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대제학 장공(응일) 묘갈명。
(贈 資憲大夫吏曹判書兼大提學張公(應一)墓碣銘)
[생졸년] 1599년(선조 32)~1676년(숙종 2) / 壽 77歲
이가환(李家煥) 찬(撰)
옛날 나의 종조부(從祖父)이신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3) 선생께서 청천당(聽天堂) 장공(張公)의 행장(行狀)을 차례로 엮어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으셨는데, 그 내용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지금, 공의 가문에서 다시 묘 앞의 갈명(碣銘)을 나 가환(家煥)에게 부탁하였다.
나는 어리석고 보잘것없으나, 성호(星湖) 선생의 재종손(再從孫,4촌형제의 손자)으로서 보고 들은 바가 익숙할 것이라 여겨 맡기신 것이니, 의리상 감히 사양할 수 없었다. 유학(儒學)의 도가 이미 여기에 있으니 내가 어찌 감히 덧붙이겠는가. 우선 성호 선생의 글을 바탕으로 공의 삶을 서술한다.
공의 휘(諱,이름)는 응일(應一), 자(字)는 경숙(經叔)이며 인동(仁同) 사람이다. 청천(聽天)은 그의 호이다. 멀리 고려의 삼중대광(三重大匡) 금용(金用)을 시조로 하며, 13대조 중양(仲陽)은 함흥(咸興)에서 태조 이성계(李成桂,1335~1408)와 포의지교(布衣之交)를 맺었던 분이다.
부친은 문강공(文康公) 장현광(張顯光,1554~1637) 선생이니 곧 여헌(旅軒) 선생이다. 공(公)은 원래 현도(顯道)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7세 때 숙부인 여헌 선생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당시 여헌 선생은 유학의 종주(宗主)로서 문하(文下)에 배우는 자가 가득했는데, 공은 그 사이에서 매일 학문이 진보하였고, 가르침을 받을 때는 반드시 무릎을 꿇고 경청한 뒤 물러나 실행에 옮겼다.
인조 7년(1629) 문과에 급제하였고, 여헌 선생이 돌아가신 뒤 복제(服制)를 마치고 전적(典籍), 정언(正言), 지평(持平) 등을 역임했다.
나주(羅州) 사람이 목사(牧使) 이경생(李更生,1585∼1646)을 살해한 사건을 조사할 때, 아버지가 아들을 증언하는 기막힌 상황을 보고 "천하의 부자관계가 이래서야 되겠는가"라며 아들을 풀어주니 조정에서 그 명철(明哲)함을 칭송했다.
인조(仁祖)에게 올린 직언(直言) 상소에서 "전하께서 잘못을 알면서도 행하시는 것은 불인(不仁)한 것이요, 남이 알까 봐 숨기는 것은 허물을 꾸미는 것(文過)이며, 간언(諫言)을 두려워하는 것은 고집(固執)을 피우는 것(愎諫)입니다"라고 극언(極言)하였다.
소현세자(昭顯世子, 인조의 장남) 빈(姜嬪) 사건: 인조가 크게 노하여 대신들을 내쫓고 궁궐을 지키게 할 때, 모두가 두려워 떨었으나 공은 홀로 9일 동안이나 성덕(聖德)에 누를 끼칠까 우려하며 격렬하게 쟁론(爭論)하다 파직(罷職)되어 귀향했다. 이때 공의 명망(名望)이 크게 떨쳐 길거리 아이들이 앞장서서 노래하며 공경(恭敬)을 표했다.
효종(孝宗,조선 제17대 국왕) 재위기에는 사간(司諫), 대사성(大司成) 등을 지냈으나 권세가들의 비위를 거슬러 삼척 부사(三陟府使)와 금산 군수(錦山郡守)로 나갔다가 이후 12년 동안 야인(野人)으로 지냈다. 현종(顯宗) 시대의 상소: 영릉(寧陵,효종의 능)에 문제가 생겼을 때, "임금이 선왕을 장사 지냄에 정성이 부족해서야 되겠습니까"라고 상소했다가 조정의 논란을 사서 황간(黃澗)으로 유배되었다.
