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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하이디와토미 원문보기 글쓴이: 하이디
해질녘
새벽 4시! 아침 밥을 지어 아들의 도시락을 싸놓고, 남편이 깰세라 조용히 현관을 나선다. 코끝에 스치는 5월의 싱그러운 새벽 공기가 발걸음을 가볍게 해 주는것같다. 어두컴컴한 골목길에서 불안한 마음으로 다시 한번 주머니를 더듬어 돈뭉치를 확인한다. 아직도 풍겨오는 담장너머의 라일락의 향기를 맡으며 골목길을 빠져 나온다. 삼화고속 첫차로 동대문 의류 도매시장으로 가서 메모해온 옷가지를 산다. 내 몸보다 더 큰 옷 보따리를 어깨에 메고 다시 인천 계산동 재래시장 나의 가게로 돌아온다. 컵라면 한개를 먹고 칸막이 뒤의 창고로 들어간다 . 시간을 보면 아직 8시30분 전후이다. 창고의 벽에는 몇일전에 붙여놓은 노루지가 있다. 130x162cm크기이다. 바닥에서부터 한 뼘을 띠어서 붙였으니 내키 보다 한자는 높다. 4B연필로 뎃생을 한다. 실제 다 자란 크기의 옥수수 그림을 채색으로 그리기 위한 밑그림이다. 그리 멀지않은 옥수수밭에 이른 아침에 나가 스케치북에 옥수수의 뎃셍을 해다 놓았었다. “학상들 가르치는 미술선상님 인가봐유, 저리 가면 옥수수열매가 달린놈두 있으니께 그리루가봐유" 고맙게도 옥수수 농사짓는 영감님께서 도와주신다. 내키보다 높은 종이 끝자락에 그릴때에는 의자를 놓고 올라가야 눈높이가 맞는 것이다. 간판그리는 사람들이 사다리를 놓고 그리듯이 의자위에서 열심히 여러날 뎃생을 하였다. 몇일후 화방에 주문해 두었던 캔바스가 왔다 나무로 된 문살에 여러겹의 배접을 한 동양채색을 그리는 동양화 캔바스이다. 100호 캔바스를 받은 나는 새하얀 켄바스만 보고도 감격해 하였다. 100호라 함은 132cmx162cm 이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백지캔바스를 처음 대했을 때의 기쁨, 어느정도 진행 되어가는 중도의 아름다움, 또 마무리지어 완성 시켰을 때의 성취감, 이런 여러 가지의 행복감 때문에 예술의 세계에 푹 빠지는 것이다. 여기 저기서 셔터문 열리는 소음이 나기 시작한다. 어쩔수 없이 나도 셔터를 올리고 장사할 채비를 한다. 새로 가져온 옷을 진열하고 밖으로 수백장의 옷을 내놓는다. 거의 한시간반이나 가게문 열기와 청소를 한다. 한숨 돌리고 앉아 있을 때 쯤 아들의 등교를 거들어 주고 남편이 내려온다. 그리도 잘되던 장사가 IMF 이후 신통치 않다. 남편을 앉혀놓고 잠시라도 그림을 그리러 뒤에 들어가면"아줌마는 어디 갔어요? 하고 손님들이 꼭 나를 나오게 만드니 아예 장사 할 동안은 그림에 손을 대지 못한다. 그래서 주로 새벽 장에 가지 않는날 아침 일찍 내려와 작품에 매달리기를 6개월... 새벽6시면 내려와 그림을 그렸으니 6개월동안 아침밥을 남편은 말없이 혼자 차려 먹었다. 붓을 들고 그리는 동안 기억의 저편에 있던 지나간 날들이 주마등 처럼 머리속을 스쳐간다. 나는 어려서 서울에서 태어나 자랐고 7 남매중 막내딸이었다. 친정집은 그 시절로서는 넉넉한 편이었다. 계동에 점포가 3개 방이 9개나있는 디귿자 (ㄷ) 한옥 2층 집이 우리집 이었으니까, 재동초등학교 4학년 시절부터 미술반에 있었고 화가가 되겠다는 꿈은 변한 적이 없었다. 이화여중에 합격하였고 서울 예고 미술과를 수석으로 입학하였었다. 수석입학생에게는 대학교를 마칠때 까지 7년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강의 장학금이 나왔었다. 그러나 학교측에서는 우리집이 무척이나 잘 사는 줄 알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어려운 학생에게 그 장학금을 주게 된 일이 있었다. 