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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별종 새울★ 원문보기 글쓴이: 화준!
굿 애국가 눈
02 이화준
즐거운 생활
막 도심을 벗어난 버스가 시 외곽으로 접어든다. 버스 안에는 아무렇게나 군복을 빼어 입은 사람들로 득실하다. 만원인 버스는 그들이 내는 소음으로 왁자하다. 휴대전화로 시끄럽게 통화를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의자에 몸을 깊숙이 파묻은 채 잠을 청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에게 체면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 모양이다. 외려 그것에 대해 타박하거나 짜증을 부리는 사람이 없는 게 신기할 정도로 그들의 행위는 자연스러우면서 한편으론 몰상식해보이기까지 한다. 마치 순대 속처럼 꽉 막힌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그들의 열망 때문인지 난방기를 틀지 않았는데도 내부가 몹시 후덥게 느껴진다.
맨 뒷좌석 가장자리에 앉아 창유리에 고개를 기대고 있는 희주로선 이 시간이 지루하기만 하다. 버스가 지면이 고르지 못한 길을 지나는 동안 창유리에서 희주의 머리가 통통 튄다. 희주는 그것이 나쁘지 않다. 머리가 창유리에 부딪힐 때마다 그는 뇌세포가 몇 만 개쯤 파괴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기억을 담당하는 대뇌 부분이 손상된다면 퍽이나 유쾌해질 수 있을 듯하다.
버스가 구불구불한 길에 접어들면서부터 희주의 머리가 창문에 더욱 세게 부딪친다. 부러 몸을 바로 세우지 않고 관성을 이용해 마음껏 머리를 부딪치는 희주의 얼굴이 마치 그것을 즐기는 사람처럼 자연스럽다. 이로써 뇌세포가 몇 만개쯤 파괴됐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희주는 몸을 바로 세운다.
날씨가 풀리면서 가뜩이나 후덥한 내부에 온기가 돈다. 희주는 갑갑했는지 야전상의를 풀어헤친다. 아침까지만 해도 잡힐 것 같지 않은 날씨 탓에 단단히 채비를 하고 나온 희주의 앙상한 몸이 드러난다. 얇고 가름한 체형이다. 군복은 체형보다 한 치수 크게 입었는지 헐렁한 느낌을 준다. 휴가 나온 군인치고는 군복과 군화에 손질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야전상의의 상병 표식마저 실올이 삐져나와 있다. 정작 희주는 그런 것에는 별 미련이 없다는 듯 차창 밖만 바라보고 있다. 특별휴가이기는 하지만 불쾌함을 감출 수 없는 오전이다.
'실명이라…….'
눈을 잃는다. 전부터 한쪽 눈의 시력이 나빠진 건 알고 있었지만 사물을 구분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흐릿하게나마 글자를 읽을 수 있고 대상을 식별할 수 있는데도, 군의관의 말은 달랐다. 너무 오랫동안 눈을 방치했다는 것이다. 렌즈에 스크래치가 심한데다 평소 불규칙하게 안경을 사용한 탓에 한쪽 눈의 기능이 급격히 감퇴했다며 군의관은 전역을 해서든, 혹은 그 전에라도 안과 시술을 받아야 한다고 강권했다. 이미 자신의 눈 상태를 잘 알고 있어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위험을 인지한 건 사실이었다.
한쪽 눈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 시야가 좁아질 생각을 하니 희주는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진다. 군의관이 맞춰 준 안경이 눈에 익지 않아서인지 자꾸 대상이 흐릿하게 보이는 게 어지럽기까지 하다. 높은 도수 탓인 모양이다. 복귀하기 전에라도 다시 안경을 맞출 생각이다. 군의관의 안경은 어딘지 모르게 꺼림칙하기 때문이다.
두꺼운 뿔테 안경을 쓴 희주를 관심있게 쳐다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결국 이들과 자신은 별 볼 일 없는 타인의 관계일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실명이 먼 미래의 일처럼 느껴지면서 유쾌해진다.
내부는 여전히 승객들이 내뿜는 열기와 소음으로 인해 기사의 안내멘트마저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그러면서 저만치 앞에서 언성을 높이면서 싸우는 듯한 소리가 얼핏 들린다. 누군가 자신의 엉덩이를 만진 것에 대한 수치심을 감추지 못한 여자의 앙칼진 음성이 버스 내부의 소음을 소거시키기에 충분하다. 희주는 그것을 포르노 속 여주인공의 행복에 겨운 교성 정도로 비유하고 싶어진다.
