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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1410년에 일어난 타넨베르크 전투를 그때까지 북동유럽의 강국이었던 튜튼기사단이 몰락하는 시초로 삼는 사람들이 많다. 굳이 말하자면 이것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전투로 인해 결정적으로 몰락하였다고 보기에는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마치 만치케르트 전투로 인해 비잔티움이 몰락하는 시초가 되긴 했지만 만치케르트가 그렇게 결정적인 요소는 아니었던 것과 비슷하다. 비잔티움을 몰락하게 만든 진짜 결정적인 사건은 바로 4차십자군인데 튜튼기사단에도 이 4차십자군과 같이 결정타를 날리는 사건이 있었다. 바로 13년전쟁이다.
타넨베르크 전투 이후,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침공을 물리치고 오히려 폴란드로의 역침공을 감행하려 했던 강경파 하인리히 폰 플라우엔이 기사단내 쿠데타로 체포되고 온건파가 힘을 얻으면서 그들은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주고 전쟁을 끝내게 되었다. 하지만 쿠데타로 단장이 갈리고 기사단에게 손해인 평화협정이 맺어지니 이미 단장의 권위는 땅에 떨어진 뒤였다. 국가의 수반이 권위를 잃어버리면 지방세력이 일어나는 법이다. 이미 리보니아와 독일지부는 거의 독자적인 세력을 이룬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기사단의 본토라고 할 수 있는 프로이센 내부에서도 도시의 상인들과 지방의 유력자들이 조직한 프로이센 동맹(Prussian League)이 거의 준정부급에 달하는 강력한 권력을 행사했다.
그러는 와중 1449년, 개혁을 원하는 루트비히 폰 에를리히스하우젠이 단장으로 선출되었다. 개혁의 가장 큰 걸림돌은 프로이센 동맹이었다. 동맹의 상인들은 기사단이 폴란드에 배상금을 물어준 뒤 휘청대는 재정을 도시의 상업활동에 특별세를 징수하여 매꾸는 것에 불만을 품고 이를 철폐하려고 했다. 이 특별세는 사실 국가긴급상황 시, 임시로 거두는 것이었는데 배상금이 워낙에 막대하다보니 전쟁이 끝난지 수십년이 흘렀는데도 계속 걷고있었던 것이다. 동맹은 또한 기사단의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법정조언을 해주는 이탈리아에서 공부한 변호사들을 의회에서 몰아내고 싶어했다. 동맹자체가 기사단과 맞서기에 법적으로 매우 취약한 기반을 가졌기에 그런 것인데 에를리히스하우젠은 동맹에게 불리한 이 법으로 그들과 상대하고자 교황청에 조언을 구했다. 에름란트 주교는 단장을 강력히 지지했고 독일외교에서 큰 영향력을 가진 니콜라스 폰 쿠사 추기경은 많은 조언을 해줬다. 리보니아 지부에서도 단장의 권한을 축소하여 지부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하이덴라이히 빈케 폰 오베르베르크가 죽고 에를리히스하우젠에게 더 협조적인 요한 폰 멩게데가 지부장이 되면서 기사단 내부의 문제도 상당수 풀어진 뒤였다.
프로이센 문제에 가장 큰 관심을 보인 사람은 교황특사 아이네아스 실비우스 피콜로미니였다. 투르크에 대한 십자군을 강력히 주장하던 그는 일단 기독교권 내부의 문제가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십자군이 제대로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군주들이 강력한 권력을 가지지 않아서이며 지방세력들이 군주에게 복종하고 통일된 체계를 가져야지 국가들이 충분히 투르크를 상대할만한 십자군을 일으킬 수 있다고 피콜로미니는 생각했다. 그런 그에게 있어 프로이센은 하나의 본보기로 삼을 수 있는 가장 좋은 타깃이었다.
기사단과 동맹이 법적인 문제를 위해 교황청에 파견한 변호사들도 현격한 역량차이를 드러냈다. 기사단측이 파견한 라우렌티우스 블루메나우는 매우 유능한 변호사로 단장에게 기사단의 기록을 마음대로 관람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받았지만 동맹측 변호사는 그렇지 못했다. 상대가 되지 않는 변호사들이 교황과 황제 앞에서 법적으로 다투자 점점 그들은 기사단의 편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 교황 니콜라스5세가 죽게 되었는데 그의 후임으로 피콜로미니의 정책을 지지하며 그를 추기경으로 임명한 칼릭스투스3세가 새로운 교황이 되었지만 콘스탄티노플을 탈환하려는 십자군을 꿈꾸던 피콜로미니는 일년의 시간을 헛되이 보내게 된다.
