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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묘동] 신숭겸 장군 유적·표충사
오후 첫 답사일정은 수년전 TV드라마 ‘태조 왕건’을 통해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된 신숭겸 장군 유적지인 「표충사」이다. 표충사는 대구의 대표적인 관광지인 팔공산 초입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대구시민들 중에는 다녀오지 못한 이가 많다고들 한다. 경내가 워낙 넓은 탓에 오늘처럼 식후 산책하는 코스로 제격일 것 같다. 입구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이 되어 있다.
신숭겸(申崇謙) 장군 유적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1호
소재지: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 526
여기는 고려 개국공신인 장절공 신숭겸 장군이 순절한 곳이다. 신숭겸 장군은 배현경(裵玄慶)등과 함께 궁예를 내몰고, 왕건을 받들어 고려를 개국하였다. 공은 그 뒤 대장군이 되어 927년(고려 태조 10년)에 신라를 침공한 후백제 견훤의 군사를 물리치기 위해 왕건과 함께 출전하였다.
왕건이 이 곳 공산싸움에서 후백제군에 포위되어 위기에 빠지자 자신이 왕건을 가장하여 싸우다 전사하였으며, 왕건은 그 틈을 이용하여 홀로 탈출하였다고 한다. 왕건은 장군의 죽음을 애통히 여겨 그의 시신을 거두어 지금의 춘천인 광해주에서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렀다. 그리고 신숭겸이 순절한 이곳에 순절단과 지묘사(미리사)·智妙寺(美理寺)를 세워 그의 명복을 빌게 하고, 토지를 내려 이곳을 지키게 하였다고 한다.
1607년(선조 40)에 없어진 지묘사 자리에 경상도 관찰사 류영순이 서원인 충렬사(忠烈祠)를 세워 장군을 모셨으며, 1672(현종 13)에 표충사는 사액서원이 되었다. 1871년(고종 8)에 서원철폐령으로 표충사가 없어진 뒤에 후손들이 재사(齋舍)를 지어 이곳을 지켜오던 중 1993년에 표충사를 복원하였다.
유적지 경내는 크게 4구역으로 나눠볼 수 있다. 표충단(祭壇), 표충재(講堂), 표충사(祠堂), 상절당(別堂)이 그것인데, 모두 독립된 공간으로 담장으로 둘러져 있다. 우리 일행은 맨 먼저 표충사에서 알묘례를 거행할 예정이다. 표충사에 대해서는 대구시에서 발간한 안내 리플릿을 참고해 보자.
표충사
왕산 아래 제일 윗채가 표충사이다. 표충사는 선조 40년(1607)에 신숭겸 장군의 외후손인 경상도 관찰사 류영순이 영남에 사는 공의 후손들과 합력하여 옛 지묘사 터에 세웠다. 그 후 사우가 퇴락하자 현종 11년(1670)에 건물을 다시 짓고 동년 8월에 영정을 봉안하였으며, 현종 13년(1672)에 「表忠祠」라 사액되었다. 숙종 2년(1676)에 공과 함께 순절한 김락 장군을 배향하였고, 영조 2년(1726)에 다시 공의 후손 신길원 공을 함께 배향하였으나, 고종 8년(1871)에 훼철되고 말았다. 그 후 1988년에 후손들이 뜻을 모아 사당을 중건하고 1993년에 장군의 영정과 신위를 모셨다.
과거에는 신숭겸, 김락, 신길원 세 분의 신위가 봉안되었지만, 지금은 신숭겸장군 1위에 대해서만 영정과 신위가 모셔져 있다는 설명이다. 또한 표충재 동북쪽에는 충렬비각이 서 있는데, 역시 안내 리플릿을 참조해보자.
충렬비각
선조 40년(1607)에 외후손 류영순이 신숭겸 장군의 충절정신을 기려 충렬비를 세웠다. 비문은 후손인 예조판서 신흠이 짓고, 글씨는 여주목사 김현성이 썼으며, 전문은 안변도호부사 김상용이 썼다. 정조 5년(1781)에 비각이 허물어지면서 비가 넘어져 누운 것을 관민이 힘을 모아 다음해 8월에 바로 세웠으며, 같은 해에 비각도 고쳐 세웠다. 현재의 비각은 1979년 대구시에서 보수한 건물이다.
신숭겸 장군 유적지를 돌아보다보면 자연스레 고려 태조 왕건이 오버랩 된다. 동수대전에서 참패한 후 홀로 탈출을 하면서 대구지역에 많은 지명을 남긴 고려 태조 왕건. 왕건의 대구 ‘진출로’와 ‘탈출로’에서 연원되었다는 대구의 몇몇 지명에 대한 이야기는 대구시청년유도회 daum 카페의 회원 자유기고란(2011. 9. 23.)에 올라 있는 본회 송은석 사무국장의 글을 참고해보자. 그러고 보니 오늘의 답사 일정이 공교롭게도 왕건의 진·탈출로와 정확히 일치한다.
달빛에 바랜 신화, 고려태조 왕건 천년을 살다
“경들은 들으시오. 과인은 팔공산 공수대전에서 군사 1만 5천을 잃었소.. 또한 신숭겸, 김락 두 장수의 시신도 수습하지 못한 채 과인 홀로 살아남았소. 부디 경들은 팔공산 왕산자락 어디에선가 목이 잘린 채 나뒹굴고 있을 이 두 장수의 시신을 꼭 찾아주기 바라오.”
이 이야기는 지금부터 정확히 1,084년 전인 서기 927년 초겨울. 저의 고향인 대구 팔공산 남쪽 지금의 지묘동 왕산 일대에서 벌어진 동수대전의 결말입니다. 후백제의 견훤은 당시 친고려 정권이었던 신라의 경애왕을 경주 포석정일대에서 제거한 뒤 팔공산을 경유하여 본국으로 회군을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반면 고려태조 왕건은 경애왕의 사전원병요청에 응하여 선발대 1만 병사를 먼저 출병시킨 뒤, 자신은 신숭겸, 김락 두 장군과 함께 정예기병 5천을 이끌고 견훤군의 회군로로 추정되는 팔공산 남쪽으로 출병을 하였습니다. 신라 오악 중 중악으로서 신라 최고의 명산이었던 팔공산은 당시 신라의 영토였습니다. 그러나 동화사, 파계사 같은 산내 사찰세력은 백제계 법상종 사찰이었던 탓에 후백제 견훤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습니다. ‘신라 영토안의 백제 세력권에서의 국지전’ 그래서일까요? 수차례 패배를 거듭한 왕건은 마침내 왕산일대에서 역사에 ‘동수대전’이라 기록되는 최후의 혈전을 벌이게 됩니다. 이 전투에서 왕건의 군대는 전멸하였지만 왕건 자신은 신숭겸의 묘책으로 구사일생 혈혈단신으로 대구에서 개성까지의 탈출에 성공하게 됩니다.
