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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인디언의 목소리를 여러 책에서 인용하겠습니다. 가장 많이 인용되는 책은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일텐데, 다른 책에 비해 양적으로 압도합니다. ^^; (918쪽) 인디언 연설 중 대표적인 것으로 손꼽을 수 있는 것이 시애틀 추장이 한 것으로, 녹색평론선집에 실려있는‘우리는 결국 모두 형제들이다’입니다. 아래의 글은 그의 다른 연설 중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당신들(백인)은 그저 땅을 파헤치고, 건물을 세우고, 나무를 쓰러뜨린다. 그래서 행복한가? 연어떼를 바라보며 다가올 겨울의 행복을 짐작하는 우리만큼 행복한가? 얼굴 흰 사람들의 도시 풍경은 얼굴 붉은 사람들의 눈에는 하나의 고통이다.
당신들의 도시에는 조용한 장소라는 곳이 없다. 봄의 나뭇잎 소리를 듣거나 곤충의 날개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을 만한 곳이 없다. 당신들의 도시에서 들리는 소음은 귀를 욕되게 할 뿐이다. 인디언은 물웅덩이 수면으로 내리꽂히는 바람의 부드러운 소리를 좋아한다. 한낮에 내린 비에 씻긴 바람 그 자체의 냄새를 좋아한다. 소나무 향기도 마찬가지이다. 얼굴 붉은 사람들에게 공기는 더 없이 소중한 것. 동물이든 나무든 사람이든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똑같이 숨결을 나눠 갖기 때문이다.
죽은 지 며칠이 지난 사람처럼 당신들의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악취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잠자리를 계속 파헤치고 더럽힌다면, 어느 날 밤인가 당신들은 스스로의 폐허에서 숨이 막혀 깨어날 것이다.
들소는 모두 죽임을 당하고, 야생마들은 모두 길들여지고, 숲의 은밀한 구석까지 사람들의 냄새로 가득하다. 그리고 산마다 목소리를 전하는 전선줄이 어지럽게 드리워져 있다. 덤불숲은 어디에 있는가? 없어져 버렸다. 독수리는 어디에 있는가? 사라져 버렸다.
들짐승이 사라지면 인간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들짐승들이 저 어두운 기억의 그늘 속으로 사라지고 나면 인간은 혼의 깊은 고독감 때문에 말라죽고 말 것이다. 모든 것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짐승에게 일어나는 일은 똑같이 인간에게도 일어난다.
당신들이 온 이후로 모든 것이 사라졌다. 그러니 사냥이니 날쌘 동작이니 하는 것에 대해 굳이 작별을 고할 이유가 무엇인가? 이제 삶은 끝났고 ‘살아남는 일’만이 시작되었다. 이 넓은 대지와 하늘은 삶을 살 때는 더없이 풍요로웠지만, ‘살아남는 일’에는 더없이 막막한 곳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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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앞으로 소개하는 대부분의 인디언 이야기는 백인을 염두에 둔 것이 많습니다. 비교를 통해 자신의 우월성을 입증하려는 의도라기보다, 백인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한 말로 여기시면 됩니다. 그러니 백인 혹은 기독교 그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드물긴 했지만 인디언과 마음이 통했던 백인과 기독교 선교사들도 있었고, 인디언들은 그들을 좋아했었지요. 하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았는데 이게 반드시 개인의 윤리적 문제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보다 정교한 논의가 필요한 부분이지만 저는 그냥 뭉뚱거려 ‘초월적 권력’이란 말로 표현하고 넘어갑니다. 아래는 오히예사라는 인디언의 글입니다.
위대한 신비에게 바치는 인디언들의 예배는 침묵과 홀로 있음 속에 행해졌다. 신과의 만남이 침묵 곳에서 이루어지는 이유는 모든 언어가 어쩔 수 없이 불완전하고, 진리에 훨씬 못 미치기 때문이다. 신과의 만남은 홀로 있음 속에서 가능하다고 우리 인디언은 믿었다. 우리를 만드신 이와 우리 사이에 어떤 성직자도 끼어들 필요가 없었다. 누구도 다른 사람의 종교적 체험에 대해 참견하거나 간섭하면 안된다. 우리들 각자가 신이 창조한 자식들이고, 모두가 그 안에 신성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얼굴 붉은 사람들의 종교는 어떤 특정한 교리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또한 받아들이길 거부하는 사람에게 그것을 강요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의 종교에는 설교도 없고, 개종이나 박해도 없으며, 다른 사람의 종교를 무시하고 비웃는 일도 없었다. 무신론자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의 종교는 교리가 아니라 마음 상태였다.
자연을 제외하고는 우리에게는 사원도 신전도 없었다. 자연의 자식들이기 때문에 인디언들은 매우 시적이었다. 말할 수 없이 신비한 원시림의 그늘진 오솔길에서, 처녀와도 같은 평원의 햇빛 비치는 가슴 위에서, 현기증 나는 산 정상과 벌거벗은 바위가 우뚝 솟은 산봉우리 위에서, 보석 박힌 드넓은 밤하늘에서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만날 수 있는 그 거대한 절대자를 위해 손바닥만한 집을 짓는다는 것은 우리가 보기에 신을 모독하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우리가 물질적으로 의식을 행하는 것은 모두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얼굴 흰 사람들이 십자가를 찬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디언들은 태양을 숭배했다. 태양과 대지는 인디언들의 눈에는 명백히 모든 생명의 원천이며, 과학적인 진리이면서 동시에 시적인 은유이기도 했다. 우주의 아버지인 태양은 자연의 원리에 생명력을 불어 넣는다. 그리고 어머니인 대지의 인내심 많고 비옥한 자궁 속에는 모든 식물과 인간의 숨겨진 태아가 있다.
번개, 바람, 물, 불, 서리와 같은 자연 속의 장엄한 요소들을 우리는 영적인 힘을 지닌 것들로 여겨 경외감을 갖고 바라보았다. 그 신비의 영이 이 세상 만물 속에 두루 존재하고 있으며, 모든 생명체들이 어느 정도는 영혼을 갖고 있다고 우리는 믿었다. 비록 어떤 영혼은 자신을 의식하지 못할지라도. 나무, 폭포, 회색 곰 등은 각각 위대한 힘의 표현이며, 존경의 대상이었다.
