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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은 그의 일생을 더듬어 보면 진면목을 알 수 있습니다.
피나는 자기 수행정진을 통해 위대한 발자취를 남기셨죠.
많은 사람들이 그들 받드는 것은 그의 청빈하고 치열한 구도과정을 숭앙하는 것입니다.
1912년 - 경남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에서 아버지 이상언 님, 어머니 강상봉 님의 장남으로 출생
1935년 - 지리산 대원사로 영원의 문제를 풀기 위한 구도의 길을 떠남
1936년 - 해인사(海印寺)로 출가. 3월에 하동산(河東山) 스님을 은사로 수계 득도
- 범어사 금어선원에서 하안거, 범어사 원효암에서 동안거
1937년 - 범어사 원효암에서 하안거, 통도사 백련암에서 동안거
1938년 - 범어사 내원암에서 하안거, 통도사 백련암에서 동안거
1939년 - 경북 은해사 운부암에서 하안거, 금강산 마하연에서 동안거
1940년 - 금강산 마하연에서 하안거,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동안거, 오도송(悟道頌) 읊음
1941년 - 전남 송광사 삼일암(三日庵)에서 하안거, 충남 수덕사 정혜사에서 동안거
1942년 - 충남 서산군 간월도의 만공(萬空) 스님 토굴에서 하안거, 동안거
1943년 - 충북 법주사 복천암에서 하안거, 경북 선사 도리사에서 동안거
1944년 - 선산 도리사에서 하안거, 경북 문경의 대승사에서 동안거
1945년 - 대승사에서 하안거, 대승사 암자인 묘적암에서 동안거
1946년 - 경북 파계사 성전에서 하안거, 동안거
1947년 - 통도사 내원암에서 하안거, 경북 문경 봉암사(鳳巖寺)에서 동안거
- 봉암사에서 "부처님 법 답게 살자"는 기치 아래 결사(結社)하여 청담, 자운, 월산, 혜암,
성수, 법전스님 등과 주석. 중국 총림의 일과에 맞게 생활하고 대불정능엄신주를 독송하도록 함.
1948년 - 봉암사에서 하안거, 동안거
1949년 - 봉암사에서 하안거, 경남 월내리의 묘관음사에서 동안거
1950년 - 경남 고성군 문수암에서 하안거, 동안거
1951년 - 안정사 윗 산자락에 초가삼간의 토굴을 지어 천제굴이라고 이름함.
- 경남 고성의 은봉암에서 하안거, 경남 통영 안정사의 천제굴(闡提窟)에서 동안거
- 신도들에게 3천배를 하게 함.
1952년 - 천제굴에서 하안거, 경남 마산의 성주사에서 동안거
1953년 - 천제굴에서 하안거, 동안거
1954년 - 천제굴에서 하안거, 동안거
- 비구 종단의 정화(淨化)가 시작됨.
1955년 - 경남 남해의 용문사 백련암에서 하안거, 파계사 성전에서 동안거.
- 비구 정화 후, 해인사 초대 주지로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음.
1956년∼1963년 - 파계사 성전암에서 동구불출하며 하안거, 동안거
1964년 - 부산 다대포에서 하안거, 서울의 도선사에서 동안거
1965년 - 경북 문경의 김용사(金龍寺)에서 하안거, 동안거
1966년 - 김용사에서 하안거
- 육조단경, 금강경, 증도가 및 중도이론을 대중들에게 최초로 설법함.
1967년 - 경남 해인사로 와서 백련암(白蓮庵)에 주석함.
- 해인총림의 초대 방장으로 취임, 동안거 기간 중에 백일법문(百日法門)을 함.
1967년∼1993년 - 11월 4일 열반하기까지 해인총림 방장으로 퇴설당과 백련암에 주석함.
1976년 - {한국불교의 법맥} 출간
1981년 - 1월 20일 대한불교조계종 제7대 종정으로 취임. '산은산 물은 물'이라는 법어로
큰 화제를 불러일으킴 - 12월/{선문정로(禪門正路)} 출간
1982년 - 11월/{본지풍광(本地風光)} 출간
1986년 - 6월/{돈오입도요문론 강설}과 {신심명·증도가 강설} 출간
1987년 - 6월/{자기를 바로 봅시다} 출간 - 7월/백련불교문화재단 설립
- 11월/도서출판 장경각 설립(선림고경총서 출판 시작)
1988년 - 2월/{돈황본 육조단경} 출간 - 7월/{영원한 자유} 출간
1991년 - 대한불교조계종 제8대 종정 재추대
1992년 - 4월/{백일법문} 상·하 출간
1993년 - 10월 7일∼9일 해인사에서 제1회 백련불교학술회의
[선종사에서 돈오돈수 사상의 위상과 의미] 개최
- 11월 4일 오전 7시 30분 해인사 퇴설당에서 입적
- 11월 10일 영결식 및 다비식 봉행, 11월 12일 100여과에 이르는 사리 수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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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종정 법어 -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1981년 1월 20일, 대한불교조계종 제7대 종정 취임)
원각이 보조하니 적과 멸이 둘이 아니라
보이는 만물은 관음이요 들리는 소리는 묘음이라
보고 듣는 이 밖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
시회대중은 알겠는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2. 종정 법어 - 남을 돕는 것이 곧 나를 돕는 것 (1981년 6월 28일, 정초우(鄭草宇) 총무원장 취임식)
천지는 나와 같은 뿌리요 만물은 나와 같은 몸입니다.