적어도 휴가와 동시에 이 불유쾌한 삶도 끝이라는 생각에 희주는 더할 나위 없이 즐거워진다.
바른 생활
장장 다섯 시간이나 국도를 타고 달린 버스가 마침내 터미널에 닿는다. 종착지라 그런지 빈 좌석이 많다. 그 중 군복을 입은 사람은 희주 뿐이다. 잠이 들었던가. 창문에 고개를 기댄 채 짐을 챙겨 내리는 승객들의 분주한 뒷모습을 눈으로 좇는다. 희주로서는 저들이 괜히 부럽게만 느껴진다. 저들에게는 분명 가족이 있고, 반겨주는 이가 있을 것이다. 짐을 넘겨주며 부둥켜안을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희주는 조금은 섭섭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성질 급한 버스기사가 아직 내리지 않는 희주를 바라보며 불쾌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빨리 내리라는 것이다. 희주는 좌석 앞에 걸어놓은 안경을 집어 눈가로 가져간다. 짐이라고는 안경이 전부다.
버스에서 내림과 동시에 약간의 어지럼증이 인다. 높은 도수에 눈이 적응하려면 하루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군의관의 말을 떠올린다. 실명을 자초하면서까지 굳이 안경을 벗고 싶진 않아 희주는 눈을 몇 번 깜빡이는 것으로 피로를 풀어본다.
대한(大寒)임에도 터미널이 사람들로 빼곡하다. 연인인 듯한 남녀가 출구에서 만나 가볍게 포옹하고는 길가 포장마차로 들어선다. 종이컵에 따른 어묵 국물을 호호 불어가며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웃는다. 희주는 그들이 곧 인근 모텔로 들어가 뜨겁게 몸을 섞으며 사랑을 속삭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날은 춥고 몸은 녹여야 하겠기에 가능한 일이다.
터미널에서 집까지는 걸어서 약 이십 분 정도의 거리다. 택시를 잡을까 하다가 승차구에 줄이 늘어선 걸 보고는 희주는 마지못해 걷기로 결심한다.
일 년 만에 찾은 고향이다. 그 사이 건물이 많이 올려졌다. 잡화점이 있던 자리에 큰 규모의 할인마트가 들어섰고, 소읍에 하나 있던 초등학교 부지에는 간판도 제대로 읽기 힘든 사설기관이 떡 하니 세워져 있다. 가뜩이나 학생이 없어 운영이 어려운 처지에 놓인 학교였다. 그 학교를 국민학생 신분으로 졸업한 희주로선 달갑지 않은 광경이다. 대체 학교를 왜 없앴을까. 모교가 없다는 사실이 마치 부모의 부재를 처음 느꼈을 때처럼 명징하게 각인된다. 이 세상에 자신이 기댈 곳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모양이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니 홀로 된다는 것이 썩 나쁘지 않게 여겨진다. 억지로라도 부모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보지만 정작 떠오르는 건 아무것도 없다. 기억이란 껌과 같은 것이어서 오래 씹을수록 그 맛이 잊혀지기 마련이다.
특별휴가이기는 하지만 순전히 조모상 때문이다. 할머니의 운명 소식을 듣던 날 밤 희주는 강원도에 소재한 대규모 훈련장에 있었다. 부음 소식 덕분에 훈련장을 벗어날 수 있었지만 새벽 첫차를 타기 전까지 무작정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조모상의 경우 3박 4일의 특별휴가가 주어지지만, 희주가 기초생활수급자인 점과 친인척이 없는 상황에서 상주라는 이유로 하루가 더 붙어 휴가는 전부 4박5일이었다. 할머니의 부음보다도 희주는 잠시나마 군대를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위안으로 삼기로 했다.
할머니의 임종은 어떠했을까. 삼고의 고통 속에서 할머니는 어떤 몸짓으로 죽어갔을까. 어쩌면, 그녀는 마지막 가는 길에 손자가 불러주는 노래를 듣고 싶어 했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희주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할머니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기로 한다. 병신. 희주에게 할머니는 병신이었다. 앞 못보고 말 못하고 걷지 못하는 슬픈 병신. 당신은 왜 나를 버리지 않았나요. 당신도 내 부모라는 사람처럼 나를 버렸다면 조금은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었을 텐데 왜 날 버리지 못했나요. 당신은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나요. 슬픈 병신,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으로 기억될 사람, 아 나의 할머니.
