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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4주기 기제사
음력 8/5일이 아버님 기일이다. 금년은 음력 8/5일이 양력 9/20일이었다. 제사는 기일이 시작되는 새벽 0시(밤 12시)에 지내는 것이 관례이어서 하루 전인 음력 8/4일 저녁에 제사상을 차려 새벽 0시(밤 12시)를 기다려 제사를 지내야 한다.
이번에도 음력 8/4일(양력으로는 9/19일)에 제사 준비를 하였고, 이 날에 맞추어 부산으로 갔다. 큰형수는 하루 전인 9/18일 저녁, 둘째 형수는 오늘 아침, 큰형님은 오늘 오전, 재균형님, 나, 조카 현석이는 저녁 8시, 이어 누나와 언지가 부산집에 도착하였다.
제사에 참석하기 전에 내가 한 일은 기제사 때 읽을 아버님께서 지은 한시를 선택하는 일이었다. 내려가기 전 회사 회의실에서 아버님 시를 꺼내 놓고 한시를 읽으면서 오늘 읽을 시를 골랐다. 제사에 참석하는 제주들 숫자만큼 시를 골랐다.
시를 고르던 중에 2006. 3. 24에 지으신
多 息 多 悶(자식이 많으니 번민이 많다.) 於 蔚山 彦 智 家(울산 언지집에서)
散 策 南 山 誦 賦 空(남산을 산책하며 공연히 시를 외우는데)
太 和 江 眺 夕 霞 紅(태화강을 바라보니 저녁 노을 붉고 나)
梅 花 萬 發 稀 蜂 蝶(매화는 만발한데 찾는 벌나비 드물고)
躑 䕽 群 遊 微 冷 風(진달래는 무리 지어 노는데 미냉풍 부니)
老 莊 春 寒 非 久 遠(노장과 봄 추위는 오래 가지 않는 것)
幼 崩 暖 氣 不 遙 隆(어린 싹과 따뜻한 기운은 머지 않아 일어날 것이요)
叟 翁 倚 탐 向 深 思(늙은이 걸상에 기대어 무엇을 심사하는 고)
末 女 無 愚 末 息 忡(막내 딸은 무우한데 막내 아들 걱정되네)
*걸상 탐 한자가 없었음.
마지막 절구인 “말녀무우 말식충” 부분에서 잠시 머물 수 밖에 없었다. 말식 재식은 2006. 2. 28일자로 회사를 퇴사했으니 아버님의 걱정이 많았다는 것이 시에 나타나 있었다.
말녀인 양언지에게 전화를 하였다. 아버님께서는 “말녀무우”라고 하셨는데 말녀는 무우한가?" 라고 물으니 언지가 또록또록한 말투로 "말녀가 걱정이 많다고 한다." 뭔 걱정인지 "오늘 물어 보마."라고 통화를 마쳤다.
다식다민 외에 한시 6편을 더 준비하였다.
遊伽倻山(2007. 11. 2), 回顧祖國光復(거창한시고전연구회백일장출품작) 등이다.
월요일부터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재균형님이 열흘 뒤 추석에도 내려 가니 이번 기제사에는 쉬어라고 하였지만, 해병대 정신으로 충만한 이실장님의 강권에 나의 부산행에 대한 망설임은 사라졌다.
오후 4시 반 기차를 탔다. KTX 중간 4인석이 개별적으로 3석을 티켓팅하는 것보다 비용이 적게 들어서 재균형님은 중간 4인석을 끊었다. 다리가 긴 현석 앞 자리를 비워 두고 재균형님, 나, 현석이 순으로 앉았다.
조카를 위해 지나가는 이동매점에서 뭘 좀 사려 했으나 현석이는 "할머니께서 제사 음식을 많이 해 놓았을 것인데 속을 최대한 비워가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삼촌보다 철든 말을 한다.
내려 가는 길에 선택한 한시를 정리하고 한시 한편을 가지고 현석과 시 해석을 하였다. 아버님 한시는 매력이 있다.
기일 때마다 아버님 영정 앞에서 한 약속은 "남기신 시를 모아 한시집을 만들겠습니다."는 다짐이었는데 아직도 하지 못했다. 세번이나 다짐했건만 아직도 유고집을 만들지 못했다.
