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자(金守雌)는 자가 계보(谿甫)이며 옛 이름은 김리(金理)이다. 상주(尙州) 사람으로 어려서 아버지를 잃자 책 상자를 짊어지고 사방을 돌아다니며 공부하였다.
과거에 급제하여 금양현위(金壤縣尉)에 뽑혔고 국학학유(國學學諭)로 승진하였다가 벼슬을 버리고 가서 두문불출 하였다. 전원(田園)을 관리하여 채소를 길러 자급하였고 날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인종(仁宗) 때 직사관(直史館)이 되었는데 이자겸(李資謙)의 난에 궁궐이 연달아 불에 타버렸다. 김수자는 궁궐에서 숙직하다가 국사(國史)를 짊어지고 산호정(山呼亭) 북쪽에 이르러 땅을 파고 감추어 둔 덕분에 불타지 않을 수 있었다.
직한림원(直翰林院)으로 승진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병이 드니 근시직에 있음을 좋아하지 않았다. 또 늙으신 어머니를 모시려고 수령이 되기를 청하여[乞郡] 예주방어사(禮州防禦使)가 되어 나갔다가 죽었다.
의종(毅宗) 때 이부(吏部)에서 아뢰기를, “김수자는 병오년의 난리(이자겸의 난)에 사관(史館)에 입직하여 몸과 생명을 아끼지 않고 국사(國史)를 옮겨 보관하였습니다. 옛날 당(唐)의 위술(韋述)이 사관(史官)이 되어 안록산(安祿山)의 난에 국사를 안고 남산(南山)에 감추어두었으나 몸이 적의 수중에 떨어져 위관(僞官)으로 더럽혀지고 적이 평정되자 유주(渝州)로 유배 가서 죽었습니다. 광덕(廣德) 초에 공으로 잘못을 덮어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를 추증했습니다. 위술이 끝내 위관으로 더럽혀져 유배 가서 죽게 되기에 이르렀으나 오히려 그 공을 논하였는데, 지금 김수자는 누를 끼친 바가 하나도 없고 외관(外官)으로 임명되었다가 죽은 예에 따라 공로에 따른 포상을 받지 못하였으니 심히 애석합니다. 청하건대 옛날의 전례에 따라 관작(官爵)을 추증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김수자에게〉 예부시랑 한림시독학사 지제고(吏部侍郞 翰林侍讀學士 知制誥)를 추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