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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씨 독립운동가 명단은 총17명입니다.
출신지역으로 보면 평안남도 7명, 황해도 4명, 경상남도 2명, 평안북도 1명 함경북도 1명, 전라남도 1명, 충청북도 1명으로 이북 출신이 14명, 이남 출신이 3명입니다.
본관을 살펴보면 순흥이 8명, 본관 미상이 7명, 신죽산이 1명, 탐진안씨가 1명입니다.
성별로 보면 남자가 16명 여자가 1명입니다.
안경근(安敬根,1896~1978) 황해도 신천(信川) - 순흥(順興)
안경신(安敬信,1877~미상) 평남 대동(大同) - 미상(未詳). 여자.
안규홍(安圭洪,1897~1911) 전남 보성군 - (신)죽산(竹山)
안명근(安明根,1897~1927) 황해도 벽성군(해주시) - 순흥(順興)
안병무(安炳武,1912~1986) 평남 안주(安州) - 미상(未詳)
안병찬(安秉瓚,1854~1921) 평안북도 의주(義州) - 미상(未詳)
안상익(安相益,1898~1921) 평안남도 강서(江西) - 미상(未詳)
안세환(安世桓,1892~1927) 평안남도 평원(平原) - 미상(未詳)
안승우(安承禹,1865~1896) 충북 제천 - 순흥(順興)
안재환(安載煥, 1898~1977) 평안남도 안주(安州) - 미상(未詳)
안중근(安重根. 1878~1910) 황해도 신천(信川) - 순흥(順興)
안지호(安智鎬,1857~1921) 경상남도 고성(固城) - 미상(未詳)
안창호(安昌浩,1878~1938) 평남 강서(江西) - 순흥(順興)
안춘생(安椿生,1912~) 황해도 벽성(碧城) - 순흥(順興)
안태국(安泰國,미상~1920) 평안남도 평양 - 순흥(順興)
안희제(安熙濟,1885~1943) 경상남도 의령(宜寧) - 탐진(耽津)
안무(安武,1883~1924) 함경북도 경성(鏡城) - 순흥(順興)
안경근(安敬根) 1896. 6. 10~1978. 12. 9 호:석천(石泉) 이명:이관오(李冠五)
황해도 신천(信川)사람이다.
1918년 망명의 길을 떠나 종형 안중근(安重根)의사가 이미 독립투쟁의 근거지로 삼았던 해삼위(海蔘威)로 가서 박은식(朴殷植)・안정근(安定根)・신채호(申采浩)・이범윤(李範允) 등 애국지사들과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2년 2월에는 혁명 러시아의 과도기적 혼란으로 인하여 자주독립운동에 어려움이 가중됨으로써 상해로 이동하였다. 여기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가담하여 당시 임정 경무국장이었던 백범 김구(金九)와 의기투합함으로써 그를 적극 보좌하면서 일제 관헌과 밀정 숙청에 전력투구하였다. 1923년에는 동지들의 권유로 사천성(四川省)의 노주군관학교(瀘州軍官學校)에 입학 이준식(李俊植)・문일민(文一民) 등과 소정의 과정을 마치고 졸업하였다. 1925년에는 운남군관학교(雲南軍官學校)를 마쳤으며, 그후 임시정부 요인들과 국권회복 문제를 협의하였다. 그는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만주로 건너가 정의부(正義府) 군사부의 위원이 되어 사령장 김창환(金昌煥)의 참모로 들어가 독립투쟁에 종사하였다. 1929년에는 정의부, 참의부(參議府), 신민부(新民府) 등 3부 통합운동에 심혈을 경주하였다. 독립운동 단체의 분산은 그만큼 독립투쟁의 역량을 저해・약화시킨다는 의견을 피력하고 민족통합적 차원에서 합작운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해관계에 얽혀 통합에 실패하고 남만주의 국민부(國民府), 북만주의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로 양립되었다. 이곳은 일제의 주구와 일본군 그리고 공산당이 포진하고 있어 김좌진(金佐鎭)・오동진(吳東振)・김규식(金奎植)・김동삼(金東三) 등이 그 피해를 입었다. 김좌진이 암살당한 것도 공산당의 소행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만주 일원에서의 독립투쟁이 불리해지고 압박도 받자 안전지대인 국제도시 상해(上海)로 돌아와 활동할 계획을 세웠다. 1930년 상해로 돌아온 그는 김구・이동녕(李東寧) 등 임정 요인과 협의하고 황포군관학교(黃浦軍官學校)의 구대장(區隊長)으로 활약하였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尹奉吉)의사의 투탄의거로 침체국면에서 허덕이던 임시정부는 활기를 되찾을 수 있었다. 중국 국민당 정부의 적극적인 협조로 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가 개교됨에 따라 직접 학생을 훈련시켰으며 남경(南京) 등지에서 군관생도(軍官生徒)모집에 주력하였다. 1933년 1월 15일에는 상해에서 재호한국독립당대회에 참석하였다. 이해 5월 그는 상해거주 한인교포들과 독립운동가들을 괴롭혀 오던 일본총영사관 소속의 친일파 주구인 밀정 이종홍(李鍾洪)을 교살함으로써 한일들의 맺힌 한(恨)을 풀어주었다. 이듬해에는 남경에서 애국단(愛國團) 조직에 참여하였다. 한편 동년 12월에는 한국독립군특무대(韓國獨立軍特務隊)를 조직할 것을 결의하여 대장에 김구, 참모장에 안공근(安恭根)을 선출하였으며, 그 자신은 군관학교 졸업생 등과 함께 대원이 되었다. 1934년에는 장개석(蔣介石)총통과 백범 김구와의 연락 책임을 맡아 한・중간의 친선을 도모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1936년 11월 10일의 제29회 의정원 회의에서는 황해도 의원으로 피선되었으며, 임시정부가 사천성(四川省) 기강현으로 이주한 후인 1939년 10월에 다시 의정원 의원으로 보선되어 계속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42년 10월에는 임시정부 군사위원회 위원이 되어 활약하다가 광복으로 귀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수여하였다.
안경신(安敬信) 1877~미상
평남 대동(大同)사람이다. 출생후 강서군 읍내 덕흥리(江西郡邑內德興里)에 이주하여 살았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1개월간 구류를 살았다. 그러나 그 후로 더욱 분발하여 조국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심하고, 1919년 11월 감리교 여성 신자로서 중진(重鎭)이던 오신도(吳信道) <목사 손정도의 모친>・안정석(安貞錫) 등과 같이 대한애국부인회(大韓愛國婦人會)를 조직하고, 평양 본부의 교통부원(交通部員) 겸 강서지회(江西支會) 재무(財務)를 담당하여 활약하였다. 동회에서는 많은 군자금을 거두어 상해 임시정부에 보내는등 활동하다가 1920년 초에 동지 106명이 일경에 체포되자, 김행일(金行一)을 따라 상해로 망명하였다. 그러다가 때마침 1920년 8월 미국의원단 일행이 내한(來韓)하게 되는 기회를 이용하여 항일투쟁의 생생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국제적 여론을 환기시키자는 목적으로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에서 국내에 결사대를 파견하게 되자 제2대에 참가해서 장덕진(張德震)・박태열(朴泰烈) 등과 함께 상해를 출발해서 도보로 평양까지 들어왔다. 이들은 동년 8월 3일 평남경찰국 청사에 폭탄을 던져 평양시내를 진동시켰고, 평양시청과 평양경찰서에도 투탄하였으나 도화선이 비에 젖어 불발되고 말았다. 그후 피신하여 함남 이원군 남면 호상리(南面湖上里)에 숨어 있었으나 일경에 탐지되어 1921년 3월에 마침내 체포되었다. 그리하여 모진 고문과 악형 끝에 평양지방법원에서 사형언도를 받았다가, 공소하여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10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안규홍(安圭洪) 1897. 4. 10~1911. 5. 5 호:담산(澹山) 자:제원(濟元) 이명:계홍(桂洪)・안진사(安進士)・담살이
안규홍의 본관은 죽산(竹山)이다. 1879년 4월 10일 전남 보성군 조성면 덕산리(寶城郡 鳥城面 德山里)에서 안달환(安達煥)의 3남으로 출생하였다.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자랐으며 가세가 빈한하여 남의 담살이(머슴)로 모친을 극진히 봉양한 효자였다. 1907년 군대 해산을 계기로 구국의 함성이 높아가자 거의할 목적으로 일심계(一心契)를 조직하였다. 한편 주인에게 모일(某日)에 논일을 할 터이니 일군들을 대접할 준비를 해달라고 설립연후 은밀히 담살이 동지들 수십 명을 규합하였다. 거사일이 되어 동지를 모으고 주인에게 몰려가 국사를 도모하고자 하나 우리에게 재물이 없으니 군사물자를 조달해 줄 것을 강청하여 군량과 자금을 받아냈다. 그리고 일찍이 은밀하게 밀약받았던 동리의 참봉 안극(參奉 安極)에게 무기와 자금을 제공받을 수 있었다. 이와같이 준비를 갖추고 있을 때 1908년 2월 관북출신 강성인(姜性仁)이 무장한 의병 수십 명을 이끌고 와 합세하여 병력 70여 명으로 불어났다. 이들은 보성 동소산(桐巢山)에서 훈련을 시켰는데, 강성인은 본래 성격이 난폭하고 잔인하여 민폐가 컸다. 규홍이 다스리고자 하나 고쳐지지 않자 할 수 없이 그를 포박하여 죄상을 밝힌 후 참형에 처하였다. 이로써 군기는 바로 잡히게 되었다. 그후 농군을 소모(召募)하여 대오(隊伍)를 정비한 후 안규홍이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는데 그 편제는 다음과 같다.
