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발자취] <24> 3·1 민주구국선언(명동 선언)
김대중 서명에 노발대발 박정희 "모두 잡아넣어라"
新舊 기독교·재야 손잡고 "反유신" 성명
당국에선 "미운털 제거" 긴급조치 올가미
“3ㆍ1절 57돌을 맞으면서…, 이 나라는 1인 독재 아래 인권은 유린되고 자유는 박탈 당하고 있다…. 우리는 이 나라의 먼 앞날을 내다보면서 민주구국선언을 선포하는 바이다.”
1976년 9월 9일 미 워싱턴D.C. 백악관 앞에서 재미 목사와 교수 등 18명이 구속자들을 대신해 죄수복을 만들어 입고 ‘유신 반대, 구속자 석방’ 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제공 이해동 전 한빛교회 목사
1976년 저녁 명동성당에서 열린 ‘3ㆍ1절 기념 미사 및 기도회’에서 성명서가 발표됐다. 서명자는 10명이었다. 함석헌 윤보선 정일형 김대중 윤반웅 안병무 이문영 서남동 문동환 이우정.
내용의 요지는 ‘▦이 나라는 민주주의의 기반 위에 서야 한다 ▦경제입국의 구상과 자세가 근본적으로 재검토 돼아 한다 ▦민족통일은 오늘 이 겨레가 짊어져야 할 지상의 과업이다’로 간추려져 있었다. 미사와 기도회는 조용히 끝났다.
열흘 뒤인 10일 오후 서울지검은 ‘일부 재야 인사들의 정부 전복 선동 사건’을 발표하면서 가담자 20명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입건했다고 밝혔다.
서명자 10명 외에 선언문 제작에 관여한 문익환 이해동 목사, 이태영씨, 함세웅 문정현 신현봉 김승훈 장덕필 김택암 안충석 신부가 공모자로 추가됐다.
‘3ㆍ1 민주구국선언 사건’(당국은 ‘명동 사건’이라 불렀음)이었다. 남산 부활절 연합예배 사건(73년)이나 민청학련 사건(74년)과 마찬가지로 ‘유인물을 증거로 반(反)유신 세력을 일망타진하는 수법’의 전형이었다.
이들 중 윤보선 함석헌 정일형은 70세 이상의 고령으로, 이태영 이우정은 여자라는 이유로, 김승훈 장덕필 신부는 직접 가담자가 아니어서 불구속(7명) 하고 11명을 구속 기소했다. 18명 모두가 성직자(목사 6, 신부 5명)거나 신ㆍ구 기독교 신도들이었다.
이 사건은 신ㆍ구교 내의 반유신 세력과 김대중씨 주변의 재야ㆍ정치세력을 뿌리뽑기 위해 기획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이후 기독교계 전체가 반유신 연합전선을 갖도록 정비해주고, 김대중씨를 이 세력의 구심점으로 부각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1977년 3월 22일 ‘3ㆍ1 민주구국 선언’ 사건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이우정 안병무 함석헌 이해동(맨 앞 왼쪽부터)씨 등 불구속 피고인들이 서울 정동 성공회 대성당에서 기도회를 마치고 함게 법정으로 걸어가고 있다. /사진제공 이해동 전 한빛교회 목사
당국의 발표도 제목만 ‘명동 사건’이지 피의자 가운데는 원주 원동성당의 신ㆍ구교 연합기도회(1월 23일)와 천주교 전주기도회(2월 16일), 갈릴리교회와 목요기도회(한빛교회)의 주요 책임자가 모두 끼워져 있었다.
이해동(李海東ㆍ68ㆍ당시 한빛교회 담임목사ㆍ현 덕성학원 이사장)씨의 설명.
“문익환 목사의 제자(한국신학대)로 심부름하고 타이핑도 하고 유인물을 만들었다. 사건의 출발과 산실은 갈릴리교회와 목요기도회였다. 유신으로 해직된 기독교계 교수ㆍ언론인들이 문 목사를 중심으로 갈릴리교회를 만들었다.
75년 8월 17일 명동 대성빌딩에서 첫 예배를 가졌으나 이후 건물주가 임대를 거절, 미아리 한빛교회로 장소를 옮겼다. 70년 문 목사가 세운 한빛교회는 당시 내가 뒤를 이어 담임목사를 맡고 있었는데 주일 오전에는 한빛교회, 오후에는 갈릴릴교회가 되었다.
갈릴리교회는 이해영 당회장 아래 문익환 문동환 서남동 안병무 이문영 이우정 등 6명의 지인들이 교대로 설교를 했다. 갈릴리교회는 이들 6명의 강사로 인하여 ‘민중신학’의 산실로 이름이 높았다. 이들이 ‘민주구국 선언’의 주모자들이다.
74년 민청학련ㆍ인혁당재건위 사건이 터진 뒤 8월부터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매주 목요일마다 기도회를 가졌다. ‘목요기도회’는 매달 명동성당에서 천주교인권위원회가 주도한 ‘인권미사’와 함께 시국 종교집회의 양대 축이었다.
신ㆍ구 기독교계는 서로 상대방의 모임에 참석하면서 구속자 유가족을 중심으로 공감대를 넓혔다. ‘3ㆍ1 선언’ 서명자인 윤반웅 목사(신흥교회)는 목요기도회에서 ‘박정희와 그 일당을 제거해 달라’는 기도를 했다가 경찰에 잡혀가 정작 명동집회에는 참석하지도 못했다.”
성명서 낭독이 국가전복 음모로 비화한 데는 김대중(일본서 납치, 73년 8월 13일 귀국)씨의 서명 참여도 중요한 요인이 됐다. 이해동씨와 이우정(李愚貞ㆍ전 국회의원ㆍ2002년 사망)씨의 설명과 증언은 다음과 같다.
76년 2월 김대중씨는 독자적으로 ‘3ㆍ1절 선언’을 준비하고 있었다. 김씨는 정일형 의원을 찾아가 취지를 설명하고 동참을 요청했다. 부인 이태영씨는 문익환 목사의 심부름을 온 이우정씨에게 ‘민주구국선언’에 동참키로 약속한 상황이었다.
자연스럽게 김대중-정일형-이태영-이우정-문익환 형태의 연결고리가 형성됐다. 이우정씨의 회고. ‘중부경찰서로 연행돼 밤샘 조사를 받았다. 다음날 아침 각서나 한 장 써놓고 가라고 했다.
담당 형사와 함께 밖에서 느긋하게 아침을 먹고 경찰서로 돌아오니 분위기가 확 바뀌어 있었다. 곧바로 정보부로 넘겨졌다. 나중에 안 일인데, 3ㆍ1절에는 으레 교회나 성당에서 성명서 같은게 나오는 만큼 대충 넘기라는 지시가 새벽에 내려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2일 아침 국무회의에서 김대중씨가 서명한 것을 안 박 대통령이 노발대발해 모두 잡아넣고 엄히 다스리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구속된 11명은 모두 12월 29일 결심공판에서 징역5년까지 유죄를 선고 받았다. 이해동 안병무(76.12.29ㆍ집행유예) 윤반웅 신현봉(77.7.17) 함세웅(77.12.25) 문익환 문동환 서남동 이문영 문정현(77.12.31)은 형집행정지로 석방됐다.
김대중씨는 77년 12월 18일 마지막 석방 기회(77.12.31)를 앞두고 본인과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진주교도소에서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져 ‘강제 치료’를 받다가 78년 12월 27일 박 대통령의 9대 취임식을 기해 풀려났다.
정병진 편집위원 bjjung@hk.co.kr
입력시간 : 2003/10/30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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