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 김사행, 경복궁을 설계한 천재건축가
원나라서 환관을 하다가 귀국… 고려 말에 사찰 짓는 등 건축에 조예 깊어
조선 내시부 제도 정비하고 오늘날의 골프 비슷한 타구를 원나라에서 도입
경복궁의 설계자는 누구일까? 서울의 궁궐들을 돌아보면 아름답기로야 창덕궁이 최고지만 역시 정궁(正宮)으로서의 위엄은 경복궁이 으뜸이다. 사실 다른 궁궐은 경복궁의 건축미학을 약간씩 변용한 것에 불과하다.
토막상식 퀴즈 하나, ‘경복궁을 만든 사람은?’ ‘태조 이성계’라고 하면 너무나 무성의한 답이다. 그것은 마치 ‘예술의전당을 만든 사람은?’이라고 물었을 때 ‘전두환 대통령’이라고 답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질문을 바꿔본다. ‘예술의전당을 설계한 이는 건축가 김석철이다. 그렇다면 경복궁을 설계한 이는?’ 이럴 경우 상식이 풍부한 한국인이라도 십중팔구 ‘정도전’이라고 답한다. 유감스럽게도 100% 틀린 답이다.
정답은 김사행이다. 경복궁과 관련해 정도전이 한 일은 태조 4년 12월 경복궁이 완성된 후에 전각(殿閣)들의 이름을 지은 것뿐이다. 경복궁, 근정전, 사정전, 교태전, 강녕전 등의 이름이 바로 그의 작품이다.
그런데 우리 역사에서 경복궁을 지은 천재건축가 김사행의 이름은 사라졌고 그 빈자리를 작명자 정도전이 차지했다. 거창하게 말할 필요도 없이 이런 게 바로 역사 왜곡(歪曲)이다. 왜곡의 ‘왜(歪)’자를 주목해보라. 올바른 것(正)을 아니다(不), 혹은 잘못된 것(不)을 바르다(正)고 하는 것이 바로 ‘왜’다. 이런 왜곡이 일어난 이유는 다름아닌 그가 환관(宦官)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후일의 태종)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당했기 때문에 오욕의 이름으로 기억되기 시작했다.
고려 공민왕의 총애를 받다
환관 김사행(金師幸)은 아마도 어려서 원나라에 환관으로 보내진 듯하다. 실록 곳곳에서 그가 원나라 환관으로 있다가 고려 공민왕 때 돌아왔다고 서술하고 있다. 어쩌면 북경(베이징)에서 공민왕과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귀국한 것인지 모른다. 공민왕은 김사행을 아껴 내시부사로 임명했다.
미리 말해두지만 김사행은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노국공주를 잃은 공민왕은 공주를 추모하기 위해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벌인다. 다름아닌 대규모 사찰을 곳곳에 짓는 일이었다. 불교와 토목공사 그리고 호화사치, 공민왕과 김사행을 연결해주는 세 가지 키워드다. 밖으로 공민왕의 혀가 되어준 이가 ‘요승(妖僧)’ 신돈이었다면 궐 안에서 공민왕의 손과 발이 되어 움직인 인물이 바로 김사행이다. 김사행은 노국공주의 능 조성작업을 잘하였다고 해서 안장 갖춘 말을 상으로 받기도 했다. 당시로서는 최고의 상이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김사행은 북경에 있으면서부터 건축에 각별한 조예를 갈고닦았던 것으로 보인다.
통상 환관의 운명은 모시던 국왕이나 세자의 부침(浮沈)과 함께 했다. 공민왕을 죽인 것도 환관 최만생이다. 우왕이 즉위하자 김사행은 ‘왕을 부추겨 사치를 조장하고 대규모 공역(工役)을 일으켜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했다’는 죄목으로 익주(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의 관노로 전락했다. 그나마 다른 환관처럼 정치에 깊숙이 개입하지 않은 덕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누가 왕이 되건 김사행과 같은 환관은 필요악이다. 우선 환관은 조정 신하처럼 잘난 척하거나 거들먹거리지 않는다. 개인신앙인 불교에 대해 반(反)성리학적이라며 비판을 하지도 않는다. 당장은 목숨이라도 내줄 것처럼 맹종(盲從)한다.