한시 뒷편 여백에 아버님께 드리는 편지를 썼다. 재균형님이 보더니 스마트폰 메모에 편지를 쓰는 게 더 좋겠다면서 형님은 스마트폰에 편지를 썼다.
현석에게도 편지를 권했으나 대학 4년인 현석이는 취업을 위해 자기소개서 등을 많이 작성하다 보니 편지를 안 써도 편지가 머리 속에 그려진다고 한다.
펜으로 쓰는 편지보다 스마트폰에 쓰는 것이 더 좋게 보여 나도 스마트폰에 편지를 썼다.
글은 그리움을 잉태하는 듯하다. 편지를 쓰니 아버님에 대한 그리움이 짙어진다. 대전을 지날 때까지 편지를 썼다.
재균형님은 나이가 들면 삐지기 쉬우니 큰형님에게도 편지를 쓰라고 해야겠다며 전화를 했으나 부산에 와 있는 큰형님은 편지보다 그냥 말로 하겠다고 한다.
문장력이 좋고 재치가 있는 재균형님이 편지를 써서 먼저 읽을 텐데 재균형님 다음의 내 편지는 삭을 듯하여 몹시 신경을 썼다.
부산에 도착하였다. 2시간 40분이 걸렸다. 플랫폼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부산역에 오르니 부산항의 불빛이 보인다. 여름에 오면 짭조름한 바다 내음이 났는데 오늘은 그렇지 않다.
집으로 가는 택시를 타니 차안에는 프로야구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바다, 야구.. 부산에 왔음을 실감한다.
언지에게서 문자가 왔다. 언니 모시고 막 동래를 출발했다는 내용이다.
8시에 집에 도착하였다. 먼저 와 있던 큰형님이 우리를 반긴다. 벌써 제사상을 다 차려져 있었고, 병풍만 치면 되었다. 농 옆에 있는 병풍을 꺼내어 제사상 뒤에 쳤다.
누나와 언지가 도착하였다. 누나와 큰형님이 같이 기제사에 참석하는 건 4년만이다.
부모형제간으로 일컬어지는 가족이란 이해집단적 성격이 있어 이해가 엇갈릴 경우 만나지 않아도 되는 관계일 수도 있다. 모든 만남은 필수가 아닌 선택일지도 모른다.
아버님 영정 사진을 제사상에 모셨다. 어머니의 추천으로 아버지 젊은 시절(50대) 사진을 영정으로 모셨는데, 어머니께서 "사진도 젊은 모습이 좋다."고 하신다.
8시가 좀 지난 시간에 제사를 시작하였다. 참가자 전원의 제배로 시작하여 각자 제배 순이 되었다.
준비한 한시 한수를 큰형님에게 건냈다. 한시 한수를 읽고 큰형님의 아버지께 고하는 말이 이어졌다. "찌는 더위 잦은 태풍 등의 불순한 일기와 어려운 경기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족은 별 일 없이 한해를 잘 헤쳐나오고 있습니다. 특히, 금년은 어머니께서 여느 해보다 건강히 잘 계셔 기쁩니다. 저희들 모두는 잘 있으니 아버님께서 편안히 계시고 저희들 무사함을 아버님께 고합니다."
재균형님은 둘째 형수와 같이 절을 올리고 "스마트 시대를 맞아 스마트폰에 적은 아버님께 드리는 편지를 읽겠습니다."라는 말로 부산행 KTX에서 적은 편지를 읽었다.
아버지, 안녕하세요.
아버지께서 떠나신지도 어언 사년이 흘렀습니다.
저도 내년이면 육십이 됩니다. 전철을 탈 때 노인석을 기웃거려도 경쟁력이 있어 웬만하면 노인석 한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어머니도 표현을 안하셔서 그렇지 아버지를 많이 그리워합니다.
자식은 아버지 뒤를 보면서 본인도 모르게 아버지를 닮는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도 아버지의 은퇴후 삶을 가장 닮고 싶습니다.
노후에 글을 가까이 하시는 아버지를 어머니께서는 "젊어서는 그렇게도 술만 드시고 공부를 안하시더니, 늙어서 쓸데없이 공부만 한다."고 힐난하시면, 아버지께서는 "목적이 있는생산적 공부는힘들고 어렵지만, 목적이 없는 소비적 공부는 즐겁고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공부할 동안은 몸도 아프지 않다."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을 그리면서, 저의노후도 아버지처럼 글을 벗하면서 유유자적한 선비적 삶을 살 수 있을 것같아 아버지의 아들임이 너무 좋습니다.