그런데 ‘고려태조 왕건의 대구 진출과 탈출’이라는 이 동수대전의 이면에는 정말 놀라운 이야기들이 숨어 있답니다. 왕건은 대구분지를 둘러싼 산의 안쪽 기슭을 따라 시계방향으로 돌되 9시 방향 성주 쪽에서 진입하여 12시 방향 팔공산, 3시 방향 경산, 6시 방향 앞산을 경유하여 다시 9시 방향 성주로 탈출합니다. 이때 고려 태조 왕건은 자신이 지나가는 곳마다 자신과 관련된 독특한 지명들을 남기게 되는데 이를 유래로 하는 많은 이름들이 무려 1,00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왕건의 정예기병 5천이 팔공산 일대에서 최초로 진을 친 지역은 지금의 대구시 북구 동서변동 일대의 ‘무태동(無怠洞)’과 ‘연경동(硏經洞)’입니다. 무태라는 지명은 왕건이 진영을 순찰하면서 ‘병사들이여 경계를 태만치 말라’, ‘이 지역 백성들이 태만치 않고 부지런하구나’ 하였던 것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왕건의 군대가 무태에서 동화천을 끼고 팔공산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어느 마을을 지나게 되는데 전란중임에도 불구하고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가 들렸다’하여 이 마을을 ‘연경동’이라 합니다. 연경동을 지나 팔공산 남쪽을 경유하여 동으로 은해사 일대로 진격한 왕건은 이곳에서 처음으로 견훤과 일전을 벌입니다. 하지만 첫 전투에서 왕건은 패하게 되고 ‘태조지(太祖旨)’라 불리는 조그만 산봉우리를 거점으로 군대를 다시 수습하게 되는데 지금도 이곳을 ‘태조지’라 부르고 있습니다. 태조지에서 회군하여 고개 너머 팔공산 쪽으로 퇴각하던 왕건의 군대를 후백제군이 나팔을 불며 맹렬히 추격하였다하여 생겨난 고개 이름이 ‘나팔고개’입니다. 결국 왕건의 군대는 그들이 최초로 진을 쳤던 무태까지 다시 퇴각하여 동화천과 금호강이 합류하는 지점을 사이에 두고 견훤군과 대치합니다. 이곳을 ‘살내[矢川]’라고 하는데 양측의 군대가 쏜 ‘화살이 하천을 가득 매웠다’는 데서 유래되었지요. 다시 전열을 가다듬은 왕건은 팔공산 남쪽 지묘동 왕산일대에서 그 유명한 ‘동수대전’을 벌이지만 결국 패배로 끝을 맺습니다. ‘왕산(王山)’은 동화사와 파계사로 갈리는 길목에 있는 작은 산으로 이 역시 왕건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또한 왕산의 동쪽 고개를 ‘파군재[破軍峙]’라 부르는데 ‘왕건의 군대가 깨어진 고개’라는 뜻입니다. ‘지묘동(智妙洞)’이라는 지명은 ‘지혜가 참으로 묘하다’는 의미로 이곳에서 왕건과 옷을 바꿔 입고 대신 죽음으로써 자신의 주군을 살린 신숭겸장군의 지략이 참으로 묘하다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제 홀몸으로 탈출 길에 오른 고려 태조 왕건. 그가 홀로 앉아 쉬었다는 바위 ‘독좌암(獨座巖)’. 그가 한 마을에 이르렀는데 어른들은 전란으로 모두 달아나고 어린아이들만 남아 있었다하여 ‘불로동(不老洞)’. 그가 어느 산기슭에서 한 나무꾼을 만나 주먹밥을 얻어먹은 적이 있었는데 나무꾼은 뒤늦게 그가 고려의 왕이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곳을 ‘왕을 잃은 곳’ ‘실왕리(失王里)’라 이름하였습니다. 추격권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자 ‘얼굴이 펴졌다’고 하여 ‘해안동(解顔洞)’. 비로소 마음을 놓고 ‘안심하였다’하여 ‘안심동(安心洞)’, ‘한 밤중에 반달이 떠서 탈출을 도왔다’하여 ‘반야월(半夜月)’ 등. 대구의 동쪽 금호강을 건너 남쪽 앞산 기슭을 탈출로로 택한 왕건은 앞산 일대에도 ‘은적사(몸을 숨겼다)’, ‘안일사(편안하게 쉬었다)’, ‘임휴사(휴식에 임했다)’ ‘왕굴(왕건이 숨은 굴)’, ‘안지랑골(앉아서 쉬었다)’ 등 많은 흔적을 남겨두고 성주 방면으로 탈출에 성공했다고 전합니다.
고려 태조 왕건. 그는 반만년 우리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승리자 중 한 명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대구 땅의 신라의 후예들은 자신들을 도우러 왔다가 비참한 결말을 맞은 ‘패배자 왕건’에게 한없는 연민의 정을 품었던 모양입니다. 1,000여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 땅의 민초들은 역사와는 별개로 자신들의 삶 속에다 ‘패배자 왕건’에 대한 연민의 정을 담아놓았습니다. 달빛에 바랜 신화처럼...
팔공산 왕산 아래 파군재 삼거리에는 거대한 신숭겸장군상이 서있습니다. 매일 밤 이곳에는 새로 구입한 자동차의 무사안전을 기원하는 고사를 지내기 위해 많은 자동차가 모여드는 진풍경이 펼쳐집니다. ‘신 장군 앞이니 잡신들은 물러가라’ 아참! 목 없는 신숭겸장군의 시신은 후에 수습이 되었고, 왕건의 명에 따라 황금으로 머리가 만들어진 뒤 도굴을 대비해 3개의 봉분을 갖춘 형태로 조성되었다지요.