천지 사이에 만물이 많이 있지만은 나 외엔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하여 남을 도우는 것은 나를 도우는 것이며,
남을 해치는 것은 나를 해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해치고자 하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 이치를 깊이 깨달아 나를 위하여 끝없이 남을 도웁시다.
바위 틈 돌호랑이 일어서서 소리치니
허공이 무너지고 바닷물이 말라버렸네.
크게 웃고 돌아서서 먼 곳을 바라보니
붉은 산호가지 마다 달빛이 찬란하다
3. 종정 법어 - 계성이 본래 청정하다 (1981년 9월, 통도사 합동수계식)
계성(戒性)이 본래 청정하므로 계상(戒相)이 항상 무구(無垢)합니다.
청정무구한 이 무상정계(無上正戒)는 대천세계를 부수어 가루를 만들지언정 추호도
파괴하지 못하며, 무변허공(無邊虛空)을 붙잡아 단청을 그릴지언정 찰나도 전지(傳持)
할 수 없습니다.
이는 개개(箇箇)가 원만하고 찰찰(刹刹)이 구족하여 연화대 위의 만덕존상(萬德尊像)이나
무간지옥의 극고중생(極苦衆生)이 호리고 차이가 없이 절대평등하여 담담적적(湛湛寂寂)
하고, 휘휘황황(煇煇煌煌)하니 참으로 신묘불가사의합니다.
이는 사방 제불이 일시에 출현하여 미래겁이 다하도록 설명하려 하여도 설명하지 못하여,
다만 대사대활(大死大活)하여 통개(洞開)하여 심안(心眼)이 확연철증(廓然徹證)할 뿐입니다.
홀연히 크게 웃고 바라보기 철수(鐵樹)에 홍화(紅花)가 찬란하고 방산에 맹화(猛火)가
염염(焰焰)합니다.
이에 부처와 조사는 삼천리 밖에 물러서고 곤충과 미물이 겁외(劫外)의 풍광(風光)을
구가(謳歌)합니다.
생사와 열반은 몽중작몽(夢中昨夢)이며 정찰(淨刹)과 예토(穢土)는 안리공화(眼裏空華)이니
오직 탕탕무애(蕩蕩無碍)한 일대활로(一大活路)에 우유자재(優遊自在)할 뿐입니다.
우리 모두 충천(沖天)의 예기(銳氣)가 충일(充溢)하여 있습니다.
각자(各自) 신명(身命)을 불고(不顧)하고 용맹정진하여 심안(心眼)을 활개하여 이
무상정계(無上正戒)를 친증(親證)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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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문
1. 무심(無心)이 부처다 (方丈 大衆法語 1982년 음 4월 30일)
불교라고 하면 부처님이 근본입니다. "어떤 것이 부처냐" 하고 묻는다면 여러 가지로 대답할 수 있지만 그러나 실제로 부처라는 그 구체적인 내용을 말하기는 좀 곤란한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의 근본 원리 원칙을 생각한다면 곤란할 것도 없습니다.
모든 번뇌망상 속에서 생활하는 것을 중생이라 하고 일체의 망상을 떠난 것을 부처라고 합니다. 모든 망상을 떠났으므로 망심이 없는데 이것을 무심(無心)이라고 하고 무념이라고도 합니다. 중생이란 망상 속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중생이라는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저 미물인 곤충에서부터 시작해서 사람을 비롯하여 십지등각(十地等覺)까지 모두가 중생입니다. 참다운 무심은 오직 제8 아라야 근본무명까지 완전히 끊은 구경각(究竟覺) 즉 묘각(妙覺)만이 참다운 무심입니다. 이것을 부처님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망상 속에서 사는 것을 중생이라고 하니 망상이 어떤 것인지 좀 알아야 되겠습니다. 보통 팔만 사천 번뇌망상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구분하면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의식(意識)입니다. 생각이 왔다 갔다, 일어났다 없어졌다 하는 이것이 의식입니다. 둘째는 무의식(無意識)입니다. 무의식이란 의식을 떠난 아주 미세한 망상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의식을 제6식(第六識)이라 하고 무의식을 제8식(第八識:아라야식)이라고 하는데, 이 무의식은 참으로 알기가 어렵습니다. 8지보살도 자기가 망상 속에 있는 것을 모르고 아라한(阿羅漢)도 망상 속에 있는 것을 모르며 오직 성불(成佛)한 분이라야만 근본 미세망상을 알 수 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곤충 미물에서 시작해서 십시, 등각까지 전체가 망상 속에서 사는데, 7지보살까지는 의식 속에 살고 8지 이상, 10지, 등각까지는 무의식 속에서 삽니다. 의식세계든 무의식세계든지 전부 유념(有念)인 동시에 모든 것이 망상입니다. 그러므로 제8 아라야 망상까지 완전히 끊어 버리면 그때가 구경각이며, 묘각이며, 무심입니다.
