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두 번 주말 연이어 비가 와 즐겨가는 산행에 차질이 있었다. 엊그제 국회의원선거일에도 비가 흩뿌려 도서관에 박혀있었다. 다가올 두 번 주말에도 시골 가서 고추모종을 심어야하고 초등학교 동창회 행사로 묶여있는 시간이다. 사월 들어 토요휴무일이 낀 둘째 주말, 전방에 군복무중인 큰 녀석으로부터 면회 다녀가라는 제의는 오월로 넘겼다. 이맘때 나 홀로 떠나는 산나물 채집도 마음 접었다.
그러고는 가락문학회 상반기 문학기행에 나났다. 다달이 있는 공부방 연수회에 꼬박꼬박 나가지 못해 송구했다. 춘추 두 번 있는 문학기행도 더러 빠졌다. 행사를 앞두고 집행부에서 참석여부 문자가 왔더랬다. 문자 보낼 줄 모르는 죄로 사무국장하고 직접통화를 나누게 되었다. 차마 못 간다는 핑계를 찾지 못해 참여하겠노라는 답을 보냈다. 토요일 아침 일곱 시 반에 창원시청 앞으로 나갔다.
전세버스는 마산과 함안 회원들을 차례로 태웠다. 문산 지날 때 벚꽃이 지고 있는 차창밖에 하얀 배꽃이 피어 있었다. 칠순 넘은 최고령 회원이 진주에서 합류했다. 회원들은 삼십대부터 분포한 연령대와 직업도 경찰과 전업주부 등 다양했다. 가락문학에서 회원 스물일곱 명이 소록도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공교롭게도 어느 일간지 ‘현대시 백 년, 시인 백 명이 추천한 애송시 백 편’에 한하운의 시가 나온 아침이었다.
고속도로를 달린 버스는 섬진강 건너 순천에서 국도로 내려섰다. 벌교를 지날 즈음 겨우내 시들었던 묵은 갈대밭이 보였다. 곧 새순이 비집고 올라오지 싶었다. 봄비 머금은 남녘 논밭엔 푸름이 점점 짙어가고 있었다. 보리는 이삭을 내밀고 마늘은 뿌리가 굵어갈 때였다. 고흥반도 접어들어 미리 연락이 닿아 군청에서 파견 나온 문화해설사가 동승했다. 새내기라 안내가 서툴다며 수줍어해도 남도가락에 귀가 즐거웠다.
문화해설사의 안내로 고흥만방조제 근처로 갔다. 회원들은 널따란 노란 유채꽃밭을 배경으로 단체사진을 남겼다. 방조제를 건너 녹동으로 향했다. 완공 앞둔 소록도 연륙교는 접속도로 공사를 남겨두고 있었다. 녹동에서 빤히 보이는 소록도까지는 도선으로 잠시 사이 건넜다. 배에 내리자 한센 병 주민자치회장이 국회의원 되었다는 축하 플랜카드가 걸려있었다. 그는 어느 당 전국구 2번으로 배정받은 인물이었다.
문화해설사의 길잡이로 두 시간 남짓 소록도를 둘러보았다.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자 십자가가 보이고 이어 일본 신사가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마지막 남은 신사는 역사 기념물로 되살려 보존하고 있었다. 몇 개 더 있는 성당과 교회와 원불교당으로 보와 신앙이 이곳 사람들에겐 큰 힘이 되었지 싶었다. 1984년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여기까지 직접 찾아 천형의 병으로 고통 받은 이들을 위로해주었다.
소록도는 한센 병자 주거지와 국립병원 직원 주거지로 나누어져있었다. 한 때는 한센 병자들이 6,000명에 이른 적도 있다고 했다. 지금은 대부분 치료된 음성 환자 600명 정도 있고 병원 관계자 200여명이라고 했다. 몸이 불편한 한 주민이 전동휠체어를 타고 지나갔다. 지금은 폐원 된 미감아 보육소가 있었다. 한센 병에 감염된 부모들과 격리되어 수용된 자녀들이 있던 생활관과 학교는 허물어져가고 있었다.
우체국이 있었는데 예전엔 외부와 유일한 소통 창구라 했다. 뭍의 가족들과 일 년에 단 한 차례 면회가 허용 되어 수용자들은 평소는 편지로 강제 격리의 아픔을 달랬다고 했다. 우체국에서는 수거한 편지를 철저히 소독해 수신인에게 보내졌다고 한다. 바닷가 솔숲에 탄식의 장소라는 ‘수탄장(愁嘆場)’이 있었다. 한 달에 한 번 바람을 등진 미감아가 한센 병자 부모와 줄지어 마주서서 눈물의 상봉을 했단다.
우리는 병원 본동 건물을 지나 중앙공원으로 향했다. 일본식 조경수들이 무성한 숲을 이루었다. 해방 전 한센 병자들이 강제 노역으로 조성된 공원이었다. 감염아가 다닌 소록초등학교는 오래 전 문을 닿아 넓은 운동장엔 잡초만 무성했다. 마침 대빗자루를 든 손가락 마디가 없고 코가 문드러진 노인의 안내로 모양이 단아한 후박나무 한 그루를 구경했다. 대만에서 시집은 나무로 나이가 90년 가량 된다고 했다.
