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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전개
당면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1787∼8년에 왕은 귀족과 성직자로 이루어진 친왕파의 인물 145명으로서 '명사회'를 소집한다. 이 명사회의 주도 인물은 Turgot, Necker, Calonne등인데 이들은 은행가들로써 재정 파탄을 막기 위한 시도의 일환으로 평등 과세 등의 조세 개혁안을 제출하나 실패한다. 그리고, 고등 법원을 중심으로 왕정에 대한 비판의 분위기가 생기고 이것은 삼부회의 소집 요구로 이어진다. 이 삼부회 소집 요구는 앞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태 즉, 프랑스 혁명의 시발점으로서 의의를 지니는데 이것을 귀족 혁명 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때의 삼부회 개최 요구는 귀족들이 왕에 대항해서 왕권을 축소시키고 과거에 자신들이 누렸던 영광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1789년에 삼부회가 개최되면서 이 삼부회의 조직 구성은 Necker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특권 신분 보다 평민 신분의 의원 수가 더 많은 특징을 지닌다. 즉, 제 1신분인 승려가 285명, 제 2신분인 귀족이 308명으로 구성되어 총 593명의 특권 신분이 있는데 비해 1214명의 총 의원들 중 621명의 제 3신분 즉, 평민으로 구성되었다. 그래서 신분간에 표결 방법에 대한 대립이 일어나게 된다. 즉, 과거의 삼부회는 3 신분이 각기 다른 장소에서 모여 각 부별로 의결하고 그 결과로 전체 의사를 결정하였으나 이제 숫자가 많아진 평민들은 전부 한 자리에 모여서 동등한 투표권으로서 사안을 결정짓자는 두수제(頭數制)를 주장하였고 이에 반대한 귀족들은 종래의 부별제(部別制)를 고수 할 것을 주장하게 된다. 이처럼 표결 방법의 문제로 1 2 신분과 3신분이 대립하는 과정 속에서 제 3 신분이 정치의 주역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3신분의 등장은 당시 Abbè Sieyès가 발간한 팜플렛에서 "지금까지는 아무것도 아니었으나 이제부터는 모든 것이다."라고 표현한 것에서 잘 나타난다.
삼부회 내에서의 타협이 점점 불가능해지자 제 3신분의 의원들은 Mirabeau와 Bailly를 중심으로 일부 불만을 가진 귀족과 승려도 참여한 가운데 그들만의 의회를 구성하는데 이것이 '국민 의회'이다. 이러한 평민 의원들의 행동에 대해 왕이 탄압의 기미를 보이자 이들은 귀족과 국왕의 탄압에 대해 끝까지 해산하지 않을 것을 맹세하는 '테니스 코트 맹세'를 한다. 그리고, 이 단계의 혁명을 부르조아 혁명이라 할 수 있다. 평민 의원들이 이러한 위기에 봉착하게 되자 파리 시민들은 특히, 상큐롯층을 중심으로 봉기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Demoulins 같은 이는 무장 봉기도 주장하게 되는데 봉기 군중은 그들이 당면한 무기와 식량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 두 가지가 풍부할 것이라 판단되고 또, 많은 계몽사상가들이 정치범으로 갇혀 있다고 알려진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게 된다. 이것이 1789년 7월 14일의 일로서 프랑스 혁명의 본격적인 시작이라 할 수 있는데 바스티유 감옥의 함락은 군중들에게 그들이 바라던 어떤 것도 충족시켜주지 못 했으나 절대주의의 상징인 바스티유가 함락된 것은 절대 왕권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엇다. 그리고, 이 봉기는 도시의 민중인 상큐롯층이 그 주도세력이 됨에 따라서 이 단계의 혁명을 도시 민중 혁명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프랑스 혁명은 위의 여러 단계의 혁명이 혼합되어 발생하였다.
바스티유 감옥의 함락은 전국적인 농민 폭동의 발생으로 이어지는데 농민들은 자치위원회(Commune)와 민병대를 조직하여 영주의 저택을 습격하는 등 과격한 모습을 보여 전국적으로 '대공포(Grande pear)'가 확산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국민 의회는 6월 27일에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기 위한 '제헌 의회'로 개편하고 그 이전인 6월 17일에는 프랑스의 삼색기를 제정하는데 삼색중의 백색은 부르봉 왕가의 상징이고 청 적색은 파리시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8월 4일에 봉건적 특권들을 폐지하는 조치들을 취하게 되고 8월 26일에는 '인권선언'을 채택한다. 봉건 잔재를 타도하기 위해 실시된 봉건적 특권의 폐지 조치는 영주에 대한 부역과 영주 재판권을 폐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봉건 지대는 철폐하지 않아 불철저한 모습을 보였으며 이 봉건 지대의 철폐는 로베스피에르에 이르러 이루어진다.