무심의 내용은 무엇인가? 이것은 거울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본래의 마음자리를 흔히 거울에 비유합니다. 거울은 언제든지 항상 밝아 있습니다. 거기에 먼지가 쌓이면 거울의 환한 빛은 사라지고 깜깜해서 아무것도 비추지 못합니다. 망상은 맑은 거울 위의 먼지와 마찬가지이고, 무심이란 것은 거울 자체와 같습니다. 이 거울 자체를 불성(佛性)이니 본래면목(本來面目)이니 하는 것입니다. 모든 망상을 다 버린다는 말은 모든 먼지를 다 닦아낸다는 말입니다. 거울에 끼인 먼지를 다 닦아내면 환한 거울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동시에 말할 수 없이 맑고 밝은 광명이 나타나서 일체 만물을 다 비춥니다. 우리 마음도 이것과 똑같습니다. 모든 망상이 다 떨어지고 제8 아라야식까지 완전히 떨어지면 크나큰 대지혜 광명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은 비유하자면 구름 속의 태양과 같습니다. 구름 다 걷히면 태양이 드러나고 광명이 온 세계를 다 비춥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마음도 모든 망상이 다 떨어지면 대지혜 광명이 나타나서 시방법계(十方法界)를 비추인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일체 망상이 모두 떨어지는 것을 '적(寂)'이라 하고, 동시에 대지혜 광명이 나타나는데 이것을 '조(照)'라고 합니다. 이것을 적조(寂照) 혹은 적광(寂光)이라고 하는데, 고요하면서 광명이 비치고 광명이 비치면서 고요하다는 말입니다. 우리 해인사 큰 법당을 '대적광전(大寂光殿)'이라고 하는데 부처님이 계시는 곳이란 뜻입니다. 이것이 무심의 내용입니다. 무심이라고 해서 저 바위처럼 아무 생각 없는 그런 것이 아니고 일체 망상이 다 떨어진 동시에 대지혜 광명이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또 무심은 바꾸어 말하면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불생이란 일체 망상이 다 떨어졌다는 말이고, 불멸이란 대지혜 광명이 나타난다는 말이니, 즉 불생이란 적(寂)이고 불멸이란 조(照)입니다. 그러니 불생불멸이 무심입니다.
무심을 경(經)에서는 정혜(定慧)라고도 합니다. 정(定)이란 일체 망상이 모두 없어진 것을 말하고, 혜(慧)라는 것은 대지혜 광명이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정혜등지(定慧等持)를 부처님이라고 합니다.
이 무심을 완전히 성취하면 또 견성(見性)이라고 합니다. 성불(成佛)인 동시에 열반인 것입니다. 육조(六祖)스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무상 대열반이여!
두렷이 밝아 항상 고요히 비추는도다.
無上大涅槃
圓明常寂照
흔히 사람이 죽는 것을 열반이라고 하는데, 죽어서 아무것도 없는 것은 열반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모든 망상이 다 떨어지면서 동시에 광명이 온 법계를 비추는 적조가 완전히 구비되어야 참다운 열반입니다. 고요함[寂]만 있고 비춤[照]이 없는 것은 불교가 아니고 외도(外道)입니다. 일체 망상을 떠나서 참으로 견성(見性)을 하고 열반을 성취하면 일체의 속박에서 벗어나 대자유인이 되는데, 이것을 해탈(解脫)이라고 합니다.
해탈이란 결국 {기신론(起信論)}에서 간단히 요약해서 말씀한 대로 "일체 번뇌망상을 다 벗어나서 구경락인 대지혜 광명을 얻는다[離一切苦 得究竟樂]" 이 말입니다.