부 장 : 염재보(廉在輔)
참 모 장 : 송기휴(宋基休)
선 봉 : 이관회(李貫會)
좌우익부장 : 정기찬(鄭基贊)・장재모(張載瑁)・송경회(宋敬會)・손덕호(孫德浩)
유 격 장 : 안택환(安宅煥)・소휘천(蘇輝千)
좌우부참모 : 오주일(吳周一)・나창운(羅昌運)
서 기 : 임정현(任淨鉉)
군 수 장 : 박제현(朴濟鉉)
안규홍은 비록 배우지 못하여 문자를 몰랐으나 천성이 뛰어나고 결백하며 과감하였기 때문에 많은 농민군이 그를 따랐다. 이들 안 담살이 의진이 보성을 중심으로 하여 형성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일병들이 보성군 조성(鳥城)・벌교(伐橋)・순천(順天)을 연결하는 토벌진을 구성하여 포위 섬멸전을 전개하려 하였다. 규홍은 평소 초로 지리(樵路地理)에 밝은지라 일군에 대한 기습 작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1908년 2월 적이 정시(定時)에 출동하여 수색하고 있음을 간파하고 미리 보성 동쪽 8키로미터 떨어진 파청(巴靑)의 험한 지점에 복병을 마련해 두었다. 마침 일대에서 최강을 자랑하는 미도(永戶)・히라이(平井)의 두 부대가 골짜기로 들어왔을 때 복병들이 총탄을 퍼부었다. 적병 부대장들이 쓰러지고, 전군이 궤멸하여 의병 부대는 많은 전리품을 노획한 후 다시 대원산(大院山)으로 들어갔다. 이것이 파청대첩(巴靑大捷)이다. 이후 일군은 안규홍의 부대를 의병 부대 중 최강의 부대로 지목하게 되었다. 파청대첩 후 적의 신예 부대(新銳部隊)는 보복전을 펼쳐 대원산 사찰을 포위하고 필사적으로 공격해 들어왔다. 그러나 의병은 사찰 문루와 장벽에 의지하여 분전한 끝에 여유있게 적을 격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동복(同福)을 탈환하기 위해 운월치(雲月峙)로 진군하다가 누봉산(樓鳳山)에서 적과 부딪쳐 많은 희생자를 내었고, 특히 참모 나창운(羅昌運)이 전사하는 등의 손실을 보았다. 이에 장경선(張京善)을 참모로 임명하고 병력을 증강한 후 1908년 8월 24일 진산(眞山)에서 일군 수비대 및 기병과 격전을 벌여 일군 5명을 중상시키는 등 대첩을 거두었다. 이 전투가 진산대첩(眞山大捷)이다. 그후 안규홍의 의병 부대는 화약과 군량을 준비하여 공격 태세를 갖추어 1909년 3월 25일 원봉(圓峰)의 적병을 기습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이때 규홍은 소병력을 한산한 곳으로 보내어 약탈을 가장하는 등 적의 눈을 속이고 정예 부대를 거느리고 원봉 기병 주둔소를 야습하는 작전을 썼다. 일군 대장 와다나베(渡邊)는 말을 타고 도주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다량의 무기와 화약・군량을 획득하였으므로 의병 부대를 재편하는데 크게 도움을 주었다. 다시 순천(順天)으로 가서 일군 대부대를 습격하였다. 처음에는 큰 전과를 거두었으나, 안택환(安宅煥)・임정현(任淨鉉) 등이 전사하였다. 이어 송기휴(宋基休)를 유격장으로 임명하고 전투를 계속하였으나 일병 증원 부대가 도착하여 포위당하였다. 규홍은 의병을 상인・농민 등으로 가장시켜서 포위망을 탈출하여 바닷가에 집결시켰다. 다시 밤에 배를 타고 고흥(高興)으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의병의 수는 줄고 무기도 빈약하여져서 정면충돌을 감행할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 이에 작전을 바꿔 유격・기습 작전으로 성과를 거두며 전전하다가 송기휴가 전사하게 되었다. 모든 것이 일진회(一進會)의 밀고 때문인 것으로 밝혀지자 그들을 색출하여 시장에서 공개 총살시켰다. 그리고 일인 첩보대장 나다이치(灘市)를 사살하고 8월에는 270명의 의병을 총동원시켜 순천군 낙서면 상우리(洛西面 上右里) 소재 일진회를 습격하여 친일 주구들을 처단하고 9월 25일 3백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광양(光陽)의 백운산(白雲山)으로 들어가 근거지로 삼았다. 한편 1909년 5월 이후 함평(咸平)의 심남일(沈南一)과 연합전선을 꾀하고자 수차례의 회합을 갖기도 하였다. 보성・순천・흥양・여수・돌산・광양・곡성・남원・구례・장흥・순창 등지에서 게릴라 활동을 재개하였다. 적은 토미이시(富石)대위를 중심으로 토벌대를 구성하는 한편 의병의 가족들을 동원시켜 각종의 귀순 공장을 전개하였다. 토벌대의 대병력이 전라도를 북쪽에서부터 포위망을 압축하면서 남쪽으로 몰아 내려 왔다. 규홍은 하는 수 없이 의병을 해산시키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9월 25일 보성군 봉덕면 법화촌(鳳德面 法化村)에서 부하 염재보・정기찬과 함께 토미이시의 부대와 광주경찰서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곧 광주에서 대구 감옥으로 이감되었으며, 1911년 5월 5일 교수형에 처하여져 한을 남기고 순국하였다. 그밖에 안규홍의 부하로서 전사・순국한 영웅들이 많다. 해산을 극구 만류하던 임낙균(林洛均)부자는 흑석산(黑石山)에서의 전투중에 모두 전사하였으며 그리고 박봉석(朴奉石)・손덕오(孫德五)・염인서(廉仁瑞・廉在輔)・정기찬(鄭基贊) 등은 1910년에 교수형에 처해져 순국하였다. 안규홍의 안담살이 의병 부대는 처음 유생 중심의 의병운동이 점차 대중적 기반을 닦게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의병운동 전개사상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러한 대중화 경향은 1908년에서 1909년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투쟁은 보다 격렬화 하여갔다. 공간적으로도 처음의 의병운동이 산악중심이었던 것에 반해 점차 평원지대, 도시, 해안 지대로 확산되어 가는 발전적 면모를 띄며, 작전도 보다 능숙한 게릴라전의 양상을 띄게 되어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안명근(安明根) 1897. 9. 27~1927. 7. 7
황해도 벽성군(해주시) 수양산 아래에서 태어났다. 안중근(安重根)의 종제(從弟)로서 어려서부터 안중근의 감화를 받아 항일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심하고 안악군면학회(安岳郡勉學會)와 해서교육총회(海西敎育總會)의 회원으로 교육구국운동에 헌신했다. 안중근의 이등박문(伊藤博文) 포살사건이 있은 후에, 안명근은 매국노 이완용(李完用) 등을 총살하고 북간도에 가서 의병을 모집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할 계획으로 군자금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그는 1910년 11월 18일 송화(松禾)의 신경천(申敬天)에게 5천원을 요청하여 3천원을 받고, 11월 30일 신천의 이원식(李源植)에게 1만원을 요청하여 6천원을 받았다. 11월 21일 신천의 민(閔) 모에게 2천원을 요구했다가 준비해놓겠다는 약속을 받고 돌아왔으나, 민이 일제 헌병대에 밀고하여 1910년 12월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일제는 1911년 1월에 안명근이 모집한 군자금을 맡아 두었던 배경진(裵敬鎭)을 체포하여 군자금 9천원을 압수하고, 안명근의 계획에 찬동한 바 있는 원행섭(元行燮)・박만준(朴萬俊)・한순직(韓淳稷) 등을 체포하였는데 이것이 이른바 「안명근사건」이다. 일제는 이 사건을 의도적으로 확대하여 신민회 황해도 지회를 탄입하기 위해서 김홍량(金鴻亮)・김구(金九)・도인권(都寅權)・김용제(金庸濟)・최명식(崔明植)・김용진(金庸震)・이상진(李相晋)・이승길(李承吉) 등 무려 160여명을 체포・투옥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안악사건」이다. 일제는 또한 만주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기지 창건사업을 추진했다고 해서 1911년 1월 신민회의 중앙간부들인 양기탁(梁起鐸)・임치정(林蚩正)・안태국(安泰國) 등을 비롯한 다수의 인사들을 체포・투옥하였다. 이것이 이른바「양기탁 등 보안법 위반사건」이다. 일제는 또한 신민회라는 비밀결사가 일제총독 데라우찌를 암살하려는 기도를 했다고 날조하여 신민회 회원 800여 명을 검거하고 이미 「안악사건」과 「양기탁 등 보안법 위반사건」에 의하여 투옥된 신민회 간부들도 재기소하였다. 이것이 일제가 말하는 이른바 「데라우찌총독암살음모사건(寺內總督暗殺陰謀事件)」이라 하는 통칭 「105인 사건」이다. 이 세 사건이 모두 「안명근사건」과 연계되어 일어났다. 안명근은 이 사건으로 일제에 의하여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5년만에 출옥하였으며 출옥 후에는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길림성 의란현(依蘭縣) 팔호리(八湖里)에서 병사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안병무(安炳武) 1912. 6. 8~1986. 5. 31