1789년 8월 26일에 채택된 인권 선언은 '인간과 시민의 권리의 선언'이라는 제목을 가지는데 인류 역사상 인간의 권리를 가장 존엄한 것으로 서술하였다. 이것은 또한 Acièn Regime에 대한 사망 진단서라 할 수 있으며 이 선언을 통해 시민의 권리를 보장하고 자유 평등 박애라는 혁명 이념을 제시한 의의를 지닌다. 이 선언은 영국의 혁명 사상과 미국의 독립 선언 그리고, 계몽 사상가들 특히, 루소의 {민약론}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선언의 제 1조에서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고 하고 사회의 목적은 공동의 행복에 있으며 모든 정치적 결합의 목적은 인간의 천부적 불변의 권리를 유지하는데 있고 그 권리는 자유, 재산, 안전 그리고, 압제에 반항하는 권리라고 명시하였다. 또한 이 선언에서는 모든 주권의 원리는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천명하였고 자유는 타인의 권리에 개입하지 않는 한에서 무엇이나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고 이 자유의 한계는 법으로 규정한다고 밝혔다. 소유권은 신성 불가침의 권리라고 또한 이 선언에서 얘기하고 있는데 이것은 오늘날도 인정되고 있는 것이다.
10월 5일에는 '10월 폭동'이 일어나는데 봉기한 파리 시민들은 베르사이유궁으로 가서 왕 루이 16세를 파리 시내로 데려온다. 그리고, 이 시기에 Jacobin 수도원에서 전체 계층의 사람들이 모인 결사가 이루어지는데 이것이 Jacobin Club의 효시이고 최초로 나타난 정당이라 할 수 있다. 혁명기에 프랑스에 나타났던 정파들은 크게 4개가 있는데 먼저, 초기에 다수를 점유했으며 상층 계급의 친왕당파적 성격을 가진 평원파(Feuillant)가 있고 온건한 지롱드현 출신인사가 주를 이룬 지롱드파(Girond), 혁명을 주도한 자코벵파로서 과격한 혁명 부르조아지로 구성된 산악파(Montagnarl) 그리고, 도시의 숙련 수공업자들로 구성된 상큐롯층이 있었다. 최초는 페이앙파가 정권을 차지했고 다음으로 지롱드파가 권력을 장악하나 이들은 온건적인 성격으로 인래 비판을 받고 곧 물러라게 되고 산악파가 권력을 잡아 상큐롯과 연합하여 귀족에 대항하는 공포 정치를 실행하였다.
1790년에는 '성직자 민사 기본법(Civil Constitution of Clergy)'이 제정되어 성직자에 대한 선출과 임명 그리고, 봉급 지급 등을 국가가 모두 장악하게 되자 교황이 이것에 대해 분개하여 혁명 정부와 대립하게 된다.
1791년에 국민 의회는 봉건 제도에 대해 개편을 시도하는데 종래에 불균형하게 정해진 '주(州, Province)'를 해체하고 전국을 83개의 '현(縣, Departmente)'으로 개편한다. 이러한 정세속에서 6월에 루이 16세는 왕비의 권유에 따라 오스트리아로 도피하여 혁명 세력을 진압할 원조를 요청할 계획을 세우고 변복한 후 오스트리아로 도피하다가 Varenne에서 체포된다. 그래서 루이 16세에 대한 처리 문제가 제기되고 이 문제를 통해 각 정파는 서로 대립하는 모습을 보인다. 즉,보수 반동적인 다수파인 페이앙파는 왕정의 유지를 주장하는데 비해 자코벵파는 왕정의 폐지를 조장한다. 이러한 대립 속에서 페이앙파가 집권을 하게 되자 민중들은 과격한 왕정 폐지 운동을 벌인다. 이러한 민중들의 왕정 폐지와 공화제 청원 운동에 대해 정부는 미국 독립 전쟁에 참가했던 장군 La Fayette의 지휘하에 국민 방위군을 투입하여 Champ-de-Mars 민중 학살으로 민중들의 격앙된 분위기를 억누르려 하나 이 사건으로 민중들은 더욱 과격화하는 양상을 띠었다.
1791년 9월에 최초의 헌법인 '1791년 헌법'이 제정되는제 이 헌법에서는 입헌 군주제를 채택하고 있어 부르조자이와 귀족들이 타협한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 헌법에서는 '재산 선거 자격제'를 규정하였는데 이 제도는 재산을 가진 세금납부자를 능동 시민으로 규정하고 재산이 없이 세금을 납부하지 않는 시민을 수동 시민으로 규정하여 능동 시민에게만 선거권을 주었다. 헌법이 제정된 이후 헌법 제정을 위해 구성되었던 제헌 의회는 해산을 하고 1791년 10월에 '입법 의회'를 구성하였다. 이 의회는 745명의 '초선 의원'으로 구성되었는데 여기서 '초선'이라고 하는 의미는 그 이전의 제헌 의회의 경우는 선거 없이 국민 의회의 의원들 중에서 자격자를 임명한 것이므로 이 입법 의회의 의원들은 능동 시민들의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 선거를 통한 초선 의원이 된다는 의미이다. 이 입법 의회는 왕권과 타협한 부르조아 의회였는데 이에 반대해 과격파인 Murat를 주도자로하여 자치위원회의 확대된 형태라 할 수 있는 '민중 협회'가 등장한다.