이상으로써 성불이 무엇인지 무심이 어떤 것인지 대강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참으로 불교를 하는 사람이라면 그 근본이 성불에 있는 만큼 실제로 적조를 내용으로 하는 무심을 실증(實證)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능력이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능력이 없는 것인가? 근본은 누구든지 다 평등합니다. 평등할 뿐만 아니라 내가 항상 말하듯이 중생이 본래 부처이지, 중생이 변하여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명경(明鏡)을 예로 들겠습니다. 이것은 새삼 내가 지어낸 얘기가 아니고 불교에서 전통적으로 말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명경은 본래 청정합니다. 본래 먼지가 하나도 없습니다. 동시에 광명이 일체 만물을 다 비춥니다. 그러니 광명의 본체는 참다운 무심인 동시에 적조, 적광, 정혜등지(定慧等持)이고 불생불멸(不生不滅) 그대로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중생이 참으로 청정하고 적조한 명경 자체를 상실한 것처럼 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아무리 깨끗한 명경이라도 먼지가 앉을 것 같으면 명경이 제 구실을 못합니다. 그러나 본래의 명경은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먼지가 앉아 있어서 모든 것을 비추지 못한다는 것뿐이지 명경에는 조금도 손실이 없습니다. 먼지만 싹 닦아 버리면 본래의 명경 그대로 아닙니까? 그래서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것은 명경이 본래 깨끗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자성(自性)이 본래 청정한데 어찌해서 중생이 되었나? 먼지가 앉아 명경의 광명을 가려 버려서 그런 것뿐이지 명경이 부서진 것도 아니고 흠이 생긴 것도 아닙니다. 다만 먼지가 앉아서 명경이 작용을 완전하게 못 한다 그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참다운 명경을 구하려면 다시 새로운 명경을 만드는 게 아니고 먼지 낀 거울을 회복시키면 되는 것처럼 본래의 마음만 바로 찾으면 그만입니다.
내가 항상 "자기를 바로 봅시다" 하고 말하는데, 먼지를 완전히 닦아 버리고 본래 명경만 드러나면 자기를 바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라고 할 때 마음의 눈이란 것도 결국 무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표현이 천 가지 만 가지 다르다고 해도 내용은 일체가 똑같습니다.
그러면 우리 불교에서 말하는 무심(無心)은 세속의 사상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예전의 고인들의 책이나 얘기를 들어볼 것 같으면 유교, 불교, 도교, 유불선 3교가 다르지 않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천부당만부당합니다. 유교라든가 도교 등은 망상을 근본으로 하는 중생세계에서 말하는 것으로 모든 이론, 모든 행동이 망상으로 근본을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망상을 떠난 무심을 증득한 것이 우리 불교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유교니 도교니 하는 것은 먼지 앉은 그 명경으로써 말하는 것이고 불교는 먼지를 싹 닦은 명경에서 하는 소리인데, 먼지 덮인 명경과 먼지 싹 닦아 버린 명경이 어떻게 같습니까? 그런데도 유·불·선이 꼭 같다고 한다면 그것은 불교의 무심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십지등각(十地等覺)도 중생의 경계인데 유교니 도교니 하는 것은 더 말할 것 있습니까?
중생의 경계, 그것이 진여자성을 증득한 대무심경계와 어떻게 같을 수 있습니까. 그리고 예전에는 유·불·선 3교만 말했지만 요즘은 문화가 발달되고 세계의 시야가 더 넓어지지 않았습니까. 온갖 종교가 다 있고 온갖 철학이 다 있는데 그것들과 불교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동서고금을 통해서 어떤 종교, 어떤 철학 할 것 없이 불교와 같이 무심을 성취하여 거기서 철학을 구성하고 종교를 구성한 것은 없습니다. 실제로 없습니다. 이것은 내가 딱 잘라서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서양의 어떤 큰 철학자, 어떤 위대한 종교가, 어떤 훌륭한 과학자라고 해도 그 사람들은 모두가 망상 속에서 말하는 것이지 망상을 벗어난 무심경계에서 한 소리는 한마디도 없다, 그 말입니다.
내가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불교에는 부처님이 근본인데 부처님이란 무심이란 말입니다. 모든 망상 속에 사는 것을 중생이라 하고 일체 망상을 벗어난 무심경계를 부처라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무심이 근본이니만큼 불교를 내놓고는 어떤 종교, 어떤 철학도 망상 속에서 말하는 것이지 무심을 성취해서 말하는 것은 없습니다. 이것을 혼돈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만큼 불교란 것은 어떤 철학이나 어떤 종교도 따라올 수 없는 참으로 특출하고 독특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망상 속에서 하는 것하고 망상을 완전히 떠난 것하고를 비교해서 생각해 봅시다. 다시 명경의 비유를 들겠습니다. 명경에 먼지가 앉으면 모든 것을 바로 비추지 못합니다. 먼지를 안 닦고 때가 앉아 있으면 무슨 물건을 어떻게 바로 비출 수 있겠습니까? 모든 물건을 바로 비추려면 먼지를 깨끗이 닦아내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망상 속에서는 모든 사리(事理), 모든 원리, 모든 진리를 바로 볼 수 없습니다. 망상이 눈을 가려서 바로 볼 수 없습니다. 모든 진리를 알려면 망상을 벗어나서 무심을 증(證)하기 이전에는 절대로 바로 알 수 없습니다. 구경각(究竟覺)을 성취하여 무심을 완전히 증득한 부처님 경계 이외에는 전부 다 삿된 지식이요, 삿된 견해[邪知邪見]입니다. 대신에 모든 번뇌망상을 완전히 떠나서 참다운 무심을 증득한 곳, 즉 먼지를 다 닦아낸 깨끗한 명경은 무엇이든지 바로 비추고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정지정견(正知正見)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세상의 모든 종교나 철학은 망상 속에서 성립된 것인 만큼 사지사견이지 정지정견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정지정견은 오직 불교 하나뿐입니다.