외교문제가 이렇듯 불리하게 돌아가자 동맹이 위기를 느낀 것은 당연했다. 비록 교황청과 황제가 기사단의 편을 들어 동맹을 불법조직이라 선언하고 해체를 명령해도 그것을 실행할 힘이 그들에게는 없었지만 명분적으로 밀리는 것은 일단은 좋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단장이 군대를 모을 시간을 줬다간 군사적으로 기사단과 맞서기 어렵다고 판단한 그들은 단장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내용인즉 자신들은 기사단과의 관계를 끊고 폴란드 왕의 밑으로 들어가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폴란드 왕 카지미에슈는 적극적으로 전쟁에 나설 마음은 없었지만 동맹의 조치를 환영했다.
동맹의 이러한 갑작스러운 행동에 기사단은 크게 놀랐다. 비록 전쟁준비를 하고는 있었지만 아직 준비를 다 마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엘빙, 단치히, 토른이 순식간에 함락되고 파괴당했다. 토른에는 현재 단츠커라는 거대한 화장실시설의 유적만이 당시 기사단이 그곳을 지배했다는 사실을 말해줄 뿐이다. 서프로이센 또한 마리엔부르크, 슈툼, 코니츠를 제외한 거의 전지역이 "반란군"의 손에 들어갔다. 하지만 단장은 작센, 마이센,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슐레지엔 등에서 용병들을 모아 만오천명의 군대를 조직하였다.
한편 카지미에슈는 귀족들을 설득하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왕권이 약하고 귀족들의 힘이 센 폴란드에서 귀족들이 카지미에슈가 동맹을 돕기 위해 군대를 일으키는 것에 흥미를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반대의 움직임까지 나타난 것이다. 그들은 만약 프로이센을 정복하게 되면 왕이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이 늘어나 자신들의 도움없이 국정을 운영해나갈 힘을 기르고 또한 그로인해 왕권이 강화되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도움없이 동맹이 계속 성공하자 기뻐진 그는 기사단의 최후가 가까워왔다고 생각하고 동맹의 "성공"에 자신도 참여하기 위해 일단 자신이 모을 수 있는 병력을 모아 북쪽으로 개선식이나 다름없는 행군을 벌이며 다가갔다. 가는 곳마다 도시와 농촌의 현지주민은 물론 시장과 귀족들까지 그를 환영했다. 이제 눈엣가시같은 기사단은 몰락할 것이다!
동맹이 마리엔부르크를 공성하는 동안 카지미에슈는 코니츠를 감시하기로 했다. 기사단의 독일지부에서는 후스전쟁에서 용맹을 떨친 보헤미아 용병들을 모아 원군으로 보냈는데 카지미에슈는 휘하의 병력만으로도 충분히 이들을 처리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미처 그가 생각하지 못한 것은 코니츠의 성주(castellan) 하인리히 로이스 폰 플라우엔이었다. 후일 단장이 되는 그는 원군과 폴란드군이 싸우자 수비대를 이끌고 성 밖으로 나가 폴란드군의 배후를 공격했고 앞뒤를 공격당한 카지미에슈는 간신히 도망칠 수 있었다.
카지미에슈는 의회를 설득하여 다시 군대를 일으키려고 했지만 의회는 용병을 고용할 자금을 내놓기를 거부했고 귀족들도 왕의 밑에서 참전하려 하질 않았다. 단치히가 이끄는 프로이센 동맹은 갑작스럽게 시작한 전쟁 때문에 자금난에 시달리자 기사단이 거두는 것보다 훨씬 더 무거운 세금을 거둬들였지만 제대로 시행되질 않았고 빠른 종전의 희망은 사라져갔다. 전쟁은 전국에서 소규모의 전투들이 벌어지고 요새들을 뺐고 뺐기는 등의 소모전으로 흘러갔다. 기사단이 고용한 용병들은 동맹이 장악했던 요새를 점령하고 나면 그곳의 주민들이 누구의 편인가에 관계없이 약탈을 일삼았고 기사들은 용병들을 제지할 수 없었다. 1457년, 단치히에 속한 세척의 배로 이루어진 동맹의 해군(?)은 보른홀름이라는 섬 주위에서 야간전투를 벌여 더큰 리보니아와 덴마크 함대를 무찔러 덴마크가 전쟁에서 빠지게 되었지만 단치히의 상인들은 이 승리로 아무런 이득을 취할 수 없었다.