[지묘동] 다천정·태동공 묘우
지묘초등학교 길 건너편에 자리한 경주최씨 다천공파의 재사(齋舍)와 묘우(廟宇)이다. 아래는 경주최씨 다천공파 홈페이지에 등재되어 있는 다천정에 대한 설명이다.
다천정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 738-1번지
이 정자는 경주인 崔東栗(최동률)이 제자들과 더불어 經史(경사)를 강론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최동률의 호는 茶川(다천), 임란시의 의병장인 台洞 崔誡(태동 최계)의 子이다.
父公(부공)의 명으로 한강 정구, 낙재 서사원 양문하에서 수학하여 文學行誼(문학행의)가 당세에 추중되었고 1611년(光海君 3) 從氏(종씨) 호군공 동립과 같이 晦齋(회재), 退溪(퇴계) 兩先生(양선생)의 辨誣(변무)에 힘썼으며 1619년(光海君 11) 사마에 합격했으나 시사가 순탄치 못함을 보고 즉시 귀향하여 茶川上(다천상)에 이 정자를 지었으며, 모당 손처눌과 여헌 장현광과도 道義交(도의교)가 있었다.
현재의 정자는 1980년대에 犬齒石(견치석) 축대위에 방 3칸 대청 2칸의 현대식 구조로 새로 중건하였으며, 지묘동 776에 있었던 三忠祠(삼충사) 廟庭碑(묘정비)도 1995년에 이곳으로 이건하여 같은 경내를 이루게 하였다.
삼충사는 1592년(宣祖 25) 임란시에 창의하여 망우당 곽재우와 합세 전공을 세운 경주최씨 일가 삼충(三忠)인 한천(寒川) 최인(崔認), 태동(台洞) 최계(崔誡), 우락재(憂樂齋) 최동보(崔東輔) 삼숙질(三叔姪)의 공적을 추모하기 위하여 약 180년 전에 三忠祠(삼충사)을 세우고 비를 건립하였던 것이다.
다천정의 좌측에는 담으로 둘러싸인 독립된 공간에 「태동공 묘우」와 「삼충사 묘정비각」이 있다. 삼충사 묘정비각의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이 되어 있다.
삼충사 묘정비각
경주 최씨일가 삼충(三忠)인 한천 최인, 태동 최계, 우락재 최동보 삼숙질(三叔姪)이 임란에 창의하여 혁혁한 전공을 수립한 업적을 찬양한 충의사적비다.
무진년(1808)년에 영남관찰사 윤광안(尹光顔)이 최씨일실삼현의 창의사실을 임금께 아뢰니 임신년(1812)에 한천 최인을 사헌부지평에, 태동 최계를 병조참판에, 우락재 최동보를 호조참판에 추증하였다.
비문은 대사간 풍산인豊山人 유태좌(柳台佐)가 찬(撰)하고 호조좌랑 진성인(眞城人) 이휘령(李彙寧)이 서(書)하였다.
비각 건물은 그동안 부분적으로 파손되어, 이축(移築)․보수하였다. 현재 삼충사 비각과 묘실이 있으며, 113평의 대지에 2칸 규모의 건물이다.
지묘동 토박이로 현재 지묘동 통장이자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로 활동하고 있는 채건기 선생의 설명을 참고하여 경주최씨 삼충(三忠)의 계보를 정리해본다.
[父] 최종옥(시조 최치원의 18세손)
[1子] 신와 최겸--> [孫]우락재 최동보
[2子] 한천 최인(대명동): 원모재(지묘동 24번지)
[3子] 태동 최계--> [孫]다천 최동율(지묘)
[孫]대암 최동집(옻골)-->5세손 백불암 최흥원
[孫]향암 최동직(도동, 봉무동)
[연경동] 연경서원 구지(舊址)·화암(畵巖)
이어지는 답사지는 연경서원 구지 및 화암이다. 금번 답사에서 연경서원 구지를 답사지로 채택한 것은 그 연유가 있다. 많은 분들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현재 연경서원은 이곳에 없다. 심지어 연경서원의 옛 터조차 확인되지 않고 있다. 연경서원은 1871년 고종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이 되었다. 그 후 서당으로 잠시 존재하였다가 어느 시기엔가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지금까지 복원이 되고 있지 않고 있는 것이다. 최근 연경동 일대에는 대단위 아파트가 들어설 예정이다. 이에 따라 지역의 유림계에서는 지금 연경서원을 복원하지 못하면 영원히 실기(失期)하게 된다는 위기감에, 현재 지역유림을 중심으로 복원을 위한 모임이 결성 되어 연구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늘 답사에서 시간적인 여유가 허락된다면 회원들과 함께 화암 정상에 꼭 올랐으면 한다. 정상에서 연경동 일대를 굽어보며 그 옛날 연경서원이 있었을법한 터를 여러 회원들과 함께 고찰해보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을 것 같아서 말이다.
우리 대구지역에 있어 연경서원이 지닌 의의
1. 대구인근의 서원들 중에서 건립연대가 가장 빠른 서원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소수서원·1443년) 건립 후 불과 20년 뒤인 1565년(명종 20년)에 세워졌다. 이는 서원건립의 초창기로 분류되는 명종 이전에 건립된 서원인 것이다. 참고로 명종 이전까지 건립된 우리나라의 서원은 전국적으로 29개소에 불과했는데 연경서원이 그 중 하나였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2. 조선 중기 대구 유학의 문풍을 일으킨 구심점이다.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 선생은 자신의 고향 대구가 경상도의 거읍(巨邑)임에도 불구하고 문풍의 일천함을 한탄한 바가 있다. 서거정 선생 이후 도하(都夏), 양희지(楊熙止) 같은 인물이 과거급제하여 중앙정계로 진출하였으나 여전히 지역의 문풍은 크게 진작되지 않았다. 1500년대 중반 드디어 퇴계의 문인인 매암(梅巖) 이숙량(李叔樑 1519-1592)과 계동(溪東) 전경창(全慶昌 1532-1585)에 의해 연경서원이 세워지고 강학활동이 전개된다. 이때에 와서 비로소 대구지역 전체를 아울러는 유학사단이 형성되고 문풍이 크게 진작되었다.