인디언들은 동물 나라에 있는 우리의 형제와 누이들에 대해 동정심을 갖고 영적인 교감을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 그들은 분명하게 말을 하지 못하는 영혼들이지만, 순진무구한 아이들처럼 티없이 맑은 순수성을 간직하고 있다. 우리는 저 위쪽에서 내려오는 신비의 지혜를 믿듯이 그들이 가진 본능 또한 믿었다. 우리의 생존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몸을 바치는 그들의 희생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전해진 기도문과 제물로써 그들의 영혼에게 경의를 표했다.
따로 설명할 것이 없죠? 그의 이야기가 제법 세련되게 느껴지는데, 그는 1858년에 인디언으로 태어났으며 나중에 백인사회로 들어가 의학박사 학위를 받습니다. 말하자면 백인 사회에서도 지식층에 해당되기 때문에 그런 것 같은데요, 다음 회에 계속 그의 이야기를 듣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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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들의 이야기를 좀 더 실감나게 느끼시려면 백인에게 당했던 수난의 역사를 아시면 좋은데, ‘상처난 무릎’에 나왔던 이야기로 그냥 지나치겠습니다. 한 가지만 예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인디언들은 술을 ‘불타는 물’이라고 부르며 싫어합니다. 반면, 담배는 신성시하죠 (물론 회사에서 제조된 담배가 아니라 잎담배입니다.) 세계의 많은 부족들은 술이나 마약 성분이 있는 풀을 이용해 자신의 조상들을 만나는 의례를 치릅니다. 그런데 왜 하필 인디언은 술을 싫어할까요? 과거 백인들이 인디언으로부터 땅을 뺐을 때, 서류에 서명을 하도록 강요했고 그게 잘 통하지 않으면 술을 먹였다고 합니다. 술에 취한 추장이 자기도 모르게 그 서류에 서명을 하지요. 그런데 인디언의 관습으로는 추장이 그렇게 했어도 부족으로부터 동의를 받지 않는다면 대표성을 띠지 못합니다. 하지만 백인들은 그 서명을 핑계로 인디언을 몰아낸 사례가 많았습니다. 그러니 인디언이 술을 좋아할 리가 없지요. 제가 하필 술을 예로 드는 이유가 절대로 제가 술을 좋아해서가 아님!!! ^^;;; 아래는 오히예사가 인디언에게 개종을 강요하던 당시 선교사들을 비판하는 말입니다만, 기독교가 원래 이와 같다고 오해하진 마시기를.
기독교 속에는 인디언들의 사상과 매우 비슷한 것들이 많다. 부와 부자들에 대해 예수가 한 말들은 특히 우리 인디언들이 충분히 공감하는 내용들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많은 설교를 늘어놓으면서 한편으로는 전혀 다르게 행동하는 선교사들과 신도들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들의 종교에 대해 냉담한 마음을 갖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자신을 과시하고, 권력을 추구하며, 무조건 남을 개종시키려 들고, 자기 종교를 제외하고는 다른 종교를 드러내 놓고 무시한다.
나아가 종교를 내세우는 얼굴 흰 사람들 속에서도 우리는 수많은 모순된 행위들을 발견했다. 그들은 입으로는 영적인 것을 말하면서 한편으론 물질적인 추구에 몰두해 있다. 얼굴 흰 자들은 모든 것을 사고판다. 시간, 노동, 개인의 자유, 여인의 사랑, 심지어 자신의 신성한 목사직까지도! 이론적으로 맨 첫 번째에 속하는 고결하고 영적인 삶은 실제로는 맨 나중의 문제였다.
돈과 권력에 대한 추구, 그리고 남을 정복하려는 욕망은 못 배운 인디언의 세계에서도 비난을 면치 못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남을 지배하려 드는 얼굴 흰 자들의 그 두드러진 성향이 온유하고 가난한 예수의 정신과 너무도 대비된다는 사실을 느꼈다.
...그때 나는 여러 부족에서 온 젊은이들과 함께 작은 통나무 교회에서 예수의 삶과 인격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한 늙은 인디언이 일어나 말했다. “우린 지금 당신이 말하는 그 계율을 이미 수천 년 동안 지키며 살아왔다. 우린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살아왔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창조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먹을 것도 그냥 주어졌고, 햇빛이나 비처럼 땅도 무상으로 주어졌다. 그런데 누가 이 모든 것을 바꿔 놓았는가? 바로 얼굴 흰 사람들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신을 믿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아버지이신 신의 그런 특성들을 조금도 물려받지 못한 듯하다. 뿐만 아니라 자기들의 형제인 예수도 본받지 않는다.”
또다른 인디언 노인은 의견을 묻자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 마침내 그가 말했다. “나는 그 예수라는 사람이 인디언이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물질을 손에 넣는 것, 나아가 많은 소유물을 갖는 것에 반대했다. 그리고 평화에 이끌렸다. 그는 인디언과 마찬가지로 계산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고, 사랑으로 일한 것에 대해 아무 대가도 요구하지 않았다. 얼굴 흰 사람들의 문명은 그런 원리와는 거리가 멀다. 우리 인디언들은 예수가 말한 그 단순한 원리들을 늘 지키며 살아왔다. 그가 인디언이 아니라는 것이 이상할 정도다.”
인디언들이 예수님을 친근하게 여겼다는 것이 드러나지요? 오히예사가 속한 다코다족의 인사말은 ‘미타쿠예 오야신!’입니다. 이는 ‘모든 것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또는 ‘모두가 나의 친척’이라는 뜻이라고 하네요.