그러나 내가 고3 이 되었을 무렵 아버지의 건축업의 고전과 오빠의 사업실패로 나는 미술대학의 꿈을 접어야만 하였다. 미술대학이라는 것이 등록금만 간신히 낸다고 해결 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어머니께서 분양 받아놓으신 세운상가 백화점에 나가 열심히 아동복 장사를 하였다. 그러나 장사가 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집 살림은 밑빠진 독에 물붓기였다. MBC 탤런트가 된 언니와 나 남동생이 집안 살림을 꾸려 나갔다. 그러나 병드신 아버지의 치료비와 염치없이도 어머니를 졸라대어 사업자금을 여러차례 가져가는 오빠 때문에 집안은 점점 기울어만 갔다. 내나이 27살 되던해에 병드신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그 이듬해에 나는 지금의 남편과 결혼을 하였다. 남편은 77년도에 부동산을 하여 큰 돈을 벌게 되었다. 아마도 잠실 주공 아파트 10채값 되는 돈으로 땅투기를 했는데 정부의"토지투기억제정책"으로 5 년 간이나 매매가 안되어 답답한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그나마 5년후 고향 친구 동업자인 스님 에게 백지 위임장을 써주었다. 그 결과 한푼도 받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돈을 없애고 가슴앓이를 하는 남편은 술만 마시고 살았다. 건설회사 임시직도 그만두고 뜬 구름이나 잡으려는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라보교재를 사서 영어동화와 영어 노래, 한문을 가르쳤다. 아이들이 잠이들면 벽에 합판 한장을 기대놓고 수채화를 그렸다. 그때 그린 수채화중 하나가 "그리운 정동골목"이다 아이들은 지금도 그 어린 시절 외운 영어동화를 하나도 안 잊어버리고 있다. 그리고 한문 공부는 내가 붓글씨로 크게 100자씩 써서 단칸방에 있는 미닫이 문에 100자를 써 붙였다. 벽에다가 100자, 미싱앞에 100자, 이렇게 삼백자를 써붙이고 매일 내가 소리 내어 읽었다. 아들이 네살이었었는데 따라읽다가 어느날 갑자기 줄줄 외우게 되었다. 지금도 방안에서 아들이 네 살때 뿅뿅카를 타고 천자문을 달달 외우는 사진을 갖고 있다. 아들이 여섯 살이 되어 차려놓은 상에서 밥을 찾아 먹을수 있을때,나는 단돈 삼 만원을 들고 계산시장 한복판에 나가서 양말 노점상을 시작 하였다. 나무 사과궤짝 한개에 올 려놓는 정도의 분량 이었다. 흰 양말은 곧 잘 팔 렸다. 밑천이 작으니 자주 동대문 도매시장에 나가서 양말을 떼어 왔는데 돈이 벌어지니 너무나도 기운이 났다. 하루에 5000원~10000원 벌이가 되었었다. 이때가 1986년이다. 딸이 9살 이었는데 "엄마 창피하지않아?" 라고 물었다. 나는 "엄마는 하나도 안 창피해 , 아무것두 안하구 있다가 옆집에 돈 빌리러 가는 것은 너무 창피해" 라고 말했다. 딸은 수련장을 사주면 5 장 해서 갖고 오라 하면 15 장 을 해와서 나를 놀라게 했다. 내가 해답을 부르면 딸은 채점을 한다. 노점상 자리 옆 시멘트 바닥에서... 노점 장사를 2년 하는 동안 추운 어느날 나는 얼굴이 다 얼어버렸다. 노점상을 하는동안 인천시립이동 도서관 차가 오면 재미있는 소설책을 빌려 보아서 밝은 노점에서 책읽기가 너무 좋았다. 200권의 책을 빌려 보았더니 인천시립도서관으로부터 다독자 상까지 받게되었다. 그때에 읽은 번역소설 시드니쉘던 의 책 이라던가 김주영, 박범신씨의 소설 또 여명의 눈동자 9권 등을 보아서 표현력 어휘력이 그때에 좋아졌을 것이다. 그나마 노점자리 뒷편 점포의 주인이 바뀌어서 노점은 쫒겨나게 되었었는데 다행히도 아주 작은 가게를 갖게 되었다. 