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고구려 계통의 예맥족과 한반도 남부의 삼한(마한,진한,변한)계 종족들이 동일 계통의 종족내지 집단인지, 아니면 완전히 별개의 종족 내지 집단인지는 한국사의 틀을 좌우하는 매우 중요한 주제다. 한국에서는 전통적으로 부여-고구려는 당연히 한국사의 일부이고, 그 주민들인 예맥족은 넓은 의미에서 한국인의 조상이라고 생각해 왔다. 만약 그런 틀이 무너진다면 한국사는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그 역사적 변천과 발전과정을 재구성해야만 한다.
실제로 근대 이후 일본학계에서는 예맥족과 삼한계 종족은 언어적으로나 인류학적으로 서로 별개의 집단이고 계통적으로 관련이 없다는 식의 주장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중국에서도 90년대 후반 이후 동북공정이 본격화되면서 반세기 전 일본 학계의 주장을 받아들여 부여-고구려사나 예맥족을 한국사에서 분리하려고 계속 시도하고 있다.
이 글은 그 같은 과거 일본 학계의 주장이나 최근 중국 학계의 주장에 대한 의문을 담고 있다. 그 방법론적 수단은 체질인류학이다. 누차 강조하지만 체질인류학은 특정한 종족, 혹은 민족, 혹은 주민집단의 성격을 규정하고, 그 귀속을 판정하는데 절대적이고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사료의 부족으로 언어계통론적인 접근이 봉쇄된 상황에서 고인골을 분석해서 그 특징을 분석하는 것은 현재로서는 몇 안되는 유효한 방법이다.
물론 보다 진전된 방법은 최근 수년간 연구 수준이 급속도로 높아지고 있는 분자인류학 내지 집단유전학적인 방법을 동원하는 것이지만, 현재로서는 만주 지역 고인골의 부계 Y-SNP 하플로그룹 분석 결과가 공개된 경우가 아직 적어 이런 주제의 연구에 이용할만한 자료가 별로 없다. 보다 진전된 분자유전학적 결과가 나오기 이전이라면 전통적인 체질인류학적 접근법이 여전히 참고자료로 이용할만한 가치가 있다는 전제 하에 발해인 고인골의 특징을 한번 따져보자.
중국 학계의 연구결과(东北、内蒙古地区古代人类的种族类型与DNA, 중국 길림대 2006)에 따르면 발해 수도인 상경성 근처에서 출토된 발해인 남자 5명의 평균치로 보았을 때 이 발해인 인골들의 머리 뼈의 앞뒤 길이는 177.10mm다. 머리 뼈의 좌우 폭은 141.44mm이고, 머리 뼈의 높이(b-ba)는 142.44mm다. 이마의 좌우 넓이는 136.86mm다. 머리 길이와 폭의 상대적 비율을 보여준는 머리뼈 지수는 80.29다. 상안고는 73.86mm다. 해당 논문에서는 이 같은 발해 지배층이 체질인류학적 특징을 중국 화북지방, 몽골족, 퉁구스족, 에스키모족, 일본 서남부 지방인 등과 비교하고 있다. 애당초 한국인은 비교 대상에서 제외한 것이다. 중국측 논문에서 왜 한국인을 비교 대상에서 제외했는지는 하나하나 살펴보면 분명해진다. 이 인골이 한국인과 너무 닮아 중국측 동북공정 논리를 위협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 발해인 인골의 머리뼈 길이
사체 내지 고인골의 머리 뼈를 직접 측정했을 때를 기준으로 보면 177.10mm라는 길이는 대단히 짧은 것이다. 1990년대 이후 북한 사회과학원에서 발간한 각종 체질인류학 서적에서 제시한 수치들을 보면 현대 몽골족의 평균 머리뼈 길이는 182.2mm, 몽골족 중에서 부리야트족의 평균 머리뼈 길이는 181.9mm다. 또한 말갈,여진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퉁구스족의 머리뼈 길이는 185.5mm이고 시베리아에 사는 유카키르족은 183.3mm, 에스키모는 183.9mm, 축치족은 182.9mm다. 따라서 177mm 대의 머리뼈 길이를 가진 발해족은 그보다 긴 머리뼈를 지닌 몽골-퉁구스족이나 기타 시베리아 소수민족과는 다소 차이가 나는 집단임을 알 수 있다.