3. 퇴계선생의 시 「서원십영(書院十詠)」에 등장하는 9개 서원 중 하나이다.
퇴계선생은 연경서원이 창건되는 해인 1565년에 「서원십영」이라는 시를 짓는다. 이 시에는 모두 9개의 서원이 소재로 등장한다. 참고로 9개 서원은 죽계서원(풍기 소수서원), 임고서원(영천), 문헌서원(해주), 영봉서원(성주 천곡서원), 구산서원(강릉), 남계서원(함양), 이산서원(영주), 서악서원(경주), 화암서원(대구 연경서원)이다. 퇴계선생의 「연경서원기후(硏經書院記後)」의 말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는데 한번 음미해볼 일이다.
내가 일찍이 열 서원의 시를 지었는데 연경서원도 그 중의 하나이다. 비록 서원의 경중에는 관계가 없으나 제군들에게 숨기고 싶지 않아 조심스레 말미에 기록하여 들려주노니 바라건데 제군들이 힘써주면 다행이겠다.
화암의 좋은 형체 그림으로 그리기 어려운데
서원 세워 서로 모여 육경을 외웠도다.
이로부터 도학의 밝아진 소문 들려옴을 기다릴지니
많은 사람 잠속에서 깨어나지 않겠는가.
선조 원년 정묘(一五六八 )시월 열엿셋날 진성 이황(眞城 李滉) 삼가 쓰다.
4. 창건초기 강학(講學)위주의 서원이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 서원 역사에 있어 서원건립 초창기에 해당하는 대부분의 서원들은 선현제향을 위한 사우의 건립으로부터 시작된 제향위주의 서원이었다. 하지만 연경서원은 창건 후 약 50년이 지나서야 사당(1613)과 향현사(鄕賢祠 1635)가 건립되었다. 이를 통해 연경서원이 강학위주의 서원이었음을 알 수 있다.
5. 서원의 창건이 퇴계의 문인인 매암 이숙량과 계동 전경창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매암 이숙량은 농암 이현보의 다섯째 아들이다. 중년에 경상도 예안에서 이곳 연경으로 이거(移居)를 했다. 서원 창건 논의에서부터 창건이후 강학활동까지 연경서원의 모든 사업의 중심에는 매암 이숙량이 있었다. 특히 매암은 연경서원과 퇴계선생과의 연결고리 역할에 충실했다. 퇴계선생의 사양으로 결국 「연경서원기」는 매암이 썼지만 그의 거듭된 요청에 퇴계는 결국 「연경서원기후」를 써서 보내주게 된다. 그리고 기록에 의하면 창건당시 연경서원 내 모든 편액은 퇴계선생의 친필이었다고 한다. 매암은 연경서원이 창건되고 약 10여년 후 다시 예안으로 돌아갔고, 임진왜란 때 74세의 나이로 진주대첩에서 순국했다. 계동 전경창은 지난해 우리일행이 답사를 한 파동의 무동재(武洞齋)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인물이다. 송담 채응린, 임하 정사철과 함께 대구지역에 최초로 성리학의 문을 연 대표적인 인물 중 한분이다.
위에서 언급한 5가지 의의를 염두에 두고 연경서원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서원 창건에 대한 내용이다. 최근 자료들을 참고하기 보다는 창건당시 매암선생이 쓴 「연경서원기」를 살펴보는 편이 유학을 공부하는 우리일행들에게는 더 유익할 듯하다. daum카페 「영천이씨 대종여로(大宗旅路)」에 게재되어 있는 자료인데 거친 부분이 많아 약간의 교정을 가하였음을 밝혀둔다.
연경서원(硏經書院)기문
매암 이숙량
명종 계해(1563)년 여름 향시에 필요한 학업을 익히는 향중 선비들이 학당에 모여 글을 읽고 짓는 여가에 서로 팔을 잡고 탄식하여 이르기를 서원(書院)이 우리나라에 있어서 전후에 들은 바가 없었더니 무릉(武陵) 주선생(周先生)이 처음으로 백운동(白雲洞)에 세움에 시청을 고동시키고, 새로운 인재를 양성하였으니 참으로 우리나라 위대한 사업의 으뜸이었다.
그 소문을 듣고 일어난 것으로 해주의 문헌서원(文憲書院)과 성주의 영봉서원(迎鳳書院)과 영천의 임고서원(臨皐書院)과 경주의 서악서원(西岳書院) 같은 것이 있다. 따라서 크고 작은 고을에 파급되어 서로 다퉈가며 추모하고 점차 확장하였으니, 이러한 것들이 어찌 모두 수령들에 의해서 건립되었으며 또 어찌 모두 반드시 어진이의 숭배를 위주로 하여 설치한 것이겠는가!
고을 사람들이 능히 스스로 분발하여 강학의 장소로 세운 것이 간혹 있었으니 도의를 강마하고 풍속을 격려하는 데에 있어 어찌 도움이 적다 하겠는가!