원래는 구두수선 하는 가게 였었는데 내가 바라던 바로 그가게였다. 저런 가게 라도 있었으면.... 하는 바램 이 이루어 진것이다. 구두수선 하는 영감이 노환이 들어 그 가게가 나온것이었다. 그 가게를 얻어서 악세사리와 수입품가게를 했다. 그 당시 우리가족 생활비가 60~70 만원 이었는데 신기하게도 2년동안 그생활비가 벌어졌다. 그러나 아이들이 학원에도 다녀야 하고 중학교도 가려면 두배로 벌어야만 하겠다는 궁리를 하고 있었다. 2 년째 하고있을 무렵 점포의 주인이 가게를 비워달라는 것이었다. 바로 길건너 편에 새 건물을 짖고는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돈은 겨우 그 새 건물 임대료의 10%에 불과했다. 1989년 늦은 가을 우리는 빚을 얻어 10평짜리 가게의 주인이 되었다. 업종은 "가방" 상호는 "계동가방" 몇 년간 장사가 곧잘 되었다. 아들은 컴퓨터 학원에 보내고, 딸은 피아노 학원에 보낼 수 있었다. 바둑 교실도 보내고 합기도장도 보낼수 있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학원비를 줄때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얘기하고 또 얘기하였다. "지금은 내가 너희들을 학원에 보낸다 마는 이 다음에 너희들이 커서 돈을 벌 때에는 엄마를 꼭 화실에 보내줘!" 라고 했다. 아이들이 어버이날 쓴 편지 속에 "제가 이 다음에 돈많이 벌어서 엄마 화실을 꼭 차려 드릴께요" 이 문장은 꼭 들어 있었다. 장사가 그런대로 잘 되어서 가게 세를 내고도 빚을 갚아 나갔다. 그런데 그렇게 잘 되던 장사가 근처에 나드리 백화점이 생기고 바로 코앞에 가방가게가 생기더니 매상이 급격히 떨어지게 되었다. 궁리 끝에 의류업 으로 바꾸기로 하고 또다시 빚을 내어 숙녀복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계절은 쉴 새없이 바뀌었다. 계절마다 새 물건을 수 백만원 어치씩 해오다 보니 빚은 산더미 처럼 불어났다. 비싸게 가져온 물건은 재고로 남기 일쑤였다. 나중에는 더 이상 빚을 얻을 수도 없었다. 가게를 처분하여 빚 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가게에 들어온지 5년 째 되는해였다. 그리고 단골 택시기사한테 가게를 내놓겠다고 이야기를 했다. 어느날 새벽 그 기사가 상의를 해왔다. 그 택시기사가 우리가게를 계약하러 오겠다고 했다. 남편에게 울면서 "가게를 계약하러 온대요" 하고 말했다. 남편은 "당신이 그렇게 서운 하면 이틀 만 미루어봐 이틀후에 계약하자고 해" 이렇게 나를 위로 하였다. 계약하러 오고있는 사람 에게 전화를 해서 오지 말라고 부탁을 하였다. 후일에 생각 해보면 남편의 조언이 큰 덕이 되었다. 그러자 그 기사가 "아줌마! 아줌마네 가게앞 다이 좀 빌려줘요!" "다다구리"(손벽치고 떠들면서 파는 행위) 를 칩시다. 그러면 손님이 많이 꼬이고 그렇게 하면 권리금도 더 많이 받을 수 가있지요 !" 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도 시장에서 10년이상 경험이 있는터라 "그러면 차라리 그 덤핑 물건을 나를 줘요. 내가 다다구리를 쳐볼게"그렇게 말하고 몇일 후부터 덤핑물건을 사기로 하였다. 그때 마침 아들이 졸업하고 찾은 학생저축예금 180만원이 있었다. 그 돈은 전에 들여놓은 아들의 컴퓨터값을 지불 해야할 돈이었다. 만약 컴퓨터 수금사원이 왔더라면 나는 그돈을 내어 주었을 것이었다. 기적적으로 그 돈으로 덤핑장사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유능한 땡칠이(물건을 땡쳐 오는 사람)를 알게 되었다. 