슬기로운 생활
장례는 성당의 늙은 여자들에 의해 치러졌다. 읍에 하나 있던 성당에서 할머니의 장례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지원해주었다. 그녀가 평소 착실하게 성당에 다닌 덕분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희주가 기억하는 일들 중 할머니와 읍내를 다녀오는 유일한 시간이기도 했다. 그때마다 희주는 이십 분 거리에 있는 읍내의 성당까지 할머니를 휠체어에 태우고 뒤에서 밀면서 걷는 지루한 시간을 견뎌야 했다. 마을버스 시간에 맞춰 다녀오거나 택시를 부를수도 있었지만 할머니는 유독 손자가 태워주는 휠체어를 좋아했다. 휠체어를 좋아했다라기보다는 어쩌면 희주가 불러주는 애국가를 더 좋아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애국가의 곡조는 티브이의 정규방송이 끝난 뒤 나오는, 국가의 주요 행사 등에서 불려지는 음이 아닌 스코틀랜드 민요 <이별의 노래>의 곡조에 가까웠다. 아무래도 지금의 애국가가 만들어지기 전 그녀는 그 곡조로 노래를 배운 모양이었다. 덕분에 희주는 학창시절 조회시간마다 엉터리 애국가를 불러야했다. 할머니가 돌아간 지금, 이제 엉터리 애국가는 듣지도 부르지도 않게 될 것이었다.
성당의 늙은 여자들이 할머니의 영정 앞에서 마치 자신들이 친 딸들인 것처럼 슬퍼하는 모습을 보면서 희주는 한심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훌륭한 배우의 연출된 눈물이 이와 같을까. 저들에게 할머니는 그저 일주일 한 번 불편한 몸을 이끌면서까지 예배에 참석했던 늙은 자매에 불과할 것이다. 어쩌면 그들이 슬퍼하는 건 할머니의 죽음이 아닌 성당 발전기금을 거르지 않고 내던 교인이 줄었다는 안타까움 때문일 것이다. 성당 사람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극구 집에서 장례를 치를 것을 요구한 것도 그 때문이다. 평생을 삼고 속에서 살다가 돌아간 할머니였기에 적어도 그녀의 저 가엾은 영혼만큼은 자유롭게 해주고 싶은 게 희주의 솔직한 심정이다. 그러다 문득 희주는 할머니가 왜 그토록 성당에 열정적이었는지 새삼 궁금해진다. 정말 그녀는 누구를 위해 기도를 올린 것일까. 평생을 반불구자로 살아온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을까. 그것마저 아니라면 자신이 돌아가고 난 뒤 홀로 남을 손자의 안녕을 바랐던 것일까. 아아 불쌍한 할머니. 병신같은 나의 할머니.
주위에 친인척이 있었던가. 조문객이 없는 새벽은 희주에게 지루함만을 안겨주기에 충분하다. 성당의 늙은 여자들은 주어진 역할을 충분히 수행했다고 여겼는지 울다 웃다를 반복하다가 아침에 다시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그들이 떠난 집은 적막 그 자체로 희주의 마음을 들뜨게 한다. 희주로선 이 적막함이 나쁘지 않다. 자신이 군대에 자원한 뒤 할머니가 겪었을 적막감과 외로움이 이와 같았을 생각을 하니 조금은 미안함 감정이 앞선다.
희주가 입대하던 날 할머니는 천상 병신처럼 울었다. 눈이 없는 사람에게도 눈물은 존재하는가. 팔과 고갯짓만으로 할머니는 아이마냥 응앙거리며 아주 서럽게 울었다.
‘가지 마라. 가지 마라. 희주야, 이 할미를 두고 어디 가려느냐. 가지 마라. 가지 마라.’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또렷하게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당신의 목소리.
영정 속 할머니에게는 눈이 없다. 그런데도 희주는 마치 할머니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바라보고 있다는 건 순전히 희주의 느낌일 뿐이다. 할머니에게 눈이 있었던가. 희주는 이제껏 그녀의 눈을 본 적이 없다. 생전에 보지 못한 세상을, 죽고 난 다음에 보는 느낌은 어떠할까. 희주로선 자꾸만 할머니가 자신을 가엾이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불쾌하고 한편으론 오싹한 기분에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아무렇게나 던져놓고는 그대로 빈소가 마련된 방을 빠져 나온다.
