻게 일개 인간이 죄를 사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이 중풍병자를 향하여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것과 네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쉽겠느냐고 물으십니다. 대답을 못하지요! 왜요? 둘 다 인간의 능력으로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씀도 하시고 네 침상을 들고 가라고도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예수님이 죄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하나님의 나라 복음이란 예수님이 죄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병 고침을 받은 자들이 또다시 다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려주었던 과부의 아들도 다시 죽었고 나사로도 다시 죽었습니다. 그러나 죄 사함을 입은 자들은 죽어도 다시 삽니다. 그들은 죽음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활과 생명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지금도 부르시면 살아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생명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죽어도 괜찮은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소식을 전하고 이루시기 위하여 하나님께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전도하시는 이것은 2천년 전에 전도하시고 멈추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전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말씀하시는 분이 이루어내신다는 화자의 결단이요 결심입니다.
그 말씀대로 성령이 임하셔서 오늘도 복음이 증거 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이 전도하시더라는 말씀이 어떤 모습으로 증거 되겠습니까? 미련하고 어리석은 방법으로 증거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의 말씀처럼 십자가의 도가 증거 되는데 십자가의 도는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며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즉 사람들에게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세상의 영광과 자랑이 안 되는 모습으로 전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의 부르심을 보라고합니다. 세상에서 약하고 천하고 미련한 자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전하여지는 전도란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너무나 세련되고 멋있어서 고객 감동을 넘어 고객졸도를 시켜야한다고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세상의 사람들이 잘못된 메시아 상을 가지고 있었기에 예수님께서 숨기시라고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상들이 있기에 십자가라는 미련한 방법으로 전도하시기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사람들의 능력과 지혜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전도하시더라는 그 말씀이 성취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질문을 또 하시는데 여러분이 마음에 감동이 되시는 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두 가지만 말씀드립니다. 예수사회를 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선교헌금에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드디어 우리 목사님도 무엇을 하라고 하는군요! 그것을 하면 우리의 의가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 하면 율법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제가 미리 말씀드렸지요! 주의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면 그 믿음의 분량대로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주님의 전도에 참여되는 자는 나 같은 죄인에게 이런 일을 맡겨주시니 감사합니다. 역시 주님께서 전도하고 계시군요! 이 고백이 나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