땡칠이가 첫날 바지 150장을 주었다."아줌마 이걸 가져가서 떠들면서 팔면 아마 한 70장 정도가 팔릴꺼요". 라고 말한다. 구입한 가격은 4000원 판매가격은 6000원이다. 나는 물건을 펼쳐놓고 용기를 내었지만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6000원이요! 6000원 바지가 한 장에 단돈 6000원! 구경하고 가세요. 살림에는 눈이 보배요. 날이면 날마다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자- 입어보고 사세요. 사가시면 오늘 돈 벌어가는 겁니다!" 손님이 하나 둘 모여들어 물건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신바람이 나자 점점 목소리는 커졌다. 사람들은 순식간에 모여들었다. 가게 안에는 바지를 입어 보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이었다. 바지는 몇시간 만에 바닥이 보였고 총 130장이나 팔려버렸다. 벽에 걸려있던 다른 물건 까지도 다 팔려 버렸다. 94년 2월 말 남편은 제사 보러 정읍에 가 있을때였다. 나는 전화를 남편에게 걸었다. “여보! 빨리 올라와요!. 손님이 너무 많아요!. 나 혼자선 안돼요. 당신이 있어야 겠어요." "정말이야? 정말?" 남편은 믿을 수가 없다면서 술에 취해 울고 있었다. 바로 몇일 전에 점포를 내놓겠다고 했었으니 믿을 수 가 없을 수 밖에..... 남편과 함께 열심히 덤핑장사를 하였다. 매일 새벽 4시면 나는 일어나서 동대문으로 물건을 받으러 나갔다. 매일 매상이 백만원을 넘어 돈세기도 귀찮았다. 월 소득이 오백을 넘으니 4식구 생활비를 쓰고도 월300만원씩 저축이 되었다. 1년 만에 대추나무에 연 걸리듯 했던 빚을 다 갚고 나니 숨통이 트였다 하늘이 도운것만 같았다. 어떻게 이런 기적같은 일이 나에게 일어난단 말인가? 그리고 2 년만에 꿈에도 그리던 방 3개가 있는 아파트를 샀다. 20년 묵은 가구를 몽땅 새것으로 바꾸고 아이들 방에 침대와 책상 옷장을 사주었다. 96년 3월 이었으니 내나이 47살이었다. 나하고 딸은 7년간을 가겟방에서 전자요에 몸을 의지하며 살았었다. 딸이 그 방에서 고2 까지를 보냈다. 딸하고 나는 후일 가겟방 을 생각하면 눈물지을 것이다. 아들과 남편은 단칸방에 자고 아침이면 나만 부산하다. 딸의 도시락 싸놓고 집으로 가서 아들의 도시락 싸고 별거생활을 7년이나 했었다. 이제 집을 샀으니 안방을 부부의 방으로 쓰게 되어 좀 어색하기도 하여, "우리 아파트에 이사 가도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방을 쓸까?" 물으니 중3 아들은 "아니요. 어머니 하고 아버지가 안방 쓰세요" 하고 말한다. 돈 벌고 집을 사게 되어 7년만에 신혼 생활까지 하게 되었다. 오랫동안 누추한 곳에서 살다보니 깨끗한 아파트가 나의집이란 것이 실감이 나질 않았다. 남의 집에 잠시 얹혀 있는 것 같아 조심 스러웠다. 이게 내집인가? 하는 신기함이 무려 육개월이나 갔다. 남편은 하도 새집으로 이사를 오지 않아서 내가 데리러 갔다. "싫어, 싫어. 그 집은 내 집이 아니야 김연자네 집이야. 이러면서 오질 않았다. 모두들 이사 나가고 곧 헐리게 될 으시시한 집에 혼자남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 취한 남편의 손을 잡고 벼개를 옆구리에 끼고 아파트로 데리고 왔다. 무슨 마음에서 였을까? 자기보다 내가 애쓴 것이 미안해서 였겠지... 그러나 새벽장을 갔을 때 아들의 등교를 보살폈고 빨래와 다림질 등 온갖 일을 도와주었다. 그렇게 장사가 잘 되기를 4년이 지나고 IMF가 왔다. 북적이던 시장은 한산하기가 이를데 없었다. 