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완구(趙琬九)라는 이름은 낯설다.
김구, 이동녕, 안창호처럼 교과서에 굵직하게 박힌 이름도 아니고, 윤봉길이나 이봉창처럼 극적인 장면으로 기억되는 이름도 아니다. 그런데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부터 1945년 광복까지 27년 동안, 임시정부를 단 하루도 떠나지 않은 사람을 꼽으라면 그는 손에 꼽히는 인물 중 하나다.
호는 우천(藕泉), 연꽃 뿌리가 맑은 물에 잠겨 있듯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1881년 음력 3월 20일, 그는 서울 계동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풍양 조씨 명문가였다. 증조부 조병현은 병조·이조·예조 판서와 대제학을 지냈고, 조부 조봉하는 이조판서였다. 아버지 조동필도 이조참판을 역임했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익히고 성장한 그는 1902년 한성법학전수학교를 마친 뒤 내부 주사로 관직에 들어섰다. 이후 육품승훈랑, 내부주사에 임명되었고, 증보문헌비고 교정으로도 일했다.
그 관직 생활은 3년을 넘기지 못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분개해 스스로 관복을 벗었다. 당시 그의 나이 스물 다섯이었다.
관직을 버리게 한 계기는 하나가 아니었다.
그 첫 번째는 상관이었던 민영환의 죽음이었다. 민영환은 왕실과 가까운 인물로 18세에 문과에 급제해 형조판서와 예조판서를 지냈고, 29세에 병조판서에 올라 군권을 쥔 실권자였다.
두 차례 미국과 유럽을 다녀오며 근대적 구국관을 정립하기도 했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 그는 대한문 앞에 엎드려 무효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고,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자 1905년 11월 30일 순국했다. 당시 내부주사였던 조완구는 그 곁에서 지켜보았다. 훗날 그는 민영환에게 "일본 헌병에게 잡혀갈 각오로 상소를 올리셨습니까"라고 묻자 그가 빙그레 웃으며 퇴궐했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그 웃음을 평생 부끄러운 기억으로 간직했다.
두 번째 계기는 처남 홍범식의 순국이었다.
금산군수였던 홍범식은 조완구의 부인 홍정식의 오빠였다.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이 공식화되자, 그는 "내어찌 고을 군수로 나라가 망하는 포고를 군민에게 알릴 수 있겠느냐"는 유서를 남기고 벽에 '國破君亡 不死何爲'(나라가 무너지고 임금이 망하는데 죽지 않으면 무엇을 하랴)라는 여덟 글자를 써놓은 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시 그의 나이 마흔이었다. 현재 충남 금산군 남산에 홍범식의 순국기념비가 남아 있다.
두 사람의 죽음은 조완구에게 방향을 정해줬다.
관직 미련이 남았을 리 없었다.
세 번째 계기는 대종교였다.
1909년 음력 1월 15일, 홍암 나철(羅喆)이 서울 재동에서 단군교를 중광했다. 중광(重光)이란 새로 만든다는 뜻이 아니었다. 이미 있던 것을 다시 밝힌다는 의미였다. 고려 원종 때 몽고 침입 이후 약 700년간 끊어진 단군신앙을 이어받아 다시 세상에 드러낸다는 선언이었다. 나철은 1908년 도쿄에서 두일백(杜一白)이라는 인물로부터 단군교포명서를 받은 것을 계기로 귀국 후 제천의식을 거행하고 교단을 열었다. 1910년 8월에는 교명을 대종교(大倧敎)로 바꾸었다.
'大倧'의 倧(종)은 상고(上古)의 신인(神人), 즉 단군을 뜻하는 고어였다.
나철이 대종교를 중광한 이유는 순수한 종교적 동기에서만이 아니었다. 그는 을사오적 암살을 시도하다 유배를 당한 항일투사였고, 4차례 일본에 건너가 외교항쟁을 벌였으나 모두 실패했다. 그 과정에서 그와 동지들은 개인의 투쟁으로는 나라를 구할 수 없다는 판단에 이르렀다. 민족의식 자체를 민족종교로 일깨워야 한다고 본 것이었다. 그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대종교는 창시 1년 만에 교인 수가 2만 명에 달했고, 1915년 일제가 조선총독부령 제83호 종교통제안을 공포해 대종교를 강제 해산하기 전까지 국내외에서 빠르게 확산되었다.
조완구는 중광 직후인 1909년 입교했다.
1910년에는 대종교 시교사(施敎師)와 규칙기초위원으로 임명되었고, 1911년에는 참교(參敎)와 지교(知敎)직을 받았다. 1914년에는 부교(副敎)로 승임했다.
대종교의 국내 활동은 일제의 탄압으로 오래가지 못했다. 총본사는 1910년부터 이미 만주 이동을 준비하다가 1914년 백두산 북쪽 청파호 인근으로 완전히 이전했다. 조완구도 그해 가족을 본국에 남겨두고 홀로 북간도로 향했다. 노모와 아내, 자녀들을 두고 떠난 것이었다.
대종교가 만주에 뿌리를 내리면서 독립운동의 구조가 달라졌다.
종교 교단은 곧 독립운동 네트워크였다. 총본사를 중심으로 동도본사, 서도본사, 북도본사, 남도본사의 4도본사 체제를 갖추었고, 이 구조는 사실상 만주 전역의 독립운동 거점망이기도 했다.