결국 바로 보지 못하고 바로 알지 못한다고 하면 행동도 바로 못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눈감은 사람이 어떻게 바로 걸을 수 있겠습니까? 먼지 앉은 명경이 어떻게 바로 비출 수 있겠습니까? 망상이 마음을 덮고 있는데 어떻게 바로 알 수 있으며, 어떻게 바로 볼 수 있으며, 바른 행동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바른 행동이라 하는 것은 오직 참으로 무심을 증해서 적광적조(寂光寂照)를 증하기 전에는 올바른 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부처냐? 하고 물었을 때 바로 앉고, 바로 보고, 바로 행하고, 바로 사는 것이 부처인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누구나 다 바로 알고 싶고, 바로 보고 싶고, 바로 살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눈이 캄캄해서 눈감은 봉사가 되어 있는데 어떻게 바로 살 수 있겠습니까?
쉽게 말하자면 바른 생활을 하자는 것이 불교인데 망상 속에서는 바른 생활을 할 수 없다 이 말입니다. 오직 무심을 증해야만 바른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십지등각도 봉사입니다. 왜냐, 부처님께서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십지등각이 저 해를 보는 것은 비단으로 눈을 가리고 해를 보는 것과 같아서, 비단이 아무리 엷어도 해를 못 보는 것은 보통의 중생과 똑같습니다. 그래서 십지등각이 사람을 지도하는 것도 봉사가 봉사를 이끄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바로 이끌려면 자기부터 눈을 바로 떠야 하고, 바로 알아, 바로 행동해야 되겠습니다.
이제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간추려 보면, 망상 속에 사는 것을 중생이라 하고 모든 망상을 벗어난 것을 부처라 합니다. 모든 망상이 없으니 무심입니다. 그러나 그 무심은 목석(木石)과 같은 무심이 아닙니다. 그것은 거울의 먼지를 완전히 다 닦아 버릴 것 같으면 모든 것을 비추는 것과 같으며, 구름이 걷히어 해가 드러나면 광명을 비추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망상이 나지 않는 것을 불생(不生)이라 하고, 대지혜 광명이 항상 온 우주를 비추는 것을 불멸(不滅)이라 하는데, 이것이 무심의 내용입니다. 이 무심은 어떤 종교, 어떤 철학에도 없고 오직 불교밖에 없습니다. 또 세계적으로 종교도 많고 그 교주들의 안목도 각각 차이가 있습니다마는 모두가 조각조각 한 부분밖에 보지 못했단 말입니다.
불교와 같이 전체적으로 눈을 뜨고 청천백일(靑天白日)같이 천지만물을 여실히 다 보고 말해 놓은 것은 실제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 불자들은 자부심을 가지고 노력해서 실제 무심을 증해야 되겠습니다. 밥 이야기 천날 만날 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직접 밥을 떠먹어야지요. 그렇다고 해서 없는 무심을 만들어 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본래 무심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근본 입장입니다. 내가 자꾸 "중생이 본래 부처다" 하니까 "우리가 보기에는 중생들밖에 없는데 중생이 본래 부처란 거짓말이 아닌가?" 하고 오해할 수도 있겠습니다마는, 아까 명경의 비유는 좋은 비유가 아닙니까. 먼지가 앉은 중생의 명경이나 먼지가 다 닦인 부처님 명경이나 근본 명경은 똑같습니다. 본시 이 땅 속에 큰 금광맥이 있는 것입니다. 광맥이 있는 줄 알면 누구든지 호미라도 들고 달려들 것 아닙니까, 금덩이를 파려고.
우리가 '성불! 성불!' 하는 것도 중생이 어떻게 성불하겠느냐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게 아닙니다. 본래 부처입니다. 그러니 본래면목, 본래의 모습을 복구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래 부처란 것을 확실히 자신하고 노력하면 본래 부처가 그대로 드러날 것이니 자기의 본래 모습을 바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딴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화두만 부지런히 하여 우리의 참모습인 무심(無心)을 실증(實證)합시다.
2. 부처님같이 존경하라 (方丈 大衆法語 1982년 음 5월 29일)
저 원수를 보되
부모와 같이 섬겨라.