평남 안주(安州) 사람이다. 1930년 상해 유학을 떠나 복단(復旦)대학에 재학 중 1932년 상해사변이 발발하자 천도교 청우당원(靑友黨圓)으로 복단대학 학생의용군에 가담하여 항일운동을 하였으며, 중국19로군(中國十九路軍)에 편입하여 대일전에 참가하였다. 한편 상해 한인학우회에 가입하여 재무위원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1937년부터는 남경(南京)에서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의 청년단에 가입하여 역보(驛保), 항전일보(抗戰日報), 건군반월보(建軍半月報) 등의 잡지에 독립군의 활동이나 독립운동, 또는 일본을 비판하는 등의 원고를 기고하였다. 특히 1940년 9월에는 「일본 제국주의 철제하의 조선(日本 帝國主義 鐵蹄下的 朝鮮)」이라는 책자를 발간하여 한국내의 일본 폭정을 폭로하는 등의 언론활동을 전개하였다. 같은 해, 9월부터 광서성(廣西省)에 있는 중국 중앙군관학교 제6분교에서 일본어를 교수하였는데 그곳에서 다시 중국 제3전구에 가입하여 대적선전을 담당하였다. 1944년 3월부터는 임시의정원 비서에 임명되었으며, 동년 6월에는 임시정부 선전부 비서 및 편집위원을 겸하여 중경(重慶)에서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수여하였다.
안병찬(安秉瓚) 1854~1921
평안북도 의주(義州)에서 태어났다. 법부 주사(主事)를 지내고, 1898년 독립협회(獨立協會)에 가입하여 그해 11월의 만민공동회 때에는 이에 간부로 적극 활동했으며, 12월 말에 독립협회가 강제 해산 당할때에는 한때 체포되기도 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황제와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체결해서 국권을 빼앗아 가자, 도끼를 메고 대한문(大漢門) 앞에 엎드려 을사조약을 파기하고 을사 5적을 처단할 것을 주장하는 격렬한 상소를 올리었다. 일본 경찰은 안병찬을 경무청에 체포했다가 70여일 만에야 석방하였다. 그 이후에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와 서북학회(西北學會)에 가입하여 애국계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했으며, 1907년 4월에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로 신민회(新民會)가 창립되자 이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安重根)의 이등박문(伊藤博文) 총살사건이 일어나자, 변호사이기도 한 그는 자진하여 안중근의 변호를 담당해서 여순법정으로 갔으나 일제는 관선변호인만 인정하고 안병찬의 변호는 일제에 의하여 거절당하였다. 이에 「일본은 피고에게 주어진 당연한 권리를 유린함으로써 피고에게 미리 사형을 선고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논설을 써서 일제를 통박하였다. 이해 12월 22일 이재명(李在明)이 매국노의 수괴 이완용(李完用)을 자상(刺傷)하고 일제에게 체포되어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게 되자, 자진하여 변호를 담당해서 이완용은 매국역적이므로 이재명이 이완용을 공격한 것은 애국열성에서 나온 당연한 거사임을 주장하였다. 일제강점 후 1911년 9월에 일제가 신민회 회원을 검거할 때, 소위 「데라우찌 총독암살음모사건(寺內總督暗殺陰謀事件)」의 혐의로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당하였으며, 이듬해 석방되자 독립운동을 위하여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바로 그 달에 조재건(趙在健)・함석은(咸錫殷)・오학수(吳學洙)・지중진(池仲振) 등 동지들과 함께 안동현(安東縣)에서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이라는 독립군단체를 조직하여 그 총재로 선임되었다. 그는 대한독립청년단을 지휘하다가 1919년 9월에 일제에게 체포되어 1년 6개월의 언도를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병이 나서 병보석으로 가출옥되었다. 즉각 다시 망명하여 남만주의 관전현(寬甸縣)에서 1920년에 대한청년단연합회(大韓靑年團聯合會)의 총재로 추대되었다. 그는 남만주 각지의 독립운동단체들을 통합할 필요를 절감하고, 김찬성(金燦聖)과 같이 대한청년단연합회를 대표해서, 평안북도독판부(平安北道督辦府) 대표 조병준(趙秉俊)・김승만(金承萬), 독립단(獨立團) 대표 김승학(金承學) 등과 관전현 향로구(香爐溝)에서 통합회의를 열어 각 독립운동단체의 수뇌들을 개별적으로 방문하면서 통합할 것을 권유하기로 결정하였다. 1920년 12월 12일 동지들과 함께 관전현 대아하(大雅河)에 있는 기원독립단(紀元獨立團) 부총재 백삼규(白三奎),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있는 기원독립단 총재 박장호(朴長浩), 한족회(韓族會) 간부 김동삼(金東三), 안동원(安東源) 등을 역방하고 통합안을 협의한 바 전원의 찬동을 얻었다. 이에 관전현으로 돌아와서 1921년 2월에 향로구에 남만주 독립운동의 통일기관을 설치했는데, 이 기관이 대한광복군(大韓光復軍)이었다. 대한광복군의 성립은 안병찬의 활동에 의거한 바가 매우 컸다. 1920년 4월 2일에는 상해 임시정부로부터 평안북도 독판부의 독판에 임명되어 평안북도독판부와 대한광복군을 긴밀하게 연계시키고, 5월에 김승학・이탁(李鐸) 등과 함께 상해로 가려고 하다가 중・일합동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그러나 관전현지사(중국인)의 호의로 석방되자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와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협의하였다. 상해 임시정부와 안병찬 일행이 합의한 결과 남만주의 교민통치기관은 대한광복군 참리부(參理部)라 칭하여 임시정부 내무부의 직속기관으로 하고, 남・북 만주의 군사기관은 대한광복군사령부(大韓光復軍司令部)라 칭하여 임시정부 군무부의 직할로 하기로 결정하였다. 1920년 9월에는 임시정부의 법무차장에 임명되고, 임시정부 법률기초위원회(法律起草委員會)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21년 공산주의로 전향하여 이르크츠크에서 개최된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 1차 대회에 참석하여 중앙위원에 선출되고, 상해로 돌아와서 국내 연락기관으로 고려공산당 상해지부를 결성하였다. 이 해에 다시 모스크바로 가서 소비에트정부로부터 독립운동자금을 얻어 돌아오다가 자금문제의 갈등으로 반대파 공산당원에게 암살되었다.