비상금 까지 통장에 두둑 하니 겁날 것이 없었다. 위기가 기회다 싶어 한시도 잊은 적이 없는 동양화를 배우기로 했다. 예고 동창생 홍대 김태호교수 에게 전화로 상의를 하였다 김태호교수의 안내로 홍대 디자인교육원에 동양화 공부를 다니기로 한것이다. 지금도 잊지못하고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5개월 이나 기다리고 기다려서 9월 3일부터 홍대에 첫 수업을 하러가는 날이 다가왔다. 그러나 9월 2일 남편이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119를 타고 인하대학 병원으로 가게 되었다. 7시에 검사와 함께 수술을 하게 되었다. 한순간도 지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수술이 순조롭게 되어 목숨을 구사일생으로 건지고 남편은 중환자 실에 누워 있었다. 누워있는 환자에게 물을 떠먹이면서 나도모르게 중얼거렸다. "내일 홍대에 가야 하는데... 아마도 미술공부 하지말라는 신의 계시 인가봐요"라고 했드니 뜻밖에도 남편이 "당신 내일 학교 갔다와! 첫날인데 빠지면 어떻게 해. 어차피 중환자실 보호자는 밖에 있어야 하니까, 간호사 한테 부탁하고 학교에 갔다와!" 나는 너무나도 머리속이 혼란했지만 그 다음날 학교에 갔다. 9월 오후의 뜨거운 태양은 내리쪼이고 특히나 신촌은 왜 그리 덥던지.. 버스정거장을 헤매는 나는 꼭 미친 사람만 같았다.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미쳤나봐! 아빠는 중환자실에 눞혀놓고..." "엄마! 미쳐야 뭐가 되는거야!" "미쳐야되" 돌아오는 전철속에서 남편과 딸이 고마워서 남몰래 눈물을 닦아내고 또 닦아내었다. 홍대디자인교육원에서 차대영 교수님께 채색을 1년 배우고 국전에 출품하려는 욕망으로 100호짜리를 그리게 된것이었다. 난 오직 나홀로 옷가게의 창고에서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아침마다 작품에 매달리기를 6개월. 그동안 남편은 아침식사를 물론 혼자 하였지만 한번도 불평하지않고 나를 격려 하였다. "당신 작품이 최고야!" 남편도 채색화에 빠져있었다. 99년 10월 50살이되는 내 생일날 나는 제18회 대한민국미술대전에 출품을 하였다. 작품명은 "해질녘" 노을진 하늘밑에있는 옥수수밭의 풍경 이었다. 서예하는 친구가 겨우 채색 일년 하러 다니다가 국전에 낸다고 어이 없어 했다. 남들은 10년공부를 해도 떨어지는 판이란다. 몇일후 새벽 신문에 난 발표를 보고 나는 소리쳤다. "여보! 합격이야! 합격!" 남편이 마루로 뛰어나왔다. 우리는 부둥켜 안고 둘이같이 소리내어 울었다.믿기지가 않았다. 혹시 동명 2인이 아닐까? 아침 9시가 지나 한국미협으로 전화를 걸었다. 접수번호까지 확인하고 그때서야 형제 자매들에게 전화를 걸어 기쁜소식을 알렸다. 신기하게도 접수번호가 아들의 생일날인 813번 이었다 . (아들 생일 8월 13일) 경사가 겹쳐 아들이 연대에 합격을 하였고 나는 경기미전에 인물화로 특선을 하였다. 점점 의류경기가 없어지고 재래시장의 상인들이 하나둘 떠나갔다 의류업을 도저히 할 수 없는 상황이되었다. "에라 모르겠다“. 죽이 되든 밥이되든 죽을 때 까지 그림이나 그려보자!" 남은 옷을 몽땅 쎄일로 없애버렸다. 유리문을 다 열어 젖히고 나는 빈 가게에서 마음 놓고 큰 그림을 그렸다. 지나가는 행인들이 구경을 하고 눈을 휘둥그레 뜨고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옷장사 아줌마가 웬일 입니까?" 헤일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눈을 크게 뜨고 입을 크게 벌리고 나의 작품을 구경 하였다. 