觀彼怨家
如己父母
이것은 {원각경(圓覺經)}에 있는 말씀입니다.
중생이 성불 못 하고 대도(大道)를 성취 못 하는 것은 마음속에 수많은 번뇌, 팔만 사천 가지 번뇌망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많은 번뇌 가운데서 무엇이 가장 근본 되는 것인가. 그것은 증애심(憎愛心), 미워하고 좋아하는 마음이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선가(禪家)의 3조 승찬대사는 그가 지은 {신심명(信心銘)}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만 증애심만 떨어지면
통연히 명백하도다.
但莫憎愛
洞然明白
이 증애심이 실제로 완전히 떨어지려면 대오(大悟)해서 대무심경계를 성취해야 합니다.
무심삼매에 들어가기 전에는 경계에 따라서 계속 증애심이 발동하므로 이 병이 참으로 고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불자들은 대도를 목표로 하므로 부처님 말씀을 표준삼아 이것이 생활과 행동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내가 가장 미워하는 사람, 나에게 가장 크게 죄를 지은 사람을 부모와 같이 섬겨라 하는 것은 무리한 요구일 것입니다.
'나쁜 사람을 용서하라'거나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또 모르겠지만 원수를 부모같이 섬기라 하니, 이것은 부처님께서나 하실 수 있는 말이지 다른 사람은 감히 이런 말조차 못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불교에서는 '용서(容恕)'라는 말 자체가 없습니다. 용서라는 말이 없다고 잘못한 사람과 싸우라는 말은 물론 아닙니다.
상대를 용서한다는 것은 나는 잘했고 너는 잘못했다, 그러니 잘한 내가 잘못한 너를 용서한다는 이야기인데, 그것은 상대를 근본적으로 무시하고 하는 말입니다. 상대의 인격에 대한 큰 모욕입니다.
불교에서는 '일체 중생의 불성은 꼭 같다[一切衆生 皆有佛性]'고 주장합니다. 성불해서 연화대 위에 앉아 계시는 부처님이나 죄를 많이 지어 무간지옥(無間地獄)에 있는 중생이나 자성자리, 실상(實相)은 똑같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죄를 많이 짓고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겉을 보고 미워하거나 비방하거나 한층 더 나아가서 세속말의 용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무리 죄를 많이 지었고 나쁜 사람이라도 그 사람을 부처님같이 존경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불교의 생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부처님을 실례로 들어도 그와 같습니다. 부처님을 일생 동안 따라다니면서 애를 먹이고 해치려고 수단을 가리지 않던 사람이 '제바닷타[調達]'입니다.
보통 보면 제바닷타가 무간지옥에 떨어졌느니 산 채로 지옥에 떨어졌느니[生陷地獄] 하는데 그것은 모두 방편입니다. 중생을 경계하기 위한 방편입니다. 어찌 됐건 그러한 제바닷타가 부처님에게는 불공대천의 원수인데 부처님은 어떻게 원수를 갚았는가?
성불(成佛), 성불로써 갚았습니다.
죄와 복이 온 시방법계를
비춤을 깊이 통달했다.
深達罪福相
照於十方
착한 일 한 것이 시방세계를 비춘다고 하면 혹시 이해할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악한 짓을 한 무간지옥의 중생이 큰 광명을 놓아서 온 시방법계를 비춘다고 하면 아무도 이해하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가장 선한 것을 부처라 하고 가장 악한 것을 마귀라 하여 이 둘은 하늘과 땅 사이[天地懸隔]입니다마는, 사실 알고 보면 마귀와 부처는 몸은 하나인데 이름만이 다를 뿐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죄를 많이 지었다 해도 그 사람의 자성(自性)에는 조금도 손실이 없고, 아무리 성불했다 하여도 그 사람의 자성에는 조금도 더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마귀와 부처는 한 몸뚱이이면서 이름만이 다를 뿐 동체이명(同體異名)입니다. 비유하자면 겉에 입은 옷과 같은 것입니다.
제바닷타가 아무리 나쁘다고 하지만 그 근본자성, 본모습은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나중에 제바닷타가 성불하여 크게 불사(佛事)를 하고 중생을 제도한다고 했습니다. 제바닷타가 성불한다고 {법화경}에서 수기(授記)하였습니다. 이것이 불교의 근본정신입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원수를 보되 부모와 같이 섬긴다"는 이것이 우리의 생활, 행동, 공부하는 근본지침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불교에 들어오는 첫째 지침은 '모든 중생을 부처님과 같이 공경하고 스승과 같이 섬겨라'입니다. 우리 불교를 행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착한 사람, 나쁜 사람은 물론 소나 돼지나 짐승까지도 근본자성은 성불하신 부처님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부처님과 같이 존경을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불교 믿는 사람은 상대방이 떨어진 옷을 입었는지 좋은 옷을 입었는지 그것은 보지 말고 '사람'만 보자는 말입니다.