정부는 그의 독립운동에 끼친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안상익(安相益) 1898. 3. 11~1921. 10. 17
평안남도 강서(江西) 사람이다. 1919년, 대동군(大同郡) 금제면(金祭面) 원장(院場) 장날인 3월 4일 최능현(崔能賢)・송현근(宋賢根) 등이 주동하여 일으킨 강서군 반석면 상사리(班石面上四里)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이날 곡물매입차 모락장(沙川市場)에 들렀다가 만세운동이 전개됨을 알고 적극 참여하였다. 이날 오후 1시경 3천여명의 군중들이 헌병대 유치장에 갇혀 있는 애국지사를 구출하기 위해 25리 떨어져 있는 원장으로부터 행진하여 오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반석면장 김종화(金宗化)가 거사계획을 밀고하여 일본 헌병들이 미리 시장입구에서 무장 매복하여 시위대열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위대열은 이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계획을 강행하여 모락장 입구에 도착하자 그도 이에 합세하였다. 그가 시위군중과 같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자 대기하고 있던 일본 헌병들이 발포하여 곳곳에서 사상자가 속출하였으나, 그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청년들과 함께 투석으로 대항하여 계속 만세시위를 진행하였다. 이에 형세가 불리함을 깨달은 주재소장 좌등(佐藤)상등병이 재빨리 총을 쏘아대며 도망가자 이를 붙잡아 살해하고, 먼저 달아났던 보조원 3명도 붙잡아 살해하고 구금중이던 동지 전원을 무사히 구출하였다. 이로써 모락장 진군의 목적은 일단 달성하였으나 일본 헌병과의 무력충돌로 13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4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날의 만세운동에서 그는 선두에 서서 주동하다가 일제의 보복적인 대규모 검거로 체포되어, 1919년 12월 6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살인・방화・소요 및 보안법 위반이라는 혐의로 15년형을 받고 평양감옥(平壤監獄)에서 복역 중 잔인한 고문으로 시달리다 2년만에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안세환(安世桓) 1892. 3. 25~1927. 9. 20
3・1운동 당시 중앙지도체 인사 중의 한 사람으로 평안남도 평원(平原) 출신이다.
1911년 1월 105일 사건에 연루되어 윤치호(尹致昊)・이승훈(李昇熏) 등과 함께 옥고를 치렀다. 조국광복의 기운이 고조되고 있던 1919년 2월 20일 밤 당시 평양기독서원(平壤基督書院) 총무로 재직하던 그는, 이갑성(李甲成)・오상근(吳尙根)・현순(玄楯)・함태영(咸台永) 등과 서울 남대문로 5가의 함태영 집에서 만나 독립운동에 관하여 협의하였다. 이튿날에는 다시 세브란스 병원내의 이갑성 방에서 이승훈(李昇熏)・박희도(朴熙道)・오기선(吳基善)・오화영(吳華英)・신홍식(申洪植)・김세환(金世煥)・함태영 등 기독교측 대포들과 만나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는데 있어서 천도교측과의 연합문제에 대해 협의하였다. 22일에는 다시 기독교측 대표들과 만나 무조건 천도교측과 연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자신은 임규(林圭)와 함께 일본 정부에 한국의 독립을 통보하고, 일본 귀족원(貴族院)과 중의원(衆議院)에 독립청원서와 이유서를 전달할 책임을 맡았다. 이에 그는 박희도로부터 여비 500원을 받아 27일 남대문역을 출발하여 3월 1일 동경역에 도착, 우선 신전구(神田區) 준하대(駿河臺)의 용명관(龍名館)에 투숙하였다. 3월 4일에는 경시청에 가서 경시총감(警視總監)을 만나 여러차례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설명하다가 3월 5일 체포되었다. 이후 재판이 계속되는 동안 긴 옥고를 치르다가 이듬해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무죄로 판결받고 석방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안승우(安承禹) 1865~1896. 6 호:下沙 자:啓賢
안승우의 본은 순흥(順興)으로서 문성공 안유(文成公 安裕)의 후예이다.
대대로 지평 상석리(砥平 上石里)에서 살았다. 일찍이 학문 익히기를 좋아하여 성재 유중교(省齋 柳重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95년 명성황후시해 사건에 대한 소식에 접하고 성재 문하의 인사들과 거사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때 동참하기로 한 서상열(徐相烈)이 선산(先山)에 이별을 고하러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11월 단발령이 내려져 길이 막혀 돌아오지 못하였다. 그러나 제천(堤川)에서 괴은 이춘영(槐隱 李春永)이 거사하려 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달려가서 11월 28일 의거의 기치를 내어 걸었다. 뒤이어 서상열이 동문인 이필희(李弼熙) 등과 의거하여 제천으로 달려왔다. 한편 이춘영은 지평군수 맹영재(孟英在)의 포수 4백여 명과 맹장 김백선(金伯善)을 얻어왔다. 이에 1895년 12월 3일에 이필희(李弼熙)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서상열(徐相烈)을 군사로, 이춘영(李春永)을 중군으로, 안승우(安承禹)는 군무도유사(軍務都有司)가 되어 군용을 정비하고 친일 매국 역당의 앞잡이 장기렴(張基濂)의 군대 및 왜적의 무리와 혈전을 시작하였다. 첫번싸움은 단양 장회협(長淮峽)에서 전개되었는데 이 전투에서 적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의진의 당면 과제는 소모활동이었다. 단양전투에서 크게 성공한 후 이춘영과 서상열은 남쪽으로 소모하러 떠났다. 그리고 이민옥(李敏玉)도 그들을 따라가고 안승우 만이 제천의 본진에 있는데 적군이 창졸지간에 쳐들어왔다. 대적하고자 할 때 남쪽에서 소모활동이 활발하다는 소식을 접하고 적군이 모두 흩어졌다. 안승우는 모산(毛山)에 사는 판서 심상훈(沈相勳)을 찾아가 동참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거절당하고 주천(酒泉)에 이르러 모병하니 백여 명의 군사를 얻었다. 1895년 12월 영월로 들어간 안승우는 유인석에게 의진의 대장이 되어 줄 것을 청하여 대장소(大將所)의 일을 주재하고 의진의 구성을 재편성하였는데 그 부서는 다음과 같았다. 〈봉장-김백선, 좌군장-원규상, 중군장-이춘영, 전군장-안승우, 후군장-신지수〉1896년 2월 15일 충주로 진격할 것을 결의하고 이튿날 행군하여 17일 일거에 충주성을 함락시키고 입성할 수 있었다. 입성한 이튿날부터 적의 공격은 시작되었다. 2월 23일 적 수백 명이 달천(撻川)에 이르렀다는 보고에 접하자 이춘영이 나아갔다. 이들은 조령 및 수안보에서 접전하였는데 교전 중에 이춘영이 전사하였다. 이춘영의 시신을 본집으로 보내고 이춘영의 뒤를 이어 중군장으로 임명된 안승우는 남산을 파수하였다. 29일 적의 병력이 증가하여 남산을 파수할 수 없게 되어 철군하니 적군은 충주성 바로 아래에까지 육박해 들어왔다. 이에 입안 주용규(朱庸奎)가 나아가 접전 중에 다시 전사하였다. 그러나 의진은 분전하여 적을 멀리 쫓을 수 있었다.