장례를 치르는 것만으로 하루가 갔다. 할머니가 아니었다면 희주는 지금쯤 혹한의 추위 와 싸우고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명령이 없다면 몇 시간이고, 한 자리에 틀어박혀 더딘 하루를 보냈을 게 분명하다. 온전치 못한 신체를 지닌 할머니가 겪었을 삶의 불편에 비한다면 지금 희주는 아주 짧고, 편한 시간을 감내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할머니에게 조금은 감사해하기로 한다. 감사에 대한 뜻으로 희주는 할머니의 영혼을 편안하고 자유롭게 해주겠다고 다짐한다. 어쩌면 그것은 그가 할머니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효도인 셈이다.
생활의 길잡이
희주는 생전 할머니의 흔적이 남아 있는 물건들을 정리하고자 마음먹는다. 그러면서 그것이 자신의 흔적을 지우는 일과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희주로선 마치 그것이 기억을 지우는 일처럼 단순하고 명료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태어나 줄곧 할머니 곁에서 자란 희주지만 그녀가 평소 다듬고 소중히 여기던 물건들에 대해선 전혀 알지 못한다. 평생을 감각에만 의존해서 살다간 할머니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무엇이었을까. 적어도 희주의 기억 속에서 할머니는 불편하게나마 제 할 일을 충실히 이행했던 여자였다. 누군가 옆에서 따로 거들지 않아도 곧잘 몸을 움직여 밥을 짓고 세탁기를 돌리고 이부자리를 펴던 할머니였다. 어린 희주에게 그런 할머니는 마냥 우습고 병신같은 존재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은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으려는 할머니의 맹렬한 의지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실례합니다.”
뒤란에서 할머니의 유품을 정리하고 있던 희주는 마당 쪽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흠칫 놀란다. 누가 이 시간에. 다소 불쾌해진 희주가 하던 일을 멈추고 마당으로 돌아나간다. 그러면서 마당 한 가운데에 중년의 여자가 서 있는 모습을 확인한다. 조문 온 것이라 여기기에는 여자의 옷차림이 제법 수상하다. 여자는 세련미 넘치는 흰색 정장슈트차림에 짙은 선글라스를 낀 채 주변을 둘러보고 있다. 예법을 따지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여자의 옷차림은 문상을 온 사람의 그것이라고 하기에 무리가 있다. 불쾌함과 호기심을 동시에 느낀 희주가 여자 곁으로 다가서며 묻는다.
“어떻게 오셨죠?”
희주의 물음에는 나른함과 불쾌함이 섞여 있다. 여자는 선글라스를 벗지 않고 가볍게 허리를 굽혀 인사한 뒤 입을 연다.
“손자 분 되시죠. 군인이시라고 들었는데. 처음 뵙네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희 할머니와 어떤 관계이신지 여쭤도 될까요?”
희주는 여자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짙은 향수 냄새가 낯설지 않다고 느낀다. 언젠가 코끝으로 음미했을 법한 냄새다.
“군대에 계신 동안 제가 할머니를 간간히 돌봐드렸어요. 요 며칠 일이 많아서 들를 수 없었는데……이렇게 가실 거라고는…….”
그랬는가. 여자가 할머니를 돌봤는가. 홀로 지내야 하는 할머니를 가끔 동정하긴 했지만, 누군가 옆에서 보살펴 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한 게 사실이다.
마루 맡에 달아놓은 전구 빛을 받아 여자의 얼굴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알이 큰 선글라스는 눈매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색이 짙다. 여자는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희주는 괜히 궁금해진다.
여자를 안방으로 안내하면서 희주는 그녀의 몸을 흘끔거린다. 중년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여자의 몸은 아름답고 유혹적이다.
향이 다 탔는지 향로에서 연기가 나지 않는다. 희주가 향을 새로 꽂고 불을 붙이는 사이, 여자가 영정에 대고 절을 한다. 잠깐이지만 희주는 여자의 어깨가 경미하게 떨리고 있는 모습을 놓치지 않는다.
잠시 후, 희주와 여자가 마주한다. 그때까지도 여자는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 희주는 내색하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말문을 튼다.
“생전 제 할머니께 도움을 주신 분이라니,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감사는요. 정작 필요할 때 도움을 드리지 못해서 죄송할 뿐이에요.”
“할머니와는 언제부터 알고 지내셨는지…….”
희주의 물음에는 나른함이 묻어 있다. 여자가 영정을 한번 돌아보고는 말한다.
