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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스크랩 퇴계 17대 종손 이치억씨가 말하는 ‘21세기 종손으로 산다는 것’ / 宗孫의 괴로움
이장희 추천 0 조회 132 14.04.30 20:1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같은 조상 유전자 받았는데 종손만 희생해야 되나요”

퇴계 17대 종손 이치억씨가 말하는 ‘21세기 종손으로 산다는 것’

안동=권석천 기자 sckwon@joongang.co.kr | 제79호 | 20080912 입력

 

경북 안동시 도산면. 도산서원을 지나 3분쯤 달렸을까. 솟을대문이 서 있는 한옥이 나타났다. 퇴계종택(退溪宗宅). 퇴계 이황 선생의 종손들이 대대로 살아온 한국의 대표적 명문종가이자 영남 유림의 구심체다. “경상감사보다 퇴계 종손 자리가 낫다”는 말이 있었을 정도다. 잠시 후 지프 한 대가 기자 앞에 섰다. 반팔에 반바지 차림의 젊은이가 차에서 내린다. 퇴계의 17대 종손 이치억(33)씨. 돌이 갓 지난 아들을 안고 부인 이주현(32)씨와 함께 고개를 숙인다.

치억씨는 성균관대에서 박사과정(유교 철학 전공)을 마치고 현재 학위 논문을 준비 중이다. 그가 결혼과 함께 7년간의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퇴계종택으로 내려온 것은 지난해 4월이었다.

그의 안내로 종택 안으로 들어섰다. ‘ㅁ’자로 된 본채 툇마루에서 마당을 내다보던 이씨의 할아버지 동은(15대 종손)씨가 손자 부부와 증손자를 반긴다. “아야, 할배 알겠나~” 올해 100세를 맞았다. 귀가 어둡고 거동도 불편하지만 정신은 또렷하다.

치억씨는 본채 옆 작은 대문을 넘어 아버지 근필(77·16대 종손)씨가 있는 ‘추월한수정’으로 간다. 치억씨가 인사를 올리자 근필씨가 “서울 처가 분들은 잘 계시나” 하고 묻는다. 그런데 왠지 못마땅한 표정이다. “교수님이 뭐라고 안 하시드나.” “예?” “니 패션숀가, 뭔가 나갔다고….”

 

치억씨가 지난 6일 서울 운현궁에서 ‘안동 전통한복 패션쇼’에 부인과 함께 모델로 등장한 것을 두고 하는 얘기다. 치억씨가 “안동시청에서 나와 달라는 걸 어떻게 합니까” 하고 되묻는다. 말 주고받는 태가 여느 부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

종손 무게에 방황했던 시간들
생활 한복으로 갈아입은 치억씨와 추월한수정의 널찍한 재실(齋室)에서 마주 앉았다. 치억씨는 최근 “종손치고 가출 한번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말해 주목을 받았다. ‘종갓집 제사, 어떻게 지속될 것인가’ 심포지엄에서였다.

-종손으로 산다는 게 힘든 일이지요.
“힘들다기보다는 답답하고 갑갑했습니다. 양반 가문과 뿌리 없는 집안을 나누는 계급의식에 남존여비, 상명하복…시대는 변했는데, 숨막히는 고리타분함, 그 한가운데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게 감당하기 어려웠어요.”
그는 1남3녀 중 독자였다. 한 해에 최소 12차례씩 치러야 하는 제사에 쉴 새 없이 찾아오는 손님들. 사춘기 소년의 눈에 비친 ‘봉제사 접빈객(奉祭祀 接賓客)’은 이해할 수 없는 굴레로 다가왔다. 제사가 끝나면 할머니는 며칠씩 몸져눕곤 했다.

-종손으로서의 압박감이 컸을 텐데.
“1000원짜리 지폐에 나오는 그 분의 종손이구나…하루에도 수십 번씩 ‘종손’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중·고교 다닐 때 선생님들도 ‘종손이 그러면 되느냐’고 하셨고요. 동네 분들 눈을 의식해야 했지요. 항상 가면을 쓰고 사는 느낌이었습니다.”