아버지께서도 음악을 참 좋아하셨는데, 아버지께서 부르시던 선구자 노래가 오늘 따라 더 듣고 싶어집니다.
유정이도 학교 잘 다니고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양선생이라 불린다고 하니 집안에서 유일하게 아버지 직업을 계승하였습니다.
현석이도 취업 문제로 고달파 보이지만, 아버지의 손자답게 슬기롭게 잘 대처할 것이라 믿습니다.그리고, 이번 기제사에 참가도 하였습니다.
아버지, 우리 가족은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도 여전하십니다. 아버지, 저희들 걱정마시고 글과 노래와 술을 즐기시며 하늘 나라에서 다시 뵐 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요.
재철형님은 약국일 때문에 이번 기제사에 불참하여 내 순서가 되었다.
"多息多悶" 한시를 읽고 아버님께 드리는 편지를 읽었다.
아버님께! 잘 계십니까?
회사일 때문에 천안에 간 적이 있습니다.일 마치고 나오면서 두돌이 지났다는 꼬마가 있길래 돈 한잎을 주었습니다.아이 엄마가 "할아버지께 고맙다고 인사해야지!" 말을 하길래 제가 할아버지처럼 보이나 하는 생각과 함께 아버님 생각이 났습니다.
제가 고1이었던 여름 어느날 저녁 아버님께서 대연중학교 근무하실 때였겠죠. 퇴근길 버스를 타러 나오는 길에 골목을 지나는데 축구공이 굴러 오면서 꼬마들이 "할아버지 공 좀 차주셔요." 라고 했답니다. "허허! 꼬마들이 날 보고 할아버지라 하더군." 할아버지로 보이는 것이 영 어색한 듯한 표정을 저녁 식사 자리에서 지었습니다.
아버님은 49세 때 할아버지라는 말을 들었고(물론 지원이 연미가 있었으니 할아버지였죠.) 저는 54세가 되는 금년에 할아버지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아버님! 이처럼 생활 속에서 아버님이 문득 떠오를 때가 많습니다.용덕에 있는 밭에서 일하시면서 한잔의 막걸리를 드시고서는 저희들에게 전화하셔 땀흘린 뒤의 막걸리 맛에 대해 생생하게 중계하셨던 말씀은 한잔의 막걸리를 앞에 두면 항상 생각납니다.
최근 독도영유권을 두고 일본과의 분쟁이 치열합니다. 2006년 여름 어느날 집에 오니, 안정복재단에서 18세기 안장군의 활약을 담은 일본 고문서를 해석해야 하는데 18세기 일본고문서 해독하기 위해 필요한 한자와 일본어 실력을 동시에 갖춘 사람이 없어 아버님이 해석해 주었다고 하셨습니다. "원고비를 받은 게 있으니 오늘 보신탕 값은 내가 낼께!" 당시 실직 상태인 저를 배려한 말씀이셨겠지만, 지금도 보신탕,독도분쟁을 앞에 두면 그 날 일이 생각납니다.
금년 봄에 대변 옆에 있는 월전에서 장어양념구이를 먹으면서도 같이 있었던 엄마,자형,누나가 동시에 아버님께서 좋아하시던 분위기,안주였다고 하더군요.
4주기인 오늘 아버님께 드리는 편지를 부산행 기차안에서 적고 있습니다.
글은 그리움을 잉태하는 듯합니다. 생활 속에서 문득 떠올리는 아버님이지만 이렇게 정리하다 보니 더욱 그리움이 짙어집니다.
아버님! 아버님은 가셨지만 저의 생활 속에,저의 마음 속에 영원히 계십니다.
아버님! 보고 싶습니다.
감정이 북받친다.
양현석의 차례가 되었다. 현석이는 최근 입사시험과 면접을 치르면서 느낀 스펙의 부족함이 게으름에서 비롯되었다고 분석하면서 좀 더 부지런하게 생활할 것을 할아버지께 다짐을 하였다.
제사를 지내보면 출가외인이라는 말이 실감된다. 순서상 맏이이지만 누나는 제사의 말미에 아버님께 인사를 올리게 되었다.