숙종(肅宗,조선 제19대 국왕) 시대의 예우: 숙종이 즉위하자 특명으로 풀려나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당시 허목(許穆) 선생이 공의 청렴한 이름과 곧은 절개를 높이 평가하여 상신하니, 숙종이 가선대부로 승차시키고 특별히 불렀다. 공은 감격하여 병든 몸을 이끌고 입궐하려 했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고, 숙종 2년(1676) 11월 임강(臨江) 별업에서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공은 네 임금을 섬기며 늘 바른 낯빛으로 직언하였다. 그가 임금의 허물을 지적할 때는 대등한 상대라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였고, 시국에 금기시되는 일을 건드릴 때는 용맹한 장수라도 주저할 법한 기개가 있었다. 이는 모두 집안에서의 가르침(旅軒, 선생의 교육)에서 비롯된 것이니, 부자간이면서 동시에 스승과 제자의 도리가 있었다.
경전에서 이르기를 "효도는 어버이를 섬기는 데서 시작하여 임금을 섬기는 것을 거쳐 입신양명하는 것으로 끝난다" 하였으니 공이 바로 그러한 삶을 살았다.
명(銘)하기를,
군자의 가르침은 그 자식에게 사사롭지 않으니
사사롭지 않아도 결국 그 선함을 닮는구나.
충직한 임금의 신하됨은 내가 물려받은 바 있으니
그것이 무엇인가, 요순을 임금으로 만드는 것이라네.
임금의 잘못을 면전에서 꾸짖으니 늙은 선비도 하기 어려운 일.
아! 전대의 왕들(열성조)은 귀에 거슬리는 말을 구하여 도를 찾았으니,
국론이 무너지는 위기 속에서도 공은 꺾이지 않았네.
말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베풂이 다하지 못했을 뿐이니,
모든 관원들이여, 이 기록을 홀(笏)에 새겨 잊지 말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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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이가환 錦帶詩文抄[下]
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成均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行嘉善大夫行弘文館副提學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張公墓碣銘。
昔我從祖星湖先生。撰次聽天堂張公事行。銘之神道。而無愧色。今距撰次之歲若干年。公家又以公墓前之碣。命家煥。家煥愚陋無所取。豈以其爲先生晜弟之孫。意其聞見習。而義不敢辭也邪。然斯文在斯。家煥何敢復有所云。卽姑就先生之文而述之曰。公諱應一。字經叔。仁同人。聽天。其自號也。遠祖高麗三重大匡金用。十三世。有諱仲陽。隨父任咸興。與我 太祖爲布衣交。及太祖御極。降手札以左尹召。不起。又四傳有諱俊。贈左承旨。是生贈吏曹參判諱繼曾。是生贈吏曹判書諱烈。是生左參贊贈領議政諡文康諱顯光。卽旅軒先生也。