*곰의 마음1
우리말로 옮기면 곰의 마음이고 영어로는 베어하트 (Bear Heart)인 인디언 주술사의 이야기입니다. 주술사는 영어로 medicine man인데요, medicine은 일반적으로 약이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주술사는 곧 치료사이기도 합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나쁜 기운(邪氣)’를 몰아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 책의 제목은 ‘인생과 자연을 바라보는 인디언의 지혜’인데 원 제목은 ‘The wind is my mother', 즉 ’바람은 나의 어머니‘입니다. 주술사라고 해서 뭔가 신기막측한 이야기를 기대하진 마시기를. 아래는 본문입니다.
내가 태어난 지 3일 후에 어머니가 나를 집 근처의 언덕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나를 자연의 요소들에게 소개했다. 맨 처음 어머니가 소개한 것은 동서남북의 네 방향이었다. “이 아이에게 특별한 축복을 바랍니다. 당신들은 우리 인생을 둘러싸고 우리를 계속 가게 합니다. 이 아이를 보호하고 인생에 균형을 주기 바랍니다.”
다음에 어머니는 내 작은 발을 ‘대지 어머니’에 닿게 했다. “대지 어머니, 언젠가는 이 아이가 당신 위에서 걷고 놀고 뛸 것입니다. 아이가 자라면서 당신을 존경하도록 가르치겠습니다. 아이가 어디를 가든지 그를 보호하고 보살펴주시기 바랍니다.”
다음에 나는 해에게 소개되었다. “해 할아버지, 이 아이가 자라는 동안 빛을 주십시오. 아이의 몸 구석구석 건강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육체적으로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건강한 아이가 되게 해주십시오. 아이가 어디에 있든지 당신의 따뜻하고 사랑스런 에너지로 감싸주십시오. 때로는 아이의 인생에 흐린 날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늘 그곳에서 빛나는 당신이 이 아이에게 빛을 주시고 늘 안전하게 지켜주십시오.”
어머니가 나를 들어 바람에 안기고 이렇게 얘기했다. “이 아이를 받아주십시오. 때로는 당신이 강하게도 불고 때로는 아주 부드럽게 불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가 자라면서 늘 당신의 존재를 소중히 여기며 이 지구에서 살게 해주십시오.”
나는 다음 물에게 소개되었다. “물이여, 우리는 당신 없이 살 수가 없습니다. 물은 곧 생명입니다. 이 아이가 갈증을 모르도록 도와주십시오.”
어머니가 내 이마에 재를 바르고 이렇게 얘기했다. “불이여, 이 아이의 인생에서 장애물을 태워 없애소서. 아이의 길을 깨끗하게 하여 인생의 사랑과 존경을 배우는 길에서 넘어지지 않게 하소서.”
그날 밤 나는 보름달과 별들에게 소개되었다. 이것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내가 자라고 대지 어머니가 주신 풀밭 위에서 뛰어다니고, 내 안을 흐르면서 생명을 유지시키고 독소들을 빼내는 공기를 호흡할 것이다.
이 책 외에 인디언 주술사의 대표적인 이야기로 ‘구르는 천둥’이란 책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뭔가 신기한 것에 대한 호기심을 내비치고 있지요. 이에 대해 인디언들에게 내려오는 짤막한 이야기 하나로 제 생각을 대신하겠습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속삭였다.
“위대한 정령이시여, 저에게 말씀 좀 해주소서!”
그러자 종달새가 노래했다. 그러나 그는 듣지 않았다. 그가 소리쳤다.
“위대한 정령이시여, 저에게 말씀 좀 해주세요!”
그러자 천둥이 하늘을 굴러다녔다. 하지만 그는 듣지 않고 사방을 둘러보며 말했다.
“위대한 정령이시여, 저에게 당신의 모습을 좀 보여 주소서.”
그러자 별 하나가 밝게 빛났다. 그러나 그는 쳐다보지 않고 다시 소리쳤다.
“위대한 정령이시여, 저에게 기적을 보여 주세요!”
그러자 한 생명이 탄생했다. 하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절망에 차서 울부짖었다.
“당신이 여기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제발 저를 한번만 만져 주세요!”
그러자 위대한 정령이 내려와 부드럽게 그 사람을 만졌다. 하지만 그는 손을 내저어 그 나비를 쫒아 보내고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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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글은 곰의 마음이 주술사가 되기 위한 공부의 과정입니다. 현재 우리의 교육제도와 비교하면 매우 다르게 느껴지는데요, 그렇게 다른 이유를 생각해보세요. 사실 이런 식의 교육은 인디언만의 독특한 방식이지는 않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서도 발견되는 방식, 심지어 우리나라의 어떤 곳에서는 지금도 행하고 있는 방식입니다.
우리 부족의 노인들은 교실에서 가르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가르친다. 그분들에게는 1과, 2과 같은 것이 전혀 없다. 뒤에 답이 적혀 있는 교과서 같은 것도 전혀 없다. 많은 경우에 그분들은 설명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깨달아야 할 때가 아주 많다.
...그 분(이름은 데이브이며 곰의 마음의 스승임)은 나에게 얘기했다. “이 나무 둘레에 양다리를 묶거라. 그리고 양팔로 감싸안거라. 그런 후에 그곳에 앉아라. 나는 나중에 돌아오겠다.” 그러고는 더 이상의 설명도 없이 그곳에서 떠났다.
나는 그곳에 앉은 채 나무에 몸이 묶여 있었다. 그러면서 나는 온갖 생각들을 하기 시작했다. 왜 나 같은 어른이 나무에 묶여 있어야 하나? 나는 내가 아는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내 모습을 보면 어떻게 하지?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얼마 되지 않았고, 그 학교에서 가장 유망한 학생으로 뽑히기도 했다. 그들이 내 모습을 보면 어떻게 하지?
때때로 우리는 어떤 것을 너무 복잡하게 생각한다. 어떤 것이 늘 색다른 의미를 내포하는 것은 아니다. 그 생각을 하면서 나는 데이브가 얘기하려 했던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분은 나에게 자아와 자존심을 극복하도록 가르친 것이다. 그제서야 나는 깨달음을 얻기 시작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무엇이 되려면 좋은 것들이 흐르게 하는 그릇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몸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이다.