어떤 전시회도 그런 광경은 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돈이 많아 옷장사인 나를 가엽게 보던 여인까지 내앞에 고개를 떨구고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고 상담을 청해왔다. 그리고 수십명의 학생들이 그림을 배우러 오게되었다. 광고지 한장 안돌리고 수강생은 30명이 넘었다. "열린 미술 교실" 이렇게 써붙였다. 옷장사로 꾸려가던 살림은 어느듯 수강생의 수업료로 꾸려가게 되었다. 값비싼 강남 컴퓨터학원에 접수 했다고 심하게 야단 맞고 나간 딸 한테서 전화가 왔다. 인하대학교 대학원 지리정보학과에 학비장학생으로 입학하게되었다고. 70세 연세인 엄마 같은 큰 언니에게 메일로 소식을 전하였다. 눈물이 흘러내려 편지를 쓸수가 없었다. 온 집안이 경사가 겹쳐 축하받기에 정신이 없었다. 요즈음 살아있음을 느낀다. 살아있는 동안 좋은 작품을 열심히 그려 놓아야지... 매일 매일 이렇게 그림을 그릴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축복인가? 남편은 기쁜 마음으로 나를 도와주느라 바쁘다.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마음속으로 외친다. "나는 그림을 그려요! 죽을 때 까지 그릴꺼예요! 죽고 난후에 내그림을 알아 줄지라도 혼신의 힘을 다해 그림을 그릴 겁니다!!!"
2003년11월24일 생활수기 1부는 2003년 당시 한국일보 생활수기 공모전에 상금 을 타보려는 야심을 갖고 썼었는데 낙방 했었읍니다. 생활수기 2부 내가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국전에 입선한 이후 미술 교습소를 하면서 십여년 간 을 살았다. 아줌마란 호칭 은 날아가고 선생님 소리가 익숙해졌다. 홍익대학교 디자인 교육원에서는 채색 과 수묵을 수료 하였다. 배우던 아이들은 떡볶이를 많이 해주시던 선생님 강아지 두마리를 갖고 놀게 해주신 선생님 으로 기억할 것이다. 서울 예술고등학교시절 에 전공 했던 응용미술이 한몪 톡톡히 해서 포스터 가르치는데는 큰 도움이 되었다. 학생 들이 300명이 넘게 배워 나갔다. 일반인 제자들과는 좋은 친구가 되었다.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고 오전 시간을 이용하여 한문서예를 공부 를 5년 하다가 근처에 장애인 자립재활센터 라는 곳에 오전 장애인 미술지도 봉사활동을 신청하였다. 그 무렵 생겨난 것이 "장애인 활동보조" 제도 이다. 나도 교육을 이수 하고 장애인 활동 보조인으로서 오전에 미술 출장 지도를 하였다. 학원생들은 오후에 오니 오전이 한가 하였다. 최남숙 최경순 씨가 그 초창기 멤버이고 그들 은 지금 한국미협 회원 까지 되었다. 장애인 활동보조를 10년간 했더니 지금도 장애인들이 휠체어를 타고 경인교대 탁구장 에서 탁구 치는 나를 찾아온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중에 하나님의 은혜로 딸은 공무원시험에 합격하고 좋은 신랑을 만나 결혼을 잘 해서 가까운 이웃에 집을사고 살게되었다. 손녀도 보게 되어서 가족의 즐거움이 더해졌다. 지금은 7급 공우원이 되었다. 손녀는 초등학교 1학년이며 할머니는 세계제일의 화가 라고 존경한다. 손녀의 친구들 까지도 이다음에 커서 유리네 할머니 같은 화가가 되고싶다고 할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어린이집에 동화그림을 선물로 주고 "생활속의 아이들" 서예작품도 여러명 에게 나누어 준 일도 있었기 때문이다. 