일행은 문학기행에서 가장 의미가 큰 한하운의 시비 앞에 섰다. 나는 그의 시비를 보고 놀랐다. 아하, 시비를 이렇게 세워도 되는구나. 아니, 눕혀놓아도 되는구나 싶었다. 커다란 자연석을 땅에다 묻어 놓고 하늘 향한 면을 평편하게 깎아 ‘보리피리’를 음각해두었다. 마침 현장학습 나온 유치원생들이 시비에 올라가 떠듬떠듬 보리피리를 읊조리고 있었다. 이 시비는 한센 병자들이 먼 곳으로부터 옮겨온 바위라고 했다.
역사전시관에서 한센 병자들의 한과 아픔이 서린 살림살이와 기록사진을 감상했다. 악명 높은 일인 병원장을 살해한 한센 병자가 사형을 선고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도 했다. 해방 직후 자치권확보 투쟁으로 안타깝게도 팔십여 명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지금은 은퇴해 대전에 사는 조창원 전 병원장은 인근 간석지를 매립해 농토로 확보하려다 좌절했다. 이청준의 그린 ‘당신들의 천국’ 실제 모델이 그다.
우리는 코끝이 찡한 곳으로 갔다. 서대문형무소 벽돌집이 연상되는 감금실(監禁室)이었다. 수용소 규칙을 어기면 강제 구금해두는 구치소였다. 이곳에 오면 죽어서 나가든지 살아나가든지 반드시 검시실(檢屍室)을 거쳤다고 한다. 죽어나가면 검시대에서 해부 당했고 살아나가도 그 곁의 단종대(斷種臺) 틀에 손발이 묶인 채로 거세 당해야했다. 나는 버스에서 어느 회원이 나누어준 상록상수리 씨앗을 검시실 울타리에 심어두었다.
도선을 타려고 되돌아 나오면서 왜 섬 이름이 작음 사슴일까 궁금했다. 이곳에 풀어놓은 사슴이 백여 마리 된다고 들었다. 흰 사슴도 있다고 했다. 두어 시간 둘러본 내 눈엔 한마리도 띄질 않았다. 물론 낮에는 인적 뜸한 숲속에 숨어 있을 것이다. 우리가 더 가까이 가서 만나보지 못한 한센 병자들이 사슴처럼 착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은 공평하다고 한다. 육신이 불편한 이들에겐 천사 같이 맑은 영혼을 주었다.
소록도에는 무덤이 한 개도 없었다. 한센 병자들은 세 번 죽는다고 했다. 자연사로 한 번 죽고, 시신을 해부당해 한 번 더 죽고, 마지막으로 화장터에서 한 줌 재로 죽는다고 했다. 그렇지만 대단한 무덤이 있었다. 거기에서 다시 위대한 탄생이 있었다. 한하운의 누워 있는 시비가 그 현장이었다. 누워 있기에 얼마나 행복한 시비인가. 낮에는 아이들이 올라타 간질이고 밤에는 쏟아지는 별빛을 그대로 받을 수 있지 않은가.
닥쳐온 시련 앞에 의연해지기란 쉽지 않다. 한하운은 시련을 창작으로 승화시킨 거룩한 성자였다. 뭍으로 나와 팔영산 능가사에 잠시 들렀다. 대웅전 뜰 커다란 동백나무 아래 붉은 꽃이 뚝뚝 떨어져 있었다. 소록도에서 문드러져갔을 한센 병자들의 살점처럼 보였다. 석양을 뒤로하고 돌아오는 길가 조팝나무 꽃이 하얗게 피어나고 있었다. 소록도의 순수한 영혼은 하늘에선 별이 되고 땅에선 꽃이 되었다. 아름다운지고.
첫댓글 섬의 형상이 작은 사슴과 비슷하여 소록도(사슴 섬)라고 한답니다. 흰 사슴 뛰노는 풍경을 보았더라면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올 수 있었을 텐데 아쉽네요.
그랬습니다. 소록도의 붉은 살점들이 능가사 동백 아래 누워 있었습니다.
잘 다녀오셨습니다. 소록도는 여정님 말씀같이 작은 사슴섬이라 합니다. 공중에서 본 형상이 안내판에 그려져있는데 작은 사슴모양이랍니다. 물론 보는사람에 따라 다를 수도 있겠지요. 그리고 한하운 시비있는 기념탑 자리가 바로 4대원장 수호병원장 동상이 있던 자리입니다. 역대 병원장 중에서 가장 악명높던 자로 자신의 동상을 새우고 환우들에게 참배를 하도록 강요했고 140만장의 벽돌을 찍어 어제 보신 감옥 등 각종 건물을 짓게했습니다. 1942년 이춘상으로 부터 살해를 당했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소록도가 이제야 제 머리 속에 정리되는 듯하군요. 앞으로도 계속 좋은 글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소록도를 잘 이해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