동맹이 이러한 난항을 겪자 몇몇 회원들이 기사단에 붙고 몇몇 도시의 작은 길드들이 반란을 일으키려고 시도하였지만 에를리히스하우젠은 이 상황을 제대로 활용할 수 없었다. 돈이 없었던 그는 용병들을 제대로 부릴 수 없었고 세금감면을 약속으로 동맹에서 등을 돌리게 하려는 계획도 실행할 수 없었다. 임시방편으로 그는 몇몇 도시와 요새들을 용병들에게 담보로 잡히고 아직 자신의 휘하에 남아있는 시민들에게 더 많은 돈을 종용하는 것이 다였다. 마리엔부르크도 담보 중 하나였는데 이런 조치까지 취하고 동맹의 도시들이 반란의 움직임까지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용병들은 밀린 자신들의 봉급을 받는 것 외에는 별 관심이 없었으며 절대로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동맹내부의 반란움직임은 도시상인들의 과두정이 단치히가 보낸 병력의 도움을 받아 무자비한 진압을 하면서 멎었고 쿨름의 경우에는 폴란드왕이 이것을 도왔다. 동맹이 전쟁에서 이기고 있다고 생각한 용병들은 기사단이 전쟁에서 지기전에 밀린 봉급을 받아내기 위해 더욱 단장에게 압력을 가했고 에를리히스하우젠은 일단 일부를 지급한 뒤 약속된 날짜에 나머지를 지급하지 못할 경우 담보로 잡힌 요새들을 팔아도 좋다고 허락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약속한 날짜가 되어도 봉급은 지급할 수 없었다.
용병들의 봉급은 동맹과 카지미에슈에게도 문제가 되었다. 동맹의 회원들은 전비지출로 상당한 출혈 중이었고 카지미에슈는 의회가 돈을 내놓지 않아 역시 용병들에게 봉급을 지급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자동맹을 약화시키려는 덴마크의 전쟁선포에도 단치히의 무역은 활성화하여 어느 정도 고생 끝에 돈을 마련할 수 있었고 카지미에슈는 단치히에 그지방 정치와 무역에 대한 특권을 약속했다. 그 대가로 상인과두정부는 카지미에슈에게 요새들의 열쇠를 넘겨주었다.
단치히의 노력으로 용병들에게 봉급을 준 동맹과는 달리 봉급을 지급하지 못한 에를리히스하우젠은 용병들에게 구금당해 코니츠로 끌려가 왕에게 팔려갈 운명이었다. 블루메나우는 용병들의 행동이 신과 정의, 성경에 반하는 것이라 말하며 그들을 설득하려 했지만 결국 성 밖으로 끌려나가 내동댕이쳐지고 말았다. 하지만 에를리히스하우젠은 탈출하여 동맹의 손길이 닿지 않는 쾨니히스베르크로 갔고 그곳은 그뒤 계속 기사단장의 거처가 되었다.
피콜로미니는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애썼다. 동맹과 기사단 모두 피콜로미니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애썼지만 교황이 죽고 그가 새로운 교황 피우스2세로 즉위하게 되면서 사정이 변했다. 이제 더이상 프로이센 문제에 대한 관심을 잃게 된 그는 발칸의 투르크를 향해 십자군을 발족시키려 애썼지만 야노슈 후냐디의 죽음과 그의 아들 마티아슈 코르비누스로부터 헝가리의 왕관을 빼았으려는 황제 페르디난트3세의 대결 등으로 범유럽적인 십자군을 기대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직접 소규모의 훈련도 되지 않은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가 베네치아 선단을 타고 발칸으로 건너갈 생각이었지만 배도 타기전 몸이 허약해져 죽고 말았다. 그의 뒤를 이어 파울루스2세가 교황이 되었는데 그는 친후스파적인 성향을 보이던 보헤미아왕의 대표인 그레고르 폰 하임부르크를 매우 싫어했다. 더욱 큰 문제는 하임부르크가 기사단의 대표단으로도 활동한다는 사실이었다. 이에 따라 새로운 교황은 기사단의 적들에게로 기울 수 밖에 없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이제는 단치히 마저 제대로 용병들에게 봉급을 줄 수 없게 되었다. 때문에 이들은 상당수의 용병들을 내보내야만 했는데 문제는 이들이 떠나지 않고 지방을 돌아다니며 약탈을 하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그외 전쟁으로부터 재산과 마을을 지키기 위해 조직된 농민들의 민병대가 있었는데 이들은 전쟁이 길어지면서 식량과 자금이 부족해지자 때강도로 돌변하여 곳곳을 돌아다니며 약탈을 저질러댔다.
마리엔부르크는 그곳을 지키던 보헤미아 용병대장이 배신하면서 기사단에게 다시 넘어왔지만 일년의 공성 끝에 다시 넘어가게 되었다. 도시가 공성당하고 있는 와중에도 돈이 없던 에를리히스하우젠은 구원군으로 조직할 용병들을 모을 수 없었고 수비대에게리보니아에서 식량을 공급해주려고 했지만 곡물을 수송해올 배를 운영할 돈도 없었다. 마리엔부르크가 넘어가자 동맹은 기사단측 용병장교들을 대대적으로 처형해버렸다.