-실제 가출을 해본 적은.
“없습니다. 제가 아는 종손 가운데 가출을 해본 분도 계세요. 저는 소심한 성격이라…그래도 고등학교 때 술도 마시고, 또래 친구들이 하는 것은 다 해봤어요.”
그는 고교 졸업 후 일본 도쿄로 유학길에 올라 대학 4년을 보냈다. 전공은 지역사회였지만 영화 동아리 활동에 몰두했다.

-일본에서 어떻게 생활했나요.
“무한도전 보시나요?”

-예? MBC ‘무한도전’이오?
“예. 무한도전에 나오는 것은 다 해봤어요. 머리에 염색 물도 들이고, 길거리에서 자기도 했어요. 탈출구로 유학을 택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마음껏 자유를 누려봤습니다.”

“어차피 할 종손, 적극적으로 하자”
하지만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유교 철학으로 방향을 틀었다. 벗어날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 것일까.

“숙명이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런 분위기에 젖어 살아서 그럴 수도 있고…어느 순간 편해지더군요. ‘어차피 할 종손, 적극적으로 하자’는 생각에 유교의 정신을 파고들어 보기로 한 것이지요.”

그는 “그렇다고 불합리한 인습과 화해한 것은 아니다”고 말한다.
“종손은 장가 가기 힘들다, 이런 말이 더 이상 안 나와야 합니다. 종손이 사는 집이 아니라 문중 모두의 집이어야 합니다.”

-문중 모두의 집이라면.
“퇴계 후손이 수천 명이에요. 같은 조상에게서 같은 유전자를 받았는데, 왜 누군가만 희생을 강요당해야 하는 것이지요? 종손만의 일로 맡길 게 아니라,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해요. 종손과 지손(支孫)이 그런 점에 생각을 같이한다면 발전적인 대화가 가능해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래도 봉제사 접빈객은 종가의 기본 아닌가요.
“형식보다는 조상님을 살아계신 듯 모시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봉제사 접빈객은 2차적인 것이지요. 의무감에 억지로 지내는 제사를 조상님이 기쁘게 받아줄 리 없어요. 피하고 싶은 제사가 아니라 참여하고 싶은 제사가 돼야 합니다.”

치억씨는 “앞으로 제사를 간소화하는 등 시대에 맞는 예(禮)를 다시 창조해야 한다”며 “제사를 지내는 구성원들의 합의가 있다면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제사상에 떡 대신 케이크나 과자를 올리는가 하면, ‘너희들 좋아하는 것으로 제
사상을 차리라’는 고인의 유언에 따라 피자나 탕수육을 올리는 집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앞으로 퇴계 종가의 제사를 어떻게 바꿔나갈 계획이냐”고 묻자 “아직 어른들께 배울 것도 많고, 연구도 해봐야 한다”고 답한다. 아무래도 문중에서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곳에서 계속 살 생각인가요.
“저도 먹고살아야 하니까, 밥그릇을 주겠다는 곳이 있으면 그곳으로 가야겠지요. 하지만 유학에 군대, 대학원까지 13년을 나가 살았지만, 한번도 그곳이 집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내 집은 여기고, 언제든 돌아올 곳이에요.”
헌법상 보장된 ‘거주 이전의 자유’ 없이 살았던 할아버지-아버지 세대와 다른 점이다. 할아버지 동은씨는 평생 직업이 ‘종손’이었다. 경북대 사범대를 나온 아버지 근필씨는 집을 떠나지 않기 위해 이 지역 근무를 자원했다. 인근 온혜초등학교 교장을 끝으로 정년 퇴직할 때까지.

아버지, 그리고 아내는
근필씨에게 종손으로서의 삶을 새롭게 개척해가겠다는 아들의 생각에 대해 물었다.
“나야 당연한 것으로 알고 살았다 아닙니까. 안 그러면 스트레스 받아서 하루도 못살아요. 하지만 이제는 세상 따라 살아야 안 합니까.”

안채에 들어가 부인 이주현씨를 만났다. 곱게 자란 인상이었다. 서울내기로 미국 보스턴대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그는 7년 전 치억씨가 학원 강사 아르바이트를 할 때 만났다. 결혼 전 시할머니와 시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터라 나이 어린 종부 역할을 하고 있다.