3월 2일 적의 공격이 재차 감행되자 철군할 것을 결의하고 5일 달천을 거쳐 청풍(淸風)으로 들어갔으며 8일에 제천에 이를 수 있었다. 16일 가흥(佳興) 방면으로 총 공격전을 전개하였다. 이때 김백선을 중심으로 하여 후군과 좌・우군이 합세하기로 작전을 구상하였다. 그런데 김백선은 전세를 보고서 증원군을 요청하고 군대를 머물렀다. 본진에 있던 중군장 안승우는 "계획이 이미 정하여졌으니 요는 사기를 보아 결정하여야 할 일이요, 군사가 적음을 말할 것이 아니다. 더구나 중심지지(中心之地)를 비우고 많은 군사를 보낸다는 것은 그릇된 계산이 아니겠는냐." 하며 증원군을 보내지 않았다. 결국 김백선 의진의 역부족과 지휘부에 대한 불만 그리고 각 의진의 협조가 이루어지지 않은 때문에 가흥 진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 때문에 회군하여 돌아온 김백선은 칼을 빼어들고 안승우에게 대들었다. 결국 김백선은 군법에 회부되어 총살형에 처해졌다. 이 일은 의진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리고 분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제천 본진에서는 후방 대책으로서 단양・청풍・원주・영월・평창・정선・지평 등지에 수성장을 임명 배치하여 해당 읍성을 장악・관리하고 군사의 소모와 군수물자를 담당하게 하였다. 그리고 대내적으로 동요하는 군사들의 마음을 무마 격려하고 대열을 정비하여 군사들의 민폐를 방지하여 군민 협력을 강화하는 데에 꾸준히 노력하였다. 그 중에서도 비분강개한 목소리로 군사들에게 "국모의 형체가 재가되고 말았는데 저승의 혼백이 너희들만을 바라고 있다. 군부(君父)께서 형상을 변하여 오랑케의 모습을 하였는데 천지신명이 너희들만을 바라고 있다. 너희들 일신의 임무가 이 얼마나 중한 것이냐. 너희들은 전일의 그 몸으로 생각지를 말고, 하늘의 명을 받들어 일한다고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하며 독려하였다. 이즈음 의병을 해산할 것을 권유하는 선유 조칙이 내려왔다. 이에 주화론(主和論)이 일어나게 되자 안승우는 "이 무리들은 모두 왜의 형상을 하고 국모를 시역한 자들이니 우리가 이들 적을 토벌하는 것을 반드시 왜보다 먼저 하여야 할 것이다."고 주장하여 주화론은 고개를 숙이게 되었다. 4월 초순부터 경군(京軍)이 내려와 형세는 더욱 어려워졌다. 의진의 일부에서 본진을 제천에서 조령으로 옮기자는 의논이 비등하였으나 안승우는 "영남으로 가는 것은 이될 것이 없고 적에게 약점을 보이며, 도 제천을 중심으로 한 일대의 백성들이 그동안 힘을 다하여 군수품을 공급하고 크게 기대하는 터인데 일로에 버리고 갈 수 없다." 고 극력 반대하여 그대로 제천에 머물게 되었다. 5월 23일 최후의 결전을 맞이하였다. 의진은 수비책을 강구하고 있었지만, 경군은 의병진의 파수가 있는 곳을 만나면 우회하여 뒤로 나와서 바로 제천읍을 향하니 대전할 겨를도 없이 이미 의병 주둔처 깊숙이 들어왔다. 24일 비가 와서 주무기인 화승총을 사용할 수 없었다. 25일 안승우는 비장한 결심을 하고 새로 쌓은 남산성에서 싸움을 독려하여 손수 화약을 재어 군사들에게 주면서 격려하였다. 의병의 사기는 다시 충천하였으나 바람의 방향이 불리하게 되어갔으며, 설상가상으로 폭우가 내렸다. 의병의 무기는 무용지물이 되었는데 적의 총탄은 비오듯이 쏟아졌다. 이에 안승우는 돌을 던지며 대항하다가 분을 참지 못하고 "창의 중군 안승우는 여기에 있다. 너희들이 나를 죽이려면 빨리 오너라." 하였다. 결국 안승우는 적에게 체포되어 모진 매를 맞고 절명하였다. 이때 안승우의 제자로서 중군 종사로 활약하던 19세의 청년 홍사구(洪思九)가 함께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안재환(安載煥) 1898. 11. 25~1977. 5. 11
이명:안지청(安志靑,安之靑), 안동만(安東滿), 안심청(安心淸), 안일청(安一淸), 왕여남(王汝南), 안지만(安池滿), 안봉천(安鳳天)
평안남도 안주(安州) 사람이다.
중국으로 망명, 황포군관학교(黃浦軍官學校) 무한분교(武漢分校)에 입학, 훈련을 받았으며, 1924년 9월 박은식의 양자인 동교생 박시창(朴始昌)・송욱동(宋旭東)등 수명 및 중국군대의 기술교관으로 있는 백득림(白得林)등과 같이 무창(武昌)에서 무한한인혁명청년회(武漢韓人革命靑年會)를 조직하여 동지 훈련과 광복운동 선전에 심신을 경주하였다. 1927년 2월 그는 유자명(柳子明)・신공제(莘公濟)・김규식(金圭植)등과 손잡고 중국인, 안남인, 인도인 등과 남경에서 연합하여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東方被壓迫民族聯合會)를 조직하고 김규식을 동회의 회장으로 추대하였다. 여기서 그는 한국부 상무(韓國部常務)로 활약하다가 기관지 「동방민족(東方民族)」을 한・중・영문(韓中英文)으로 발간하여 민족독립의 당위성 절박성을 호소하였다. 1929년에는 남경에서 민병길(閔丙吉)・신익희(申翼熙)・김홍일(金弘壹)등 10여명과 한국혁명당(韓國革命黨)을 조직, 활동하였다. 이어 그는 무력행동단체로 철혈단(鐵血團)을 조직하고 그 단장이 되었으며, 나월환(羅月煥)등 10여명을 중견 단원으로 하고 기관지 「우리길」을 발간,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1933년 남경(南京)에서 김규식이 김두봉・신익희・최동오 등과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을 결성할 때 그는 남경한교회 간부로 참여하였다. 이듬해에는 남경한교회 주석으로 의열단 활동에도 참여했으며, 1935년에는 낙양군관학교를 졸업하고 군 간부양성에 치중하며 한국 역사를 가르쳤다. 1935년 여름 5당(한국독립당・신한독립당・조선혁명당・의열단・미주대한인독립단) 대표가 남경에서 회합하여 통합당으로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을 조직할 때 그는 실무간부로 활약하였으며 기관지 「민족혁명」을 발간하였다. 1937년 그는 민족혁명당 상해특별지부장이 되어 김원봉 등 적색분자를 제거하는 청당운동에 참여하는 등 활약하다가 동 10월에 중일전쟁의 발발과 동시에 적극적 지도 임무를 띠고 군자금 모집, 밀정처단 등 후방교란에 활약하다가 동 12월 하군 상해 일본영사관에 체포되었다. 그는 평양으로 압송되어 옥고를 치렀다고 하며, 출옥 후 다시 상해로 탈출하여 1943년 3월 15일 현재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비서처의 부비서장에 임명되어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수여하였다.