‘맞아, 선생님이 가르치려고 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야. 그러니까 선생님이 올 때까지 이곳에 앉아 있어야 해. 선생님의 뜻에 따라야 해.’ 그러자 무언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물론 나무가 말을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조물주는 어떤 수단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새, 동물, 또는 풀잎을 통해서도. 나에게 들린 그 무언의 소리는 생각과 관념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나는 내 질문에 답을 얻지 못했다.
처음에 나에게 온 것은 질문이기보다 하나의 서술문에 가까웠다. ‘그러니까 너는 아는 게 많다고 생각하지?’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 너는 책을 무척 많이 읽었지.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다른 사람의 생각과 경험에 불과해. 너에게는 그것들이 들은 소리에 지나지 않아. 네가 직접 경험해 보지 못했으니까. 너는 그것들을 아는 게 아냐. 너는 다만 그것들에 대해서 아는 것뿐이야.’
그분이 내가 나무에 묶여서 배우기를 원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모든 것을 늘 설명하고 싶은 사람은 그 전체 과정을 분석하고 싶어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나에게는 그 교훈을 경험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나는 처음에 그것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교훈은 바로 그 곳에 있었다. 나는 과장된 내 자존심을 멀리 던져버려야만 했다. 나는 내 자존심을 극복하고 그냥 인간이 되어야만 했다. 해질 무렵 마침내 데이브가 돌아왔다.
“그래, 이제는 가도 좋다. 나는 네가 그 나무처럼 되는 것을 배우도록 만들었다. 그 나무가 말을 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많은 것을 들려줄 것이다. 무언가를 배울 때 엉터리로 배우지 말라. 귀담아 듣는 것을 배우라. 바람에 귀를 기울여라. 네가 걷고 있을 때 한 무리의 새들이 갑자기 날아가거든 걸음을 멈추어라. 무언가가 그들을 방해했다.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
곰의 마음은 이런 식으로 자신을 다스리는 법, 관찰하는 법을 배웁니다. 혹 이것을 보고 작금의 교육제도를 한탄하실 수도 있겠는데요, 그 전에 자신이 이런 식으로 배우는데 게을리하진 않았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의 스승, 데이브의 말입니다. “그냥 오래 살기만 하는 것과 오래 살면서 무언가를 배우는 것은 전혀 다르다네. 우리 모두는 삶이라는 선물을 받았네. 그냥 늙은 사람이 되지 말고 무언가를 배워가야만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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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에 관한 이야기 한편 더. 우리는 흔히 무엇을 제대로 아는 것을 ‘실감한다’라고 표현합니다. 물위에서 살고 물고기와 해초로 생활을 영위하는 부족은 제각기 자기 밭이 있습니다. 그런데 땅의 밭과는 달리 물의 밭은 구분하기가 아주 힘들죠. 하지만 그들은 바다의 색깔, 물의 흐름, 냄새 등등으로 어디가 자기 밭인지 정확하게 알아냅니다. 에스키모인은 눈을 뜻하는 단어가 열 개도 넘습니다. 제각기 다른 성질의 눈을 나타내는데 이 역시 외부인은 구별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이 구분을 통해 앞으로의 기상변화, 사냥감의 위치 등을 알아냅니다. 목수, 약초꾼들도 이와 같습니다. 나무의 질감과 양감, 촉감 등으로 재목을 고르며, 산세와 지형, 숲의 색깔 등으로 어디에 원하는 약초가 있는지 찾아내지요. 현대적 용어로는 ‘특개성’이라 하고, 제 식으로는 ‘기(氣)’입니다. 이를 알아야 ‘무엇을’ 아는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무엇에 대해서’ 아는 것일 뿐이지요. 실로 책을 읽는 것도 이런 구분이 존재합니다. 후자의 경우 흔히 ‘수박 겉핥기 식’으로 공부한다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이- 그리고 저도 상당히 - 이런 식의 공부만 하므로 남 이야기를 조합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질 못합니다. 아래 이야기를 읽어보시고 실감한다는 것에 대해 그리고 그렇게 공부한다는 것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린아이였을 때, 나는 한 나무 밑으로 걸어간 적이 있었다. 그 나무 밑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 씨앗 하나가 공중제비를 돌면서 내 발 밑으로 떨어지는 것이었다. 자연히 나는 그 씨앗에 시선이 이끌려 바닥을 내려다보게 되었고, 그곳에서 앞서 떨어진 수많은 씨앗들을 보게 되었다. 씨앗이 그토롣 많은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씨앗들을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몸을 숙였고, 그 씨앗들 하나하나에서 한 그루의 나무가 자랄 수 있다는 사실에 내 가슴은 경이로움으로 가득 찼다. 씨앗이 위에서 떨어진 것을 기억하고 나는 고개를 들어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그곳에도 수천 개의 씨앗들이 매달려 있었다.
내가 생명의 경이로움에 사로잡힌 것은 바로 그 나무 아래서였다. 그 나무 한 그루 속에 거대한 숲이 들어 있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그 나무 아래 서 있으면서 나는 살아 있는 모든 존재들 속에 깃든 무한한 가능성을 실감했다. 그 나무 아래 서서, 나는 각각의 씨앗이 한 그루의 나무로 자랄 수 있으며, 그 나무는 또 하나의 숲이 될 수 있음을 이해했던 것이다. 그 한 그루의 나무로부터 나는 온통 나무들로 뒤덮인 아름다운 세상을 내다볼 수 있었다.
그날 나는 나무의 언어를 이해했으며 내가 나무로부터 배워야할 것들을 이해했다. 나무들이 나보다 더 큰 영혼을 갖고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평생 동안 나무들에게 배워야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또한 우리가 크든 작든 위대한 힘을 부여받았다는 것을 이해했다. 편안한 나무 그늘 아래 서서 나는 겸허함을 알았다. 내 전생애에 걸쳐서 언제나 나를 보호하고 지켜줄 더 큰 영혼이 존재한다는 것도 이해했다.