-결혼할 때 고민되지는 않았나요.
“많이 부담됐지요. 지금도 부담돼요.”

-친정에서 반대하지 않았는지요.
“반대하진 않으셨지만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주현씨는 “한옥 생활이 불편하긴 하지만, 증조부와 할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게 아이에게 좋은 것 같다”고 말한다. 치억씨는 기자를 대문 밖으로 배웅하며 한마디를 던졌다.

“알면 못 오는 곳인데, 여기가 어떤 곳인지 모르고 온 것이지요. (아내가) 안쓰럽고 미안해요.”

 

 

 

[이순구의 역사 칼럼] 宗孫의 괴로움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 제78호 | 20080907 입력

 

추석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제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더불어 제사 지내는 사람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이른바 종손(宗孫)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노상추(1746~1829)는 종손 종옥(宗玉)과 끝내 불화했다. 종옥은 형님의 손자로서 집안의 종손이었다.

“이번 정월에 종옥이 아프다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몇 년 전 7, 8월 제사에도 전염병이 돌아 깨끗하지 않다며 제사를 안 지내려고 하기에 내가 임박해 서둘러 지낸 적이 있다. 또 지난겨울 묘사(墓祀)도 흉년을 핑계로 지내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정월에 또 제사를 안 지내니 5대조 제사도 안 돌아보는데, 뭘 더 바라겠는가.”

제사에 소홀한 종손에 대한 비난이다. 이 일이 있고 나서 얼마 후 종옥은 또 제사답을 팔았다. 만세불역지전(萬世不易之田), 즉 대대로 절대 팔아서는 안 되는 제사답을 그만 팔아 버린 것이다. 노상추는 천하에 몹쓸 종손이라고 생각했다. 종옥은 왜 이런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일까.

종옥의 할아버지, 즉 노상추의 형님은 일찍 죽었다. 부인과 아들 하나를 남겨 두고. 형수는 당시 26세였다. 청상이나 다름없었다. 이 형수는 매사에 의욕을 보이지 않았다. 친정 나들이[覲行]만이 유일한 낙이었다. 그러니 어린 아들과 종부만 있는 종손 집은 썰렁할 수밖에 없었다.

노상추는 후에 이 종손 집이 늘 자기네 집을 헐뜯었다고 말한다. 『예기(禮記)』에서는 종손과 지손(支孫)을 하늘과 땅 차이로 구분했다. 지손은 종손보다 귀하고 부유해졌더라도 절대 부유한 티를 낼 수 없다. 가령 지손은 좋은 수레가 있어도 종손 집에 들어가려면 수레를 멀리 두고 단출하게 걸어 들어가야 했다. 종손의 권위를 한껏 높여준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는 종손의 권위가 그만큼 침해될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잘된 지손들에 의해 말이다. 노상추의 집은 그야말로 잘됐다. 노상추가 무과에 급제해 고위직에 올랐고, 또 그 아들도 급제해 수령을 지냈다.

종옥이라고 왜 과거에 뜻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위에서 보듯이 종손에게 일차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제사 지내기다. 과거에 집중할 시간이 별로 없다. 노상추는 과거에 급제하기까지 10년이 걸렸다. 그 10년 공부에 가산이 탕진되다시피 했다고 말했다. 그만큼 집중력이 요구된다는 얘기다. 제사의 주체인 종손들에게 과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조선 후기 제사 지내기는 가문 유지의 기본이었다. 집안 사람들은 그 가문을 배경으로 관직에 나가 활동할 수 있다. 그러나 역시 기본은 관직 생활만큼 화려하지 않다. 부러움을 사지도 않는다. 반면 종옥은 잘나가는 노상추 집이 부러웠을 것이다. 그러면서 종손 역할에는 싫증이 났을지도 모른다. 두 집은 갈등 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이제 종옥의 행동이 일면 이해되기도 한다. 화려함 없이 기본을 묵묵히 수행해야 하는 종손 역할은 때로 싫증이 날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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