안중근(安重根) 1878. 9. 2~1910. 3. 26 이명:응칠(應七), 다묵(多默)
황해도 신천(信川) 사람이다.
1894년 갑오농민혁명이 일어났을 때 부친을 따라 총을 들고 도내에서 동학혁명을 빙자하고 민간에 폐를 끼치는 무리들의 토벌에 나서기도 하였다. 17세되던 1895년에는 부친을 따라 천주교(天主敎)에 입교하고 프랑스인 홍신부와 함께 선교에 나서기도 하였다. 27세되는 광무 9년(1905) 을사늑약의 소식을 듣고 중국 상해로 건너가 국권회복의 길을 강구하였으며 부친상을 당하고 돌아와서는 집을 평안도의 진남포(鎭南浦)로 옮기고 재산을 기울여 삼흥(三興)학교・돈의(敦義)학교를 세워 인재교육에 힘썼다. 그러나 광무황제의 폐위, 군대의 해산 등 국권이 식민지 상태에 이르자 다시 해외로 나가 이범윤(李範允)・김두성(金斗星)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 융희 2년(1908)에는 의군중장이 되어 의병부대를 거느리고 함경북도로 진입하여 경흥(慶興)・회령(會寧) 등지에서 대일항전을 전개하였다. 그후 다시 노령(露領)의 블라디보스톡・연추(煙秋) 등지를 왕래하면서 동지들을 만나 구국의 길을 강구하고 1909년 봄에는 김기열(金基烈)・백낙길(白樂吉)・우덕순(禹德淳) 등 동지들과 함께 손가락을 잘라 단지동맹(斷指同盟)을 결성하여 일사 보국을 맹세하고 기회를 기다리며 준비하였다. 1909년 9월 노령 블라디보스톡에서 일제침략의 원흉인 이등박문(伊藤博文)이 하얼빈으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 기회를 이용하여 이등을 처단하기로 하였다. 일찍부터 뜻을 같이하던 우덕순(禹德淳)을 만나 함께 거사하기로 한 다음 권총을 한 개씩 준비하였다. 그리고 하얼빈 방면으로 향해서 가는 도중 다시 유동하(劉東夏)와 조도선(曺道先) 두 사람을 만나 함께 참가하게 되었으며 거사장소를 남청(南淸) 철도의 교환점인 채가구(蔡家溝)와 하얼빈의 두 곳으로 정하고 우덕순은 채가구에서, 그는 하얼빈에서 기다리다가 엄습하기로 하였다. 10월 26일(음력 9월 13일) 9시경 이등박문이 기차에서 내려 러시아 재정대신 꼬꼬흐체프와 함께 러시아 군인들의 경례를 받으며 각국 영사들이 있는 곳을 향하여 천천히 걸어가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그는 권총을 빼들고 이등박문을 향하여 총을 쏘아 4발을 모두 명중시켰다. 그는 다시 이등의 뒤를 따르는 일본인들을 향하여 총을 쏘아 일본 총영사 천상준언(川上俊彦), 비서관 삼태이랑(森泰二郞), 만주 철도이사 전중청태랑(田中淸太郞) 등을 차례로 거꾸러뜨렸다. 일헌병이 그를 체포하려고 대들자 하늘을 향하여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세 번 외쳤다. 거사의 성공을 알리는 개가(凱歌)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본국 동포들의 그 큰 기쁨이야 이루 말할 수 조차 없는 것이었다. 또한 청・일전쟁 이래로 일본제국주의의 위협에 떨고 있던 중국의 국민들에게도 큰 기쁨의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군대해산이 있은 후 중국 상해로 가서 조국의 독립운동을 준비하던 예관 신규식(申圭植)의 다음과 같은 시 또한 당시 상황의 일면을 말해주는 것이다.
푸른하늘 대낮에 벽력소리 진동하니
6대주(大州)의 많은 사람들 가슴이 뛰놀았다.
영웅 한번 성내니 간웅(奸雄)이 거꾸러졌네
독립만세 세 번 부르니 우리조국 살았다.
1909년 11월 그는 러시아 헌병대에서 여순(旅順)에 있는 일본 감옥으로 이송되어 심문과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일제 관리들은 위세를 부리며 중죄인으로 다루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저들의 부당한 침략행위를 통렬히 공박하여 시정을 요구하였으며 일제 관리 또한 그의 의로운 기개에 감복하여 특별히 우대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공판정에서는 의병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독립전쟁을 하여 적 이등박문을 죽였으니 이런 법정에서 신문을 받을 이유가 없다 하여 재판을 거부하기도 하였으며 재판장의 신문에 대하여 이등박문은 누차에 걸쳐 대한(大韓)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양국간의 조약과 서명을 무시하고 무력으로 우리나라를 위협하여 독립을 빼앗으니 이것은 세계의 인도의 적이요, 우리 대한 신민(臣民) 만대의 원수인 즉 죽이지 않을 수 없다고 항변하여 일제를 당황하게 하였다. 그는 또 이등박문이 우리나라를 침략하고 불법무도한 일을 제 마음대로 하여 동양평화를 교란한 사실 등 15개조의 죄상을 들어 서면으로 저들에게 제출하여 다시금 이등박문을 논죄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등박문의 처단은 목적의 일부를 달성한 것이요, 정작 큰 소원은 조국의 완전 독립과 동양평화의 정착임을 주장하였다. 1910년 2월 7일부터 14일에 이르기까지 6회의 공판을 받았던 그는 14일 사형을 선고받고 3월 26일 순국하였는데 순국 직전에 그는 아우 정근(定根)・공근(恭根)에게 다음과 같이 부탁하였다고 한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國權)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 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우리나라의 국권회복을 위하여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여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공을 세우고 업(業)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면 만세를 부를 것이다." 그러나 조국이 광복된 지 45년이 지나도록 남북이 갈라진 채 그의 유언을 실행하지 못하고 있으니 오직 부끄러울 따름이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안지호(安智鎬,1857~1921)
자는 운익(雲翼), 호는 우봉(藕峰)이다. 경상남도 고성(固城)에서 출생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통감부(統監府)와 일본정부에 논책문(論責文)을 보냈다가 여러 차례 구금되었고, 1910년 국권이 침탈되자 만국공관(萬國公館)에 호소문을 보냈다. 또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에게 독립을 요구하는 글을 보냈다가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징역 3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기도 하였다.
1919년 전국적으로 3·1운동이 일어나자 한문 교사로 재직하던 중 조한휘(趙漢輝)·한종순(韓鍾淳)·이찬영(李讚榮) 등 함안군(咸安郡) 청년들의 고문 역할을 하면서 3월 19일 함안읍(咸安邑)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날 장터에 모인 3,000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경찰주재소·군청·등기소·우편소·일본인 소학교 등을 파괴하고 일본인을 습격하며 격렬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부산교도소 마산분원에서 복역하다가 옥사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안창호(安昌浩) 1878. 11. 9~1938. 3. 10 호:도산(島山)
평남 강서(江西)사람이다.