...모든 큰 영혼들과 마찬가지로, 나무의 영혼 역시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앎을 나눠 준다. 큰 사람이든 작은 사람이든, 젊은이든 늙은 사람이든, 나무는 모두에게 똑같은 가르침을 베푼다. 내 친구도 틀림없이 나와 똑같은 배움을 얻으리라는 것을 나는 확신했다. 위대한 정령이 하나의 씨앗 속에 그토록 많은 힘을 심어 놓았다면, 인간에게는 얼마나 더 많은 능력을 심어 놓았겠는가!
* 결혼
한때 결혼의 이유를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있었지요. 어떻게 그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는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무튼 결론은 ‘결혼을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전에 노총각 한명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결혼을 하게 되면 서로의 자유를 제한하게 되고 작금의 현실에서 아이를 행복하게 키울 자신도 없다고요. 고등학교 교사이니 돈이 없다는 말은 아닐테고 사회환경이 황량하단 뜻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때 제가 말한 것은 그래도 결혼을 해야 갈등을 겪으면서 서로에 대한 이해도 깊어지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그래야 진실로 사랑을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천지를 자기 몸으로 여기는 성인이 아닌 다음에는 자신의 아이가 있어야 사랑을 준다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라고요. 너무 뻔한 변명인가요? ^^; 아래는 인디언의 결혼식 때 신랑 신부에게 말하는 축사입니다.
나바호족
이제 두 사람은 하나의 불을 피울 것이다.
이 불은 꺼지지 않을 것이다.
두 사람은 사랑과 이해, 지혜를 상징하는
하나의 불꽃을 갖게 될 것이다.
이 불이 두 사람에게 따뜻함과 음식과 행복을 가져다주리라.
이 새로운 불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새로운 삶과 새로운 가정을.
이 불은 언제까지나 타올라야 한다.
두 사람은 언제까지나 함께 있으리라.
이제 두 사람은 새로운 삶을 위한 불을 밝혔다.
이 불은 꺼지지 않으리라.
늙음이 그대들을 갈라놓을 때까지.
아파치족
이제 두 사람은 비를 맞지 않으리라.
서로가 서로에게 지붕이 되어 줄 테니까.
이제 두 사람은 춥지 않으리라.
서로가 서로에게 따뜻함이 될 테니까.
이제 두 사람은 더 이상 외롭지 않으리라.
서로가 서로에게 동행이 될 테니까.
이제 두 사람은 두 개의 몸이지만
두 사람의 앞에는 오직
하나의 인생만이 있으리라.
이제 그대들의 집으로 들어가라.
함께 있는 날들 속으로 들어가라.
이 대지 위에서 그대들은
오랫동안 행복하리라.
제 결혼식 때의 주례사가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기억하시는 분? 요즘은 주례사가 어떤지 궁금하네요. ㅋ.
*
아랫글은 ‘느린 거북’이란 이름을 가진 인디언의 이야기입니다. 모든 사물이 제각각 신성한 이름을 지닌 것처럼 각 개인 또한 그러하단 말인데요, 혹 개인을 강조하는 것이 ‘관계’라는 측면과 마찰이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로 동일한 사람들일수록 오히려 원자화됩니다. 이에 대한 생각은 전에 올린 ‘코뮨주의 해설’에서 ‘낯선자’부분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열네 살 때 나는 인디언 이름을 받는 의식을 거쳤다. 어른들은 내게 ‘느린 거북’이란 이름을 주었다. 그것은 내가 사람들과 대화할 때 반응이 무척 느리고 동작 또한 굼뜨기 때문이었다. 인디언들은 그것을 무척 지혜로운 행동이라 여긴다. 거북이는 앞으로 나아가기 전에 항상 목을 빼 주위를 살핀 다음 걸음을 옮겨 놓는다.
인디언들은 사람이나 사물의 이름을 정할 때 그런 식으로 한다. 그 사람의 성격, 그 사물이 세상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 등을 기준으로 이름을 정한다. 따라서 인디언 세계에서는 어떤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는 일이 한결 쉽다. 그 사람의 성격과 특징이 곧바로 이름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것에 비하면 당신들의 이름은 기억하기도 어렵고 별다른 의미도 없다. 인디언에게는 이름이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한 개인을 부르는 호칭일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고유한 영혼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그러한 이름들로 가득 차 있다.
우리가 볼 때 모든 사람은 독특한 존재이며,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개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인간을 네 가지 혹은 열 가지 형태로 나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당신을 바라본다. 당신의 얼굴과 목소리는 많은 것을 말해 준다. 당신이 아무리 그럴싸한 말을 꾸며낸다고 해도 자신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감출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자연 그대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다. 그것이 곧 당신의 독특함이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일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아는 일이다. 인디언 창조 설화에서는 사람은 저마다 여행할 길이 다르다고 말한다. 그 다른 여행길에서 자기만이 가진 선물을 나눠 갖는 것이야말로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고 설화는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말한다. 신은 각자에게 특별한 선물을 주었으며, 모든 존재가 다 특별하다고. 또한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특별한 선물이라고. 왜냐하면 사람마다 나눠가질 특별한 어떤 것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정치 형태가 원으로 되어 있어서 모든 사람이 똑같은 기여를 하게 된 것도 이런 깨달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당신들(백인)은 자기 자신이 되려고 진정으로 노력해 본 적이 없고, 또 자기 자신이 되게끔 허용하지도 않는다. 항상 누군가에게 자신을 통제하도록 내맡긴다. 부모가 당신을 위해 학교와 교회를 선택하고, 삶의 모든 방식과 규칙을 정해 놓는다. 그런 다음에는 사회가 당신을 이탈하지 못하도록 금을 그어 놓는다. 그러면서 당신들은 자유를 이야기한다. 그것은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에 불과하다.
당신들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기 위해 끝없이 시계를 보며 생활하고, 배고프지 않아도 시간만 되면 밥을 먹는다. 그런 부자유는 우리로선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자기 자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은 곧 삶을 포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 우리 인디언의 생각이다.