우리 고을은 한 도(道) 가운데 선비의 후손이 많은 데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몸을 사사롭게 하고 선비들은 그 학문을 사사롭게 하여 활과 말의 기예에만 따르고 문학에는 힘쓰지 않았다. 그 사이에 또한 어찌 호걸스런 재목과 기위(奇偉)한 사람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그 퇴폐한 풍습 속에서 능히 스스로 분발한 사람이 얼마나 있었겠는가! 풍속이 이로 말미암아 아름답지 못하고 인심이 이를 예사로 여겨 날마다 나빠졌으니 이 어찌 다만 우리 고을의 수치였겠는! 또한 국가의 불행이었다. 지나간 것을 따를 수 없고 다가오는 것을 힘쓸 수 없으니 지금 어진 임금을 만났으며 하찮은 고을에서 어진 성주를 얻었으니 이것은 진실로 고을 풍속을 혁신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옛 말에 이르기를 ‘모든 공인(工人)이 제자리에 있으면서 그 일을 이룬다’고 하였으니, 학문을 하는 데에 있어서만 어찌 그렇게 하겠는가! 그렇다면 선비가 있을 자리는 서원이 아니고 어디겠는가! 이에 목욕 제계하고 성주에게 들어가 뵙고 서원 세울 뜻을 고하였으니 이때 성주는 밝은 성주 박응천(朴應川)이었다. 그 향약의 마음을 아름답게 여기고 사람의 아름다움을 이루어 주는 것을 즐겁게 여기고 즉시로 명령하여 이르기를 ‘내가 비록 능히 주관할 수는 없으나 그 일로써 와서 말하면 들어 주겠다’고 하였으니 또 이르기를 ‘집을 세우는 데에는 기와가 가장 큰 일이니 이것은 내가 마련해 주겠다’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일을 하는 데에는 유사(有司)보다 더 앞서는 것이 없으니 유사의 우두머리를 선택하라’ 하였다. 제생들이 그 명령을 듣고 뛸 듯이 기뻐하며 물러 나왔다. 다음날 향사당(鄕射堂)에 향중 부호들을 모아놓고 역시 서원 세울 뜻을 말하니 모두 말하기를 ‘감히 동심협력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에 일을 주관할 사람을 세우고 또 재력(財力)의 규모를 계획하여 대소인원을 차례로 써서 그 빈부에 따라 돈과 곡식을 거두었으며 노력을 내는 데에도 역시 이와 같이 하였다. 이에 공인(工人)들을 먹일 곡식과 노임으로 줄 포백들이 단시일에 집합되었다. 이에 마땅한 기지를 살펴 팔공산 기슭에 세우도록 작정하였다.
고을에서 20리쯤 떨어진 곳에 마을이 있어 위의 마을은 지묘(智妙)라 하였고 아랫마을은 무태(無怠)라 하였으며 서원은 그 사이에 자리를 잡고 이름을 연경(硏經)이라 하였으니, 당초에는 잡초가 우거진 묵밭이었던 것을 전임 성주가 공유지로 교환하였다. 한 줄기의 맑은 냇물이 그 남쪽을 지나 잔잔하게 흐르며 구비구비 산을 따라 서쪽으로 10리를 체 못가서 호(湖)에 이르렀다.
그 상류의 두 마장쯤 되는 지점에 왕산(王山)이 있어 웅장하게 서려있고 높이 솟아 아름다운 기운이 매우 짙었다. 그 왕산을 호위하듯 그 남쪽에 벌려섰는 중첩된 봉우리가 마치 용이 나르고 봉이 춤추는 듯 굽고 방박한 것은 서원의 동남쪽 경관이다. 서원의 북쪽산을 성도(成道)라 일렀으니 봉우리가 높이 솟고 골짜기가 아늑하고 깊어 흰 돌과 푸른 소나무가 은은하게 비추었으며 서쪽으로 달리다가 갑자기 큰 바위가 깍은 듯이 높이 서있어 화암(畫巖)이라 일렀으니, 이는 즉 서원의 서쪽 진(鎭)이라 붉은 언덕 푸른 절벽이 높이 서 있어 기괴한 형상들이 저절로 아름다운 그림을 이루었으니, 화암이라고 한 이름이 이 때문이었는가? 그 아래 푸른 못이 있어 깊고 맑아 잠겨있는 고기들이 헤아릴 수 있었으니 이는 즉 서원에서 굽어보는 경관이다.
갑자년 봄 삼월에 상량하여 그 명년 겨울 시월에 공사를 마쳤으니 집이 모두 40여칸이었다. 그 정당(正堂)은 세 칸으로 기둥이 높고 처마가 나는 듯 하며 산과 물의 형세가 다 그 안을 밝혀 읍하는 듯 하니 참으로 인자(仁者)와 지자(知者)가 좋아할만한 곳이라 그 이름을 인지당(仁智堂)이라 하였다.
그 왼쪽 채는 넓고 깊어 그윽한 형세가 존엄하였으므로 수방재(收放齋)라 일렀으며, 오른쪽 채는 상쾌하고 시원하여 마음이 저절로 가다듬어졌음으로 경타재(警惰齋)라 일렀다. 그리고 동재를 보인(輔仁), 서재를 시습(時習)이라 일렀으며, 긴 행랑의 중간에 초현문(招賢門)이 있고, 초현문의 서쪽 곁에 동몽재(童蒙齋)가 있으며, 그 동쪽의 양헌(涼軒) 두 칸을 양정당(養正堂)이라 일렀으며, 그 서쪽 온실 세 칸을 유학재(幼學齋)라 일렀다. 그 밖에 주방과 창고를 동편에 붙여 세우고 원장은 서쪽으로 둘려있다. 이러한 것을 모두 합하여 「연경서원」이라 일렀다.
집은 이미 이루어졌으나 모든 용품이 미비하였다. 이에 또 권고하는 안을 내어 향중 동지들과 의논하고 스스로 원하는 바에 따라 받아들였으니, 적게는 소반과 기명이요, 크게는 돈과 곡식과 서책들이었다. 그들의 재력에 따라 들여 놓았으니 한 고을의 동심합력이 참으로 가상할 만 하였다. 대개 서원의 건립이 비록 지방사람들의 공통된 소원에 근본 하였으나 모든 계획과 처치에 있어서는 전후 성주의 힘이 많았다. 당초 재목을 모으고 기와를 구울 적에 힘이 미치지 못하면 성주가 담당하여 엄한 호령으로 순하게 인도하고 태만한 것을 이끌었으며, 토지 노속의 배치, 선비를 기르는 경비의 근본대책, 등유 식염의 규정에 이르기까지 모두 용의조치 하다가 완수하지 못하고 전임됨에 고을 사람들이 실망하고 중도폐지 될까 염려하였더니, 우리 유학에 행운이 깃들어 또다시 어진 성주를 만나게 되었다. 부임하자 곧바로 서원건립에 마음을 기울여 모든 고하는 것을 그대로 들어주었다. 인부들이 부역이며 경비의 계속에 용의주도하였으며 수호하는 군정과 주방의 식모들 까지도 힘써 주었으니 문학을 숭상하고 교화를 일으키는 뜻이 전임자와 후임자가 똑 같았다 우리 고을 많은 선비들의 다행스러움이 어떠하겠는가. 그러나 두 분 성주의 공적이 어찌 다만 구구하게 집을 짓는 사이에 베푼 조치의 말단에만 있었겠는가.
