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상, 고 무아의 진정한 의미를 알자 >
우리는 불교를 한문권을 통해서 받아들였다. 그래서 불교에 관한 용어는 대부분 한문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런 과정에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세 가지 궁극의 진리인,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를 이해함에 있어서도 어려서부터 매운 한문의 뜻 그대로 해석해서 받아들인다. 그러다 보니 무아를 “내가 없는 것” “마음을 비우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무상에 대해서도 그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하고 주위에서 얻어들은 겉핥기식 관념과 지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래서 흔히 무상을 “허무한 것” “덧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우리는 무상을 염세적인 의미로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 빨리(pāli)어로 무상을 의미하는 아니짜(anicca)는 ‘모든 것은 변한다, 영원하지 않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이 세상 모든 것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만 있을 뿐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없다. 태어났으면 죽고, 영원히 갈 것 같던 슬픔도 세월이 지나고 나면 잊혀 진다. 또한 뛸 듯이 기뻤던 일도 좀 지나면 어느새 시들해지기 마련이다. 빛이나 내 마음이 한 순간의 파장에 불과하다는 무아의 개념도 다른 의미에서 보면 영원한 것이 아니라 매 순간 변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렇듯이 이 세상 모든 것은 주기(週期)만 다를 뿐 진동하며 변하는데, 우리는 변하지 않는 행복과 즐거움이 있는 줄 알고 그것을 추구하는 데에서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이것을 무지라고 하는데 이는 무상과 무아를 경험과 지혜로 알지 못한 까닭이다.
스승이 항상 드는 예로서, 낙엽이 떨어지는 것,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것을 보고 무상을 느낀다고 말할 때는 관념으로 이해한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나”라는 것이 개입되어 있다. 나의 슬픔, 나의 허무한 마음이라는 자아가 앞서기 때문에 좌절하고 허무주의에 빠질 수가 있는데 스승들은 이때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돌아오라고 한다. 자신의 호흡의 일어남, 꺼짐을 알아차리거나 슬픔 때문에 미어지는 뻐근한 가슴의 느낌을 분리해서 지켜보아야 한다. 그러면 거기에 나라는 자아는 없고 오직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만 있다. 무상은 이렇게 지혜로 알아야 한다. 실재하는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생멸하는 현상을 통해서 아는 것이라야 담담한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다.
태어났으면 죽어야 하고 세월이 가면 늙어가는 자신의 얼굴에서 우리는 두려움을 느낀다. 그래서 괴롭다[苦]. 우리의 괴로움은 두려움에서 시작한다. 부처님은 몸과 마음을 가지고 있는 한 괴로울 수밖에 없다고 하셨다. 태어남이 괴로움이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이 괴로움이며, 싫어하는 사람과 같이 살아야 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뜻을 이루지 못해도 괴롭고, 뜻을 이루어도 이것을 지키지 못해 괴롭다.
이는 우리들의 속성이 불만족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항상 더 좋은 것을 추구한다. 방 한 칸만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던 마음이 막상 이루고 나면 더 큰 집을 원한다. 그렇게 바라던 일등을 하면 오히려 그때부터 괴로움이 시작된다. 그 자리를 놓치기 싫은 두려움 때문이다. 그래서 성자들의 눈으로는 즐거움도 괴로움일 뿐이다. 그런데 이 괴로움도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무상의 원리로 보자면 괴로움도 결국은 사라지게 되어 있다.
그래서 빨리어로 괴로움[苦]이라는 의미의 둑카(dukkha)는 ‘불만족, 하찮은 것, 별볼일 없는 것”이라는 또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견디기 힘든 괴로움이라도 결국은 끝이 있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부처님은 이 괴로움의 원인이 바로 ‘바라는 마음’인 갈애 때문이라고 하셨다. 바라는 마음이 없으면 괴로울 것도 없다. 알아차림이 있으면 이 괴로움도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사라진다는 것을 체험으로 알 수 있다. 언젠가 나는 어떤 일이 성사되지 않아서 고심하던 끝에 포기한 순간 지나친 욕망이 화근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그렇게 마음이 편해진 적이 있었다. 이렇게 괴로움은 원래 무상한 것이고, 당초부터 바라지 않았으면 불러들이지도 않았을 괴로움이기 때문에 하찮은 것이고 별 볼일 없다는 것이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갈애가 문제다. 그래서 12연기에서는 갈애를 괴로움의 근본원인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빨리어 원음으로 보는 무상, 고, 무아의 의미는, “변하는 것, 불만족,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혹은 “영원하지 않은 것, 하찮은 것,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도 말한다. 이렇게 한문을 통해 본 무상, 고, 무아와 빨리어를 참조한 사실상의 의미는 사뭇 다른데, 부처님의 수행을 따르고자 한다면 그 핵심 사상인 세 가지 법에 대한 바른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지혜는 이해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끊는 것으로 완성된다”고 말한다.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없다는 것, 원래 괴로움은 있는 것, 나라고 하는 주체는 없는 것이라고 지혜로 받아들이면 더 이상 의지할 것이 못 된다는 것을 알고 집착을 끊게 된다. 이것이 윤회를 벗어나는 길이다.
첫댓글 ()()()
감사합니다.
옮겨 나누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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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영원하지 않은 것, 불만족,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도 말한다.
“지혜는 이해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끊는 것으로 완성된다”고 말한다.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없다는 것,
원래 괴로움은 있는 것,
나라고 하는 주체는 없는 것이라고
지혜로 받아들이면 더 이상 의지할 것 이 못 된다는 것을 알고 집착을 끊게 된다. 이것이 윤회를 벗어나는 길이다.
~~~나모붓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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