제가 약간 편집했는데요, 중간에 백인의 정치를 비판하는 글이 나옵니다. 아마 직관적으로 권력의 형태가 백인들을 그런 식으로 행동케 한다고 느꼈나 봅니다. 서양의 개인주의는 많이 변모되어 왔는데, 예전 공립학교는 대량생산과 국가에 복종하는 개인(즉 국민)을 만들기 위해 모범적 인간을 내세웠고 따라서 규율을 강조했었지요. 그러나 자본주의가 발달함에 따라 요즘은 개성에 큰 강조점을 둡니다. 한국은? 삼성 회장이 천재경영론을 주장하고 ‘19세기 교실에서 20세기 선생이 21세기 학생을 키운다’란 개탄이 나옵니다. 물론 이는 자본주의의 변화에 발맞추자는 뜻이지 결코 위 인디언의 말에 동의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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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백인이 사용한 인디언 말살정책은 전쟁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첫째, 전염병의 의도적 방출.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백인이 선물로 준 담요에 의해 콜레라와 같은 전에 인디언에게는 없었던 병이 퍼집니다. 이 사실을 깨닫자 일부러 병자의 담요를 건네는 일도 생겼다고 하네요. 둘째, 철도의 건설. 이상하게 들리실텐데, 이 기차는 서부로 진출하는 백인뿐만 아니라 많은 사냥꾼들을 실어 날랐습니다. 인디언의 주요 식량인 들소를 없애기 위해서였지요. 셋째, 백인식 교육. 아래의 글은 인디언 여인이 백인 학교에서 겪었던 어떤 일입니다.
첫 시간에 한 인디언 소녀가 칠판에 무엇인가를 썼는데, 내가 추측하기에 그 아이가 뭔가 실수를 한 것 같았다. 그러자 반 전체가 떠나갈 듯이 웃어대기 시작했다. 우리를 가르치는 수녀 교사는 입을 가리고 있었지만 웃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 인디언 소녀는 자리에 앉아 책상에 얼굴을 파묻고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이 무척 무례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예의범절이 무엇인가 알고 있었다. 내가 자란 방식으로는 사람들이 실수를 할 때 그것을 보고 놀리거나 비웃으면 안 되었다. 오히려 그들을 도와줘야 한다고 배웠다. 속도가 느린 사람이 있으면,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야 한다고 부족의 어른들은 가르쳤다. 그날 이후 나는 입을 굳게 닫았다. 그들이 결코 나를 놀리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스스로 결심했다. 그해 1년 동안 나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숫자를 배우는 수업이 있었는데, 그 시간에도 나는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래서 공부 못하는 학생에게 벌로 씌우는 고깔모자를 쓰고 늘 교실 구석에 앉아 있어야만 했다. 하루는 내가 창문 밖으로 도토리를 입에 물고 장난치는 다람쥐를 보고 있는데 교사 수녀가 질문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사과를 네 개 갖고 있는데, 너에게 한 개를 주면 나한테는 몇 개의 사과가 남지?’ 그때 내가 손을 번쩍 들고 말했다. ‘부끄러운 줄 아세요, 수녀님. 사과를 두 개 줘야 하는 거여요. 친구와 뭔가를 나눌 때는 똑같이 반씩 나눠 갖는 거여요.’ 그 말을 한 나 자신도 놀랐다. 모두가 얼어붙었고, 수녀는 입이 떨어졌다. 그때 이후로 나는 도저히 입을 다물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내가 4학년 때, 식민지 역사에 대한 교과서를 배우게 되었다. 책에는 인디언 전사들이 그려져 있었는데, 모두가 머리를 빡빡 밀고 머리꼭지에만 몇 가닥 머리칼을 매단 야만인들로 묘사되어 있었다. 한 인디언 전사는 아이를 안은 여자의 머리채를 잡고 칼로 찌르고 있었다. 수녀가 와서 내 옆에 앉으며 말했다. ‘너도 바로 이런 야만인들 사이에서 태어났다. 우리가 널 문명인으로 만들기 위해 이곳으로 데려온 거야.’
나는 그 책을 움켜잡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멀리 집어던졌다. 그리고는 노간주나무 뒤로 달아났다. 그 나무 그늘 아래서 나는 울고 또 울었다. 나는 생각했다. ‘나의 할아버지가 이런 야만적인 사람일 리가 없어. 얼굴 흰 사람들이 찾아오면 할아버지는 언제나 차와 먹을 걸 대접했어.’
나는 나흘 동안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 여름이 되어 집으로 돌아갔을 때 나는 할아버지에게 그 책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말했다. ‘난 네가 영어를 배우기 바란다. 사전에 있는 모든 단어를 배우거라. 그러면 언젠가 넌 교사가 될 수 있을 것이고, 우리 인디언들에 대한 진실을 책으로 쓸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열심히 영어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다.
제가 어릴 때, 세계의 많은 원주민의 멸절에 대해, ‘그 지역으로 들어간 문명의 힘을 견디지 못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설명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문명의 힘이 무얼 뜻하는지는 훨씬 후에나 알게 되었지요.
...어느 부모님이 한번은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아이한테 분수 덧셈을 가르치는데, 분자와 분모들끼리 그냥 더해버린다고요. 그래서 답답해 죽겠다고. 그래서 제가 대답했습니다. “야구 타율은 바로 그런 식으로 계산한답니다.”
... 제가 이 게시판을 시작하던 초기 무렵 한 댓글이 달렸습니다. ‘교육에 마음이 멍든 사람’으로부터요. 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네요. 어릴 적 기억이 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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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글은 ‘붉은 새’라는 필명을 가진 한 인디언 여인의 글입니다. 그녀 또한 앞글의 인디언 학생처럼 강제로 백인학교 기숙사에 들어가는데, 한번 들어가면 빠져나올 수가 없었답니다. 달아난 학생을 잡아오면 포상금이 지급되었고, 인디언 언어를 쓰면 가혹한 벌을 받아야 했으며 사계절 내내 군대식 교복을 입었다고 하네요. 안타까운 일이지만, 기독교 또한 여기에 한 몫을 했지요. 이 글의 제목은 ‘나는 왜 이교도인가’입니다.