아버지와 가장 긴 시간을 보냈던 누나이어서 깊은 정이 우러나는 듯하였다.
"아버지, 잔정이 없는 아버지가 멀게만 느껴졌었는데 돌아가시기 몇 년 전부터 아버지의 깊은 정을 느끼게 되었고, 몸이 불편해져 자리에 누워 계실 때에는 집에 들어 오면서 어머니보다 아버지를 먼저 찾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렇게 기일을 만나 아버지를 생각하게 되는 자리에 서니 아버지가 더 그리워집니다. 그리고, 늦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이어져 문득 아버지를 그리는 날들이 있습니다... 아버지, 다시 만난 날까지 편히 계십시요."
말녀 언지는 "우리나라 교육은 아줌마들이 다 망친다.는 걱정을 하셨는데, 제가 지금 아버님의 걱정의 실현하고 있는 게 아닌지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상적인 학부형이 현실 앞에서는 쉽지 않음을 느끼게 됩니다. 금년을 잘 마쳐 내년 기일에는 하림이, 유림이를 데려 오도록 하겠습니다..."
애절함이 넘치는 누나와 언지의 말에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이로써 제사를 마쳤다. 1시간에 약간 못미치는 시간이 흘렸다.
어머니께서는 제수 음식을 모아 현관(아파트 입구)에 두는 것(귀신들이 먹고 가시라는 뜻)을 이번에도 하시려 했으나 자식들의 만류를 받아들여 이번에는 하지 않으셨다. 어머니도 고집을 꺾고 자식들의 의견을 접수하는 비율이 최근에는 높아져 간다.
음식 장만에 양조절 기능이 약한 어머니께서는 이번 제사에도 장만을 많이 하셨다. 큰형수, 둘째 형수의 수고가 추정된다.
어머니께서 음식 장만 과정에 참석한 큰형님에게 갈비를 덮히라고 하신다. 어머니께서는 제사 음식과는 별도로 갈비를 준비하셨다고 한다. 어머니는 갈비에 대한 집착이 강하시다.
제사에 참석한 전 가족이 모여 앉아 제사 음식을 먹었다. 9시, 늦은 저녁인 셈이어서 많이 먹힌다.
상에 올렸던 막걸리를 한잔씩 하였다. 나는 상태가 좋지 않아서인지 술이 땡기지 않았지만, 재균형님은 밥보다 막걸리를 주로 마신다. 큰형님은 별로 마시지 않았다.
언지가 스피드 있는 말투로 일상을 이야기 한다. 언지는 생활의 어려움을 가볍게 하는 능력이 있다. 재수하는 큰 딸 하림이, 일이 많은 엄서방의 내조로 힘든 요즘이지만 다 잘 넘어 가고 있는 듯하다. 아버님 시에서 언급한 것처럼 역시 "末女無憂"(막내 딸은 걱정이 없다.) 이다.
막걸리가 다 되어 현석이가 막걸리 3통을 더 사왔다. 현석이가 없으면 내가 가야만 했을 것이다. 현석이는 나에게 소중한 존재이다. 재균형님이 기분이 좋은 모양인지 막걸리를 많이 마셨다.
울산으로 가야 하는 언지가 10시 반에 일어서면서 구서동에 언지를 모셔다 드리고 울산으로 가겠다고 한다. 누나와 언지가 떠나고 어머니, 3형제, 현석이... 12시가 넘었다.
내일 새벽 기차로 서울에 가야 하는 일정을 아는 어머니의 재촉으로 자리에 누웠다. 어머니께서는 행주포를 삶아야 한다면서 주방 불을 밝힌다.
거실에 누워 T.V.를 보았다. 어머니는 박근혜의 팬이시다. 박정희대통령 향수에다 박근혜의 단정함이 더해져 대선 후보 중 박근혜를 좋아 하신다. T.V. 프로 중 정치 대담 프로를 가장 많이 보시는데 모르는 용어나 시대 상황이 나오면 물어 볼 사람이 없어 아쉽다고 하신다. 아버님의 부재가 아쉽다는 말씀이다.
행주포 삶는 것은 내가 확인할 테니 먼저 주무시라고 권했지만 어머니께서는 행주포를 지켜 보시며 계셨다. 곧 나는 잠에 빠졌다. 다음 날 보니 행주포들이 베란다에 가지런히 널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