뒷날 원근에서 이 서원을 찾아와 노는 사람들이 두 분 성주의 근념과 서원을 건립한 뜻을 생각하여 글을 읽는 데에는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으로 근본을 삼고, 문장을 서술하는 데에는 미사여구로 다듬는 것을 말단으로 삼아, 학문은 자신의 수양을 위하고 외부의 물욕에 뜻을 빼앗기지 말며 진실을 알고 성실하게 시행하여 다른 잡기에 현혹되지 아니하며, 맑은 냇물에 임하거든 ‘가는 것이 이와 같다’고 한 공자의 말씀을 추모하고 높은 바위를 우러러서는 맹자의 기상을 상상하여 뛰어난 사람은 심오한 학문의 진리를 얻게 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라도 오히려 어진 것을 잃어버리지 아니할 것이라. 궁하여서는 가문과 시속의 모범이 되고 현달하여서는 임금을 존경하고 백성을 비호하여 충과 효를 다하는 인재가 많이 나올 것이니 두 분 성주의 공적이 이에 커져서 장차 화암과 더불어 우뚝 솟아 떨어지지 않을 것이 틀림없다.
지금 성주의 이름은 승간(承侃)이니 전임 성주와 성이 같으며 아름다운 치적도 잘 이었다. 이 때 고을사람들이 나를 무능한 사람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공사를 주관토록 하였으며, 완공된 뒤에 또 나에게 서원건립의 내력을 써서 퇴계선생에게 기문을 청하도록 책임을 지웠다. 이에 퇴계선생에게 청하였더니 선생이 병환으로 사양하시면서 내가 쓴 내력이 기문에 적합하다 하시고 칭찬하시며 발문을 뜻 깊게 써 주시고 반드시 기둥사이에 같이 계시도록 하였다. 내가 감히 안 된다고 사양하면 이것은 졸작인 나의 글 때문에 발문까지 버리게 되며 나의 글을 버리고 발문만을 취하면 서원건립의 전말을 알 수 없게 된다. 이에 감히 옳지 못한 죄를 범하면서 마침내 썼으니 뒷날 군자들은 못난 사람의 글이라 하여 버리지 말고 특별히 관용하여 주면 매우 다행이겠다.
명종 22년(1567)정묘 10월16일 진사 이숙량 기(記)
요약하자면 이렇다. ‘1563년 대구지역 제현(諸賢)들이 자발적으로 고을에 서원을 건립키로 뜻을 모았다. 하늘의 도움인지 고을 수령은 물론 고을 민까지 나서서 일사천리로 서원 건립이 이루어졌는데, 1565년 겨울 40여 칸의 규로로 완공이 되었다. 이에 매암 이숙량이 기문을 쓰고, 퇴계 선생이 발문을 썼다.’는 내용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주목을 해보자. 기문에는 5동(棟) 40여 칸의 건물들이 소개되어 있다. 현재 우리는 연경서원의 정확한 옛터조차 확인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반해 기문을 통해 창건 당시 건물의 배치 및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아래는 기문에 소개된 5동의 건물 외에 이후 추가로 건립된 건물들을 기록을 참고하여 요약해본 것이다.
• 인지당(仁智堂): 講堂(3칸).동쪽 1칸 수방재(收放齋), 서쪽 1칸 경타재(警惰齋)
• 보인재(輔仁齋): 동재
• 시습재(時習齋): 서재
• 초현문(招賢門): 正門
• 동몽재(童蒙齋): 초현문 서편 행랑(5칸). 동쪽 2칸 마루는 양정당(養正堂), 서쪽 3칸 방은 유학재(幼學齋)
• 포주(庖廚): 초현문의 동쪽 행랑
• 애련당(愛蓮堂): 위치 불분명. 방형(方形)의 연못과 함께 있었다고 함. 蓮塘
• 류정(柳亭): 위치 불분명. 정자.
• 사당(祠堂): 강당의 북동쪽. 편액명 미확인. 퇴계 이황(主享), 한강 정구·우복 정경세(配享)
• 향현사(鄕賢祠): 別廟. 사당의 북동쪽. 계동 전경창·매암 이숙량(竝享).
• 관서루(觀逝樓): 서원의 남쪽 개울 가.
• 육수청(育秀廳): 미확인. 대암 최동집의 연경서원 「인지당 중건 상량기」 소개.
1565년 대구에서 최초로 창건된 연경서원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다. 1602년 태암 이주와 모당 손처눌에 의해 다시 중건. 이후 사당과 향현사를 비롯한 여러 부속건물들이 들어서고, 1659년 사액서원이 되면서 명실상부한 대구지역 유학의 거점으로 발전한다. 1871년 고종의 서원훼철령을 피하지 못한 연경서원은 지금 그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잠시 서당의 형태로도 운영되었다고 하는데 어찌된 일인지 연경동 부로(父老)들도 그 구지를 알지 못한다. 아래 사진은 화암 정상에서 굽어본 「서원연경마을」 전경이다. ‘아~ 어디에 있었나? 연경서원이여!’
[서변동] 서계서원(西溪書院)
오늘 답사의 마지막 일정인 무태 서변동의 서계서원이다. 대구의 유림이라면 서계서원하면 반사적으로 태암(苔巖) 이주(李輈)라는 인물이 떠올라야 한다. 대구 유학의 계보를 논할 때 태암 선생을 빼놓고는 도저히 논의가 불가하다. 앞서 우리는 연경서원 구지를 둘러보았다. 임란으로 소실된 연경서원을 1602년 다시 재건한 중심인물이 바로 태암 이주 선생이다. 역시 임란으로 소실되었던 대구향교를 교동에서 달성공원 남각(南角)으로 옮겨 중건한 이 역시 태암 선생이었다. 서계서원은 바로 이 태암 선생과 선생의 8대조 되는 공도공(恭度公) 오천(烏川) 이문화(李文和) 선생을 제향하는 공간이다. 서원 경내에는 환성정(喚惺亭)이라는 유서 깊은 정자도 있다. 먼저 「서계서원」 daum카페에 등재되어 있는 서원의 연혁을 참고해보자.