“제가 일하는 안경원에서 처음 뵀어요. 다른 어르신의 부축을 받으면서, 손자 분께 드릴 안경을 사야 한다며 생떼를 쓰셨지요. 처음에는 안 된다고, 본인이 아니면 안경을 맞출 수가 없다고 했는데도 당신께선 말을 듣지 않으셨어요. 몸이 불편하신데도 계속 안경원에 들르신 할머님이셨어요. 그게 인연이 됐는지, 그때부터 일이 없는 날에 찾아뵙고, 집안일을 도와드렸지요. 말동무도 되어드리구요. 친 딸처럼 예뻐해주셨는데…….”
선글라스 뒤에 감춰진 여자의 눈은 얼마나 아름답게 빛나고 있을까. 희주는 갑자기 여자가 어떤 눈을 하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마흔쯤 됐을까. 도무지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을만큼의 아름다운 여자라고 희주는 생각한다. 조금은 야하다 싶을 정도의 화장이 외려 그녀를 더욱 수수하게 만들어놓는다.
“발인은 언제인가요?”
그 말에 흠칫 놀란 희주가 여자에게서 시선을 거둔다.
“내일 모레입니다.”
“그럼 발인 날 다시 오도록 할게요. 아침 일찍 일이 있어서 이 이상은 힘들 듯해요.”
“와주신 것만으로도 할머니께서 좋아하실 겁니다.”
“그런데, 할머님을 어디로 모실 생각이시죠?”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말고 여자가 돌연 희주에게 묻는다.
“화장을 할 생각입니다. 평생 자유롭지 못하셨으니, 저 세상에서라도 자유롭게 돌아다니셔야지요.”
“제가 드릴 말은 아니지만…… 그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여자가 선글라스를 고쳐 쓰곤 말한다. 그 사이 희주는 잠깐이지만 여자의 눈을 들여다 본 것에 만족해한다.
“제가 아는 할머님은 늘 누군가를 기다리는 눈치셨어요. 마치 누군가 자신을 찾아오겠거니 하며 말예요. 저 세상에서라도 할머님은 누군가를 계속 기다리고 계실 거예요.”
“누군가라면…….”
희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자가 가볍게 예를 표하고는 방을 빠져나간다. 마루에 걸터앉아 하얀 발목을 드러내며 구두를 신는 여자를 보면서 희주는 그 모습이 낯설지 않다고 여긴다. 언젠가, 아주 오래 전 자신의 눈으로 목도한 것마냥 뚜렷한 잔상이 희주의 머릿속에 남는다.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떠올릴 수 없었던 기억이 조금씩 되살아 나는 듯하다. 여자는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을 열고 나선다. 희주는 그 모습이 전혀 생경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정말, 할머니가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누구였을까.
말하기 듣기
조문객이 없는 빈소는 희주에게 지루함을 안겨주기 충분하다. 성당의 늙은 여자들은 음식을 만들거나 집안의 살림살이 중에 상태가 온전한 것들을 살피면서 시간을 보낸다. 결국 그 음식과 물건들은 그들의 가족 곁으로 들어갈 것이다. 희주는 그런 것에 별 개의치 않는다는 듯 상복을 벗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는다. 군복을 입었을 때보다 한결 멋스럽다. 희주는 음식을 만들고 있는 늙은 여자들에게 잠시 읍에 다녀온다고 말하고는 그대로 대문을 나선다.
이참에 안경을 새로 맞출 생각이다. 실명을 조금이라도 방지하기 위해선 자신의 눈에 맞는 도수의 안경을 맞춰야 한다. 지금 희주에게 중요한 건 조문객 하나 없는 빈소를 지키는 일보다 안경을 새로 맞추는 게 가장 시급하다.
새벽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이 그칠 기세를 보이지 않는다. 버스를 탈까 하다가 희주는 그냥 걷기로 한다. 소읍까지는 이십분 정도가 걸린다. 할머니가 살아 있을 적만 해도 희주는 일주일에 한 번 이 길을 걸으며 애국가를 불렀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할머니의 집은 이제 젊은 부부의 조촐한 신혼처가 될 것이다. 그들은 귀농한 부부일 수도 있고, 소읍에서 살다가 마을로 이사 올 사람들 일 수 있다. 그마저 아니라면 그악스런 기계에 의해 산산이 부서질 게 분명하다. 이제 희주가 기댈 곳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그것이 실명을 처음 언도받을 때처럼 명징하게 각인된다. 어느 소설가의 문장처럼 이제 희주의 고향에는 더 이상 눈이 내리지 않는다. 적어도 희주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한다.