영혼이 가슴을 채울 때면, 나는 한가로이 초록색 언덕들을 거닐기를 좋아한다. 아니면 때론 중얼거리는 강 언덕에 앉아 경이에 찬 눈으로 머리 위 파란 하늘을 올려다본다. 눈을 반쯤 감고 뒤쪽 높은 절벽들 위에서 소리없이 장난치는 거대한 구름 그림자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강이 부르는 부드럽고 감미로운 노래가 내 귀를 채운다.
무릎에 손을 얹고 앉아 나는 세상의 시간을 잊는다. 맥박치는 하나의 작은 모래알처럼 나와 내 가슴은 그렇게 대지 위에 앉아 있다. 흘러가는 구름들과 반짝이는 강, 그리고 온화한 여름날의 빛이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위대한 신비를 다함없이 말해주고 있다. 그 여름날의 강가에 한가롭게 앉아있는 동안 내 영혼은 무럭무럭 커갔다. 비록 등 뒤 높은 절벽 가장자리에 자란 초록색 풀들처럼 그렇게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마침내 나는 가파른 강둑으로 올라가는 희미한 오솔길을 되짚어 평평한 지대로 걸어간다. 그곳에 초원의 야생화들이 가득 피어 있다. 그 사람스런 어린 친구들은 향기로운 숨결로 내 영혼을 위로해주고, 놀라움으로 가득한 내 가금에게 그들 역시 전능한 신의 살아있는 표현임을 일깨워준다. 초록색 평원 위에 화려한 색깔로 피어난 무수한 별꽃들을 나는 어린아이와 같은 눈으로 흠뻑 들어마신다. 그들이 표현하는 그들 영혼의 본질은 너무도 아름답다.
작은 존재든 큰 존재든 모두가 똑같이 신의 장엄한 세계를 펼쳐보이고 있다. 그래서 각자가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들을 놓치지 않고 있다. 내가 근처를 지나갈 때, 야생 해바라기의 가느다란 줄기 위에서 흔들리고 있는 노랑가슴새가 내게 그것을 증명하듯 달콤하게 목소리를 떨며 노래한다. 내가 가벼운 모카신을 신고 천천히 걸어가자, 새는 투명하고 맑은 노래를 멈추고서 작은 머리를 갸우뚱거리며 지혜롭게 나를 쳐다본다. 그러다가 다시 기쁨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여기저기로 훌쩍 날면서 새는 여름 하늘을 날렵하고 달콤한 음악으로 채운다. 진실로 새의 생명력 넘치는 자유는 그의 날개보다 그의 작은 영혼 속에 더 많이 깃들어 있는 듯하다.
(중략)
그래도 나는 잊지 않으리라. 그 얼굴 흰 선교사나 불행한 원주민이나 모두가 신의 자식들이라는 것을. 비록 무한한 사랑에 대한 그들의 이해가 실로 작을지라도. 이 경이로운 세상에서 아장거리며 걷고 있는 작은 아이인 나는 그들의 교리보다는 자연의 정원으로 걸어들어가는 나의 짧은 산책을 더 좋아한다. 그곳에서는 새들의 지저귐과 힘센 물살의 웅얼거림, 그리고 꽃들의 향기로운 숨결을 통해 위대한 정령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이것을 이교도의 믿음이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나는 기꺼이 이교도가 되겠다.
참 아름다운 문장이죠? 우리나라는 다른 곳에 비해 종교 간의 이해가 넓고 너그럽습니다. 뭐, 수준이 아주 낮은 사람도 있긴 하지만, 그건 어디라도 마찬가지지요. 그것보다 인간의 가능성을, 그 잠재력을 억압하는 힘이 어디로부터 나오는지 한번 잘 살펴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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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일리쉬족 추장의 말입니다.
나는 북아메리카 원주민이다. 나는 원래 대가족 제도를 지닌 문화 속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가 낳은 아들들과 그들의 식구 전부가 커다란 집에서 함께 살았다. 잠자는 곳은 골풀로 만든 돗자리로 칸막이가 처져 있었지만, 식사는 집 한가운데 있는 화덕 주위에 모여 다 함께 했다. 아이들은 어른들 세계의 생각을 함께 공유했다. 그리고 자신들 주위에 삼촌과 숙모와 사촌들이 있어서 언제나 자신을 사랑하며 겁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 집에서는 서로를 받아들일 뿐 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자연의 생명체들에 대한 깊은 존경심이 있었다.
아버지는 대지와 대지에서 나는 존재들을 마음 깊이 사랑했다. 대지와 그 위에 있는 모든 것들은 위대한 정령의 선물이었다. 그리고 위대한 정령에게 감사하는 길은 그가 주는 선물들을 존경심을 갖고 사용하는 일이었다. 그 존경심을 잃어버릴 때 선물은 여지없이 파괴되고 만다. 그것은 결코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린 소년이었을 때, 나는 아버지와 함께 인디언 강에서 낚시를 하곤 했다. 지금도 내 눈에는 이른 아침 산꼭대기에서 떠오르던 태양이 보인다. 그리고 물가에 서서 두 팔을 들어올리고 부드럽게 중얼거리던 아버지의 모습도 보인다. 그렇게 아버지는 아침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기도를 올렸다. 그것이 어린 내 마음 속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한번은 내가 재미삼아 작살로 물고기 잡는 것을 보고 아버지는 크게 실망하셨다. 아버지는 말했다.
“아들아, 위대한 정령께서는 그 물고기들을 너의 형제로 만드셨다. 네가 배고플 때 너의 허기를 채울 수 있게 하셨다. 따라서 넌 그들을 존중해야 한다. 그들을 죽여선 안 된다.”
나의 어머니는 생명 가진 것들을 무엇이든 품에 안는 친절함을 지니고 있었다. 어머니는 자신이 있을 장소를 잘 알았으며,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나눠 주었다. 그것이 인디언 여인들의 전통이었다.
내가 받은 모든 가르침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이 세상에서 네 것은 아무것도 없다. 네가 가진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눠야만 한다.’