서계서원 연혁
대구광역시 북구 서변동에 소재하는 서계서원은 1781년 신축 정조 5년에 유림의 공의(公議)로서 창건된 서원이다.
조선조 태종조 때의 명신이요. 이 예조판서(吏 禮曹判書) 예문관 대제학(藝文館 大提學) 의정부(議政府) 참찬(參贊)을 역임하시고, 증 영의정 시 공도(贈 領議政 諡 恭度) 오천 이문화 선생(烏川 李文和 先生·1358-1404)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 상현존덕(象賢尊德)하기 위하여 봉안천향(奉安薦享)하는 곳이다.
그 후 본도 사림에서 다시 공론을 모아 추가 배향할 석학을 천거하였는데, 선조 초에 이미 대곡정사(大谷精舍)를 지어 강학의 장소로 삼고 1582년에 금호강 위 창포리에 환성정을 지어 유학진흥에 이바지한 당대의 거유이며, 또한 임란 때는 의거로써 백의단충(白衣丹忠)을 나타낸 영남대유(嶺南大儒)이신 선생의 후손 태암 이주 공을 추가 배향하게 되었으니 즉 1801년이다.
창건 이후 매년 춘추 전향(奠享)과 강례수학(講禮修學)을 계속 이어 오다가, 고종 8년(신미년·1871)에 국령에 의하여 훼철되었다.
창건 당시의 규모를 살펴보면, 원호(院號)를 문간공(文簡公) 고동(古東) 이익회 판서가 짓고, 산목헌(山木軒) 김의순 판서가 원호를 쓰고, 호동(壺洞) 유언수 참판이 사실(史實)을 서술하고 인촌(仁村) 우재악 참봉이 봉안문과 상향축문을 찬하고, 연안(延安) 김횡 성산(星山) 목사가 기문(記文)하다.
경내 건물로는, 삼간(三間)의 사우(祠宇)와, 신문(神門), 동재, 서재, 협문(夾門), 삼간의 강학당(講學堂), 일간(一間)의 서고(書庫), 삼간(三間)의 대문, 주사(廚舍) 등이 있었고, 사우에는 오천 이문화와 태암 이주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고, 동재는 금수랑(琴水廊)이라 하였는데, 여기에는 서원내의 여러 가지 행사와 유림의 회합, 학문의 토론장소 등으로 사용하였으며, 문헌(文獻)과 가보(家寶)를 보관하고 있었고, 서재(西齋)는 희리당(希理堂)이라 하여 유생의 강학하는 곳으로 사용하였으며, 창포리에 있던 환성정을 서재로 옮겨왔다. 서고는 부용장(芙蓉帳)이라 하여 유생들의 휴식소 겸 숙소로 사용하였으며, 주사는 향사 때 제수를 마련하여 전사청에 두었다고 한다.
본원이 훼철된 후 120년이 경과하여, 사림의 염원과 본손의 지성으로 본원 복원을 도모하여, 1990년 기공, 1991년 준공, 1992년 위패를 봉안하여 매년 음 9월 9일에 향사하게 되었다.
요약하자면, ‘서계서원은 1781년(정조 5) 유림의 공의로 창건된 서원으로 오천 이문화 선생의 제향소이다. 그 뒤 1801년 오천 선생의 8세손인 태암 이주선생을 추가 배향하였다. 1871년 고종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91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재로 사용되는 환성정은 본래 태암 선생이 금호강가에 지은 정자였는데, 현재는 서계서원 내에 옮겨져 있다.’는 내용이다.
서계서원기(西溪書院記)
영남의 어진 이를 숭배하는 풍습이 다른 도보다 가장 높아서 옛적 위대한 분과 큰 선비의 업적이 찬양되고 도덕이 빛나서 풍화에 도움이 있고 유교에 법이 되는 분이면 후학이 존모하는 도리로 모두 서원을 세우고 제향을 올리며 향화(香火)를 받들어 추모하였으니 대체로 그 빛나는 예속(禮俗)을 환하게 가히 서술할 만하다.
달구의 북쪽 금호의 위에 서계서원이 있으니, 이것은 즉 오천선생을 봉안한 곳이다. 그리고 여기에 또 오천선생의 팔세손인 육휴당선생(六休堂先生·태암 선생의 別號)을 배향하였다.
오천선생은 고려 말기에 출생하였으니, 그 자품이 원래 뛰어나고 학식이 풍부하였다. 젊어서 율정(栗亭) 윤 선생을 따라 배웠고 그 때에 이목은(李牧隱)과 정포은(鄭圃隱)이 도의(道義)의 벗을 삼았다. 그것은 의성(義城) 문소루(聞韶樓)에서 정포은의 시를 화답한 것과, 이목은(李牧隱)이 단산(丹山)에서 자설(字說)을 지어주신 권면한 것을 보면, 그 실천의 바름과 수립의 높은 것을 가히 생각할 수 있다.
오천선생은 이태조(李太祖) 잠저(潛邸) 때의 지구(知舊)로서 받들어 추대함을 부지런히 하고, 특별한 대우를 받아서 국초의 명신이 되었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대제학으로 있었으며, 영남에 관찰사와 안찰사로 가서 세상의 가르침을 붙들어 유지하였으며, 유도의 교화를 크게 빛내어서 한 도의 의관을 갖춘 선비들이 지금까지 그 덕택을 칭송한다.
그리고 육휴당 선생은 산림에서 글을 읽으매, 이치를 궁구하는 공부에 전념하여 조예가 정밀하였으며, 이퇴계에게 학문의 연원을 이어 받고, 정한강(鄭寒岡) 장여헌(張旅軒)과 더불어 강마해서 한 세상의 유종이 되었다.
선조 때에 이르러 특별히 부르시는 명령을 받았으나, ‘학업이 부족하다’하면서 사양하였다. 그 후 임진년 왜적의 난에 어버이를 받들고 팔공산으로 들어갔으며, 이어 서낙재(徐樂齋) 손모당(孫慕堂) 제현(諸賢)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적을 이기어 회복하는 데에 큰 공이 있었다.