발해인 인골의 머리 길이 177.10mm는 일본인의 머리 길이 180.7mm에 비해서도 짧은 편이다. 최근 부여-고구려어가 일본어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는 일부 언어학자들이 있지만, 외모상으로 보자면 부여 내지 그 계승관계에 있는 발해인들이 일본인과 그리 닮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발해인의 머리 길이는 북중국의 179.4mm(발해인과 2.3mm 차이)와 비교적 가까운 편인데, 현대 한국인은 175.2mm(발해인과 1.9mm 차이)여서 발해인과 더 닮았다. 적어도 머리 길이로만 보자면 발해인과 가장 비슷한 것은 현대 한국인이다.
■ 발해인 인골의 머리뼈 좌우 너비
발해인 인골의 머리뼈 너비는 141.44mm다. 이 같은 머리뼈 좌우 폭은 머리 길이를 기준으로 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몽골족-퉁구스족과는 큰 차이가 있다. 몽골족은 149mm로 두드러지게 좌우 폭이 크고, 역사상의 말갈-여진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퉁구스족의 머리뼈 폭은 145.7mm다. 대중영합적인 주장을 펴기 좋아하는 일부 사람들이 부여와 연관짓기를 좋아하는 몽골 부리야트족의 머리뼈 좌우 폭은 154.6mm에 달할 정도여서 발해인 인골과 가장 차이가 크다.
발해인 머리뼈의 좌우 너비는 현대 북중국의 139.2mm(발해인과 2.24mm 차이) 현대 일본의 140.2mm(발해인과 1.24mm 차이)와 비교적 가까운데 그보다는 현대 한국인의 142.4mm(발해인과 0.96mm 차이)와 더 가깝다. 역시 동아시아 지역의 제 종족, 민족, 혹은 집단 중에 발해인과 가장 가까운 것은 현대 한국인이다.
■ 발해인 인골의 머리뼈 높이
아래턱을 제외하고 머리뼈 뒤쪽 하단에서 정수리까지 재는 것이 머리뼈 높이다. 현대 한국인은 동아시아지역에서 거의 유일하게 머리 뼈 높이가 140mm를 넘는 집단이다. 역사적으로 한반도에 거주한 인류는 후기 구석기이래 전반적으로 머리 뼈가 높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한국인의 머리 뼈가 주변 집단에 비해 높은 것은 아주 오래된 특징 중 하나다. 발해인들의 머리 뼈 높이는 142.44mm로써 아주 높은 편이다. 이는 141mm 수준인 현대 한국인보다도 약간 높다. 물론 북중국은 138.1mm여서 한국보다도 더 차이가 크고, 몽골족은 131.4mm로 비교가 불가능하며, 퉁구스도 126.3mm로 발해인과 큰 차이가 있다. 일본도 138.3mm로 한국인에 비하면 발해인과 덜 유사하다. 머리 뼈 높이에서도 현대 인류집단 중에서는 한국인이 발해인 인골과 가장 유사한 뼈 모양을 가지고 있다.
■ 발해인 인골의 다른 특징
이처럼 발해인 인골의 머리뼈 모양은 전반적으로 현대 한국인과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다른 기준에서도 마찬가지다. 발해인 인골의 이마 너비는 136.86mm인데, 이 수치는 일제 강점기 경성제대의 島五郞이 제시한 한국인 이마너비 134.70mm과 아주 가깝고, 중국 학계가 제시하는 중국 화북사람들의 132.7mm과는 상대적으로 거리가 있다. 발해인의 코높이(두개골에서 코 위치에 뚫린 부분의 상하 길이)52.7mm는 일제 강점기 한국인의 53.6mm와 가깝고 중국 화북사람들의 55.3mm와는 상대적으로 멀다. 몽골, 퉁구스는 56.5mm, 55.4mm와는 역시 거리가 있다. 입에서 눈 사이 코가 시작되는 지점의 길이를 잰 상안고에서 발해인은 73.86mm, 현대 한국인은 73.9mm, 현대 중국 화북인은 75.3mm,몽골족은 78mm, 퉁구스족은 75.4mm다. 이처럼 적어도 체질인류학에서 중시하는 두개골 모양으로 보자면 발해인들과 가장 가까운 현대인은 한국인이라고 할 수 있다.