게다가 김사행은 국왕의 권위를 빛나게 해줄 궁궐 건축의 달인이 아닌가? 우왕은 다시 김사행을 불러들였고 창왕, 공양왕을 거치면서도 김사행은 위태로운 가운데 궁궐생활을 이어갔다. 김사행은 신하들과 국정을 논의하며 성리학을 익히는 자리인 경연에 참석하려는 공양왕에게 “한두 번 빠진다고 국정에 무슨 문제가 있겠느냐”며 불교를 믿도록 권유하기도 했다.
공양왕 시절 최고 실권자는 이성계였다
공양왕의 내시부사였던 김사행은 두 사람 사이의 가교역할을 했다. 이 과정에서 이성계는 김사행을 눈여겨보았을 것이다. 조선 개국과 함께 김사행은 고려의 배에서 조선의 배로 옮겨 탔다. 건국 1년을 맞은 태조 2년 7월 27일 이성계는 창업에 공이 있는 신하들에게 교지를 내려 치하했다. 그 중에 김사행이 포함돼 있다.
“내시부 판사 김사행은 내가 왕위에 오른 초기에 궐내의 제도가 갖춰지지 못했는데 고려조가 왕성했을 때의 궁중 제도와 의식을 일일이 알아내어 지나친 것은 줄이고 모자란 것은 보태어서 내조(內助)의 다스림을 장식했으니 공을 기록할 만하다.”
고려 말 환관의 폐단을 몸소 겪은 개국공신들은 환관을 모두 궁에서 내쫓아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사대부의 집안에도 종이 있는데 궁궐에 국왕이나 중전의 시중을 드는 환관이 없을 수 없었다. 태조의 이 같은 뜻을 받들어 조선 초 내시부의 제도를 정비한 장본인이 바로 김사행이었다.
경복궁 조성 및 내시부 창설에 이어 ‘조선 제1호’와 관련해 김사행은 또 다른 기록을 갖고 있다. ‘조선의 골프’인 격구(擊毬) 혹은 타구(打毬)를 처음으로 조선에 도입한 인물이 김사행이라는 기록이 정종 1년 5월 1일자 실록에 나온다.
김사행 등이 원나라에서 보고 배워 들여와 늘 태조 이성계에게 “임금이 궁중에만 머물면서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반드시 병이 생길 것입니다. 몸을 움직이는 데는 타구만한 것이 없습니다”라며 권유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타구는 원나라 몽골족이 즐겨 행하던 놀이였던 것 같다. 정종 때의 신하들은 실권을 동생 이방원에게 빼앗긴 채 격구에나 몰두하는 정종을 향해 “어찌 망해버린 원나라의 놀이를 본받겠습니까?”라고 비판하고 있다.
한양 천도 및 경복궁 창건을 추진할 때 태조 이성계는 신하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다. 건국 초기에 백성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역사(役事)를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정도전도 반대의 선봉에 있었다. 반면 하륜을 비롯한 일부 신하들은 “건국 초야말로 왕권의 위엄을 상징할 대역사를 일으킬 적기”라며 태조를 지지했다. 실은 보다 가까이에서 김사행이 태조로 하여금 새로운 궁궐을 짓도록 부추겼다.
태종 12년 5월 14일자 실록에 흥미로운 기록이 나온다. 태종 이방원이 태조 시절을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태조 때 모든 공역(工役)을 김사행이 맡았다. 온 나라 사람이 말하기를 ‘김사행이 태조를 권하여 공역을 일으켰다’고 하였다.
그러나 김사행이 권한 것이 아니고 한양 도성을 창건하는 계획은 결국은 태상왕의 뜻에서 나온 것이다.” 한양 및 경복궁의 설계자가 사실상 김사행이었음을 이보다 확실하게 증언해주는 기록이 또 있을까? 태종의 입장에서는 결국 중대사의 책임은 최고지도자에게 있음을 역설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했겠지만, 당시 백성은 김사행 때문에 자신들이 죽을 고생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경우 대개 정치인보다는 백성의 말이 맞다.
이런 공이 인정되어 김사행은 품계가 2품에 이르렀고 경흥부 판사, 도평의사사 동판사, 사복사 및 선공감 판사에 가락백(伯)이라는 귀족작호까지 받았다. 가락백이라는 것은 김사행이 김해 김씨였다는 뜻이다. 이성계의 뜻을 받들어 세자 방석과 그의 장인인 심효생과 정치노선을 함께 했던 김사행은 그러나 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 세력에 의해 체포되어 참수형을 당했다. 죄목은 그가 익주로 쫓겨날 때와 같았다. ‘왕을 부추겨 사치를 조장하고 대규모 공역(工役)을 일으켜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