1792년이 되면서 프랑스의 혁명적인 정세에 불안을 느낀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에 도전 해 오게 된다. 그러나, 당시의 페이앙파 정부는 외국과의 전쟁에 대해 소극적인 자세를 보임에 따라 이들을 타도하고 지롱드파가 집권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집권과 함께 오스트리아에 선전 포고를 하지만 전쟁에서는 패하게 되어 파리와 전국에서 의용군들이 봉기하였는데 이 때 마르세이유 출산들이 부른 '라 마르세이즈'는 오늘날 프랑스의 국가로 불리워지고 있다.
8월 10일에 민중들에 의한 제 2혁명이 발생하여 왕이 있던 튀르리 궁전을 습격하고 왕은 의회로 피신한다. 이에 의회는 왕정 폐지와 왕권의정지를 선언하는데 이것은 곧 1791년 헌법의 정지를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입법 의회도 해산 된다. 9월 2일에 새로운 의회가 구성되는데 이것을 '국민 공회'라 한다. 이 국민 공회는 최초로 보통 선거에 의해 750명의 의원을 선출하였는데 이들의 대부분은 법률가들이었고 이 선거에서실제로 투표자는 총선거권자의 10%에 불과한 것이었다.
새 의회의 구성과 함께 9월에는 Danton의 주도하에 반혁명파 1200명이 학살되는 9월 학살이 있었고 9월 22일에는 제 1 공화정을 선포하고 이 날을 기점으로 혁명력을 선포하였다.
1793년 1월 21일에 루이 16세가 처형되자 오스트리아 영국 프러시아 러시아 등에 의해 제 1차 반불(反佛)동맹이 결성되고 반혁명 복고적 반란으로 Vendeè농민 반란이 일어난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롱드파가 외국의 위협에 대해 열세를 취하자 이들을 축출하고 산악파 즉, 로베스피에르를 중심으로 하는 자코벵파가 집권하게 되는데 이것으로 부르조아 혁명이 관철 되었다 할 수 있다. 6월 24일에는 인민 주권, 보통 선거, 자유등이 보장 되는 제 1공화정 헌법이 제정되는데 이 헌법의 실시는 내란으로 인한 위기를 구실로하여 그 실시가 유보되었다.
10월 10일에 혁명 정부가 구성되어 다음해 7월까지 존속하게 되는데 이 정부는 비헌법적인 공토정치 시대의 변칙 정부로서 그 중심 기관으로는 12명으로 구성된 '공안위원회'가 있었다. 이 공안위원회는 일종의 공동독재체제라 할 수도 있는데 그들은 민족주의와 애국심, 정의감이 풍부한 인사들로서 지도자는 로베스피에르이고 산악파와 상큐롯을 그 중심세력으로 하였다. 혁명 정부가 이상으로 내세운 것은 도덕 공화국인데 여기서 '도덕'은 루소가 {민약론}에서 말한 원칙을 가리킨다. 그리고, 판사 16명과 배심원 60명으로 구성된 '혁명재판소'를 설치하여 공포 정치를 실시하였는데 이 혁명 재판소애서는 국민 징발과 반혁명분자의 처형 등을 행하여 1년 동안 4만여명이 처형되었다. 또한, 혁명 정부는 물가 최고 가격제를 도입하고 영주권(領主權)을 무조건 폐지하여 프랑스 농민들은 작으나마 최초로 자기 땅을 가진 '분할지 농민'이 되었다. 그러나, 이처럼 과도한 공포 정치에 모든 국민들은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하였고 이 통치에 반대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1794년 7월 27일에 Termidore 쿠테타가 일어나 로베스피에르의 반대파들은 그를 체포하고 그와 관계있는 모든 사람들을 숙청하였으며 자신들의 파가 아닌 사람들은 좌 우를 가리지 않고 모두 숙청하였다.
1795년에는 공토 정치가 종식되고 최초의 입헌 공화국헌법이 제정되는데 쿠테타후에도 국민 공회가 그대로 존재하여 이 시기의 의회를 'Termidor 공회'라 하기도 한다. 새 정부에서는 집권한 부르조아지의 의도에 따라 "새로 구성되는 의회는 반드시 직전 의회 의원의 2/3가 의원으로 참가하여야 한다."는 '2/3법'이 제정되었으며 정부 조직은 내무 외무 군무 사법 재무를 각각 담당하는 5인의 집정관으로 구성된 '도독 정부'의 모습을 보였다. 10월 달에는 왕당파의 반란이 있었는데 이것은 나폴레옹에 의해서 진압 되었다. 그리고, 대외적으로 제 2차 반불 동맹이 결성되어 프랑스를 위협하자 프랑스인들은 자신들을 보호할 수 있는 사람으로 나폴레옹을 생각하게 되고 이것이 나폴레옹이 등장하는 계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