公本生考諱顯道。文康公從晜弟也。娶星山李氏。富春女。以穆陵己亥月日生公。七歲。文康公取以爲子。時文康公爲世儒宗。鼓篋者盈門。公周旋其間。日有進益。有誨必跪而聽。聽訖。又起拜。時省速行。長陵己巳。登文科。丁所後妣冶壚宋氏憂。壬申。分隷承文院。將入京。文康公送以忠義恭約四字。丁丑。丁文康公憂。服闋。陞典籍。尋入臺。歷正言持平。乙酉。羅州人戕其牧使李更生。公承按覈之命。囚有父子相證者。公曰。若然。天下之爲父子者。果何如也。請釋其子。朝廷稱其明愼。是歲冬。以弼善。疏陳闕失。其略曰。舊歲窮矣。新春迫矣。流年之感。非假於外。迷塗之轍。尙可及回。凡起瞻聆之感。招覆止之禍者。殿下無不身踐悔吝之作。豈不自知。今殿下不知。不明也。知而爲之。不仁也。諱不欲人知。文過也。畏人之敢言。愎諫也。殿下家事。殿下不爲。誰復任之。明年。昭顯嬪姜氏事作。上震怒。倂黜大臣及三司官。令衛士守闕。以備非常。人皆惴恐。不敢復言。公以獻納。獨啓謂變在宮闈。處之未盡。恐累聖德。爭之凡九日。嚴旨累降。言愈激切。坐罷而歸。於是。直聲大振。有堂堂之謠。街童爲之唱導前路。拜伏致敬。己丑。仁祖禮陟。奔哭入京。除掌令。論勳臣金自點貪汚縱恣狀。聞者縮頸。庚寅。拜司諫兼弼善。以災異應旨陳疏。請定聖志。以立根本。明是非。以別賢邪。廓乾斷。無所猶豫。且極言朋黨。不恤國家之將亡。不知君父之可畏。三司迭斥。遞職還鄕。辛卯。以經學。選拜玉堂。尋除輔德。因王世子嘉禮。例陞通政。壬辰。拜成均館大司成。懇辭不許。諭以家庭之訓。作成多士。癸巳。忤用事者。出爲三陟府使。至庚子。又出爲金山郡守。自是家食者一紀。及崇陵癸丑。聞寧陵有變。上疏極言曰。陵寢有釁隙之變。其築土不密。人謀不臧邪。宅兆不利。神道不寧邪。監董諸官。奉審大臣。俱被罪譴。遷陵之敎。斷自聖衷。此國家之福也。旣又因旱審理。幷皆宥免。殿下之待大臣則盡矣。於其事先王之道。何如也。恐不足以感天心而致雨也。匹夫掩其親。猶思自盡。以千乘之君。葬先王而反有不及乎。願親臨新舊兩陵。以盡必誠必信之孝焉。疏入。朝議譁然。請遠竄。上諒其無它。只配中途黃澗縣。至明陵元年乙卯春正。特命放還。
夏拜右承旨。時邦禮旣正。黨人猶拾。餘論投疏。謂宗統自有所歸。公因辭職上疏。痛斥相臣。許文正公穆白上以某淸名直節。負士林望。宜加優禮。乃特陞嘉善。拜弘文館行副提學。有命特召。辭旨益勤。公感泣。欲力疾造朝而未果。丙辰。復除副提學。遷大司成。冬十一月日。考終于仁同府臨江之別業。春秋七十有八。葬于星州牧元峴山負壬之原。公歷事四朝。正色直言。其旨陳袞闕。則有敵以下。所不能堪者。其奮觸時諱。則有賁育所趑趄者。至今讀公之書。有以見非公不能言。非列聖不能容。君臣之際。可謂盛矣。而原原本本。直養而至。充塞兩間者。實由家塾之敎。蓋父子而有師弟之道焉。經曰。夫孝始於事親。中於事君。終於立身。公實有之矣。後筵臣師錫。以名節宜褒。 特贈吏曹判書。兼帶如例。配冶壚宋氏。正郞光鼎女。媲德如鴻光。與公同年生。先公十七年卒。葬于府西勿疑洞負丑原。擧男三人。長𨥭正郞。次鍵持平。次鈺縣監。正郞有六男三女。男長萬紀郡守。次萬重。次萬最。次萬容出後。次萬益府使。次萬成參奉。女長適安重鉉。次適參奉洪相文。次適贈判書李震柱。持平有三男。長萬元。次萬善。次萬春。縣令。縣監取兄子萬容爲後。有五女。長適洗馬洪相民。次適金汝鈵。次適許銑。次適柳聖泰。次適柳後經。銘曰。
君子之敎。不私其子。雖則不私。其究穀似。蹇蹇王臣。吾有所受。伊何。堯舜厥后。面斥過差。難於庶老於戲前王逆耳求道國論橫潰機牙嶽嶽不挫不激。徐折其角。匪言不能。而施未卒。凡百有位。無替書笏。<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