손녀가 늘 공주와 왕자를 그려 달라고 하더니 나중 에는 공주 와 왕자 가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 아기를 업고 있는 모습까지 그려달라 해서 나도 힘들었지만 많이 공부가 되었었다. 한글성경필사를 일년반 에 쓰고있는 도중 아들 이 연세대학에서 컴퓨터공학 박사학위를 받고 이화여대 디자인 박사 며느리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아들은 상암동 첨단산업센터에 권지용 연구원이며 며느리는 만화영화 로봇 트레인의 전혜정 작가이며 "미디어 피시" 의 대표이다. 십년넘는 미술학원 생활을 정리하고 68세인 지금은 공동작업실에서 작업을 하고 그동 안 해마다 공모전에 입상하여서 최근에 "인천광 역시 초대작가" 가 되었다. 일년에 한번씩 50호 (110cmx80cm) 출품해서 입선 8번 특선 두번 낙선 두번 십년넘는 세월에 꿈을 이룬 것이다. 20 여년간 단체전에 100 여회 참가 하다보니 내가 참여한 도록이 책장으로 가득하다. 5 년전에 계양구청에 작품 네개를 기증 하였고 2016년에는 계산 노인 문화센터에도 네점을 기증 하게 되었다. 이제 70을 바라 보는 나이 내가 할수 있는 일은 계양구의 문화 발전을 위하여서 관공소 나 지하철역사에 그림을 기증 하고 살다가 가기를 바랄 뿐이다. 요즈음은 영어성경 필사를 하고 있는데 10개월째인데 아직 사사기를 쓰고있다. 1000 일 기도 하는 마음으로 쓰고 있다. 영어성경필사 도중 에 두가지의 기도제목이 이루어 지게 된것이다. "인천광역시 초대작가" 의 기도 와 수필집 "함박눈" 발간 이다. 성경을 쓰는 동안 아주 좋은 일이 많이 생긴다. 한글성경 필사 도중 에는 아들 이 박사되고 예비박사며느리와 결혼 하게 되었었다 .
더욱 감사한것은 중학교 시절부터 꿈꾸어 오던 사생회에 회원이 된것이다. 인천수요사생회 임원이 되어서 한달에 두번씩 아름 다운 곳을 찾아 다니면서 그림을 그린다. 원미산공원의 벗꽃을 그리러 갔을때에 는 우리가 천국에 온 것이 아니냐고 환호성을 질렀다. 멀리 가는 곳은 관광버스로 갔다 오니 원로작가 선생님들과 선후배 화가들 제자도 함께 하니 인생의 황혼 길에 더 이상 행복 할수는 없다. 관광 버스로 가는동안 이삼영 원로작가님이 제작하신 배경음악이 멋진 우리들의 작품 동영상을 보면서 가는 품격있는 관광 여행이니 얼마나 좋은가? 요즈음은 영감이 우울증이 왔지만 아직 신체가 건강 하니 함께 문화센터에 일어와 한문을 배우러 다니고 있다. 엎어지면 코닿을 계산노인 문화센터에 자가용을 타고 둘이 같이 갔다온다. 한문 반이고 일어반이고 부부가 함께 오는 커플은 우리밖에 없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ㅎ ㅎ ㅎ 그리고 삼시세끼를 영감과 함께 밥을 먹는다. 30년간의 재래시장의류사업, 미술 교사 생활, 손주 돌보기, 장애인 활동보조인, 요양사 2 년, 활동으로 남편 혼자서 점심, 저녁을 먹었었다. 그동안 힘들 때 마다 게시판 일기에 영감 흉보는 글, 나의 반성하는글 , 을 써놓은것은 책으로 내게 되어 부끄러운 것도 있지만 더없이 뿌듯하다. 우리와 상관 없는 이들이 읽고 웃을수 있다면 그것이 나의 바램이다. 펜화의 대가이신 김영택 화백님께서 추천의 글을 써주셨는데 어찌나 정확히 판단을 해주시는지 역시 작품 이란 바로 그사람 이란 말이 실감 난다. 김영택 화백님의 그림은 누구도 따라잡을수없이 정확하고 치밀 하니까 남의 글과 그림을 보시는 눈도 역시 그렇다. 모든것이 감사하다. 재능을주신 하나님께도 감사하고, 그림 그리는것을 박수 쳐주던 남편에게도 감사하다. 끝으로 지켜봐 주시고 도움을 주시는 주변 모두의 분들께 감사 하고 또 감사 한다. 2016년 9월 15일 (음력 8월15일)추석날에 |
출처 :하이디와토미 원문보기▶ 글쓴이 : 하이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