옛날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라에 큰 잔치가 있어서 전국의 큰스님네들을 모두 초청했습니다. 그때 어떤 스님 한 분이 검박한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그 잔치에 초청되었습니다. 본시의 생활 그대로 낡은 옷에 떨어진 신을 신고 대궐문을 지나려니 문지기가 못 들어가게 쫓아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좋은 옷을 빌려 입고 다시 갔더니 문지기가 굽신굽신하면서 얼른 윗자리로 모셨지요. 다른 스님네들은 잘 차려진 음식들을 맛있게 먹고 있는데 이 스님은 음식을 자꾸 옷에 들이붓고 있습니다.
"스님, 왜 이러시오. 왜 음식을 자꾸 옷에다 붓습니까?"
"아니야, 이것은 날보고 주는 게 아니야. 옷을 보고 주는 것이지!"
그리고는 전부 옷에다 붓는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비유입니까. 허름한 옷 입고 올 때는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더니 좋은 옷 입고 오니 이렇게 대접하는 것입니다. 겉만 보고 사는 사람은 다 이렇습니다.
혹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법문하시면서 큰 짐을 지워 주시네. 그건 부처님이나 하실 수 있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나. 말 한마디만 잘못 해도 당장 주먹이 날아드는데 어쩌란 말인가'고 항의할 수도 있겠습니다마는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지나간 실례를 몇 가지 들겠습니다.
옛날에 현풍 곽씨 집안의 한 사람이 장가를 들었는데, 그 부인의 행실이 단정치 못했습니다. 시부모 앞에서도 함부로 행동하고, 의복도 바로 입지 않고, 언행이 전혀 공손치 않아 타이르고, 몽둥이로 때리기까지 하고, 별 수단을 다 해봐도 아무 효과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양반집에서 부인을 내쫓을 수도 없는 형편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 사람이 {맹자(孟子)}를 펴놓고 읽다가 이런 구절에서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본성은 본래 악한 것 없이 착하다.
악한 이고 착한 이고 간에 누구든지 그 본성은 다 착하여 모두가
요순과 똑같다.
孟子道性善
言必稱堯舜
여기에 이르러 그 사람은 다시금 깨닫고 생각했습니다.
'본래 요순같이 어진 사람인데 내가 잘못 알았구나. 앞으로 우리 마누라를 참으로 존경하리라' 하고 마음먹었습니다.
예전에 양반집에서는 아침 일찍 사당에 가서 자기 조상에게 절을 했습니다. 이 사람이 다음날 아침 도포 입고 갓 쓰고 사당에 가서 절을 한 후에는 제일 먼저 자기 부인에게 넙죽 절을 했습니다. 부인이 자기 남편을 보니 미친 것 같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자기를 보고 욕하고 때리더니 이게 웬일입니까. 정색으로 정장을 하고 절을 하니 말입니다.
"당신이 참으로 거룩합니다" 하면서 남편이 또 절을 합니다.
막 쫓아내는데도 한사코 따라다니며 절을 하고는
"사람이란 본시 모두 착한 것이오. 당신도 본래 착한 사람인데 내가 잘못 보고 욕하고 때렸으니 앞으로는 당신의 착한 성품만 보고 존경을 하렵니다."
이렇게 하기를 한달 두달이 지나다 보니 부인도 자기의 본래 성품이 돌아와서 "왜 자꾸 이러십니까. 이제는 나도 다시는 안 그럴 테니 제발 절은 그만 하십시오" 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요·순임금과 똑같소. 그런 당신을 보고 내가 어찌 절을 안 할 수 있겠소?" 하며 여전한 남편의 기색에, 결국 부인도 맞절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이 날보고 요·순이라고 하는데 진짜 요순은 바로 당신입니다" 하면서 서로가 요·순이라고 존경하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앞에서 말했듯이, 부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누구든지 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전 인도에서는 조석(朝夕)으로 예불시간에 반드시 지송(持誦)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마지르제타'라는 스님이 지은 150찬불송(讚佛頌)이 그것입니다.
의정(義淨)법사의 {남해기귀전(南海寄歸傳)}에도 보면, 의정법사가 인도에 갔을 때 전국 각 사찰에서 150찬불송을 조석으로 외우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거기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베푼 은혜 천지보다 깊어도
그걸 배반하고 깊은 원수 맺는다.
부처님은 그 원수를
가장 큰 은혜로 본다.
恩深過覆載
背德起深怨
尊觀怨極境
猶如極重恩
어떤 상대를 부모보다, 부처님보다 더 섬기고 받들고 하는데, 그는 나를 가장 큰 원수로 삼고 자꾸 해롭게 합니다. 이럴 때 상대가 나를 해롭게 하면 할수록 그만큼 상대를 더 섬긴다는 말입니다.