그 후로 드디어 산림에 자취를 감추고 도를 강론하여 후학을 권장함으로써 자기의 책임(을 삼았으며, 금호의 위에 정자를 세우고 ‘환성정(喚惺亭)’이라 부르고, 일봉(日峯) 아래에 서재를 지어 육휴(六休)라는 현판을 달았고, 또 화암(畵巖)에 서당을 세웠으니 그곳은 즉 이선생(退溪 李先生)이 머무시던 곳이요. 또 본향의 연경서원(硏經書院)이라. 아아! 유림에서 길이 찬송하리로다.
조(祖)와 손(孫)이 한 사당에 함께 계시어, 그 유풍과 남은 운치가 백세를 지나도록 추모하리니, 옛날 유서간(劉西澗) 부자의 사당만이 아름다움이 아닐 것이다.
그 강산의 아름다움과 풍물의 풍부함과 새와 고기의 날고 뛰는 것과 구름과 연기의 퍼지고 걷히는 것은 다 자세히 기록하지 못하나, 이 서원에 올라서 동쪽을 바라보면 마을이 가득 차 있고 꽃나무가 둘러있으니, 그 후손이 대대로 사는 고장이다. 지금 후학과 자손들이 여기에서 공부하고 여기에서 놀고 있으니, 아아 아름답다!
나도 역시 오천선생의 외손으로서 마침 성산(星山)에 있다가 제생(諸生)들의 청함으로 사양하지 못하여 서원의 첫 머리에 욕되게 하노니 첨배(瞻拜)하오매 느낌이 있으므로 그 실적(實蹟)을 가리어 모아서 이에 쓰노라.
병오[1846] 4월 상완(上浣)[상순]에 연안(延安) 후학 김횡(金鑅)은 삼가 기문을 씀.
태암선생문집의 「행장과 「행록」에는 태암선생과 관련된 대표적인 일화 두 가지가 공통적으로 실려 있다. 하나는 계동 전경창 선생과 관련된 이야기인데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태암 선생이 향시의 생원·진사에 모두 합격하고 동당시(東堂試)에서 장원을 하였다. 회시(會試)에 나가 강경(講經)을 보는 날, 대학에 이르러 갑자기 의심스러운 곳이 있어 외우기를 멈추었다. 당시에 같은 마을(현재의 대구 파동)에 살던 지평(持平) 전경창 선생이 공무(公務)로 장막 밖에 있다가 이 모습을 보고 자신의 가죽신을 긁어서 글자를 써 보여주었다. 이에 태암 선생은 돌아보지도 않고 곧장 일어나 과장을 나갔다. 뒤에 계동 선생이 내방하자 태암 선생이 말하기를 “공은 간관(諫官)으로서 하나의 ‘사자(私字)’를 털어버리지 못하니, 어떻게 조정에 서서 직언할 수 있습니까?”하니 계동 선생이 용모를 고치고 사과하였다.
또 다른 일화는 임란 전 왜승(倭僧)과 관련된 일화인데 한번 살펴보자.
임란 발발 6년 전인 1586년. 태암이 대곡정사에 있었을 때, 한 이상한 중이 와서 절하고 시를 구했다. 그런데 그 중의 외모가 매우 엄숙하여 좌중의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두려워했다. 그 때 태암이 강건한 기개로 말하기를 “너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너를 아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는가?” 하고, 일본의 정세를 되물었다. 드디어 중은 당황하면서 그 자리를 떠났다. 태암이 좌중을 둘러보고 말하기를 “저 중은 반드시 왜승이다. 우리나라의 허실을 정탐하는 자이다.” 하면서 당시 국방에 소홀한 국내 정세를 한탄했다고 한다.
환성정(喚惺亭)
태암선생문집의 행장에는 무인년(1578) 봄에 태암 선생이 망일봉 남쪽에 집을 짓고 편액을 ‘육휴당’으로 했다는 내용과 함께 금호강가에 임하여 정자를 짓고 편액을 ‘환성정’이라고 명명했다는 내용이 있다. 문집에는 태암 선생이 직접 찬한 「환성정기」가 있는데 중간부분은 생략하고 그 첫머리와 말미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환성정이라고 편액한 까닭이 잘 나타나 있다.
옛적에 서암사의 승려가 매일 스스로 묻기를, “주인옹이 깨어 있는가?” 하고, 이어서 답하기를 “깨어 있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곧 옛사람이 항상 마음을 깨우는 법이다. ...중략... 이것이 내 정자를 지은 까닭인데, 날마다 아름다운 빈객, 좋은 벗, 마을의 젊은이, 산중의 아이들과 함께 여기에서 쉬고 여기에서 강론하여, 달아난 마음을 구하여 몸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일로 삼고, 문 위에 편액을 달기를 ‘환성정’이라고 하였다.
이는 곧 성리학에서 말하는 「경(敬) 공부」를 이르는 것이다. 도동서원의 ‘환주문(喚主門)’, 남명 선생의 ‘성성자(惺惺子)’와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우리 일행은 이 곳 환성정에서 강경(講經)을 할 예정이다. 성독회 회원님들의 「夙興夜寐箴」, 대학생부원들의 「歸去來辭」, 최영기 선생님의 「太極圖說」, 조익목 선생님의 「書傳序文」 등 이다.
서계서원 답사를 마무리하면서 인천이씨 문중의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을 소개하고자 한다. 인천이씨는 고려초 평장사(平章事) 소성백(邵城伯) 휘 허겸(許謙)을 시조로 한다. ‘이씨가 허씨를 시조로 모신다?’ 뭔가 사연이 있을 듯한데 태암선생문집 에 실린 해당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인천이씨의 선대는 본래 가락국왕 김수로이다. 수로왕의 둘째 아들은 왕후의 성 허씨를 따르게 된다. 그 후에 신라의 아찬벼슬에 있었던 허기(許奇)가 ‘안록산의 난’ 때 당 현종을 호종한 공로로 황제의 성인 이씨(李氏)를 하사받고 소성백(현재의 인천)에 봉해진다. 이후 6대를 내려와 고려 때 허겸이 인천 이씨의 시조가 된다.
사진자료: 사무차장 한정호
자료정리: 사무국장 송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