1894년 상경하여 구세학당(救世學堂:일명(一名) 원사우학교(元社宇學校))에서 수학하였다. 1898년 독립협회(獨立協會)에 가입하고, 동회가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로 발전함에 따라 평양에서 관서지부(關西支部)를 발기하고 쾌재정(快哉亭)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국민의 자각(自覺)을 호소하였다. 1899년에는 강서군 동진면 암화리에 점진학교(漸進學校)를 설립하고 황무지 개간사업도 병행해서 추진하였다. 1902년 미국으로 건너 가 로스엔젤레스에서 한인친목회(韓人親睦會)를 조직하고 회장에 선출되었다. 1905년에는 한인친목회를 발전시켜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창립하여 상부상조 조국광복(相扶相助 祖國光復)을 목적으로 초대 회장에 취임하여 공립신보(共立新報)를 발행하는 등 활동하였다. 1907년 고국의 실정을 알아보기 위하여 귀국하였으며, 양기탁(梁起鐸)・안태국(安泰國)・이승훈(李昇蕓) 등과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한 뒤 평양에 대성학교(大成學校)를 설립하는 한편 각 주요도시에 태극서관(太極書館)을 두고, 자기회사(磁器會社)를 차리는 등 정치・교육・문화의 여러 방면에 걸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에는 청년학우회를 창설하여 청년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안중근(安重根) 의거에 관련되었다는 혐의로 용산헌병대에 수개월간 수감되기도 하였다. 1910년 일제 통감부(統監府)의 도산내각(島山內閣) 조직 권유를 일축하고, 거국가(去國歌)를 남긴 후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다음 해 북만(北滿)에서 무관학교를 세우려고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1912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인국민회(Korean National Association)중앙총회를 조직하고 초대 회장에 취임하였다. 그리고 흥사단(興士團) 조직에 착수하여 무실역행・건전인격・단결훈련・국민개업(務實力行 健全人格 團結訓練 國民皆業) 등 정신개조(精神改造)를 목표로 한 민족계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공립신문을 신한민보(新韓民報)로 표제를 바꾸어 발행하였다. 1919년 2월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국민대회를 개최하고 파리강화회의에 국민회 대표를 파견할 계획을 추진하다가, 국내에서 3・1독립운동이 일어나고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그를 내무총장에 선임하자 상해로 건너갔다. 임시정부의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서리에 취임한 그는 연통제(聯通制) 실시, 독립신문 발간 등 독립운동의 방략을 지도하였다. 동년 7월 2일에는 임시사료편찬회를 구성하고 그 총재가 되어 한일관계사료(韓日關係史料) 전4권을 편찬, 발행하기도 하였다. 또한 임시정부의 재정이 어려워지자 임시정부후원회를 조직하여 해외 교포들로부터 군자금을 출연받아 임정을 꾸려나가도록 하였다. 같은 해 임정의 내각 개편으로 국무위원 노동부 총판(總辦)에 임명되었다. 1920년에는 흥사단 원동위원부(遠東委員部)를 설치하고, 대(對)미국의원시찰단준비위원장이 되어 북경에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동년 8월에는 지방선전총판(地方宣傳總瓣)이 되어 민족의 단합을 호소하는 격문을 만주등지에 배포하였다. 또한 임시정부의 세력 통일을 위하여 노력하다가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국무위원을 인책 사임하고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추진하였다. 1921년에 서울에 수양동맹회(修養同盟會), 평양에 동우구락부(同友俱樂部)를 설립하도록 하였으며, 뒤에 이 두 단체가 합하여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가 되었다.
1923년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열리자 그가 부의장에 선임되었으나, 이 회의도 임시정부의 개조파(改造派)와 창조파(創造派)로 대립되어 실패하자, 북만에 독립운동기지인 이상촌(理想村) 건립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그의 독립운동 방략은 군사・외교・재정・문화・식산・통일의 6대운동으로써 후에 민족의 통일단합을 위한 대독립당(大獨立黨)을 결성하여 이를 실행할 것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1924년에는 남경(南京)에서 동명학원(東明學院)을 설립하여 실력배양운동(實力培養運動)의 기초를 다졌다. 이해에 그는 군자금 확보를 위하여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1926년에 돌아왔다. 중국에 돌아온 그는 만주 일대를 답사하며 이상촌 후보지를 물색하고, 민족유일당(民族唯一黨) 조직,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 발기 등 구체적인 사업계획을 추진하였으나, 삼시협정(三矢協定)이 체결되어 독립군의 주요 간부인 김동삼(金東三)・박창식(朴昌植) 등이 일경에게 체포된 뒤에, 김좌진(金佐鎭)・정신(鄭信) 등이 암살되는 수난이 계속되고, 이어서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이상촌 건설은 실현 불가능하게 되었다. 상해로 되돌아 온 그는 1930년에 협동상조(協同相助), 소비합작(消費合作), 신용생산(信用生産) 등으로 생활역량(生活力量)을 넓히기 위한 동인호조사(同人互助社)를 조직하여 재상해한인(在上海韓人)의 합심 협력을 계획하였다. 1931년 1월에는 흥사단 제17회 원동대회를 주재하여 대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흥사단보(興士團報)를 발행하는 등 민족의 부흥과 발전을 위한 국민의 자질혁신(資質革新)과 청년 인재 양성 등 흥사단의 이념 구현에 주력하였다. 그리고 애국부인회(愛國婦人會)가 흥사단의 취지에 따라 군자금 모집 계획을 세우자 설립목적이 동일한 동인호조사와 합병하여 공평사(公平社)로 개칭하고, 그 이사장에 취임하여 생활 역량을 증강시키기 위한 소비, 신용, 생산 등의 합작운동(合作運動)을 추진하였다. 같은 해 만보산(萬寶山)사건으로 한중인(韓中人) 충돌사건이 일어나고 중국민의 한인에 대한 감정이 악화되자 병인의용대(丙寅義勇隊), 노병회(勞兵會), 교민단(僑民團), 학우회(學友會), 여자청년동맹, 애국부인회, 청년동맹 등의 각 단체를 연합하여 상해한인단체연합회(上海韓人團體聯合會)를 조직하게 되자 그는 흥사단 대표로 이에 참가하여 중국과 공동으로 항일투쟁을 강화하였다. 1931년 10월에는 이시영(李始榮)・김사집(金思潗)・김철(金澈)과 함께 교민단 심판원(僑民團 審判員)으로 활동하였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 홍구공원 의거에 따라 일경은 프랑스 조계 경찰의 협조로 독립운동가의 일제 검거를 실시하였다. 그는 이러한 정보를 알고서도 어린 소년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상해 하비로(霞飛路)에 있는 이유필(李裕弼)의 집을 방문하였다가 잠복하고 있던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본국으로 압송된 그는 동년 12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형을 받았다. "앞으로도 독립운동을 할 작정인가?" 하는 물음에 그는 "나는 밥을 먹어도, 잠을 자도 민족을 위해 먹고 잤으니, 앞으로 민족을 위해 일하고자 함은 변함이 없다."고 기개를 꺾이지 않았다. 1935년 2월 대전감옥에서 출옥한 그는 일경의 감시를 받으면서도 지방을 순회하며 계몽 강연을 하였다. 그후, 평남 대보산(大寶山)에 은거하여 이상촌 건설을 계획하였으나 1937년 6월 수양동우회(同友會) 관계로 다시 일경에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던 중 중병(重病)이 들어 동년 12월에 보석으로 출옥하였으나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이듬해 3월에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안춘생(安椿生) 1912. 8. 12~
황해도 벽성(碧城)사람이다. 안중근의사(安重根義士)의 당질(堂侄)로 1918년에 가족과 함께 만주(滿洲)로 망명하였다. 일제의 만주침략이 본격화되자 산해관(山海關)을 넘어 남경(南京)으로 가서 1936년에 중앙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에 임관되어 중국군 제2사단에 배속되어 대일전에 참전하였다. 1939년 10월에 중국군 육군 소령으로 군정부 감호대대(軍政府監護大隊)에서 복무하였다. 1940년 6월 임시정부 군무부에서는 산서(山西)지역에 군사특파원을 파견하여 군사활동을 전개하는데 그는 이준식(李俊植), 노태준(盧泰俊), 서파(徐波), 이영화(李英和)등과 함께 특파단원으로 파견되었는데, 동년 11월 광복군총사령부가 설치되자 제1지대는 산서성대동(山西省大同)을 근거지로 하여 하남성(河南省), 산서성(山西省)을 활동구역으로 하였는데 그는 제1지대 간부로 활동하였다. 1942년 4월에 그는 다시 광복군 제2지대 제1구대장에 임명되었으며, 1945년에는 주영지대장(駐寧支隊長)으로 조국광복에 이바지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적을 인정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수여하였다.