소읍에 건물은 몇 개 되지 않는다. 초등학교가 없어진 이상 주위에 펼쳐져 있단 상점들도 저마다 문을 닫거나 학교가 있는 곳으로 옮겨간 모양이다. 이 근처에 안경점이 하나 있었을 텐데. 희주는 기억을 더듬어 안경점의 위치를 떠올리면서 소읍의 중심가로 들어선다. 장날인지 오일장이 한창이다. 번화가라고 한다면, 장이 선 곳이 그나마 사람으로 붐빌 시간이다. 계속해서 시장 길을 걷다가 희주는 마침내 작은 도로를 끼고 있는 안경점을 찾아낸다. 소읍에서는 그나마 깔끔하고 시설이 잘 갖춰진 안경점이다. 희주의 기억으로 안경점에 있던 자리에는 아마 단층 병원이 있었을 것이다. 의사의 이름을 간판으로 내건 작은 안과였는데, 그곳에서 희주는 실명에 대한 위험을 처음 언도 받았었다. 때문에 군의관이 실명을 언급할 때에도 희주는 담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실례합니다.”
안경점으로 들어서자 내부의 후덥한 온기가 훅 끼쳐온다. 희주는 온기보다 차라리 바깥의 추위가 더 매력적이라는 불유쾌한 생각이 든다. 산 자만이 느낄 수 있다는 온기가 이 순간만큼은 못내 불쾌하다.
온기에 녹아 있던 젊은 남자 직원이 정신을 차리고는 희주에게 다가온다. 그러고는 어울리지 않은 얼굴로 해맑게 웃으며 묻는다.
“안경 하실려구요?”
직원이 한 없이 해맑게 웃으며 반기는 통에 희주는 마지못해 높은 도수의 안경을 맞춰줄 것을 주문한다. 직원은 기본적인 안과검사를 해봐야 알 수 있다며 희주를 검사실로 안내한다. 검사를 받는 중에 희주가 문득 직원에게 묻는다.
“여기 직원 중에, 혹시 나이 지긋하신 여자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그 말에 직원이 새삼스럽다는 듯 가볍게 웃는다.
“직원은 저 혼자뿐이에요. 사장님은 저녁시간쯤에나 나오실 테고요. 사장님은 남자 분이랍니다. 찾으시는 분이 누구신지 모르겠네요.”
직원의 말에 희주의 동공이 일순간 커진다. 생전 할머니에 대해 물어볼 겸 여자를 만나려고 찾은 안경점이다. 그런데 여자가 없다니. 여자는 분명 이곳에서 일을 한다고 했는데. 희주는 짐짓 여자가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한다. 대체 왜, 어떤 연유로.
“혹시 알이 큰 선글라스를 낀 여자를 본 적 없으십니까?”
“글쎄요. 선글라스가 워낙 흔하니까요.”
희주는 낙담한다. 안경보다도 여자를 다시 만나고 싶었던 게 솔직한 심정이다. 중년의 나이임에도 그토록 매혹적인 몸을 지닌 여자를 이제껏 본 적이 없다. 기회가 된다면 희주는 여자를 다시 만나고 싶다. 적어도 엊저녁에 보았던 잔상을 다시 느껴보고 싶을 뿐이다. 어째서 여자에게서 그 사람의 잔상이 보였을까.
“아, 그 여자일 수 있겠네요.”
“……?”
“말씀하신 그 여자분 말이에요.”
세공을 하다 말고 직원이 생각났다는 듯이 희주를 돌아보지도 않고 자기 혼자 신나서 말하기 시작한다.
“선글라스라고 하시길래……누굴까 싶었는데, 아무래도 그 여자 같네요. 이따가 여기서 나가시면 왼쪽 골목을 따라 가 보세요. 가다 보면 찻집이 하나 있을 거예요. 찻집은 그렇고 그냥 다방이에요. 시골 촌구석의 나이 많은 레지들만 모여 있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저도 직접 본 건 아니라서 섣불리 말씀 드리기가 좀 그런데……아는 사람이 거기 선글라스 낀 아가씨랑 하룻밤을 지냈는데, 질겁해서 뛰쳐나온 얘기를 해주더라구요. 혹시나 해서 말씀 드리는 거니까 기분 상하지 마세요.”
“무슨 말입니까?”
희주가 정색을 하며 호기심이 깃든 얼굴을 해서 묻는다. 직원이 어깨를 한번 들썩여 보인다. 세공에만 신경 쓰고 싶은 모양이다. 희주는 마지못해 직원에게 묻는다.
“얼마나 걸립니까?”
“한 삼십분이면 됩니다. 도수가 높을 테니까 눈의 피로를 풀어두시는 게 좋을겁니다.”