이것이 내가 태어난 문화였으며, 오직 그 문화만을 알면서 나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것이다. 사람들은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그 연기 나는 집보다 수십 배나 큰 집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한 아파트에서 살면서 바로 옆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그들에게 관심조차 없다. 가슴과 가슴이 하나 되지 않고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됨을 이야기할 수 있는가? 그것이 되지 않는 한 당신들은 육체만 이 자리에 있을 뿐이고, 우리들 사이에 가로놓인 벽은 저 산맥만큼이나 높은 것이다.
생각나는 성경 구절이 있어 인용합니다. 마태오 22장 35~40절입니다.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자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어째서 두 계명이 사실상 같은 의미인지 위 인디언 이야기를 읽으시면 이해될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은 실제로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전에 소개해드린 영화, 작은 거인(Little big man)에서 늙은 샤이엔족 추장으로 나옵니다. 이 양반의 말을 한편 더 옮기고 인디언 이야기는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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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사는 즐거움’이란 책도 있습니다만,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면 혼자 사는 경우란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나무들의 아름다움, 대기의 부드러움, 풀잎의 향기, 그것들이 내게 말을 건다. 멀리 있는 산꼭대기, 하늘의 천둥, 바다의 파도, 그것들이 내게 말을 건다. 아스라한 별들, 아침의 신선함, 꽃에 맺힌 이슬, 그것들이 내게 말을 건다. 불의 힘, 연어의 맛, 태양의 여행, 결코 어디로 사라지지 않는 생명, 그것들이 내게 말을 건다. 그러면 내 가슴은 높이 솟아오른다.
백인들은 내 얼굴을 보는 순간, 더 이상 나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았다. 내가 인디언의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내 얼굴은 잘 알려져 있었다. 내가 숲 속을 걸을 때 발아래서 부러지는 나뭇가지 소리를 듣는 다람쥐는 내 얼굴을 잘 알고 있었다. 나무 꼭대기에 앉아 밑으로 지나가는 나를 내려다보는 호저는 내 얼굴을 잘 알고 있었다. 다른 동료들에게 내가 오고 있음을 알리는 까마귀도 내 얼굴을 잘 알고 있었다. 숨겨둔 내 음식을 훔쳐가는 여우와 덫을 놓는 나를 지켜보는 비버도 내 얼굴을 잘 알고 있었다. 내게 먹을 것을 찾는 인내심을 가르쳐준 왜가리도, 목청을 떨며 노랠 불러 내 가슴에 기쁨을 채워주는 새도 내 얼굴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날마다 목을 축이는 시냇물을 공급해주는 비도, 수면에 하늘을 비추며 모두에게 자유를 말하는 호수도 내 얼굴을 잘 알고 있었다.
나무들도 내 얼굴을 잘 알았다. 아버지는 내게 말했다. 어느 날 내 얼굴 피부에 소나무 껍질처럼 깊은 고랑이 패일 때, 내 영혼은 육체를 떠나 나무속에서 새 집을 찾을 것이라고. 하지만 머지않아 이곳에서 사라질 늑대들처럼 내 얼굴도 사라져 가는 부족의 얼굴에 지나지 않는다. 저 야생에 있는 것들이 내 얼굴 속에 있고, 내 얼굴 속에 있는 것들이 야생 속에 있다. 내 얼굴이 곧 대지다!
수천 년 동안 나는 대지의 언어로 말해 왔고, 대지의 수많은 목소리를 들었다.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나는 취했으며, 대지는 모두를 위해 부족함이 전혀 없음을 알았다. 강물은 맑고 생명체들로 가득했다. 대기는 순수했으며, 수많은 날개의 파닥거림으로 채워져 있었다. 내지 위에는 온갖 생명체들로 넘쳐 났다.
나는 자부심을 갖고 걸었다. 위대한 정령의 축복을 느끼면서. 모든 존재들과 형제애 속에서 살았으며, 하늘을 가로지르는 태양의 여행을 보며 하루의 시간을 재곤 했다. 철따라 강을 거슬러 연어가 돌아오고 새들이 짝을 지어 둥지 위를 나는 것을 보고 한 해가 가는 것을 알았다. 첫 번째 모닥불에서 시작해 하루의 마지막 모닥불을 피울 때까지 먹을 것을 구하고, 집을 마련하고, 옷과 도구를 만들었다. 그리고 언제나 기도할 시간이 있었다. 내 아버지의 지혜를 나는 내 자식들에게 전했다. 용기와 신념과 자비심, 그리고 올바른 삶의 방식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갖고 살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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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은 말들이 있겠지요. 하지만 이것으로 인디언 이야기는 마치겠습니다.
구들장 주민들의 가슴에도 인디언의 강건함이 깃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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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글 잘 읽었습니다. 언제나처럼 인디언 글은 많은 걸 들려주네요.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요. 그냥 자연의 소리처럼 들리는 것만 조금씩 들을 밖에요. 조금씩 많이 들리길 바라면서, 그런데 '나는 왜 네가 아니고 나일까'요.고맙습니다^^
'나'는 인디언이며 '너'는 백인입니다. 인디언들이 볼 때, 백인은 약속 어기기를 밥 먹듯 하고, 예수님을 본받기는 커녕 그러지 못하는 핑계나 대고, 어머니 대지와 대지 위의 형제자매를 소유물로만 여기고, 끝없는 탐욕으로 무엇이든 집어삼키려는 사람들로 여겨졌지요. 그러니 백인이 아무리 강요한다 해도 '나' 인디언은 '너' 백인이 되기 싫은 것입니다.
많은 글 옮긴다고 고생하셨어요
작년에 어느 곳에 게재한 것을 다시 올린겁니다.. ㅋ
인디언의 지혜...인류의 유산임에 틀림없는....새삼 그분들의 삶과 역사 앞에 겸허해집니다.
겸허만 하지 마시고... 제가 2월 모임에 할 질문을 댓글로 올렸으니 깊이 생각해 보시기를.. ^^
컴으로 읽으려다 바로 인쇄했습니다. 꼼꼼히 읽어보겠습니다.
음... 오타가 많이 나올텐데.. ㅡ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