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빌론 유수
BC 597~BC 538년 이스라엘의 유다왕국 사람들이 신(新)바빌로니아의 바빌론으로 포로가 되어간 사건. BC 597~BC 538년. 이스라엘의 유다왕국 사람들의 예루살렘 함락, 이스라엘의 유다왕국 사람들이 신(新)바빌로니아의 바빌론으로 포로가 되어간 사건
BC 601년 신바빌로니아왕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유다왕국에 침입하여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BC 597년 그 상층계급의 사람들을 바빌론에 포로로 데려갔다. 이것이 첫 번째이다. 두번째는 BC 586년의 일로, 예루살렘은 함락되어 완전히 파괴되고 당시의 왕 제데키아(시드키야)는 제리코(예리고)에서 붙잡혀 맹인이 되었으며, 대부분의 주민이 바빌론으로 납치되었다. 세번째는 BC 582년의 일로, 유다의 모든 고대도시가 파괴되고 주민도 포로가 되었다.
《예레미야》 52장 30절에 의하면 포로의 수는 전후 3회에 걸쳐 4,600명이라고 기록되었으나 이것은 남자만의 수일 것이며, 부녀자를 포함하면 4만 5,000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당시 유다의 총인구는 약 25만으로 추정되며, 포로는 왕국 사회의 중핵층인 귀족 ·군인 ·공인(工人) 등이었다. 이 포로는 BC 538년 페르시아의 키로스 2세의 포고로서 귀환이 허용되었다. 포로는 바빌론에서 종교적 자유는 허용되었으나, 예루살렘 신전에서와 같은 제의(祭儀)는 할 수 없었다. 대신 안식일 예배가 중심이 되어 회당(會堂)에서의 율법낭독과 기도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예배의식이 비롯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모세시대에서 그들의 시대까지의 역사인 《신명기(申命記)》에서 《열왕기(列王記)》까지가 편찬되었다. 5세기 후반에 느헤미야 ·에즈라 등이 귀국하면서 새로운 새로운 법전(法典)이 나오고 민족이 재건되었으며, 유대교가 성립되었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일대 시련이었으나, 약 반 세기 동안 포로들은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도 바빌로니아의 문화에 접하여, 구약성서의 근간이 된 헤브라이의 여러 문서를 집성하였다. 또한 팔레스타인에서의 유다인 공동체 회복의 원동력이 되었다.
이스라엘서 바빌론 喩囚 증명 유물 발견
[연합뉴스 2004-02-21 11:22]
(예루살렘 =연합뉴스) 이스라엘 고고학자들이 약 2천500년 전 유대 여성들이 사용했던 보석류와 화장품, 작은 거울 등을 발굴했다.
예루살렘에 있는 히브리 대학과 텔아비브 근처 라마트 간에 있는 바 일란 대학의 고고학자들이 공동 참여한 발굴팀은 지난 3년 동안 사해 인근 동굴을 발굴하던 도중 최근 이같은 유물들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발견 유물들 중에는 바빌로니아 문화의 흔적을 볼 수 있는 바빌로니아풍 마노 메달과 바빌로니아 성직자가 새겨진 도장을 비롯해 130개 구슬로 이루어진 목걸이, 초승달과 석류 문양이 새겨진 은(銀) 펜던트, 파우더 용기를 비롯한 화장품세트, 청동 거울 등이 포함돼 있다.
이스라엘 자연.공원국 수석 고고학자인 츠비차 축은 성서에 나오는 기원전 6세기 바빌론 유수(幽囚)를 증명하는 유물이라면서 바빌론 유수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이 사용한 유품으로 확실시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이번에 발견된 유물은 풍부함이나 그 시기로 볼 때 거의 독보적이고 매우 희귀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기원전 597년 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왕은 유다왕국을 점령했고, 많은 유대인들을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끌고 갔다. 이 유대인들과 그 후손은 기원전 538년 페르시아 키루스 왕의 해방령에 따라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왔다. 유대인들이 바빌로니아에 끌려가 살았던 이 시기를 바빌로니아 유수시대라고 부른다.
축은 "이 발굴품들은 가난하고 평범한 사람의 유물이 아니다"라고 지적하면서 바빌론 유수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사는 부유하고 번창한 사회가 이 지역에 있었음을 시사한다고 말했다.
첫댓글 와우~ 오늘 수업들은건데~ 교수님이 말씀하시자마자 바로 올리셨군요~ 빠르기도 하셔라~
ㅋ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