아직 살아있던 피우스2세와 황제는 기사단이 처해있는 입장에도 불구하고 계속 싸울 것을 독려했다. 교황은 동맹과 폴란드왕, 기사단에 대항하는 독일귀족들에게 파문선언을 했지만 그들은 그것을 무시하고 계속 기사단과 싸웠다. 폴란드는 교전국 중의 하나였지만 폴란드군은 별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지 못했다. 전쟁특별세를 징수하거나 군사모집을 위해서는 의회의 동의가 필요했지만 카지미에슈가 전쟁에서 성공하기를 원치않는 귀족들은 절대 왕을 도우려 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왕의 권리를 상당부분 포기하고 의회에 더 많은 권리를 주겠다고 약속한 후에야 자금지원을 얻을 수 있었다. 리투아니아의 귀족들은 카지미에슈에게 기사단과 동맹을 맺겠다고 위협하면서 더 많은 권리와 함께 볼히니아를 리투아니아에 귀속시키도록 만든 뒤 리보니아에서 프로이센으로 지원군이 가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역할을 맡았다.
1461년, 에를리히스하우젠은 독일에서 용병들을 모아 군대를 조직하는데 성공했다. 수는 적었지만 충분히 지쳐있는 적들을 물리치기에 적당하다고 판단한 그는 62년 9월, 쿨름을 출발하여 단치히에서 자신과 맞서기 위해 나온 동맹군과 싸우게 되었다. 양측 다 군대의 숫자도 적고 오합지졸인데다 용병, 떠돌이 전직농민, 도시모집병, 소수의 기사들로 이뤄진 형편없는 모양세였지만 기사단측의 병력이 그래도 더 전력에서 우위였다. 이를 알고있는 동맹에서는 당시 동유럽에서 유행하던 바겐부르크 전술을 사용하여 전투를 벌였고 결국 에를리히스하우젠이 힘들여 조직한 군대는 무너져 버렸다. 63년 가을에는 동맹의 해군이 기사단의 함대를 물리침으로서 단장은 협상테이블에 나올 수 밖에 없었다.
피우스2세와 한자동맹의 중재로 협상이 열리게 되었는데 결국 이 협상은 계속 질질 끌다가 몇번의 반전과 더이상 용병을 고용할 돈이 없던 에를리히스하우젠이 동맹과 폴란드왕의 가혹한 협정문에 66년, 서명을 하는 것으로 맺어지게 된다. 이것을 2차토른협정이라고 하는데 서프로이센과 쿨름은 폴란드왕에게 "반환"되었고 마리엔부르크, 엘빙, 크리스트부르크가 모두 폴란드에 양도되었으며 에름란트는 독립해나갔고 기사단은 신성로마제국과의 관계를 끊고 폴란드왕의 봉신이 되기로 하였다. 동시에 기사단의 입단하는 회원의 반은 폴란드인이 차지하기로 하였다.
기사단장의 거처는 폴란드로 넘어간 마리엔부르크 대신 쾨니히스베르크가 되었으며 안그래도 떨어진 단장의 권위는 더더욱 떨어지게 되었다. 독일과 리보니아는 그래도 같은 조직이라는 일체감은 있었지만 전쟁 후 아예 독립조직이나 다름없이 되어버렸고 성주들과 관리들은 더이상 기사단의 일원으로 기사단을 위해 헌신하기보다는 자신이 관리하는 지역을 왕국삼아 독자적인 이익만을 취하게 되었다. 코니츠의 성주였던 플라우엔이 새로운 단장이 되어 내분을 상당수 수습하고 기사단을 상당부분 정상화시켰지만 그는 단장이 된지 일년만에 죽고 그의 후임인 하인리히 레플레 폰 리히텐베르크는 최선을 다했지만 그에게 남겨진 한정된 자원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폴란드는 오랜동안 눈엣가시였던 기사단을 굴복시키고 바다로의 출구를 얻게 되었지만 심각한 왕권의 약화를 겪어야만 했다. 가뜩이나 왕의 힘이 약하고 귀족들의 힘이 큰 폴란드에서 카지미에슈가 용병을 고용할 자금을 얻기 위해 의회에 더 많은 권리를 주기로 한 타협 덕분이었다. 게다가 카지미에슈가 기사단에 신경쓰는 사이 동쪽에서는 모스크바 공국이 이반3세의 영도 아래 크게 성장하여 크림한구과 동맹을 맺은 뒤 리투아니아를 야금야금 갉아먹는 중이었다. 가뜩이나 기사단과 상대할 돈이 없어 절절 매던 카지미에슈가 리투아니아까지 신경쓸 여유가 없었고 결국 리투아니아는 상당한 영토와 영향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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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결국 승자는 모스크바 공국이였군요.
;;;;; 참 찜찜한 결말이군요=_= 제로섬 게임이라니;;;
역시 불쌍한 폴란드... 귀족들이 나라를 말아먹는군요.
폴란드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제국 되기는 글렀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