직원이 콧노래까지 부르며 세공에 전념하는 사이 희주는 진열대에 놓인 안경들을 주욱 훑어본다. 자신에게 어울릴만한 안경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가 문득 알이 큰 선글라스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여자가 썼던 선글라스와 같은 디자인이다. 희주는 그것을 집어 눈가로 가져간다. 짐짓 여자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거울이 저물어가는 사람의 잔상을 만들어낸다. 불쾌하고 한편으론 당혹감에 희주는 거칠게 선글라스를 벗는다.
삼십분. 그 시간 동안에 희주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기다리는 일뿐이다. 그것은 오래 전의 추억처럼 희주를 들뜨게 하기에 충분하다. 제발 할머니가 죽어주었으면 좋겠다고 소원하던 시절의 기다림이 이와 같을까. 기다림치고는 꽤 오래 걸린 셈이다.
갑자기 희주가 선글라스를 집어 직원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재빨리 외투 안주머니에 집어넣는다. 직원은 그런 희주를 눈여겨보지 않는다. 희주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직원에게 삼십분 뒤에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안경원을 나선다.
탐구 생활
직원의 말대로 다방은 골목 어귀에 있다. 요즘 건물에 비해 낡아 보이는 다방이다. 지하에 자리한 다방은, 내려가는 계단이 좁고 자칫 발을 헛디딘다면 굴러 떨어질 정도로 가파르다. 계단 층층이 눈이 쌓여 있어 난간을 잡지 않고서는 도무지 입구로 내려설 수조차 없다. 영업을 하기엔 이른 시간인 지 계단에 빗질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어차피 계단을 오르내리는 건 하이힐을 신은 채 배달을 나서는 여자들 일 뿐이다. 다방이라고는 하지만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여지는, 트로트 음악이 깔리는 시골 촌동네의 다방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어딘가 음침하고, 슬픈 느낌을 주는 다방이다. 희주는 난간 기둥을 잡고 한발씩 내딛어 입구로 내려선다. 자물쇠가 개방 돼 있는 걸로 보아 안에 누군가 있는 모양이다. 그 여자도 안에 있을까. 희주는 안주머니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쓴다. 알이 큰 선글라스 때문에 가뜩이나 작은 희주의 얼굴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가려진다.
문을 열자 입구에 달아놓은 작은 새 모형이 찌르릉 울어 제친다. 아직 영업 전이라 그런지 다방은 안은 한없이 고요하고 어둑하다. 커튼도 걷지 않은 상태라 문을 닫으면 밀실처럼 느껴질 정도로 어둡다. 할머니가 처음 느꼈을 어둠에 대한 두려움이 이와 같을까. 희주는 문을 반쯤 열어 둔 채 다방 안으로 들어선다. 그나마 빛 때문에 내부의 구조를 겨우 분별 할 있을 정도다. 주방에서 덜그덕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걸로 보아 누군가 설거지를 하는 모양이다. 헛기침을 하는 것으로 희주는 인기척을 대신한다. 안쪽에서 덜그덕소리가 멈추지 않는다. 희주는 마지못해 사람을 부른다.
“실례합니다.”
주방 쪽에서 덜그덕소리가 잠시 멈추는 듯하더니 다시 이어진다. 아무래도 희주의 말을 듣지 못한 듯하다. 어쩔 수 없이 다시 한 번 크게 사람을 부르려는데 문득 입구 벽 면에 걸린 성모마리아의 초상화가 눈에 들어온다. 마리아가 한없이 자애로운 눈으로 희주를 바라보고 있다. 바라보고 있다고 건 어디까지나 희주의 느낌일 뿐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의 미소가 이와 같을까. 희주는 마리아의 미소와 할머니의 미소가 닮았다고 생각한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할머니의 미소가 아닌 다른 사람의 미소일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오래 전에 잊혀진, 희주가 아무리 떠올리려 노력해도 떠올릴 수 없었던 어느 여인의 미소. 희주는 마리아의 미소를 뒤로하고 다시 주방 쪽을 향해 살짝 언성을 높여 사람을 부른다.
“아무도 안 계십니까.”
그제서야 주방에서 덜그덕거리는 소리가 멎는다. 어둠 속에서 여자 한 명이 손에 묻은 물기를 닦으며 다가온다. 여자는 선글라스를 낀 채로 희주를 마주한다. 희주는 대번 그녀가 빈소를 찾아왔던 여자일 것이라고 단정한다. 그러나 여자는 희주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지 이른 시간부터 찾아온 손님 때문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아직 영업 전이예요, 손님. 이따 다시 오지 그러세요.”