안태국(安泰國) 미상~1920. 4. 11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났다. 평양에서 협동사(協同社)라는 회사를 설립하여 1905년 11월 을사조약 후에는 실업구국운동에 종사했으며, 이승훈(李昇薰)・최응두(崔應斗)등과 함께 상민공동회(商民共同會)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07년 4월에는 서울에서 양기탁(梁起鐸)・안창호(安昌浩)・전덕기(全德基)등을 중심으로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로서 신민회(新民會)가 창립되자 이에 가입하여 평안남도 총감(總監)이 되고 신민회의 최고위 간부의 하나가 되어 활동하였다. 1909년 7월에 신민회 사업의 일환으로서 평양에 태극서관(太極書館)을 설립했으며, 대성학교(大成學校) 교사로 활동했다. 1909년 8월에는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설립의 발기인이 되어 이 청년단체의 초대 총무로 활동하였다. 1909년 12월 22일에 이재명(李在明)이 매국노 이완용(李完用)을 자격(刺擊)한 의거가 일어나자 그 연루자로 지목되어 일제 헌병대에 체포되어 2개월간 고문을 당하며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1910년 3월 신민회가 긴급간부회의를 열어 독립전쟁전략을 채택하고 국외에 무관학교(武官學校)와 독립군기지 창건사업을 결행하기로 결정한 회의에 평안남도 대표로 참가하여 군자금과 이주민 모집을 분담하였다. 무관학교나 독립군기지 창건의 준비사업을 하는 중에 1910년 12월 「안명근(安明根)사건」이 일어나자, 일제는 간도(間島)에 독립군기지를 설치하는 운동을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묶어서 신민회 중앙간부들을 체포하기 시작했으며, 안태국도 1911년 1월에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911년 7월 22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징역 2년형의 언도를 받았다. 일제는 다시 신민회를 해체시키고 한국민족의 국권회복운동을 탄압하기 위하여 소위 「데리우찌총독암살음모사건(寺內總督暗殺陰謀事件)」을 조작하여 1911년 9월에 전국의 신민회 회원 800명을 일거에 검거한 다음 복역 중인 안태국을 재기소하였다. 1912년 9월 28일에 안태국은 다시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0년형의 언도를 받았다. 재판 과정에서 정확한 기억과 물증까지 제시하면서 이 사건의 날조성을 조리정연하게 폭로하여 일제 재판부를 궁지로 몰아놓는 완강한 공판투쟁을 전개한 결과, 1913년 3월 20일 공소심에서는 징역 6년의 언도를 받고 양기탁 등 동지들과 함께 5년의 옥고를 치렀다. 1916년에 출옥하자 바로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3・1운동후 독립운동 단체들의 통합 문제를 임시정부와 협의하기 위해 상해로 갔다. 그곳에서 병을 얻어 1920년 4월 11일 상해 홍십자 병원에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안희제(安熙濟) 1885. 8. 4~1943. 8.3 호:백산(白山)
경상남도 의령(宜寧)군 부림(富林)면 입산(立山)리에서 태어났다. 한말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여 1907년에 동래의 구포(龜浦)에 구명학교(龜明學校)와 의령군 의령면에 의신학교(宜新學校)를 설립하였다. 1908년에는 고향인 의령군 입산리(설뫼)에 창남학교를 설립하고 애국청소년들을 양성하였다. 1909년 10월에는 서상일(徐相日)등 8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비밀 청년결사인 대동청년당(大同靑年黨)을 창설하여 활동하였다. 대동청년당은 안창호 계열의 지하 청년단체로서 1945년까지 일제에 발각되지 않았으며 당원들은 일제강점말기까지 안희제의 조직에 다수가 참가하여 끝까지 애국 동지로서 활동하였다. 1914년에는 백산상회(白山商會)를 설립했다가 3・1운동 직후 이를 「백산무역주식회사」로 확장하였다. 백산상회는 단순한 상업기관이 아니라 독립운동의 연락기관이 되어 활동하였으며,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는 기관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1919년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인 의령에서 독립선언서를 등사시켜 각지에 배포하여 군민들의 봉기를 촉구하였다. 1919년 11월에는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를 조직하여 다수의 애국적 청년학생들을 외국에까지 유학시켰으며, 기미육성회의 장학생중에서 다수의 독립운동가가 배출되었다. 1927년에는 이시목(李時穆)등 동지들과 함께 「자력사(自力社)」를 조직하여 협동조합운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에는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신앙하는 민족종교인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여 만주로 갔으며, 1933년에 발해의 옛 수도인 동경성(東京城) 부근에 발해농장(渤海農場)과 발해학교(渤海學校)를 설립하였다. 당시 한국 농민들은 일제의 식민지 약탈통치하의 국내에서 토지를 잃고 남부여대하여 만주로 건너가서 유랑하다가 중국인 지주들의 불리한 소작조건 밑에서 착취당하는 일이 매우 많았는데, 안희제는 동경성 부근에 농토 천수백일 갈이(千數百日耕)을 구입하여 농장을 만들고 유랑하고있는 한국농민 300여호를 유치하여 토지를 분배해주고, 5개년 연부상환조건으로 자작농의 창설을 추진하였다. 또한 발해학교를 농장 일대에 설립하여 이주농민의 자제들에게 민족교육을 실시하고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1942년 11월에 일제는 대종교가 독립운동조직이라고 보고 만주와 국내에 있는 대종교 지도자 윤세복(尹世復)이하 21명을 일거에 체포하였다. 이 사건이 대종교에서 임오교변(壬午敎變)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임오교변 때 일제의 고문으로 10명의 대종교 지도자가 순국했는데, 이를 순국십현(殉國十賢) 또는 임오십현(壬午十賢)이라고 하며, 안희제는 그 중의 하나가 되었다. 안희제는 일제에게 체포되어 대종교의 독립운동에 대한 장기조사를 받다가 잔혹한 고문으로 1943년 8월에 옥사(獄死)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안무(安武) 1883. 6. 29~1924. 9. 7 호:청전(靑田) 이명: 병호(秉鎬)
함북 경성(鏡城)사람이다. 1900년에 대한제국 육군 진위대에 입대하여 해산될 때까지 교련관으로서 일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한국이 강점당하자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4년에는 북간도에 대한국민회를 조직하고 국민회군(國民會軍) 3백여명을 편성하여 무장시키고 부사령관이 되어 무장항일 투쟁을 하였다. 1920년에는 대한독립군, 군무도독부군과 연합사령부를 구성하고 최진동(崔振東) 사령관의 부관으로서 무력으로 일제에 대항하였다. 1920년 6월에는 독립군 부사령관으로 봉오동전투에 참전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이에 대한 일제(日帝)의 반격이 있자 동년 12월에 밀산(密山)으로 이동하여 독립군을 정비하였다. 1921년 2월에는 노령의 자유시(自由市)로 이동하여 독립군의 세력 만회를 위하여 노력하는 한편, 국민회군을 일단 한인보병자유대대에 속하게 하였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의 배반으로 1921년 6월에 자유시참변을 당하게 되자 이르크츠크를 거쳐 이청천(李靑天) 등에 이어 다시 만주로 탈출하였다. 1923년 2월에는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열리자 국민회군 대표로서 참여하여 동년 6월 10인의 국민위원 중 1인으로 선출되었다. 그 뒤 용정(龍井)에 돌아와 계속 무장항일투쟁을 전개하다가 1924년 9월 6일 용정(龍井)영사관 경찰에 탐지되어 교전 중 총상을 입고 체포되었으며 중상으로 용정(龍井)에 위치한 자혜(慈惠)병원에서 치료하였으나 7일 아침에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80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