■ 삼령묘 출토 발해인 인골의 의미 발해인 인골이 나온 삼령묘는 발해 상경성 터라는 주장이 있는 중국 흑룡강 영안현에 위치하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이곳에 위치한 삼령묘가 발해 왕릉이라고 주장하고 있고, 일부 학자들은 발해 귀족들의 묘라고 주장하고 있다. 어느 경우라도 발해 최상층부 지배층이라는데 대해서는 크게 이견이 없다. 이곳에서 나온 남자 5명의 머리뼈로 유추할 수 있는 외모는 현대 한국인과 가장 가깝다. 외모만으로 최종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부여-고구려인, 혹은 예맥족, 그리고 그들의 후예인 발해 지배층들이 한국인의 조상이었다는 우리의 전통적 믿음이 어느 정도 근거가 있음을 재확인할 수 있다.
■ 삼령묘 고인골과 만주 지역 주요 고인골과의 비교
이들 발해인 인골이 부여 건국 직전 단계의 문화를 보여주는 서단산문화의 인골이나 부여족이라는 주장이 있는 형가점묘 인골, 선비족들에게 포로가 된 부여족들의 무덤인 라마동삼연묘의 인골과도 유사한 점이 많다는 점도 흥미롭다. <참고자료>
중국 학계(陳産,喇嘛洞 墓地 三燕文化居民 人骨 研究 - 중국 길림대 박사 학위 논문 2009년)의 연구결과를 보면 라마동에서 나온 50여구에 달하는 인골의 머리뼈 앞뒤 길이는 177.94mm, 머리뼈 좌우 너비는 144.43mm, 머리뼈 아래 위 높이는 136.30mm, 상안고는 75.15mm로 되어 있다. 머리뼈 좌우 너비가 현대 한국인에 좀 더 넓고, 아래 위 높이는 약간 더 짧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당 학위논문에서 현대 주요 종족-민족-집단 중에 한국인(원문의 표현은 조선인)이 라마동 삼연묘 고인골과 가장 가깝다는 분석결과를 제시했다.
서단산 묘의 경우 머리뼈 길이는 178.18mm, 너비는 138.18mm, 높이는 134.67mm였는데 북한 학계(조선사람의 기원, 1989)에서 퉁구스족들보다는 현대 한국인에 가깝다는 주장을 이미 오래 전에 했었다. 농안현에 위치한 형가점묘의 경우 중국 서한시대(기원전 205~기원 25년)의 부여족 무덤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라마동 삼연묘, 삼령묘와 한 그룹으로 묶인다는 분석결과가 삼령묘를 분석한 논문에 실려 있다.
두장고와 이마 너비만 따진 이 그래프에서 1번이 발해 삼령묘, 5번이 부여 형가점, 9번이 부여 라마동에 해당한다. 7번은 하가점상층문화의 고인골에 해당하는데 선비족과 관련 있는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지만, 부여족과도 가깝게 위치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하가점하층문화의 인골이 전반적으로 머리 높이가 높아서 현대 한국인과 연결되면서 동시에 현대 한국인과 구별되는 특징을 동시에 가진 집단인데, 하가점상층문화의 경우에도 일정 부분 부여-발해인과 연결고리가 보이는 점이 인상적이다. 11번은 고대산문화의 유골이다. 4번은 전국시대의 길림성 구대시의 유골인데 상대적으로 부여-발해인과 가깝게 나타난다. 부여-발해인과 유사한 집단이 이미 전국시대에 만주 길림성 일대에 제법 널리 분포하고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
2번은 러/중 국경지역의 말갈족 고인골, 6번은 시베리아 신석기시대, 10번은 내몽골 적봉의 거란족, 12번은 내몽골의 선비족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부여-발해인과 선비-거란-말갈족이 어느 정도 구별이 됨을 알 수 있다. 거란족 무덤에서 나온 고인골은 야율우묘 등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머리뼈 좌우 너비가 180mm가 넘어 현대 한국인이나 발해인보다 앞뒤 길이가 더 길고, 좌우 너비도 147~154mm로 한국인보다 훨씬 넓다. 동시에 머리뼈 높이는 129~137mm로 현대 한국인이나 발해인보다 낮다. 훗날의 여진족과 관련이 있는 말갈족의 경우 머리뼈 앞뒤 길이가 181.6mm로 부여-발해-현대 한국인보다 더 길다.