“커피나 한 잔 하고 가겠습니다.”
희주는 선글라스너머로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하려고 노력한다. 여자는 여전히 희주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 희주는 그것이 괜히 재미있다.
“아유. 손님도 참. 그럼 조금만 기다리세요. 금방 내올게요. 앉아서 기다리세요.”
희주는 그러하마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 앉는다. 여자는 실내등도 켜지 않고 그대로 주방으로 들어가 차를 준비한다. 왜 불을 켜지 않는 걸까. 희주는 개의치 않기로 한다.
잠시 후 여자가 쟁반에 차를 받쳐 내온다. 그때까지도 여자는 실내등을 켤 생각을 하지않고 있다. 희주는 그런 여자가 궁금했지만 애써 태연해지려고 노력한다.
“드세요. 뜨거우니까 조심하시구요.”
“고맙습니다.”
희주가 커피를 받아 테이블에 내려놓는다. 여자가 선글라스를 한 번 매만지고는 희주의 맞은편에 자리잡고 앉는다. 희주가 가슴팍으로 커피를 가져가려다 말고 그런 여자에게 묻는다.
“왜 앉는 겁니까?”
“원래 손님이 차를 다 드시기 전까지 이렇게 앉아 있는 거예요. 싫으시다면 일어날게요.”
여자가 일어서려는데 희주가 잔을 내려놓으며 앉으라고 손짓한다. 여자는 당연하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자리에 앉는다. 그러면서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며 하나만 피우겠다며 검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일한 지는 얼마나 됐습니까.”
“일 년 됐어요. 그 전까지는 도시에서 살다가, 삭막하기도 하고 저처럼 나이 많은 여자가 할 일도 마땅치 않고 해서 고향으로 내려온 거예요.”
“원래 이곳 태생이었습니까. 도시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요. 사람이 고향을 떠나면 엄마 곁을 떠나는 기분이 든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다시 내려온 거예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을 하셨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희주의 그 말에 여자가 까르르 웃는다.
“직접 보여드릴까요?”
“무슨 말입니까.”
갑자기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희주 곁으로 다가선다. 그러고는 희주의 몸을 약하게나마 등받이 쪽으로 밀고는 그대로 무릎을 꿇고 앉는다. 희주는 당혹감에 여자를 제지하려고 하지만, 이미 여자가 바지를 벗기고 속옷까지 벗기려 들고 있다. 희주는 그런 여자의 행동이 익숙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제가 재밌는 걸 보여드릴게요. 노래를 불러드릴 거예요. 마음에 드시면 이따 가실 때 팁이라도 얹어 주시면 돼요.
그러고는 여자가 선글라스를 벗고 희주 성기를 애무하기 시작한다. 희주로선 거부할 수 없는 색다른 쾌락이다. 할머니의 발인을 앞두고 낯선 여자에게서 애무를 받는다. 희주는 갑자기 기분이 유쾌해지면서 이 시간이 지루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때 여자가 노래를 부른다. 귀에 익숙한 노래다. 어떻게 애무를 하면서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희주는 그것이 궁금하다.
“동해에 물과 배액두산이 마아르고 다알토록…….”
애국가. 희주는 여자가 부르는 노래가 자신이 할머니에게 불러주던 애국가임을 빠르게 인식한다. 어떻게 여자가 이 곡조의 애국가를 알고 있을까. 희주는 자신과 할머니만이 알고 있다고 믿었던 노래를 여자가 부르는 것에 의아함을 품는다. 더구나 어떻게 자신의 성기를 애무하며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일까. 불쾌함과 궁금함을 동시에 느낀 희주가 여자를 그대로 밀쳐낸다. 여자가 밀려나면서 탁자 위에 놓인 선글라스가 바닥에 떨어진다.
희주는 재빨리 바지를 입고 빛이 드는 입구 쪽으로 다가간다. 여자는 충격이 심했는지 희주에게 한껏 욕을 뱉어낸다. 몸을 일으킨 여자가 입구 쪽으로 다가서려는 그때 희주는 여자의 얼굴을 보고 그만 놀라움에 질겁한다.
여자는 한쪽 눈이 없다. 눈으로 자신의 성기를 애무한 것일까. 희주는 그대로 다방을 벗어난다. 밖으로 여전히 거센 눈이 내리고 있다. 급히 계단을 오르느라 희주가 계단에서 미끄러진다.
마리아의 초상화 앞에서 여자가 서럽게 울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