김교헌(무원종사)이 2대 교주로 취임한 이후에는 비밀결사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했다. 중광단은 1919년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발전했다. 백포 서일(徐一)이 총재를 맡고, 김좌진이 사령관으로 지휘한 북로군정서는 1920년 10월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대규모 전투를 치러 큰 전과를 거뒀다. 이 전투에 참여한 독립군의 다수가 대종교 신자였다는 것은 이후 연구들이 공통적으로 확인하는 사실이다.
그 와중에 대종교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문서 하나를 세상에 내놓았다. 1918년 음력 11월, 만주 노령(露領) 지역의 독립운동가 39명이 서명한 무오독립선언서(戊午獨立宣言書)가 발표됐다. 이 선언서는 한일합방의 무효를 선포하고, 일제 10년간의 식민통치를 규탄하며, 무장투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할 것을 호소했다.
조완구는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이동녕, 조성환 등과 함께 상해로 향했다. 같은 해 4월 10일, 상해 프랑스조계 김신부로에서 29명의 대표가 모여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결정했다. 이튿날인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29명 중 21명이 대종교 인사였다는 사실은 이 종교 공동체가 단순한 신앙 집단이 아니라 독립운동의 조직적 모태였음을 보여준다.
조완구는 이후 임시정부 국무원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교통국 설치, 연통제 운영, 독립신문 발행 등 초기 임시정부의 행정 기반을 세우는 데 적극 관여했다.
임시정부 내에서 그의 이력은 길다.
내무차장에서 시작해 내무장, 재무총장, 내무부장을 거쳐 1944년 좌우연합정부가 출범했을 때는 재무부장을 맡았다. 1930년대 민족혁명당 창당을 계기로 임시정부가 분열되고 사실상 무정부 상태에 빠졌을 때, 그는 김구, 이동녕, 송병조, 차리석 등과 함께 임시정부를 다시 일으켰다. 또한 1943년 임시의정원에서 중국 측이 요구한 한국광복군 행동준승 문제가 논의될 때, "이는 매국행위이며 굶어 죽을 각오를 하고 취소해야 한다"는 강경론을 제시해 결국 1945년 광복군을 임시정부의 국군으로 인정하는 새 협정 체결을 이끌어냈다.
대종교의 이야기는 수난으로 이어진다.
1925년 일제는 만주군벌 장작림을 압박해 삼시협약을 체결했다. 만주 내 한국인 독립운동을 단속하는 조약이었고, 그 부대조항은 대종교를 직접 겨냥한 것이었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제의 만주 점령이 현실화되면서 대종교의 활동 공간은 더욱 좁아졌다. 그리고 1942년, 일제는 오랫동안 준비해온 임오교변(壬午敎變)을 조작했다. 3대 교주 윤세복을 비롯한 대종교 간부 21명이 일시에 검거되었다. 그 결과 안희제 등 10명이 순국했고, 윤세복을 포함한 7명은 무기징역에 처해져 해방 후에야 출옥했다.
1945년 8월, 소련군의 참전으로 일제가 무너지면서 윤세복 등이 석방되고 대종교는 만주에서 총본사를 재건했다. 그러나 소련군이 만주 일대를 장악하면서 포교 활동은 불가능해졌다. 1946년 1월, 대종교는 서울로의 환국을 결정했다. 같은 해 3월 서울 중구 정동에 총본사가 자리를 잡았다. 조완구는 광복 후 교리 강의와 종경연구회 활동, 중흥회 발기 등으로 대종교 재건에 직접 참여했다.
해방 이후의 삶은 또 다른 싸움이었다. 친일 세력이 해방된 조국에 버젓이 살아남아 있었고, 임시정부의 정통성은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조완구는 1948년 김구 주석과 함께 남북협상에 참여했고, 1949년 김구 피살 후에는 한국독립당 위원장을 맡았다. 그러나 한국독립당은 더 이상 정치적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그는 납북되었고, 1954년 10월 27일 "통일을 못보고 가는 게 한이다"는 말을 남기고 북한 용성의 중앙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향년 74세였다. 정부는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그의 삶에서 대종교는 단순한 종교가 아니었다. 나라를 잃은 시대에 민족의 정체성을 뿌리 내릴 수 있는 사상적 토대였고, 흩어진 사람들을 묶는 조직이었으며, 국내에서 활동하기 어려운 독립운동가들을 받아들이는 망명지였다. 조완구는 그 안에서 간부이자 교사이자 현장 독립운동가였다.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한 29명 가운데 27년을 끝까지 버틴 사람이 얼마나 됐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분열하고, 타협하고, 때로는 돌아선 사람들 사이에서 조완구는 그 자리를 지켰다. "나 27년 해보았습니다"라는 그의 말 한마디는 연설이나 선언이 아니었다. 긴 세월의 무게가 그냥 흘러나온 한 문장이었다.
"우리는 과거에 영광스럽게 남의 위에서 살았소. 그때는 우리가 단조(檀祖, 단군 한배검)를 잊지 아니한 때요. 근년의 우리는 욕(辱)스럽게 부끄럽게 살았소. 이때는 우리가 단조(檀祖, 단군 한배검)를 잊은 때외다. 우리것을 찾아야 하겠소. 예전 것 찾지도 못하고 새것에 말살(抹殺)되는 것이 많소. 제것도 제가 세우지 못하면 남의 것도 얻어오지 못할 것이오." [-조완구 어록, 대한민국 2년(1920) 5월 6일 독립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