결론적으로 부여-발해인의 고인골은 역사상 거란-말갈족과 거리가 있다. 부여-발해인 고인골은 현대인과 비교해서도 중국 북부, 일본, 몽골족, 몽골 부리야트족, 퉁구스족과 상대적으로 적게 닮았고 한국인과 가장 유사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 해석하기 어려운 문제점
문제는 3번 길림성 통화 전국만기 석관묘에서 나온 인골이다. 이 무덤은 고구려 건국 직전 단계의 인골인데 그 인골의 특징이 부여족이나 발해족과 차이가 있다. 머리뼈 길이가 180.25mm여서 더 길고, 머리뼈 높이도 133.1mm로 부여-발해-현대 한국인에 비해 다소 낮다. 문제는 이런 인골이 나온 곳이 몇 곳 더 있어서 특정한 무덤만의 예외적 현상으로 치부할 수 없다는 점이다. 대표적으로 춘추전국시대 본계 묘후산지역의 고인골도 머리뼈 길이가 192.8mm에 폭은 144mm여서 부여-발해인-현대 한국인과 적지 않은 차이가 있다.
이 지역은 맥족 내지 고구려 건국 직전 단계의 청동기 내지 초기철기시대의 고인골인데 현대 한국인과도 다소 거리가 있고 고구려인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부여-발해인과도 다소 거리가 있다. 무덤 양상이 중국 연나라풍이 아니어서 중국인의 이주일 가능성도 없다. 앞으로 더 인골이 출토되어 봐야 알겠지만 어쩌면 혹 이것이 문헌사학계에서 오랫동안 논쟁했던 예족과 맥족과의 차이를 보여주는 단서일 가능성도 있다. 현재로서는 다소 모험적인 이야기지만 극단적으로 생각한다면 부여 혹은 예족, 그리고 발해 지배층은 현대 한국인과 상대적으로 가깝지만, 맥족 혹은 초기 고구려는 현대 한국인과 상대적으로 거리가 멀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다.
상상해 본다면 대충 이런 시나리오가 된다. 원래 부여는 고구려에 비해 대국이었고, 인구도 더 많았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따르면 부여 8만호, 고구려 3만호, 마한 10만호라고 되어 있다. 또한 고구려의 지배층은 잘 알려져 있듯이 부여계다. 고구려 피지배주민인 맥족은 원래 부여족과는 약간 특성이 다른 집단이었지만 부여족 지배층에게 정복당하면서 점차 부여족과 외모와 유사해지고, 훗날 역으로 고구려가 자신보다 인구가 더 많던 부여를 정복하면서 고구려인이 더욱 부여인과 닮아가는 과정을 밟게 된 것은 아닌가라는 추정도 해볼 수 있다. 이 때문에 고구려가 어느 정도 영토를 확장한 단계에서는 순수 고구려인의 특성보다는 부여계 특성을 더 많이 가지게되고, 그 같은 특성이 발해 지배층으로 계승된 것이 아닌가하는 가설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삼한계 종족의 경우 그 직접 후신인 현대 한국인이 부여-발해인 고인골과 매우 유사한 체질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애당초 부여계와 비슷한 체질적 특성을 가진 집단일 가능성이 있다. 다만 한반도의 고대 고인골이 충분하지 않아 최종 결론을 내리긴 일러 보인다. 현재로서는 고대 시기 만주부터 한반도까지 체질인류학적으로 대체로 유사한 집단이 거주했지만, 그 중간 지역에 다소 이질적인 맥족-고구려인이 중간에 관통하는 형태로 이주하고, 그 이주의 여파가 부분적으로 한반도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닌가 추정해 보고 싶다. 초기 철기 이후 삼국시대까지 한반도 남부지역 고인골 중 일부가 현대 한국인과 다소 형태가 다른 것도 그 같은 영향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 다섯줄 요약
-발해 수도 상경성 인근 발해 지배층 무덤에서 출토된 남자 5명의 머리 뼈 모양은 현대 한국인과 가장 유사하다.
-발해인 지배층 고인골과 유사한 특성이 있는 고인골은 청동기시대 길림성, 요령성에서도 출토되며 3~4세기 요서지역의 부여계 포로집단에서도 확인된다.
-발해 지배층 고인골은 고대 선비족, 거란족, 말갈족의 머리뼈와 다르게 생겼고, 현대 몽골족, 몽골 부리야트족, 퉁구스족, 현대 중국 북부지역 한족, 일본인과도 다르게 생겼다.
-부여-발해인은 현대 한국인과 외모상 유사한 특징을 지닌 집단일 가능성이 높고, 그 이상의 밀접한 계통적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훗날 고구려의 초기 중심지역이 되는 기원전 8~3세기 본계, 통화지역의 고인골은 부여-발해-현대 한국인의 머리뼈와 다소 차이가 있으며, 초기 고구려인 혹은 맥족은 부여인과 다소 다른 외모와 다른 계통적 특성을 지닌 집단일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