원수는 부처님을 해롭게 해도
부처님은 원수를 섬기기만 한다.
상대는 부처님 허물만 보는데
부처님은 그를 은혜로 갚는다.
怨於尊轉害
尊於怨轉親
彼恒求佛過
佛以彼爲恩
존어원전친! 부처님은 원수를 섬기기만 한다!
근본은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저 사람에게 잘해 주는데 상대방은 내게 잘해 주는 것은 하나도 없이 다 내버리고 자꾸 나를 해롭게만 합니다. 그런데도 섬기기만 하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상대가 나를 해롭게 하면 할수록 더욱더 상대를 받들고 섬긴다는 말입니다.
심원해자심애호(深怨害者深愛護)! 나를 가장 해치는 이를 가장 받든다!
이것이 부처님 근본사상이고 불교의 근본입니다.
전에도 한번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교 믿는 사람 몇이 삼천 배 절하러 왔길래
"절을 할 때 그냥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제일 반대하고 예수님 제일 욕하는 그 사람이 제일 먼저 천당에 가도록 기원하면서 절하시오" 이렇게 말했더니 참 좋겠다고 하면서 절 삼천 배를 다 했습니다.
이것을 바꾸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부처님 제일 욕하고 스님네 제일 공격하는 그 사람이 극락 세계에 제일 먼저 가도록 축원하고 절합시다."
이제는 우리 불자들에게도 이런 소리를 할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이 '저 원수를 보되 부모와 같이 섬겨라'는 말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원수를 부모와 같이 섬기게되면 일체 번뇌망상과 일체 중생의 병은 다 없어진다고 말입니다.
중생의 모든 병이 다 없어지면, 그것이 부처입니다. 그렇게 해서 성불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불을 목표로 하고 사느니만큼 부처님 말씀을 표준삼아서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때그때 자기 감정에 치우쳐 살려고 하면 곤란합니다.
한편으로는 또 이런 의심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교에서는 치고 들어오는데 자꾸 절만 하고 있으면 불교는 어떻게 되나? 상대가 한 번 소리지르면 우리는 열 번 소리질러야 겁나서 도망갈 텐데, 가만히 있다가는 불교는 씨도 안 남겠다. 자! 일어나자.'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럴수록 자꾸 절하고, 그런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고 축원하는, 그런 사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선전하고, 그런 사상으로 일상생활을 실천해 보십시오. 불교는 바닷물 밀듯 온 천하를 덮을 것입니다. 그것이 생활화되면 모든 사람이 감동하고 감복하여 '불교가 그런 것인가!' 하여 불교 안 믿을래야 안 믿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장애는 어느 곳에 있는가? 저쪽에서 소리지른다고 이쪽에서 같이 소리지르면 안 됩니다. 저쪽에서 주먹 내민다고 이쪽에서도 같이 주먹 내놓아서는 안 됩니다. 불지른다고 같이 불을 지르면 함께 타버리고 말 것입니다.
저쪽에서 아무리 큰 불을 가져오더라도 이쪽에서 자꾸 물을 들이붓는다면 어찌 그 물을 당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불은 물을 못 이길 것입니다. 나중의 성불(成佛)은 그만두고 전술(戰術), 이기는 전술로 말하더라도 불에는 물로써 막아야지 불로 달려들어서는 안 됩니다.
근본은 어디 있느냐 하면, 모든 원수를 부모와 같이 섬기자! 하는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법문의 결론을 말하겠습니다.
실상은 때가 없어 항상 청정하니
귀천노유를 부처님으로 섬긴다.
지극한 죄인을 가장 존중하며
깊은 원한 있는 이를 깊이 애호하라.
實相無垢常淸淨
貴賤老幼事如佛
極重罪人極尊敬
深怨害者深愛護
모든 일체 만법의 참모습은 때가 없어 항상 청정합니다. 유정(有情)·무정(無情) 할 것 없이 전체가 본래(本來) 성불(成佛)입니다. 옷은 아무리 떨어졌어도 사람은 성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귀한 이나 천한 이나, 늙은이나 어린이나 전부 다 부처님같이 섬기고, 극히 중한 죄를 지은 죄인까지도 받들어 모셔야 합니다. 동시에 나를 가장 해롭게 하는 사람을 부모같이 섬겨야 한다는 말입니다.
'심원해자심애호(深怨害者深愛護)!'
나를 가장 해치는 이를 가장 받든다, 이것이 우리 불교의 근본자세입니다. 이것을 우리의 근본지침으로 삼고 표준으로 삼아서 생활하고 행동해야만 부처님 제자라고 할 수 있고, 법당에 들어앉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근본은 '원수를 부모와 같이 섬기자'는 여기에 있느니만큼 우리 서로서로 노력합시다.
내용출처 : 본인 일부 작성 및 http://www.songchol.net/ven-songchol/v-main-1-3.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